어거스틴-칼빈과 그 비교연구의 한 방법론과 실제

댓글 0

예수 신앙 연구가들/어거스틴

2009. 1. 31.

 

 

1. 현대 세계에서 칼빈과 어거스틴을 연구하는 의미

 

현대 기독교는 유럽과 북미는 물론,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등 제반 문명권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기독교가 서구 중심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2] 각 지역의 기독교 공동체가 미래를 향한 신학적 방향을 모색할 때마다, 신학자들은 기독교 전통으로 돌아가 과거의 지혜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칼빈 연구, 어거스틴 연구, 그리고 칼빈과 어거스틴에 대한 비교 연구는, , 중세 기독교나 근대 유럽 기독교 문명의 근원에 대한 탐구일 뿐 아니라, 아시아 기독교의 정체성을 세우고자 하는 신학적 노력에 있어서도 의미심장한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어거스틴과 칼빈은 모두, 기독교 제국인 로마의 몰락 시기와, 중세 기독교 문명이 무너지고 유럽이 새로운 근대 사회로 재편되던 16세기 종교개혁 시기라고 하는 매우 드라마틱한 대 격동기에, 그들 자신의 역사적 교회의 지도자로서 신학을 전개했으며, 그 과정에서 그들의 사상이 형성되어 갔기 때문이다.

 

2. 칼빈 이해를 위한 어거스틴 연구의 유용성

 

어거스틴과 칼빈의 사상을 비교 연구하는 작업은, 두 신학자들 각각의 이해에 매우 유용한 빛을 던져주게 될 것이다. 다음의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어거스틴 연구는 우리에게 칼빈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를 제공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칼빈이 태어나고 성장한 당시의 지적 환경을 고려할 때, 칼빈의 사상적 발전에 미친 어거스틴의 영향이 중요하기 때문에, 어거스틴 연구는 칼빈을 이해하는데 매우 필요하다. 중세 후기에, 유럽은 일종의 어거스틴 르네상스를 경험하게 되며,[3] 칼빈은 중세에서 근대 세계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대인 종교개혁 시기에, 고전 언어들과 신학을 배우면서 성장했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적 발전은 후기 중세의 신학적 토양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칼빈이 어거스틴의 사상을 접하게 된 것도 이런 문맥과 깊은 관련이 있다.

 

둘째, 칼빈이 어떻게 그리고 왜 어거스틴의 작품들을 사용했는지를 고찰할 때, 어거스틴은 칼빈의 사상에 있어서 중심적인 인물임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칼빈을 이해하는데 어거스틴 연구가 유익하다. 여러 교부들 중에서도 칼빈은 특히 어거스틴을 가장 압도적으로 많이 인용했는데,[4] 왜냐하면, 그는 어거스틴을 “가장 순수하고 원시적 교회”의 선생으로 보았고, 개신교 운동이 역사적 기독교와 연속성을 갖는다고 주장하려고 했기 때문이다.[5] 칼빈은 우로는 16세기 로마 카톨릭 교회와, 좌로는 급진적인 재세례파들과의 투쟁속에서, 어거스틴의 작품들과 어거스틴의 권위에 호소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성숙시켰다.

 

이런 배경을 고려한다면, 어거스틴에 대한 이해는 칼빈의 사상을 해석하는데 매우 긴요한 조건임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칼빈은 어거스틴 수용자였다고 평가될 수 있으며, 따라서 칼빈과 어거스틴의 비교 연구는 칼빈 이해를 위한 보다 심도깊은 통찰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요약하자면, 어거스틴에 대한 연구, 특별히 어거스틴과 칼빈의 비교 연구는, 칼빈의 신학적 근거들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3. 어거스틴 이해를 위한 칼빈 연구의 유용성

 

칼빈은 전체적으로 보아 어거스틴의 신학을 충분히 수용했던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칼빈이, 전적으로 동일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어거스틴의 사상을 충족하게 반영했던 가장 중요한 인물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면, 칼빈 연구는 이 북아프리카 교부 이해를 더욱 폭넓게 해줄 것이다. 즉 칼빈과 비교하면서 진행되는 어거스틴 연구는, 신학자들로 하여금, 어거스틴의 사상이 어떻게 사용될 수 있고, 해석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얼마나 강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게 될 것이다. 어거스틴과 칼빈의 사상간에 어떤 차이점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거스틴 사상의 독특한 특징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안내자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II. 칼빈[6]과 어거스틴[7]: 그 비교연구의 한 방법 - 교회와 국가의 관계

 

1. 칼빈과 어거스틴의 비교연구 현황

 

칼빈의 사상을, 교부 특히 어거스틴과 관련해서 연구하려는 시도들은 지금까지 지속되어 왔는데,[8] 칼빈과 어거스틴의 예정론을 비교 연구하려는 작업들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9] 그러나 20세기에 진행된 이 연구 목록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칼빈과 어거스틴을 교회와 국가라고 하는 주제로 비교 연구한 경우를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말할 때 칼빈을 어거스틴과의 관계속에서 고찰하는 연구가 앞으로도 광범위하게 필요하거니와,

[10]

특히 칼빈과 어거스틴을, 교회론, 역사관, 성례론 등을 매개로 해서 진행하는 연구들이 더욱 긴요하다고 할 수 있다.

[11]

그러므로,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중심으로 칼빈과 어거스틴을 비교 연구하는 본 논문은, 지금까지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못한, 그래서 앞으로의 연구가 더욱 요청되는 분야를 향한, 한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2. 어거스틴 연구와 칼빈 연구 최근 경향들

 

어거스틴과 칼빈 각각에 대한 근래의 연구 결과들은, 이 두 사상가들을 “교회의 신학자”로 해석하도록 인도해 주고 있다. 어거스틴의 경우, 새롭게 발견되어 1980년과 1990년대에 각각 편찬된 어거스틴의 작품들은 교회사가들에게 어거스틴에 대한 보다 선명한 상을 제공해 주었다. 처음 발견된 것은 26편의 어거스틴의 편지들과 제롬에 의해서 기록된 한 개의 편지였다. 요한네스 디프약 교수에 의해서 발견되어 1980년대에 출판된 이 “디프약 편지”는 프랑스 Marseilles에 있는 Bibliothèque Municipale에서 어거스틴의 필사본들에 대한 카탈로그 작업 과정에 우연히 발견되었다.[12] 이 편지들은 어거스틴의 노년기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는데, 새롭게 부각된 어거스틴의 이미지는, 경직된 신학자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후기 로마 시대 북아프리카 교회를 배경으로 목회했던 교회의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13]
1990년대에 돌보(François Dolbeau)에 의해서 발견된 어거스틴의 새로운 설교문 또한 어거스틴에 대한 생생한 초상화를 제시해 주고있다. 마인쯔(Mainz)의 시립 도서관(Municipal Library)에서 필사본들을 새롭게 목록화 하는 작업 도중에, 26편의 어거스틴의 설교문들이 발견되었는데, 대부분이 397년에서 416년 사이에 행해진 것이었다.[14] 돌보의 설교문 덕분에, 우리는 어거스틴을 로마 제국 말기 북아프리카의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상황속에서 사역을 감당했던 한 교회의 지도자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두 새로운 발견은 어거스틴이 살면서 목회를 감당했던 역사적 환경에 대한 연구를 더욱 촉발시켰다.

 

한편 칼빈의 경우를 보면, 그의 역사적 경험이 그의 사상 형성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면서, 칼빈을 16세기의 역사적 문화사적 문맥과, 프랑스와 제네바의 사회적 종교적 상황속에서 이해하려는 역사적 칼빈에 대한 연구가 대두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15] 특히 칼빈의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에 대한 사상을 연구하는 작업은 중요한 연구 주제였으며,[16] 이 연구에는 칼빈을 종교개혁시대의 종교적 정치적 난민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17]

 

 또한 칼빈 시대 제네바 콘시스터리 자료를 고찰하는 것은, 제네바에서 활동하던 칼빈의 교회-국가 관계에 대한 태도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18] 미래의 칼빈 연구의 방향에 대한 더글라스의 제시 또한 의미심장하다. 앞으로의 칼빈 연구의 지향점은, 첫째, 사회적 문맥이 연구되어야 하고, 둘째, 칼빈을 보다 심도있게 이해하기 위해서, 그의 주석들, 설교문들, 그리고 서간문들이 기독교 강요보다 우선적으로 연구되어져야 하며, 셋째, 청년 칼빈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넷째로, 성경해석학과, 주석사라는 측면에서 칼빈의 위치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고, 마지막으로 성 연구(gender studies)와 관련해서 칼빈 연구는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9]

 

한편, 칼빈은 어거스틴을 비롯한 교부와의 관계속에서 연구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칼빈과 어거스틴의 교회론과 역사관을 서로 연결시켜 연구하는 작업이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20]

그러므로, 칼빈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사상을 연구하고 또 새롭게 평가하되, 특별히 그것을 어거스틴과 비교해서 고찰하는 작업은, 미래의 칼빈 연구에 있어서 심화 연구가 더욱 필요한 중요한 한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3. 두 신학자의 비교 연구 방법론

 

본 고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칼빈과 어거스틴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연구의 방법론은 다음의 세가지 측면이다.

 

3.1. 역사적, 사상적 배경

 

 첫째는 칼빈과 어거스틴이 활동했던 시대의 역사적, 철학적, 지성사적 배경을 고찰하여 비교하는 것이다.

칼빈의 경우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칼빈의 사상은 그가 살았던 16세기의 배경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점이 주목되어야만 한다.[21]

칼빈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 이해는 보다 복잡한데, 왜냐하면 그 자신이 16세기 프랑스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 속에서와 스위스 제네바의 개신교 공동체에서 직접 역사적 경험을 한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16세기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 시대의 모든 영역, 즉 유럽의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그리고 종교적 삶을 포괄하는 막강한 권력을 취하면서 성장했다.[22]
칼빈이 사역했던 종교개혁 시기는 기독교와 종교개혁을 수용했던 사회들에서 근본적인 변화들이 출범하면서, 역동적으로 지역적 국가적 전통들이 창출되어갔던 때였다. 칼빈은 16세기 유럽에서 강력한 권력을 구가하고 있었던 로마 카톨릭과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각 지역 국가들이 생성해 가며, 유럽의 모든 국가들이 두 개의 경쟁적인 교회들의 갈등에 간여되어 있던 시기에 프랑스의 개신교도로서 난민 생활을 했다. 그러므로, 칼빈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 사상의 배후에는 종교개혁 시대의 박해의 위협속에 살아갔던 난민으로서의 칼빈의 경험이 존재한다.[23] 실제로 많은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이 이교도로서 법정에 넘겨지고 있었다.[24]

결국 칼빈은 신생 개신교 도시국가인 제네바에 정착해서 사역했다. 당시 제네바의 상황은, 주교와 사보이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막 정치적 자유를 획득했었고, 베른이 제네바를 식민지화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 독립을 광범위하게 향유하고 있었다. 제네바 정부가 전통이 없는 젊은 정부였기 때문에, 그 자유는 종교개혁 유지와 단단히 결합되어 있었으며,[25] 특별히 1555년 제네바 선거에서 칼빈의 후원자들이 승리를 거둔 이후, 제네바에서 칼빈의 영향력이 확고하게 되면서,[26] 칼빈의 공동체가 확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어거스틴의 경우, 그는 4~5세기 기독교 국가인 로마제국 말기의 북아프리카 교회의 주교였다. 어거스틴은 당시 기독교 국가요 유일한 국가로 여겨졌던 로마제국이 붕괴해 가는 과정에서 교회를 국가와 예리하게 대조시키며 종말론적으로 해석해 내었다. 두 사람은 이와 같이 역사적 전환기에 각각의 교회의 책임을 맡았던 위대한 교사였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사상에 관한한, 어거스틴은 터툴리안, 키프리안, 암브로스, 그리고 출교당했던 도나티스트주의자인 티코니우스 등으로부터 긍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다른 한편 그는 자신이 한때 심취했던 마니교와, 자신과 같은 북아프리카의 교회운동인 도나티스트 운동을 시종일관 비판했지만, 그 이면에 이 두 사상의 영향의 그늘이 존재한다.

 

어거스틴은 터툴리안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자신의 사상에 반영했지만,[27] 터툴리안이 그의 말년에 전통적인 교회를 떠났기 때문에 다소 조심스럽게 그를 언급하고 있다.[28] 어거스틴은 키프리안을 선한 목자의 예로 묘사하면서,[29]

그의 세례론과 교회일치론에서 적극적으로 키프리안을 수용한다.

[30]

어거스틴은 키프리안을 따라, 교회의 성례를 세상속에서 그리스도 왕국의 현존과 동일시하기까지 한다.

[31]

한편 어거스틴은 그가 기독교 제국 내에서 주교의 모델로 보았던 암브로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32]

어거스틴은 암브로스를 통해서 구약성경의 영적 해석을 배우면서 마니교에서 떠날 수 있었으며,

[33]

암브로스로 인해서 플라톤주의와 관련된 기독교를 접할 수 있었다.

[34]

특히 암브로스가 황제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감동을 받기도 했다.

[35]


어거스틴은 394년부터 396년 사이에 출교당한 도나티스트주의자인 티코니우스의 작품들을 감동깊게 읽고 있었는데,

[36]

특히 그의 구약 주석에서 그러했다.

[37]

어거스틴이 티코니우스로부터 배웠던 중요한 신학은 그의 종말론과,

[38]

교회론으로서,

[39]

각각 신국론과

[40]

기독교 교양에 잘 나타나 있다.

[41]

 

부정적인 방식으로 어거스틴의 사상적 배경이 되는 것은, 마니교와 도나티스트주의 운동이다. 어거스틴은 마니교에 심취했다가 벗어나지만, 유대교적 종교운동의 한 분파로 해석될 수 있는 이 마니교로부터는 두 도성의 3단계 발전 사상을[42]

그의 신국론에 수용했으며,

[43]

세상 속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나그네(sojourners)로 보는 관점을, 신국론에 반영했다.

[44]

한편, 어거스틴은 도나티스트주의자들과 서로 경쟁관계였지만, 교회론과 관계해서는 이들과 공유하고 있는 신학자들이 있었는데, 바로 터툴리안과

[45]

키프리안과

[46]

티코니우스다. 결국 북아프리카의 공통적인 배경이,

[47]

어거스틴의 신국론에까지 깊이 배어있다.

[48]

요약하자면, 어거스틴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사상의 배후에는, 북아프리카의 신학과 교회의 역사적 상황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과 어거스틴의 교회와 국가의 사상을 비교하기 위해서는, 칼빈을 16세기 종교개혁의 역사적, 사상사적 문맥에서 이해하고, 어거스틴을 4-5세기 로마 제국 말기의 북아프리카 교회의 상황에서 파악한 후 비교하는 작업이 이루어 져야 할 것이다.

 

3.2. 성경 해석

 

칼빈과 어거스틴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비교 연구하는 두번째 방법은, 두 신학자들의 성경 해석학을 통해서 드러나는 그들의 교회와 국가에 대한 사상을 비교하는 것이다.

칼빈의 생애와 사상을 연구함에 있어서, 그의 주석들이 매우 중요하게 사용되어야 하는데, 그의 성경 주석들은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방대한 자료들을 제공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49]

어거스틴의 경우, 그는 자신의 주석을 체계적으로 저술하려고 했다기 보다는,[50] 교회의 주교로서의 그가 역사적 상황에 위치하게 되었을 때,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정에서, 저술되었다고 볼 수 있다.[51]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칼빈과 어거스틴의 사상을 잘 드러내 줄 수 있는 성경 본문을 택해서, 그들의 해석학을 비교한다면, 칼빈과 어거스틴과 같이 기독교 역사상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큰 영향을 끼쳤던 인물들의 비교 연구라는 광범위한 작업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의 목적이 칼빈과 어거스틴의 교회와 국가에 대한 사상을 비교하기 위한 방법론 연구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동일한 성경 구절에 대한 칼빈과 어거스틴의 해석을 비교할때, 그들의 사상적 특색과 차이점과 유사점들이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칼빈과 어거스틴의 성경해석을 비교 연구하기 위해서 다음의 방법들이 가능할 것이다. 첫째로, 성경 권별에 대한 그들의 주석뿐 아니라, 전 작품들에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특정한 성경 구절의 인용을 가능한 한 많이 찾아내는 것이다.[52]

둘째로, 위의 방법에서 찾아진 그들의 성경 인용 작품들을 연대기적으로 분류한다.[53] 세 번째 단계는, 그들의 해석을 분석해 내어 그들의 사상과 그 발전의 여부를 추적하는 것이다.

 

이중에서, 두번째 단계에 해당하는 칼빈과 어거스틴의 성경 해석이 담겨있는 작품들을 연대기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그들의 성경 해석에는 일관성이 존재하는가 혹은 불일치성이 존재하는가? 중대한 역사적 시점들에서 그들의 주석은 뉘앙스나 강조점의 변화를 보여주는가 혹은 아닌가도 중요한 문제가 된다. 만약 어떤 사상적 발전이 있다면, 왜 그런지 그 신학적 이유가 명확하게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칼빈의 경우는, 그의 주석들의 헌정 편지들에 교회와 국가에 대한 어떤 사상적 단서가 있는지 까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칼빈과 어거스틴의 특정 성경 인용들과 그 해석을 조사할 때, 두 신학자의 해석은 각각 다음과 같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점을 전후로 해서 점진적으로 발전해 간 것으로 여겨진다.

 

칼빈의 성경 해석의 발전은 다음의 세 시기로 구분해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시기는, 1541년 이전으로서, 칼빈이 스트라스부르그에 머물면서 목회하며 신학을 전개했던 시기까지이다. 두번째 기간은, 제네바 시의회가 다시 칼빈을 초청해서 그가 제네바로 돌아가서 제 2차 제네바 사역을 시작한 1542년부터 시작해서, 1555년 제네바 시 의회에서 칼빈파가 완전히 권력을 장악하게 되기 까지의 시기이다. 세번째는, 1555년 이후, 제네바의 안정적인 교회 지도자로서 강력한 리더쉽을 발휘했던 칼빈의 후기이다. 이 1555년은 제네바가 칼빈의 후원자에 의해서 완전히 칼빈의 영향력 하에 놓여지는 시점이며, 칼빈의 승리의 배후에는 점차 제네바의 브르죠아로 되어가고 있었던 프랑스의 난민들의 점증하는 영향력이 놓여있다.[54]

어거스틴의 경우는 첫째, 그가 카톨릭 교회의 주교로 서품을 받은 395년 이전과 이후, 둘째로 396년부터 도나티스트 칙령이 반포된 405년 사이, 그리고 세번째는 서로마 제국의 영역에 반달족의 침입이 시작되었던 406년 이후로 크게 나누어 진다.

 

이런 맥락에서, 칼빈과 어거스틴의 성경 해석학에 나타나는 교회와 국가에 대한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로마서 13:1-7절을 택한다면 우리의 목적과 관련해서 유용할 것이다. 왜냐하면, 로마서 13:1-7은 전통적으로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설명해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구절 중 하나인데, 칼빈의 경우, 그의 로마서 주석이 1540년, 1551년, 그리고 1556년에 걸쳐 나타나기 때문에, 그의 사상의 발전 여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초판은 1540년에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출판되었으며, 그것은 1536년에서 1538년까지 진행된 그의 강좌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 1540년은, 칼빈의 제2차 제네바 사역 이전으로서 제 1기에 해당한다. 1551년과 1556년에 칼빈은 기존의 로마서 주석에 필요한 문장들과 구문들을 첨언해서 로마서 주석의 2판과 3판을 각각 출판했다. 1551년은 그의 제2차 제네바 사역의 기간으로서, 1555년 제네바의 시의회 선거에서 칼빈의 지지자들이 완승을 거두기 이전의 시기에 해당한다.

 

한편 1556년의 마지막판 로마서 주석은, 그가 사실상 전 제네바에 강력한 리더쉽을 발휘할 수 있게 된 1555년 이후에 나온 것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세 판들을 연대기적으로 분석하면,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칼빈의 사상이, 그의 청년 시기부터 노년까지 역사적 상황속에서 어떻게 전개되어 갔는지, 그리고 어떤 뉘앙스의 발전을 발견할 수 있는지를 고찰하는데 매우 유용할 것이다.

 

3.3. 기독교 강요와 신국론[55]

 

칼빈과 어거스틴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사상을 비교 연구하기 위해서, 이 주제와 관련된 그들의 대작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 강요와 신국론을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칼빈은 1536년부터 1559년까지 기독교 강요의 여러 판들을 출판했는데, 이 각 판들을 거듭하면서 칼빈의 사상은 점진적으로 발전되었다.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기록한 일차적인 의도는 칼빈과 개신교인들은 왕이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왕에게 순종하는 자들이며 정부 정복자가 아님을 프란시스 왕과 독자들에게 천명하는 것이었다.

[56]

일반적으로 칼빈은 혁명적인 재세례파들과 지배적인 카톨릭 세력 사이에서 중도의 길을 택했다. 칼빈은 사회를 위협했던 재세례파 혁명주의자들과 대조하면서, 부분적으로는, 시민정부를 옹호하기 위해서 그의 기독교 강요를 기록했던 것이다.

[57]

 

전체 6개의 장으로 구성된 칼빈의 기독교 강요 초판은, 1536년에 바젤에서 출판되었는데, 그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사상은, 마지막 장에 나타난다.[58]

여기에서 그는 이중의 정부, 즉 영적인 정부(regimen spirituale)와 정치적인 정부(regimen politicum)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59]

칼빈에 의하면, 이 정부들은 모두 하나님에 의해서 수립되었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에 복종된다. 그러므로 교회와 국가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적 지배하에 놓여있는 것이다. 또한 그의 기독교 강요의 초판에서, 칼빈은 기독교인의 양심의 자유뿐 아니라, 복종도 강조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1539년 판에 이르러, 이미 칼빈이 자신의 근본적인 신학적 방향성을 설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구조가 그 이후의 판에도 연결되고 있다.[60] 그 성격에 있어서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1539년 이후 교리문답서에서 기독교 사상의 핵심 요약서로 발전해 갔다.[61]

그의 기독교 강요의 최종판인 1559년판에는 제 4권의 20장에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사상이 설명되어있다.

[62] 

 

이상과 같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여러 판들에, 만약 가감된 문장들이 있어 의미의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곧 칼빈의 신학적 뉘앙스나 강조점의 변화를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각 판들을 비교하되, 교회와 국가의 관계와 관련된 어떤 내용들이 첨가 혹은 삭제되어 나타나고 있는가를 고찰한다면, 이 주제와 관련된 칼빈의 사상적 변천 여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어떤 변화가 있다면, 그 이유와 방향성을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특히 1536년에 나타난 칼빈의 기독교 강요 초판과 1559년에 출판된 마지막 판을 비교하는 것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그의 초기 사상이 결국 어떻게 강화되어 갔는가 혹은 약화되어 갔는가를 대조해 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바처럼, 어거스틴의 신국론은 교회와 국가의 적절한 관계에 대한 그의 사상에 근본적인 틀을 제공해 준다. 이 작품에는 세상의 시작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어거스틴 사상의 중심적인 주제들이 광범위한 구도로 다루어지고 있다. 신국론의 구조는 비록 그것이 오랜기간 기록되었지만 그 배후에 일치감을 보여주는데, 이 신국론에 나타난 두 도성 사상을 고찰하는 작업은 그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사상을 연구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III. 나오는 글

 

칼빈과 어거스틴과 같이 근대 유럽 기독교 문명과 서방 기독교 전통의 토대를 놓았던 위대한 신학자를 비교 연구하는 학문적 작업은 결코 쉽지 않은 신학적 과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비교 연구가, 두 교회의 지도자 각각의 사상 이해에 깊은 통찰력을 제공해 주며, 21세기에 미래를 전망하고자 하는 각 기독 교회들에게 영적 에너지를 제공해 준다고 한다면, 그것은 칼빈 학계와 어거스틴 연구계 뿐 아니라, 현대 기독교 문명에도 매우 필요한 연구 분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이 의미심장한 칼빈과 어거스틴의 비교 연구를, 교회와 국가의 관계라고 하는 매개를 사용하여 접근하는 방법론을 세가지로 고찰하였다. 유럽의 중세 문명이 붕괴하고 근대 사회로 재구성되어 가면서 경쟁적인 교회 운동들이 충돌하던 급변기인 종교개혁시대에 태어나서 성장했던 칼빈의 사상은, 16세기의 역사적 경험과 문화적 문맥속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한편 어거스틴의 사상도, 기독교 국가였던 로마 제국의 몰락기인 4세기말 5세기 초에 북아프리카 교회를 섬겼던 그의 배경이 고찰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역사적 사상적 배경을 비교 고찰한 후에, 그들의 성경 해석학의 발전을 연구하되, 교회와 국가와 관련된 성경 해석학을 역사적으로 비교하면, 그 사상적 특징들과 뉘앙스의 강조점들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또한 칼빈과 어거스틴의 교회와 국가 사상을 심도있게 설명하고 있는 기독교 강요와 신국론을 비교 연구하되, 특히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경우 1536년 초판과 1559년 마지막 판을 비교 고찰하면, 칼빈의 교회와 국가 사상이 어떻게 강조되어 나갔는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은 16세기 유럽이라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개신교회를 섬겼으며, 어거스틴은 4-5세기 로마 시대의 북아프리카라는 배경 속에서 교회와 신학을 위해서 봉사했다. 칼빈과 어거스틴의 교회와 국가 관계의 비교 연구를 위한 방법론을 고찰한 본 논문은, 결국은 21세기 아시아라고 하는 역사적 문맥속에서 한국 기독교회의 정체성을 수립하기 위한 작은 교회사적 시도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cli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