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 카이퍼 - 칼빈주의와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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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신앙 연구가들/아브라함 카이퍼

2011.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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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와 종교 > - 1) 종교 자체
by 아브라함 카이퍼


첫번째 강연에서 칼빈주의가 기독교의 완성된 모습으로서, 그리고 삶의 체계로서 높고 풍성한 인류의 발전을 이끌고 있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던 아브라함 카이퍼는, 그의 두번째 강연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종교 영역에서 칼빈주의가 차지하는 위치를 설명한다. 매우 빠르게 지어진 미숙련자의 솜씨처럼 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하나님께로 이끄는 칼빈주의의 놀라운 힘의 비밀은 무엇인가? 카이퍼는 이 문제에 대하여 종교 자체, 교회 생활, 실제 생활의 세 측면으로 나누어 차례로 답한다.


종교는 다음 네 문제에 대하여 대답하여야 한다.
1. 종교는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하는가 아니면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는가?
2. 종교는 직접적으로 작용해야 하는가 아니면 매개적으로 작용해야 하는가?
3. 종교는 우리 개인 존재와 실존의 일부분에서 작용하고 마는가 아니면 전체에서 작용할 수 있는가?
4. 종교는 정상적인 특성을 가질 수 있는가 아니면 비정상적인 즉 구원론적 특성을 가져야 하는가?


종교에 관한 첫번째 문제에 대하여 현대 종교 철학은 종교의 기원을 하나의 잠재력에 돌리는데, 그것은 사람 안에 존재하는 영혼과 마찬가지로 자연을 움직이는 영적 능력을 추론하게 되고, 더 나아가 포괄적인 개념의 인격신의 존재를 기대하게 만든다. 하지만 결국 인간은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대조를 파악하게 됨과 동시에 자신의 영혼의 고상함에 매료되어 -자기 숭배의 행위로- 비인격적 이상(ideal) 앞에 절을 하고 만다. 이러한 종교는 어떤 다양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위한 종교가 된다.

인간을 위한 종교는 비록 그것이 하나의 신을 숭배하는 모습으로 발전한다 해도 역시 인간의 승리를 목적으로 육성되는 종교일 수밖에 없다. 이런 종교가 숭배하는 신은 언제나 사람을 돕거나, 국가를 위한 좋은 질서와 안정을 보장하거나, 궁핍한 때 도움과 구원을 제공하거나, 죄의 타락에 맞서 고상한 충동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종교는 궁핍한 때에 번성하며, 번성한 때에 버림받는다. 계몽된 계급은 학문의 진보로 인하여 우주의 압력에서 구제받는다고 느끼자마자 이런 종교를 버린다. (그리고 같은 현상이 고상하고 잘 살고 계몽된 사회 계급에 속한 이름뿐인 그리스도인 가운데 반복되고 있다.)

이에 반하여 칼빈주의의 대답은 간단하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성경이 말하기 때문에, 종교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계를 위하여 존재하시는 게 아니라 피조물이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의식없는 전체 피조물에 종교적 표현을 새겨 두셨다. 그러나 온 창조계가 사람 안에 그 절정에 도달하는 것처럼, 종교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에게서 분명하게 표현된다. 칼빈이 말했던 '종교의 씨'와 같이, 하나님은 신적인 것에 대한 감각을 통하여 인간을 종교적으로 만드신다. 종교는 오직 찬양과 경배의 감정이지, 불화하고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의존의 느낌(필요를 외치는 소리)이 아니다. 종교에서 모든 동기의 출발점은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것 말고 다른 존재를 탐하지 않는 것, 하나님의 뜻 말고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는 것, 주의 이름의 영광에 전적으로 몰입하는 것, 그것이 모든 참된 종교의 핵심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이루어지이다"하고 간구하며, 마땅히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하고" 그런 다음 자신의 필요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하여 고백한다. 왜냐하면 만물이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이것이 칼빈주의가 주장하는 종교의 근본 개념이다.


그렇다면 종교는 직접적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매개적이어야 하는가? 기독교 외의 모든 종교에서 인간 대언자가 필요했고, 기독교 영역에서도 성모 마리아, 천사, 성인, 순교자, 성직자로서 대언자가 등장했다. 루터 역시 이러한 사제적 매개에 대항하였지만, '가르치는 교회'라는 이름으로 중보자 직분과 신비의 청지기를 다시 도입하고 말았다.

칼빈에 의하면, 종교는 피조물의 중재가 전혀 없이 하나님과 인간 마음의 직접적 교통을 실현해야 한다. 그는 사제나 순교자, 천사를 평가절하했기 때문이 아니라, 종교의 본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옹호해야 했기에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 끼어든 모든 것에 맞서서 거룩한 분노로 전쟁을 벌였다. 물론 타락한 사람에게 중보자가 필요하지만, 그 중보자는 오직 하나님이어야 하고, 사람이 확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내주하심에 의해 확증될 수 있다.

여기에서 사람을 위한 종교와 하나님을 위한 종교를 다시 한번 비교할 수 있겠다. 사람을 돕는 일이 종교의 주된 목적으로 남는 한, 사람이 자신의 신앙으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 한, 신앙심이 열등한 사람이 더 거룩한 사람의 중보 활동을 구하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되고 그러한 종교는 다른 사람의 중보자 노릇을 필요로 하게 된다. 하지만 종교의 요구가 모든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면,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두번째 요점은 개별적 선택의 고백에 이르러 절정에 도달한다. 모든 성직자 중보의 결과가 한결같이 종교를 외형적이게 만들고 사제적 형식으로 종교를 숨막히게 하였지만, 오직 모든 사제적 간섭이 사라지고 영원부터의 하나님의 선택이 내면의 영혼을 하나님께 바로 매이게 하는 곳에서 종교가 이상적으로 실현된다. ('예정'이라는 관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빈을 나란히 놓을 수 있겠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여전히 감독으로서 자신과 교회의 중보 위치를 유지하였다.)


종교의 목적이 인간 자신에게서 발견되면, 자연스럽게 모든 사람은 종교적 필요를 불러일으키는 사건들에 종교를 국한시키게 된다. 그리고 종교의 실현이 성직의 중보자에게 달려 있다면, 그들 자신이 마음대로 간섭할 수 있는 사건에 종교를 국한시키게 된다. 따라서 이런 종교는 부분적일 수밖에 없는데, 종교적 기관(organ), 영역, 개인의 집단에서 그런 특징이 발견된다.

이러한 종교에서는 종교적 기관으로서 정당하게 사용되어야 할 인간의 감정, 의지, 지성 가운데 지성을 억제당한다. 종교가 인간 지성의 범위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종교가 과학에서 배제되고 종교의 권위가 공적 생활의 영역에서 배제되었다. 종교의 영역이 윤리적 생활로 국한되고, 개인적인 은신처로만 여겨진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종교는 모든 사람과 관계를 맺지 못하고 일부 경건한 사람들과 관계 있는 종교가 된다.

마찬가지로 로마교는 종교를 자신의 교회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알았고, 종교의 영향력을 자신이 봉헌한 삶의 부분에 국한된다고 보았다. 이렇게 삶의 봉헌된 부분과 세속적 부분의 경계선을 긋는 이원론적 체계는, 종교를 일상 생활에서 절기로, 번영의 시절에서 위험과 병든 때로, 삶의 충만한 때로부터 다가오는 죽음의 때로 국한시키고 말았다.

칼빈주의는 이 세번째 문제에 대하여서도 역시 단호하다. 칼빈주의는 종교의 전적으로 보편적인 특성과 적용을 옹호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한다면,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 마땅하다. 따라서 사람은 제사장으로서 마땅히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의 제단에 제물로 올려놓아야 한다.

칼빈주의는 감정이나 의지에 국한된 종교를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람의 이성적 의식(사람 안에 있는 로고스) 즉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비추는 사유의 빛을 배제할 수 없다.
하나님은 창조 때에 변할 수 없는 존재 법칙을 창조된 모든 것에게 주셨다. 칼빈주의는 이에 철저히 순종하여 모든 생활을 하나님을 섬기는 데 봉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전능한 능력으로 모든 생활에 임재하신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면전에 서있으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따라서 칼빈주의자는 종교를 단일한 단체나 사람들 가운데 몇몇 집단에 국한시킬 수 없다. 종교는 인류 전체와 관계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창조하셨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모든 것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특별 은혜로 선민에게 끼칠 뿐만 아니라 일반 은혜로 모든 인류에게 끼치기 때문이다.

교회에는 종교적 빛과 생명이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이 교회의 벽 안에는 활짝 열린 창들이 있어서 그 빛이 온 세상에 비친다. 또 여기에는 모든 부패를 억제하는 거룩한 소금이 있어서 모든 방면으로 스며든다.


종교 자체에 대한 마지막 네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종교는 인간을 정상적으로 봐야하는가 아니면 비정상적으로 봐야하는가? 만약 인간을 비정상적으로 본다면 그 종교는 필연적으로 구원론적 특성을 갖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가 정상적인 존재로서 사람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견해를 갖는다. 이런 종교관은 진화론적 사고에 근거하여 가장 낮은 형식에서 가장 높은 이상으로 나아가는 종교의 발전을 말한다. 종교가 불완전한 상태에서 진보하여 완전한 상태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칼빈주의는 불완전한 종교 형식을 창조의 결과로 보지 않고 타락의 결과로 설명한다. 최초의 사람은 하나님과 완전한 관계에서, 순수하고 참된 종교에 의하여 고취된 상태로 지음받았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이것을 깨닫고 죄 의식을 느끼며 한탄스러운 타락을 이해한다. 이것에 대한 회복은 오직 구원론적 방법으로만 가능한데, 이 결론에 따라 칼빈주의는 참된 실존을 위한 중생의 필요에 대한 근거와 분명한 의식을 위한 계시의 필요에 대한 근거를 발견했다.

하나님이 삶의 굽은 바퀴를 바로잡아 주시는 직접적 행위인 중생에 대하여는 강연 주제에 따라 자세히 다루지 않지만, 계시와 성경의 권위에 대하여는 할 말이 있다. 슈바이처와 같은 사람들은 성경을 오직 개혁주의 신앙고백의 형식적 원리라고만 이해하였지만, 칼빈은 성경적 계시의 필요(necessitas S. Scripturae)라고 표현했다. 이 교의는 성경의 지배적인 권위에 대한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비평적 분석과 비평적 결과의 성경 적용을 기독교 자체를 버리는 것과 동일하게 보는 이유이다.

타락 전 낙원에는 성경이 없었다. 그리고 장차 영광의 낙원에서도 성경은 없을 것이다. 자연의 빛이 우리에게 직접 말하며 하나님의 내면적 말씀이 우리 마음에 명료하게 울릴 때 성경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지금은 죄로 인하여 자연과 우리 마음을 통하여 이처럼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러한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인간에게는 성경의 계시가 전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시는 인간 중보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되는 이 빛(태양에 비할 때 인공조명과 같은)을 거룩한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비춰주신다.

그러나 사람을 여전히 정상적으로 보는 종교의 입장에서는, 종교가 구원론적일 필요가 없다는 그릇된 가정에 서게 되어 성경의 권위와 맞서게 되고, 결국 성경이 필요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과 사람의 마음 사이에 놓인 방해물이 되고 만다.


종교의 네 가지 문제에 대하여 칼빈주의는 적절한 교의로 다음과 같이 각각 표현한다.
1. 칼빈주의는 종교를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는 공리주의적 행복주의적 의미로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 (하나님의 주권)
2. 종교에서 하나님과 영혼 사이에 어떤 피조물의 중보가 있어서는 안 된다. 모든 종교는 하나님께서 내면의 마음에 이루시는 직접적인 역사이다. (선택)
3. 종교는 부분적이지 않고 보편적이다. (일반,보편 은혜)
4. 우리의 죄악된 조건에서 종교는 정상적일 수 없고 구원론적이어야 한다. (중생 & 성경적 계시의 필요)

(요약 - 나쥬니(lazeniu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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