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 닮으려....!】

【http://예수님.닷컴 】

루터- 갈라디아서 강해 1장4절

댓글 0

예수 신앙 연구가들/루터

2011. 2. 17.

click 

루터의 갈라디아서 강해 1장4절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갈라디아서 1장4절)


그리스도는 그분 자신을 주셨다. 무엇을 위하여 주셨는가? 왕관, 왕국, 우리의 거룩함, 의(義)를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위함이다. 이 말은 모든 종류의 의에 항거하는 하늘로부터의 진정한 천둥번개이니,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고 했다(요 1:29).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말씀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무심히 바라보거나 가볍게 보아 넘겨서는 안 된다. 이 말씀들은 위로로 채워져 있으며 겁에 질린 양심에 큰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죄들, 곧 다른 사람의 죄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죄를 어찌 할 것인가?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죄를 위해 자신을 주셨다고 대답한다. 이는 놀라운 위로의 말씀이며 옛 율법이 약속한 것이다. 즉, 우리의 죄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음에 내어 주시는 것 외에는 그 어떤 방편으로도 제거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같은 총탄과 포탄은 황청, 모든 이방 종교들, 모든 의식(儀式)들, 모든 사역들, 모든 공로들을 파괴하기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의 죄가 우리 자신의 보속(補贖)들로 사라질 수 있다면, 왜 하나님의 아들이 죄를 위하여 보냄을 받아야 하셨겠는가? 그러나 그 분이 죄 때문에 우리의 죄를 위하여 보냄받으셨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공로로 죄는 없어질 수 없다는 말이 된다.

덧붙이자면, 우리의 죄는 너무도 크고 무한하고 정복할 수 없는 것이어서 온 세상은 그 죄의 어느 하나도 배상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확실히 이 구속, 곧 하나님 아들의 보혈의 위대함이, 우리는 우리의 죄를 위해 보속을 할 수도 없고 죄를 극복할 수도 없다는 사실은 분명히 해준다.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 이 말씀으로 죄가 가진 세력과 능력이 증폭된다. 그러나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리고 죄를 하찮은 것,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긴다. 비록 죄가 쏘는 것과 양심의 가책을 가져오기는 해도 여전히, 죄는 매우 가볍고 작은 세력이어서 우리가 행하는 작은 일이나 공로가 죄를 없이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이 죄를 위하여 무한정 큰 값이 지불되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때에라야 죄의 능력이 너무 크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는 일 외에는 다른 어떤 방법이라도 죄가 제거될 수 없다는 사실이 현저히 드러날 것이다. 이것을 주의 깊게 생각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죄”라는 이 한 단어가 하나님의 영원한 분노와 사탄의 왕국 전체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리고 죄는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모든 인간은 죄의 포로와 노예이며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죄 아래 팔렸다”고 결론짓는다. 죄는 온 세상 모든 사람을 억압하는 대단히 잔인하고 강력한 폭군이다. 천사든 인간이든 그 어떤 피조물의 능력으로는 넘어뜨리거나 몰아낼 수 없는 폭군이다. 오직 죄를 폐하기 위하여 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시고 주권적인 능력에 의해서만 넘어뜨리고 몰아낼 수 있는 폭군이다.

만일 우리가 이 신앙으로 자신을 강화하면 그리고 마음을 다하여 인자이신 예수그리스도에게 매어 달리면, 우리는 빛을 얻을 것이며 모든 인생길에서, 자유롭고 확실한 판단을 할 수 있는 건전한 판단력을 얻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죄가 그토록 전능한 폭군이라는 사실을 들을 때, 우리는 즉시 다음과 같은 추리를 불가피하게 이끌어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황주의자들, 수도사들, 수녀들, 성직자들, 마호멧 교도들, 그리고 종파주의자들이 그들 자신의 전통들, 예비적 공로들, 배상들로 죄를 없이하고 극복하려 할 때 그것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제부터 우리는 모든 종파주의자들을 무익하고 사악한 것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손상시킬 뿐 아니라 아주 없이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우리 자신의 영광을 들어 올려놓는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보기에 은헤를 받을 만한 베드로, 바울, 그리고 다른 성자들의 죄를 위하여 보냄을 받으셨다고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이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여러분 자신을 위하여 그리스도가 보냄을 받으셨다고 말하거나 마음으로부터 믿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그리고 이 대명사 없이 그리스도의 복을 엄청나게 찬양하거나 높이는 일은 쉽다. 그러나 “우리”라는 대명사를 적용하게 되면 우리의 약한 본성과 이성은 역전을 당한다. 우리의 이성은 감히 하나님에게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거나 이런 위대한 보화를 거저 받겠다고 장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성은 먼저 순수하거나 죄가 없기 전에는 하나님과 어떤 일도 행하기를 거부한다. 따라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 또는 이와 비슷한 문장을 읽거나 들어도, “우리”라는 대명사를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고 자격이 있고 거룩한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한다. 그리고 자기 공로로 자격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결정한다.

이 모든 것이 뜻하는 것은 ‘내가 바라는 만큼 죄가 큰 힘과 위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위선자들도 죄에 대한 참회를 느끼지만 여전히 그들의 사역이나 공로로 쉽게 죄를 제거할 수 있다고 상상한다. 그리고 그들 자신의 사사로운 마음에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이라는 말은 단지 겸손의 표현에 불과하며 자신들의 죄는 전연 심각하거나 실제가 아니며 단지 사소하고 허구적인 것이기를 바란다. 요컨대 인간의 이성은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죄의식이 전혀 없는 모조와 가짜 죄인을 하나님에게 제시하기를 좋아한다. 의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건강한 사람을 데려오기를 좋아한다(마태복음 9:12). 그리고 죄의식이 없는 바로 그런 때에만,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주어진 분으로 믿기를 좋아한다. 온 세상이 이렇게 느끼고 있다. 특히 선함과 거룩함에 있어서 남들보다 더 큰 명성을 원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느낀다. 예를 들면 수도사들과 모든 ‘자칭 의인’이 된 사람들이 그러하다. 그들은 입으로는 스스로 죄인들이라고 고백한다. 또 매일 죄를 범한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자신들의 공로로 처리할 수 없을 만큼의 죄는 짓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것 외에 그들은 자신의 의와 자신의 공로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오기를 원하며, 심판자는 그 대가로 영생을 보상으로 주시기를 요구한다. 한편 그들은 매우 겸손한 탁발승과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에 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들이라고 주장은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떤 죄를 범한 자들처럼 가장할 따름이다. 그리고 이 죄들의 사함을 위하여 세리들과 함께“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누가복음 18장13절)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그들에게 “우리의 죄를 위하여”라는 사도 바울의 말은 공허한 것이거나 거짓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그들이 죄를 실제로 의식하게 되는 유혹의 때에는 이 말에서 아무런 위로도 얻지 못하고 철저한 절망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주된 지식과 참된 지혜는, 바울의 이 말을 매우 심각하고 참된 것으로 여기는 일이다. 즉,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나 거룩함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죽음에 내어줌을 당하셨다. 이 죄는 가공이 아니라 실제이다. 크고, 많고, 사실이고, 무한하고, 정복할 수 없는 죄들이다. 그러므로 죄를 작게 생각하거나 우리의 공로로 제거할 수 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또한 생활 현장에서 그리고 죽음의 때에 죄의 압박을 느낀다면 그 중압 때문에 절망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여기서 우리는 가식이나 허위의 죄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주신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작은 죄를 위하여 주신 것도 아니고, 크고 엄청난 죄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주신 것을 믿는 법을 바울에게서 배워야만 한다. 한 두 사람의 죄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하여, 이미 극복된 죄를 위함이 아니라(인간이나 천사라도 가장 작은 죄 하나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 정복할 수 없는 죄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주셨다는 사실을 믿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죄” 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무리에 동참하지 않는 한, 즉 이 신앙의 교리를 가진 자와 그것을 가르치고 듣고 배우고 사랑하고 믿는 무리의 일부가 되어 있지 않는 한 우리를 위한 구원은 없다.

"그들은 입으로는 스스로 죄인들이라고 고백한다. 또 매일 죄를 범한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자신들의 공로로 처리할 수 없을 만큼의 죄는 짓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지금 교회에 다니고 있는 많은 교인의 죄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이글은 표현하고 있다. 자기 죄가 얼마나 크고, 많고, 사실이고, 무한하고, 정복할 수 없는 죄라는 것을 모른다면 크고 엄청난 죄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주신 것을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고 체험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혹의 때만 아니라 죽음의 때와 죽음과의 싸움을 위하여 충분한 준비를 해야만 한다. 그러한 때에 우리의 양심은 과거의 죄를 회상함으로써 공포에 떨게 될 것이다. 마귀는 우리를 강하게 공격할 것이며, 산더미와 홍수와 바다 같은 죄로 우리를 빠뜨리려 할 것이다. 우리를 두려움에 질리게 하고 그리스도에게서 분리하며, 절망에 던져 버리기 위하여 그리 할 것이다. 그때에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의와 성도들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불의와 죄인들을 위하여 주어지신 것이다. 만일 내가 의롭고 죄가 없다면 나의 화해자로서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심술궂은 성자를 가장한 사탄아, 사실은 내 속에 죄 밖에 없고 그 죄가 실제적이고 심각한 때에 왜 너는 나로 경건함을 느끼게 하며 내 속에서 의를 찾아 헤매게 하느냐?

이죄는 허구적이거나 사소한 것들이 아니다. 이 죄들은 첫째 돌판(십계명 가운데서 하나님에 대한 부분-역지주)을 범하는 죄들이다. 즉, 불신, 의심, 절망, 하나님 모독, 증오, 무지, 불경, 감사치 않음. 하나님 이름의 남용, 경멸, 혐오, 하나님 말씀 모독 등이다. 이에 더하여 둘째 돌판(인간에 대한 부분-역지주)을 범하는 육의 죄들이 있다. 첫째 돌판을 범하는 죄보다는 덜 중한 악행들이지만 부모 공격 실패, 통치자들에 대한 불순종, 다른 사람의 재산이나 아내를 탐내는 일 등이다. 물론 나는 살인, 간음, 도둑질, 그리고 기타 둘째 돌판을 범하는 죄들을 짓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으로 나는 그 죄들을 범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어겼다. 그리고 내 죄의 수는 너무나 많아서 소가죽도 찢어질 정도이다. 그 수는 헤아릴 수 없다. “ 내가 지은 죄가 바다의 모래 보다 많도다 ” 마귀는 아주 지혜로운 사기꾼 이어서 나의 의나 선행에서 큰 죄를 만들어 낸다. 나의 죄가 매우 무겁고, 매우 현실적이고, 한이 없고, 심히 두렵고, 매우 끈질긴 것이어서 나의 의는 내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나를 불리한 입장에 놓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나의 죄를 없이 하시려고 그리고 믿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아들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어 주셨다.

그렇다면 영원한 구원의 의미는 이 말씀들을 진지하고 참되게 받아들이는 일에서 구성된다. 나는 빈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거룩하고. 의롭고, 자격 있는 사람들, 또는 그리스도의 친구들을 위함이 아니라 경건치 못하고, 죄 되고, 자격이 없는 자들, 혹은 그의 원수들, 하나님의 분노와 영원한 죽음을 받아야 할 사람들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주셨다는 것을, 특히 양심의 갈등 가운데서 이것을 믿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나는 자주 경험하였다. 그리고 지금 까지도 날마다 경험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의 이 말과 또 이와 유사한 말들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강하게 하자. 마귀가 우리를 고발하면서 “너는 죄인이다. 그러므로 너는 정죄를 받았다.” 라고 말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응답할 수 있다. “나는 죄인이라고 네가 말하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의롭다 함을 입고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 때 마귀는 “아니다. 너는 정죄를 받을 것이다.” 한다. 이때 나는 말할 것이다.

“아니다. 나의 죄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그리스도 안에 피난처를 삼기 때문에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탄아, 너는 내 죄의 크기를 내게 보여줌으로 나를 놀라게 하고 나를 불안, 믿음의 상실, 절망, 증오, 하나님 경멸, 모독으로 밀어 넣을 때에 나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사실 네가 나더러 죄인이라 말할 때 그것은 너 자신을 대항할 무장과 무기를 마련하여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너 자신의 검으로 너의 목을 베며 너를 발로 밟도록 한다. 너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에게 설교한다. 비참하고 정죄 받은 나로 하여금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요한복음 3장16절 )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게 한다. 너는 나의 구속자이신 그리스도의 복을 기억하게 한다. 내 어깨가 아니라 그의 어깨에 나의 모든 죄가 놓여 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기’ 때문이며,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 이었기 때문이다(사도행전 53장6,8절). 그러므로 나를 일컬어 죄인이라고 네가 말할 때, 너는 나를 놀라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헤아릴 수 없는 위안을 나에게 가져온다.’

죄와 죽음과 마귀는 그리스도의 지혜로만 파멸될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죄에 대한 기억을 털어버리지 않고 굳게 붙들고 있는 사람과 자신의 힘만으로는 스스로를 도울 수 있다거나 자기 양심이 인정되기까지 기다릴 수 있다고 상상하고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은 누구나, 사탄이 사람들을 유혹하려고 놓은 덪에 걸려든다. 그리고 자신을 슬픈 파멸에 이르게 하고 마침내 완전히 정복당한다. 마귀는 사람의 양심을 고소하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이 교활한 뱀은 실로, 우리의 중보자요 구세주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어떻게 하면 율법 수여자, 심판자, 정죄자로 제시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유혹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바울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매우 적절하고 참되게 정의한 말을 우리는 사용하여야만 한다. 즉,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동정녀의 아들이시다. 그는 우리의 죄를 위해 죽음에 넘기우시고 죽임을 당하셨다.” 만일 마귀가 그리스도에 대한 다른 어떤 정의를 인용하더라고 우리는 이렇게 말하여야 한다. “그 정의(定義)와 주제(主題)는 거짓되다. 그러므로 나는 그 정의를 받아들이지 않겠다.” 내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의 말에서 왜 내가 그토록 엄격히 그리스도를 정의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잔인한 주님이 아니시다. 그는 온 세상의 죄를 위한 화해자이시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죄인이면(참으로 우리는 모두 죄인들이다) 그리스도를 심판자로 무지개 위에 올려놓지 말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공포에 떨게 될 것이며 그의 자비에 대해 실망할 것이다. 그렇다. 주님에 대한 참다운 정의는 이런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요 동정녀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위협하시거나 괴로움을 주시거나 죄인들을 정죄하시거나 우리의 악한 과거를 드러내시는 분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십자가에 못박으심으로 없이 하시고(골로새서 2장14절) 혼자서 우리의 죄를 모두 몰아내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어떤 사람들의 죄를 제거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죄와 온 세상의 죄를 제거하셨음을 확신한다고 말이다. 비록 세상은 믿지 않았지만 그리스도가 자신을 드린 것은 온 세상의 죄를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죄를 단순히 죄로 내버려두지 말라. 그것들을 여러분 자신의 죄로 되게 하라. 즉,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사람들의 죄들 뿐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죄를 위하여 보냄 받으신 사실을 믿으라는 말이다. 이 사실을 굳게 붙잡으라. 그러나 어떤 일이 있어도 그리스도에 대한 이 다정한 정의를 빼앗기지 않도록 하라. 이 정의는 하늘의 천사들에게까지 기쁨을 가져다준다. 엄격히 말해서 그리스도는, 모세도 아니고 괴롭히는 자도 아니고 강제집행자도 아니며 우리의 죄 때문에 자신을 내어 주신 죄의 중보자요 은총의 수여자이시다.

내가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우리의 죄를 위하여 자신을 죽음으로 내어주셨다면 그는 우리를 괴롭히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는 괴로워하는 자를 내어 던지시는 분이 아니라 넘어진 자를 일으키시는 분이며 공포에 떠는 자에게 화해와 위로를 가져오는 분이시다. 그렇지 않다면 바울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분”이라 말할 때 거짓말을 한 것일 것이다. 만일 내가 그리스도를 그처럼 정의한다면 그분을 올바로 정의하는 것이며 진정한 그리스도를 포착하는 것이며 참으로 그분을 내 주님으로 모시는 것이다. 나는 신적인 위엄성에 대한 모든 사색을 피하고 그리스도의 인간성 위에 자리한다. 거기에는 두려움이 없다. 순전한 감미로움과 기쁨, 또 그런 류가 있을 뿐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나 자신과 모든 피조물에 관한 참된 지식, 그리고 마귀 나라의 모든 사악함에 관한 참된 지식을 나에게 보여주는 불을 켜준다. 우리는 신기한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옛 교리를 반복하고 또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입으로만 가지고 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 심령의 중심에서 명상하도록 하고 특별히 우리가 죽음과 싸우고 있을 때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이 말에서도 바울은 이 서신에서 논하려는 것을 요약하고 있다. “이 세대”라는 말로써 그는 과거 현재 미래를 포함하는 온 세상을 뜻하고 있다. 앞으로 올 ‘영원한 세대’와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이 세대의 모든 것이 온 세상을 다스리는 마귀의 악한 일에 순종하기 때문에 이 세대를 “악하다”고 부른다. 그러므로 세상을 마귀의 왕국이라고 한다. 하나님에 대한 무지, 모독, 불경, 증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모든 사역에 대한 불순종 외에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세상 왕국 안에, 그리고 그 아래 존재한다.

여기서 다시금 사람이 자신의 공로나 자신의 힘으로는 죄를 제거할 수 없음을 보게 된다. 요한이 말한 대로 온 세상은 “악마의 세력 아래 놓여 있기”(요한일서 5장19절)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죄와 마귀의 노예들이며 그의 식구들이다. 마귀가 폭군이 되어 붙잡아 두고 있다. 그렇다면 죄에서 벗어나기 위한 그리도 많은 종교적 수도원들의 설립, 그리고 많은 무겁고 어려운 사역들의 발명, 수건을 쓰는 일, 피가 나도록 몸에 채찍을 가하는 일, 갑옷을 입고 성 야고보에 순례를 가하는 일 등이 무슨 유익이 있었던가? 우리가 이 모든 것을 행하였다 하더라도, 앞서 행한 정의는 여전히 서 있다. 우리는 여전히 악한 세대 안에 있고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악한 세대와 사탄의 왕국이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즐거워하는 몸과 마음의 모든 선물들, 곧 지혜, 의, 경건함, 설득력, 힘, 아름다움, 또는 건강은 다만 우리 위에 군림하는 폭군 마귀의 도구일 분이다. 이 도구로 마귀는 자신을 섬기라고 우리를 강요하고 그의 왕국을 발전시키라고 강요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지혜로 그리스도의 지혜와 지식을 애매하게 한다. 그리고는 우리의 악한 가르침으로 많은 사람들을 파멸로 인도하게 함으로써 마침내 그들을 은혜와 그리스도에게로 올 수 없게 한다. 그대 자신의 의와 거룩함을 강론하고 설교하라. 그러면 그대는 우리가 유일하게 의롭다함을 얻고 삶을 얻게 되는 그리스도의 의를, 악하고 마귀의 것으로 미워하고 정죄하게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리스도의 왕국을 파괴하기 위하여, 복음을 근절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종들과 그들의 말을 듣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살해하기 위하여 우리의 힘을 남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떠나 있으면, 우리의 이 지혜는 갑절로 어리석은 것이 되며 우리의 의는 벌(罰)이 더하여져 죄와 악한 것이 된다. 그리스도의 지혜와 의를 알지 못하고 그것을 애매하게 하고, 훼방하고, 불경하게 하고 박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악한 세상”이라 부르는 것은 맞는 말이다. 최상 일 때 최악의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안에서 실제로는 갑절이나 악하다. 나는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조잡한 악들, 예를 들면 간음, 매춘, 도둑질, 살인, 중상, 그리고 다른 더러운 것들에 대해서는 말하지도 않겠다. 이것들은 다른 악덕에 비교하면 작은 것들이다. 자신을 빛의 천사(고린도후서 11장 14절)로 둔갑시킨 이 백색 마귀, 그가 진짜 마귀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를 건지시기 위하여”등의 말로 이 서신의 논의 점을 보여 준다. 즉, 우리에게 은혜와 그리스도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나 천사나 다른 어떤 피조물도 사람들을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질 수 없다. 이것은 신의 권능에만 합당한 사역이며 인간이나 천사의 능력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가 죄를 제거하시고 마귀의 폭정과 왕국, 곧 이 악한 세대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 세대는 자기 신, 즉 마귀에게 순종하는 종이며 좋아서 따라가는 추종자이다.(고린도후서 4장 4절) 살인자요 거짓의 아버지(요한복음 8장44절)가 행하거나 말하는 것이 무엇이든 세상은 그의 가장 충실하고 순종하는 아들로서 순종을 다하여 모방하여 실행에 옮긴다. 그러므로 세상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증오 불경, 모독,속임, 오류의 죄뿐만 아니라 살인, 간음, 절도, 강도 같은 공공연한 죄들로 가득차 있다. 간단히 말해서 세상이 잘 되어 가는 곳에는 악이 배나 넘친다.

그러므로 이 세대는 악하다는 바울의 말에 덧칠을 하거나 겉치레를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참되고 정확하게 서 있게 하자,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가장 훌륭한 덕스러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혹은 외식하는 자들이 신성을 크게 가장하기 때문에 체념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오히려 바울이 말한 것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자. 바울의 말로부터 여러분은 이 세상에 대하여 담대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은 모든 지혜, 의, 그리고 능력과 함께 마귀의 왕국을 이루고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의 아들로써 우리를 이 마귀의 왕궁에서 구원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찬양하자.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그의 자비를 인하여 그에게 감사를 드리자 그리고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가 없을 때, 그가 우리를 마귀의 왕국에서 구원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찬양하자.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그의 자비를 인하여 그에게 감사를 드리자.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을 때, 그가 우리를 마귀의 왕국에서 구원하여 주셨다. 하나님의 친 아들에 의해 그리 하셨다.

그리고 바울과 함께, 마귀의 털끝 하나도 굽히지 못하는 우리의 모든 공로와 의들을 ‘상실물이요 배설물’(빌립보서 3장 8절)이라고 고백하자. 그리고 모든 자유 의지의 능력, 이 세상의 모든 지혜와 의, 모든 종교적인 규범들, 모든 의식들, 모든 미사들, 의식들, 서약들, 금식들, 머리 수건들을 ‘더러워진 옷’이나 마귀의 지독한 독극물로 여겨 밟고 혐오하자. 반대로 그의 죽음으로 우리를 세상에서 뿐 아니라 이 “마귀의 세상”에서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찬양하고 선포하자. 이리하여 우리는 두 가지 정의를 내리게 되었다. “세상”과 “그리스도”또는 세상의 왕국과 그리스도의 왕궁, 세상의 왕궁은 죄, 죽음, 마귀, 불경, 절망, 그리고 영원한 사망의 왕국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왕국은 은혜, 죄 사람, 위로, 구원, 그리고 영원히 영광을 받으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가 옮겨진 (골로새서 1장13절) 영생의 왕국이다. 아멘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바울은 여기서 그의 모든 말을, 의의 교리를 배반하는 자들을 대항하여 싸우게 하려고 선택하고 배열한다. 그는 말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악한 마귀의 왕국과 세상에서 구원하셨다.그리고 아버지의 뜻, 기뻐하심, 그리고 명령에 따라 그리하셨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뜻과 노력(로마서 9장16절), 또는 우리 자신의 지혜나 결단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한복음 1장13절). 그러므로 우리가 이 현재의 악한 세상에서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바울은 은혜를 찬양하는 일에 매우 장황하고 격렬하여, 거짓 사도들에 대항하려고 말끝마다 날카롭게 하고 겨냥한다.

바울이 여기서 ‘아버지의 뜻’을 언급하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요한복음서의 많은 구절들에서 반복되는 이유이기도 한데, 이로써 그리스도는 그의 사명을 주장하면서 우리를 아버지의 뜻에로 불러들인다. 그리하여 그의 말씀과 사역 안에서 우리가 그분이 아니라 아버지를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신 것은 그가 우리를 붙잡아,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가운데 직접 아버지께 이끌리고 옮겨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앞에서 경고한대로,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사색’하는 것으로는 그 어떤 하나님의 구원하는 지식을 오게 할 수 있는 소망은 없는 것이다. 이 지식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우리 죄를 위하여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신 그리스도를 붙드는 일만으로 올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면 모든 분노는 그치고 두려움과 공포는 없어진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직, 자신의 친아들을 아낌없이 우리 모두를 위하여 포기하신 자비로운 하나님으로 나타나신다(로마서 8장32절). 하나님의 엄위하심이나 그의 무서운 심판을-어떻게 홍수로 온땅을 파괴하셨는지, 어떻게 소돔을 멸망시켰는지 등을 ‘사색하는 일’은 극히 위험하다. 이런 사색은 사람들을 절망의 벼랑에 이르게 하고 내가 앞에서 보여준 대로, 사람들을 철저한 파멸에 던진다.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우리”라는 이 말은 양쪽에 다 적용하여서, “우리 하나님”과 “우리 아버지”를 뜻하도록 하여야 한다. 이때 그리스도의 아버지와 우리의 아버지는 하나요 같은 분이 되신다. 그래서 요한복음 20:17에서 그리스도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은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고,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러하시다. 이것이 사도적 발언 형식이며 바울 자신의 표현이다. 바울은 조심스럽게 선택한 말로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들은 그 정열에 있어서 매우 적합하고 격정적인 것이다.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 찌어다. 아멘.” 1장 5절 강해

글을 쓸 때 히브리인들은 찬양과 감사를 혼합한다. 이는 히브리인들과 사도들이 지켜온 관습으로, 바울에게서도 매우 흔하다. 주님의 이름은 큰 존경을 가지고 다루어야 하며, 일종의 예배 형식인 찬양과 감사 없이는 절대로 말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세속에서는 왕이나 군주의 이름을 말할 때 보기 좋은 몸짓, 존경, 무릎 꿇음 등의 풍습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에 관하여 말할 때에는 더욱 우리 마음의 무릎을 꿇는 일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고마움과 최대의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해야 한다.



cli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