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 갈라디아서 강해 1장 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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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신앙 연구가들/루터

2011.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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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갈라디아서 강해 1장 6절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불러 주신 분에게서, 여러분이 그렇게도 빨리 떠나 다른 복음으로 넘어가는 데는,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갈라디아서 1장6절)


여기서 거짓 사도들에 의해 낙오되고 미혹 당한 갈라디아 사람들을 사도 바울이 어떻게 처리하는지 그 예술과 기술을 엿볼 수 있다. 그는 거칠고 엄격한 말로 공격하지 않는다. 그는 어버이같이 말한다. 인내를 가지고 그들의 낙오를 참아줄 분 아니라 어느 정도 용납까지 한다. 그는 또 그들에게 어머니 같은 애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부드럽게, 그러면서도 목적에 매우 합당한 말을 가지고 그들을 꾸짖는 형식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그들의 배반에 대해서는 심히 맹렬한 분노를 한다. 배반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비난하면서 서신 첫머리에서부터 잘못을 향하여 분을 터트린다.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찌어다”(갈라디아서 1장9절) 나중에 5장에서는 정죄로 그들을 위협한다. “그러나 여러분을 교란시키는 사람은, 누구든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12절) 이것은 육적인 의나 율법의 의를 반대하는 무서운 말이다. 이것은 육적인 의나 율법의 의를 반대하는 무서운 말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을 무례하게 다룰 수도 있었을 것이며, 거친 말로 저들을 공공연하게 비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너희들의 변질에 천벌이 있으라! 나는 너희를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너희의 감사치 않음이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나는 너희에게 분노한다” 또는 그들을 향하여 비극적으로 부르짖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 이 세대여 이 무슨 짓들이냐!

그러나 넘어진 자들을 일으키며 아버지 같은 돌봄으로 그들의 잘못에서 다시 복음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므로, 그는 특히 이 맨 처음의 사나운 말에서 물러서서 풍성한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가지고 그들에게 말한다. 상처받은 사람들을 치료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날카롭고 고통스러운 반창고를 상처에 붙여서 상처를 악화시키는 것은 온당치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보다 더 다정하고 부드러운 말들을 찾지 못하였을 것이다. “나는 이상히 여기노라” 이 말로 그는 자신의 마음이 슬프다는 것과 그들이 바울에게서 떨어져 나간 일이 그를 슬프게 하였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자기 규범에 따라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이 규범은 6장에서 제시된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갈라디아서 6장1절) 우리도 이 예를 따라야 한다. 미혹당한 어리석은 제자들을 향하여, 부모가 자녀들에게서 느끼는 것과 같이 우리가 느끼고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들이 우리의 아버지같은 열정과 어머니 같은 느낌을 보도록 하고, 우리가 그들의 구원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들이 우리의 아버지 같은 열정과 어머니 같은 느낌을 보도록 하고, 우리가 그들의 구원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나 마귀와 그의 종들, 그리고 빗나가거나 종파주의의 창시자들을 만날 때에는 사도들의 예를 따라야만 한다. 성급하고 자긍하고 날카로워야 하며, 할 수 있는데 까지 날카롭고 거칠게 그들의 속임수에 대해 모질고 무시하며 정죄하여야 한다. 어린아이가 개에게 물렸을 때 부모는, 개는 쫓아내고 우는 아이는 다정한 말로 위로하고 달랜다. 바울은 넘어져서 괴로워하는 양심을 대하는데 놀라운 기술을 가지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악인은 폭군과 같이 난폭하며, 호통을 치며, 양심에 비참과 고통을 느끼는 자들을 향하여 저주한다.


“이 같이 속히”

사람이 얼마나 쉽게 믿음에 낙오하는지에 대해 바울이 한탄하는 것을 본다. 그는 같은 기분으로 다른 구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을 경고한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린도전서 10장12절) 우리 자신의 경험이 확고부동한 믿음을 얻고 지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주님 앞에 완전한 백성을 제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날마다 증명하고 있다. 사람이 10년을 애쓰고 나서야 비로서 작은 교회 하나를 바르게 질서 잡을 수 있다. 일단 질서가 잡혀다 싶어도, 말씀을 진실하게 설교하는 사람을 중상하고 학대할 줄만 아는 광신자가 온다. 그리고 한순간에 모든 것을 뒤집어 엎는다! 그런 난폭한 행위에 요동치 않을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비텐베르크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다운 형태를 확보하였다. 우리들은 말씀을 순수하게 가르치며 성례전을 올바로 사용하고 있다. 모든 사회 계층을 위하여 권하고 기도한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것이 잘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어떤 광신자라도 이 복된 복음의 발전을 그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여러 해 동안 힘들려 건설한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뒤집어 엎을 수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그릇으로 택하신(사도행전 9장15절) 바울에게 생긴 일이다. 큰 수고와 고생으로 그는 갈라디아 교회를 얻었다. 그러나 그가 더난지 얼마 안되어 거짓 교사들이 그 교회들을 뒤덮었다. 이 서신과 그의 다른 서신들이 이를 증거하고 있다. 현재 매우 연약하고 비천하며 사탄의 속임수에 의해 심한 공격을 받고 있기 때문에, 여러 해 동안 밤과 낮으로 애써 건설한 것을 한 사람의 광신자가 짧은 시간에 파괴하여 완전히 원점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우리는 이것을 오늘날 냉혹한 경험을 통하여 배우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교회는 매우 무너지기 쉽고 연약하며, 매우 쉽게 뒤집어지기 때문에, 이 광신자들에 대항하여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설교를 두 번 정도 듣고 성경을 한 두 장 읽으면 스스로 모든 사람의 권위에 대항하여 갑자기 모든 학생과 교사들의 자칭 대가가 된다.

여러분은 오늘날 , 유혹의 시험을 받지 못하여 하나님 두려워하기를 배우지 못하고 은혜의 맛을 보지 못한 자들에게서 그와 같은 예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있지도 않은 채 그들은 그들이 좋은 대로 가르치며 일반이 그럴듯하게 생각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나 가르친다. 신기한 무엇을 들으려고 열망하는 무지한 대중은 그들에게 곧 애착을 느낀다. 실제로 믿음의 교리를 이해하며 유혹의 시험을 당한 사람조차도 그들에 의해 잘못 인도된다.

많은 노력으로 얻은 교회들이 그토록 빨리 그리고 쉽게 뒤엎어진 다는 것을 바울은 자기의 경험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디에서나 횡행하는 마귀를 대항하여,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베드로전서 5장 8절) 우리가 잠을 자는 동안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서 가라지를 심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마태복음 13장25절) 목사들이 언제나 정신을 차려 지키고 부지런하여도 그리스도의 무리는 사탄의 위협을 받는다.

바울은 온갖 고생을 다하여 갈라디아에 교회를 세웠다. 그런데 그가 문밖으로 발을 옮겨 놓자마자 거짓 사도들이 일부 교회들을 뒤집어엎었다. 그리고 이 같은 부패가 갈라디아 교회에 엄청난 파멸을 가져왔다. 이 손실은 매우 갑작스럽고 막대한 것이어서 사도에게는 의심할 없이 죽음 자체보다 더 혹독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마태복음 26장 41절) 첫째로 각자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둘째로 성직자 자신뿐 아니라 전체 교회를 위해서 경계해야 한다.


(너희는) 떠나

여기서 바울은 다시금 날카롭지 않고 매우 부드러운 말을 사용한다.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너희가 그렇게 빨리 변절하고, 불순종하고, 변덕스럽고, 변하기 잘하고, 감사할 줄도 모르고 그리고 빨리 떠나니 나는 놀랬다.” 오히려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너희는 완전히 수동적이다. 해로운 일을 한 것이 아니고 해를 당하였기 때문이다.”그러므로 뒤로 미끄러진 자들을 다시 불러내기 위해, 그는 떠난 사람들보다 오히려 떠나게 한 자들을 비난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는 주저한듯 그들이 떠난 것을 비난할 때 약간의 불평을 한다. “그래, 나는 너희를 아버지같은 느낌으로 품에 안아준다.. 너희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거짓 사도들의 잘못으로 너희가 떠난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건전한 교리의 힘으로 좀 더 성숙하기를 바란다. 너희는 말씀을 충분히 강하게 잡고 있지 못했다. 말씀에 충분히 깊게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가벼운 바람이 너희를 그리도 속히 옮겨갔다.”

제롬은 생각하기를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라는 이름을 ”타락한” “떠내려간”에 해당하는 “갈라”를 인용하여 해석하려는 것 같다고 하였다. 즉 너희는 참으로 이름과 실제에 있어서 갈라디아 사람들이다 즉 너희는 옮겨갔다”

인간의 암흑시대부터 복음의 빛이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을 때,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설교를 들었다. 그러나 종교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말슴의 큰 성장에 의해 성공적으로 개혁된 지금에 와서, 많은 사람들이 분파주의에 연합하여 파멸에 이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무시할 뿐 아니라 거의 모든 배움을 무시한다. 분명히 이들은 저 무지한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비교할 만하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

이 구절은 애매하다. 그러므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그리스도로부터” 둘째는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너희를 부르신 그 분(즉 하나님)으로 부터나는 앞에 것을 선호한다. 방금 전에 바울이 그리스도를, 현재의 악한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시는 분이요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하게 은혜와 평화를 주신 분이라고 하였기에, 여기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부르시는 분’으로 소개하는 것이 내게는 옳게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인(印)치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을 인(印)치려는 것이 바울의 특별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그리스도로부터”라고 한 이 말은 또 큰 힘을 가지고 있으며 반대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마치 다음과 같이 발하는 것 같다. “아하, 너희는 얼마나 쉬이 스스로 그리스도로부터 물러나 다른 곳으로 이끌려 갔는가! 모세처럼 율법, 공로, 죄, 분노, 정죄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순전한 은혜로 너희를 부른 너희가!” 오늘 우리도 바울과 함게 개탄한다. 인간의 눈멀고 고집스러움이 너무도 지독하여 아무도 은혜와 구원의 교리를 기쁘께 받으려 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설혹 누가 그것을 받아들인다 해도 얼마 안 가서 떨어져 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리와 함께, 영과 육 모두에 모든 유익, 즉 죄 사함, 마음의 평화, 그리고 영생이 온다. 그리고 모든 것에 관한 빛과 건전한 판단을 가져다준다. 이 교리는 하나님에 의해 제정되고 설립된 세속 정부, 가정, 일상생활을 승인하고 후원한다. 이 교리는 모든 잘못, 죄, 사망, 소란, 혼돈 등의 교리를 근절한다. 간단히 말하면 마귀의 모든 일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일을 우리에게 열어준다. 영원한 위로, 은혜, 구원, 그리고 영생에 관한 이 말씀과 이 복음을 몹시 미워할 때, 그리고 사탄의 분노를 가지고 이 교리를 모독하고 핍박할 때 세상은 무엇을 하려고 미쳐 있는 것인가?

앞서 바울은 이 현 세계를 “악하다”고 말하였다. 순전히 악하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인정하여야 할 것인데 짓궂게도 거부하고 박해한다. 세상은 빛, 진리, 그리고 그리스도의 왕궁을 사랑하기 보다는 어두움, 오류, 마귀의 왕궁을 더 사랑한다.(요한복음 3장19절) 실수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악마의 극단적인 악의를 통하여 그리한다. 모든 인간의 죄를 위하여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신 그리스도는 아무 것도 얻으신 것이 없고 다만 그를 모독하는 일, 그의 유익한 말씀을 박해하는 일,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그를 다시 못 박는 일만 얻으셨다. 그러므로 세상은 요한복음서 1장5절에 기록된 대로 어두운 데 거할 뿐 아니라 어두움 자체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말을 강조한다. “너희를 부르신 그리스도로 부터”그러면서도 신비롭게도 반대의 것을 제안한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나의 선포는 모세의 딱딱한 율법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너희를 멍에 아래 있는 노예가 되어야한다고 가르치지도 않았다. 나는 너희에게 순전한 은혜와 자유를 가르쳤다. 그리스도께서, 모세 아래 노예가 되기보다는 그리스도 아래서 너희들을 자유인이 되게 하는 은혜로 너희를 불쌍히 여겨 부르셨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너희의 거짓 사도들을 통하여 너희는 지금 모세의 제자들이 되었다. 그들이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를 불렀기 때문이다. 은혜로 부르지 아니하고 분노, 하나님의 증오, 죄, 그리고 사망으로 불렀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부르실 때에 은혜와 구원을 가져온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율법에서 복음으로, 분노에서 은혜로, 죄에서 의로, 그리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시기 때문이다. 너희 같으면 너희 자신이 은혜와 생명이 넘치는 살아 있는 기초를 떠나서 다른 방향으로 그렇게 빨리, 그리고 그 따위의 것에 쉽게 떠내려가도록 허락하겠는가?” 이제 하나님의 율법 자체를 가지고 모세가 사람들을 하나님의 분노와 죄에로 부른다면, 교황은 그 자신의 전통으로 사람들을 어디에서 부른다고 상상하겠는가?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아버지가 부르신다고 하는 해석도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인용하는 앞서의 해석이, 괴로워하는 양심을 위로하는 데 더 호감이 가며 더 합당한 것이다.



"다른 복음 "

여기서는 마귀의 속임수와 교활함을 배우자. 이단자는 “오류자 또는 마귀”라는 딱지를 붙이고 오지 않는다. 마귀 자신은 마귀의 형식으로 오지 않는다. 특히 “백색 마귀”로 오지 않는다. 사실 공공연한 악행을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검은 마귀들도 그들이 행하거나 행하려고 의도하는 행위를 덮개로 덮어서 준비한다. 살인자는 그의 격분 속에서도 살인을, 사실이 그러한 만큼 크고 무서운 죄로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살인을 덮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호색가, 강도, 탐내는 자, 술고래와 같은 사람들은 우쭐대는 방편과 그들의 죄를 덮어 버리는 방편을 가지고 있다. 그런 식으로 검은 마귀는 항상 위장을 하고 나타나며 자기의 모든 일과 책략을 덮어 가지고 나타난다. 사탄이 백색으로 나타나는 영적인 영역에서는 천사나 하나님 자신을 가장하고 나타난다. 거기서 사탄은 매우 교활한 겉치레와 놀라운 비결을 가지고 나타난다. 그는 그의 치명적인 독극물을 은혜의 교리,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인양 팔러 다닌다. 이 때문에 바울은 거짓 사도들과 사탄의 종들의 교리를 “다른 복음”이라 하여, “복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식으로 풍자를 쓴다. “이제 너희 갈라디아 사람들은 다른 복음 전도자들과 다른 복음을 가지고 있다. 지금 너희는 나의 복음을 멸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너희의 존경을 잃게 하였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이 거짓 사도들이 갈라디아 사람들 중에 있는 바울의 복음을 정죄한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확실히 바울이 시작은 잘 하였다. 그러나 시작만 잘해서 충분한 것은 아니다. 뒤따라야 할 장엄한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5장1절에서 말한 것과 같다. “그리스도를 믿거나 세례를 받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 왜냐 하면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이 말이 뜻하는 것은 ‘그리스도는 집짓기를 시작한 훌륭한 일꾼이다. 그러나 완성하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모세가 그것을 완성해야만 한다’ 고 말하는 것과 같다.

최근에는 분파주의자들이 우리를 공개적으로 정죄할 수 없을 때 대신 이렇게 말한다. “이 루터파 사람들은 비겁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진리를 솔직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말하고 이로부터의 결과를 얻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 결과를 얻어야만 한다. 확실히 그들은 기초를 놓았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기초로 놓았다 그러나 시작, 중간, 그리고 끝이 함께 있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것을 성취하는 임무를 맡기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남겨 두셨다.” 그리하여 이 고집이 세고 사탄에 잡힌 사람들은 그들의 악한 선포를 영화롭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가장하고 그 아래서 그들의 파괴 사업이 진행되도록 하고 있다. 마귀는 그의 종들이 불구가 되거나 검게 되기를 원치 않고 아름답고 흰색이 되기를 원한다. 그런 외모를 옷 입기 위하여 그는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을 진리와 함께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과 학께 말하고 장식한다. 이것이 저 친숙한 독일 잠언의 원천이다. ‘모든 불행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작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마귀의 특기임을 배우자. 만일 그가 박해와 파괴로 손해를 입힐 수 없을 때에는, 바로잡거나 교화하는 일을 가장하고 행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오늘날 그는 힘과 검을 가지고 우리를 박해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한 번 길을 비켜주면 그는 복음을 부패하게 할 뿐 아니라 그 흔적을 없애 버린다. 지금까지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우리의 교리가 거룩하고 신성하다고 고백한 많은 사람들을 그가 죽였으나, 저들의 피로 교회는 파괴되지 않고 오히려 양식을 받았다. 그런 방법으로는 성공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거짓 교사들을 일으킨다. 그들은 처음에는 우리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우리의 의견과 일치하게 설교한다. 그러나 후에는, 우리들이 시작은 잘 하였으나 더 장대한 일들은 지금까지 남겨 두었다는 등으로 말한다. 이런 방식으로 마귀는 우측과 좌측에서 복음의 발전을 방해한다. 박해와 파괴로 좌측에서 행하는 것보다 교화와 수정으로 우측에서 더 많이 행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쉬지 말고 기도하며( 데살로니가전서 5장17절), 읽고,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굳게 붙잡음으로, 마귀가 좌우에서 우리를 공격하는 책략을 이겨야 한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에베소서 6장12절).


마르틴 루터/"갈라디아서"강해중에서/루터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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