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철원-성령에대해 바른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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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신앙 연구가들/서철원

2009.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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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순절주의 성령론

 


 성령론은 정교회 신학자인 니콜라이 베다에프의 말을 빌자면 “마지막 탐구되지 않은 신학의 역역이다.” 칼바르트는 성령신학을 기독교 신학의 미래라고 하였다.1) 그런 측면에서 성령론에 대한 다양한 면을 살펴 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비록 학자는 아니지만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목회하고 있는 입장에서 성령론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바른 이해를 갖는 것은 복된 작업이라 생각한다.
 

이 번 발제는 개혁과 부흥 컨퍼런스의 주제에 맞게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그리고 성령의 인침과 은사들에 대하여 살펴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개혁교회의 성령 세례는 오순절운동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도널드 메크레오드가 마틴 로이드존스의 성령론과 비교하여 개혁주의 성령론을 논의하였다면 서철원 교수는 오순절주의와 비교하여 개혁교회 성령론을 제시하고 있다.


서철원 교수는 성령론이 오직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그리스도 신학으로 개진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성령을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임을 말하는 것이다. 특별히 성령 세례와의 관계에서 오순절주의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의 강림간의 연결이 바로 이해하지 못해서 생긴 오류라고 하였다. 즉 예수 믿음과 상관없는 세례 받음에서 성령세례의 문제가 발생하였다고 보는 것이다.2)


성령운동에 대한 공교회는 초기부터 우려와 불안 회의와 경계로 대하였다. 2세기 중엽의 몬타누스의 성령부흥운동과 종교 개혁시에 나타난 광신적 성령운동 모두 성경의 가르침보다 내적인 체험을 강조했다. 즉 성령의 직접적인 계시와 조명을 강조하므로 교회의 질타를 받고 이단으로 정죄되었다.3) 이러한 교회사의 역사는 오순절 운동이 초기에 크게 배척을 당하게 된 이유이다.


오순절 운동이 불러일으킨 신학적 논의는 바로 성령세례이다. 성령세례를 중생 후에 받는 별도의 과정이고 중생이나 교회 가입과 일치 시킬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오순절주의의 성령이해는 성령 자체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강림의 근거인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서 시작함으로 교정할 수 있다.


1) 오순절 운동의 역사


 서철원교수는 오순절 운동과 오순절 신학의 역사를 구분하여 설명한다. 그것은 오순절운동은 오순절시 예루살렘 교회처럼 성령세례 받고 그 표로 방언해야 한다는 신학으로 시작하였다. 즉 오순절 운동은 방언 받는 것을 추구하였다.4) 방언을 받아야 성령 세례를 받았음을 증거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운동은 1900년 미국의 감리교 목사인 찰스 파함에게서 시작하여 1906년 그의 제자인 흑인 감리교 목사인 윌림엄 씨모어르 통하여 전파 되었다. 이에 1914년 하나님의 성회라는 교단을 형성하였고, 1960년대까지 로마 카톨릭을 비롯하여 전 세계로 확장되었다.
 

2) 오순절 신학의 역사


 오순절 신학은 처음부터 성령을 추구하였다.5) 오순절 신학은 알미니안 신학과 웨슬리의 성화교리의 융합이다. 이 둘 다 체험과 인간주도성이 강조됨으로 인하여 교리보다 경험을 규범으로 삼는다.6) 이러한 오순절의 신학은 웨슬리의 완전 성화의 가르침에서 작하였다. 웨슬리는 칭의가 성화에 의하여 루어진다고 보았다.

 

특별히 완전 성화는 인간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이 땅에서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웨슬리의 완전 성화는 믿음과 성화에 있어서 인간의 주도성이 강조됨으로 자연히 경험이 강조되고 경험이 신앙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7) 물론 웨슬리는 완전 성화에 있어서 성령세례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웨슬리의 인간 주도적 경험주위 신학은 19세기 초엽 미국의 부흥운동을 주도하였던 찰스피니에게 이어진다. 찰스피니는 장로교도였지만 웨슬리의 신학을 받아들였다. 그는 감정보다도 자유의지와 지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인간 주도적 경험은 더욱 분명하였다. 찰스 피니는 법정적 칭의를 부정하였다. 오히려 찰스 피니의 자연적 능력으로 이 땅에서 완전 성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보고 바울은 증거로 논증하였다.8)
 

이러한 웨슬리와 찰스 피니의 신학을 요한 플릿처가 수정 보완하였2다. 그는 완전성화가 이루어지려면 성령세례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한 것이다. 이로써 오순절 운동이 바로 가능하게 된 것이다. 오순절파의 기본 교리는 성령 세례를 반드시 경험해야하며 그 경험은 방언으로 확증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찰스 피니의 후계자인 D.L 무디에게 이어졌다. 무디는 성령세례를 강조하여 이는 개종과 구분되는 경험으로 봉사를 위해서 오순절적인 능력을 입음이라고 전파하였다. 이 운동은 영국의 케스윅 운동을 열게 하였다. 이러한 무디의 강조는 그의 동역자인 R.A 토레이에 의하여 확정되었다. 이러한 신학적 흐름으로 오순절은 중생,성령 세례, 신유 그리고 긴박한 재림의 4대 교리가 세워진 것이다.9)


결론적으로 오순절주의 근본신학은 성령세례는 중생 곧 구원 다음의 제2의경험이고 방언을 말함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성령 세례의 경험은 은혜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 편에서 적극적인 노력의 결과이다.10)


 2. 오순절 성령 강림의 이해
 

 이제 오순절 성령강림의 문제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서교수는 오순절 성령 강림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있다고 본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다 성령을 받게 작정되었고 약속되었다(요7:37-39). 그러므로 예수 믿는 자는 다 약속된 성령을 받게 되어 있으며(갈3:14).

 

성령을 받는 것은 믿음으로 이고 믿음외의 다른 종교적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으로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율법을 지켜서는 이룰 수 없는 의를 이뤄야 하는데 그 의의 성취가 바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다.11) 결국 예수 그릿도의 십자가의 완전한 제사가 죄를 완전히 제거하고 해결하였으므로 인류가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백성 됨의 표로 성령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서교수는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 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가 이루어짐을 말한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가 성령으로 이루어진 사건을 첫 아담(창6:3)에게서 보여 졌고, 출애굽 후에 이스라엘과 언약을 체결함으로 임재를 확실하게 하였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성소를 짓고 거주하셨다.

 

이렇게 거주하심이 바로 성령의 임재이다. 이 것이 성령의 임재임을 알 수 있는 것은 스데반의 설교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이 광야 중에서 성령을 거스렸다고(행7:5)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구약의 임재는 성도 각자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었다. 성도 각자에게 임하는 것은 신약교회에 와서 이루어진 것이다.”12)
 

그런데 성도 각자에게 임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러한 그리스도의 구속 받은 백성들과 함께 하기 위하여 성령이 오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오신 성령은 오직 보혜사로 왔다는 것이다. 보혜사의 의미가 백성들과 함께 있고 백성과 함께 거하고 백성들 각자 안에 내주하시는 자를 말한다. 요일 2:1에는 보혜사가 변호사로 쓰여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앞에 범죄 한 그리스도인들을 변호함을 지시하지만 요한복음의 보혜사는 백성과 함께 있고 그들을 인도하며 그들과 함께 거하는 자이다(요14:16-18)


서 교수는 바로 요한복음의 관점을 더 우선시 하여 성령은 보혜사로 백성들과 함께 하고 그들과 함께 거하고 그들 안에 내주하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이다. 즉 성령 강림의 근본 목적은 백성들과 함께 거하고 그들 안에 내주하심이며, 성령의 내주가 그의 사역의 일차적 목표라는 것이다.13) 그러나 오순절파는 성령의 보혜사로서의 직임은 별로 고려하지 않고 능력 주시는 면만을 강조한다는 것이다.14)


이러한 성령 강림의 목적이 백성들 안에 내주하심이기에 한번 오신 성령은 백성을 떠났다가 반복적으로 다시오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보혜사의 직임이 백성들과 함께 있고 그 들과 함께 거하는 것이므로 제자들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다(요14:6)15) 즉, 한번 오신 성령은 다시 떠나시지 않고 반복되는 것은 오순절 성령의 오심은 종말론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16) 만약 반복되면 그것은 임시적인 것이지 종말론적인 것이 아니다.17)


이렇듯 서교수는 성령 강림의 목적을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에 두고 있음이 오순절파와는 분명히 다른 관점이며 성령 강림을 구속의 완성과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종말론적 사건으로 보는 견해가 또한 차영배교수를 비롯한 여타의 분들과 다른 관점이라 할 수 있다.


3. 성령 세례


1) 예수의 성령 세례


 성령 세례에 대한 부분은 참으로 분분하다. 오늘날 성령론의 근본 문제가 바로 성령 세례에 있기 때문이다. 성령 세례라는 말은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성령으로 받는 세례, 혹은 성령으로 주시는 세례로 나타나고 있다. 특별히 신약에서 성령 세례가 처음 등장한 것은 세례 요한의 메시야 선포에서 비롯되었다.1) 이러한 사실로 인하여 예수의 성령 세례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에 의하여 메시야 곧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선포되었다(요 1:34).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됨의 표는 그가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고 성령으로 세례 주는 자라는데서 성립한다. 바로 이것이 메시야의 전령인 세례 요한의 선포이다.(마 3:11, 막 1:8, 눅 3:16, 요 1:33)2)


이렇게 예수는 전령인 세례 요한에 의해 세례 받을 때 성령이 강림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복음서 저자들은 성령으로 세례 받았다고 하지 않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예수에게 임하였다고 기록한다. (마 3:16, 막 1:10, 눅 3:22, 요 1:33).


서 교수는 이 사실에 주목하여 예수의 성령 세례는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음이라고 해야 더 타당하다고 강조한다. 즉 예수의 성령 받음은 메시야로서의 임직식이었으며 이 같은 사실이 하늘의 음성으로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선언이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리니’(마 3:17, 막 1:11, 눅 3:22) ‘내 사랑하는 아들’이 메시야로서의 공식 선언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하였다.(요 1:34). 결국 예수는 성령으로 기름 부음 받음으로 메시야로 임직되고 선포되었다.3)


서 교수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 받아 메시야로 세워짐으로 그의 나라에 속한 자들이 다 성령 받을 것임을 예시하였다고 본다.(요 7:37~39). 이렇듯 예수의 성령 받음이 기름 부음 받음이므로 요한의 백성들이 성령 받는 것도 기름 부음 받음으로 표기하였다(요일 2:20)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보다 성령 받음으로 표기해야 올바른 이해로 본다.


2) 성령 세례는 성령 받음이다.


성령세례에 대하여 오순절파는 구원받은 이후에 오는 또 다른 표라고 말한다. 이것이 오순절 성령론의 중심이다. 이에 대하여 개혁교회는 성령세례에 대하여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서교수는 성령 세례는 예수의 메시야의 임직에 합당히 적용되고 백성들의 성령 받음은 성령 받음, 성령 부어주심, 성령 충만으로 표기되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베드로의 설교에서 성령 세례를 약속하지 않고 예수 믿음으로 성령 받음을 약속하였음을 그 예로 증거한다(행 2:38).4) 결국 성령 강림 후에는 더 이상 성령 세례는 적용되지 안했고 주 예수의 약속을 회상하여 한번 반복함밖에 없다는 것이다(행 11:16). 서교수는 성령 강림 이후에는 성령 세례가 더 이상 사용되지 안했고 성령 받음과 성령의 충만, 성령의 내주, 성령을 마심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5)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는 성령세례가 더 이상 언급되지 않고 다 성령 받음으로 족한 것이다. 사마리아교회(행8:15-17), 에디오피아 영왕 간다게의 내시(행8:26-39),고넬료와 로마인들(행10:34-48), 비시디아 안디옥 교회(행13:13-48)빌립보 교회(행16:12-15),데살로니가교회(행17:1-4), 고린도교회(행18:5-8) 모두 예수믿음으로 성령 받은 후에 물 세례 받음이 이방 교회에 이루어진 교회 구성 방식이다.

 

 이러한 논증에 따라 획증하여 말하기를 “예수 믿을 때 받는 성령 받음이 성령 세례이고 예수 믿은 후에 성령 세례는 사도행전에 없다.”6)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한 논증이 오순절파와 개혁교회의 차이이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서교수의 분명한 입장을 살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1) 사마리아 교회는 성령 세례를 받았는가?(행8:4-25)
 

오순절파는 이 본문이 중생 후 성령 세례 받는 도식이 가장 잘 성립하는 본문으로 삼는다.7) 이에 대하여 서교수는 “사마리아인들은 빌립의 전도를 들었다. 그러나 말도 들었지만 빌립이 행하는 표적을 보고 그의 말을 따르다가(행8:6) 귀신들이 나가고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므로 큰 기쁨을 얻어(행8:7-8)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하는 빌립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

 

.(행8:12) 사마리아인들은 주 예수 이름으로 세례 받았으니 예수를 믿었다고 할 수 있으나 성령이 아무에게도 내리시지 안했으니(행8:16) 그들이 바로 예수 믿었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행8:12에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하는 빌립을 그들이 믿었더라’고 한 것을 보면 주 예수를 믿었다기보다는 빌립을 더 믿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전에 마술사 시몬을 믿은 것처럼 이번에는 그보다 더 큰 기적들을 행하는 빌립을 믿었다고 해야 한다. 빌립은 믿은 사실은 마술사 시몬의 믿음과 세례에서도 보여 진다. 다 믿어도 시몬은 안 믿을 줄 알았는데 자기보다 더 큰 기적을 행하는 빌립을 믿고 세례를 받았음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믿을 수 없는 시몬이 믿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시몬 자신까지도’ 믿고 세례를 받았다. 시몬과 사마리아인들이 믿고 세례 받았음의 표현이 동일하다. 그러나 시몬은 실제로는 변화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인들의 믿음도 바른 믿음이라고 보기가 어렵다. 빌립의 기적들을 인해 그냥 미신적으로 믿은 기적 신앙이었고 실제로 예수 믿었다고 할 수 없다. 이것이 사마리아인들의 교회 가입에 사도들의 개입을 필요로 한다.”8)


 (2) 바울의 개종(행9:1-18)
 

오순절파는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중생하였고 3일후에 아나이아에 의해 세례 받으며 성령을 받았으니 중생후 성령 세례 도식이 잘 성립하는 본문으로 삼는다. 그러나 오순절파와 달리 서교수는 본문은 중생 후 도식으로 볼 수없음을 분명히 한다.


“바울은 3일 전에 예수 믿고 그 후에 세례 받은 것이 아니고 세례 받음이 바로 신앙 고백이므로 그의 믿음은 주 예수를 처음 만나 후 세례 받기까지가 예수 믿음에로의 전이 과정이다. 철저한 율법주의자가 그의 율법종교의 체계를 부수고 그리스도의 구원에 이르는 투쟁이었다. 삼일 간 식음을 전폐한 것이(행9:9) 그 단적인 증거이다.......바울이 예수믿음에 이르러 주 예수가 하나님의 성육신이고 자기의 죄를 위해 어린양으로 죽었음을 이해하기 위해는 자기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일이 필요하다.

 

삼일간의 식음 전폐는 이 투쟁이었다. 부활자 예수의 현현은 바울에게 폭탄의 폭발이었다. 사울이 주 예수를 만나고 신앙 고백이 없었다. 예수를 주 예수라고 고백하며 신앙에 이른 것은 삼일 후 아나니아에 의해 세례 받을 때 이루어졌다(행9:17-18)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믿음과 성령 받음이 일치한다. 바울은 자기의 경험과 갈라디아 교회 설립시 경험에 근거하여 예수 믿음과 성령 받음 간에 아무런 시간적 거리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함으로(갈3:2-5) 이 진리를 분명히 한다.“9)


 (3) 고넬료와 로마인들의 개종(행10:1-48)
 

고넬료의 개종 사건도 은혜의 두 단계로 본다. 그러나 고넬료의 개종 사건 역시 은혜의 두 사건으로 볼 수 없다. 고넬료는 예수 복음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를 믿을 수 없고 중생은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고넬료도 예수 믿어 중생해야 할 사람이었다. 이것이 베드로를 청해서 복음을 들어야 할 이유이다.

 

(행10:3-8 30-33) 또 고넬료야 율법을 아는 경건한 개종자이었지만 그의 친족, 친지들과 군인들은 전혀 그런 것도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베드로가 주예수의 사역을 선포하는 중에 특히“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고 할 때 성령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셨다(행10:43-44)10)


그렇다면 로마인들이 방언하게 된 이유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성령 세례 받은 증거가 아닌가? 이에 대하여 서교수는 “로마인들로 방언하게 하므로(행10:46)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이후에는 이방인에게도 아무 구분을 두지 않고 그리스도의 교회에 편입시킴을 분명히 하였다........이방인 특히 로마인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교회에 편입시킨 줄을 유대인들은 전혀 기대하지 못하여 놀랐다. (행10:45)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편견과 좁은 마음을 전적으로 깨뜨리셨다. 방언을 말함은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백성 되었음을 유대인들에게 알리는 하나님의 신호이다.”11)


결국 고넬료와 로마인들의 개종 사건도 중생 후에 성령 받음이 아니라 예수 믿음과 성령 받음이 같은 사건이다.


 (4) 에베소 교회(행19:1-20)
 

에베소 교회의 문제만큼 오순절 파의 강력한 주장의 근거가 된다. 이에 대한 서교수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아볼로는 전도하여 12명을 세례 주었지만 요한의 세례밖에 알지 못하였으므로 (행18:25) 예수 이름으로 세례주어 예수 믿게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 12명은 세례요한의 제자로 남았다. 그들은 예수 믿어 성령을 받아야 할 사람으로 남았다. 예수 믿으면 성령 받음이 당연한데 그들은 예수 믿는 신앙 고백을 못하였으므로 믿는 자가 아니어서 성령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세례 받게 하여 성령을 받았다.

 

예수 믿을 때 성령 받음이 당연함을 바울의 놀란 질문에서 잘 알 수 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는 둘 다 시제가 단순과거여서 예수 믿음과 성령 받음이 동시적인 사건임을 분명히 한다.”12)


특별히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19:2)라는 헬라어 말씀을 흠정역이 ‘너희가 믿은 이후에’라고 말함으로 잘 못된 신학을 낳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둘 다 단순과거로서 예수 믿음과 성령 받음이 동시적인 사건이라는 것이다.13)


또한 에베소 1:13절의 말씀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에서 복음을 듣고 믿고 인침이 다 단순과거로 표시되었음을 강조한다.14) 즉 예수 믿음과 성령 받음이 동시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서교수는 성령세례는 곧 성령 받음이고 성령 세례와 중생은 별도의 단계가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것이 오순절파와 분명히 다른 개혁교회의 가르침으로 보고 있다.


4. 성령 받음


 성령 받음이 성령 세례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성령 받음은 어떻게 주어지는가? 성령 받음에 대한 찰스 피니의 주장은 인간의 주도적인 노력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개혁교회의 가르침은 이와는 분명하게 다름을 볼 수 있다. 서교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이루어져서 성령이 강림해서 교회에 계신 이후에는 종교적 노력으로 성령 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에 의해 선물로 받는다(행2:38).

 

도덕적 의를 이루는 종교적 노력들로 성령을 중생 후에 추후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중생 후에 기도와 회개, 전적인 죄의 제거와 완전한 순종 성령 신앙과 기다림과 간청으로 성령을 청구하여 성령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예수 믿으면 성령의 도움으로 중생하고 그 후에 도덕적 의를 이룸으로 성령을 추후적으로 받는다고 주창하는 알미니안 감리교회 지반에서나 가능하고 성경에는 그 자리가 없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이므로 하나님은 인간의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성령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 단지 믿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1)
 

결국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고 ,믿음으로 성령 받아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 것이다.(갈3:14) 성령 받는 것은 듣고 믿음으로 되는 것이지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다. 그러므로 구원 얻음과 성령 받음이 일치한다.2)(갈3:2) 이렇게 성령은 주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저주를 제거하시되 대신 저주가 되심으로 해소되었다. 따라서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결국 성령은 믿음으로 받고 율법을 지킴으로는 불가능하다.3) 성령 받음은 인간의 종교적 노력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만 받는 선물이다(행2:38)


 5. 성령 충만
 

 성령 충만에 대한 논란은 은사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근거이다. 그래서 성령 충만을 오순절 성령 강림의 반복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오순절 성령 세례의 반복이 아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 충만과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성령 충만은 성령 세례의 반복 형식이 아니고 성령의 지배 혹은 인도를 말한다. 성령은 인격적 영이시므로 사람들에게 오실 때 그들을 지배하고 다스리신다. 성령의 지배 혹은 인도가 성령 충만이다”4)


결국 성령 충만을 이야기 할 때 성령의 세례의 반복적인 의미가 아니라 성령의 지배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성령은 신자들에게 내주하실 때부터 그들을 지배하고 인도하신다. 이 인도는 죄와 악과 모든 더러움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거룩한 백성 되게 하는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은 선물로 주어졌지만 인격적 영으로 오셨으므로 신자들을 지배하고 다스리신다. 주권적으로 역사 하신다. 성령이 한 개인에게 오시면 믿음을 일으키고 회개케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믿음과 동시에 내주 한다”5)


그러므로 성령 충만을 성령의 통치를 받는 것이다. 엡5:18절의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의미는 성령의 전적인 통치를 받아들이고 그의 지배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에베소서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통치를 연관해서 전개하고 있는데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통치를 완전하게 이루는 통치의 영역 곧 충만으로 표현하였다.(엡1:23)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케 됨은 성령에 전적으로 순종하고 그에게 지배됨을 뜻한다. 성령으로 충만케 된 자는 전적으로 성령에 매이고 그에게 복종하는 자를 뜻한다.”6)


결국 성령으로 충만 받았다는 것은 성령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며 그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이렇게 성령으로 인도받으면 죄악의 행실들을 벗는다. 결국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성령의 인도가 성령의 지배이고, 그것이 바로 성령 충만 이다.


6. 성령의 은사


 성령론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은사이다. 특별히 한국 교회에서는 은사의 문제로 인하여 심한 대립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은사에 대한 이해와 대립되는 관점인 방언,예언,신유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한다.


첫째, 은사는 성령께서 모든 이들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받은 자들은 모두 은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령은 인류에게 오실 때 풍성한 은사들을 가지고 와서 사람들에게 배분하였다. 그러므로 예수 믿어 성령을 받은 자들은 다 은사를 받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자연적 은사의 복원이든지 새로운 은사의 수여이든지 간에 그리스도인은 다 은사를 받아 가지고 있다.(고전12:122)”1)


둘째, 은사는 몸의 지체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즉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몸의 지체들에게 주신 것이다.
“. 믿는 개별 그리스도인들에게 은사가 주어진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서 그들에게 주어졌다. 그것은 교회를 세우기 위한 목적에서 그렇게 작정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은사는 다 교회를 세우고 바로 자라 가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2)


그러므로 은사가 교회를 위하여 사용되지 않으면 오히려 교회를 혼란케 하고 교회를 하무는 일이 되는 것이다.


셋째, 은사들의 은혜의 표현이다. 넷째 은사들은 교회의 지체들에게 주어졌으므로 각각 상이한 은사를 받아 서로 보충하게 되어 있다 다섯째 은사들은 성령의 주권적 역사에 의해 몸의 지체들에게 배분되었다.(고전12:11) 여섯째 은사들은 다 초자연적으로 오지 않는다. 이미 주어진 재능들이 개발되고 활용되는 것도 성령의 은사이다.

 

 일곱째 성령의 선물은 종말론적 선물이어서 영원한 선물이지만 은사들은 임시적이다. 목적이 성취되면 그 기능이 중단한다. 여덟째 은사들은 다 성령에게서 유래하였다. 성령은 그의 사역을 완수하기 위해 은사들을 베푼다.3)


성경은 이러한 은사에 대하여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4) 성경에 기록된 은사를 보면 고전와 로마서 그리고 에베소서에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5)


 1) 방언

 방언 문제만큼 문제가 되는 것이 없다. 본질적으로 방언문제는 오순절 교회와 개혁교회의 근본적인 차이를 가져 왔기 때문이다.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오순절은 방언 받음을 중생 후 성령 세례 받음의 증거로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순절 교회와 고린도 교회에 일어났던 방언을 어떻게 보아야 하며 오늘날 방언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에 대하여  일단 방언은 성경의 기록이 완성된 후 교회사속에서 사라졌다가 20세기에 오순절 운동으로 방언문제가 나타났다는 것이다.6)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방언을 어떻게 볼 것인가? 분명한 사실을 방언은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주어 졌다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들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주어졌으므로 방언도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사용되어야 하고 이 일을 위해서는 통역이 필수적이다(고전 14:15-19). 그러나 통역 은사 받은 자들은 방언 은사 받은 자들보다 수가 적었다(고전14:5. 28)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가 사라질 수밖에 없다. 고린도 교회에 방언 자는 많았어도 통역 자는 매우 적었음을 알 수 있다. 방언이 통역되면 권면을 전하는 예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통역도 방언이 중단되면 자연히 소멸되게 되어 있다(고전 13:8).”7)


이와 같이 방언은 반드시 통역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통역되면 계시의 역할을 한 것이다. 하나님이 직접 주신 말씀이니 당연히 계시의 반열에 오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순절 운동의 방언도 통역되면 예언이 되어 새 계시가 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리하여 계시의 연속성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사도들이 받은 동일한 성령을 받았으므로 새 계시도 사도들을 통해서 온 계시와 동등한 계시가 진행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성경의 자기 증거와 합치하지 않는다. 계시는 신약 정경의 작성으로 완결된 후 더 이상 계속하지 않는다. 계시는 신약 성경의 작성으로 완결된 후 더 이상 계속하지 않는다.”8)


이렇게 볼 때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새 계시를 가져오는 방언은 신약의 기록의 종결로 완전히 폐지되었다. 고린도 교회의 방언도 임시적이었다. 그 때는 아직 서신들과 복음서들이 기록되기 전이었으므로 간혹 예언성 방언이 있었음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 방언에서의 통역은 아무런 예언을 가져오지 못하였고. 혹 통역을 통해 유익을 봤다면 그것은 성령의 조명이지 전혀 영감이 아니다. 방언은 성경의 종결로 폐지되었다(고전13:8-10).9)
 

그렇다면 오늘 날 일어나는 방언의 현상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은사인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만약 아니라면 오순절 운동의 부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하여 서 교수는 두 가지로 분명하게 대답한다.


첫째, 20세기 방언 현상은 성령으로부터 온 초자연적 은사라기보다 자연적 언어 기관의 특별한 반응이라고 해야 맞다. 자연적 능력이 환경과 분위기에 의해 방언이 형성되고 표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심리적인 열망에 의해 그와 같은 다른 방언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다른 종교들도 방언을 말하는데서 알 수 있다. 20세[기 오순절 운동과 은사 운동은 방언 받기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찬송하며 방언들과 접촉하여 그들의 영향권에 있으므로 방언은 계속 확산될 수 있었다. 방언을 열렬히 추구한 사람들이 참으로 많았다. 이와 같은 분위기와 열망이 방언 현상을 일으켰다고 보아야 한다.10)


둘째, 방언 받기 위해 열심히 기도한 것이 오순절 운동을 촉진시키고 지속시켰다. 기도를 많이 하므로 주와 깊이 교제하게 되어 영이 자라게 되었다. 방언이 영을 자라게 한 것이 아니라 방언 받기 위한 회개의 기도와 간구가 오순절 운동의 생명을 지속시켰다. 말씀에 기초하지 않은 기도의 열성이 탈선도 많이 일으켰지만 그 기도는 주께로 나아갔으므로 기도의 불이 오순절 운동을 지금까지 지속시켰다고 할 수 있다.11)


서 교수는 여기서 더 나아가서 방언 현상에 사탄의 역사도 있다고 까지 말하고 그러한 보고들이 있고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확인에 대한 이야기는 하고 있지 않다.12)


 2) 예언
 

 예언의 문제 역시 중요하다. 예언은 새로운 계시를 가져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시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오순절은 여전히 예언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예언은 이미 성경의 기록으로 폐지되었다는 것이다.13) 그렇다면 고린도서 기록된 예언의 은사는 무엇인가? 예언은 구약에서 선지자가 그리고 신약에서는 사도들이 그 직임을 감당하였다. 그렇다면 오늘 선지자와 예언의 은사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칼빈의 견해를 따른다.
 

“칼빈의 가르침대로 고린도 전서 12:28-29의 선지자는 미래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아니고 성경을 다루고 성경을 해석할 뿐 아니라 지혜롭게 그 시대의 요구에 맞도록 성경의 가르침을 적용하는 사람을 뜻한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성경의 탁월한 해석자들이요 교회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탁월한 지혜와 소질을 가지고서 교회의 요구에 응하는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다.

 

즉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리고 성경의 모든 가르침을 교회의 현재 요구에 바로 적용시키는 능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덕을 세우기 위해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완결 이후의 선지자나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해석하여 교회와 시대의 요구에 적용시키며 교회를 바로 세우는 역사를 하는 사람과 그런 말씀이다. 이 때는 영감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이 적용된다.”14)


 3) 신유
 

 신유에 대한 열심은 한국이 가장 앞선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신유의 은사가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하여 서 교수는 초대 교회 사도들의 은사와 오늘 날 은사와 구분하여 말한다.
 

초대 교회에 신유의 역사는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신유의 은사는 특별하고 임시적인 것이라 복음의 사역과 정착으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러한 예로 디모데의 질병을 위한 바울의 태도(딤전5:23)와 에바브로디도의 병이 죽을 만큼 중하였지만 고쳐주지 못하였다.(빌2:26-27) 그렇다면 초대 교회에 주신 치유의 은사는 무엇 때문인가?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사도들은 교회의 설립자이고 계시의 기관이며 복음 전파들이었으므로 상당기간 신유의 은사를 행하였다.(행3-10, 4:30-31, 6:8, 9:32-34, 37-42, 14:8-10, 19:10-12, 20:7-12, 28:8-9) 하나님은 교회를 바로 세우고 많은 사람들의 구원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사도들로 여러 기적과 신유의 은사를 행하게 하셨다.

 

그들은 기도와 안수로 그들의 사역 기간에 병을 고칠 수 있는 권능을 받았다. 그들은 복음 사역의 기간에는 신유 은사의 소유자로 일하여 기적을 행하고 병을 낫게 하였다. 그러나 복음 전파의 사역을 쉬거나 제한 당하고 있을 때는 이 은사를 활용하지 못하였다.(딤전 5:23) ......

 

신유 은사자는 사도들의 활동이 끝남과 함께 중지되었다 신유의 은사도 교회 설립과 복음의 확증을 위해 사도들에게 주어진 특별 은사임으로 사도들의 죽음으로 끝났다. 또 사도들에 의해 성경 기록이 완료됨으로 이 신유 은사의 지속적 행사도 계속 될 필요가 전혀 없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신유 은사의 소유자로서 치병의 능력을 행하는 것은 사도들을 끝으로 중단되었다.”15)


그렇다면 오늘 선교 지역에서 들려오는 신유의 보고는 무엇인가? 이것은 신유의 역사라기 보다는 기도의 응답이라 보는 것이 올바르다는 것이다.


“사도 시대 이후에는 믿음의 기도로 병들이 낫는 것이 허락되었다. 야고보 사도의 가르침대로 믿음과 기도로 신자들의 병이 나음을 얻게 된다.(약5:14-16) 그리스도인들의 간절한 기도를 따라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병을 고치신다. 지속적인 신유 은사의 행사는 더 이상 일정한 사람들에게 국한되지 않았다......기도를 통하여 많은 성도들의 기도를 통하여 초자연적 치유가 일어난다. 그러나 신유의 은사가 어떤 특정인들에게 주어져서 임의로 병을 고치고 지속적으로 그 은사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16)


이 상에서 보듯이 서철원 교수는 성령의 은사는 분명히 부정되지 않으나 은사에 대한 오순절 교회와 분명히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특별히 방언과 예언 그리고 신유의 논증은 오늘 한국 교회 대부분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특별히 신유의 문제가 신유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기도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의 측면은 분명히 되새겨야 할 부분이다. 그리고 개혁교회라 말하면서 이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혼돈하고 있는 이들에게 다시 한번 생각해야 부분이다.


7. 성령의 사역


 성령의 강림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서 교수는 성령의 사역을 크게 두 가지로 보고 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파 즉 전도하시는 일이다. 1) 예수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 그의 본업이며 이에 사람들을 동참시키는 것이다. 사람들을 통하여 성령이 예수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거룩한 백성을 만드시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성화자 성령이라 말한다.2) 즉 성령이 내주하시면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 육의 욕망들을 매일 죽임 당하게 하시며 거룩해 진다고 하였다. 결국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성화가 진행된다는 것이다.3) 결국 성령의 목표는 거룩한 백성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을 거룩한 영이라 호칭된다는 것이다.4)
 

 8. 결 론
 

 한국의 대표적인 개혁교회의 신학자인 서철원 교수의 성령론을 살펴보았다. 서 교수의 성령론은 전통적인 개혁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다수의 성령에 대한 이해와는 많은 부분 상충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것이 개혁교회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논의하여 적용하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교회 성장 논리에 빠져 덮어 버리고 만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교회의 강단에서도 개혁교회의 가르침을 바르게 설교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인기 영합주의나 혹은 성장주의에 교회의 좋은 유산을 폐기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이렇게 혼란스러움은 서 교수가 제기한 것처럼 바른 가르침에 벗어나서 보이기 위한 사역에 힘썼기 때문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서 교수의 입장은 어떤 면에서 매우 고답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가 한번이라도 있었는가? 과연 개혁교회의 가르침을 우직하게 교회에 적용한 적은 있었는가? 물론 본 발제에서 성령의 능력과 인침 그리고 성령과 그리스도의 관계등은 다루지 않았다.

 

특별히 성령의 사역에 대하야 폭넓게 다루지 못한 것이 아쉬움이 있지만 오늘날 문제가 되는 부분에 대하여 자세하게 살펴보려고 하였다. 자세한 것은 저자의 저서들을 곰꼼하게 읽어 보기 바란다. 다음의 말로 발제를 마치고자 한다.


“보냄 받은 성령은 진리의 영이기에 예수를 가르치고 해석하며 조명하고, 주 예수의 가르치신 것을 바로 이해하게하고 바로 해석하여 준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인격을 바로 알도록 가르치시고 조명하여 주는 일을 한다.5) (פרופסור  שְׂצְליוּ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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