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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철원-구약 성경 해석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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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신앙 연구가들/서철원

2009.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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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 해석이해


 

                                                     갈라디아서 3장

지금 바울이 율법으로 다시 돌아가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믿는 그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자들이 참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므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모든 복을 받을 자다. 그 복이 곧 구원이고 그 밖에 모든 것이 우리의 상속이 된다는 것이고 그리고 율법을 지킴으로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는다. 갈라디아서의 주제가 곧 믿음으로 성령받음이다. 갈라디아서가 믿음책이어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말할 수 있지만 바로 성령 받음이 구원얻음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성령을 받는다.


그리고 또 그 성령 받음이 하나님의 그 구원에 이를(이미 받았지만) 보장이 된다. 그런데 왜 믿음을 따르는 자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그 구원에 이르느냐? 그 이유는 율법으로가 아니고 하나님이 믿음으로 세상을 구원에 이르게 하시게 할 것임을 율법이 오기 430년 전에 이미 약속하셨다.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 것은 그냥 믿기만 하면 된다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주를 믿으면 구원에 이르기로 하나님께서 작정하셨는데 그것을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바로 아브라함이 세상의 주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음으로 의롭게 됐다. 그냥 창세기 15장에 있는대로 그냥 믿기만 해가지고 아들을 주신다고 해서 그것을 믿었으므로가 아니고 바로 이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것을 보면 많은 자손이 아브라함의 씨가 아니라 곧 그리스도의 씨다.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데 그 약속을,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렀는데 우리는 바로 율법을 지나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믿는 동일한 믿음을 가졌다. 한쪽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었고 우리는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는데 믿음에 있어서는 세상의 약속된 구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동일하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나서 믿음을 지키는 이방인들이 참 아브라함의 씨다. 그러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아브라함의 백성이다. 그리고 복을 받는다. 아브라함이 믿는 그 믿음으로 우리가 의에 이르고 성령을 받는다.


4장에 가면 우리가 믿음에 이른 아들이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의 영을 보내서 4:5-6에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다. 그러니까 구약의 책이 율법을 지킨 유대인들의 책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책이다. 그리스도의 교회 책이다. 회당이 책이 아니고 교회책이다. 구약이 말하는 근본 중심은 다 그리스도다. 바로 아브라함이 믿고 바란 그 그리스도를 구약 전체가 말한다. 일부분에 예언된 부분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아니고 구약 성경 전체가 그리스도를 이름이 없는데서도, 언급되지 않는데서도, 그리스도의 약속이 없는데서도, 전체로 다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리스도를 선포한다.


그러니까 구약이 다 교회책이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을 따라서 믿는 이방인 교회가 참 아브라함의 씨고 그러기 때문에 구약 전체로 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아브라함의 참 후손이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을 따라서 믿은 이방인 교회가 참 아브라함의 씨고 그러기 때문에 구약 전체로 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아브라함의 참 후손이다. 그러니까 구약이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의 책이 아니고 곧 그리스도의 교회 책이다.


구약은 단지 어느 예언된 부분,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말한 부분, 예표로 드러난 부분에서만 구약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다. 전체로 다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는데서도 다 그리스도를 말한다. 그러니까 구약이 그리스도의 책이다. 구약 해석에 있어서 제일 문제는 구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가 문제이다. 어떻게 해석해야 구약을 제일 바르게 해석하는 것이냐? 율법은 생활의 법으로 하고 율법주의로 사는 그 유대교의 책이냐 아니면 아브라함이 믿는 그 그리스도를 잘 믿는 교회의 책이냐? 바로 구약 전체가 다 그리스도를 목표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다.


구약은 그 자체로는 완결되지 않는 책이다. 늘 쉼이 없고, 늘 불안해서 참 안식이 없다. 목표를 향해서 늘 나아가고, 달리는 책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에게 와서 구약의 모든 것이 다 성취된다.


구약이 목표하는 목표점은 바로 그리스도다. 그리고 그에게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구원이 성취됐다. 그러니까 구약을 해석하는 문맥 그 표로는 바로 구약이 다 전체로 그리스도를 증거할 뿐만 아니라 구약의 모든 약속들이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됐다.


그러니까 구약을 읽을 때는 반드시 그리스도로 부터 읽어서ㅓ 이해해야 바른 이해다. 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하나님이 바로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을 이루셨다. 바로 동일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구원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에게서 모든 의를 이루셨다.


이 때는 구약에 임재하시고 신약에서 또 역사하사 그리스도에게서 모든 의를 이루셨다. 그리고 구약 유대 회당의 책이 아니라 교회책이다. 유대주의는 문자적인 이해로만 알았다. 그것이 바로 히브리서의 진리이다. 그런데 바울은 신약의 저자들은 구약을 인용해서 신약을 증명할 때 글자대로가 아니고 바로 구약의 약속이 구약의 문맥을 떠나서 신약에서 성취되므로 그 문맥이 이루어진 것으로 설명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신약과 구약이 한 성경으로 통일되어 있고 완전히 하나로 믿으니까 문제가 없는데 초대교회에 4복음서, 바울의 서신을 읽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어떻게 구약이 교회책이냐는 문제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였다.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의 책이 아니고 바로 율법을 지키는 그들을 지나서 교회의 책이라고 하는 것을 분면하고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러면 구약을 읽어보면 신약에 인용되어 이해한대로가 아니고 그 문맥에서 보면 문자주의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도록 보인다. 많은 경우에 그렇다.


그런데 구약에서 인용해서 신약에서 성취된 것을 말할 때 보면 일단 그 문맥에서 떼어다가 그리스도에게 맞춤으로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 것을 분명하게 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메시야적으로 해석된 70인경을 성경으로 택하고 자기들이 번역했던 70인경은 메시야적으로 해석됐다고 해서 그것을 버리고 유대교는 순전히 글자적으로 해석한 책에로 되돌아갔다.

 

그러면 어떤 배경에서 신약에 구약의 이해가 나왔는지를 생각해 보자. 초대교회가 형성될 당시에 구약은 어떻게 해석해야 되느냐? 해석학적인 과제로 구약이 놓여 있다. 실제로는 구약책이 해석한 후에 자기들 것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교회가 생겨날 때에는 주어져 있는 책은 다 희랍어로 번역된 구약성경 책이었다.


그렇지만 이 구약이 어떻게 신약의 교회의 책인지 이해하는 것은 해석학의 문제가 된다. 초대교회가 구약을 성경으로 사용하는데 첫째로, 랍비들의 성경해석인데 구약을 전체로 토라라고 해서 모세오경만이 아니라 구약 전체는 토라라고 해서 그 구약을 초시간적으로 영원히 타당한 율법들의 수집으로 보았다.

 

그러기 때문에 구약은 유대교가 갖고 있는 전통하고 유전하고 잘 조화되는 것으로 여겼다. 이게 랍비들의 성경해석이다. 그러니까 이걸 넘어서서 메시야적으로 해석해 가지고 그리스도에게로 갖다 붙일 것이 아니라 그렇게 붙임은 랍비들에게는 구약이 타당하지 못하다. 그러니까 구약이 그리스도와 상돤 없이 영구히 타당한 율법의 수집으로 보았다.


두번째로, 헬라 디아스포라 유대교는 구약을 순수한 철학과 윤리의 원천으로 이해하는 그런 주석을 발달시켰다. 이것은 특히 모든 문화의 전통이고 헬레니즘 당시에 모든 문화를 집대성 한 것으로 알려진 알렉산드리아에서 발전하였다. 그래서 구약과 희랍의 철학이 만나 조화를 이룬 것이 알렉산드리아인데 이때 알렉산드리아에 필로라고 하는 유대인 학자가 살았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과 동시대인인데 이 필로는 구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희랍철학 특히 플라톤의 철학의 진리를 이해하도록 하기 위하여 구약을 우화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소위 알레고리칼 해석을 발달시켰다. 그래서 성경도 문자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다, 글자적으로 이해하면 초급한 수준이기 때문에 이 글자가 글자 자체로 뜻하는 해석 그 의미도 있지마는 문자적, 역사적 의미로 제일 낮은 단계의 의미다.

 

그것보다 조금 나아가며는 조금 더 높은 수준에 소위 도덕적이 뜻을 가진다. 그런데 그것이 제일 마지막 궁극적인 성경이 말하려는 뜻이 아니고 영적인 뜻이 있다. 소위 플라톤의 철학이 말하는 이데아와 같은 의미를 발견해 내는 것이다. 이 해석이 상당히 기독교에 영향을 많이 미쳤는데 이 알렉산드리아의 교부닝 오리겐 그 이전에 플레멘트를 통해서 해석이 교회로 대거 들어오게 됐다. 그래서 루터의 종교개혁 때 우화적인 해석을 루터가 배척할 때까지 우화적인 해석이 계속되고 지금도 그 뿌리가 깊어가지고 그렇게 이해를 하게 됐다.


그런데 이 플라톤에 의하면 우리가 아는 이 감각세계는 참 실제인 이데아의 불완전한 표상이다. 또는 상이다. 완전한 이데아의 세계를 불완전하게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글자 자체로만 보아가지고는 그 완전한 그 이념 이데아가 반영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것을 영적인 의미를 따져가는 영해로는 우화적인 해석을 하게 된다고 했다. 이것이 이제 철학의 영향이 너무 크다보니까 교회가 처음부터 단호가헤 배척했어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고 중세 천년이상 유지하게 됐다.


세번째가 묵시문학과 광야분파, 쿰란학파의 해석인데 거기에는 마지막 시대에 구주와 미래의 구원시대의 약속들에 중심을 두었다. 그래서 쿰란 에세네파들이 자기들이 메시야를 맞을 그런 준비된 선약된 그런 백성들로 여겼다. 그래서 메시야가 오셔서 구약의 모든 약속을 이루실 때 그 구약의 복을 다 자기들에게 줄 걸로 믿었다.

 

그러니까 구약은 전체로 앞으로 성취되어야 할 선지자적인 선포였따. 이 묵시문학과 소위 광야분파들의 성경해석에 초대교회 해석이 출발점을 갖는다. 왜? 그 쿰란파가, 묵시문학이 기다리는 그 구속주가, 구원시대가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됐고 도래됐다. 그들이 기다리는 것이 바로 초대교회가 믿는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고 구원시대가 도래됐다. 이것 때문에 쉽게 가져올 수 있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의 복음의 메세지가 전달될 수 있는 사실은 구약의 그 랍비들의 성경 해석보다는 이렇게 소위 세례요한이 나왔다고 하는 광야분파가 더 가깝다.


그렇지만 아직 메시야 시대를 기다리는 광야분파의 기대보다도 더 초대교회는 성경사용에 있어서 과격하게 나갔다. 출발이 완전히 새출발이다. 왜냐하면 기다리는 단계가 아니고 완전히 성취됐으니까 쿰란파가 보고있는 구약하고 신약교회가 이해하고 있는 구약하고는 전혀 각도가 다르다.

 

그런데 구약에 대한 이 태도,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태도에 근거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적 권위를 아주 강조했지만 또 성경말씀의 권위를 반복해서 지시했다. 자기가 왔지만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룬다는 반복을 지시했지마는 그러나 그의 비판은 랍비들과 바리새인들의 유전 뿐만 아니라 토라 자체까지 그 비판을 향했다.

 

 결례, 이것이 이제 성전 제사장들의 것을 바리새인들이 따라 지킨 것인데 결례가 실은 형식적으로만 이루어지고 있다고 지칭했고 이혼 문제에 있어서도 아내를 내어버림이 가합니까 물어보니까 가냐 부냐를 답하시기 전에 모세가 뭐라고 명했느냐? 그러니까 랍비들이 바리새인들이 모세 이야기를 잘 안다! 이혼증서를 써서 주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편리한가! 그러니까 그것은 본래는 바른 법이 아니고 남녀를 지으신 하나님은 그 결합에서 하나가 되게 했으니까 결코 내어버릴 수 없는 것인데 하나님이 짝지워 주신 것은 사람이 나누지 못하는데 이것이 너희들의 완악함 때문에 그런 것이지 창조 때부터 그런 것이 아니다. 모세가 신명기에서 준 법이 처음부터 타당한 법이 못된다고 해서 모세의 권위를 시비한다. 토라가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있는데, 토라 자체까지, 이것도 모세오경에 나와있기 때문에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데도 그렇다.


산상수훈에서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옛사람이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것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그래서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마음에 음욕을 품은 자는 이미 마음에 간음하였느니라.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이미 살인하였느니라. 그렇게 증거하시므로 성경 자체를 근본에서 바로 해석하는 것이 되지만 그렇게만 말한 유대인들이 알고 있고 모세가 선포했을 때 부터 알고 있는 그런 정도의 수준이 다른 법이 아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왜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모세보다 더 높은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뜻의 종말론적인 성취자인기 때문에 이렇게 모세의 권위를 시비할 수 있다.


그래서 자기 오심을 옛언약에서 말하고 있는 사건 중에 단순한 하나가 아니라 모세가 말하기를 너희를 위하여 하나님이 선지자를 세우실 터인데 나를 순종한 것처럼 그를 들어야 한다. 이렇게 말씀했는데 단지 그건 선지자 계열 중에 하나가 아니다. 단순한 이건 옛날의 구약사건의 연속, 모세가 나오면 또 다른 선지자가 또 나오는 그런 선지자라 이해하지 않고 그것보다 조금 더 높이 올라간 그런 것으로 보지 않고 바로 구약에 약속하신 종말론적인 성취 그로 인해서 구약이 해소된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스도 오심이 그냥 옛날 사건 중에 연속돼 흘러간 사건중의 하나가 나타났다가 그보다 더 높은 그런 수준이 아니라 구약의 완전한 종말론적인 성취란 해석이다. 여기서 종말론적인 성취이고 그러므로 그것이 재창조라고 하는 것을 강조했는데 요한복음 2:19(잘 이해하기 어렵다) 성전이 하나님이 계시는 곳인데 하나님이 계신 성전을 훼방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훼방하는 것이다. 성전을 훼방함은 곧 사형에 해당된다. 돌로 쳐죽여야 된다.

 

그런데 성전을 헐라고 그랬다. 그러면서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을 짓겠다고 말하므로 자기가 성전을 능가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성취됐으므로 이 성전이 다시 필요없음을 말한다. 종말론적으로 성취됐기 때문에 성전이 더 이상 필요없는 것이다. 그리고 참 성전은 자기의 몸임을 분명히 한다.


그러니까 성전이 십자가 사건 후에는 더 이상 필요없는 것이다. 그리고 마태복음 12:41이나 요나서, 구약의 선지자의 계열 중에 보면 요나는 별로 큰 사람이 못된다. 이사야 예례미야 엘리야 에스겔 이런 선지자들의 계열로 보면 요나가 그리 큰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요나가 큰 일을 한 사람이나.

 

아무도 강퍅해서 회개시키지도 못할 니느웨를 회개시켰다. 그러니 얼마나 큰 표적을 행한 선지자인가! 그러니까 요나보다 더 큰이가 있다고 한 말은 요나보다 조금 높다 월등히 높다 그런 존재가 아니라 요나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사람이 있다. 그리고 솔로몬보다 더 큰이가 있다고 하는 말도 솔로몬이 이스라엘 역사에 가장 전성기를 이룬 왕중의 왕이다. 솔로몬이 왕이 되어서 어디로 갔느냐! 하나님께 제사하러 가 가지고 꿈 꿨다.


거기 갔을 때, 솔로몬이 지혜를 구했다. 그러니까 지혜와 부와 명예와 수(壽)를 하나님이 약속하셨다. 그렇게 큰 역사를 이룬 사람이 없다. 왕중에 제일 큰 존귀요 영광과 존귀가 넘친 사람이다. 그런 사람보다도 더 크다 그 말은 그들과 비교해서 그를 보다 높다 그런 수준이아니라 종말론적인 해석의 의미를 뜻한다.

 

구약이 다 성취되어서 그들이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그런 것으로 끝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 구약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는지를 분명히 말한다. 그리스도가 구약에 약속한 모든 약속의 성취다. 그러기 때문에 구약이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므로 해소된다. 그냥 또 하나의 장이 열리는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성취하고 해고하므로 전적으로 새로운 국면의 시대를 연다.


자, 이런 변증법이 바울에게도 마찬가지로 있다. 그런데 이 바울에게 있어서 구약에 예비되었던 구속이 신약에서 성취됐다. 구속사건이 계속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가 참 이스라엘이고 영에 따라서 난 이스라엘이다(롬 2:28-29). 바울이 증거한 것을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교회가 참 이스라엘이다. 육으로 난 자들이 아니라 영으로 난 교회가 참 이스라엘이다.


여기 표면적 유대인 즉, 물리적으로 아브라함의 피를 받는 유대인이 진짜 유대인이 아니고, 또 유대인들의 남자가 받는 표로서의 할례가, 이것이 진짜 할례가 아니다. 속이 유대인인 사람이 예수를 믿는 이방인이다. 그리고 할례는 마음에 해야지, 육체에 해서는 진짜 할례가 못된다. 왜? 변화가 안되니까! 할례를 받으면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하는데 하나님의 법을 못 지킨다. 그러니까 할례만 받으면 그것을 자랑하고 그것으로 만족하면 안된다. 진짜 할례는 마음에 받는 것인데 성령을 받는 것이다.


그러니까 글자에 있지 않고 영으로 된 할례가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까 참 유대인은 이와 같이 성령으로 마음이 변화된 그리스도인들이 참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러니까 교회가 참 이스라엘이고 영으로 따라 난 이스라엘, 갈라디아 6:16... 진짜 유대인은 몸의 일부에다 할례받는 유대인이 아니라 성령으로 그 마음이 변화된 그 사람들이 진짜 할례를 받는 사람이다. 그들이 바로 참 이스라엘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러니까 교회는 성경을 바로 읽지만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회당에는 그들에게 순종이 담겨있다. 고후 3:14 바울의 구약성경 해석이 상상을 뛰어 넘는다.


하나님 앞에 갔다 왔을 때 모세가 얼굴이 빛이나서 하나님의 광채가 나니까 두려워서 못 봤는데 그런 두려움을 멀리하게 할려고 얼굴에다 수건을 가리웠는데 그 수건이, 수건때문에 모세가 증거한 그리스도를 못 본다. 모세가 증거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인데 모세가 증거한 그리스도를 못 본다.

 

그러니까 아직까지도 모세오경을 읽을 때 수건이 그 마음에 덮혀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못 본다. 그러면 언제 그리스도를 보느냐?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서 구약을 보면 그 수건이 벗겨져서 구약을 바라보게 된다. 그런데 그 얼굴에 아직도 수건이 가려져 있어 모세의 얼굴을 못 보는 것이 아니라 모세를 넘어서서 보아야 할 그리스도는 못 본다. 아브라함이 바로 믿는 자들의 조상이다.


그러면 구약은 어떻게 읽을 것이냐? 바로 이 종말론적인 성취로부터 읽는다. 옛 언약의 약속과 선지자의 증거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되고 성취됐다. 이로 보면 또 둘간에 불연속성이 이루어진다. 옛 언약과 새 언약간에 같은 것에 동일한 수준에로의 차원이 아니라 옛 질서는 해소하고 전혀 새것이 생긴다. 옛 구원언약의 질서들이 조금 더 보충되고 개량되고 인양된 것이 아니라 다 옛 구원의 질서가 완전히 제거되고 없어져 버렸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지막이다. 롬 10:4 율법의 마침이 된다. 왜? 그리스도가 율법을 다 지키고 성취하므로 폐쇄해 버렸다. 그러기 때문에 이 율법을 안지키며는 정죄가 온다. 정죄는 바로 사망이다. 그런데 정죄와 사망세력에서 율법이 끝났다. 그가 성취하셨을 뿐만 아니라 율법의 모든 정죄를 다 담당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서 타당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전에는 율법을 지키므로 구원에 이르고 의롭게 됐다고 여겼는데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다 지키시고 그리고 그 율법의 저주를, 그러니까 다 성취됐는데 누가 그것을 요구하느냐? 우리가 빚을 지고 살 때에 빚독촉을 받고 살지만 빚을 다 갚았으면 빚장이가 나에게 뭐라고 하겠는가? 누가 갚았든간에 다 갚았으니까, 그렇다 그러니까 끝났다. 갚아준 사람으로 인해 빚에 매이는 데서 끝났다.


율법이 와서 율법을 다 지키도록 얽매여 있는데 그리스도가 와서 다 지키고 못 지키면 받을 정죄를 다 담당하여 버리셨으니까 내가 이제 더이상 율법에 매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구원의 길로서 율법이 끝났다. 율법을 지키므로 구원 얻었다고 유대인들이 철두철미하게 믿었는데 그리스도가 다 지킴으로 이제 끝났다. 그러니까 구원의 길은 더이상 율법에서 나오지 않고 믿음에서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에 율법은 나를 영원한 죽음이나 생명으로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이나 세력으로는 끝났다. 그 율법은 있어도 나를 죽음에로도, 생명에로도 인도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율법의 기능이 종결되고 그 세력이 파괴되고 그러니까 우리에게 타당성이 사라졌따. 왜? 그리스도에게서 종말론적으로 성취됐으니까 더 이상 그것이 나에게 구속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그런 율법에로 갈라디아 교인들이 지금 돌아간 것이다. 그러니 어처구니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까 율법이 그리스도에게서 종말론적으로 성취되므로 완전히 무력화되어 버렸다. 나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다. 빚을 갚아버렸는데 누가 나에게 와서 빚을 독촉하겠는가? 그러니까 율법없이 예수를 믿어 세례받는 자들에게는 율법의 타당성이 사라진다. 그것이 사도행전 15장에 사도들의 공회의의 결정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방교인들이 구약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토라가 율법이 타당하지 않다고 하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율법을 계속해서 지켜오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지키며 예수를 믿었는데 이방인들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할례받을 필요가,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다. 절기를 지킬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이 다 끝났으니까 율법이 이러한데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이런데 솔깃할 필요가 없다.
 
 
그게 루터의 잘못이다. 루터는 그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이해할 때 먼저 율법을 선포하므로 그래서 복음으로 불러내서 그 짐을 벗겨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율법이 구원의 길로 타당하다는 데에 서 있다.
그러나 바울의 이해는 그럴 필요가 없다.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선포할 필요가 없다. 처음부터 예수를 믿음만 전하면 됐다. 그런데 이방인들에게만 그렇지 않고 율법을 지키고 잇는 유대인들한테 가서 율법은 못지키니까 율법을 지킬 필요없이 예수만 믿으라고 전했다. 그러니까 분이 넘치고 이가 뿌득뿌득 갈리는 것이다. 이방인 세계에서도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키며 왔는데 율법을 지킬 필요없이 예수만 믿으면 된다.


자기들의 신성한 종교적 노력을 못하게 해도 분수가 있지, 분노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이 하나님의 사역으로서, 역사로서 구약이 성경으로 권위를 갖지만 또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도 여기 구약이 잇고 신약이 있고 나뉘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에 의하면 구약은 하나님의 책으로 성경을 우리가 받아갖고 있어도 구약이 있고 신약이 나란히 있는 방식이 아니라 이 신약이 완전히 새 창조이다. 그래서 이것을 종말론적 성취라 한다. 이게 어떤 방식에 의해서 이루어지느냐? 성경증명 예표론, 우화적인 해석이 있다.


구약의 본문들이 종말론적인 구원시대 곧 메시야 시대에 관련되는 것이 그 관례가 전통이 있었다. 그런데 신약에서 성경을 증명할 때는 그 일부 이것을 따다가 신약에다가 맞추는 것이 아니다. 본래 그 이 신약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사건을 해석을 한다. 즉 구약의 예언이 서 있는 그 본문에서 떼어가지고 신약의 그리스도에게다 적용을 한다. 그러니까 그 문맥에서만 읽어보며는 이게 그리스도의 예언이 아닌데 그 구약을 가져다가 그리스도 사건을 설명한다. 해석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성취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예언이 가장 많이 들어있는 이사야를 생각해 보자. 이사야가 신약에 있는 4복음 다음에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제 5복음서라 한다. 이사야 7:7절 이하에 보면 그리스도의 예언으로 마태가 인용해다가 그리스도의 성취로 분명히 했다. 마태복음 1:23절 이하에 보면 그때 역사적인 상황이 이 아람하고 사마리아 하고 동맹을 맺었다. 그래서 유다는 압박해 왔다.


 그러니까 아하스가 아람하고 에브라임하고 사마리아하고 동맹을 깨고 자기를 보호하도록 금은보화를 주었다. 그렇게 해 놓고는 에브라임을 압박해서 치도록 그런 정치를 했다. 그래서 이사야가 찾아가서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나 하나님이 구원해 주실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유다를 구원하시고 지키실 것이다.

 

그렇게 했는데 아하스가 정치적으로 국가의 운명이 어려울 때에 이제 정치적으로 인위적으로 다 해놓았는데 하나님만 믿으라고 독촉했다. 그 에브라임과 아람이 동맹 맺은 것을 깨고 아람하고 동맹맺어서 자기의 생존을 지키는 것을 떠나서 여호와만 의지하고 하나님이 구원하 표만 구하라고 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구원해 주신다고 했는데도 아하스는 정치적으로 다해 놨기 때문에 안 믿는다.

 

그래도 이 예언을 보면 애브라임은 패할 것이라고 했다. 아하스가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않는다고 했는데 그래서 신앙이 좋은것 같지만 그런것이 아니다. 자기 의지적으로 다 해놨기 때문에 하나님 한태 그럴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 그가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줄 알 때에 미처 버터와 꿀을 먹는 것이다."(16절)그러기 때문에 아람과 에브라임이 망한다. 그 문맥을 가져다가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설명을 했다. 그래서 그리스도 사건을, 십자가를 종말론적 구속사건으로 설명한다.

 

 역사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사건을 설명한것이 아니고 그것이 성경증명이 우리는 그냥 신약의 글자하고 구약의 글자하고 딱 맞으니까 성취되는걸로 이해하는데 그런것이 아니고 그 문맥에서 떼어다가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될걸로 신약을 설명한다. 그것이 성경증명이다. 그러니까 개별적으로 여기 저기에 그리스도에 대한 안내와 암시와 예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 다 거기에 본문 전체가 거기에 그리스도를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진 이스라엘에 약속하신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그리스도 자신에게서 온전히 성취된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사건을 구약의 역사적 문맥에서 떼어다가 그리스도 사건을 설명한다. 구약이 말한 이 분문을 신약에서 성취된 것이다. 이 본문만 보면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으로 보기가 쉬운일이 아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신약에 나와 있는 구약의 예언들이 거의 다 그렇다. 역사적인 문맥에서 떼어다가 그리스도에게 성취될 걸로 설명했다. 제일 많이 인용된 곳이 바로 마태복음이다.


그러기 때문에 마태복음이 신약성경에 제일 먼저 나와 있는 이유일 것이다. 전에는 마태가 제일 먼저 기록된 걸로 알았는데 지금은 성경학자들이 마가를 제일 먼저 기록된 것으로 공통으로 받는다. 그러면 답이 무엇이냐? 구약의 성취는 가장 분명하게 말한 책이 마태복음이다. 마태복음 뿐만 아니라 전체로 다 그리스도 사건을 설명했다. 그래서 그것이 맞는 법으로 이해했다. 이것이 성경증명이다. 꼭 역사적 문맥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사건으로 그것을 설명한다.


두번째로는 예표론적인 해석인데 이것은 신약에서 볼때에 구약을 예표론이지 구약에서 신약을 보아가지고 예표론이 아니다. 그런데 예표론은 생긴 후에 해석하다가 생긴것이 아니고 바울 자신이 벌써 구약을 예표론적으로 이해했다.

 

로마서 5:14에서 아담은 오실자의 표상이다. 창세기에 나와 있는 아브라함을 구약 어디를 읽어봐도 그렇게 이해하는 곳이 없다. 아담이 모든 인류를 죄악에 빠뜨린 자인데 아브라함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표상이요, 예표가 되느냐?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아담을 보고 (세상의 구속주로 오실 그리스도에다가 조상이 되는 면에 있어서, 구원론적인 면에서) 그리스도의 표상으로 말했다.


고전 10:6,11 출애굽기 전체 홍해사건도 그리스도에게 세례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그 사전 표상으로 보았다. 그러니까 예표는 역사적인 인물, 과정, 재료들이 다 종말론적인 예수 그리스도 사건의 사전 예표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구약은 종말적인 사건의 사전 표상으로 볼 수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다 예표가 들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원형인 그리스도와 그 예표 사전 표상인 그 둘간에 항상 대칭적으로 나란히 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특히 그 사전 표상이 성취되었다고 하는 성취와 완성을 바라는 의미로도 했지마는 반대로 이 제도들의 훼손, 무너뜨림, 끝냄을 말함과 동시에 또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구원을 말하기 위해서도 썼다. 이것을 히브리서가 잘 말해주고 있다.히브리서가 구약의 모든 제도들이 그림자다.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다. 그것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므로 없어져 버렸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예표로 썼다.

 

또 단순히 성취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취되어 없어져 버림을 표시하기 위해서도 예표로 했다. 그러니까 결국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문장으로 표시되어 있는 것을 그리스도에게 갖다 붙여서 성취를 말할 때는 그것이 성경증명이지만 이와같이 분명하게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고도 이 약속들이 다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고 하는 것을 밝히는 때는 이 해석은 예표론이라고 하는데 예표론은 그러니까 성경증명하고 각별히 연관되어 있다.


세번째로, 우화적 성경해석인데 이 우화적 성경해석이 헬라 유대교에서 생성됐다. 이 우화적 해석은 역사적 본문과 문자적 의미는 상관이 없다. 문자적인 깊은 뜻이 없다. 그러기에 글자보다더 깊은 의미가 있어야 된다. 이 영해가 바로 우화론적인 해석이다. 그러니까 영해를 조심해야 한다.

 

이런 우화적인 해석은 아주 나변에서만쓰고 곧 예표론으로 고쳤고 고전 9:9을 구약본문을 읽어 보고서 이것을 그 부분만 그 문맥에서 보면 (어떻게 이것이 복음의 사역자들이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그 복음사역을 한 것 때문에) 이 홍해를 지나는 것을 세례로 보고 그것을 그리스도에게 세례 받은 것으로 입혔다.


고후 3:3을 보자. 구약에 하나님이 십계명을 쓰실 때에 돌에다 썼다. 영구 보존하기 위해! 그런데 그것이 바벨론 포로로 갈 때 없어졌다. 그것을 바벨론 포로로 가기 전에 예례미야가 31:31에 예언했다. 새 언약의 때가 올 터인데 그 때는 그 돌비에 기록한 계명을 심령에 기록할 것이다. 그래서 율법을 다 지킬 것을 말씀했다.


하나님이 계명을 돌에 기록한 것을 지금 우리가 예수 믿어 성령받아 계명을 그런 식으로 우리 마음에심은 것으로 해석했다. 그것도 일종의 예표다. 그러니까 예표론적으로 활용 혼합했다. 갈라디아 4:21에 보면 하갈과 사라를 말할 때 하갈은 지금 육체적으로 시내산과 같은 것이고 사라는 예루살렘이다.

 

그 두 여인의 사건을 우화적 해석으로 예표론적으로 설명해서 바로 사라에게서 난 우리가 참 이스라엘인 것처럼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육으로 난 유대인이 진짜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다. 얼마나 유대인들에게는 분이 넘치는 후손인가? 너희는 하갈의 자손밖에 못되므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못 된다.


이 우화적 해석은 신약하고는 조화될 수 없으니까 예표론하고 합친다. 왜? 성경이 증명한다. 기록한대로 지상 역사에서 일어나는 것이 진짜 하나님의 구원이다. 그런데 그걸 넘어서서 배후에 있는 진짜 뜻을 잡으면은 하나님의 구원이 끝나는 것이다. 이것이 플라톤의 사상이다. 저 하늘에 있는 이데아의 불완전한 반응이다.


예를 들면, 밥상에 우리의 곡식이 더들어간 것이 값이 있는데 희랍 사람들과 플라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진짜 저 원형 황금으로 된 식탁이 저 하늘에 있는데 그 원형이 여기에 반영됐다. 이것이 완전히 들어간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게 들어갔다. 이데아가 많이 들어가면 좋은 것이다. 우리는 들국화를 좋아하지만 진짜 국화하고 비길 수 있느냐? 왜 값이 적느냐? 플라톤에 의하며는 그 진짜의 아름다움이 덜 반영됐다. 이것이 들국화다.

 

국화, 장미는 아름다움이 많이 들어가서 좋은 것이다. 예를 들어서 책상이 이런 각각 세계는 이데아가 들어갔다 나갔다 한다. 많이 들어오면 생기가 나고 빠져나가면 변한다. 빠져나가면 허물어진다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진짜가 아니고 가짜다. 그런데 신약은 진짜 이 감각세계 시간과 공간에서 하나님이 이루신 사건이 진짜다. 그래서 지상역사에서 하나님이 구원사역을 이루셨다고 신약이 선포한다.

 

그러니까 플라톤이 이데아와 현대 감각에 대한 이것을 맞추기 위해우화적인 해석을 발전시키는데 이것을 배척해야 된다. 필로의 설명을 보며는 하나님이 우리 형상으로 만드시고 그것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시고 그것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지 않고 천사의 형상으로 본다. 그래서 의미는 문자가 지시하는 의미를 넘어서서 깊은 의미를 따진다. 하늘에 있는 깊은 의미! 이 모든 것들은 구약의 모든 약속과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됐다고 하는 이 종말론적인 구원 사건을 이해하기 위한 도전이다.

 

그렇게 해서 구약의 권위를 시비하면 어디로 가냐? 구약의 통치자가 필요 없다는 데로 간다. 그것이 말시온과 그노시스주의에서 나타난 것이다. 말시온에 의하면 구약은 신약에 비해서 동등한 하나님의 책일 수가 없다. 왜? 물질을 만드신 구약의 하나님은 신약에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구원의 하나님, 선한 하나님에 비기며는 같은 하나님이 아니고 아주 정도가 많이 떨어진다.

 

그러니까 구약이 그런 질투하는 하나님, 전쟁의 하나님, 그런 하나님을 표시하는 이 책은 신약과 같은 자리에 놓을 수 없다. 그러니까 완전히 구약 전체로 필요 없는 것이다. 그것이 말시온과 그노시스 주장이다.


반대로 랍비들은 이 구약의 문자적인 의미만 보고 그리스도를 여기서 못 본다. 그러면 글자대로 보아야 한다고 하는 랍비들의 성경해석과 구약은 통채로 필요 없다고 하는 이 양면에서 양극에서 교회가 택한 것이 즉 구약은 하나님의 계시의 책으로 받는다. 율법이 폐지됐음에도 불구하고 구약을 하나나 의 책으로 구원의 책으로 받는다. 율법이 폐지됐으면 구약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 구약은 율법인데 그러면서도 구약을 계시의 책으로 불면의 신적인 권위의 책이다. 그런 신적인 권위를 갖는 면에서 같다.


또 그렇게 해서 구원의 길로 일단 폐기 됐어도 그리스도를 이해하기 필요한 것으로 구약을 정당화 했다. 둘 다 하나님의 법이다. 그래서 말시온 그노시스주의 같은데서 초대교회가 수정을 해서 의식법은 완전히 폐지되고 성취된 뜻이 되고 그 다음에 도덕법은 더욱 강화되고 그리고 모든 예언은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됐다. 그렇게 하므로 구약을 그대로 받는다. 뿐만 아니라 구약의 의식법과 제사법도 예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갈라디아 4:1-11 ; 여기는 [복음과 율법]에 나타나 있는데로 아들이 오기까지 믿음의 때가 오기까지 율법은 사람을 얽어매는 노예의 가정교사와 같은 역할을 했다. 그래서 그가 바로 아들이라도 자유자이고 아버지의 상속자이고 그리고 모든 재산과 종들 위에 권세를 받아 가질 자이지만 아직 상속의 때가 정해지지 않았다. 상속의 날을 정해서 아들에게 권한과 모든 재산을 다 양도해 주기까지는 노예 가정교사 밑에 있다.

 

그래서 비록 주인이고 상급자이어도 노예 가정교사 밑에 있는 동안은 종들과 같다. 노예들이 사는 똑 같은 법도와 방식으로 산다. 주인의 아들이라고 우리처럼 주인 행세를 하고 특권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노예 가정교사하고 똑 같이 산다. 그래서 꼭 노예 가정교사가 처하는 것에 바로 매인다.


그런데 그와 마찬가지로 율법 아래 사는 자들도 그랬다. 그래서 돌 위에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에 매여 살고 절기를 지키며 살았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때가 차매 보내사 여인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들로 하여금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아들인고로 아들의 마음에 성령을 보내셨다. 로마인들이 아들에게 상속식을 베풀 때에 자기 반지를 빼서 아들의 손에 끼워주므로 그가 주인인 것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였다. 이처럼 우리 마음에 성령을 보내사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분명히 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했다.

 

이제 더 이상 종이 아니다. 이제 그 상속식을 한 후에는 종이 아니다. 종이 아니고 그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의 유업을 이을 자다. 우리가 이제까지 율법에 매여서 그렇게 살았는데 그 율법에서 벗어나서 이제 하나님의 아들로 성령을 모시고 살게 됐다.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다시 율법으로돌아가서 그 천하고 약한 그런 것들에 종노릇 할 필요가 없다. 완전한 해방과 자유를 이루었으니까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들을 여인의 몸에 나게 하시고 우리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셨다. 그런에 루터는 이 복음의 도를 이해할 때에 아직도 율법 아래 사람을 가두어 두었다가 거기서 해방시켜 복음으로 자유롭게 해야 진정한 구원으로 이루어지는 줄 알고 아직도 복음과 율법이 생명으로 마주 서는 것으로 이해를 했다. 이것이 개신교로 하여금 바울의 복음의 이해를 잘못하게 한 근원이 된다.


1.증거된 역사와 선포된 담화

 

구약의 본문들은 그냥 사건들의 기록이 아니라 지상 역사 내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사역을 신앙 증거로 해석한 것이다. 그냥 사건만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니라 거기는 다 해석이 들어가 있다. 그러니까 역사서, 열왕기 같은 것도 이게 신앙의 증거에 의해서 쓰여진 책이다.

 

그러니 그것이 우리 70인경을 따르는 이기독교회의 성경배열에는 열왕기 이런 부분이 다 역사서에 들어가 있지마는 그 맛소라 본문에는 역사서가 선지서에 들어가 있다. 그것이 전 선지자들이다. 사무엘, 사사기, 여호수아, 열왕기가 다 역사서에 들어가 있다. 이건 그냥 역사 내의 하나님의 사역을 그냥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니라 신앙증거에 의해서 해석을 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그것인데, 사실적으로 본문들은 우리의 사건 내에서 장소에서 경험된 역사인데 그 역사가 해석을 해서 선포되었다. 여기에서 선지자적인 설교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구약에는 어디서나 초역사적인 사상세계나 초시간적인 신화나 추상적이고 합리적인 교회의 책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보편적인 종교 윤리적인 경험들이나 그리고 역사와 상관없이 있을 수 있는 그런 선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본문들은 그냥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고 또 그냥 신앙의 증거만 기록한 것이 아니고 둘이 합쳐져 있다. 언제든지 합쳐져 있다.


그러니까 이 본문들이 선포되어 있는 의도를 하나님이 이룩하신 사건이고 떼어가지고서 말을 못한다. 구약은 하나님의 창조적 말씀에 의해서 이루어진 그 종말론적인 목표를 향해서 운동하는 역사를 증거한다. 구약의 본문은 이루어진 사건이 지금 하나님께서 이루신 사건이다. 그리고 왜 그렇게 되도록 사건을 이루셨느냐? 종말론적인 목표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 이룩한 것이다.


예례미야가 직면했던 제일 큰 문제가 지금 이스라엘이 망해 버리며는 이스라엘에 남아있는 여호와의 종교의 마지막 등불이 꺼진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존재의의가 다 없어지고 다 없어지면 여호와의 종교가 다 어디로 가냐? 그러니까 도저히 이해를 못한 것이다.

 

그런데 그러면 이 사건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고 유다가 멸망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사역이다. 그리고 이 사역이 그냥 벌하기 위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질 마지막 종말론적인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을 선포한다.

 

그러기 때문에 제일 비극의 사도인 예례미야가 그 역사적인 자기 눈으로 나라의 멸망을 지켜 보면서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선지자뿐만 아니라 아까 말한대로 그 역사서들을 전선지자라고 할 때에 실제로 예언한 선지자들을 후선지자라고 하고 그러면 그 전선지자들에서 역사적인 사건들을 기록해 놓았는데 그냥 사건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이 사건들이 하나님의 사역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 사역이 하나님이 이루실 구원을 목표로 하고 이루어졌다. 그것이 근본이다.


열왕기하 마지막을 보며는 왕하 25:27-30 본문만 보면 그냥 사실만 기록해 놓은 것 같다. 그런데 영왕기가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는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열어놨다. 말은 안하고 열어놨다. 그 이후는 어떻게 됐는지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호야긴이 잡혀간지 37년만에 그러니까 70년 반을 거의 살아가지고서 여호야긴을 옥에서 놓아서 많은 왕들 위에 높이고 죄수복을 벗기고 그리고 왕의 상에서 먹게 했다. 그러면 이것이 뭘 뜻하냐? 절망이 깊어 가장 어두운 때인데 이 왕기 기자가 마지막을 결론 맺기를 여호야긴을 옥에서 풀어 놓아서 그를 높인 것으로 왕기를 끝냈다.


우리가 열왕기가 역대기 다음에 있어서 같은 수준의 책으로 알지마는 유대인의 눈에는 왕기가 역대기와 같은 수준의 책이 아니다. 왕기는 선지서지마는 역대기는 제일 마지막에 쓰여 있다. 열어놨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아직 포로 생활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중간 쯤 왔을 때 이 사건이 벌어진 사건으로 써 놨다.

 

무엇을 뜻하느냐? 하나님의 구원이 분명히 가까이 진행되고 있음을 말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회복됨이 약속대로 이스라엘에 회복시켜서 가까이 오게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포로로 잡혀가서 반쯤 살았을 때 이런 사건이 벌어졌다고 하는 것을 써놓고 그냥 사건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여기에 신앙이 들어가 있다.

 

이렇게 써놓은 것 뿐만 아니라 후에 거의 모든 성경들이 다 그 하나님의 역사적인 사역을 신앙으로 고백한 선포다. 그냥 사건들의 기록이 아니라 신앙으로 기록한 선포다. 교회의 신앙고백과 하나님의 선택한 인도의 문제는 항상 이 선포로 기초되어 있는 역사 내에서 일어난 사건을 문제시한다.


지금 이 왕기 이 부분을 읽어서 어떻게 설교를 할 것인가? 설교할 수가 없는 것 같다. 그래도 이것이 하나님이 교회에 말씀하신 내용이기 때문에 지금도 여기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뜻을 발견해 내어 새롭게 해석하므로 현재화해서 현재 교회에 말씀을 주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항상 자기 역사를 이해할 때에 그냥 한 민족 중에 어떠한 사건이 진행될 걸로 그렇게 이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의 택한 한 교회가 세계와 민족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적이고 주권적인 행동으로 그냥 사건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자체가 이스라엘 민족 뿐만 아니라 택한 교회뿐만 아니라 전세계 민족을 위해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이다.

 

그것이 이스라엘이 이해한 역사의 큰 철칙이다. 세계 어느 민족에게도 이런 역사 이해는 없다. 자기 역사가 바로 하나님께서 이룩하신 행동인데 그것은 그냥 자기만 위한 것이 아니라 세계 민족을 위해서 이루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다.


그러니까 세계사도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세계사 자체도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들어온다. 그래서 계속해서 들어온다. 구약 역사는 세계역사의 파노라마에 함께 실려있다. 그리고 신약에 와서도 마찬가지로 그것이 전개된다. 누가복음의 처음장에 보면 누가는 그리스도의 출생을 말하면서 로마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2장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명을 내렸다. 그는 로마의 황제다.

 

이 사람이 황제가 됐을 때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고 로마 전역 전체에서 축제를 벌리게 했다. 그가 황제가 되어 첫번째 한 일이 평화의 시대 새로운 시대가 되었다고 1년 반동안 축제는 로마 최초의 황제다. 바로 그 황제 때 천하가 다 호적하는데 이댸 예수 그리스도도 출생했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그러니 세계 역사하고 구원사하고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역사도 구원사이지만 항상 세계 역사하고 연결해서 자기 역사 내에로 세계사가 들어온다. 그래서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성공되어져서 하나님께서 목표하신 그 목표에로 인도되는 걸로 분명히 믿었다. 역사는 근대인들의 사고처럼 소위 근세관 역사관처럼 인과적으로 내세계적으로 진행되는 그런 과정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우리가 왜 일제 36년을 지냈는가? 당파싸움 많이 해서 그런가? 군대가 약해서 그런가? 뿐만 아니라 일본도 사업혁명을 일으켜 가지고 19세기 말경에 벌써 산업혁명이 벌써 완성됐다. 완전 형태는 아니지만! 그리고 러시아도 그렇고 그런 열강들이 세계를 지배할려고 그러니까 한국은 군대도 없고 당파 싸움이나 많이 하고 있을 때에 그런 상황이 일어났기 때문에 한국이 망했는데 보통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바벨론으로 잡혀간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세계를 재패할려고 하는 정복자의 야욕 때문에 정복되고 망한 걸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벌 주기 위해서 느부갓네살을 일으켰다고 하였다. 포로로 잡혀간 걸로 그걸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벌을 갚고 다시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고 그러신다.

 

전부 다 인과적으로 세계 내에서 일어나는 그런 필연적인 과정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으로 말했다. 역사라고 하는 것은 세계 내의 사건들이 그렇게 진행되니까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이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주권적으로 역사안에 들어올 때 역사가 일어난다. 그러니까 역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이고 이 사역으로부터서 만물의 시작과 끝을 해석할 수 있다. 무엇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렇게 진행하시는지를 우리는 아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자기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한 보고는 연대학자들이 사실을 보고하는 그런 차원의 보고가 아니라 항상 신앙으로 해석된 보고이다. 왜 이런 일이 됐느냐?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런 것이 다 항상 신앙에 의해서 해석된 것이다. 그러니까 그 역사는 그냥 사실의 역사가 아니라 선포되고 설교된 그리고 잊혀진 역사와 사건이 생기기 전에도 선포되지마는 이미 발생한 사건들을 하나님께서 하신 사역들로 외친다.


그렇기 때문에 듣는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역을 그렇다고 고백하게 하고 그리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뜻하신 것을 어떻게 하라고 권고를 받고 그리고 증거하고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된다고 설명 해주는 그런 말을 해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크신 사역들을 외치는 것은 그 당대 교회에 반드시 필요하다. 언제든지 예배하러 모인 회중에게 이 역사적인 사실을 설명을 한다. 그런데 이렇게 모인 회중에게 하나님의 역사를 하나님의 사역으로 선포할 때에 그때 설교의 특색은 사실하고 신앙고백이 둘 간에 따로 따로 떨어졌다고 중간에! 그러니까 후에 합쳐진 것이 아니라 사실하고 신앙고백이 하나로 일치되어 거기에 들어가 있다. 그 선포가 함께 있다. 그것을 반성해서 추후에 갖다 붙인 것이 아니라 사실하고 신앙고백이 항상 일치되어 있다. 둘 다 해소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사실을 보고 거기에 대한 증거 역사와 선포 그리고 어떤 일을 알림과 신앙고백간에 항상 일치하고 분리가 있지 않다. 하나님의 사역으로 이해한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갖는 다른 민족과 전적으로 다른 역사 이해다. 그리고 이 열왕기가 아까 말한대로 열어 놓았다. 바로 열어 놓은 것 때문에 선지서다. 앞으로 이루어질사실을 신앙고백하는 그 둘 사이에 역사적 사건과 신앙고백 사이가 해소되거나 서로 떨어져 나가 있지 않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해할때는 항상 신앙고백된 역사로 즉 하나님의 사역으로 신앙고백된 역사다. 그러니까 여기서 항상 구약의 본문들을 당시에 듣는 교회에 대한 설교이기 때문에 해석할 때에 무엇을 우리에게 설명할려고 했는지를 묻는 것이 설교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역사가 지금 우리에게도 현재화해서 설명해서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 이 마지막 부분의 역사를 열어 놓은 것도 하나님께서 구원의 사역이 진행되고 있음을 말한다. 바로 이스라엘에게 소망을 주는 것이다. 열왕기는 이 기사대로 보면 아직 포로가 끝나기 전에 기록됐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본문들은 그 때 당시에 생존한 교회에 그렇게 하도록 강렬하게 요청하고 그렇게 강요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물음과 순종이 교회가 이 선포를 듣고 순종하는 것이 그들의 생과 사를 결정한다.


예례미야가 마지막 왕한테 가서 무어라고 말했는가? 시드기야 때 시드기야가 예례미야를 불러 어떻게 하면 좋으냐? 그러니까 항복하소서. 그것이 왕과 백성들을 살려내는 길이라고 요청했다. 도망하면 죽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례미야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들었으면 눈을 빼이지 않았을 것인데 시드기야 두 아들은 잡혀 죽었다. 항복했으면 죽지 않았을텐데, 들었으면 안 죽었을텐데 듣지 않았다. 그러니까 죽었다. 이 말씀이 죽고 사는 것을 결정했다.


구원사적 설교는 하나님이 교회에 향하신 역사를 늘 눈에 두고 살핀다. 하나님이 교회에 하신 사실 역사로 그러니까 구약의 역사가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니고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사역이다. 설교는 반복적으로 하나님이 행하신 역사에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사역의 미래를 말하고 관련해야 한다. 이렇게 일을 이루셨는데 다 그 전에는 뭐라고 되었느냐? 마지막에 반항하는 무리들을 잡아다가 끌고가는 이야기다.

 

그런데 끝 부분에 가서는 이렇게 여호야긴을 옥에서 풀어서, 37년의 옥중 세월이 얼마나 긴긴 세월인가? 그런데도 없어지고 망하지 않는다. 끌어 올러셔 다시 왕의 자리로 앉혀 왕복을 입히고 왕의 식탁에서 먹게하고 이스라엘 해방이 가까이 왔고 그렇게 진행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이제 회복될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사역이미래에 어떻게 될 것인가를 늘 말한 것이다. 그리고 이 선포를 듣는 교회에 약속이 되고 위로가 되지만 위협도 된다. 왜? 안 들으면 망하니까! 그러니까 항상 이렇게 열어 놓은 것이 미래가 선포에 늘 구조적으로 속한다.


그것은 예루살렘의 성전교회도 마찬가지였다. 항상 유월절을 지키고서 그 듣는 성전교회가 받는 위로와 선포 하나님이 우리의 조상들을 애굽에서 구출하고 또 구원하러 오실 것이다. 역사가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에 미래도 하나님의 손에 있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다. 하나님의 일이다.


그런데 요즘 현대신학에서 최근의 연구들에 있어서 주님의 재림을 그리스도의 미래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 구원사적 선포는 지금 현재의 교회에게도 바로 현재 교회에 향한 호소가 되어서 여기 우리가 갖고 있는 이 본문들을 새롭게 해석하게 된다. 전통이 그냥 옛날 이스라엘 역하로만 한다며는 우리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데 이 역사가 지금도 우리에게 우리의 것으로 말을 거는 것으로 이해될 때만 이것이 우리에게 의의가 있는 것으로 살아나는 것이다. 이야기를 계속해서 반복하는 정도, 그랬다 하는게 하니고 해석을 해야 한다.


보수 복음주의 교회들이 범하는 실수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해석없이 과거 스토리만 전개한다. 옛날에 다윗은 이렇게 신앙이 좋았는데 우리도 신앙이 좋아야 되지 않느냐? 그러면 은혜는 받지만 그 옛날 상황하고 지금 우리의 상황하고는 잘 맞지 않는다. 그렇게 반복해서는 우리의 현실하고는 유리되어서 별 연관이 없다. 그래서 계속 이야기만 해버린다. 해석해서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설명을 해야 되는데 그런게 없다.


늘 우리의 구속사적인 설교는 항상 이 역사를 새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도록 부르는 것이고 그리고 믿도록 부르는 것이고 순종으로 살도록 하는 것이다. 해석을 해서 설교를 해야지 그냥 역사적인 사건만 반복해서 레코드를 틀어주며는 우리와 상관없는 것이 되어서 우리의 역사적인 상황하고 그때 상황하고 전혀 다른데 그것을 그냥 그렇게 옳은 것처럼 이야기를 해놓으면 우리하고 멀어져서 괴리된 신앙이 되어 현실하고는 맞지 않는다.


신학의 선포에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역사적으로 일하신 사역이 현재 이 교회들에게 하나님의 사역으로 현재화하고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 과거의 이스라엘의 역사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 교회의 역사하시는 걸로 현재화 하고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교회는 구약의 역사 사건들을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으로 신앙고백한다. 역사와 사실과 신앙간에 항상 해소 불가결한 일치가 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역사의 증거는 선포되고 외쳐진 역사다. 그냥 역대기 기자가 사실들을 나열해 놓은 기사가 아니라 선포되고 외쳐진 그런 사실이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마가복음의 모든 중심이 어디에 집중하고 있느냐? 고난 중간에 이루어진 사실을 11-15장까지 기록하고 있다. 3년의 사건을 10장에 기록하고 나머지 한 주간의 사건을 6개 장에다 기록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다 모든 것을 집중한다.

 

 그리고 부활에 마가복음이 가장 사실적인 보고만 하고 있는 것 같은데도 마가복음이 중심하고 있는 기사의 전체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다. 그러니까 한 주간의 사건에 16장 중에서 6장을 할애했다. 그래도 대강 이것을 읽으면 빨리 이해를 못한다. 무슨 말을 할려고 하는 것인지 복음에 대한 설명이 별로 적다.


그러니까 10:5 ; 그리스도의 사역의 목표를 설명해 놓았다. 분명히 인자가 온것은 죽으러 왔다는 사실을 말했지마는 전체 마가복음 구조로는 십자가의 부활에 집중하고 있어도 보통 독자는 그것을 못 알아본다.


그런데 바울이 읽으며는 이 사건들이 전부 다 사건들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사역으로 해석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생각해 보면 나사렛 예수가 왜 죽었는가? 죽은 제목이 무엇인가? 로마의 왕이 가이사인데 예수가 왕이라는 말은 예수가 가이사의 통치에 대한 반역이다.

 

 독립 운동을 한 사람으로 봤는데 왜 산헤드린 공회의가 정죄를 했는가? 왜 죽게 했으며 왜 신성모독인가? 유일신 사상에 보면 신성모독인데 대제사장들이 질투하고 시기해서 죽이기 위해 그 죄목을 붙혔지마는 예수 자신이 자기는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야로 인자로 말해도 죽지 안해도 된다. 왜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라고 했으니까 로마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방만 가져오면 자기는 메시야라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자라고 불러도 죽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런데 해방은 가져오지 않으면서 메시야로서 주장을 하니까 참람죄로 몰아 죽인 것이다.


그보다 1세기 더 지나서 135년 바 코크바 전쟁 때 그가 메시야로 선언됐다. 자기도 자기를 메시야로 선언했다. 그리고 로마하고 게릴라 항전을 했다. 자기도 메시야로 선언하고 다 그를 메시야로 선언했다. 로마에서 독립을 가져올 것 같으니까 다 그렇게 인정했다.


그런데 예수 자신은 독립을 가져오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러니까 신성모독죄로 참람죄로 죽인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죽은 그가 우리의 구원자가 되는지를 그 죽음이 복음서에는 없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요한은 그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사역이 모두 하나님의 구원사건이다. 그러니 바울의 해석이 구원계시가 되고 계시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역사의 증거는 신약에서도 선포되고 잊혀진 역사다. 신약과 구약간의 구조의 유사성은 바로 구약에서 신약으로 내려오는 바로 이 전승사 유전의 구조적으로 맞아 들어가는 것이다. 전통의 내용 때문에 그렇다. 구약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이 신약에서 역사하신 그 하나님이라고 말씀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지상 역사에서 생존하시고 그 행동을 새로 해석하고 현재화하고 그리고 선포해야 하는 것이 구원사적 해석의 사역이다. 구약의 본문들은 선포된 걸음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냥 사건들의 기록이 아니라 선포된 해석이다. 그렇게 해석해야 한다. 구약의 본문들은 설교로서 들으면 현재 교회에서 그 전통을 현재화하고 실재화 없이는 안된다.


그러니까 구약의 이 역사적 사건들 전통들을 새로 해석해서 우리가 서로 이해될 때만 그 유전이 우리에게 역사하지 그냥 놔두어 가지고는 안되는 것이다. 여기서 긍국에는 구약의 본문 말씀들이 현재 신약으로 사는 기독교 교회에 어떻게 선포될 것인가 문제이다. 그러니까 완성된 역사가 지금의 신약 교회도 무슨 자리를 갖느냐 그럴 때에 바로 이 해석을 해서 하나님의 사역으로 선포하는 길이다.

 

2.이스라엘의 구원사적 신앙관


 두번째 이스라엘의 구원사적 신앙관.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은 이스라엘의 후기에 와서 신앙고백이 하나 있다면 유일신 교리다. 신 6:4의 유일신 교리다. 그런데 누가 다 보면 아는 보통 문장으로 써 놓은 명제로서의 교리 체계가 없다. 희랍인들이 아는 그런 역사 주석이 이들에게는 없다. 이것은 항상 하나님의 창조적 말씀에 의해서 결과한 역사를 증거하는 것이 신앙고백이다. 역사하고 떨어져서 신앙고백이 따로 떨어져서 있지 않다.
 
 
그러니까 역사는 늘 하나님의 말씀이 이룩한 역사라고 하는 것이 교회의 신앙고백이다. 그러니까 교회의 신앙고백은 늘 이 지상의 역사에서 일어난 구체적인 사건들을 상관한다. 그것을 떠나서 이렇게 객관적으로 제 3자가 반성을 해서 나온 그런 의미가 구약에 전혀 없다. 사실들이 왜 우리에게 구원사적으로 의미가 있느냐? 신앙의 의미로 해석하기 때문에 그런다. 그 사건을 하나님의 사역으로, 신앙으로 해석한다. 그러니까 신앙고백과 사실간의 사건과 선포가, 신앙과 역사가 항상 긴밀히 뗄 수 없도록 결합되어 있다.


그러면 신앙고백이 사건이 생긴 후에 조성해서 나왔느냐? 그게 아니다. 그렇게도 있지마는 대개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선포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실을 이루실 것이다. 그러니까 선지자적 사실들이 진행될 때 사건이 일어난다. 그리고 말씀된다. 그러니까 바로 신앙으로 해석된 그 신앙의 고백대로 사건을 이해할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성립하지 않는다.


왜 느브갓네살 왕이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멸망시켰느냐? 아까 말한대로 정복자로서 대제국을 정복하고 싶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통일된 제국이 섰을 때 늘 침략 당해 왔다. 몽고의 징기스칸에 의해서 나라가 통일되니까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청나라가 생기니까 그들의 지배를 받고 한나라가 섰을 때 한사군이 왔다. 당나라가 있을 때 그 군대가 와서 삼국을 통일시켜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이런 식으로 중원에서 통일이 되며는 그 여파가 언제나 한반도에 밀려왔다. 그렇지 않은 나라가 약체국인 송나라다.


강력한 군대가 들어설 때는 항상 우리에게 정복자의 침략이 있었따. 그런 침략은 정복자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서 일어난 사실로 이해된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느브갓네살의 그 원정을 그렇게 이해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죄를 위해 만드신 하나님의 채찍이다. 그러니까 느브갓네살한테 가서 순종한다.

 

그러니까 신앙고백으로 살 수 있다. 늘 함께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크신 사역들을 자랑하는 것은 순전히 느브갓네살 왕이 세계를 정복하여서 대 통일제국을 세울려고 하는... 또 고레스가 일어나 페르시야를 이루었다. 고대 아시아 국가 중에서 제일 큰 나라요 제일 오래 지배한 나라도 페르시아이다.

 

왜 그렇게 했느냐? 유능한 왕이니까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어떻게 이해를 했느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해방시킬려고 고레스를 기름부어 세웠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역을 자랑하는 것은 그런 역사가들이 아는 의미로 역사를 해석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선지자적으로 이것을 끌어올려서 하나님의 사역으로 규정했다.


그러니까 이것이 신앙고백으로 성립된다. 그런까 과거를 항상 객관적으로 대상으로 보지 않고 예표론적으로 확대되었다. 이미 있는 것은 오실자의 거울의 상으로 종말론적인 성취 예표론으로 하나님이 고레스 왕을 세워서 중동지역을 다 통일했다. 파샤와 알렉산더 중 누가 더 넓은 줄은 모르겠지만 파샤는 동양인이 세운 세계 제국이다. 이것이 멸망하고 알렉산더 제국이 세워졌다. 그것 때문에 역사 주도권이 서방 사람으로 넘어온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파샤의 나라의 싸움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완전한 구원을 이루시기 위한 사전의 사역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니까 종말론적인 성취 예표니까 이 역사에는 하나님이 항상 미래에 어떤 큰 구원을 이루실건가 하는 미래가 역사와 함께 결합되어 있다. 역사는 미래가 와봐야 아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은 미리 역사를 알고 있다. 왜? 이런 일들이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성취를 위한 예표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였으니까 그렇다. 진짜 완전한 구원이 미래에 온다. 이스라엘이 역사를 이해하는 이해는 다른 이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러니까 신앙고백이 항상 사실적으로 일어난 사건에 정체되어 있다. 만일에 사실로 일어난 지상의 역사와 관련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앙고백이 아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시간적인 신학을 해야 한다. 역사하고 떼어가지고 사건하고 떼어가지고 하나님의 구원섭리만 말하면 그것은 신화가 된다. 사가가 된다. 사가하고 신학하고 차이가 뭐냐? 역사 이전의 일이니까 신화는 이 세상의 일을 저 세상의 일로 표현한다. 역사에서 떼어내 버리면 이스라엘의 신앙고백도 신화가 된다.


그런데 구약의 선포는 항상 지상역사에서 자기들이 경험한 지상역사에서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지상의 역사를 하나님의 인도와 주권과 심판들로 이해한다. 하나님의 일로 축복, 시간 그것이 구약의 선포 구약의 규칙이다.


구체적으로 일어난 역사적 경험이 지상에서 일어난 사건을 하나님의 인도로 하나님의 축복으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한다. 그러니까 구원사적 해석은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사실들을 이 신앙고백으로 이해할 때만 가능하다. 이 신앙고백이 증거된 것들이 역사성과 함께 넘어지고 함께 선다.


그러니까 역사는 빼어버리고 거기서 의미만 찾으면 안된다. 불트만 같은 사람은 현대에 와서 과학적으로 안 맞으니까 역사적인 사실은 포기하고 거기서 종교적 의미만 찾아낸다. 구약과 신약에서 역사는 빼어버리고 종교적 의미만 찾아서! 그러니까 성경의 무오성은 매달린다.

 

실제로 우리가 증거한 사실들에 역사성이 넘어져 버린다면 우리의 신앙고백은 끝난다. 그러니까 신앙고백하고 역사적인 사실하고 일치해야 하고 해석은 신앙고백하고 결합되어 있는 역사에서 분리해 내서는 안된다. 또 해석은 신앙고백 없이 떼어내서 설명하면 안된다.

 

 둘을 함께 어떤 신앙고백에서 이 역사를 이해했는지 이 역사에서 어떻게 신앙고백이 바로 노출 되었는지 봐야 한다. 그것이 구원사적 해석이 할 일이다. 내가 바로 구약에서 가장 어렵게 이해되는 것이 에스겔서다. 왜 그러느냐? 환상중에 진행되고 있으니까 그렇게 환상중에 진행되고 있는데 여기보며는 에스겔 골짜기가... 37:1-11을 보자.


겔 37:1-1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 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이 사건이 언제 일어난 사건인가? 에스겔이 포로중에 예언한 선지자이다. 이것이 역사적인 사건이냐? 아니다. 그러면 뭘 뜻하느냐?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느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가서 다시 민족을 이룰 것을 말한다.
그런데 세대론자들은 글자 그대로 해석해서 이것이 주님 재림 때 이루어질 사건이다. 그러니까 항상 신앙고백이 사실들과 함께 있기 때문에 항상 구원사적 해석은 사실들을 해석할 때 사건들을 함께해서 해석해야 한다. 그러면 구약과 신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구약의 모든 중심이, 목표가 그리스도이고 그의 성취가 바로 그리스도이므로 그리스도에 의해서 신약에 의해서 구약을 이해하고 해석해야 된다. 어느 빛에 의해서 구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바른 이해냐? 그리스도의 빛에 의한 것이 바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남는 길이 전 유대인들이 율법을 유일한 삶의 길로 생활의 길로 한 것처럼 유대주의가 된다. 또한 영지주의가 된다. 지난 역사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다 무시해 버리고 영혼의 구원만을 말하면 영지주의가 된다.


그러니까 구약은 신약에 의해서 반드시 해석되고 이해해야 한다. 구약을 해석하는 문맥이 신약이다. 그러니까 해석하는 과제는 신약과 구약의 차이를 인위적으로 억지로 말하는 걸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의 근본 문제점은 양 성경의 메세지가 어떻게 서로 연관되며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실 당시 구약을 이해하는데 무엇을 뜻하는지 그것을 묻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구약하고 어떻게 연과되어 있느냐?

 

양 성경이 어떻게 통일성을 갖느냐? 그리스도의 출현은 우리 신약의 저자들 눈에는 모세로 새 아담으로 그렇게 기술해 놓았다. 마가복음도 1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환경에서 지내는가를 기술한다. 40일을 광야에서 지내신다. 광야는 그냥 광야지마는 동산은 아니고 광야지마는 시험받는 일과 들짐승과 함께 사는 일과 천사들의 수종을 말을 하므로 아담하고 대비를 시킨다.

 

 아담이 동산에서 짐승들과 함께 살았다. 그때는 아직 하와가 생기기 전이다. 그리고 천사가 수종들었다. 첫 아담의 경우에도 하나님의 천사가 함께 했을 것으로 본다. 대비를 시키면 새 아담이라고, 산상수훈을 말하는 그리스도를 새 모세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구약의 눈으로보면 전적으로 새로운 사건이다. 또 그리스도 출현이 그렇게 보면 양 성경의 통일성이 어디에 성립하느냐? 교회가 양 성경을 하나의 정경으로 결합했는데 구약교회는 구약 밖에 없다. 그런데 구약과 신약을 함께 가진 것은 교회일이다. 교회가 정한 일인데, 그러면 차이는 어디에 성립하느냐? 두 성경의 차이는 물론 이 양 성경이 통일성을 갖는 것은 두 성경이 완전히 교리가 같아서 하나라 그런 것이 아니고 그냥 성경을 결합하는 것은 지상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행하신 사역을 증거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잘못은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자기들의 것으로만 생각했다. 전 인류를 위한 사역으로 보지않고 자기들만 생각했다. 그러니까 천년왕국 메시야 왕국이 다가온다. 옛 언약의 역사에서 일하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증거한 하나님과 구약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이 동일하신 한분이라는 신앙고백이 성립했다. 구약에서 구원을 위해 역사하신 하나님이 신약에서 그리스도에게서 아버지로 증거된 그분이 구원을 이루셨다는 고백이 성립한다.


그런까 옛 언약과 새 언약을 결합하는 그 연속성과 통일성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사 선택하시고 그리고 구속과 심판에서 역사하셨다. 구약의 역사를 부르심으로 시작한다. 창세기 12장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 선택한다. 부름 그것이 선택이다.

 

또 선택해서 이스마엘과 이삭에서 이삭을 선택하시고 그리고 야곱을 선택하시고 그리고 야곱의 자녀들에게서 12자녀를 선택하시고 그들의 구원자로 요셉을 선택하시고 그리고 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고 구속하시면서 남은자들을 선택하시고 마지막 마리아를 선택하셨다. 마리아가 이스라엘의 선택의 목표다. 그리고 구속과 심판에서 역사하신다. 하나님의 창조주 구원사역이 늘 새롭게 역사해 들어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구원을 역사하시기 때문에 이 역사의 내적인 연관하고 마지막 목표를 향해서 달음질 되는 것은 왜 그렇게 목표로 나아갈 수 있느냐? 하나님의 약속인 신실성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니까 이 양 성경을 함께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이 신약에서 일하시는 동일하신 하나님이라는 역사성 사역의 연속성을 부정해버리면 안된다. 구원사역을 구약에서 이루신 하나님이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렇게 이루시기 위하여 일해오셨다. 여기에 성립한다. 늘 이 역사내에서 사역의 계속성을 늘 해석할 때 염두에 둬야 한다.


신구약의 역사와 증거가 상호 귀속하여 그들 상황에서 해석해야 한다. 신약에서 구약을 해석하고 구약이 신약을 해석할 때 그러니까 늘 구약에서 시작해도 신약에 오고 신약으로 시작해도 구약으로 끝난다. 항상 해석할 때는 하나의 원이 성경을 연결하는 원이 성립한다. 그러니까 구약을 바로 이해할려며는 신약의 증거를 들을 때만 바로 이해된다.


그리고 신약을 바로 해석할려면 또 구약을 함께 읽을 때만 바르게 도니다. 왜냐하면 양 성경의 증거가 바로 이스라엘과 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됐다 하는 데 성립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미완성 작품이다.

 

구약에서 구원을 위해 역하하신 하나님이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셨다는 것을 빼버리면 미완성 작품으로 남는다. 반대로 신약의 증거는 구약을 증거를 함께 들면 바로 이해된다. 왜? 신약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구약도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때문에 그렇다. 양 성경이 함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구약을 주권적으로 전폭적으로 해석하고 동시에 구약이 그리스도 사건을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 이해 해석한다. 이런 양 성경은 원으로 원형적으로 상호 연관시키는 해석이 해석학에 늘 빼놓으면 안된다.


그리고 우리가 예표론으로 구속사적으로 성경을 바로 이해하고 구약을 이해할 때도 그것만 빼가지고 그것만 보지 말고! 그렇게 보니까 구약이 축복의 교과서이다. 한국교회는 아브라함이 많은 자녀를 갖는 것은 하나님을 잘 믿어서 그런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니까 근본 이스라엘 축복을 지상적으로 이해한다. 신약과 연관없이 구약만 보니까 하나님이 그냥 축복해 주시는 것만 보인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믿는 그 하나님을 우리도 믿으면 우리도 그렇게 복 받는다. 이런 해석만 한다. 그러니 인기이다. 신약의 모든 사상이 하나님의 사상 속에 뿌리박고 있다. 그러니까 신약을 해석할 때 해석의 배경이 어디냐 그럴 때 몇 가지 예가 있다. 일부 다이스만 이런 사람들은 신약을 이해하는데 거의 유대교의 묵시문학적인 그 주변이어야 한다.
 
불트만과 그 선생들과 그 후계자들은 신약을 바르게 이해하는 배경을 헬레니즘 시대의 배경이다. 그렇게 설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사적으로 바울에게 있는 이 속죄사상 피로 속죄된다는 사상이 어디서 왔는지를 따져 올라간다. 이 종교에 의하면 중생을 이렇게 말한다. 소를 잡아서 통나무 관에 올려놓고 피를 뚝뚝 흘리면서 그 밑을 왔다갔다 하면서 피를 맞으면 중생한다.


그러니까 불트만의 이해에 있어서 이 바울의 중생의 속죄 교리가 이런 동방에 근거한 헬레니즘 시대의 종교사와 같다. 그리고 인간이해가 근본적으로 그노시스주의의 이해다. 그것을 따져 올라간다. 신학을 이해하는 근본 배경이 헬레니즘 식이다. 그리고 반대 속에 있는 사람들은 유대교다. 그런데 우리의 바른 태도는 신약을 바로 이해하는 길은 구약이 정경의 범위를 결코 넘어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양 성경의 목소리를 항상 함께 들어야 된다. 신약 이해의 배경이 종교사 계통 양식사 계통은 헬레니즘 배경으로 모든 신약의 사상들이 거기서 왔다고 한다. 구약을 종교사학파 궁켈 이런 사람들은 바벨론이라든지 그 이상에서 온 것이다. 또 신약을 이해하는 다른 극은 유대교와 묵시문학이다.

 

 우리가 서 있는 바른 자리는 신약을 바르게 이해하는 배경은 구약이다. 이 연관, 늘 구약교회의 선택과정에서 역사하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아버지 신약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말한 그 하나님이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


묵시문학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적 사역이 하나의 통일성을 형성하는데 그것은 역사에서 직접 끌어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신실성과 약속에 감춰져 있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니 신약이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 것이다. 그것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약속의 성취이다. 성취를 이루시기 위해 모든 역사에서 하나님이 일해 오셨다. 그러지 않고 그것을 빼버리고 이해를 하며는 세대론자들이 구약교회와 신약교회가 연관이세대론자들에 의하면 신약의 교리는 거의 선지자들이 없다는데 도달한다.

 

거의 알지 못한다는 논리이다. 그러니까 간주곡으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것이다. 우리가 이해할 때에 한 성경 해석에 다른 성경의 목소리를 계속적으로 함께 들을 때 양 성경의 증거를 바르게 할 수 있다. 우리 한국에서는 대개 구약학자들이 구약만 알고 신약은 모르고 신약학자들은 신약만 알고 구약은 모른다. 이것이 단점이다.

 

구약도 신약과 연관 없이 신약도 구약과 연관 없이 말한다. 한 성경을 해석할 때 다른 성경을 함께 들어야 바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니까 구약이란 말은 유대교에 없다. 없는 말을 구약이라고 붙혀서 정경으로 정한다면 신약 때문에 그렇다. 신약과 연관해서 그렇다. 그러니까 교회가 구약을 그냥 아무 전제없이 읽는다.

 

그런 것은 말이 안된다. 항상 구약이라고 하는 말은 교회서는 신약과 연관해서 읽어야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교회가 구약을 정경으로 넣었는데 교회가 구약을 정경으로 정함으로 구약을 어떻게 읽고 이해할 것인가를 말해준다. 구약이 바로 신약 없이는 완결되지 못한 책이고 생명이 없다. 이런 것을 분명히 한다. 구약의 모든 성취가 신약이다.


그런데 동방에 있는 김재준 박사는 "옛날 고대에 이스라엘의 문서 중에는 잠언이라는 것이 있었는데"라고 쓴다. 구약과 신약을 연관된 통일된 책으로 안봤다. 우리는 그것을 그렇게 받지 않고 교회가 구약은 인간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역사적 사역의 증거로 읽는다. 뿐만 아니라 구약사건들 자체를 넘어서서 그리스도를 목표하고 진행된 역사다. 그리고 그 목적에 도달한다. 그러니까 신약의 증거로부터 구약을 읽을 때만 구약이 바르게이해된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학자는 히브리어만 잘하면 구약학자가 아니고 희랍어도 하고 신약으로 구약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때만 구약학자가 되는 것이다. 신약학자도 희랍어보다 히브리어를 더 잘해가지고 신약에 비추어서 구약을 바르게 이해할 때만 신약학자이다. 그런데 그렇게 못 가르친다. 수준이 낮아서! 그러니 구약한 사람은 구약만, 신약한 사람은 신약만 한다.

 

 그러니까 옛날 사건으로만 이해한다. 옛날 이스라엘이 어떻게 제사를 지냈는가 그거나 말하지 그리스도하고는 연관짓지 않는다. 바른 구약 이해가 아니다. 전혀 생명을 상실한다. 구약이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를 못가진다. 맨날 고대 이스라엘의 문헌 중에 잠언이라는 것이 있다.

 

그거와 무슨 차이가 있느냐? 이스라엘의 제사제도도 상관이 없다. 그러니까 레위기를 읽어도 괴롭기만 하다. 복잡하고! 그런데 주님 자신은 구약을 그렇게 이해하지 않았다. 문둥병자를 집에 돌려 보낼 때에도 그냥 돌려 보내지 않고 먼저 제사장한테 가서 제사장에게 보여라.

 

정결의 법으로 제사하고 제사장의 정결 판결증서를 가지고 가서 집에서 사는 것이다. 그리고 정결의 제사가 주의 피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해해야 바르다. 그러니까 해석을 하는데 한 본문을 해석할 때 항상 그 문맥만 연관해서 해석해야 한다. 한 문장의 문맥이 그 책이 될 수 있고 장이 될 수 있고 구약이 될 수 있고 신약이 될 수 있고 전체가 다 된다. 그런데 우리가 문맥을 뭐라고 말했느냐 신약에 비춰서 해야 한다.


그러니까 항상 해석학적 원이 늘 그 한부분 부분이 전체 이해를 돕고 전체 사건이 조직 구도에서 부분 부분을 이해한다. 그 부분만 떼어서 구약 그 부분만 이해하고 말아버리면 안된다. 왜 출애굽이 생겼느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과 자손을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

 

그러면 구약으로만 끝나는 것이다. 신약과 연관해서 이해한 것이 아니다. 그러면 별 상관이 없다. 그러면 우리에게 출애굽이 고맙고 좋은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항상 구약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해석학적 이해는 전체 사건을 전제해야 한다. 신약을 전제해야 한다. 전체 사건이 그리스도 사건이다.

 

전체가 늘 귀결되는 결말이 다 그리스도 사건이다. 그렇게 연관해서 구약을 이해해야 바르다. 왜? 그리스도 사건이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사역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왜 중요하냐?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사역이기 때문에 그렇다. 거기다가 연결해서 구약을 다 이해해야 된다.

 

구약의 제사와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과 모든걸 다 그런 의미에서 이해해야 된다. 그러니까 항상 구약을 해석하는 가장 합당한 문맥은 신약의 그리스도다. 이 문맥 내에서 구약의 증거가 전체 사건의 한 부분으로 자리를 갖고 바르게 이해된 것이다. 구약만 이야기하고 이렇게 신약의 증거에 그리스도의 증거에 함께 연관해 이해해서 말하지 못한 구약학자는 유대교다. 분명한 의미에서 기독교 구약학자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전체 문맥에서 통일성을 배제한다.

 

 그 시대 시대별로 각각 목소리만 듣는다. 전체 통일된 전체 구도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새 구원사역 종말론적 구원사역을 통해서 이 문맥이 확정된다.그러니까 구약을 해석할 때 그 해석이 구약교회만 머물러 가지고는 안된다. 구약내에만 머물며는 아까 말한대로 구약학 학자지 기독교 신학자가 아니다.

 

그렇게 보면 유대교 회당장들의 구약이해도 바른 이해가 아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연관이 전혀 없다. 그러니까 후기 유대교 전통에 따른다. 구약은 그냥 율법으로만 이해되는 것이다. 그래서 궤변론, 신비주의 종교철학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계명을 약속으로 받았는데 이스라엘이 율법교회가 됐다.그러니까 이스라엘에 준 그 약속을 율법의 그늘 아래서 이해한 것이 후기 유대교 오해다. 바울은 뭐라고 말했느냐? 계명을 약속 밑에서 이해해야 한다. 갈라디아서 5장이 그렇다. 그런데 유대교는 그리스도와 연관해서 읽을 수 없고 약속을 율법 아래 계명 밑에 다 종속시킨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인정 안하고 배척한다.


그러므로 유대교의 해석을 구약해석의 문맥으로 본 받을 수 없고 고대 동방 종교들의 발전사의 하나로 보는 이 종교사적인 이해도 구약이해의 문맥이 될 수 없다. 이 사람들에게는 구약의 이스라엘에 종교라고 하는 것이 그 전부터 발전해온 종교의 마지막 꽃이다. 의식 그런 것들이 제일 발달한게 구약교회다.

 

그 종교사가 마지막 똧이 구약교회의 의식으로 본다. 그러니까 전혀 이 종교사적이 이해방법도 결코 구약을 이해하는 바른 법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니까 의식 자체만 중요시하지 그 의식이 제사가 어떻게 시약에 연관되는지 전혀 말하지 않는다. 그 앞에서 조그마하게 발전된 것들이 이스라엘에게 와서 얼마나 꽃피었느냐만 밝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의식 자체의 소중함을 널리 드러낼 뿐이지 그리스도와 연관은 안된다. 그것이 종교사학파의 한계점이다. 그것도 우리가 전적으로 배척한다. 그 다음에종교철학 방식으로 구약을 이해하는 종교적 이념을 가치들을 항속적이고 보편 타당하고 초자연적인 것으로 보고 그런 것들이 나왔다고 본다. 그러니까 그 희랍철학의 영향 아래서 가장 이데아가 잘 구현된 것이 특수한 종교적 인물들에게 있는 걸로 보는 것이다. 이런 이해도 전적으로 배척한다. 이렇게 볼 때 구약을 해석하는 합당한 문맥은 신약 뿐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사역을 다 이루셨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에서 이제까지 하나님께서 역사해오신 모든 구원사역의 목표점이었다. 그러니까 신약을 빼놓고 구약을 바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목표로 하고 진행된 역사 이 역사가바로 하나님께서 창조하고 이루신 역사다. 이 신앙에 근거해서 구약해석의 문맥으로 신약이 결정된 것이다. 그러니까 구약은 구약 자체로 종결된 역사가 아니고 그것을 넘어서서 그리스도에게로 나가서 거기서 성취된 하나님의 사역으로 이해할 때 합당하게 해석된다.


역대하 마지막장 마지막 부분을 보자. 22절부터 구약 맛소라에서는 이 역대하 이 부분이 성경 마지막 부분이다. 이것만 보면 완결된 역사가 아니다. 시작만 말했지 결말이 없으므로 열려져 있다. 열어놨다. 일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 어디서 끝나는가? 고레스가 명해서 지으리라는 성전이 마지막 훼파되어 버릴 때 끝난다.

 

그러니까 구약은 구약으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고 구약 자신을 넘어서서 그리스도를 목표하고 진행되어도 이제 성취됐다. 그리고 성취로 부터서 약속들을 진행들을 이해해야 바른 이해다. 그러니까 구약 본문들의 그 자체 이해는 그 자체에서 확인되지 않고 그리스도에게로 향하여 운동하는 역사하고 연관해서만 확신된다.


그러니까 신약이 구약을 해석하는 사전의 원리이다. 신약이 증거하는 나사렛 예수가 이스라엘 안에서 이스라엘에게로 오셨고 그리스도께서 오심은 모든 사람과 전세계를 위해서 오시이다. 이스라엘의 이해는 항상 기독교 세대론과 마찬가지인데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안에 오셨고 이스라엘에게로만 오셨다.

 

그러니까 종말 때 가서는 메시야 왕국이 꼭 이루어져야만 한다. 지금은 성경학자들에게 종말에 대한 이해, 천년왕국에 대한 이해가 아주 넓게 퍼져 있다. 그것은 구약과 신약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니까 생기는것이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책을 분리할 수도 없지만 더더구나 이스라엘을 예수에게서, 예수에게서 이스라엘을 분리할 수 없다.


그런면 일관성이 있어야 되는데, 결국 그리스도와 연관없이 그 자체로만 이해하며는 각 시대별로 각각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이 된다. 그래서 복고풍이 되어 버린다. 사사기에서는 뭘 말했고, 여호수아는 뭘 말했고, 룻기에선는 뭘 말했고 그런 이야기 뿐이다. 전체로 문맥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 않다.

 

 그것만 보며는 구약신학 해석이 필요가 없다. 그것만 보며는 되니까 구약이 전체로 말하려 하는 것이 나타나지 않는다. 예수가 이스라엘에 오셨고, 그러므로 세상에 오셨으면 그가 바로 우리가 들어야 할 구약의 해석하는 문맥이다. 그리스도로 구약을 해석하는 문맥으로 분명히 해야 한다. 구약만 해석한 사람은 유대교 구약학자이다.


3.삼위일체론적 해석


 다음으로 삼위일체론적 해석이다.
신약은 구원사적 전체를 세상과 선택한 교회에 말씀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사역으로 이해한다. 교회에게만 이스라엘에게만 아니고 세상과 교회 전체에 향하신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다.


이것이 구약 해석에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구약 옛 언약에 약속하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바로 구약도 세상과 교회에 향하신 하나님의 창조사역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구약의 역사도 항상 그 역사를 삼위일체론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선택과 언약, 약속과 성취, 축복과 심판에 나타난 것은 늘 이런 것들로 뭘 목표하는가? 성령을 목표로, 아들의 오심을 목표로 하고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이다.


하나님이 선택하고 언약을 주시고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언약을 주시고 출애굽해서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을 분명히 해서 언약을 주시고 그래서 출애굽기 20-22장까지는 언약장이다. 거기에 계명이 들어가 있는데 언약책이라고 한다.
그리고 약속하신 것이 성취됐다.

 

궁극적인 성취는 아니어도 아브라함에게 씨를 약속하셨는데 430년 후에 4-5백만이 되어서 나온다. 장년 60만이니까 전체 인구가 6백만이 된다. 그 약속이 출애굽 때 성취된다.


그 다음에 언제 원천적으로 실현되느냐? 여호수아의 땅의 정복으로 실현된다. 완전한 성취는 다윗 때다. 그런데 다윗도 미완성이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에 가까이 땅을 늘렸지만 실제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사 유브라데 강까지 나일 강까지 그렇게 경계가 넓지못했다. 이런 약속과 성취, 축복하고, 심판하고 모든 역사들이 뭘 목표했느냐?

 

 아들의 오심을 목표로 하고 이루어진 창조사역이다. 아들의 오심을 위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옛 언약의 첫 역사가 그리스도를 목표로 하고 나아가고 그리고 구원의 사건은 왜 구원의 사건이 되느냐? 그리스도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구원의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때 이것은 조상들에게도 그러하고 홍해 교회에게도 그러하고 포로 이후 성전교회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에 이를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표현한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므로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구약이 죄로 타락해서 이제 마지막 남는 길이 무엇이냐? 마지막 심판 뿐이다. 마지막 심판으로 나아가는 인류에게 그것을 구속하려는 하나님의 역사다. 그 역사 시작이 이스라엘에게서 시작되서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됐다. 죽음에로 나아가고 있는 세계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역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이 상실되어 죽음 밖에 없는 세상에 행하신 사역이 구약에서 하나님의 사역이다. 삼위일체 사역이다.


그러므로 본문도 삼위일체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삼위일체론적인 해석은 옛 언약의 역사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아버지의 사역과 선지자의 멧세지와 교회신앙을 위해 역사하신 성령의 사역을 묻는다. 왜? 교회가 성령의 열매니까! 또 이 해석은 기독론적인 해석이다.

 

 왜? 이 모든 성령의 사역과 아버지의 사역이 아들의 오심을 목표하고 그리고 그의 영화와 연관되어 있기 대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삼위일체 해석이 기독론적 해석이다. 기독론적 해석이 삼위일체 해석이다. 우리가 구약을 이해할 때 신앙고백이 2조하고 연관하지마는 3조 교회론적인 신앙고백과 연관해서 풀어야 한다.

 

왜? 교회가 성령의 사역이니까 창조사역의 결과다. 하나님의 백성됨, 하나님의 백성 만들어 내심이 이것이 마지막 목표가 아닌가! 그러니까 기독론적으로만 아니라 교회와 연관을 해서 성령의 사역과 연관해서 늘 봐야 한다. 그러니까 아들의 사역, 기독론적인 사역을 교회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로 삼위일체론 해석의 방식이 되는 것이다. 항상 이 세 가지가 아버지의 사역, 아들의 사역, 성령의 사역이 항상 한 교리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만물의 창조주이신데 만물의 주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일을 시작하셔서 이스라엘과 모든 민족의 결국 목표인 아들의 오심으로 교회를 창조하고 교회를 유지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한 고리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구속사역을 이루시면서 교회가 생겨났다.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의 백성 만드신 것이 모든 구원사역의 목표다. 구약에 증거된 전 사건이종말론적인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관련되었으니 늘 해석 작업을 하기 전에 이미 사전에 문맥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귀결에 다 해서 그리스도에게로 이른 것이 아니라 이 신앙고백 때문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사건이 해석작업에 그 문맥으로 미리 주어져 있는 것이다. 이 연관성은 종말론적인 성취와 위기와 동일성과 개입으로 이해할 수 있다. 종말론적인 성취,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다.

 

종말론적인 성취와 폐지, 그리스도에게서 모든 것이 성취되므로 구약의 모든 제도들이 폐지된 것은 어떻게 된 것이냐?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영화에서 실제가 됐다. 그러니까 구약의 모든 것이 종말론적인 성취와 폐지이다.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영화, 교회가 이루어지면서 실제가 된 것이다.

 

종말론적인 성취에서 신약은 모든 강조로 강조하기를 옛 언약의 약속과 기대가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됐고 또 궁극적으로 성취될 것이다 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성취된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우리는 이제 신약을 이해할 때에 구약의 성취이기 때문에 약속과 성취가 신약에서는 더 없는 것처럼 생각하기 쉬운데 그런 것이 아니고 구약의 모든 약속들이 신약에 다 성취됐는데 신약에서도 그 성취된 성취가 궁극적으로 완성될 것을 또 기다린다. 약속으로 남아 있다. 약속과 성취의 모든 도식은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로 성립한다.


그러니까 새 하늘과 새 땅,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다. 언제 궁극적인 성취가 이루어지느냐? 그리스도 재림 때 신천신지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우리는 루터 교회나 다른 교회처럼 영혼만 구원에 이른 것이 아니다. 루터교회는 종말이 되면 우리의 구원받는 영육하고 선한 천사들만 남고 창조가 전부 다 해소된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모든 만물이 회복된다. 그러니 신천신지가 된다. 이렇게 루터교회와 우리와 차이가 많다. 하늘과 땅의 차이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이미 그리스도를 선한자와 영화자로 동시에 증거가 됐다. 그리고 여러 방식으로 여러 모양으로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마지막 말씀이 바로 그리스도다. 그러니까 새 교회 즉 신약의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모든 구약의 사역이 목표에 이르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아담을 연구하면서 갈라디아에서 교회가 참 이스라엘이라 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아브라함이 모든 믿는 자의 아버지이다.


갈라디아 4:11에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할례받은 후손들의 조상으로 보는데 그 실제로 구원에 이르는 길은 할례 전의 믿음으로 의롭다. 그러니까 할례를 안 받고 의롭게되는 모든 참 교회의 아버지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조상들의 아버지께서 역사하사 택하신 자들을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그의 약속을 이루어 내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들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이 내 때를 보고 기뻐하고 기뻐하였다.


요한복음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이것이 성취이다. 반면에 종말론적인 폐지, 예수의 비판은 유전 뿐만 아니라 구약 자체에도 행해졌다.마태복음 5:20을 보자. 복음과 율법을 쓸 때에 그리스도의 비판이 유전들에게만 향했다고 하는 이해 때문에 그 전통적인 이해 때문에 70인 본문을 전부 대조했다.

 

그런데 70인 본문의 구약에 있는 본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용하고 글자 그대로 동일하다. 그래서 유전에 랍비들의 가르침에 연결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간음하지 말라 했지마는 그러니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종말론적인 구원이 열린 이후에 옛 질서와 옛 법들이 폐지되어 무력해진 것이다.


이제는 우리에게 그 옛 질서와 옛 법이 죽일 수도 없고 살릴 수도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에게서 전적으로 무관하게 됐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구약의 율법이 우리에게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새 언약에서는 하나님은 자기의 값없는 은혜로 새 시작을 열으셨다. 구약도 마찬가지다. 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자들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이다. 구약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 사역이 자기들만 위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신약에 와서 바울의 이해는 그게 아니다. 세상 모든 죽은 자들을 살리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역으로 이해했따.


그러니까 유대교와 기독교의 구약에 대한 차이가 거기에 있다.
지금 세대론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마지막 사역이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다. 세대론이 사탄적인 기도라고 했다. 그래서 욕을 먹었다. 그러고 보면 진리에 대해서 다 적개심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새 언약으로 넘어오기 전에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에 하나님의 심판이 서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심판해서 멸해 버리셨다. 예루살렘 성전만 멸해 버리신 것이 아니고 바 코크바 전쟁 때 맨 마지막 마스라 성에서 마지막 게릴라전을 하다가 로마군인의 손에 의해서 완전히 타도됐다. 그 때부터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서 살지 못하도록 됐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불레셋 사람들이 됐다.

 

그래서 가나안 땅이 팔레스타인과 불레셋 땅이 된 것이다. 그후 팔레스타인이 1800년동안 살아왔는데 오늘날 이스라엘이 돌아와서 쫓아내 버렸다. 그러니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과 감정을 해속하기 힘든다. 이스라엘이 떠날 때는 사막의 이슬리 그쳤는데 이스라엘인이 오자 이슬이 내렸다.


어떤 면에서도 이사야의 예언대로 된 것이다. 그러나 심판이 서 있다. 그것을 이해 못하니까 종말론에 있어 문제가 많다. 여기서 하나님의 언약과 선택들이 잘못된게 아니다. 왜 그렇게 심판하실 수 밖에 없느냐? 하나님의 율법은 거룩하고 선한 것인데 인간의 연약과 인간의 죄 때문에 실패했따.

 

하나님의 언약이 실패한 것이 아니다. 언약을 지킬 수 없는 인간의 타락한 연약에 의해서 실패한 것이다. 인간이! 비록 그래도 하나님의 언약 자체가 무너진 것이 아니다. 그런데 왜 문제가 생기느냐? 그 언약에서 자기의 의로움을 세울려고 하기 때문에 부서진다. 하나님의 언약이 해소되고 부서진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 것이다. 인간이 언약에서 넘어졌다. 하나님의 구원질서에서 인간이 부서지고 나태한 것이 신약과 구약의 중간기간에 실패한 것으로 서 있다.


그러니까 자신으로 부터서 새로운 시작도 이룰 수 없다. 그래서 연속으로 되지 않음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구약의 모든 마지막 제도를 하나님이 심판해서 헐어 버리셨다. 새것으로 이루시기 위해! 이 면에 있어서 방언도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 팔머 로벗슨 교수가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방언의 운동을 해석했따.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경내에서 방언이 일어난 것은 결국 이스라엘 민족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끝장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다. 참 바른 해석이라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바로 그리스도께서 뭐라고 했느냐? 하나님의 밭을 추수를 많이 해서 상을 많이 줄 이방인에게 넘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상실된 자들에게 행하심으로 새 시작이 열린 것이다. 이 귀결에서 볼 때에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율법을 마침이다. 이 종말론적인 성취와 무력화는 신약에서 마감된 것이 아니라 이것은 구약에 전적으로 타당하고 그래서 이 성취와 무력화가 일부에만 타당하고 나머지는 타당하지 않는다. 그게 아니고 전체 다 타당하다. 그래서 이 성취와 무력화를 구약 각 본문에 적용시키므로 문맥이 신약에 의해 합당한 것으로 할 수 있다.


구약과 신약의 불연속성을 어디에서 분명히 볼 수 있는가? 약속은 가까운 기대와 마지막 기대, 구약이 증거한 구원사건의 중심은 하나님의 택하신 교회가 맺은 여호와의 언약이다. 그 언약관계는 그의 신실성에 근거한 약속과 교회에 행하신 하나님의 그 조건없는 자기 권리 주장에 성립한다.


언약은 여호와의 신실성과 그 뜻에만 성립한다. 그런데 늘 언약을 맺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 미래에 어떻게 행동하실 것인가 약속을 기대한다. 그리고 그의 행동을 실제로 이루실 것을 교회가 늘 언약을 받을 때마다 기대한다. 언약을 맺으며는 하나님이 미래에 어떻게 구원을 이루실 것인가 하는 약속을 받고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늘 교회는 약속이 행동으로 나타날 것을 기대한다.


그러니까 늘 많은 세대를 마지막까지 살아가는 하나님의 교회는 이 언약사건에 늘 들어있는 그의 구속하시는 것을 그의 통치하시는 것을 늘 만나는 것이다. 언약을 통해서 구원하신다. 왜?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실성에 의해서 언약의 모든 약속이 성립한다. 그러니까 화란의 개혁교회가 첫마디 외치는 말이 기원을 하는데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시고 영원까지 신실하시고 신실하다는 말을 기원에 중간교리로 넣어놨다.


하나님의 신실성 때문에 이 교회가 존속해 올 수 있다. 그런데 거기서 그 언약 사건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구속하심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구원하심을 늘 경험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늘 약속이 성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약속한 것을 이루신다. 대개 약속을 하면은 이루실 것을 기대하고 기대하면 그것이 성취될 걸로 본다. 이런 것이 선지자들 사상에 늘 들어 있다.

 

항상 구약 조상들의 역사는 신앙고백적으로 해석하고 약속과 성취의 기대는 늘 함께 있다. 그래서 아까 말한대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이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출생 주제가에서 야곱의 인도에서 요셉과 그 형제들의 구출에서 그리고 출애굽에서 성취되고 그리고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에서 성취됐다. 이렇게 눈에 볼 수 있도록 성취됐다. 이것이 언약교회로 살아가는 이정표다.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 기대만 바라보며는 못 살아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늘 약속하시고 가깝게 성취하시고 그리고 성취를 통해서 마지막 약속을 기다리게 하셨다.


애굽에서 해방하시고 가나안을 정복하사 시온산을 자기의 수도로 정하시고 다윗을 자기의 왕조로 세우시고 이런 약속들이 성취됐다. 후기 선지서들에게 보면 이런 약속들로서 이루어진 가시적인 약속의 성취가 무너지고 새 역사가 시작된다. 이스라엘이 끝나가고 돌비에 기록된대로 살던 것을 마음판에 기록한 그 언약을 바라보고 살게 했다.

 

약속들이 이전의 성취가 끝나고 새 약속들을 통해서 그 이전의 성취를 넘어서 더 큰 것을 바라게 했다(렘 31:33이하). "구약은 약속의 기대이고 신약은 성취다"가 아니다. 구약에서도 약속과 성취가 있고 궁극적인 성취가 신약에 다 있다. 신약이 궁극적으로 성취됐으면 더이상 성취가 없냐? 궁극적인 성취를 또 기다린다.

 

 신천신지 때 완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나타날 때 이루어진다. 항상 약속되고 성취되고 그러면서 나아간다. 그래서 마지막 성취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사건은 약속되고 선포되고 항상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것인지를 미리 말씀하심으로 선포하심으로 이루신다. 그러니까 항상 교회는 그의 역사적인 사실을 그 선포한 말씀에 의해서 이루시는 구원으로 정한다. 항상 사건이 일어난 다음에 추후적으로 해석을 해서 갖다 붙인 것이 아니다.

 

선행하여 사건이 일어나기전에 선포하신 말씀이 일어난 사건을 구원사건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멸망해 갈 때 포로생활 후에 오랜 반성을 거쳐서 하나님이 구원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아니라 예례미야 입을 통해서 바로 준비하고 있는 일이 심판이지만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선포하게 한다. 그렇게 하므로 느브갓네살 왕에게 복족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사건들이 구원사건으로 계시되고 성립하는 것이다.


홍해에서 구출되기 전에도 "잠잠하고 여호와께서 하신 일을 보라 너희들이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선포했다. 이것을 뒤로 해서 역투사 한 것이 아니다. 홍해를 건넌 후에 그것을 뒤로 역투사 한 것이 아니다. 바르트는 구약의 대부분의 왕들을 이스라엘에서 역투사로 본다.


가나안 40년 방황할 때 얼마나 물이 귀했느냐? 얼마나 깊이 파야 물이 나오며는 당나귀를 늘 가지고 계속해서 물을 퍼올리겠는가? 그러니까 물이 없는 나라다. 그런데 창세기 2장에 보면 에덴동산의 특징이 무어냐? 물이 넘친다. 생수의 근원이 흘러간다. 4대강으로 과일이 풍성하다. 바르트는 그들의 광야경험을 뒤로 역투사한 것이라 한다. 그런게 아니고 이미 사건이일어나기전에 그 사역을 말씀으로 선포한 것이다. 그리고 이루신다.


출애굽기 3:7이하. 다음 14장에 가서 이스라엘이 구출되기 전에 이스라엘의 구원을 미리 선포하신다. 지금 3:7절 이하가 그것이다. 이스라엘이 구출되기 전에 이스라엘에 미리 선포하신다. 그러니까 모세의 사역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이다. 14:10 이하에 보면 홍해를 건너기 전에 이미 구원이 선포됐다.

 

그러니까 그것이 구원사건으로 합당히 이해되고 성립된다. 이렇게 구원사건을 약속하시고 성취하셨다. 이렇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교회가 어떻게 하느냐? 15장에 보면 항상 교회에 찬양으로 응답이 동반한다. 하나님이 하신 사역을 하나님의 구원의 성취로 응답한다. 이것을 해석하므로 지금 현대교회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구원사역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성취된 역사가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이다.


그런데 이런 가견적 성취들이 더 큰 약속들에 의해서 논란된다. 그래서 이 구원사의 전통에서 보면 성취들이 다른 성취들에 의해서 대치되고 의문시 되어서 더 높은 성취를 바라게 한다. 그러니까 이제까지 구약의 후기 선지자들이 외치기 전까지 있었던 모든 성취들이 후기 선지자들에 의해서 무너지는 역사를 말한다. 그러므로 앞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마지막 큰 구원사건을 보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옛 언약의 모든 사건은 닫혀진 것이 아니라 개방적이다. 그리스도가 오셔서 성취하기까지 열려져 있다. 그러니까 이 역사적 성취들이 그냥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마지막에 성취가 있기까지 그리스도 사건에게로 모든 구약의 성취가 성취되기 위해서 약속이 성취된 것이 또 새 약속의 성취가 무너지면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에서 건 기대는 맨 마지막 기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늘 가까운 기대가 서 있다. 그래서 지상에서 하나님의 축복 구약만 영적인 구원 물리적인 축복의 구분이 없다. 왜? 구약에 있어서 모든 약속들은 시간 역사에서 성취되니까 물리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땅을 차지하는 그런 것들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완전한 의미의 영혼이 사는 것, 영혼이 불멸하는 것 그러다가 후기에 나가야 개인의 영혼의 개인의 부활이 나타난 것이다. 그 이전에는 그런 것을 모른다. 이것들이 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해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이다.


그러면 신약은 순수한 저 세계뿐이냐? 그런 것이 아니다. 신약교회는 마지막으로 신천신지를 기다린다. 하나님의 완전한 백성의 출현을 기다린다. 그렇게보면 물리적인 땅을 배제해 버리고 영, 신령한 것, 그것만을 구하는 것이 신약의 교회다. 그렇게 보면 순수한 영혼의 구원만 그런 영적인 구원만을 저 세상의 그것만을 신약교회도 타당하지 않다.

 

왜? 마지막 신천신지가 나타나지마는 그 약속을 바라고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구속 사건으로 생겨난 교회이다.
그리고 구원이 여기서 실현된다. 현재 우리의 역사 내에서 우리에게 구원이 와 있다. 그 구원이 완전한 인류로 신천신지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구원사역의 결국은 이스라엘과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의 통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요약을 하면 구약의 기대는 가까운 기대와 마지막 궁극적인 기대가 있다. 가까운 기대들은 역사 내에서 성취되면서 마지막 기대에 대한 약소들로 무너지면서 마지막 종말론적인 성취를 바라보게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구체적인 장소 그리고 시간에서 일어났다. 그것을 빼버리면 안되는 것이다.

 

그러면 가까운 기대의 성취를 마지막 성취를 미리 앞당겨서 가견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다.그렇게 보면 신약 교회도 믿음으로 약속을 기대하면서 사는 것이다. 마지막 기대, 궁극적인 기대를 기다리는데 그 기대가 신천신지, 곧 마지막 새 인류의 출현이다.(פרופסור  שְׂצְליוּ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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