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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 5:10 / 영적인 안전 불감증 : 다윗 불안 / 고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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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 설교들

2021. 11. 28.

영적인 안전 불감증 고병호 목사


저는 인생을 그렇게 오래 산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까지 살아오는 동안 부지불식간에 원치 않는 일로 고통스러운 날들을 지내본 경험이 몇 번 있습니다.

그리고 결코 짧지 앟는 목회를 하면서 저와 비슷하거나 혹 저와 비교할 수 없는 크나큰 일을 당해 절망으로 한숨과 눈물의 날들을 보내는 사람들 수도 없이 보기도 했고,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인 경험이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이든 부지불식간에 당한 안타까운 일들을 경험하고, 보고, 들을 볼 때면 목회자로서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답답한지 모릅니다.

이번 대구 중앙로 역에서 발생한 전동차 방화 사고를 보면서도 동일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미 다 잘 아시는 것처럼 한 사람의 어이없는 방화로 백 수십 명의 승객이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파악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실종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재난을 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부모님과 자녀들, 친척과 친구와 이웃을 한 순간에 잃은 유가족들뿐 아니라 온 국민이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큰 슬픔 속에 잠겨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왜 일어났는지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입니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각 종 신문과 방송 매체에서는 연일 전문가들의 의견을 속해며 이 번 사고의 원인에 대해 분석하고 있습니다.

사회적인 측면에서 다루기도 하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분석하기도 하고, 개인적-심리적인 측면, 심지어 정치적이고 의학적인 측면에서까지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고 해석하고 앞으로의 예방 대책에 대해 제안하고 있습니다.

그 같은 분석에 대해 읽고 들을 때 마다 느끼는 것은 그 분석이 예전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안전 불감증,” “인제” 이러한 표현들은 사고가 날 때마다 꼬리표처럼 단골 메뉴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번 사고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번 사고 역시 “인제”이며, “안전 불감증”이 가장 주된 원인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것은 예전에 일어났던 각종 사건과 사고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제기된 문제의 원인입니다.

그러데 여전히 같은 문제 때문에 감당키 어려운 사고가 몇 년, 아니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고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현실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의 마음은 안타까움과 답답함과 불안함을 넘어 이제는 분노가 치밀기까지 합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 같은 “안전 불감증”과 “인제”의 불행한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을는지 그저 마음이 답답할 뿐입니다.

저는 이처럼 마음이 답답하고 불안할 때 마다 창40장에 나오는 요셉이 한 말을 떠올립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잘 아시는 것처럼 요셉이 옥에 갇힙니다. 그곳에는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들의 얼굴에 “근심 빛”이 가득했습니다. 요셉이 묻습니다. “왜 얼굴에 근심 빛이 가득하냐?” 그들이 대답합니다.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해석할 자가 없나이다” 그러자 요셉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 하니이까?”

저는 요셉의 이 고백이 참 좋습니다.

그래서 마치 꿈을 꾼 것처럼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납득되지도 않는 문제를 만날 때마다 다른 어떤 해석보다 하나님의 해석에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합니다.

우리 개인과 역사의 주인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음습니다. 하나님은 목적을 갖고 역사를 빈틈없이 운행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는 이것을 믿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 모두는 개인이나 역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사고에 대해 하나님의 관점, 하나님의 시각,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의 눈으로 해석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입장과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관점 등에 따라 해석하는 것도 때론 필요하고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같은 관점들과 해석들이 하나님의 관점과 해석을 넘어설 수도,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엔 이번 대구에서 일어난 사고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생각하고자 합니다. 제가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우리 인간의 무능함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새로운 사명에 대한 하나님의 도전입니다.

이번 사고가 예전의 다른 대형 사고와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희생자들이 핸드폰을 가지고 가족들과 마지막으로 통화한 내용들이 소개되면서 희생자들의 마지막 순간이 생생하게 알려진 것입니다.

그 내용들은 한결같이 남아있는 우리 모두의 마음을 참으로 아프게 하고 눈물나게 합니다. 그 중 신문에 소개된 한 부부의 마지막 대화 내용을 소개합니다.

이미 고인이 된 주부 김모씨는 사고 당일 오전 6살과 4살짜리 두 아들을 유치원에 데려주고 지하철로 회사에 출근하는 중이었습니다. 남편이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한 푼이라도 가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 어린 아이들을 유치원에 맡기고 학습지 교사로 맞벌이에 나선 것입니다.

지하철 안에서 처음으로 남편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지금 지하철인데 거의 사무실에 도착했어. 저녁밥 맛있게 준비해 놓을 테니까 오늘 빨리 퇴근해”. 그런데 잠시 후 아내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절규 하듯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여보, 여보! 불이 났는데 문이 안 열려요. 숨을 못 쉬겠어요. 살려주세요, 살려줘요....”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아내와 남편과 나눈 마지막 대화는 “여보 사랑해요. 애들 보고 싶어...”

가슴을 저미는 안타까운 이야기는 이뿐이 아닙니다. 수많은 희생자들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매케한 유독 가스에 가슴을 쥐어 뜯으며 지상에 있는 가족들과 119 구급대에 전화했습니다. 그들은 “뜨거워 죽겠다”고 “살려달라”고 절규하며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간절하고 절규에 찬 구원의 요청은 공허한 메아리만 남길 뿐이었습니다. 구원 요청을 받은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사랑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힘이 되지 못했습니다. 뻔히 알면서도 살려내지 못했습니다.

이 같은 상황을 소개하던 모 방송국 기자가 한 말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모든 걸 알았더라도 어찌할 수 없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어찌 그 기자만의 생각이겠습니까?
이번 사고를 보고 듣고 있는 살아남아 있는 우리 모두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이 같은 한계 인식은 자연스럽게 우리 모두를 근심케 합니다. 불안케 합니다. 절망하게 하며, 깊은 무력감에 빠지게 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우리가 불안해하고 절망하며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에 빠져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무능함을 유능함으로 바꾸고,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고, 우리의 한계를 정복하여 거칠고 좁고 험한 이 땅을 살아가면서도 천국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에 있는 줄 믿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무능한 우리들이 이 땅에서 그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제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말씀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10절 마지막에 나오는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는 말씀은 제가 정말 욕심내고 있는 말씀입니다. “강성하여 가니라”와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사이에는 엄청난 의미차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시간이 지날수록, 세월이 갈수록, 나이를 먹어갈 수록 점점 강성해져 갔습니다. 점점 지혜로워져 갔습니다. 점점 유능한 사람이 되어 갔습니다.

6절에 보면 여부스 사람들이 다윗을 “소경과 절뚝발이보다”못한 사람이라고 깔보고 조롱하고 무시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그가 그를 깔본 던 여부스 사람의 성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주변 국가의 왕들이 목수와 석수를 보내어 집을 지어 줄 정도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손가락질 할 수 없고, 무시할 수 없고, 조롱할 수 없는 강한 왕이 되어 갔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이 같은 “점점 강성함의 복”을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분의 가정과 하시는 일들과 자녀들이 점점 강성해 강성해 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윗이 어떻게 그 같이 점점 강성함의 복을 받게 되었습니까?
한 마디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전지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에 그가 그 같은 복을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어떤 힘으로, 능으로, 지식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에 그 같은 복을 받아 누리게 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소원해야 하고 간절히 기도해야 할 가장 중요한 기도제목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복 중의 복, 근원적인 복인 줄 믿습니다.

잠시만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무능하던 사람이 유능한 사람이 됩니다.
무지하던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으로 바뀝니다.
불가능한 일들이 가능해지며,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고, 질병이 그 뿌리채 뽑히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 최고의 징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건강을 잃는 것입니까? 물질을 잃어버리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이 떠나가는 것입니까?
이 모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떠나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떠나가시면 참으로 불행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유능하던 사람이 무능하게 됩니다.
지혜롭던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가능하던 일도 불가능하게 되고, 건강한 사람도 병약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살아있던 것도 죽어버리며
형통하던 것도 막히고 맙니다.

이 원리는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되며, 나라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그 무엇보다 하나님이 나를 떠나가시는 것을 두려워하고 무서워 하셔야 합니다. 내게 힘이 되고 도움이 되었던 사람이 떠나도, 물질이 떠나도, 건강을 잃어버려도 무서워 하지마세요. 하나님만 떠나시지 않고 함께 계시면 반드시 회복될 줄 믿습니다.

욥은 그에게 있던 소중한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자식들이 그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물질이 떠나갔습니다. 건강도, 사랑하는 아내도, 의지가 되었던 친구들도 다 그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 그를 지극히 사랑하시던 하나님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으시고 언제나 그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는 그 하나님을 붙들었고 믿었습니다.

그 결과 그의 믿음은 귀로 듣는 신앙에서 눈으로 주를 보는 신앙에로 성장하고 진보했으며,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무능함을 유능함으로 바꾸고,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고, 우리의 한계를 정복할 수 있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엉뚱한 곳에 한 눈 팔지 말고 하나님만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엉뚱한 곳에 손 벌리지 말고 하나님께만 손 벌리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생각하고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누구보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기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능하지만,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그 때문에 자주 절망하고 한숨쉬고 눈물로 밤잠을 설칠 때가 많지만, 눈물과 한숨을 기쁨과 감사와 찬양으로 바꾸어 가며, 우리가 걸어가야 할 좁고 험한 모든 곳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바꾸어 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 생각하고 싶은 것은 이번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도전에 대한 것입니다.

사고가 난 후 며칠 전에 우리 교회에서 교사로 섬기는 한 자매가 제게 다음과 같은 이메일을 보내 왔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사실이 다시금 감사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기쁜 일인지 새삼 깊게 묵상할 수 있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TV에서 어떤 분이 인터뷰 중에 울먹이며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들의 희생을 밑거름삼아 다시는 이 땅에 이 같은 비극적인 일이 생기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생각하며, 두 개의 단어를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남은 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책임”이라는 단어입니다.

많은 분들이 애매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살아남아 있습니다. 제게 메일을 보냈던 자매의 고백처럼 우리가 살아있다고 하는 사실이, 혹은 내 가족 중에 한 사람이 그 엄청난 불행의 자리에 없었다고 하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참으로 감사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냥 감사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감사”의 다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감사"의 다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감사의 다음”은 언제나 “나눔”입니다.
그리고 “감사의 다음”은 “책임”입니다.

우리는 조금 전 10절의 말씀을 가지고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갔으며, 그가 그 같은 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만군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라고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번 더 질문해야 합니다. 그것은 왜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가 언제나 “감사”의 다음을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나눌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으로 주신 것을 책임 있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 사 이스라엘 왕 삼으신 것과 그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아니라”

그는 그 자신이 누리고 있는 강성함의 복, 부와 명예와 권력에 대한 존재의미를 분명하게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그처럼 축복하시고 함께 하심으로 점점 강성함의 복을 주신 것이 다윗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백성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음을 분명히 알고 깨닫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 같은 각성은 다윗으로 하여금 그 자신보다 백성들을 중요하게 여기게 했으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강성함의 복”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 백성들을 올바로 치리하는데 사용하게 했습니다.

그런 그의 자세와 태도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강성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강성함의 복”으로 민족을 위해 잘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필요에 따라 또 다시 그를 강성하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또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책임 있게 통치합니다.

이처럼 다윗은 책임 있게 하나님의 은혜를 사용하고, 하나님은 계속 그를 강성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와 그에 대한 다윗의 책임 있는 태도가 반복되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상승하여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다윗뿐만 아니라 그의 나라가 점점 강성해져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진정 여러분들이 “만군의 하나님이 함께 계심으로 여러분들의 가정이, 하시는 사업이, 여러분의 자녀들이 점점 강성해져 가는 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원하시면, 다윗처럼 “감사의 다음”, 곧 “남은 자의 책임”을 깊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번에 방화를 일으킨 사람은 57세로 행상과 화물차와 택시를 운전한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뇌경색으로 우측 반신이 마비되고 실어증 증세를 보이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에 대해 평소 비관하며 죽고 싶다는 말과 자신을 죽여 달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합니다.

이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가진 것이 없고 병약한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힘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많은 돈을 노리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준비한 범죄의 일원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회 혼돈을 노리고 범죄를 모의한 불순한 집단의 일원도 아닙니다.

그저 가난하고 병들어 절망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다 그것조차도 감당할 수 없어 하루빨리 인생을 마감하고 싶어 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범한 죄를 많은 사람들이 용서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의 지나온 삶과 처지를 생각해보면서 그가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그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가 따뜻한 이웃이나 친구가 되어 주었다면,
그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가 따뜻한 마음으로 위려하고 격려했다면,
그 누군가가 그를 친절히 대해주었더러면,
그 누군가가 절망으로 몸부림치고 있는 그에게 다가가 소망을 주었다면,
그 누군가가 그에게 무능함을 유능함으로 바꾸어 주시며,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얼마든지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천국을 주실 수 있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 주었던들...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이런 불행한 일이 과연 생겼을까...하는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자신의 삶에 절망하고, “죽어도 모든 사람들과 함께 죽겠다”는 마음을 먹을 정도로 사회에 대해, 이웃에 대해 분노하던 그에게 무관심하고 아무런 힘도 도움도 주지 못한 우리 모두가, 아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고의 공범자는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언제나 그래 왔던 것처럼 다시는 이 같은 불행이 일어나지 않도록 많은 노력들이 또 다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는 사회대로, 국민은 국민대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을 겪고 고통 가운데 있는 유족들을 위로하는 일들에 능동적으로 동참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길을 찾고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할것입니다. 무엇보다 크나큰 슬픔에 잠겨있는 유족들이 하루빨리 슬픔을 극복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신체적으로 병약한 우리의 이웃들에게 따뜻한 관심과 사랑을 베풀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연약한 우리의 이웃들이 절망 대신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좋은 사회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 같은 막중한 책임이 먼저 믿고,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자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몫이요 책임인줄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번 사고도 예외 없이 “안전 불감증”이 빚은 참사였습니다. 새삼 “안전 불감증”이 얼마나 큰 불행을 가져오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안전 불감증"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 안전 불감증"입니다. 안전 불감증이 건물을 붕괴시키고 지하철에 불이 나고 사람들의 생명을 뺏아가는지 모르지만, 영적 안전 불감증은 사회와 국가를 파멸로 끌어갈 수 있고, 무엇보다 사람들의 영혼과 정신을 파괴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사고를 보며, 우리는 무엇보다 우리 신앙의 자리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첫째,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능함을 깨닫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너무 자주 우리 자신의 무능하다는 사실을 잊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얼마든지 내힘, 내 능력, 내 지혜,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이 땅을 살아가면서도 천국처럼 살아갈 수 있다고 확신하며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뜻 과는 상관없이 자행자제하는 멋대로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식이 충만하며 과학과 기술이 진보하여 예전에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눈 앞에 펼쳐지고, 예전에 꿈꾸던 일들이 가능해지고, 불가능하리라 여겨졌던 일들이 가능해 지면서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교만은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인간 복제 운운하며 이제는 자신들이 하나님이 된 것 마냥 착각하고 교만하며 건방진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무능함을 깨닫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무능함만 생각하고 어찌할 수 없는 한계에 파묻혀 무능력하고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 또한 잘못된 것이요, 하나님 앞에 범죄하는 것입니다.

이번 사고를 범한 사람이 좋은 예입니다. 그는 그의 무능함에 대한 생각이 지나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무능함만 생각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찾지 않고 쉽게 자포자기하고 조그만 어려움에도 절망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두번째는 다윗처럼 하나님이 허락하신 복으로 남을 살리고 남을 부요케하고 남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복으로 나만 잘 먹고 잘 살겠다고 나 만을 위해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느시대 보다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주일마다 교회는 사람들로 북적이는데 이웃에서 직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기가 매우 힘이 듭니다.

사회 생활을 하는 데 불편하다는 이유로, 손해보고, 힘들다는 이유로 굳이 그리스도인임을 밝히지도 알리지도 말하지도 않습니다.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남보다 나를 더 소중히 여기며, 다른 사람들의 유익과 편리함과 필요보다는 우리 자신의 유익과 필요와 편리함을 더 추구하며, 하나님이 허락하신 아름다운 것들로 나와 내 가족만 잘 먹고 잘 살아 보려는 무언의 의지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어떤 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지 않고, 그러나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고, 마음대로 말하고, 마음대로 행동하고 살아가려는 잘못된 의도에 기인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이 같은 이기심과 잘못된 의식은 결국 우리의 이웃을 파멸로 몰고 가고 우리자신에게도 화가 되어 되돌아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외롭고 소외된 사람에 대한 무관심과 남보다 나를 더 소중히 여기는 이기심은 결국 무관심해 하던 사람들에게서 그 피값을 치룰 수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죽으면 결국 나도 죽습니다.
다른 사람이 불행하게 되면 결국은 나도 불행해지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살리면 내가 삽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면 내가 행복해집니다.


오늘 이 시간을 통해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우리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만 주인 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으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