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글모음/무분류 임시

격암(강국진) 2021. 9. 20. 15:56

우리는 언제나 과거에 의존하여 미래를 바라본다. 그래서 과거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동시에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과거는 지금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 좋은 예가 이 세상은 지금 과거보다 더 민주적인 세상이며 앞으로는 더욱 더 그러할 것이라는 사실이고 과거의 세계는 지금의 세계에 비하면 단순하고 작았고 앞으로는 더더욱 그러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철학자들의 말을 읽는 것을 즐기는 편이다. 그런데 그들의 말에는 대개 한가지 특징이 있다. 그들은 우리라는 말을 인간내지 인류라는 말로 쓴다. 즉 '우리는 어떻게 지식에 도달할 수 있는가'같은 인식론적인 질문을 던지고 답한다고 할 때 그들이 말하는 우리는 그 자신이나 그 친구들이 아니라 영국인이나 프랑스인이 아니라 암묵적으로 인간 전체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귀족적이고 오만한 것인데 과거와 지금에 있어서 서로 연결되지만 조금은 다른 문제들을 만들고 있다. 과거의 경우 당시에는 교육받지 못한 사람도 많았고 노예도 많았다. 정확히 말하면 소수의 귀족층만 철학적 사고에 빠질 수 있었다. 그런데 철학자들이 인간이란 이러저러하다면서 철학적 논의를 이끌어 나가면 어떻게 될까? 자연히 그들은 인간이라 불리지만 그러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설명을 첨부해야 한다. 결국 이런 관점은 인간의 무리는 진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귀족의 지배하에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 정당성을 부여하게 된다. 뒤집어 말하면 신적인 진리, 절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소수의 진짜 인간말고는 다른 인간은 불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의 세계는 결국 철학왕이나 볼 수 있으니 세상은 그 철학왕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이는 흄이니 데카르트니 하는 근대의 철학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반복된다. 그들은 비록 철학왕을 주장하지 않았지만 우리와 인간을 동일시 함으로써 지식이나 진리에 의한 독재를 주장하고 있기는 마찬가지가 되었다. 물론 그 지식이나 진리에 접근할만한 사람들은 다 귀족층이다. 못배운 노동자들이,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불완전한 인간이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칼 포퍼는 그들의 인식론은 그 뿌리부터 귀족적이라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인식론이나 진리관이 어떤 원천을 찾아간다는 점에서 동일하기 때문이다. 즉 영국의 흄은 경험에 대륙의 데카르트는 이성적 직관에 권위를 두고 지식은 각각 그런 원천에서 나온다고 논증했지만 진리나 지식이 어떤 원천에서 나오는가가 그 지식의 가치와 신용여부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권위적이고 귀족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왕자를 믿을 수 있는가? 그것은 그가 위대한 왕의 혈통에서 나왔기때문이다라는 주장과 이런 원천을 따라가려는 논증은 닮아 있다. 흄이나 데카르트는 한편으로는 전통적 권위에 반발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권위를 절대적인 것으로 세우려고 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고대의 소크라테스보다 권위적이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적인 한계와 영원한 무지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들의 귀족성을 비판한뒤 포퍼는 어떤 명제의 참거짓을 논할 때는 그 명제가 어떤 원천에서 나왔는가를 추적하지 말고 그냥 검증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특히 과학철학에 관련된 이야기지만 정치적 태도와도 관련이 있다. 즉 누가 말했는가, 어떻게 그렇게 보게 되었는가가 중요한게 아니고 우리가 그 가설이나 주장을 확인하고 검증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확실히 이렇게 보면 포퍼의 지식론은 훨씬 더 민주적이며 실용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현대에 이르러 철학에 있어서 우리가 인간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문제는 철학의 무용함으로 나타나고 있다. 과학은 전통적으로 철학의 일부였다. 그리고 과학은 널리 알려져 있듯이 그 보편성때문에 가치중립적이다. 그리고 과학만큼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사실 철학도 마찬가지로 가치중립적이다. 물리학을 배운다고 데이트 신청을 하거나 직업선택에 도움을 받지 못하듯 철학도 마찬가지로 가치판단에 무용하다. 비록 철학의 경우에는 과학과는 달리 어디까지가 철학인가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철학이 가치판단과 관계없다는 말은 충격적으로 들릴 정도로 드물지만 우리가 앞에서 말한 바로 그 철학의 보편성을 생각하면 우리는 이게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철학에서 특히 가치에 관련되어 있는 분야인 윤리학은 그 허술함으로 악명이 높다. 이것만 봐도 우리는 이런 사실을 느끼게 된다. 

 

물론 철학은 가치판단과 관계없다는 말은 많은 부가설명을 필요로 한다. 문맥에 따라서는 정반대의 말도 옳을 수 있고 여러분은 원한다면 철학공부가 어떤 사람의 가치관을 온통 바꾼 경우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의 문맥에서는 이 말이 옳다. 이제까지 처럼 인간과 우리를 동일시 하는 보편적 철학은 가치판단과 무관하다. 우리가 이 말을 심사숙고해야 철학을 통해서 유익함을 얻고 가치판단에 도움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현대에 있어서 종종 철학이 무용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우리를 인간과 동일시하는 철학은 많은 사람에게 전자레인지 만드는 법이나 로켓 과학처럼 들린다. 그것이 이 세상에 필요하고 대단하다는 것을 인정해도 나 개인의 삶과 연결성을 느끼는 사람은 별로 없다. 전자레인지나 로켓처럼 어디선가 그것과 관련있는 사람들이 그 부분을 나 대신 처리해 주겠거니 할 뿐이다. 철학의 귀족성이 현대의 민주적 현실과 부딪혀서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현대에서 인간은 아주 작아졌다. 내가 종종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불과 200년전에는 지식인이라면 출판되는 모든 책을 읽는다는 식의 말이 통할 정도로 세상에 유통되는 정보의 양이 작았다는 것이다. 유명한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1918년에 태어난 사람인데 그는 젊어서 미국 물리학회지인 피지컬 리뷰의 모든 논문을 읽었다고 한다. 요즘은 인터넷 사이트 하나에 연재되는 웹튠도 모두 읽는 게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100년이나 200년전에는 '세상에는 물론 내가 자세히 모르는 것도 있지만 인간이 아는 것은 대충 다 안다'는 식의 태도가 지식인에게 가능했다. 물리학과 화학의 구분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문과와 이과의 구분도 없던 시절이다. 시인이 군인인 동시에 엔지니어이기도 한 것이 자연스러운 시대였달까. 이런 시대에 우리가 인간인 것은 그렇게 큰 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흄이나 테카르트는 고사하고 더 민주적이라는 칼 포퍼의 검증주의만 생각해 봐도 그렇다. 지식을 검증한다는 것이 집단으로서의 인간에게는 가능한 일상인지 모르나 개인에게는 그저 극히 일부의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 지식과 정보가 쏟아지는 현대사회에서 진정으로 한 개인이 자기가 듣는 말들을 하나 하나 검증하면서 얼마나 배울 수 있는가? 그러므로 과학적 지식에 대해 검증주의를 배우면서 감탄을 할 수는 있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자신이 잘못 확신하고 있던 어떤 믿음에 대해서 고침을 받을 수는 있지만 이런 부수적인 것을 제외하고 나면 검증주의의 중심적 메세지는 현대 사회를 사는 개인에게는 역시 핵폭탄을 만드는 법이나, 화성착륙선에 대한 연구처럼 자신의 일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돌이켜 보면 고대 그리스처럼 2-3천년전부터 한 300년전까지는 읽고 쓰기가 가능한 어떤 지식인이 인간과 우리를 동일시했던 것은 크게 문제가 안되었다. 우리는 그걸 귀족적 시대상황과 함께 기억하면 그만이다. 지식이란 양도 얼마안되는 파피루스 조각이나 종이에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읽고 쓰는 것이 보편화되고 사회가 커지면서 이게 문제가 되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노동자의 철학, 농민문학, 페미니즘따위의 창궐을 보게 되었다. 즉 우리가 인간이 아닌 철학들이고 관점이다. 이 시기에 학문도 전문화가 이뤄져 수많은 학과가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철학의 범위를 줄여도 문제는 급격히 나빠지고 오늘날에는 오히려 진보정치가 이런 정체성 정치에 빠져서 패배하고 있다고 비판받고 있다. 인간이 아닌 작은 정체성을 중심으로 하는 철학은 대개 사회적 단합을 해친다. 게다가 이 작다는 철학도 사실 집단을 이야기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아마도 그런 철학이나 문학이 등장한 초기에는 나름의 좋은 효과를 더 많이 발휘했을지 모르나 다시 사회가 더 커지고 복잡해 지면서 마찬가지 일이 벌어지고 그래서 그 철학들도 혜택이상으로 무용하고 해로워지는 때가 있다. 여자의 철학과 노동자의 철학을 모르면 자기가 여자고 노동자라는 것을 모를 수 있지만 그들에 너무 빠지면 이번에는 단지 여자와 노동자가 되기를 멈출 수가 없다. 철학이 오히려 함정이고 성장을 멈추게 하는 감옥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이유로 이번에는 노동자의 철학왕, 여성의 철학왕, 농민의 철학왕의 지적 독재가 옹호될 수 있다. 자유를 찾아간 곳에서 잘 모르면 더 공부나 하라는 말을 들으며 남의 노예가 될 수 있다. 

 

오늘날 쓸모있는 철학은 아마도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개인적인 철학일 것이다. 나를 기준해서 말한다면 그것은 나를 그저 강국진이라는 개인으로 볼 뿐 거기에 달리는 모두 분류적인 이름을 부수적인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모두 자기의 집을 짓듯이 모두 자기의 정체성을 쌓아올리는 것으로 본다. 결국 자기 철학은 자기 손으로 자기가 직접 쌓아올려야 한다는 DIY의 철학이랄까. 

 

그러나 이런 단순한 답이 수천년간 주류가 되지 못한 것은 여기에는 나름 큰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보편을 지향하는 것은 우리의 자아를 확장해야 한다는 의지를 제공하고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는 힘을 제공한다. 근대 이후 우리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알 수 있다는 인식론적 낙관주의는 세계를 성장시켜 왔고 그것이 인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뿌리가 되기도 했다. 게다가 설사 세상에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절대적 진리란 것이 없다고 해도 그것에 도달하려고 하는 우리의 노력은 우리를 성장시킨다.

 

개인의 철학, 보통사람의 철학을 추구하는 것이 상대주의와 허무주의로 가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우리가 성장하고 배울 수 있다는 성장의 낙관론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 우리의 개인적 내부세계를 만들면서 그것을 자기를 가두는 감옥이 되게 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우리는 끝없이 우리의 경계, 한계를 탐색해야 한다. 우리는 수련하고 성장하고 자기를 지키면서 더 보편으로 나아가는 것을 우리의 본질로 여겨야 한다.  이 성장의 끝에서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로 함께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과 목표의식이 우리는 있어야 한다. 그렇게 깨어있지 못할 때 자기 철학의 추구란 그냥 이기적이고 게으른 인간의 앞뒤 안맞는 변명밖에는 안된다. 

 

환경도 과거에는 매우 나빴다. 인간의 힘은 모두가 아니라면 대부분 협력에서 나온다. 중앙집중식의 답은 이런 협력과정이 만들어 낸 것이다. 즉 뭉친 힘으로 찾아낸 답을 모두가 공유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이 힘을 무시하면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개인의 철학을 만든다라는 메세지에 공감한다고 해도 그것을 반사회적이고 반시스템적인 것으로만 생각하면 우리는 원시인이 되고 만다. 결국 과거의 환경에서는 각자가 나름대로 배운다기 보다는 중앙이 모두를 계몽하는 시스템만이 가능했을 것이다. 

 

지금은 환경이 조금 달라졌고 앞으로는 더욱 더 달라질 것같다. 개인의 철학시대는 지금처럼 평범한 우리가 필요한 것을 스스로 구할 수 있는 초정보사회에서나 가능하다. 뉴튼이 자신은 거인의 어깨위에 올라탔을 뿐이라고 말했던가. 우리도 그래야 한다. 우리와 비슷하고 우리보다 먼저 우리의 길을 간 사람의 어깨에 올라타야 한다. 이러면 예전과 다른게 없는 것같지만 내 말은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가장 큰 거인의 어깨를 노릴 형편도 안되고 상황마다 우리가 올라타야 할 거인들도 다르다는 것이다. 가장 위대하고, 가장 유명한 사람의 어깨가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게 아니다. 우리는 멀리 쳐다봐야 하지만 동시에 자기 발밑에서 눈을 떼지 말아야 한다. 

 

다행히 유튜브를 포함해서 인터넷에는 무수히 많은 보통 사람들의 사람이 표현되고 기록되고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보다 적합한 정보를 줄 것이다. 그들에게 배우는 것이 교과서에나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만 쳐다보고 있는 것보다 좋다. 그 위대한 인물들은 너무 멀리 있고 우리와는 너무 다른 삶을 살았다. 게다가 그 인터넷 속의 멘토가 바로 그 위대한 인물들로 가는 징검다리가 되어줄 수도 있다. 그리고 사실 우리가 꼭 어느 유명하고 위대한 인물에 도달해야 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끝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끝은 아니다. 우리가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 내부에 어떤 작은 집을 지었다고 해도 그걸 지키는 일은 쉽지 않다. 인간의 망각과 일상이 주는 습관은 그걸 순식간에 망가뜨릴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걸 지키는 쉽지 않은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이걸 위해서 우선 우리는 글을 쓸 수 있다. 그 기록이 우리 내부 세계를 지키는 기둥이 될 것이다. 우리는 기록을 하면서 자기 내부를 보다 단단하게 다지게 되기도 하고 시간이 지난 다음에 그걸 다시 읽으며 자신이 누구인지를 다시 기억해 내기도 한다.

 

글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우리의 생각이 바뀌면 생활이 바뀌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바뀐 생활은 이제 거꾸로 우리의 생각을 지켜주는 소중한 틀이 되기도 한다. 당신의 직업, 당신이 사는 집, 당신의 가족 구성등 여러가지 생활이 바뀌어야 자기를 지키는 것이 보다 쉬워진다. 네모난 방에 계속 살면 생각이 네모가 되는 것을 막기가 어렵다. 생각은 생활을 바꿔야 한다. 

 

나는 아직은 좀 먼 미래지만 가까운 미래에 발달된 인공지능 개인 비서가 등장해서 우리를 도와주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인공지능 개인 비서는 내 개인의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고, 그걸 통해서 나와 대화상대가 되어주기도 한다. 내가 잊어버린 것을 상기시켜주기도 한다. 우리는 그 인공지능을 사용하는 동시에 우리 자신을 그 인공지능에 훈련시키고 기록할 것이다. 평생을 써온 글더미처럼 우리는 그 인공지능과 함께 있을 때만 진정한 우리 자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인공지능은 우리가 계속 우리 자신일 수 있도록 우리의 기억을 되살려 줄 것이다. 즉 보편적인 사람이나 데이터가 기억하는 나는 이럴 때라면 어떻게 선택했을지를 말해 줄 것이다. 그리고 그럴 때 우리는 글솜씨가 없고 인터넷 검색을 잘 하지 못해도 우리 자신을 잊고 망치는 일을 멈추고 진정한 개인의 철학시대, 진정한 보통사람의 시대를 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정신의 네비이며 정신의 반자율주행이다. 

 

하지만 그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글쓰기 같은 옛날 방식에 의존해야 하고, 때로는 네모난 방안에서 끝없이 자기를 확인해서 자기 생각을 둥글게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가 그 노력을 멈출 때 우선은 우리는 주어진 대로 살게 될 것이고 그 다음에는 철학이 아무 쓸모가 없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게 오래되면 우리는 어느새 남의 의지에 의해서, 대부분 이기적이거나 어리석은 의지에 따라 스스로의 인생을 포기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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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래로 명멸한 성현들의 가르침을 섭렵한 인공지능이 있으면 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네요.
직접 문답을 통해서 삶의 공허함과 비루한 인간관계로 인한 아픔을 덜어줄 수 있는 그런 대상 말입니다.
그것이 실현되고 다수가 활용한다면 그때에도 종교라는 것이 존재할까?
회중의 일부가 됨으로써 안도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종교는 건재할 수도 있겠다 자문자답해 봅니다.
집단으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인정욕구를 넘어서지 못할 것 같습니다.
과학의 시대에도 종교가 남아있듯이 그 시대에도 종교가 남아있겠죠. 하지만 그렇게 지식을 집대성한 인공지능이 권위를 가지는 시대에 지금의 종교적 관행을 따르는 행위는 지금보다 더욱 심하게 권위의 충돌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욕구도 물론 문제입니다. 하지만 통제불능의 성욕을 사회적 훈련과 이성으로 조정하듯이 그 시대에도 특히 인공지능의 조언같은 것의 의지하여 우리는 지금과는 조금 다르게 아마도 좀 더 일관성있고 합리적으로 선택하며 살 수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10년쯤 전에 혼자 영어 읽기에 빠져서 몇년간 원서를 꾸준히 읽었는데 시간이 얼마간 지났을 때 국어와 영어 생활이 헷갈리게 되는 순간이 왔었습니다. 신기한 경험 이었지만 ‘혹시 자아가 붕괴 하는거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 작은 일이 계기가 되어 한 동안 ‘나라는 의식’에 대해 생각 해 보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위 글을 읽다보니 문득 그 때가 떠오르네요.

철학이나 전문화된 방향으로 갈라진 다른 학문이 좋은건 세상을 바라보는 틀을 주기 때문 일 겁니다. 비록 처음엔 일부 사람을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지금은 누구나 뜻과 노력만 있으면 가져와 쓸 수 있는 유익한 도구가 될 수 있으니 철학이 주는 이득이 더 커졌다고 볼 수 있겠죠?

아무리 좋은 틀이라도 모든 경우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좋을 수는 없을테니 여러 경우에 서로 맞서는 상황이 오는건 자연스러운 모양이겠죠? 그럴 때 마다 서로 공통점은 인정하고 차이점은 이해하는 태도가 필요한 덕목이 되겠죠.

지금처럼 지식이 넘치는 시대에 현명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때와 장소에 맞는 생각으로 친구, 동료, 아이, 어른 그리고 적과도 대화가 되고 협상이 가능한 능력 아닐 까요?
맞습니다. 하지만 그게 어려우니 이런 저런 일들을 하는거죠. 변하려고 하고, 자신의 한계도 돌아보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