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

작은거인 2022. 4. 13. 18:57

21세기 사기열전(史記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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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자객열전

2. 태사공자서

3. 화식열전

4. 백이열전

5. 유협열전

 

6. 굴원 가생 열전

7. 백기 왕전 열전

8. 편작 창공 열전

9. 순리열전

10. 골계 열전

 

11, 영행열전

12. 노중련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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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12;자객열전

 

나는 누구이고, 어떤 일을 해야 할까?

나는 누구냐는 물음에 대답하기는 너무나 어렵습니다. 하지만 내 앞의 사람들이 한 일을 보고 내가 어떤 유형에 들어가는지 알아보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입니다. 세월이 바뀌어도 인간 본연의 모습은 바뀌지 않습니다. 붓에서 펜으로, 펜에서 타자기로, 타자기에서 컴퓨터로 글쓰기 도구가 바뀌었지만, 그걸 이용하는 인간의 손은 다를 바 없지요. 저는 사기열전에서 우리 동아시아의 인간 유형을 보았고, 그것은 전 우주의 일이자 지금 내가 서 있는 오늘의 일이고, 내 삶의 이정표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옛 선비들은 열전의 인물, 혹은 고서의 인물 유형을 보고 자신의 갈 길을 바로잡았다고 합니다. 비록 현실이 고단하고 비극적이어도, 선배들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 길을 충실히 걸어 길이 이름을 남긴 인물들입니다. 이 열전을 통해 내가 누구이고, 어떤 일을 할 것이고, 어떻게 고난이 닥쳐오고 그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생각하고 그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한번 떠나면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동양의 고전인 사기열전에는 수많은 인물 유형이 있다. 예를 들어 자객열전에서는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의 원형을 볼 수 있고, ‘화식열전’(대부호에 대한 경제적 통찰)에서는 정주영이나 이병철을, ‘백기왕군열전’(군인의 삶)에서는 이순신이나 원균을 볼 수 있다.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인간이 있지만, 대체로 사기열전에 나오는 인물 유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한국 역사 속에 살아 숨쉬는 위인들도 마찬가지다. 이 점에 착안해 사기열전의 인물 유형으로 본 한국의 인물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한다. ‘자객열전으로 첫 장을 연다.(편집자)

 

달빛 아래서 공원을 산책했다. 소슬한 바람과 나무가 뿜어내는 신선한 기운들. 나무들 사이로 사람들이 보였다. 소나무와 같은 상록수는 검게 보이고, 은행나무, 플라타너스와 같은 낙엽송들이 눈에 들어온다.

 

겨울나무는 앙상하다. 아직까지 가지에 매달려 있는 나뭇잎 하나가 바람이 불자 툭 떨어진다. 나뭇잎 한 장을 주워 들고 물어본다. 넌 어디에서 왔느냐? 누가 너를 떨어뜨렸니? 지난 가을 나무는 가지와 잎자루 사이에 떨켜를 만들어 나뭇잎으로 흘러가는 영양분을 차단했다. 잎을 떨어뜨리는 떨켜. 겨울을 나기 위해 나뭇잎은 나무를 떠난다. 대신 나무가 잘 산다. 이젠 흙으로 돌아가는 낙엽을 도와주는 떨켜, 우리 인간 유형 중에 이 떨켜형이 있다.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 ‘사기열전에 나오는 자객열전의 영웅들을 나는 떨켜 인간이라고 부른다.

 

만주 벌판을 달리는 준마들

 

내 책상 위에는 안중근 장군의 휘호가 새겨진 작은 병풍이 있다. 국가안위노심초사(國家安危勞心焦思)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과 같은 휘호 옆에는 단지(斷指)한 손도장이 찍혀 있다. 어진 이는 자신이 죄를 짓지 않았으면 몸이 묶이는 치욕을 당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사마계주(사기의 일자열전에 나오는 인물)는 말했다. 안중근 장군은 일본인의 시각에서는 테러리스트이지만, 우리 혹은 나는 안 장군을 어진 사람으로 본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었기 때문이다.

 

안중근 장군처럼 세상을 살면서 단 한번이라도 절절하게 온 힘을 다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깨진 항아리를 연못에 던지듯, 온몸을 던져 자신의 목숨을 거부하고 세상의 삶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세상을 움직이겠다는 말이 공허하게, 혹은 코미디처럼 들리는 세상이다. 사나이 대장부라는 말이 왠지 어울리지 않는 세상. 사내란 그저 월급 타고, 가족 부양하고, 착한 아버지가 되어야 할 것 같은 세상이다(그것 역시 보람찬 일이긴 하지만, 왠지 성에 차지 않지 않은가). 이제는 만주 벌판을 달리는 준마와 같은 사내들이 다 사라져버렸다.

 

일산에 사는 늙은 선배는 한때 말했다. 만주 벌판을 달리는 말은 마구간을 돌아보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 늙은 선배도 언제부터인가 술을 먹다가 밤 11시가 되면 마구간으로 서둘러 돌아가는 마구간의 말이 되어버렸다. 이렇듯 세상과 사내들의 삶이 자잘하게 쪼개지고 무너지고 가치 있는 일에 대한 개념 자체가 바뀌어버려서인지, 우리는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대의를 향해 길을 떠나는 삶 자체를 잊어버린 지 오래다. ‘자객열전에는 만주 벌판을 달리는 준마와 같은 사내들이 있다. 책장을 넘기면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나의 심장을 쿵쾅거리게 한다.

 

자객열전에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자객들이 있다. 모두 다섯 명의 자객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모습은 각양각색이다. 거사에 성공한 이도 있고, 실패한 이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행동은 성공과 실패 이상의 울림을 전한다. 그게 뭘까 싶었다.

 

열전에 처음 등장하는 자객은 노나라 장수 조말이다. 그가 날카로운 비수 하나로 전쟁에서 패해 잃어버린 땅을 되찾은 기묘한 사건이 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조말은 노나라 장공을 섬겼는데, 제나라와 세 번 전투를 치러 모두 패했다. 노나라 장공은 수읍 땅을 제나라에 바치고 화친을 청했다. 당신이 강하니 우리 땅 좀 가져가고 전쟁하지 말자는 뜻이었다.

 

제나라의 환공은 이를 허락하고, 승리자답게 기분 좋은 술자리를 열었다. 그때 조말이 비수를 들고 뛰어올라, 환공의 목숨을 위협하면서 당당하게 말했다. ‘제나라는 강하고 노나라는 약하다.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침범하는 건 가혹한 일이다.’ 비수로 일단 상대를 제압하고 약한 나라의 어려움을 겸손하게 이야기한 다음 간곡하게 부탁했다.

 

군주께서는 이 점을 헤아려주십시오.”

 

비수 하나로 땅을 되찾다

 

일단 살고 보자는 심정으로 환공은 빼앗은 노나라의 땅을 모두 돌려주겠다고 한다.

그러자 조말은 비수를 멀리 내던지고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장군의 모습이 이러했다.

 

북쪽을 향해 신하들의 자리에 앉았는데,

얼굴빛에 변함이 없었고 말소리도 조금 전과 다름이 없었다.”

 

허허, 기가 막힌 일이다. 조말의 간덩이가 과연 부었구나, 내가 비록 너의 비수에 잠시 위기를 맞았으나 모면했으니 이제 요놈 맛 좀 봐라, 칼 한 자루 가지고 나를 위협하다니, 뭐 이런 심정으로 환공은 화를 내면서 약속을 내던지려 했다.

 

그때 관중이 나서서 군주의 체통을 지킬 것을 부탁한다. 사나이가 한번 뱉은 말은 절대 돌리는 게 아니다. 그럼 당신은 천하의 인심을 잃게 된다. 소탐대실하지 말고 약속 지키라고 한다.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양국이 화친하는 자리이니 신하와 군주가 모두 모인 자리다. 이들의 입을 모두 막을 수도 없었다. 결국 갑작스럽게 상황이 종료되고 곰곰이 생각한 환공은 결국 사나이답게, 천하의 군주답게 노나라 땅을 돌려주고 돌아간다.

 

이 풍경은 한 폭의 동양화다. 이 정도 의리가 지켜지는 사회는 공자가 그리워한 저 요순의 시절과 무엇이 다르랴. 지금 전세계를 향해, 전 국민을 향해 국가 정상들끼리 한 약속도 돈 때문에 하루아침에 날려버린다. 이른바 실용주의란다.

 

사실 지금의 최첨단 정보시대와 비교해보면 조말의 자리는 밀실과도 다름없을 것이다. ()국민 발표를 하고도, 은근히 말을 바꾸기 일쑤인 작금의 현실을 보자. 정치인은 말 바꾸기의 선수다. 이들에게는 부끄러움도 없다. 실용적인 면에서 어제 한 말을 오늘 바꾸기도 하고, 방금 말해놓고 머리로는 딴말을 준비하는 것 같은 가증스러운 얼굴들은 조말의 비수에 잠시 놀라 헛소리를 하긴 했지만 세상을 바르게 다스리기 위해, 즉 올바른 정치를 위해 쓴맛을 감수하는 제나라의 멋쟁이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긴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정치까지 갈 필요가 뭐 있나. 나나 너나 다 조말의 비수를 잃어버린 지 아주 오래이지 않은가.

 

조말이 죽고 나서 167년 오나라의 전제가 칼을 들었다. 오나라 당읍 사람인 전제는 오자서라는 뛰어난 인물의 눈에 띈 인물이다. 초나라에서 오나라로 피신 와 있던 오자서는 왕이 되고 싶어하는 공자 광에게 전제를 추천했다. 과연 오자서의 혜안대로 공자 광은 전제의 칼을 빌려 요왕을 제거하고, 왕이 되었으니 그가 합려다. 합려는 오나라의 24대 왕으로 재임하면서 초나라 신하이던 오자서를 재상으로, 그리고 손자병법의 손무로 하여금 군대를 조직하게 해서 결국 초나라를 공략하고 오나라의 세력을 중원으로까지 넓힌 왕이다.

 

요왕을 제거하기 위해 전제는 구운 생선을 요왕에게 올리는 시늉을 했다. 그 생선의 뱃속에 칼이 들어 있었다. 수저가 닿을 자리에 놓인 생선에서 칼을 꺼냈으니 그의 거사는 거의 이겨놓고 싸운 거나 다름없었다.

 

차원이 다르기는 하지만 영화에 나오는 킬러들의 세계에서도 가장 고난도의 저격은 바로 칼이라는 얘기가 있다. 프랑스의 저격수 레옹이 마틸다에게 멋진 음성으로 남긴 말이다. 목표물에 다가서기가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수는 그림자처럼 목표물에 스며든다.

 

생선 뱃속에 숨긴 칼

 

사기열전의 자객들은 프로가 아니다. 프로는 시장경제의 논리에 따라 실용적으로 움직인다. 돈을 받아야 한다. 암살 대상에 따라 돈의 규모도 다르다. 다름 아닌 인간의 목숨을 가지고 거래하니 그들은 소인배이고 무뢰한이다. 하지만 자객들은 돈 거래를 천박한 짓으로 여겨서인지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그들이 추구한 것은 다름 아닌 명분과 의리, 한걸음 더 나아가 공자의 인() 사상이었다.

 

이러한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준 자객은 진나라의 예양이다. 전술한 자객들은 나름 깔끔하게 일처리를 했다. 하지만 진나라 사람인 예양은 지독하게도 운이 없거나 아니면 칼과는 거리가 먼 선비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오로지 선비의 지조를 세우기 위해 비수를 품었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인은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화장을 고치는 것이다. 선비가 지조를 지키는 데 전제조건은 자신을 알아보고 인정해주는 주군이 있다는 것이다.

 

예양은 진나라에서 범씨와 중항씨라는 두 주군을 섬겼다. 하지만 그들은 예양을 여느 선비와 다르게 보지 않았다. 예양을 알아본 주군은 바로 지백이었다.

 

 

지백은 조양자를 능멸했는데, 열 받은 양자는 한나라 위나라와 함께 마치 신라가 당나라와 손을 잡은 것처럼 군대를 모아 지백을 멸했다. 조양자는 지백에게 맺힌 한이 많았는지, 그의 두개골을 잘 모셔다가 옻칠을 예쁘게 해서 술잔으로 썼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예양은 일단 산속으로 숨는다. 그리고 자기를 알아준 지백을 위해 한 목숨 바칠 것을 각오한다. 예나 지금이나 죽기를 각오하면 못할 게 없다. 하지만 일지매처럼 뛰어난 칼 솜씨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억울한 주군의 원을 풀어주겠다는 일념으로 일단 몸에 비수를 품고 막무가내로 달려들어 양자의 배에 칼을 푹 담글 생각을 한다.

 

두 마음을 품고 섬기는 자들이여

 

이유는 간단하다. 그래야 지백의 은혜를 받은 자신의 영혼이 부끄럽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일단 성과 이름을 바꾸고 가벼운 경범죄를 지어 죄인이 되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바꾸어버린 것이다. 선비 예양의 몸은 이미 지백과 함께 죽었고, 혼이 잠시 그 몸에 깃든다. 죄수의 신분으로 조양자가 하루에 한두 번은 반드시 오게 되어 있는 화장실의 벽을 바르면서 기회를 엿보았다.

 

열전에 의하면 사람의 목숨을 빼앗기란 쉽고도 어렵다. 하늘의 보살핌을 받았는지, 아니면 영웅이 화장실에서 일보다가 급사하는 것이 모양이 좋지 않아서인지 몰라도, 양자는 화장실 근처에서 불안감에 휩싸인다. 볼일은 급한데 가슴이 두근거리고, 두려운 마음이 들어 주변을 조사해보니 품 안에 비수를 감추고 있는 이가 있었다.

 

양자보다 주위에 있는 이들이 더 놀랐는지, 당장 목을 베라고 했다. 하지만 양자는 지백의 원수를 갚으려 했다는 초췌한 몰골의 예양을 보고 뭔가 깨달은 점이 있었다. 그는 너그럽게 예양을 풀어주었다. 예양이 의로운 사람이며 천하의 현인이라는 말을 자신의 주위에 있는 신하들이 들을 수 있게 큰소리로 외치면서 말이다. 즉 너희들도 예양의 이러한 지조를 닮아야 할 것이다. 이쯤 되면 예양도 마음을 바꿀 것이라고 양자는 생각했다.

 

하지만 예양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의 몸은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근육이 움직이는 한 그는 복수의 화신이었다. 하지만 이미 얼굴이 팔렸고, 목소리까지 들켜버렸으니 어찌할 것인가. 그는 얼굴과 목소리를 추하게 바꾼다. 온몸에 옻칠을 해서 문둥이처럼 꾸몄고, 숯가루를 먹어 목소리까지 탁하게 했다. 그러한 몰골을 아내와 가족도 알아보지 못하자 예양은 미소 지었다. 이제 다시 한번 시도하자.

 

다시 복수의 길을 떠나는 데, 오직 한 친구만이 예양을 알아보았다.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면서 예양의 뜻과 마음을 아는 친구는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기왕에 복수할 거라면 겉으로는 양자를 섬기는 척하면서 양자가 긴장을 풀고 가까이 할 때 일을 치르면 될 것 아니냐고 했다. 그는 예양의 끔찍한 몰골에서 죽음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친구에게 예양은 이렇게 말하고 뒤돌아보지 않고 가던 길을 떠났다.

 

예물을 들고 가 남의 신하가 되어 그 사람을 죽이려고 한다는 건, 두 마음을 품고 자기 주인을 섬기는 것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인데, 이 길을 걸어가는 이유는 내가 죽고 나서라도 남의 신하가 되어 두 마음을 품고 주인을 섬기는 자들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예양의 이 말은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잘 만들어진 활시위처럼 팽팽한 긴장이 흐른다. 그는 자신의 삶 너머를 보았다. 앞으로 자신처럼 살 사람들에게 전범을 제시한 것이다. 그것은 후배들에게 꼭 그렇게 하라는 명령조의 말씀이 아니다. 나는 이렇게 했다는 풍경이고 이미지다. 지금도 이 풍경은 서산의 놀에 떠오른다. 이 이미지는 저녁 하늘 놀처럼 붉고 어둡다. 그 부끄러움이 누천년의 세월을 이어오고 있다. 하여간.

 

예양은 양자가 지나다니는 길목에서 거사를 도모했으나 결국 또 하늘의 도움을 받은 양자에게 들키고 만다. 그때 양자가 꾸짖는다. 왜 이토록 끈질기게 원수를 갚으려 하느냐. 너는 범씨와 중항씨를 섬긴 적이 있지 않는가? 지백이 그들을 죽였는데, 그때 너는 왜 원수를 갚지 않고 나에게만 이러는 거냐고 따져 물었다.

 

옷을 베어 원수를 갚다

 

그러자 예양은 범씨와 중항씨는 자신을 평범하게 대했지만, 지백만이 자신을 한 나라의 걸출한 선비로 대접했기에 그에 걸맞은 행동이 이러하다고 말했다. 몰골은 흉하지만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예양의 태도에 감탄한 양자는 울면서 예양을 참하려 하였다. 그때 예양이 말했다.

 

전날 군왕께서는 저를 너그럽게 용서했습니다. 그 일로 사람들이 당신을 칭송합니다. 저는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옷을 얻어, 그것을 칼로 베어 원수를 갚으려는 뜻을 이루도록 해주십시오. 죽어도 한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감히 바랄 수 없는 일이겠지만, 제 마음속의 말을 털어 놓는 것뿐입니다.”

 

양자는 예양의 간청을 받아들이고 사람을 시켜 자신의 옷을 예양에게 가져다주도록 하였다. 예양은 그 옷을 칼로 내리치고 지백의 은혜를 갚았다고 기뻐하며 그 칼에 엎어져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나라의 선비들은 모두 울었다.

 

한국의 선비들에게도 이런 대쪽 같은 정신이 있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던 시절 고려의 두문동 전설을 예로 든다. 고려 선비들이 새 왕조인 조선을 인정하지 않고 두문동에서 나오지 않자, 태조가 불을 질러 그들의 지조를 시험했다. 그들은 두문불출했다. 그래서 모두 죽었는데, 그 선비들이 억지로 등을 떠밀어 울면서 그 두문동을 나온 선비가 바로 황희다.

 

선비들은 황희에게 너만은 살아 고려의 정신을 전해야 한다고 그를 내보냈다. 불타는 두문동을 걸어 나와야만 했던 황희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뒷날 사육신도 이러한 선비의 부끄러움을 아는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양이 비록 칼을 들어 자객 인물의 유형으로 분류되었지만, 열전에 기록된 행간의 의미를 보면 칼보다는 정신의 날이 더 날카로웠다.

 

때론 문장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가슴을 베기도 한다. 무서운 문장이 있다. 잘 벼려진 칼날 같은 문장은 어쭙잖게 입술만 나불거리는 사람의 혀를 베어버리는 힘이 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무잡한 인간들은 진짜 칼을 무서워하지만, 부끄러움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이러한 칼날을 더 무서워한다.

 

예양이 죽은 지 40년이 지나 제나라 땅에서는 섭정과 그 누이의 장렬한 죽음이 있었다. 섭정 또한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자를 위해 죽는다는 인물 유형이다. 그는 효자다. 옛 나라의 근본 사상인 충효의 모습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섭정은 사람을 죽이고 원수를 피해 어머니, 누이와 함께 제나라에서 개백정을 하면서 살고 있었다. 최대한 신분을 낮추어 구설에 오르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 오빠에 그 누이

 

섭정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은 엄중자다. 엄중자는 한나라 애후를 섬겼는데, 애후는 한나라 재상 협루와 사이가 나빠 목숨이 위태로웠다. 그래서 협루를 제거할 인물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섭정을 만나게 된다.

 

엄중자는 섭정을 찾아가 선비의 예를 갖추어 사귀고 막대한 황금을 주면서 섭정 어머니의 장수를 기원했다고 한다. 물론 그 황금은 거사에 대한 보답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내색은 감추었다. 효자 섭정은 기구한 사연으로 개백정을 하고 있는 자신을 알아보고 과감한 투자를 하는 고위관리인 엄중자에게서 군자의 덕을 보았지만, 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처지이므로 엄중자의 청을 거절했다. 그리고 섭정의 어머니가 천수를 다하고 세상을 떠나자, 이번에는 자신이 엄중자를 찾아가 속마음을 물었다. 내 몸이 필요한 곳이 어디인가?

 

엄중자는 한나라의 재상인 협루라고 밝힌다. 하지만 그는 세도가로 경비가 삼엄하니 수레와 말, 장사들을 데리고 갈 것을 권한다. 하지만 섭정은 영민한 사람이었고, 엄중자의 안위를 걱정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객으로서 말했다.

 

한나라와 위나라는 가까이 있고, 지금 그 나라 재상을 죽이려 하는데, 그가 또 그 나라 왕의 친족이라면, 이러한 형세에서는 많은 사람을 써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많으면 생각을 달리하는 자가 생길 수 있고, 생각을 달리하는 자가 생기면 말이 새어나갈 것이며, 말이 새어나가면 한나라 전체가 당신을 원수로 여길 것이니 어찌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엄중자의 걱정을 뒤로하고 홀로 길을 떠났다. 그리고 단숨에 관청의 단청에 앉아 있는 협루를 찔렀다. 협루의 부하들이 섭정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수십명이 섭정의 칼날에 베어졌다. 그런 뒤 섭정은 자신의 얼굴 가죽을 벗기고, 눈을 도려내고,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내고 죽었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한나라에서는 천금의 현상금을 걸고 자객의 신분을 확인하려 하였다. 섭정의 시체는 시장통에 전시됐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섭정의 누나 섭영이 찾아와 울부짖었다.

 

이미 엄중자와의 만남을 알고 있던 그녀는 엄중자가 섭정을 알아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장통을 지나다니던 사람들은 어찌 이 위험한 인물을 안다고 하느냐고 염려하였다. 하지만 섭정의 누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큰소리로 자신이 살아 있기 때문에 동생은 신분을 감추기 위해 처참하게 자신의 신체를 훼손하였다고 밝혔다. 또한 동생이 선비로서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섭정의 죽음을 애도하다 그 자리에서 자신도 목숨을 놓아버렸다. 한나라 주위에 있던 진나라, 초나라, 제나라, 위나라에서는 모두 섭정만 위대한 것이 아니라 그 누이도 장한 여인이라고 애도했다.

 

장사가 한번 떠나면

 

이상 소개한 4인의 자객은 하나같이 대의를 위해 목숨을 버렸다. 그들은 살아 영광을 바라지 않았다. 자객의 죽음은 때론 주군의 한을 풀어주기도 하고, 주군의 뜻을 이루기도 한다. 이들은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물론 지금 시대에 이러한 방식으로 뜻을 이룰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칼로써 자신을 뜻을 전하는 시대가 오지 않기를 당연히 바란다. 칼로써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말이 되고, 그 말이 행동이 되어 예의가 갖추어지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싶어한다. 때론 어설픈 폭력이 속 시원하다는 이도 있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말이 단적으로 그러한 심정을 대변한다.

 

개인사에서도 그러하다. 울화통이 터지는 일이 있게 마련이다. 그때 자객들을 생각하면 알량한 개인적인 원한을 가볍게 여길 수도 있다. 운전을 하다가 싸우는 사람들, 돈 거래를 하다가 주먹다짐을 하는 사람들, 일상사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원한은 옛 자객들의 처연한 행동에 견주면 티끌 같다. 거기에 목숨을 걸지 말아야 한다.

 

사내가, 아니 인간이 목숨을 걸 만한 일은 신중하게 선택되어야 한다. 옛이야기에는 뼈와 살이 있다. 이들의 행동은 살이다. 그 살은 이미 오래전에 흙이 되어 바람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이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뼈다. 이 뼈는 아직 우리의 눈에 선연하다. 그리고 그 정신은 인종을 초월해서 영원히 전해지고 있다. 그것은 때로 노래가 되기도 한다.

 

섭정이 죽고 나서 220년 후에는 진시황의 옷자락을 베었던 비운의 영웅 자객 형가가 비수를 품었다. 형가는 진시황을 암살하기 위해 떠나면서 역수라는 강가에 서서 노래를 불렀고 그 노래는 강가의 비가(悲歌)로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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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소리는 소슬하고

 

역수는 차갑구나

 

장사는 한번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

 

 

바람, , 사람, 그리고 운명을 품고 형가는 역수를 건넌다. 과연 그의 노래대로 길을 떠난 자객은 뒤를 돌아보지도 돌아오지도 않는다. 이들의 모습은 강물이 흘러가는 모습이다. 한번 흘러간 강물은 바다로 나아가 영원으로 사라진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인물들은 계속 등장한다. 자객 열전의 대표적인 인물로 우리는 형가를 손꼽는다. 그의 상대가 바로 중국 최초의 황제 진시황이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한 편의 고대 서사시를 이루었다. 장엄하고, 격정적이고, 문학적이면서 함께 음악적이다. 형가가 진시황을 만나러 가는 길은 되돌아 올 수 없는 강의 길이었다. 그래서 이 노래에는 인간의 운명이라는 보편적인 정서와 동시에 형가라는 한 특출한 인물의 비애와 진시황이라는 저 거대한 바다의 세계가 같이 녹아 있다.

 

약한 자의 비수를 조심하라!

 

형가는 위나라 사람이었다. 당시 진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기 위해 점점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격동기에 뛰어난 인물들은 큰 뜻을 이루거나 대부분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다. 형가는 책읽기와 격투기 검술을 좋아했는데 실력이 뛰어났다. 성격은 매우 조용하고 단아했다. 누군가 시비를 걸거나 성을 내면 조용히 사라져 다시는 만나지 않는 성격이었다. 나도 그러한 성격이어서 잘 아는데 이런 사람들은 많이 참는 스타일이다. 말이 없으니 참을 일도 많았을 것이다. 술을 잘 마시거나 담배를 절대 끊지 못하는 스타일이다.

 

그는 축(?)을 잘 타는 명인 고점리와 친구로 지냈다. 형가는 고점리와 어울려 술을 마시면서 노래하다가 문득 서럽게 울기도 하기도 하였다. 아들이 아비를 죽이고, 신하가 임금을 주살하는 춘추전국시대를 살았던 형가의 눈물은 참고 또 참고 있는 자의 눈물이기에 마치 지표를 뚫고 나오는 용암과도 같이 뜨거운 것이었다.

 

형가는 비록 술꾼들과 사귀어 놀기는 했지만, 그의 사람됨이 신중하고 침착하여 글읽기를 좋아하였다. 그는 제후국을 떠돌면서 한결같이 그곳의 현인이나 호걸, 나이 많고 덕을 갖춘 사람들과 사귀었다.”

 

형가는 연나라 태자 단을 만나 거사를 결심한다. 단은 어린 시절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는데, 거기서 진나라 왕인 정을 만나게 된다. 조나라에서 태어난 정이 어린 시절을 조나라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두 어린아이는 매우 친하게 지낸 모양이다. 이때의 우정이 훗날의 원한이 되었다. 단은 장성하여 다시 진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진나라의 왕이 정이었다. 그때 단의 마음은 아마도 어린 시절의 친구인 정이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주리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진나라의 정, 훗날의 진시황은 너와 나는 인간의 질이 다르다는 식으로 박정하게 대했다. 이미 천하를 가질 정에게 어린 시절의 우정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좌우간 무지하게 모멸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억울하면 출세해야 한다는 유행가 가사가 있는 것인가?

 

하여간, 연나라로 도망쳐 온 단은 이를 갈면서 수모를 당한 복수를 결심했다. 하지만 이미 진나라는 중원을 장악하고 있었다. 단은 자신의 원수를 갚아줄 사람을 찾았으나, 그 대상이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중원을 통일할 진나라의 정이었으니 그게 어찌 쉬운 일인가?

 

이미 진나라 정은 기운이 최고조에 다다라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원한에 눈이 멀면 이성이 마비되게 마련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일 필요한 것이 현명한 신하다. 태자 단에게는 그러한 신하가 있었다. 태부 국무가 단에게 업신여김을 당했다는 원한 때문에 진나라 왕을 화나게 하지 말라는 말을 듣는다. 대신 깊이 생각한 다음에 비책을 의논하고 권한다.

 

그래 이게 인생이고, 세상이다.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단은 비수를 품는다. 약한 자는 항상 비수를 품게 마련이다. 세상의 강한 자여, 약한 자의 비수를 조심하라!

 

스스로 목을 베어 건네다

 

하지만 정국은 계속 태자 단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진나라의 장군 번오기가 연나라로 망명했다. 만약에 그를 받아준다면 진나라를 화나게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태자 단은 자신의 품으로 날아온 가여운 울새와 같은 장군을 품으려 한다. 태부는 절대 받아들이면 안 된다면서 번오기를 받아들일 때의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굶주린 호랑이가 다니는 길목에 고기를 던져놓는 격이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투항해 온 장수 번오기를 품으려 하는 맘 좋고 심약한 태자 단에게 태부는 말했다.

 

위태로운 일을 하면서 안전함을 찾고 재앙을 만들면서 복을 구하려 한다면 계책은 얕아지고 원망만 깊어진다.”

 

그래도 단은 요지부동이었다. 현인의 눈에는 바로 앞의 불행이 확연하게 보이는 법이다. 태부는 자신의 지혜와 용기로는 감당되지 않는 일이라 전광 선생이라는 현인을 단에게 소개한다. 태자 단이 전광 선생을 만나면서 진시황 암살이라는 계획이 무르익는다.

 

태자는 전광 선생을 만나 연나라와 진나라가 함께 설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전광 선생은 자신은 한때 하루에 천리를 달리던 준마였지만 이미 늙고 쇠약해진 노둔한 말이라면서 광야를 달릴 수 있는 준마인 형가를 추천했다.

 

태자 단은 전광 선생에게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간곡하게 당부했다. 전광 선생은 심약한 태자의 걱정을 이미 알고 있었다. 전광은 몸을 낮추고 형가를 찾아 가 간곡하게 태자 단의 준마가 되어줄 것을 당부하고 자신의 목숨을 버렸다. 비밀 유지에 대한 태자의 염려를 덜어준 것이었다. 형가는 즉시 태자를 찾아가 전광 선생의 죽음을 전했다. 태자는 전광 선생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리고 형가가 자리에 앉자 태자는 자리에서 내려와 머리를 조아렸다.

 

그 자리에서 태자 단은 말했다. 진나라 정을 찔러 죽여 진나라 내부에 분란이 일어나게 한 다음 다른 제후국들이 합종한다면 진나라를 깨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면서 이 일, 즉 진나라 왕을 제거할 수 있는 영웅을 만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당신이 그 일을 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의 말이었다. 형가는 자신은 그러한 일을 할 만한 사람이 못 된다면서 몇 번 거절하다 끝내 허락했다.

 

형가가 진나라로 길을 떠날 때 가지고 간 것은 번오기 장군의 목과 연나라의 요지인 독항의 지도였다. 독항은 일찍이 진시황이 눈독을 들이던 땅이었다. 두 가지 덕분에 진나라 왕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태자 단은 당연히 번오기 장군의 목을 줄 수 없다고 했지만, 이 소식을 들은 번오기 장군은 스스로 자신의 목을 베어 형가의 뜻에 따랐다.

 

안중근의 장부가

 

형가의 거사에는 이미 두 인간의 죽음이 있었다. 전광 선생과 번오기 장군의 목숨이었다. 이 둘은 형가의 성공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태자는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서 부인의 비수를 황금 100근을 주고 구입했다. 독약이 발라진 그 칼날은 살짝 스치기만 해도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었다.

 

비수와 두 사람의 목숨, 그리고 기름진 땅까지. 진시황에게 다가가기 위한 준비가 다 되었다고 태자는 생각했다. 하지만 형가는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온다면 길을 떠날 일이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 장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소심한 태자 단이 형가에게 큰 실수를 한다. 다른 뜻이 있어 주저하는 것이냐, 즉 겁이 나는 거냐는 식의 질문이었다. 형가는 단호하게 태자를 꾸짖었다.

 

한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비수 한 자루를 가지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진나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은 친구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 다음, 태자가 그런 말을 하니 당장 떠나겠다면서 연나라의 진무양이라는 얼치기와 함께 길을 떠난다. 형가의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더불어 온 우주가 흔들렸다.

 

이 대목에서 나는 형가 거사의 위태로움을 보았다. 1%가 모자란 것이었다. 완벽하지 않다면 진나라 왕을 벨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대국의 통일이라는 거대한 드라마의 전주곡이었는지도 모른다. 형가는 슬픈 곡조인 우성으로 장사가 한번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노래를 부른 다음 진나라로 향했다. 가는 길에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고 전한다.

 

대한제국의 안중근 장군도 이러한 길을 걸었다. 하얼빈 김성백의 집에서 머물렀던 거사 전날, 안중근은 하얼빈 역을 바라보면서 장부가를 적었다.

 

장부로 세상에 나와 그 뜻이 크다

 

때가 영웅을 만들어내니 영웅 또한 때를 만들 일이다.

 

천하를 내려다보니 어느 날에 큰일을 이룰 것인가

 

동풍이 점점 차가운데 장사의 의기가 끓어오르는구나.

 

기개를 떨쳐 가나니 반드시 목적을 이루고야 말 것이다.

 

쥐 도둑 이등박문이여 어찌 네 목숨에 비길까

 

어찌 이에 이를 줄을 누군들 알았을까

 

세상일이 원래 그러한 것,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루자.

 

만세 만세여 대한 독립이다

 

만세 만만세여 대한 동포다.”

 

 

정확히 100년 전 1026일이었다. 이 노래를 부르기 한 달여 전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항구에서 엔치야에 머물던 친구들과 작별했다. 친구들이 언제 돌아올 거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다.

 

다시는 안 돌아올 것이다.”

 

형가에 근접한 이봉창

 

그때만 해도 장군은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모르고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와서야 비로소 이토 히로부미의 방문 사실을 알았고 거사를 준비한 것이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는 말이다. 안중근 장군의 마음과 하늘의 뜻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1909 1026일 하얼빈의 거사는 성공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말대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형가와 안중근은 모두 중국 땅에서 거사를 감행했다. 이후 또 다른 자객인 이봉창이 대단한 거사를 감행했다. 일본 천왕의 암살을 감행한 것이다. 그는 형가와 가장 근접한 인물이다. 절대세력을 제거하려 했고 거사에 실패했다는 점에서다. 이렇듯 우리는 열전에 나와 있는 인물 유형을 통해 사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하늘의 별자리와 같은 것이다.

 

광막한 우주에 떠 있는 별자리와 같은 인물들, 나는 지금 어디에서 빛나고 있는 별인가? 혹은 어둠인가? 열전은 그걸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진나라 왕 정은 과연 형가의 예측대로 기뻐하면서 형가를 맞았다. 왕을 향해, 아니 적을 향해 나아가는 형가와 부사인 진무양, 이때 형가의 염려가 현실로 나타난다. 연나라의 장사라고는 하지만 담력이 부족한 진무양이 얼굴빛이 바뀌면서 덜덜 떨기 시작한 것이다. 거사를 감행할 그릇이 아니었던 것이다. 첫 번째 불길한 조짐이었다. 하지만 형가는 여유롭게 그 위기를 넘기고 왕에게 지도를 들고 다가간다. 지도에는 비수가 숨겨져 있었다.

 

환한 얼굴로 왕이 지도를 펼치자 비수가 드러났다. 그 찰나에 형가는 왼손으로는 왕의 소매를 붙잡고 오른손으로 비수를 쥐고 왕을 찌르려고 했다. 하지만 왕이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소매만 떨어졌다. 왕은 칼을 뽑으려 했지만 칼이 길어 뽑지 못하고 칼집만 잡았다.

 

왕은 도망쳤다. 형가는 뒤를 쫓았다. 어전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옆에 있던 지혜로운 신하의 일갈이 왕을 살렸다. 칼을 등에 지고 뽑으십시오. 왕은 칼을 등에 지고 칼을 뽑아 내리쳐 형가의 왼쪽 다리를 베었다. 쓰러진 형가는 비수를 왕에게 던졌지만, 한참 혈기방장한 왕은 비수를 피하고 비수는 궁의 구리 기둥을 맞고 튕겨져 나왔다. 왕은 쓰러진 형가를 난자하고, 형가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형가는 당신을 사로잡아 위협을 해서 태자에게 보답하려 했다면서 준엄하게 진나라 왕을 꾸짖었다.

 

거사가 실패하자 호랑이에게 상처를 입힌 격이었다.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진나라 왕 정. 진노한 그는 군사를 동원해 연나라를 공략했고, 태자 단은 동쪽으로 달아났다. 5년 후 연나라는 망했다. 이듬해 진나라 왕 정은 천하를 통일하고 스스로 황제라고 불렀다. 중국 고대의 신 황제, 신들의 왕인 황제가 땅 위에 나타난 것이다.

 

열전은 형가의 죽음 이후 또 다른 자객이자 예인인 고점리를 간략하게 소개한다. 고점리는 형가와 어울려 노래하고 춤을 추던 예인이었다. 뛰어난 예인이었기에 진시황은 그가 형가의 친구임을 알면서도 가까이 두었다. 단 그의 두 눈을 멀게 해 멀리서 연주만 하게 했다.

 

열전엔 이렇게 적혀 있다.

 

진시황은 고점리의 뛰어난 축 타는 솜씨를 아까워하여 용서하는 대신 눈을 멀게 했다. 그러고 나서 고점리에게 축을 타게 했는데, 그 소리를 칭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진나라 시황은 그를 점점 가까이하였다. 고점리는 축 속에 납덩어리를 넣어두었다. 진나라 시황 곁으로 가까이 갔을 때 축으로 내리쳤지만 시황은 맞지 않았다. 진나라 시황은 결국 고점리를 죽였다. 이 일로 해서 진시황은 죽을 때까지 제후국에서 온 사람들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자객이여, 너는 누구냐

 

중국의 하얼빈에서는 해마다 1026일이 되면 총성이 울린다. 이 울림은 어디에서 오는가? 1909년에는 하얼빈의 대합실에서 울렸고, 그부터 70년 후인 1979년에는 서울의 궁정동 안가에서 울렸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는 자객이라는 단어로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박정희라는 인물보다는 유신정권이라는 망령을 저격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권총 또한 그러하다.

 

이들이 손에 들고 뜻을 펼친 무기는 총이다. 총알은 빠르게 나아가 상대를 절명시키는 무기다. 총 이전에는 칼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총성과 비수의 음률은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으로 전이된다. ‘운명교향곡 도입부의 강렬한 엑스터시는 바로 이러한 운명에 대한 음악이다. 음악과 비수와 총성, 겨누는 자와 도망가는 자와 쫓아가는 자의 모든 동작이 운명교향곡에 담겨 있다.

 

형가를 읽으면서 베토벤을 들으면, 동서양의 두 정신이 하나의 강물로 굽이쳐 흐르고, 천둥 번개가 치고, 때론 조용히 호흡하면서 저 화엄의 바다로 나아가는 모양이 보인다. 음악이 눈에 보인다는 건, 무슨 말인가. 그 음악에 자신의 이야기가 담기기 때문이다. 그 음악에 사람의 이야기가 있어 눈을 감아도 선연하게 떠오른다.

 

먼 길을 달려와 숨이 차다. 하지만 나의 마음에는 지금도 만주벌판을 질주하는 힘찬 영웅들, 그 준마들의 말발굽소리가 메아리쳐 온다.

 

그리고 자객들의 칼에 쓰러지거나 모멸을 당한 인물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셰익스피어가 표현한 로마의 영웅 카이사르의 마지막 말, ‘브루투스 너마저(et tu Brute)’가 자객을 바라보는 위대한 인물들의 극적인 심정인지도 모른다. 그토록 믿었던 이 세상이 나를 찌르는구나. 세상이여 너는 누구냐? 자객이여, 과연 너는 누구냐?

 

 

 

 다음 회 예고

 

첫 회를 자객열전으로 선택한 것은 2009년이 안중근 의사의 거사 100주년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소견으로는 안중근 의사야말로 자객의 대표적인 유형입니다. 다음달에는 사기열전의 저자 사마천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옛 책에는 저자의 자서(自敍)를 맨 뒤에 붙였습니다. ‘사기열전에도 맨 마지막에 사마천 자신의 기록이 붙어 있습니다. 사마천에 대한 기록은 한서에도 남아 있습니다. ‘사기열전 한서를 전거로 글을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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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13; 태사공자서

겨울을 난 벚나무에 향기로운 꽃이 피고

 

 

 

한 권의 책은, 곧 그 책을 쓴 사람이다. ‘사기를 읽는 건 사마천을 읽는 것이요, ‘목민심서를 읽는 건 다산의 생애와 사고를 오롯이 읽는 것이다. 후세에 길이 남을 고전은 결코 순탄하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마천은 가장 치욕스러운 시기를 저술로 견뎌냈고, 정약용은 슬픔과 고독을 책으로 달랬다.

 

 

 

()은 난()을 만들고 한()은 문화에 통한다.’ 이병주 선생은 사마천에 대한 글을 쓸 당시 나에게 이런 문장을 주었다. 이병주식 촌철살인이다. 이병주 선생 역시 사기(史記)’를 처음 읽은 곳이 경찰서 유치장이었고, 서대문형무소에서 10년형을 살면서 한서(漢書) 사기를 읽기 시작했다. 사마천이 억울하게 궁형을 받고 쓴 사기’, 이병주 선생이 억울하게 10년형을 받고 감옥에서 읽은 사기’. 시공간을 뛰어넘는 인간 정신의 교류다.

 

사기열전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와 반고의 한서에 수록된 사마천전을 읽으면서 나는 글쟁이의 운명에 대해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독하게 글 쓰는 이들을 얘기하면서, 그 독함은 바로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라는 말도 오갔다. 비록 이름을 널리 알리지는 못했으나, 가난과 슬픔, 고통 속에서 진주 같은 작품을 쓰는 시인이 많다.

 

글쟁이의 진정성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문화에 통한다는 한()이 아닌가. 세상에 남은 고전은 작가들이 말로는 전할 수 없는, 말로는 다할 수 없는, 말로 해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어둠과 고통 속에서 기어이 하늘로 띄운 별이 아니던가.

 

사마천 이전에 안 되는 건 죽어도 안 된다고 목숨 걸고 밝히며 역사가의 전범(典範)을 보여준 용감한 삼형제가 있었다. 제나라의 권력가 최저는 임금인 장공을 죽였다. 이에 제나라의 태사(太史) 최저, 장공을 시하다라고 기록을 남겼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깔끔한 문장이다. 최저는 태사가 괘씸해 죽여버렸다. 그러자 이번엔 태사의 동생이 최저, 장공을 시하다라고 썼다. 최저는 그 동생도 죽였다. 두 형의 죽음을 본 태사의 또 다른 동생도 마찬가지 기록을 남겼다. 잔인무도한 최저라지만, 이번엔 사람도 문장도 죽이지 못했다. ‘사기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에 수록된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읽고 나는 나 자신에게 물었다. ‘너는 문장 하나 때문에 죽을 수 있느냐?’

 

죽음보다 더한 치욕

 

간혹 죽음이 자비로울 때가 있다. 극심한 고통에 처한 사람은 죽음을 간절히 원하기도 한다. T S 엘리어트의 시 황무지에 등장하는 항아리 속 할머니에겐 죽음이 자비인 것이다. 고대 중국에서 남근을 거세하는 궁형(宮刑)은 최악의 형벌이었다. 사마천은 문장을 위해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견디며 사기를 집필했다. 그는 누구인가?

 

사마천은 한 경제의 중원 5(기원전 145)에 태어났다. 아버지 사마담은 사마천이 다섯 살 때에 태사령(太史令)이 되었다. 태사령은 사관(史官)을 의미하며 아들이 아버지의 직위를 이어받는 세습직이다. 사마천은 20세에 전국을 여행했으니, 그의 문장은 당시 온 세상이나 다름없던 중국을 유람한 경험에서 비롯됐다. 22세에 벼슬을 처음 했고, 38세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됐다. 42세에 사기를 쓰기 시작했지만 본격적인 저술활동은 하지 못했다. 공사다망했기 때문이다. 48세에 이릉(흉노를 정벌하러 떠났다가 포로가 된 장군)을 변호하다 궁형을 당하고, 50세 무렵 출옥해서야 본격적으로 저술활동에 임할 수 있었다. 55세에 사기를 완성하고, 62세에 세상을 떴다.

 

궁형을 당한 선비들은 으레 자결했지만, 그는 그런 식으로 도피하지 않았다. 한 무제는 궁형을 당하고도 살아남은 사마천에게 중책을 맡기고, 곁에 머물러 역사를 기록하게 했다. 사마천이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쓰는지 지켜보고 싶었던 것일까?

 

사기열전의 맨 마지막인 70번째 열전이 태사공자서. 사마천은 태사공자서에 자신의 출생배경과 학문적 배경, 경력 등을 소상히 밝혀놓았고, ‘사기의 구성에 대해서도 짧게 언급해, 책 전체를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사마천은 사람이 살아 있음은 정신이 살아 있음을 말하고, 따라서 정신과 육체를 잘 운용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정신이 고갈되고 육신이 피폐해져, 결국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면 죽는다는 얘기다. 사마천은 정신이야말로 사람의 근본이며, 육신은 삶의 도구라고 했다. 이 삶의 도구, 그중에서도 남성의 상징이자 중심을 앗아간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사마천은 이릉 장군을 변호하다가 궁형을 당했다. 사마천으로 하여금 이러한 불행을 겪게 한 이릉 장군은 누구인가? 왜 사마천은 조정의 대세를 따르지 않고 무서운 군주 한 무제의 심기를 건드리면서까지 이릉 장군을 변호했을까? 사마천은 이렇게 말한다.

 

이릉의 화()

 

나와 이릉은 같은 문하에 있었는데 본래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취미도 달라 술잔을 나누며 친하게 환담한 적도 없다. 그러나 그의 사람됨을 볼 적에 본래 예사롭지 않은 선비였다. 효심이 두텁고 신의가 있으며 청렴하여 공연한 선물은 받지 않았다. 물건을 나눌 때에는 제 몫을 남에게 양보하고, 항상 공경하는 마음과 사양하는 몸가짐을 가졌다. 항상 분기하여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국가의 위난에 뛰어들었다. 이것이 그의 평생의 자세였다.”

 

사마천은 역사를 기록하는 독수리눈을 가진 선비였다. 그의 눈은 그의 입이기도 했다. 행동과 말이 다르지 않았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전술했듯, 역사가는 단 한 문장 때문에 목숨을 버리기도 한다. 사마천은 이러한 일이 바로 되지 않으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군주가 군주답고, 신하가 신하답고, 자식이 자식다워야 함은 이러한 정직성과 정확성에 기인한다.

 

이릉은 5000 병력으로 흉노를 정벌하러 갔다. 북방의 호랑이 같은 수만의 흉노 대군을 5000 군사로 제압하려다 적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식량과 화살이 떨어지고, 구원병마저 오지 않는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이릉이 진중(陣中)을 바라볼 때, ‘병사들은 몸을 일으켜 눈물을 흘리고 피로써 얼굴을 씻고 눈물을 마시며, 살도 없는 활을 당기면서 시퍼런 칼날에 몸을 던지고, 북을 향해 앞 다퉈 죽어가고 있었다. 그때 궁에서는 이릉이 용맹무쌍하게 싸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일찌감치 승리를 자축하며 술잔을 높이 들고 있었다.

 

이릉은 한나라의 장군으로서 적에게 항복했다는 죄목으로 한 무제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이때 사마천이 한 무제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제가 생각하기로 이릉은 평소 맛있는 것도 먹지 않고 부하와 더불어 고난을 함께하니, 모두가 이 사람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아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옛 명장도 이릉보다 뛰어나지 않았습니다. 몸은 비록 적에게 붙들려 있지만, 당초 생각은 적당한 기회에 한에 은혜를 갚으려 했던 것입니다. 이미 패한 건 어쩔 수 없으나, 흉노를 무찌른 공훈은 천하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세상을 사는 일은 시인에게도 그리 녹록하지 않다. 그러니 정치판 같은 곳에서야 오죽하겠는가. 그의 충성은 호도되었고, 결국 이릉은 온 가족이 사형에 처해졌으며, 사마천은 궁형을 당해 한겨울 벌판에 알몸으로 서 있는 형국이 됐다.

 

살아남아야 할 이유

 

사마천이 사기라는 대작을 집필할 수 있었던 것은 가혹한 형벌 궁형 덕분이다. 그는 살아남아야 할 이유로 글쓰기를 택했다. 그러고 나니 육체적인 죽음이라고 할 만한 궁형은 오히려 정신을 되살려냈다. 그는 형벌을 받으면서 심각하게 고민했다. 먼저 억울함을 곱씹었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수모를 겪는단 말인가 미치기 직전까지 정신이 팽창한다. 몸과 마음은 터져버릴 것 같은 공황상태에 이른다. ‘이것이 내 죄인가? 이것이 내 죄인가? 몸이 망가져 쓸모없게 되었구나.’ 몸의 망가짐이 정신의 죽음으로 이르기 직전에 사마천은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를 극복하고 자신의 쓸모를 찾아냈다.

 

대체로 시경과 서경의 뜻이 은미(隱微)하고 말이 간략한 것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바를 펼쳐 보이려 했기 때문이다. 옛날 서백은 유리에 갇혔기 때문에 주역을 풀이했고, 공자는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고난을 겪었기에 춘추를 지었으며, 굴원은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 이소를 지었고, 좌구명은 눈이 멀어 국어를 남겼다.

 

손자는 다리가 잘린 후 병법을 논했고, 여불위는 촉나라로 좌천되자 세상에 여람: 여씨춘추를 전했고, 한비는 진나라에 갇혀 세난 고분 두 편을 남겼다.  300편은 대체로 현인과 성인이 발분(發憤)하여 지은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마음속에 울분이 맺혀 있는데, 그것을 발산할 수 없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서술하여 다가올 일을 생각한다. 좌구명이나 손자는 실명하거나 다리가 절단되자 희망을 잃고 물러나 책을 지어 토하고 글에 의지해 깊은 뜻을 세상에 알리려 했던 것이다.”

 

궁형, 거세를 당한 것은 그가 이제 더 이상 남성으로서 국정에 나가 이런저런 말을 할 수 없다는 의미기도 하다. 사마천은 이제 사회의 마이너리티로 그림자와 같은 삶을 산다. 그에게 오늘은 사라지고, 대장부의 명분도 없어진 것이다.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과거와 미래뿐이었다. 그래서 지나간 일을 서술해 다가올 일을 생각하는 문장을 남긴다. 이것이 바로 역사가의 운명이었다. 그는 벗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런 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런데 그 뜻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 이릉의 화()를 입었다. 이대로 미완성인 채로 그만두는 것은 유감천만이다. 그래서 나는 극형을 받으면서도 성난 빛조차 보이지 않았다. 내가 만일 이 저작을 완성한 진의를 전하고, 수도 장안을 비롯한 대도시에 유통시킬 수만 있다면, 이때까지의 굴욕이 보상되는 것이며 만 번 형륙(刑戮)을 받아도 한이 없겠다.”

 

불가에서는 수도승들이 묵언수행을 한다. 그 기간 자신의 산만한 내면을 살피고, 도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나는 작가에게도 묵언수행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작가의 묵언수행은 바로 집필하는 시기다. 이 시기가 무너지면 작가는 정체성을 잃는다. 그러나 이 수행은 고독하고 고통스럽다. 달콤한 말 한마디가 그립다. 금지된 육욕과 같은 유혹이다.

 

하지만 말이 많으면 실수하기 쉽고, 어떤 말은 바로 독이 되며, 또 어떤 말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 물론 부처 예수 소크라테스와 성인군자들은 말을 많이 했다. 책을 쓰지는 않았다. 공자역시 역사서인 춘추를 지었을 뿐이다. 나 역시 강의를 많이 한 날은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가 글을 쓰기가 힘들다. 말과 글은 어쩌면 한 치도 양보 않는 대척점에 있는지 모른다.

 

사마천은 과거의 인물들을 통해 자신이 갈 길을 찾았다. 선배들의 길을 따라야 한다고 자각한다. 우리의 삶도 사기의 열전 중 누군가의 길을 되밟는 일이다. 사마천의 위 문장을 이렇게 고쳐 써본다.

 

정약용의 유배, 한하운의 천형

 

옛날 다산 정약용은 참혹한 유배지 생활 동안 여유당 전서를 지었고,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 유배지에서 세한도를 그렸다. 시인 한하운은 천형(天刑)이라는 한센병을 앓으면서 시를 지었다. 김지하는 독재정권에 저항하여 오적을 비롯한 걸작을 남겼으며, 신영복은 젊은 시절을 감옥에서 보낸 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펴냈다.

 

황석영도 출감하고 나서 더욱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천형을 앓은 한하운 시인의 정치권력에 희생당한 마음에는 울분이 차고도 넘쳤다. 그것을 발산할 수 없기에 지나간 일들을 문장으로 쓰고 또 쓴 것이다. 이런 선배들 앞에서 내가 갈 길을 보지 못한다면, 나는 장님이 아닌가.”

 

정치권력에 희생되어 모진 수난을 겪은 문인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쉽게 찾을 수 있다. 고대 중국에선 신체의 일부를 거세하는 원시적인 형벌을 내렸고, 현대에 와선 인간의 신체와 정신을 감금함으로써 정신적 불구를 만들고자 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세계적인 화학자 프레모 레비도 극단적인 권력의 희생양이었다. 그는 지옥에서 살아남았지만, 자살을 택하고 만다. 한 인생이 넘을 수 없는 산이 있는 법이다.

 

나는 사마천과 같은 육체적 고통의 극한을 겪은 시인 한하운을 생각한다. ‘운명은 장담할 수 없는 일이라는 탄식으로 시작되는 한하운의 자서전을 살짝 들여다본다.

 

나는 문둥병 선고를 받던 날, 그 순간부터 하늘이 무너지는 주검보다 무서운 절망에 허탈해버렸다. 절망의 수십 년 세월 속에 세상 사람들이 제멋대로 규정한 인간 추방의 잔학성에 인간폐업의 서식조건을 박탈당한 산송장으로 싸워 나온 서글픈 생존자라 할 거다.

 

세상은 사람이 사람을 짓밟고 사람 위에 서서 보잘것없는 사람에게는 세상은 함부로 무자비한 학대를 하고 개돼지보다도 더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진다. 전락의 삶과 병과 시혼(詩魂)의 방황 속에 애달프고 서글픈 생존과 자유를 찾는 고고한 생명의 시집이라 하겠다. 그러니 이 고고한 생명은 나의 인생기록에 해당하겠다. 이 책을 출판하게 됨은 나를 격려해주는 수많은 독자의 간곡한 청에 못 이겨 내놓은 것이다. 다만, 세상에 절망한 사람, 죽고 싶은 사람들이 이 책에서 어떤 용기를 얻게 되면 이 책의 보람을 다한 것이라 하겠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세상사, 절대 맘대로 되지 않는다. 이러한 생각은 세월이 갈수록 나이테처럼 가슴에 새겨진다. 그렇다고 운명론자가 되는 건 아니다. 시인 한하운은 시를 통해 고고한 생명의 기록을 남겼다. 세상에는 그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간절하게 그를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작가의 불행이 독자의 행복이라는 잔인한 말이 틀리지 않다. 불행조차 사마천이나 한하운과 같은 사람을 만나 찬란하게 변화한다. 고통을 통해 인간성을 죽이려던 잔인한 의도는 무산되고, 오히려 찬란한 저서와 시집이 탄생한다. 이 연금술은 고통을 행복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증오를 사랑이라는 거대존재로 변화시킨다. 고통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행복한 순간이 되기도 한다.

 

그는 한겨울 헌 가마니 한 장에 의지해 서울에서 밤을 지새운 일을 회고하면서 고통이 심하면 인간은, 목소리가 변하고 시력마저 잃어 세상이 잿빛으로 보인다고 회고했다. 온전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한하운은 그때의 심경을 이렇게 적었다. ‘이제는 나는/말도 잊었다/울음도 잊었다.’// 이러한 고통 속에서 그의 절창(絶唱)이 터져 나왔다. 그의 시 전라도 길이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찔름거리며/가는 길//

 

신을 벗으면/버드나무 밑에서 자까다비를 벗으면/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한하운의 붉은 황톳길은 이후에 독재 권력에 저항하는 시인들의 길이 되었다. 선배인 김소월 윤동주에서부터 유신독재하의 김지하 황석영과 같은 시인, 소설가들이 이 길을 걸었다. 천형을 받은 건 아니나, 감금되고 통제되는 형벌의 길을 감수했다. 이러한 길은 아마도 인류가 존속하는 한 영원할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이세상과 저세상을 다르게 보지 않았다. 이승과 저승을 동일 선상에 놓고 보았다. 살아서 황제는 죽어서도 황제이고, 신하는 사나 죽으나 신하다. 제후는 노자를 무덤에 들고 들어가고, 법관은 법조문을 안고 들어간다. 무덤 속의 물건을 보면 주인의 정체가 보인다. 중국인은 왜 입신출세하고, 고관대작이 되려 하는가? 단순히 현세의 호의호식을 위해서가 아니다. 현실의 입신출세는 다음 생인 유택의 세계, 명의 세계에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아버지와의 약속

 

사마천 역시 이러한 바람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그는 사기를 저술함으로써 후대의 역사서인 반고의 한서에 이름을 남기고 명예를 되찾았다. 그의 저서 사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불세출의 고전이 되었다. 그는 치욕을 견뎌내고 살아남아 사기를 쓴 덕분에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자신의 비통에 찬 마음을 집필로 승화시켰으며, 아버지의 마음을 받들어 효를 행한 것이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아들에게 이러한 말을 남겼다.

 

내가 죽으면 너는 반드시 태사가 되리라. 태사가 되거든 내가 쓰고자 했던 것을 잊지 말아라. 효행이란 어버이를 받드는 데서 비롯하며, 임금을 섬기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입신하여 후세에까지 이름을 들날리고, 나아가 죽은 부모를 유명하게 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것이 가장 큰 효행이니라.”

 

중국의 역사가 춘추를 끝으로 무주공산이 되어버린 것을 한탄하며, 춘추 이래 400년 남짓한 역사를 기록하라고 간곡하게 명한 것이다. 한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였으니, 이제 태사가 되어 그걸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체절명의 바람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공(周公)이 가신 지 500년이 되어 공자가 태어났습니다. 그로부터 500년이 지났습니다. 주공, 공자의 도를 계승하여 이를 밝히고, ‘()’의 해석을 바로잡아 춘추를 잇고, ‘···의 전통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자가 탄생한다면 바로 지금일 것입니다.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마천이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이렇게 써나간 지 10년 만에 이릉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궁형을 받은 뒤에 중서령이라는 높은 관직에 올랐다. 이때 친구인 임안이 사마천에게 편지를 보내 옥중에서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다급함을 토로하고, 옛 현신(賢臣)의 도의를 본받으라고 충고했다. 사마천은 임안에게 보내는 글이라는 답장에서 자신이 비록 중서령의 직책을 맡았으나 쓰레기통에 처박힌 노예나 다름없는 처지라고 했다. 그러면서 사기를 완성하여 이를 마땅한 자에게 전하고, 큰 마을이나 도시에 퍼져 나가게 할 수만 있다면, 과거의 욕됨을 갚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자신은 다만 쓸 뿐이라고. ‘한서 사마천전에 수록된 임안에게 답하는 글에는 사마천의 절절한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 마치 제갈공명의 출사표 같다.

 

추사는 제주도 유배지에서 그린 세한도를 통해 날이 추워야 푸른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추사는 시련기에 세한도를 그렸다.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삼형제의 1801년 수난은 우리 문화사에 길이 남을 명저의 탄생을 예감케 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다산 정약용은 정조의 총애를 받은 뛰어난 신하였다. 이러한 그의 명성이 오히려 화를 불렀다. 뛰어난 재주는 질투와 모함을 낳게 마련이다. 1801년 신유박해로 약전은 아우 약용과 함께 유배 길에 올랐다. 약용은 장기를 거쳐 강진에 유배됐고, 약전은 흑산도에 유배됐다.

 

시련은 명작을 꽃피우고

 

약전은 절해고도 흑산도에서 자산어보를 저술한다. ‘자산어보는 약전이 흑산도 근해의 수산생물을 실지로 조사, 채집하고 분류하여 각 종류의 명칭 분포 형태 습성 및 이용에 관해 상세히 기록한 우리나라 최초의 수산학 관계 명저다. 약전이 유배지에서 살면서 먼 바다를 바라보고 오지도 않을 구조선을 기다리며, 신세 한탄만 했다면 시대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약전은 비통에 찬 세월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가장 가까이 있는 바다로 걸어 나갔다. 바닷가를 걷고, 바닷물에 손을 담그면서 그 걸음걸이로 16년의 세월을 견디다 세상을 달리했다.

 

18년 유배지 생활을 견뎌내며 저술한 정약용의 방대한 저서는 오늘날까지 우리 학문의 자존심으로 남아 있다. 다산의 많은 저서 중에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목민심서도 유배지인 강진에서 씌어졌다. 베트남의 위대한 지도자 호치민도 머리맡에 두고 읽었다는 목민심서의 서문에 다산은 사마천과 비슷한 심경을 적어놓았다.

 

나의 부친께서는 성조(聖祖)의 지우(知遇)를 받아 이현(二縣)의 감(), 일군(一郡)의 수(), 한 부()의 호(), 일주(一州)의 목()을 지낸 바 있는데 성적이 좋았다. (정약용)은 비록 불초(不肖)하지만 부친을 따라다니면서 들은 바, 본 바, 깨달은 바가 있었고, 물러나와 이를 시험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유락한 몸이 되어 이를 쓸 곳조차 없게 되었다. 18년 동안 외롭고 가난하게 오경사서(五經四書)를 되풀이 연구하고 수기지학(修己之學)을 강론했다고 하는 등 배웠다고 하지만 그 학이란 반뿐이다. 옛날 부염(傅琰) 이현보(理縣譜)’를 작()하고 유이(劉彛) 법범(法範)’을 작하고, 왕소(王素)에겐 독단(獨斷)’이 있고, 장영(張詠)에겐 계민집(戒民集)’이 있고, 오덕수(吳德秀) 정경(政經)’을 만들고, 호대초(胡大初) 서언(緖言)’을 만들고 정한봉(鄭漢奉) 환택편(宦澤篇)’을 지었다. 모두 목민지서(牧民之書)라고 할 수 있다.”

 

선대의 슬픔, 후대의 기쁨

 

유배지에서 목민심서를 집필할 때의 심경과 선배들이 지은 저서를 열거한 문장은, 사마천이 울분을 참으며 선배들의 저서를 생각한 것과 닮았다. 정약용은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현실의 곤궁함과 괴로움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빈고(貧苦)하고 곤궁한 괴로움이 또 그 심지를 단련시켜 지식과 생각을 깊고 넓게 하며, 인정물태(人情物態)의 진실과 거짓된 형상을 두루 알게 해준다.”

 

선비로서 매서운 추위를 견뎌야 봄날의 매화향기를 품을 수 있다는 전언은, 이제 수세기를 지나 우리에게까지 왔다. 정약용의 뒤를 잇는 후학들은 이를 명심하며 공부하고 집필했다.

 

우리에겐 덜 알려졌지만, 다산의 형인 정약종은 당대 가톨릭 교리를 깊게 연구했다. 천주교가 박해받을 당시 형제와 친구들이 다 배교할 때도 끝까지 신앙을 지킨 인물이다. ‘주교요지라는 저서를 남기고 전도하는 데 최선을 다하다 1801년 대역 죄인으로 참수됐다.

 

다산은 형들을 모두 잃고 유배지에 남겨진다. 이보다 더한 슬픔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우리는 다산의 슬픔보다는 그가 남긴 저서를 통해 선조의 위대한 뜻을 이어간다. 이보다 기쁜 일이 또 어디 있을 것인가.

 

사마천의 사기는 중국 역사책인 이른바 정사(正史)’의 원형이다. ‘사기는 기전체(紀傳體)로 씌어졌다. 기전체에서 기()는 중국 고대의 전설적인 제왕 황제로부터 한나라의 무제에 이르는 역대 왕조에 대한 기록이고, ()은 각 시대를 풍미했던 다양한 인물에 대한 기록이다. 기와 전 외에 세가(世家)는 황제를 떠받드는 여러 제후국의 역사이며, ()는 연표이고, ()는 경제 법률 등 각 분야의 제도를 기록한 책이다.

 

나의 고통이 그리 심한가?’

 

기는 본기(本紀), 전은 열전(列傳)이다. 본기 12,  10,  8, 세가 30, 열전 70권으로 이루어져 모두 130권이다. ‘사기의 구성은 이후 중국 역사 서술의 표준이 되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사기 이후에 저술된 한서에서부터 청사고(淸史稿)’에 이르는 중국 역대 왕조 정사의 원형을 창조했던 것이다.

 

사마천은 중국의 역사의식이 어떻게 발현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본보기이기도 하다. ‘사기와 비교할 만한 서양 고대 역사서로 헤로도투스의 페르시아 전사’, 투키디데스의 필로폰네소스 전쟁사가 언급되는데, 그 내용은 비교할 만한 것이 못된다. 헤로도투스의 역사나 투키디데스의 역사는 일종의 견문기이기 때문이다.

 

한 권의 책은 바로 그 사람이다. ‘사기를 읽는다는 건, 사마천을 읽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어떤 역경이 있을 수 있다. 궁형을 받은 사마천의 심경을 떠올린다면 나의 고통이 그리 대단한 것일까? 설령 그와 견줄 만한 고통이라 하더라도, 주저앉기보다는 사기보다 더 위대한 저서를 남기거나, 그게 아니라면,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될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다음 회 예고

 

다음달에는 화식열전(貨殖列傳)’을 이야기합니다. 고대 중국인들의 돈 버는 이야기입니다. 춘추 말부터 한나라 초까지 상공업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당대의 가치관은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비천하게 여긴 중농억상(重農抑商)이었지요. 이러한 전통적인 가치관을 부정한 사마천은 철저하게 현실을 중요시했습니다. 경제생활이 어렵다는 요즘, 고대 중국의 부자 이야기를 통해 사마천과 교감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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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14; 화식열전

 

 

 

 

 

피죽도 못 먹으면서 仁義만 논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니

 

그 어느 때보다 부자 되는 법에 솔깃해지는 시기다. 그러나 사람들의 부()에 대한 관심은 자본주의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있었고, 부를 축적한 자는 예외적인 대우를 받기 일쑤였다. 물질을 좇기보다 명분을 추구한 선비들의 삶을 높이 산 사기열전의 맨 마지막은 부자와 돈벌이 얘기다

 

나는 우울할 때 종합병원 응급실에 가곤 한다. 온갖 사고로 실려 들어오는 위급한 환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의 건강이 얼마나 큰 재산인지 알게 된다. 그 순간 매우 겸손해진다. 가끔은 산엘 오른다. 북한산에서 서울을 내려다보면 청와대를 비롯한 모든 건물이 내 손바닥 안에 있다. 마음에 드는 건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건물주가 된 것 같아 행복하다. 그보다 더 행복한 것은 산의 주인이 되는 순간이다. 마음에 드는 숲을 바라보고 있으면 자연의 일부인 내가 바로 그 숲의 주인이다. 항상 다녀갈 수 있으므로 건물을 소유하는 것보다 기쁨이 더 크다. 미국의 자연주의자 소로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그리고 또 한 곳, 동대문 새벽시장이다. 동대문 새벽시장은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상인들로 북적인다. 주 고객은 옷가게를 운영하는 사람들이다. 대형 쇼핑센터에서 조금 떨어져 그 풍경을 바라본다. 밤새 산 물건들을 대형 가방에 담고, 춘천 대구 청주 같은 지역명을 표시한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겨울이 되면 눈이 내리고,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며, 사람은 돈을 향해 모여든다. 이것은 매우 화려하고도 단순한 삶의 이치다. 사람들이 모여든 곳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꿈틀거린다. 서로 적당한 가격에 사고파는 에너지의 근본은 바로 생명이다. 부자가 되기 위해 움직이는 역동적인 모습은 경건하며 상인들이 사들인 옷처럼 아름답다.

 

새벽시장에서 구입한 의류를 자신의 가게에서 팔아 이문을 남기는 이들은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새벽 내내 분주히 움직이다. 이러한 움직임이 바로 화식(貨殖)이다. 화는 재산이고 식은 불어난다는 뜻이니, 사마천의 화식열전은 재산을 불리는 인물들의 이야기다. 사마천은 춘추 말부터 한나라 초까지 상공업으로 재산을 모은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화식열전은 말하자면, 한 시절을 풍미한 장사꾼과 기업인 열전이다.

 

사마천이 살았던 한나라는 공자의 뜻을 받들어 공부하는 선비들이 세상의 중심에서 움직였다. 농사는 하늘의 뜻에 따르는 경건한 노동으로 여겨진 반면, 상업을 하는 장사꾼은 한 수 아래로 내려다보는 게 당시 세태였다. 상업은 천한 일로 여겨졌으며, 학문하는 사람이 돈을 밝히는 것도 추하게 비쳐졌다.

 

그러나 사마천은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있었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마천은 부자들 이야기를 하면서 중농억상(重農抑商)’의 가치관에서 벗어나 현대적이고 경제적인 논리를 폈다. 부자의 미덕에 대해, 그리고 돈의 위력에 대해 이야기했다.

 

낮에 자고 밤에 일하면 된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의 소용돌이가 지나간 뒤, 한국의 경제사정은 매우 열악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이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였던 박정희 대통령은 누구보다 돈의 소중함을 잘 알았다. ‘경제 대통령으로서 박정희를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누구에게나 공()과 과()는 있는 법이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연임에 성공할 정도의 인기를 누렸으나, 부하 직원과의 부적절한 관계가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된다. 문화대혁명으로 온 나라에 피바람을 일으키고 중국 경제를 후퇴시켰던 마오쩌둥에 대해 훗날 덩샤오핑은 이렇게 말했다.

 

지난날의 과실을 모두 마오쩌둥 한 사람의 잘못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객관적으로 마오쩌둥을 평가해야 한다. 공은 우선이고 과오는 둘째다. 우리는 마오쩌둥의 올바른 사상을 계승해야 하고, 그의 과오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말해야 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공은 국가 경제발전이다. 과오는 마오쩌둥과 같은 권력 집착이었다. 하여간 1975년 여름이었다. 박 대통령이 당시 현대건설 정주영 회장을 청와대로 급히 불러, “달러를 벌어들일 좋은 기회가 왔는데 일을 못하겠다는 작자들이 있다. 지금 당장 중동에 다녀오라. 만약 임자도 못 할 것 같으면 나도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자초지종을 묻는 정 회장에게 박 대통령은, 1973년 석유파동 이후 중동국가들에 달러가 넘쳐나고 있다, 그 돈으로 사회 인프라를 건설하고 싶어하는데도 너무 더운 지역이라 선뜻 해보겠다고 나서는 국가가 없어 한국에 의사를 타진해왔다고 설명했다. 박 대통령이 급히 정부 관리들을 파견했는데, 2주 만에 돌아와 하는 얘기가 너무 더워서 낮에는 일을 할 수 없고 건설공사에 필요한 물이 부족해 공사를 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듣고 정 회장은 바로 중동행() 비행기를 탔다. 5일 만에 돌아온 정 회장이 박 대통령에게 이런 보고를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하늘이 우리나라를 돕는 것 같다. 중동은 이 세상에서 건설공사 하기에 제일 좋은 지역이다. 1년 내내 비가 오지 않으니 1년 내내 공사를 할 수 있다. 건설에 필요한 모래와 자갈이 현장에 있으니 자재 조달이 쉽다.”

 

중동이 사막지역이라 물 걱정을 하는 대통령에게 정 회장은 물은 어디서든 실어오면 된다고 답했고, 더운 나라이므로 낮에 자고 밤에 일하면 된다고 말했다. 이러한 말과 행동을 하는 정 회장에게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따르는 건 당연했다. 정 회장 말대로 한국의 개미 같은 일꾼들이 낮에는 자고, 밤에는 횃불을 들고 일했다. 세계가 놀랐다. 달러가 부족했던 시절, 30만명의 노동자가 중동으로 몰려나갔고, 보잉 747 특별기편으로 달러를 가득 싣고 돌아왔다.

 

정주영 회장의 현대를 비롯한 대기업이 이 시절 빠르게 성장했다. 박 대통령과 더불어 기업인들에게도 공과는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을 먹고산다. 정경유착과 같은 과오는 절대 되풀이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입고 먹는 것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인간은 더 나은 삶을 추구하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체가 바로 재산이다. 풍부한 재산은 엄청난 위력을 갖는다. 물론 그것을 잘 다루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사마천은 말했다.

 

재산 갖고 다투는 정치는 쓰레기

 

귀와 눈은 아름다운 소리와 아름다운 모습을 한껏 즐기려 하고, 입은 소와 양 따위의 좋은 맛을 다 보려 하며, 몸은 편하고 즐거운 것을 좋아하고, 마음은 권세와 유능하다는 영예를 자랑하고 싶어 한다. 이러한 풍속은 백성들의 마음속까지 파고든 지 오래다. 그러므로 미묘한 이론을 가지고 나와 집집마다 깨우치려 해도 도저히 교화시킬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을 가장 잘 다스리는 방법은 자연스러움을 따르는 것이고, 그 다음은 이익을 이용하여 이끄는 것이며, 그 다음은 가르쳐 깨우치는 것이고, 또 그 다음은 백성들을 가지런히 바로잡는 것이며, 가장 정치를 못하는 것은 재산을 가지고 백성들과 다투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잘 먹고 잘 입고 잘 자기를 원한다. 이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공자 할아버지가 와도 소용없다. 사흘 굶은 사람에게 공자의 인()이나, 부처의 법열에 대해 말한들 귀에 들어오고 행동으로 옮겨질 리 없다. 백성은 안락함을 추구하며, 그것을 보장해줄 위정자를 원한다. 사마천은 재산을 갖고 백성과 다투는 정치는 쓰레기라고 했다. 재산을 갖고 백성과 다투는 정치란 어떤 것일까? 부정부패, 치부(致富)를 위한 권력남용, 과중한 세금 부과 등 백성의 재산을 갖고 장난치는 일련의 나쁜 행위들을 가리킨다. 사마천은 부를 논하되 돈만 벌면 된다 식의 논조를 펴지는 않는다.

 

장자 내편(內編) ‘소요유에 상업에 대한 짧은 이야기가 있다. “송나라 사람이 장보라는 모자를 밑천 삼아 월나라로 장사를 갔지만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짧게 깎고 문신을 하고 있어 그런 모자가 필요하지 않았다.”

 

장자의 거대하고 비범한 다른 이야기들과 비교할 때 이 이야기는 매우 단순하다. 송나라는 춘추시대에 번성했다. 장자가 살았던 전국시대에는 문화국가였으나 가난하고 보잘것없었다. 신흥국가 월나라는 야만적이어서 아름다운 모자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송나라 사람이 어리석었던 것이다. 장자를 전공한 철학박사 강신주는 말한다.

 

방금 읽은 짧은 단편으로 장자가 진정 말하고자 했던 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송나라 상인이 되어 아주 천천히 그리고 끈덕지게 이 글을 읽어 내려가야 한다. 우리가 월나라에 가려고 한 이유는 그 나라에서도 모자가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우리는 억만장자가 될 기대에 부풀어 월나라에 들어간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월나라는 송나라와 달라도 너무 다른 나라였다. 월나라에서 사회적 위상을 나타내는 것은 모자와 같은 예복이 아니라 문신이었다. 이곳에서 모자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이제 우리는 상인이면서 동시에 상인이 아니게 된 것이다. 모자를 팔려고 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상인일 수 있지만 모자를 살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상인일 수 없게 된 것이다. 월나라 저잣거리에서 모자 꾸러미를 든 채 우리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다.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찔한 현기증은 우리 자신의 자아동일성이 와해될 때의 느낌이다. 상인이면서 동시에 상인이 아닐 때 오는 현기증, 이것이 바로 차이를 경험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차이에 돈이 걸려 있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차이를 알아야 한다. 세상에 차이가 존재하기에 너와 나, 남자와 여자, 부자와 빈자, 왕과 신하도 있을 수 있었다. 사람마다 먹는 것, 사는 것, 자는 것이 다르다. 사람들의 생김새만큼이나 각 나라의 풍습도 다르다. 이 차이를 잘 알아차리고 이용하는 것, 그것이 바로 부자가 되는 법이다. 송나라 상인은 이 차이를 알지 못했다. 월나라와 송나라의 차이, 이 간단한 차이를 아느냐 모르느냐가 바로 부자와 빈자의 차이다. 부자가 될 사람은 새로운 문신 기술을 배워 월나라에 갔을 것이다.

 

사마천은 부를 축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상업이라고 했다. 장사는, 싸게 사서 비싸게 팔고, 여기에서 사서 저기에서 파는, 아주 간단한 차이의 연금술이다. 우리는 자연을 통해 늘 차이를 보고 느낀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겨울이 깊으면 봄이 가깝다. 돈의 흐름 역시 자연의 현상처럼 움직인다. 사마천은 말했다.

 

농부들은 먹을 것을 생산하고, 어부와 사냥꾼은 물건을 공급하고, 기술자는 이것으로 물건을 만들고, 장사꾼은 이것을 유통시킨다. 이러한 일이 어찌 정령이나 교화나 징발이나 기일을 정해놓음으로써 모여지는 것이겠는가! 사람들은 각자 저마다의 능력에 따라 그 힘을 다해 원하는 것을 얻는다. 그러므로 물건 값이 싸다는 것은 장차 비싸질 조짐이며, 값이 비싸다는 것은 싸질 조짐이다. 각자 생업에 힘쓰고 즐겁게 일하는 것이 마치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과 같으며 물건은 부르지 않아도 밤낮으로 쉴 새 없이 절로 모여들고, 구하지 않아도 백성들이 만들어 낸다. 이것이야말로 도()와 부합하는 것이며, 자연 법칙의 징험(徵驗)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차이를 잘 아는 자에게는 가 보이게 마련이다. 어느 시기에 투자를 하느냐에 따라 천양지차다.

 

여보게 사업은 말이야 늘 잘되는 게 아니야. 누구나 살다 보면 좋은 운이 몇 번 찾아오게 마련이지. 열심히 산다면 말이야. 그렇게 사업이 잘되면 낮이 짧고 밤이 너무 길어. 자금이 들어오는 게 보이는 낮이 얼마나 짧은지 몰라. 그래서 새벽에 일찍 눈을 떠서 아침을 기다리지. 부지런한 사람은 낮이 짧은 사람들이야.

 

그런데 말이야. 자본이 쌓이면 그때부터가 중요해. 보통 사람들은 탕진하기 쉬워. 세상에는 돈 쓸 일이 많으니까. 그때 관리를 잘해서 허랑방탕하게 쓰지 않고 잘 모아두어야 해. 사업이나 개인이나 일이 안 될 때가 있는 거니까 그때를 대비해야 돼. 잘 운영한 자금으로 기회를 기다려야 해. 그러다가 다시 기회가 오면 투자를 하는 거지. 참 많은 사람이 이걸 몰라요, 하지만 난 몇 번 온 기회를 잘 잡고 운영해서 우리 기업을 만들었네.”

 

작고한 송암 이회림 회장(동양제철화학의 창업주)이 생전에 지인에게 한 말이다. 송암은 개성상인 출신으로 척박한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냈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국가의 기간산업 분야에 과감한 투자를 한 경제인이다. 어쩌다 인연이 되어 고인이 쓰던 집무실 책상 위를 본 적이 있다. 아직도 기억에 남은 것이 돼지 저금통을 비롯한 여러 개의 저금통과 동전들이다. 이 작은 단위의 동전들이 거대한 부의 근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송암은 종로에서 작은 점포를 운영하던 시절에 차이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거래가 없어 한가한 시간이면, 종로통에 지나다니는 물건들의 흐름을 파악한 것이다. 어느 집에 어떤 물건이 들어가는지, 얼마만큼의 물건이 움직이는지를 보면 종로통의 경기를 알 수 있었다. 이 버릇은 훗날 대기업을 운영할 때도 없어지지 않았다. 고속도로에서 물자를 싣고 이동하는 대형 트럭을 유심하게 관찰했던 것이다. 사마천은 돈과 물건의 유통이 물의 흐름과 같이 자연스러워야 한다고 했다. 시대는 달라도 부자들의 정신세계는 일맥상통하는 모양이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몸을 의지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이가 바로 도에 이른 사람이다. 학문이건 예술이건 기업이건 간에 이러한 경지에 올라야 대성할 수 있다.

 

물건과 돈은 유수(流水) 같아야

 

사마천은 도와 부합하고 자연 법칙을 징험한 사람으로 범려와 계연을 이야기한다. 범려는 월나라 왕 구천의 신하이며, 계연은 범려의 스승이다. 계연은 구천에게 물건과 돈은 흐르는 물처럼 원활하게 유통시켜야 한다면서 재물이 움직이는 실정을 분명하게 알려주었다. 전쟁이 있을 것을 알면 방비를 해야 하듯, 때와 쓰임을 알아두어 언제 어떤 물건이 필요한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월나라 구천왕은 오나라의 부차에게 설욕하기 위해 와신상담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진정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쓸개를 핥으면서 정신력을 키웠을 뿐만 아니라, 돈의 흐름을 유연하게 했기 때문이다.

 

구천왕은 해박한 지식으로 자연의 움직임을 살폈다. 어느 시기에 풍년이 들고 수해가 발생하는지 자연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미리 준비하게 했다. 그렇게 해서 재물을 비축해 물가가 폭등하는 것을 막고, 물자를 잘 유통시키면 백성이 왕을 따르게 마련이다. 이렇게 10년 정치를 하니 월나라가 부강해졌다. 그 힘으로 20여년을 기다려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인 오나라를 점령했다.

 

훗날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붙잡는 구천왕을 뿌리치고 월나라를 떠난 범려는 스승인 계연의 가르침을 따라 장사에 나섰다. 월나라는 계연의 일곱 가지 계책 중 다섯 가지를 써서 뜻을 이루었는데, 범려는 이것을 집에서 써보아야겠다고 작심하고, ‘라는 지방에 가서 이름을 주공으로 바꾸고 대부호가 됐다.

 

정치인 범려는 경제인 도주공으로 변모하여 중국인들에게 존경받았다. 그는 많은 재산을 가난한 친구들과 먼 형제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부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자손들도 아버지의 재산을 잘 운영해서 거부가 됐다고 한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부를 확산하는 자손들이다. 그룹 삼성을 떠올리게 된다. 이병철 회장의 대를 이어 이건희 회장은 기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한 나라를 움직이는 경제 논리는 한 가정을 움직이는 경제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한 가정을 움직이는 경제 논리는 한 기업을 움직이는 경제 논리이기도 하다.

 

누구나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있다. 중요한 건 중심 잡기와 어떻게 적용하느냐다. 기술과 문명은 진보하고 발전하지만, 본질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중국 고대 장사꾼이나 21세기 장사꾼이나 성공한 사람들은 여기에서 사서 저기에서 파는 공간 차이와 오늘 사서 내일 파는 시간 차이를 적절히 이용하는 지혜를 가졌다. 공간 차이는 이제 국가 간 거래로 확대된다. 무역은 결국 공간적인 차이를 잘 이용하는 것이다. 시간 차이는 환 차익이나 주식투자를 비롯한 다양한 영역에서 이용된다.

 

나는 최근에 후배에게서 기가 막힌 이야기를 들었다. 후배는 시간 차이를 이용하는 데 범려와 같은 기질을 타고났는지, 수천만원을 펀드에 투자해서 1년 만에 수억으로 불렸다고 한다. 10배 이상의 돈을 벌어들인 그는 목표 10억원에 거의 도달한 적도 있으며, 화장실 한번 다녀온 사이 몇천만원이 왔다갔다한다는데, 그 말이 지금도 실감나지 않는다. 하여간 결론적으로 후배는, 최근 경제 불황 여파로 겨우 본전만 건지고 펀드에서 손을 뗐다.

 

1년이 넘는 기간 후배는 현금을 만져보지는 못하고, 온라인상의 수치로만 부자 경험을 한 것이다. 한술 더 떠 후배의 친구는 한때 원금의 100배 가까운 이익을 올렸으나 지금은 후배와 같은 처지가 됐다고 한다. 후배의 친구는 그나마 원금 외에 외제차 1대와 1억원을 남겼는데도 한동안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임기응변, 결단력, 신의

 

사마천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아마도 시세 변동에 따라 새처럼 민첩하게 사고팔라고 조언했을 것이다. 후배는 새처럼 민첩하게 움직일 수 없었다. 욕심 때문이다. 조금만 더 벌면 일확천금이 들어올 것이라는 욕심이 그 몸을 하마처럼 둔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우()를 범하지 말라고, 사마천은 주나라 사람 백규를 예로 든다.

 

백규는 시세 변동을 살피는 데 귀재였다. 그는 풍년과 흉년이 순환하는 자연의 이치를 살펴 물건을 사고팔았다. 막대한 부를 이뤘지만, 옷을 검소하게 입고 일꾼들과 함께 즐거움과 고통을 나누었다. 인간적으로 성숙한 그는, 장사꾼으로서는 시기를 판단하고 움직이는 모습이 사나운 짐승이나 새처럼 빨랐다. 백규는 말했다.

 

나는 사업을 운영할 때 마치 이윤과 여상이 계책을 꾀하고, 손자와 오자가 군사를 쓰고, 상앙이 법을 시행하는 것과 같이 한다. 그런 까닭에 임기응변하는 지혜가 없거나, 일을 결단하는 용기가 없거나, 주고받는 어짊이 없거나, 지킬 바를 끝까지 지킬 수 없는 사람이라면 내 방법을 배우고 싶어해도 끝까지 가르쳐주지 않겠다.”

 

사마천은 백규를 가리켜 대체로 천하에서 사업하는 방법을 말하는 사람들은 백규를 그 원조로 보았다고 썼다. 백규는 경제경영통이면서 동시에 통섭의 인간이다. 장사꾼으로서는 이윤과 여상을, 군사적으로는 손자와 오자를, 법률적으로는 상앙을 보고 배웠다. 장사를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전인격적 수양이 갖춰져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장사는 교향곡과 마찬가지로 다양성의 통합이다. 자연과 인간에 통달하면 부자 되기는 어렵지 않다. 약속 잘 지키고, 어질고, 용기 있는 사람에게 돈이 흘러간다.

 

조선시대의 부자들은 자본주의 이전의 경제활동을 하며 화식열전에 나오는 인물들과 비슷한 길을 걸었다. 산업혁명 이후의 경제활동엔 광고, 홍보, 마케팅 전략 등 복잡하고 미묘한 상술이 등장한다. 부의 축적 방법은 그 시대 상황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사람들이 뭘 원하는가? 바로 거기에 돈이 모이는 게 당연하다. 빌 게이츠의 부는 21세기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정보화 사회에서는 컴퓨터 소프트웨어가 공기나 물과 같으니 소프트웨어를 만들어내는 빌 게이츠에게 돈이 몰리는 건 당연지사다. 부자들의 눈에는 거리에 돈이 굴러다니는 게 보인다는 속설이 있다. 그걸 주워 담기만 하면 된다는 이야기인데 돈이 보인다는 건, 정보가 보인다는 얘기와 같다.

 

산업화 시대 이전 최고의 부자는 왕과 왕실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권력을 기반으로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다. 조선시대 왕과 가족들은 당대 최고의 부자였다. 그들의 부는 토지 소유를 통해 이뤄졌다. 조선 왕실의 일부인 궁실과, 왕실에서 분가한 왕자와 공주들을 가리키는 궁가를 통틀어 궁방이라고 하며, 이들에게 지급된 땅을 궁방전이라고 한다. 궁방전에 대한 기록을 보면, 1623년 인조 시절에 면세를 받은 궁가의 전결이 수백 결이다. 20년 뒤인 효종 시절에는 한 궁가의 전결이 200~500결에 달하고, 현종 초에는 한 궁가가 1400결을 넘게 가졌다. 19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궁방전의 면세 결수가 33444~37500결에 이르니 전국 토지 면적의 약 2.5%. 부의 고른 분배는 예나 지금이나 요원한 일이다.

 

조선의 전설적인 부자들

 

사마천은 부자들을 일컬어 소봉(小封)이라고 했다. 소봉은 무관의 제왕이라는 뜻으로, 비록 왕의 자리에 앉아 있지는 않지만,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마치 왕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고 했다.

 

조선시대에도 왕처럼 지낸 전설적인 부자들이 있었다. 소설 상도로 널리 알려진 18세기 후반의 임상옥은 인삼교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가 인삼교역권을 따내기 위해 왕실 사람에게 접근하고 막대한 뇌물을 바치기는 했지만, 단순히 권력에 아부만 해서 큰 부를 이룬 건 아니다. 장사꾼으로서의 지혜와 대담한 전략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인삼교역으로 조선뿐 아니라 중국에까지 그 이름을 날렸으니, 오늘날 기업인의 모델이 될 만한 인물이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변승업이라는 부자 이야기가 나온다. 엄청난 재산가였을 뿐만 아니라 서울 1만호에서 그와 거래를 했다고 하니 당시 경제 규모로 보아 대단한 부자였음에 틀림없다. 사농공상의 시대 분위기에서도 이런 부자는 예외적인 대접을 받게 마련이다. 그는 중인 출신의 역관이었다. 조선시대 역관 중에 부자가 많았지만 변승업이 단연 탁월했던 모양이다. 그는 부인이 죽었을 때 관에 옻칠을 했다. 당시엔 국왕의 장례에만 관에 옻칠을 했는데, 사대부도 아닌 중인 신분으로 무척 대담한 행동이었다. 부인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데다, 무엇보다 부자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일이 문제가 되자 수십만금을 풀어 관리들을 입막음했다.

 

임상옥과 변승업은 부잣집 자식이었다. 그들은 가진 자본을 바탕으로 부를 확산시켜나갔다. 지금의 재벌가와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무일푼으로 시작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사람들에게 더 큰 매력을 느낀다. 개성에서 가난한 점원으로 출발한 이회림 회장과 고향에서 소 한 마리 끌고 나와 기업을 일군 정주영 회장의 경우가 그렇다. 조선시대에도 이런 인물들이 있었다.

 

최봉준은 19세기 말에 함경도에서 태어나 제국주의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몸살을 앓던 조선을 살아낸 인물이다.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열두 살에 고아가 되어, 엽전 스무 냥과 보리쌀을 조금 챙겨 두만강을 건넜다. 러시아 설원에서 늑대 밥이 될 위기를 넘기고, 야린스키라는 러시아 귀인을 만나 그 밑에서 열심히 일하고, 유산도 물려받았다. 이 돈을 종자돈으로 주식에 투자하고, 성진항과 원산항을 중심으로 무역업에 나서 거부가 됐다. 한국을 넘어 해외로 진출한 사업가들의 모델로 최봉준을 생각한다. 그러나 최봉준은 러시아 국적을 갖고 러시아인으로 경제활동을 했다.

 

사람이 사는 이유

 

사람은 인생의 가치를 추구한다. 물질적 부에 연연하지 않고 고고하게 학문이나 예술의 길을 걷는 삶이 있는가 하면, 아비규환의 속세를 사는 중생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기 위해 수도하는 사람도 있다. 힘들여 번 전() 재산을 사회에 내놓고 가난을 자처하는 사람도 있다. 사마천의 사기열전은 대부분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화식열전 사기열전의 맨 마지막에 붙어 있다. 사마천은 사기열전 백이열전으로 시작한다. 백이와 숙제는 명분을 위해 굶어죽었다. 사마천은 이들을 정직한 선비의 표상으로 여기고 존경했다. ‘자객열전 역시 부자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의 얘기다. 사마천은 부자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세상을 자신의 관점으로만 보지는 않았다.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자신의 전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준 러시아의 부자 톨스토이는 사랑을 이야기했으나, 사마천은 이렇게 말했다.

 

어진 사람이 묘당에서 도모하고 조정에서 논의하며 신의를 지켜 절개에 죽고, 동굴 속에서 숨어 사는 선비가 높은 명성을 얻으려는 것은 결국 무엇을 위해서인가? 그것은 부귀로 귀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렴한 벼슬아치도 시간이 오래되면 더욱 부유해지고, 공정한 장사꾼도 마침내 부유해진다. 부라는 것은 사람의 타고난 본성이라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얻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건장한 병사가 전쟁에서 성을 공격할 때 먼저 오르고, 적진을 점령하여 적군을 물리치며, 적장을 베고 깃발을 빼앗으며,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끓는 물과 불의 어려움도 피하지 않는 것은 큰 상을 받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정치인 군인 기업인 외에 의사 도사 공무원 도둑 강도 사기꾼 도굴범 지폐위조범 제비 꽃뱀 타짜 등 온갖 인간 유형이 뒤엉켜 사는 것은부를 추구하는 인간 본성 때문이다. 도둑처럼 부정적으로 부를 모으는 이들은 남에게 베풀지 못한다. 부자라도 같은 부자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부자의 기준을 어디에 두는가? 단순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한 사람을 부자라고 할 수 있을까? 사마천은 베푸는 부자들을 중심으로 화식열전을 기술했다.

 

한 가지 일에 진심을 다하라

 

공자의 제자 중 최고 부자였던 자공은 조나라와 노나라 사이에서 무역업을 했다. 자공은 사두마차를 타고 비단과 같은 물건을 들고 제후들을 찾아갔으므로 왕들이 예로써 극진히 대접했다. 사마천은, 공자의 이름이 천하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도 자공이 공자를 모시고 다니며 도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물론 공자는 물질적 부로 감히 어찌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른 성인이다. 사마천은 그러한 성인들 밑에서 피죽도 못 끓여먹으면서 대의만 논하는 백수 선비들을 경멸했던 것이다. “오랫동안 가난하고 천하게 살면서 인의를 말하는 것만을 즐기는 것 또한 아주 부끄러운 일이다.” 더불어 사마천은 이렇게 말했다.

 

대체로 일반 백성들은 상대방의 재산이 자기보다 열 배 많으면 몸을 낮추고, 백 배 많으면 두려워하며, 천 배 많으면 그의 일을 하고, 만 배 많으면 그의 하인이 된다. 이것이 사물의 이치다.”

 

! 이 엄정한 사물의 이치를 진작 알았어야 했다. 그럼 어떤 방법으로 부를 이룰 것인가? 사마천은 상업을 최우선으로 삼는 길을 꼽았다. 하지만 따로 정해진 직업은 없다. 상업이 최선의 길이되, 자신의 재능에 맞는 분야에서 최고의 길을 찾아야 한다.

 

조나라 사람인 탁씨는 철을 제련해 부자가 됐다. 박태준 전 포항제철 회장의 모습이 떠오른다. 양나라 사람 공씨는 철을 가공해 부자가 됐다. 제나라 사람 조간은 생선과 소금을 팔아 부자가 됐다. 그밖에 농업 목축 공업 벌목 행상 등의 분야에서 각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해 거부가 된 사람도 부지기수다. 자신의 온 힘을 던지는 진심과 열정이 부자가 되는 지름길이다. 어떤 일을 하건 간에 그렇다. 사마천은 말한다.

 

대체로 아껴 쓰고 부지런한 것은 생업을 다스리는 바른 길이다. 그렇지만 부자가 되는 사람은 반드시 기이한 방법을 사용했다. 밭에서 농사를 짓는 것은 재물을 모으는 데는 졸렬한 업종이지만, 진나라의 양씨는 이것으로써 주()에서 제일가는 부호가 됐다. 무덤을 파서 보물을 훔치는 것은 나쁜 일이지만 전숙은 그것을 발판으로 일어섰다. 도박은 나쁜 놀이지만 환발은 그것으로 부자가 됐고, 행상은 남자에게 천한 일이지만 옹낙성은 그것으로 천금을 얻었으며, 술장사는 하찮은 일이지만 장씨는

 

그것으로 천만금을 얻었다. 칼을 가는 일은 보잘것없는 기술이지만 질씨는 그것으로 제후들처럼 반찬 솔을 늘어놓고 식사를 했다. 양의 위를 삶아 말려 파는 것은 단순하고 하찮은 일이지만 탁씨는 그것으로 기마행렬을 거느리고 다녔다. 말의 병을 치료하는 것은 대단찮은 의술이지만 장리는 그것으로 종을 쳐서 하인을 부르게 됐다. 이것은 모두 한 가지 일에 진심한 결과다.

 

부유해지는 데 정해진 직업이 없으며, 재물 또한 정해진 주인이 없는 게 분명하다.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재물이 모이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기왓장 부서지듯 흩어진다. 천금의 부자는 한 도읍 군주와 맞먹고, 거만금을 가진 부자는 왕자와 즐거움을 같이 한다. ‘그들이야말로 이른바 소봉(무관의 제왕)이라고 할 만한 자들이 아닌가?”

 

 

 

 

 

 

 

*다음 회 예고

 

다음달에는 사기열전의 첫 번째 편인 백이열전(伯夷列傳)’을 이야기합니다. ‘화식열전 사기열전의 꼬리라면 백이열전은 머리인 셈이지요. 사마천은, 나라가 바뀌자 주나라 곡식은 먹지 않겠다며 수양산에서 굶어죽은 백이를 통해 역사 속에서 어찌하지 못하는 인간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영화와 부귀를 뜬구름처럼 여기고 충절을 지키는 데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은 백이. 그는 신념의 충신이었을까요? 아니면,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무능한 자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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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백이열전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 아름답다 할 수 있나

 

- 요즘은 잠깐  팔리더라도 실리를 챙기고, 욕을 좀 먹더라도 돈 되는 일을 마다하면 바보가 되는 시대인가? 멀고 먼 옛날이야기라지만, 굶어 죽더라도 소신을 포기하지 않고 불에 타 재가 되는 한이 있어도 절개를 굽히지 않은 이들이 있었다. ‘사기열전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백이와 숙제는 익명성으로 감추고 돈으로 덮어버린 현대인의 부끄러움을 반성하게 한다.

 

사기열전의 인물은 먼 고대 사람이다. ‘사기열전의 첫 인물 백이와 그의 막냇동생 숙제는 공자보다 더 먼 시절 사람이다. 생활방식이며 음식문화, 정치적인 견해 모두 지금과 달랐다. 백이와 숙제의 고사가 역사적 사실인지조차 의문스럽다고 한다. 만리장성 밖 요서 지방에서 고죽(孤竹) 기후(箕侯) 등의 문자가 새겨진 동으로 만든 그릇이 출토돼 화제가 된 적이 있지만, 그것이 백이의 실재를 증명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시대에 따라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가치관도 변화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인간의 세포처럼 변하면서 변하지 않는 가치관도 있다. ‘백이열전에서 사마천은 무엇을 쓰고자 했을까? 사마천은 역사가이기에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 과거를 쓴다. 백이와 숙제는 정치적인 치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천재적인 학자나 예술가도 아니었다. 작은 나라 고죽국의 왕자로 태어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는 길을 포기하고 나라를 떠난 사람들이다.

 

사마천은 시경에 실려 있지 않은 시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인용했다. ‘채미가.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 군주의 두 아들인데, 그들의 아버지는 아우인 숙제에게 뒤를 잇게 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자 숙제는 왕위를 형 백이에게 양보하려고 했다. 그러자 백이는 아버지의 명령이다면서 나라 밖으로 달아나버렸고, 숙제 또한 왕위에 오르려 하지 않았다. 백이와 숙제는 서백장(문왕)이 늙은이를 잘 모신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가서 몸을 맡기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이 주나라에 이르렀을 때, 서백장은 이미 죽고 없었다. 그의 아들 무왕은 선왕의 시호를 문왕이라 일컬으며 나무로 만든 아버지의 위패를 수레에 싣고 동쪽으로 가 은나라 주왕을 치려 했다. 백이와 숙제가 무왕의 말고삐를 붙잡고 간언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도 치르지 않고 바로 전쟁을 일으키다니. 이것을 효라고 할 수 있습니까? 신하가 군주를 죽이는 것을 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무왕 곁에 있던 신하들이 무기로 자신들의 목을 베려고 했다. 이때 태공이 말했다.

 

이들은 의로운 사람들이다.”

 

이에 그들을 보호하여 돌려보냈다. 그 뒤 무왕이 은나라의 어지러움을 평정하니, 천하 제후들은 주나라를 주종으로 삼았다. 그러나 백이와 숙제만은 주나라 백성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지조를 지켜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뜯어 먹으며 배를 채웠다. 그들은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러 노래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저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뜯네/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었건만/ 그 잘못을 모르는구나/ 신농(神農), (), ()나라 시대는 홀연히 지나갔으니/ 우리는 앞으로 어디로 돌아가야 하나?/아아! 이제는 죽음뿐/우리 운명도 다했구나!

 

세상에 대한 원망

 

수양산에서 굶어 죽은 백이와 숙제에 대해 사마천은 그들이 죽을 지경에 이르러 지었다는 시를 인용함으로써 공자와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백이와 숙제가 인()을 이룬 사람들로서 세상에 원망이 없었을 것이라고 한 공자의 말에 반문한 것이다. 이런 시를 지었는데 원망이 없었다고요?

 

백이와 숙제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건 공자 덕분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백이와 숙제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한다. 제자 자공이 백이와 숙제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공자가 이렇게 대답했다. “공동체의 통합을 추구()해서 공동체의 통합()을 얻었는데 무엇 때문에 원망을 했겠는가?” 최근에 출간된 신정근의 공자씨의 유쾌한 논어에 나오는 번역문이다. 다른 책에선 같은 문장을 인이란 구하는 대로 얻어지는 것인데 또한 무엇을 원망하였겠는가라고 번역했다. 인을 인간의 자유로 해석한 것이다 .

 

 

 

일본의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자유인 사마천과 사기의 세계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유는 사회적 환경의 문제이지만 그 이상으로 개인이 지닌 신념의 문제다. 자유가 주어졌기에 자유롭다는 것은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주어진 것은 반드시 유한하기 때문이다. 자유 중에서도 말하는 자유가 가장 우선한다. 현재 공산권 여러 나라에 자유가 있는지 없는지 문제가 되는데, 말하는 자유가 없다는 것은 가장 큰 결함이다. 이를 변호하는 사람들이 공산권에서는 말하는 자유 대신에 빈곤으로부터 자유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속임수다. 감옥에서도 밥은 먹을 수 있지만 그것을 자유라고 부를 수 있을까? 또한 그것은 주어진 자유다. 비록 언론의 탄압이 심한 정치체제 아래서도 개인이 진정으로 자기의 자유를 지킬 마음이 있다면 거기에는 자유가 존재하는 것이다. 전제정치 체제라든지 황제정치라고 불리는 중국 역대의 중압을 견디며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은 사례는 많지만 그 최초의 사례로 사마천은 백이와 숙제를 거론했던 것이다.”

 

이런 문장도 있다. “제나라의 경공은 4000필의 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죽던 날 인민들은 그이가 칭찬할 만한 귀감인지 아닌지 몰랐다. 이와 달리 백이와 그의 동생 숙제는 수양산 자락에서 굶어 죽었다. 인민들은 오늘에 이르러서도 두 사람을 칭송해 마지않는다. 그들의 행동에 부끄러움이 없어 사람들은 그들의 절개를 높이 산다. 모두들 부끄럽게 살기 때문에 백이와 숙제 같은 인물이 부각된다.”

 

그중에 자신의 포부를 굽히지 않고 자신의 몸을 더럽히지 않은 이는 백이와 숙제일 게다! ” 공자는 논어에서 모두 4번에 걸쳐 백이와 숙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공자의 중심사상인 인을 추구해서 인을 얻었다고 한 대목이다. 공자가 인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군자요 성인의 반열에 오른 것을 의미한다. 인을 공동체의 통합으로 번역하건, 자유로 번역하건 간에 공자는 백이와 숙제가 아무런 원망도 없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사마천은 과연 그런 것이냐?’ 하고 의문을 제기한다. 하늘을 원망하는 시 채미가를 발굴해 제시하면서 독자에게 묻는다. ‘이 노래로 미루어볼 때 백이와 숙제가 원망한 것인가, 원망하지 않은 것인가?’ 독자 중 한 사람인 나는 대답한다. ‘원망했군요.’ 이것이 범부들의 생각이다. 자신의 소신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세상을 떠나 굶어 죽을 지경이 되었다면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도, 호랑이를 타고 산중을 돌아다니는 산신이 되어 세상을 떠난 것과는 다르다. 그들은 죽는 순간까지 만물이 조화롭게 움직이던 전설 속의 신농(神農) 시절을 그리워했다. 이 땅의 사람으로서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 운명의 길을 걸어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세상을 버렸지만, 그것은 더 좋은 세상이 없음에 대한 한탄이기도 하다. 즉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으니 선비의 절개와 지조를 지키고, 부끄러움보다는 굶어 죽기를 택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중요한 덕목이다.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은 부끄러움이 있기에 옷을 입고, 예의를 갖추고, 때로 거짓말도 하고, 정직하기도 하다. 부끄러움이야말로 인간의 조건인 것이다.

 

더불어 사마천은 한탄한다. ‘하늘의 이치는 사사로움이 없어 항상 착한 사람과 함께한다고 했지만, 백이와 숙제같이 착한 사람이 굶어 죽는 것이 하늘의 이치란 말인가? 불의에 대해 불의하고, 공명정대하게 사는 사람들이 왜 형을 당하고 굶어 죽어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사마천의 한탄이 바로 자기 자신의 처지를 빗댄 것임을 알아챌 수 있다. 그 자신 선비로서 절개 있게 행동했건만(사마천은 이릉의 사건에서 소신에 따라 천자에게 직언했다. ‘신동아’ 2월호 참고)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받았다. 사마천은 동병상련 이심전심으로 백이와 숙제를 바라본다. 열전의 맨 앞자리에 이들을 소개한 것은 앞으로 열전을 기술하는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착한 사람이 잘사는 세상이 아니다, 수없이 많은 인간 유형을 보여줄 테니 독자 스스로 방향을 잘 살피고 가라, 소신을 굽히지 말라.’

 

인간에겐 이름이 전부

 

그는 공자의 70 제자 중 학문을 제일 좋아했다는 안연 이야기를 한다. 안연은 가난에 지쳐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사는 동안에도 거지나 다름없이 생활했다. 학문을 좋아하고 이치에 맞게 착하게 살다간 사람이다. 반면에 춘추시대 말기의 도척은 천하의 도둑놈에다 살인을 밥 먹듯 하고 심지어 사람의 간을 회쳐 먹었다는 인간 말종인데 천수를 누리고 침상에서 죽었다고 한다. 도척에게 어떤 덕행이 있고 안연에게 어떤 과오가 있었던 말인가? 도대체 세상은 어찌 생겨 먹은 것인가, 인간의 존재가치는 무엇인가?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사기열전을 이렇게 읽었다.

 

도대체 우리의 삶은 무엇을 위해서일까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인간의 불멸을 믿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을 규정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육체에 무게를 둔다면 그것은 생물적 인간이다. 가진 물건에 무게를 둔다면 그것은 세속적 인간이다. 이것들은 그 사람이 죽으면 모두 소멸하고 만다. 그러나 가장 본질적인 인간은 역사적 인간이다. 죽어도 죽지 않는 인간이 거기에 있다. 이 불멸의 인간을 사후까지 살려두는 것은 바로 그 이름에 의해서다. 중국인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이름은 몸에 붙인 명찰이 아니다. 바로 인간 그 자체다. 적어도 인간 그 자체와 분리할 수 없고 이름과 본질을 나눌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이 사람을 아는 것은 그 육체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이름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역사적 인간에게는 이름이 전부다. 사람은 그 이름에 의해 불멸할 수 있다. 사마천은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불멸을 굳게 믿었다.”

 

 

 

덧붙여 예나 지금이나 온갖 탈법에 불법을 일삼는 이들이 일평생 호강하고, 군자의 도를 지키는 사람은 재앙을 만나는 일이 수없이 많다고 한탄한다. 이런 사실은 역사가인 사마천을 당혹스럽게 했다. 그래서 절규하듯 말했다. ‘만약에 이것이 하늘의 도리라면, 이것은 과연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생각해보니 우리는 부끄러움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는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잠시  팔리더라도 길게 잘 먹고 잘살면 된다는 풍조가 만연하다. 선비의 절개는 이제 사기열전에나 나오는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일까? 백이와 숙제는 그러한 시대에 늘 푸른 소나무인 것이다. 공자는 추운 계절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고 했다.

 

부끄러움 없는 시대

 

하지만 현실이 어디 그런가. 소나무 같은 인물은 공자나 그 밖의 위인 중에서나 찾아야 할 것 같다. 실제 삶에서는,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만 해도 변신의 귀재가 정권이 바뀜에 따라 완전히 변신하는 데 대해 우리는 뭐라 욕하지도 않는다. 삶이 구차하기 때문이다. 그저 조금 안쓰럽게 생각하고 더는 그 사람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생활고에 시달려 변신하는 사람들에 대해선 백이와 숙제를 따르지 않는다고 욕하기 힘들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기에, 그들의 처지를 알기에 그렇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은 개운치 않다.

 

철새 정치인이나 노출증에 걸린 연예인 등 이른바 공인의 행태는 그 나라의 도덕성을 보여주기에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쓰면 되고, 돈에 꼬리표 달리지 않았다고 하지만, 부정부패와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사회에서 산다는 건, 부서진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건너는 것과 같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적어도 이들에게는 사마천이 말하는 부끄러움을 가르치고 싶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들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치는 것이 소 귀에 경 읽기 벽에다 대고 말하기라는 것을 잘 안다.

 

신라 마의태자는 신라 왕조 1000년이 무너지자 베옷을 입고 여생을 보냈다. 그때의 심경을 헤아리기란 쉽지 않다. 신라의 왕관을 비롯해 화려한 의상을 벗었다는 것은 더 이상 세속적인 영화를 누리지 않겠다는 의미다. 또한 자신의 존재를 숨기는 행위이기도 하다. 즉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의 처신이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은, 비로소 하늘을 바로 올려다볼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그는 부귀영화 대신에 자존감을 지켰다. 마의태자는 굶어 죽지는 않았지만, 금강산 비로봉 아래에 그의 무덤이 있다. 바로 옆에는 그가 타고 다니던 용마가 돌로 변했다는 용마석도 있다.

 

마의태자가 고려에 항복하는 수모를 절개로 견뎌냈다면, 신라를 무너뜨린 고려 역시 조선에 의해 왕조가 바뀐다. 역사는 일정한 순환의 고리를 갖고 있고, 사람들이 사는 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나쁜 놈, 좋은 놈 그리고 이상한 놈이라는 분류도 가능하다. 신라 마의태자처럼 고려 두문동 선비들은 백이와 숙제의 마음으로 자존감을 지켰다. ‘두문불출이라는 고사성어로 잘 알려진 두문동 선비들은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반대한다. 고려 유신 72명은 개성 남쪽에 있는 부조현에 관복을 벗어던지고 두문동에 들어가 대문에 빗장을 걸고 새로운 왕조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이성계는 두문동에 불을 질렀다. 한 나라를 열기 위해서는 인재가 필요한데 유신들이 전 왕조에 대한 지조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말을 듣지 않으니 노여움이 불길같이 타올랐다. ‘이놈들이 타죽기 싫으면 나오겠지 하는 마음이지 정말 죽일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선비들은 불에 타 죽을 때까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타 죽을망정 네 밑에서는 일을 못하겠다는 선비의 절개였다. 또한 인간으로서의 수치심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부끄러움이 삼류가 되면 시쳇말로 쪽 팔리는 걸 못 참는 중딩의 행동, 조폭이나 건달의 가오와도 연결된다.

 

이때부터 문 걸어 잠그고 세상에 나오지 않는 상황을 일컬어 두문불출이라고 했다. 당시 희생된 선비들을 두문동칠십이현이라고 한다. 그들의 이름이 다 밝혀지지는 않았다. 밝혀진 이들에 한해 추모하는 마음으로 적어본다. 신규(申珪) 신혼(申琿) 신우(申瑀) 조의생(曺義生) 임선미(林先味) 이경(李瓊) 맹호성(孟好誠) 고천상(高天祥) 서중보(徐仲輔) 성사제(成思齊) 박문수(朴門壽) 민안부(閔安富) 김충한(金沖漢) 이의(李倚) 등이다. 두문동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기슭을 가리키는 옛 지명이다.

 

죽은 뒤를 생각해야 君子

 

신라와 고려는 더럽게 망하지는 않았다. 조선은 그야말로 더럽게 망해버렸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으니 선비들의 마음은 갈 길을 잃었다.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 이것은 백이와 숙제, 마의태자, 두문동칠십이현 때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1905년 을사늑약이 발표되자 장지연 주필의 시일야 방성대곡과 신채호 선생의 시일야우 방성대곡으로부터 시작된 나라 잃은 슬픔은 매천 황현을 비롯한 많은 선비가 더러운 세상을 향해 목숨을 던지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물론 이런 시절에도 친일파들은 희희낙락 부귀영화를 누렸다. 사마천은 이러한 세상에 대해 원망에 찬 목소리를 낸 것이다. ‘하늘의 도, 공자의 인 같은 절대 진리가 무너져내리는 순간에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것이 인간이란 말인가?’ 하는 울부짖음이 있었다.

 

한일합병이 체결되자 아편을 먹고 자결한 황현은 어려서부터 총명해 신동으로 불렸다. 청년시절에 과거를 보려고 서울에 와서 강위·이건창·김택영 등 학식이 높은 이들과 우정을 나누었다. 1883(고종 20) 보거과(保擧科)에 응시해 장원을 했지만,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시험관이 둘째로 내려놓았다. 이 일로 그는 조정의 부패를 절감했다. 그는 더러운 세상이라 여기고 회시·전시에는 응시하지 않고 관리가 되려는 뜻을 접었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가 가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효가 우선이었다. 결국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못해 1888년 생원회시(生員會試)에서 장원으로 합격했다. 당시 조선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 청국의 적극 간섭정책 아래에서 수구파 정권의 가렴주구와 부정부패가 극심한 상황이었다. 황현은 다시 귀향했다. 조선 말기의 상황은 절개 있는 선비들이 설 자리가 매우 적었다.

 

황현은 구례에서 작은 서재를 마련해 3000여 권의 서책을 쌓아놓고 독서와 함께 시문(詩文) 짓기, 역사연구, 경세학 공부에 열중했다. 1905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국권이 박탈당하자 중국에 있는 김택영과 국권회복운동을 하려고 망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910 8월 한일합방의 비보를 듣고는 더는 하늘을 올려다볼 면목이 없었다. 절명시(絶命詩) 4수를 남기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고귀한 삶을 접고야 말았다.

 

어지러운 세상 머리털 희게 겪고/ 몇 번 죽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 했네./ 이제는 참으로 어쩔 수 없으니/ 찬란한 촛불 하나 푸른 하늘을 비추네.//

 

요망한 기운에 가려 임금 자리 옮겨지니/ 궁궐은 어둠침침하고 시간은 멈춰 섰네./ 조칙 또한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니/ 종이 위에 눈물만 흘러내리네.//

 

새와 짐승도 울고 온 산천 찡그리니/ 무궁화 화려 강산 기어이 망해 버렸구나/ 가을 등불 아래 읽던 책 덮고 역사를 헤아려 보니/ 글 아는 사람 제 구실하기 참 어렵기만 하네.//

 

일찍이 나라 위해 작은 공도 세우지 못 했으니/ 내 몸 하나 희생될지언정 애국이라 할 수도 없네./ 겨우 송나라 윤곡처럼 자결할 뿐이니/ 진동처럼 기개를 펴지 못한 것이 부끄럽기만 하네.//

 

이렇게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사라진 인물들 외에 동굴이나 외딴 시골에 숨어서 이름 없이 사라져간 지조 있는 인물들이 있었을 것이다. 인간의 삶은 선택이다. 어느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친일파가 되고, 독립운동가가 된다. 백이와 숙제의 선택은 죽음의 길로 이어진다. 마의태자, 두문동칠십이현, 매천 황현과 더불어 이들의 이름은 우리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불려진다. 공자는 군자는 죽은 뒤에 자기 이름이 일컬어지지 않는 것을 가장 가슴 아파한다고 했다. 죽은 뒤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 군자다. 하루살이처럼 살아간다면 군자라 할 수 없다.

 

부끄러움을 가르칩시다

 

현대사회,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부끄러움이 어디에 있을까? 박완서 소설의 제목처럼 부끄러움을 가르쳐야 할 시대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의 극악한 범죄자들은 형벌로 다스린다지만, 자존심이나 절개 정조를 제쳐두고 그저 돈돈 하면서 우르르 몰려다니는 꼴이 가관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과 익명성이 부끄러움을 가려준다. 백이와 숙제는 선비의 절개 지조 이전에 인간의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었다. 사마천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부끄러움을 알았기에 묵묵히 글을 적었다. 그것으로 부끄러움을 극복한 것이다.

 

그 시절 사람들은 돈보다 귀한 덕목을 알았다. 우리에게도 인간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두고 지켜야 할 최후의 보루가 있다. 장삼이사의 인간관계도 상대방이 수치스러워하는 그 무엇을 건드리면 관계가 단절되곤 한다. 훌륭한 선비에게 절개와 지조는 그러한 것이었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로 살 것인가, 아니면 배부른 돼지로 살 것인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어떤 순간에 이러한 선택을 해야 한다. 박정희 정권 아래서 장준하와 김준엽은 서로 다른 길을 간다. 장준하는 온몸으로 박정희 독재 정권에 항거하다 의문사를 당하고, 김준엽은 학교에 남아 은자(隱者)의 길을 간다. 그리고 이름조차 남기기를 거부하고 동굴이나 산속에서 백이와 숙제의 길을 걸었을 영혼들은 밤하늘의 별이 되었다.

 

백이와 숙제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정권의 폭압 앞에 세상에 만정이 떨어진 사람도 있다. 문득 박정만 시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박정만 시인의 인생을 절벽으로 몰고 간 사건이 있었다. 전두환 정권 초창기 이른바 국민의 군기를 잡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던 5월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일어난 일이다. ‘한수산 필화 사건에 연루된 박정만은 서빙고동 안가로 끌려가 사흘 밤낮 심한 고문을 당한다. 고문은 상상을 초월하는 폭력이었다. 당시 같은 사건으로 끌려간 중앙일보 정규웅 선생의 회고를 읽으면서 나는 박정만 시인의 몸과 마음에 난 상처를 읽을 수 있었다.

 

권력은 서정시인의 감성을 유린하고, 선비와 시인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가진 수치심을 모조리 끌어내어 군화로 짓밟아버렸다. 박정만 시인은 소설가 한수산과는 같은 문인으로 서너 번 만난 일 외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으나 정권의 횡포로 인해 영혼에 심한 상처를 입었다. 고문은 몸을 괴롭히지만 영혼의 고통이 더하다. 결국 시인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회의를 품었다. 그래도 살고 싶었다. 두문불출하던 그는 남도 여행을 감행했다. 남도로 향하던 중 불현듯 조치원에서 내려 수안보 부근의 세계사라는 절을 찾아가 인근에 텐트를 치고 2개월여를 보내기도 한다. 자연을 통해 개 같은 5월의 기억을 씻어내고자 노력했지만, 그의 삶은 5월 그 날에 멈추어버렸다. 마치 죽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처럼 술로 세월을 보내던 그는 유서와 같은 시를 쓴다.

 

하늘을 바라고 하늘을 바라고/ 울지 말아라 벙어리야/ 미친 오월의 돌개바람이/ 자지러지게 자지러지게 네 울음을 울어도/ 말하지 말아라 벙어리야/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아무도 저 하늘을 보려 하지 않는구나./ 불 먹은 하루해의 봉분 위에/ 풀잎처럼 쓰러져간 우리네 목숨,/ 벙어리야 벙어리야/ 하늘을 바라고 하늘을 바라고/ 이제 우리 기꺼이 푸른 제()의 사슬이 되자.// ‘5월의 유서 전문

 

억압하면 더 강해진다

 

사마천은 백이와 숙제에게서 원통한 마음을 보았다. 백이와 숙제가 널리 알려진 것은 공자 덕분이지만, 그들의 인간다운 마음을 읽어낸 것은 사마천이다. 그들의 원통한 마음은 시공을 초월해 한국의 시인에게도 전이된다.

 

내 가는 길섶에는/ 한 송이 복사꽃도 피지 말아라./ 눈물겨운 새소리 하나라도/ 청송靑松 높은 가지 위에 앉지 말아라.//

 

바람도 불지 말고/ 그저 앉은 채로 살아 있는 돌멩이같이/ 그렇게 내 생의 그림자만 보아라./ 산도 그냥 우리 말아라.//

 

꽃 피면 서러웁고/ 달 뜨면 아득한 인간의 하루./ 물소리 가득하여 나는 못내 못 참아라./ 내 등 뒤에서 내 등을 잡지 말아라.//

 

정작 한 소리 마음을 내노니/ 저편 한 사람 외로운 이도 볼 일이요,/ 날 기울면 이편쪽 마음도 줄 일이다./ 가는 길 없음을 나는 아노니.// ‘저 무화(無花)의 꽃상여 전문

 

박정만은 산하에 엎드려 운다. ‘꽃 피면 서러웁고/ 달 뜨면 아득한 인간의 하루라는 슬픔의 밑바닥에서 통곡한다. 누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저 광활한 우주로 사라져간 시인의 영혼은 진정으로 자유로울까?

 

사마천은 백이열전을 통해 자유로운 인간의 도리를 설명했다. 그 스스로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 얼마나 큰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체험했기에 더 절실하다. 호랑이는 죽어도 풀을 먹지 않는다. 인간 영혼의 고귀함과 자유로움은 그것에 저항하는 세상을 업고 나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선과 악의 개념을 넘어선다. 이 둘은 결국 하나이고, 하나는 결국 둘이다. 백이와 숙제는 무왕이 전쟁으로 평정한 세상이라는 피비린내 나는 혼란을 품고 넘어선다. 거기에 들어가지 않음으로써 들어가 있는 사람들을 품고 가는 것이다.

 

마의태자, 두문동칠십이현, 매천 황현도 각각 고려와 조선, 그리고 일제라는 억압이 있었기에 존재한다.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선비의 지조와 절개, 여인의 정조, 그리고 자유는 결국 그것을 억압하는 힘에 의해 더 강해지고 아름다워진다. 이 절묘하고도 가혹한 세상사가 있어 너와 내가 존재하고 그것이 자유롭고 아름답다.

 

 

 

5. 유협열전

 

말에는 믿음이 있었고 행동은 과감했다 평생 재능을 자랑하지 않았고, 보답도 바라지 않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건달 집단은 항상 있었다. 이들에 대해선 범죄의 조직화와 대량화를 통해 사회를 흉포하게 만드는 악의 세력이라는 평가도 있고, 일부는 개인의 억울함을 달래주는 영웅으로 칭송받기도 한다. 사마천의 유협열전은 군자의 품격을 갖춘 정의로운 유협의 세계를 다룬다.

사마천은 유협(遊俠) 혹은 협객(俠客)을 두 부류로 나눈다. 정권에 빌붙어서 개인의 이익을 취하는 자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위험에 빠진 약한 자를 구해주는 정의로운 자다. 전자는 개인의 이익을 탐하는 소인배이고, 후자는 군자의 품격을 갖춘 사람이다. 사마천은 유협을 정의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 그리고 열전에서는 후자의 인물들을 다룬다.

 

예나 지금이나 왕이나 최고 통치자는 국가가 정의를 실현한다고 선포한다. 우리가 세금을 내는 이유도 그 돈으로 우리를 정의롭게 보호해달라는 것이다. 이른바 깡패들이 점포를 상대로 세금이랍시고 돈을 갈취하는데 그들이 내세우는 명목도 장사를 잘하게 보호해 주겠다는 것이다. 나라의 정국이 편안하고 질서가 잘 유지되는 사회에서는 유협이 설 자리가 비좁았다. 더 큰 세력인 국가에 의해 통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국을 만나면 협객들은 국가의 정의를 대신 실현해주기 위해 자신의 한 몸을 아낌없이 바친다.

 

고대의 국가 통치이념이었던 유가에서는 당연히 유협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가 있었다. 문무가 국가를 통치했다. 문도 무도 아닌 상태라면 정의로운 행동을 해도 유가에서는 이를 기록하지도 평가하지도 않았다. 사마천은 그것이 불만이었다.

 

사마천은 유가든 묵가든 한비자든 간에 그러한 사상을 넘어선 자리에 있는 인간의 본질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사마천은 유자는 문으로 법을 어지럽히고, 협객은 무로써 금령을 범한다는 한비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정의에서 벗어난 선비들과 협객들을 비난했다. ‘배운 것들은 글로써 사회정의인 법을 어기면서 교묘하게 살아가고, 힘을 쓰는 자들은 칼을 들고 범법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고대의 중국이나 현대사회나 이러한 자들은 항상 존재한다. 선비건 협객이건 법을 어지럽히는 자는, 결국 같은 종류의 인간으로 분류된다.

 

건달의 세계화

 

우리 사회에 주먹이라고 하는 집단이 있다. 우리는 이들을 깡패, 양아치, 조폭, 건달 등으로 부른다.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건달 혹은 협객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건달은 불교용어인 건달바에서 나왔다. 건달바는 수미산 남쪽의 금강굴에서 살며 제석천의 음악을 맡아 보는 불교계의 신이다. 건달바는 술과 고기를 먹지 않고 향기를 음미하면서 꽃이 이슬을 맞고 살 듯 허공을 날아다니는 미묘한 존재다. 싸움을 한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건달이라는 주먹들은 자신을 평가하길 좋아한다. 아마도 일을 하지 않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한국 영화에서 간혹 나오는 장면이 있다. 조폭인 주인공이 스스로 건달이라고 하면서 부하들에게 양아치처럼 행동하지 말라고 훈육하는 장면이다. 사마천의 협객은 그들이 말하는 건달의 원조인 셈이다. 하지만 이 협객의 세계를 정확하게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사마천의 유협은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건달이 의협심과 애국심을 품고 있다면, 협객으로 대접받는다. 전세계 조직범죄단의 실상을 기록한 조폭 연대기의 저자 데이비드 샤우스웰은 이탈리아 마피아 조직인 코사 노스트라, 미국 마피아, 일본 야쿠자, 홍콩 삼합회, 오르가니자치야(러시아 마피아), 미국의 갱단, 영국의 다양한 갱단, 터키와 쿠르드 갱단을 포괄하는 유럽의 갱단들을 분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조직범죄는 지구상의 모든 나라에서 행해지는, 어림잡아 1조달러 규모의 사업이다. 21세기 키워드는 세계화인데, 지금의 조직범죄보다 더 국제적 상호연관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인간 활동도 없다. 어느 나라에나 지하세계가 존재하지만, 오늘날의 글로벌 경제에는 이에 상응하는 글로벌 암흑가가 출현하고 있다. 이 글로벌 암흑가의 다국적 범죄조직들은 웬만한 나라보다 큰 경제력을 가지고 있다. (중략)

 

범죄조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사회에 적응해나가기 때문에 법적으로 정의 내리기 힘들지만 과거와 오늘날의 범죄조직의 공통점이 무엇인지는 쉽게 지적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해적, 산적, 노예상인, 마약 밀매꾼들이 국가의 직접적인 후원을 누려왔다. 그런 공식 허가와 보호를 잃게 되면 뇌물을 통해 범죄 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려 했다. 이런 관행이 정치와의 결탁에 의한 범죄라는 모든 조직범죄의 주요 특징이 되었다.

 

지난 4000년 역사에서 나타난 범죄조직들의 또 다른 주요 특성은 이들이 국가의 폭력 독점에 도전하며, 그 조직원과 희생자를 모두 통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공포를 이용하고, 서열구조와 내부 규율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다. “국가란 큰 도적단이며, 도적단이란 작은 국가일 뿐인가?”

 

협객의 존재 이유

 

왜 협객은 존재할까? 중국 고대의 천재 역사학자이면서 선비인 사마천은 장엄한 역사의 강물을 바라보면서 세상살이가 얼마나 지난한 것인지를 먼저 밝힌다. 공자와 같은 대성현도, 백이와 같은 절개의 인물도, 여상 이오 등 선비로서 수양을 닦은 어진 이들도 인생을 살면서 기가 막히는 일을 당한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들은 모두 선비로서 이러한 재난을 만났는데, 하물며 평범한 재능을 가진 사람으로 어지러운 세상의 혼탁한 흐름을 건너자면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들이 재앙을 겪는 경우를 일일이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이 문장에는 한 무제에게 이릉 장군을 변호하는 정의로운 말을 했다가 화를 당한 자신의 심경이 포함되어 있다. 사마천이 전통적인 유가의 해석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으로 역사를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삶의 억울함과 가난하고 불우한 자의 심경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나라의 신하였던 사마천은 국가가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대명제에는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유협의 세계를 무시하는 태도는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칭찬할 점을 찾아 기록했다.

 

지금 유협의 경우는 그 행위가 비록 정의에 부합되지는 않더라도 그들의 말에는 믿음이 있고 행동은 과감하며, 한번 승낙한 일은 반드시 성의를 다해 실천하고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남에게 닥친 위험 속으로 뛰어든다. 그들은 생사존망을 돌아보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능력을 뽐내지 않았고, 그 덕을 자랑하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 이런 점은 높이 칭찬할 만하다. 사람은 누구든지 위급한 상황에 부딪힐 때가 있다.”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위급한 상황에 부딪힐 때가 온다. 그 순간 우리 앞에 정의를 실현해줄 국가와 법은 저 높은 곳에서 별처럼 빛날 뿐이다. 절차를 거쳐 법의 심판을 받기 위해 세월을 기다려도 그 정의는 실현되지 않을 때가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민주적이라는 미국에서도 그러할 때가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그러할 때가 있다.

 

협객이 필요한 보통사람들

 

시카고 갱단의 보스 알 카포네로 상징되는 마피아를 모델로 만든 영화 대부는 미국으로 이민한 한 평범한 이탈리아인이대부에게 와서 자신의 처지를 고백하는 어두운 장면으로 시작한다. 자신의 딸을 성폭행한 놈들이 가벼운 벌금형을 받고 법정에서 유유히 빠져나가면서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었다고 고백한다. 그 순간 법의 정의를 믿었던 시민은 분노하고 좌절한다.

 

열심히 일해서 세금 내고, 교통법규 지키고, 범법행위와는 거리가 먼 착한 시민을 지켜주어야 할 국가의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다. 하지만 국가로 치자면 대통령쯤 되는 대부는 힘없고 가난한 그를 직접 만나 독대를 해서 그의 이야기를 다 듣고 간단하게 마피아 애들을 시켜서 속 시원하게 그 원한을 풀어준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고, 국가가 실현하지 못하는 정의를 유협이 속 시원하게 해결해준다. 우는 아이에게 젖병을 물리는 대부, 그는 가난한 자의 자애로운 아버지가 된다. 그래서 대부라고 부르면서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든다. 물론 미국 마피아 조직이 사마천의 유협으로 분류될 수는 없다. 그들은 사업이라는 명목으로 각종이권 개입, 탈세, 살인을 통해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일종의 비즈니스맨이기 때문이다.

 

유협이 되기 위해서는 조선시대의 홍길동이나 일지매처럼 사심이 없어야 한다. 하여간, 이것은 매우 일천한 비유다. 우리는 우리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대해 대부가 필요한 경우를 의외로 많이 겪는다.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경우는 사방 도처에 있다. 아이들과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가혹행위, 성폭행, 주차장에서 당하는 황당한 주차싸움과 같은 일들, 일일이 거론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이러한 문제가 나름 잘 정리된 국가나 사회를 지금 세계에서 몇 나라나 찾아볼 수 있을까?

 

유협을 원하지 않는 권력자

 

유협은 철저하게 가난한 자, 시민과 백성의 시각으로 형성된다. 가진 자와 권력자들은 정의로운 유협의 세계를 원하지 않는다. 사마천은 말한다.

 

백이는 주나라가 온 천하를 얻는 것을 추악하게 여겨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지만 문왕과 무왕은 이 때문에 왕위에서 물러나지 않았고, 도척과 장교는 포악하고 잔인했지만 패거리들은 그들이 의기 있는 사람이라고 끝없이 칭송했다. 이것으로 볼 때 허리띠의 갈고리를 훔친 사람은 처형되고, 나라를 훔친 사람은 제후가 되며, 제후의 문하에는 인의가 있다는 말은 허튼 소리가 아니다.”

 

그래서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어 처형당하지만(국가에 의해), 전쟁을 일으켜 수십만명을 죽인 자는 자국에서는 영웅이 돼서 국가 권력을 독점한다. 그러니 국가 권력이 유협의 세계를 멀리할 수밖에 없다. 민중이 유협을 지지하면 정권 유지가 위태롭기 때문이다. 홍길동과 같은 유협은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고 싶어했다. 그래서 국가권력은 정의로운 유협일지라도 그 존재 자체를 기록에 남기지 않기도 한다. 사마천은 이러한 국가의 횡포에 대해 지적했다.

 

옛 서민 협객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없다. ( ) 시정의 협객들은 오로지 행실을 닦고 절개를 지켜 명성을 온 천하에 떨쳤으니 현명하다고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유가와 묵가에서는 모두 이들을 배척하고 버려 책에 기록하지 않았다. 진나라 이전의 서민 협객에 대해서는 사라져 알 길이 없다. 나는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사마천의 이러한 시각은 유가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사마천의 자유로운 시각 때문에 오늘날까지 사기열전이 생명력을 갖게 됐다. 사마천은 한나라 시대 주가, 전중, 왕공, 극맹, 곽해와 같은 인물들을 유협열전에 기록한다. 이들은 당시 국가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기도 했으나, 개인의 품위와 덕망, 청렴, 겸양에 있어서는 선비들과 백성들이 그 뒤를 따랐다고 기록했다. 즉 폭력을 동원한 깡패는 유협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마천은 유협에 대해 명증하게 정의했다.

 

패거리나 세력이 강한 종족이 서로 의지하고,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부리며, 문벌 세력이 외롭고 약한 사람을 해치고 억누르며,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여 자신들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따위를 유협의 무리는 수치로 여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직폭력배와 협객은 사마천의 이러한 분류로 간단하게 구분된다.

 

진정한 유협은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도 모르게

 

세상 사람들이 유협인 주가와 곽해 등을 세력이 강한 종족이나 문벌 세력과 같은 부류로 보고 비웃는 것은 슬픈 일이다. 주가는 노나라 협객으로 당대 유명인사다. 그가 구해준 인물은 호걸만 수백명, 일반 백성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지지기반으로 명예나 권력을 탐하지 않았다. 군사를 만들어 정부를 전복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조용히 숨어서 정의를 실천했다. 사마천은 주가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그는 평생 자기 재능을 자랑하지 않았고, 어떤 보답도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전에 자신이 은혜를 베푼 사람을 다시 만날게 될까 두려워했다. 남의 어려움을 도울 때에는 우선 가난하고 신분이 천한 사람부터 했다. 그의 집에는 남아도는 재산이 없었고, 옷은 빛깔이 바랜 것들뿐이었고, 두 가지 이상의 반찬을 먹지 않았고, 타고 다니는 것은 소달구지가 고작이었다.”

 

이렇게 청빈한 생활을 하면서도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해 기어이 구해주었고, 자신의 일보다 먼저 다른 사람의 위급함을 생각했으니 우리가 조폭 영화에서 보는 인물들과는 사뭇 다르다. 유협의 특징 중에 가장 두드러진 점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이중적인 의미로 파악할 수 있다. 하나는 국가의 법집행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단련된 인성이 훌륭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구제행동을 할 때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다. 사마천의 유협들이 그렇게 행동했다. 사마천은 이들이 어떻게 유협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임꺽정처럼 힘이 장사인지 일지매처럼 신출귀몰한지 그러한 활극적인 요소가 없다. 다만 그가 한 결과만을 담담히 기록한다.

 

주가의 행동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일찍이 몰래 계포 장군을 위험 속에서 구해준 적이 있었다. 계포는 존귀한 신분이 된 뒤에 그를 찾았지만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함곡관 동쪽 지역 사람치고 목을 늘이고 그와 사귀기를 원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주가의 뒤를 잇는 극맹과 왕맹 역시 협객으로 이름을 날렸다. 사마천이 유협열전에서 가장 길게 다룬 인물은 바로 곽해다. 곽해의 아버지도 협객으로 그는 효문제 시대에 처형됐다. 흥미로운 것은 사마천이 인정한 협객의 대표적인 인물인 곽해 역시 인생 초반에는 건달 혹은 주먹으로 살았다는 점이다. 젊은 시절엔 심성이 잔인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살인을 서슴지 않았으며, 법을 어기고 강도질을 하기도 한다. 도굴을 해서 재산을 모으기도 한다. 하지만 자기 몸을 던져 친구의 원수도 갚아주고, 여러 번에 걸쳐 망명한 사람들을 숨겨주었다.

 

주먹에서 협객이 된 곽해의 겸손

 

이러한 그가 나이를 먹으면서 협객으로서의 면모를 갖췄다.

 

자기에게 불만을 가진 사람에게는 덕으로 갚았고, 남에게는 큰 은혜를 베풀었으며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보답하기를 바라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의협심을 실천하는 것만은 더욱 즐겨했으며, 사람의 목숨을 건져주고도 그 공을 자랑하지 않았다.”

 

사마천은 말했다. “나는 곽해를 본 적이 있는데, 그의 얼굴 모습은 보통 사람보다 형편없었고, 말솜씨도 본받을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천하에서 현명한 자나 못난 자, 아는 자나 모르는 자나 정말 그의 명성을 사모했으며, 협객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모두 그의 이름을 말한다. 속담에도 사람이 아름다운 명예로 얼굴을 삼으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라고 했다. , 정말 애석하다.” 사마천이 이처럼 애석해했던 이유는 곽해 역시 말년에 일족이 몰살을 당했기 때문이다.

 

곽해의 탁월한 점은 겸손과 공정성에 있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곽해의 조카가 삼촌의 위세를 믿고선 술을 마시다가 상대방의 명예를 무시하는 무례한 행동을 했다. 화가 난 상대방이 곽해의 조카를 죽이고 달아났다. 곽해는 이 이야기를 듣곤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자 화가 난 곽해의 누나는 길거리에 아들의 시신을 놓고서는 동생인 곽해가 원수를 갚아주지 않음을 원망하면서 장사도 지내지 않았다.

 

협객이 조카의 원수도 갚아주지 않는다고 떼를 쓰는 것이다. 곽해는 은밀히 범인을 알아냈다. 범인은 결국 스스로 곽해를 찾아와 자초지종을 다 말하고 처분을 기다렸다.

 

요즘으로 치자면 전국 조직폭력배 최고 보스에게 찾아가는 심경이었을 것이다. 곽해는 조용히 그의 말을 다 듣고는 이렇게 말하고 조카의 시신을 수습했다. “당신이 그를 죽인 건 진실로 당연하오. 내 조카가 나빴소.”

 

또한 자신에게 무례하게 구는 동네 양아치에게 몰래 선행을 베풀어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찾아온 그 사내가 울면서 용서를 빌기도 한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선비가 글로써 자신의 이름을 빛내는 것과 같다. 특히 곽해가 빛나는 대목은 서로 원수처럼 지내는 낙양 사람들을 중재하고 나서 보여준 모습이었다. 곽해는 그 고을 안에 명망가들이 화해하려다가 결국 실패한 일을 간단하게 해결하고 나서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낙양의 여러 인사가 중재를 나섰으나 당신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들었소. 지금 다행히 이 곽해의 말을 들었소만, 다른 고을 사람인 내가 어찌 이 고을에 계신 어진 분들의 권위를 빼앗을 수 있겠소. 여러분은 당분간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처럼 하시오. 내가 떠난 뒤에 낙양의 호걸들이 중재에 나서게 하여 그들의 말을 들으시오.”

 

이러한 그의 행동으로 인해 황제까지도 그를 알게 되었고, 한 무제가 지방의 부호들과 호족들을 무릉으로 이주시켰을 때 재산이 없어 가난한 곽해도 그 명성으로 인해 이주하게 될 정도였다. 그때 그를 전송한 사람들이 낸 전별금이 1000여만전이나 되었다고 한다.

 

곽해는 고대 중국의 대표적인 영웅이다. 하지만 그 시절에도 곽해와 같은 이는 드물었고, 협객의 거죽은 쓰고 있지만 수치스러운 이가 많았다고 사마천은 기술한다. 사마천이 말하는 협객은 비록 글로써 유가의 덕목을 지니고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항상 어렵고 가난한 자 편에서 정의를 행한 인물들이었다. 이러한 인물들은 왕의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정권 전복과 같은 정치적인 생각이 없었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들은 단지 지금 이 순간 주저앉은 사람들의 손을 잡아 땅바닥에서 일으켜 세워주는 역할로 만족했다.

 

한국 근대사에서 유협의 세계는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 제법 자세하게 나온다. 김구 선생은 젊은 날 혈기가 왕성하던 시절, 조국의 현실에 통분하고 유협의 마음으로 일본 순사를 맨손으로 처단한다. 선생이 한국 근현대사에서 위대한 정치인, 사상가로서 존경을 받는 배경에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의협심이 있다. 물론 선생을 유협의 인간 유형으로 분류할 수는 없다. 선생은 더 큰 세상을 향해 걸어간 위대한 인물이다. 즉 선생은 숨어 사신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한 몸을 조국 독립을 위해 바친 분이다. 이런 점에서 선생은 유협이 아니다.

 

유협을 넘어선 백범 김구 선생

 

김구 선생은 옥중에서 만난 사람을 통해 도적의 역사에 대해서 듣게 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들은 자신을 절대 도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 나라에서 도적이라 명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사마천의 시각으로 보면 이들도 유협의 무리에 들어갈 수 있다.

 

조선시대 이후 도적의 계파와 시원은 이렇습니다. 고려 말 이성계가 나라를 세웠을 때, 두문동 72인과 같이 고려왕조에 충성하고 신왕조에 협조하지 않은 지사들이 비밀리에 연락하여 동지를 모았습니다. 약한 자를 구제하고 기운 것을 바로 세우며, 새 왕조의 질서를 파괴하려는 보복적 대의를 표명하고, 조선의 국록을 먹는 백성을 착취하는 양반과 부자들의 재물을 탈취하여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였소.”

 

그들은 의협심이 없이 도적질만 하는 자들을 스스로 처단하기도 한다.

 

강원도에 근거를 둔 기관을 목단설이라 하고, 삼남에 있는 기관을 추설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북대는 무식한 자들이 임시로 작당하여 민가를 털고 약탈합니다. 그러니 목단설과 추설끼리는 초면에도 오래된 동지처럼 서로 인정하고 돕지만, 북대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적대시하여 만나기만 하면 무조건 사형시킵니다. 목단설과 추설의 최고 수령은 노사장이고, 그 아래 총무를 보는 자와 각 지방 주관자를 유사라 합니다. 양설이 같이하는 공동대회를 큰 장 부른다고 하고, 각기 단독으로 부하를 모으는 것을 장 부른다고 합니다.”

 

이 계보가 현대에까지 이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제강점기의 유협은 김두한이 아닐까 싶다.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서 안동 김씨의 자부심을 가지고 종로통 상인들의 유협으로서 야인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 유협은 빛을 발한다. 일제강점기는 혼란과 혼돈의 기간이었다. 이 시절에 진짜 유협은 일제에 대항하면서 별처럼 떠올랐다. 그리고 광복이 되자 유협의 세계는 정부의 공권력에 의해 서서히 무너져내린다. 다년간 한국 주먹을 취재해 주먹세계에 정통한 조성식 기자는 근저(近著) ‘대한민국 주먹을 말하다에서 이렇게 썼다.

 

야인시대의 주인공은 김두한, 시라소니(이성순), 이정재, 이화룡 4명이다. 1950년대 서울 주먹계는 이 네 사람이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김두한은 실력으로나 명성으로나 한국 최고의 주먹이었다. 하지만 정치활동을 하면서 조직이 거의 무너졌고, 따르던 아우들도 흩어졌다. 조직으로는 자유당 정권을 등에 업은 이정재의 화랑동지회, 혹은 동대문사단이 가장 셌다. 명동파의 이화룡은 시라소니와 손을 잡고 이정재에 맞섰다. 특정 조직을 거느리지 않았던 시라소니는 김두한, 이정재, 이화룡과 두루 관계를 맺으며 자유롭게 활동했다.

 

김홍빈(1950년대 명동파 두목 이화룡 직계이면서 시라소니와 관계를 맺었다)씨에 따르면 이정재의 세력이 커지면서 김두한의 주먹계 입지는 매우 좁아졌다. 이정재가 동대문시장을 발판으로 종로와 광화문, 서대문 일대까지 장악하자 김두한은 갈 곳이 없어졌다. 돈 문제 등으로 주먹계에서 인심을 잃은 탓이라는 게 김홍빈씨의 증언이다. 김씨는 김두한은 말년에 사업 실패로 빚쟁이들에게 시달렸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며 김두한의 사망 배경에 의구심을 나타냈다.”

 

정치 깡패 이정재 VS ‘건달대표 이화룡

 

국회의원 김두한은 국회에 똥물을 뿌린 퍼포먼스로 유명하다. 그가 부패한 정치인들의 행태를 참지 못하고, 분통이 터져 똥물을 뿌린 행위는 의협심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행위에 대해서 관대하지 못하다. 속 시원하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정치인으로서 미성숙하다는 평가도 가능한 것이다. 당대나 지금이나 국회에 똥물을 뿌릴 일은 비일비재하다. 유협이 정치인이 되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보여주는 우리 국회의 추억의 명장면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유협들은 자신의 활동반경에 선을 분명히 그었다. 사마천의 유협들은 조용히 은둔자의 생활을 했는지도 모른다. 곽해와 같은 경우 맘만 먹는다면 정권 전복을 기도할 만한 세력을 갖출 수도 있었을 것이다.

 

김두한처럼 정치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정치적인 이미지가 강한 이정재에 대해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역시 조성식 기자의 글이다.

 

김씨는 이정재에 대해 건장한 체격에 잘생긴 얼굴이었다. 정말 아까운 사람이 처형당했다. 이정재가 정치깡패였던 건 틀림없다. 하지만 사람은 참 신사였다. 학자적인 면모도 있었는데, 글씨를 참 잘 썼다. 다른 조직의 주먹들이 사무실에 놀러 가면 돈봉투를 건네곤 했다. 인정이 많고 의리가 강했다고 평가했다. 동대문시장에서 출발한 이정재가 서울 주먹계의 강자로 우뚝 선 것은 화랑동지회를 결성한 이후다. 화랑동지회는 서대문의 최창수, 광화문의 장용빈, 종로의 아오마쓰(심종현) 등이 이정재를 중심으로 연합한 단체다. 김홍빈씨에 따르면 엄밀히 말해 화랑동지회와 동대문사단은 별개의 조직이지만 하나의 단체로 인식됐다고 한다.”

 

이화룡과 시라소니에 대해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화룡은 키가 170인데 네 사람 중에서 가장 작았다. 하지만 보스 기질 면에서는 최고였다는 것이 김씨의 평이다. 싸움도 잘했다고 한다. 김두한의 측근인 무옥이 이화룡과 맞대결을 했다가 패했다고 한다. 이정재 세력은 정치권력을 업은 힘이었다. 건달세계 대표자는 어디까지나 이화룡이었다. 그는 약자를 위할 줄 아는 건달이었다.”

 

이화룡 밑에는 정팔을 비롯해 15형제, 한국체육관파, 신상사(신상현) 등이 있었다. 정팔의 직계인 신상사는 원래 독자 조직을 갖고 있었다. 중앙극장 일대를 장악하고 있다가 이화룡 밑으로 들어간 그는 돌격대장 노릇을 했다. 화랑동지회 습격사건의 주동자도 신상사였다.”

 

위에 인용한 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엄연한 정부의 행정구역이 있는데도, 이들은 동사무소 하나 차려놓지 않고 동대문 일대는 누가, 중앙극장 근처는 누가 이런 식으로 구역을 나누어 관리를 했다. 이른바 나와바리라고 하는 구역싸움이다. 마치 춘추전국시대의 영웅호걸들이 패권을 다투던 모습과 비슷하지만, 결국은 나라와 정부라는 거대조직 앞에서는 무력화된다. 고대의 곽해 역시 한 무제의 한마디에 일가가 몰살당했다.

 

이정재도 1961 8월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961년 박정희 군사정권은 이른바 군대라는 총과 칼의 집단이다. 군사정권이 대의로 내건 명분도 국민의 안위와 혼란한 정국의 안정이었다.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의 편에 서서 부패한 정권을 바로잡는다는 유협의 명분은 국가적 차원으로 발전한다. 그래서 정부는 이러한 아류 집단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하니까 넌 빠져라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힘으로 제압해버린다. 그것은 고대 중국 한나라 사마천의 시대에도, 한국 군사정권의 시대에도 일맥상통한다. 사실 중국의 요순시대와 같은 좋은 시절에 유협은 그 필요성이 없어진다. 반대로 살벌한 독재 정권인 북한과 쿠바와 같은 나라에도 유협의 존재감은 없다. 유협의 무력보다 훨씬 강력한 대포가 있기 때문이다.

 

진화하는 한국의 주먹

 

그래서 우리는 연장이 아닌 주먹 하나로 자웅을 겨루던 일제강점기의 주먹들을 전설처럼 추억하는지도 모르겠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에서처럼 주먹들이 맨몸으로 대결하는 모습은 멋있어 보이기도 한다.

 

김홍빈씨는 우리 때만 해도 일대일 싸움실력이 없으면 건달생활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요즘 애들은 조직으로만 움직이고 주먹이 아니라 칼로 승부한다고 쓴소리를 했다.

 

그가 한국 주먹사에서 최고로 꼽은 주먹은 시라소니다. 싸움 실력도 최고였지만, 인간성도 좋았다고 한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르고 정의감이 넘치던 진정한 건달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정의감과 의협심을 강조한다. 사마천의 유협은 결국 이러한 정의감에 넘치는 은자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시라소니 이후 급속한 경제발전과 유신정권의 출범 등으로 한국에서 주먹 지형도는 크게 달라졌다.

 

현재 경찰에서 파악하는 전국 조직폭력배는 총 199개 파에 4153명이다. 검찰은 전국 28개 지청을 통해 주요 조직폭력배 162개 파와 668명을 관리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수사기관이 편의상 분류해놓은 것일 뿐 실제 사정은 사뭇 다르다. 이른바 실세들은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하는 데다 대부분 사업가이기 때문에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이 세계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경찰 검찰이 파악하고 있는 조폭들은 뿌리가 아니라 빵(감방)에 드나드는 가지일 뿐이라고 말했다. (중략) 주먹에는 크게 두 부류가 있다. 지역 주먹과 전국구 주먹이다. 지역 주먹은 특정 지역에서만 힘을 쓴다. 반면 전국구 주먹은 말 그대로 전국 어디서나 실력이나 이름값을 인정받는 주먹이다. 주먹세계에서 호남주먹이 돋보이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전국구 주먹의 상당수가 호남에서 배출됐기 때문이다.”(‘대한민국 주먹을 말하다’)

 

조성식 기자는 말한다.

 

오늘날 주먹은 진화하고 있다. 유흥업소의 자잘한 이권을 두고 칼부림을 하거나 소영웅주의에 빠져 수사기관의 실적 쌓기에 공헌하는 조무래기 주먹을 말하는 게 아니다. 수사기관은 위장으로 간주하겠지만, 다들 사업가의 길을 걷는다. 사업과 조직의 공존을 추구하는 것이다. 사업 분야도 다양하다. 일부 주먹들은 사회봉사활동도 한다. 일본의 독도 침탈에 항거해 단지 시위를 벌인 주먹들도 있다.”

 

신문의 사회면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주먹들인 김태촌과 조양은을 비롯해 경기 주먹계의 실세 박복만, 서울 주먹계의 실력자 백민, 전 안토니파 보스 안상민, 주먹계의 새로운 모델 양길모, 주먹계 우국지사 조일환, 시라소니 이후 맨손싸움 일인자 조창조 등을 조성식 기자는 다루고 있다.

 

사마천은 유협을 두 부류로 나누었다고 이 글의 초반에서 밝힌 바 있다. 정권에 빌붙어서 개인의 이익을 취하는 자도 있고,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위험에 빠진 약한 자를 구해주는 정의로운 자도 있다. 지금 주먹들은 어느 부류에 속할까?

 

사마천처럼 당대의 협객을 만나고 평가하는 사학자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시대가 변했다.

 

고대의 유협들은 현재의 주먹들을 보고 어떻게 평가할지도 알 수 없다. 고대의 유협들처럼 정말 이름을 숨기고 행동하는 정의로운 자가 있을 수도 있다. 사마천은 말한다.

 

지금 학문에 얽매이거나 작은 의를 품은 채 오랜 세월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것이 어찌 천박한 의론으로 세속에 부합하여 세상의 흐름을 따라 부침하며 영예로운 이름을 얻는 것만 못하겠는가? 그러나 포의의 무리로서 은혜를 입었으면 반드시 갚고 승낙한 일은 반드시 실천에 옮기고, 천리 몇 곳까

 

지 가서도 의리를 외치며 실천하고, 의를 위해서 죽는다면 세상 사람들은 평을 돌아보지 않으니, 이 또한 유협 무리의 뛰어난 점으로 구차스럽게 그런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름 있는 선비들도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그들에게 목숨을 맡기게 된다. 그들이야말로 어찌 사람들이 말하는 현인이나 호걸이 아니겠는가? 만일 민간의 유협들과 계차 원헌의 권세와 역량을 비교한다면, 그 시대에 이룬 공적을 놓고는 한 날에 같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요컨대 구체적인 성과와 말을 하면 신의를 지키는 점에서는 협객의 정의를 또 어찌 경시할 수 있겠는가?”

 

 

 

 

 

 

 

6. 굴원 가생 열전

 

 

 

현실에서 좌절된 꿈, 문학이 품어 날개를 달아주다

 

 

 

굴원 가생 열전의 굴원은 정치인으로서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그의 시는 남았다.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났으나 보통의 여인네들이 누리는 소박한 행복마저 갖지 못했던 허난설헌은 한()을 시로 풀어내 국제적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들의 삶에서 인생의 덧없음과 문학의 힘을 확인할 수 있다.

 

 

 

박경리 선생의 시 옛날의 그 집을 보는 어둔 저녁이다. 대하소설 토지를 집필한 소설가 박경리 선생은 그 시절 어둡고 외로운 마음이 들면 시를 쓰면서 견딘 모양이다. 좋은 시가 한 인간의 품에서 어떻게 태어나는지를 보여준다. 박경리 선생의 내밀한 속내가 엿보이는 시집이라 가까이 두고 간혹 잠든 아이 얼굴 들여다보듯 읽는다. 그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거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전국시대의 위대한 비극시인 굴원을 연상했다. 비극의 화살은 궁형을 받은 사마천에게 정통으로 박혔지만, 이 넓은 세상에 사마천 혼자 그 화살을 맞았을까?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화살은 날아오고, 인간은 이를 피하지 못한다. ‘사기열전에서 빛나는 대목은 굴원과 백이, 형가 등 인간 비극성의 육화다. 비극이 인간을 만들고 그 인간이 글을 쓰고 칼을 든다. 비극은 그리스 로마와 동아시아, 즉 동서양을 관통하는 궤적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굴원은 이름이 평이고, 초나라 왕실과 성이 같다. 그는 초나라 회왕의 좌도(左徒·초나라의 관직명)로 있었는데, 보고들은 것이 많고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잘 다스려질 때와 혼란스러울 때의 일에 밝았고, 글 쓰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는 궁궐에 들어가서는 군주와 나랏일을 의논하여 명령을 내렸으며, 밖으로 나와서는 빈객을 맞이하고 제후들을 상대하였다. 회왕은 그를 매우 신임하였다.’

 

사마천은 이렇게 굴원을 소개하며 그가 왕족의 족보를 가졌음을 밝힌다. 굴원의 시조인 굴하는 초나라 무왕의 아들로 이라는 지역을 다스리게 되어 이라는 성을 받았다. 좌도는 왕의 곁에서 정치적인 조언을 하고, 조서나 명령의 초안을 잡아 보고하고, 외교 협상 등의 주요한 일을 맡았던 요직이다. 왕과 성이 같고, 정치적 요직에 있는 굴원이 글까지 잘 썼으니 왕은 그를 믿고 의지했을 것이다. 왕의 곁에서 사랑받는 그를 시기하는 자가 없었다면 굴원은 위대한 정치인으로서 초나라를 부국강병의 길로 이끌었을 것이다. ‘이끌었다가 아니라 이끌었을 것이다라고 한 것은 이후 굴원에게 닥친 고난 때문이다.

 

분통함을 시로 달래고

 

회왕은 굴원에게 국가 법령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이때 굴원의 정치적 라이벌인 상관대부(上官大夫)의 중상모략이 펼쳐진다. 정치세계는 권력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따기 위해 상대방의 입안에 들어있는 것까지 손가락으로 뽑아내는 인면수심의 세계이기도 하다. 상관대부는 굴원이 법령을 만들면서 하는 행동이 교만하고 안하무인이라며 왕에게 고한다. 상관대부가 굴원에게 법령의 초안을 좀 보자고 했는데, 완성되기 전까지는 그럴 수 없다고 한 데 대한 보복이었다.

 

왕의 판단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던 시절이었다. 귀가 얇은 왕은 조금씩 굴원을 멀리하기 시작한다. 권력의 자리에서 밀려난 굴원은 무엇을 하였을까? 권력을 되찾기 위해 자기 세력을 모으고, 와신상담하면서 상관대부를 밀어낼 궁리를 했을까? 아니다. 시인 굴원은 엇나가는 세상과 나라와 사람을 걱정했다. 그리고 그 걱정이 시가 되었다. 굴원의 대표작 이소(離騷)’ 걱정스러운 일을 만나다란 뜻이다. 깊은 사색에 빠져 이 시를 짓고 아픈 가슴을 달랬다. ‘이소 창작동기를 사마천은 이렇게 적었다.

 

대체로 하늘은 사람의 시작이며, 부모는 사람의 근본이다. 사람이 곤궁해지면 근본을 뒤돌아본다. 그런 까닭에 힘들고 곤궁할 때 하늘을 찾지 않는 자가 없고, 질병과 고통과 참담한 일이 있을 때 부모를 찾지 않는 자가 없다. 굴원은 도리에 맞게 행동하고, 충성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여 군주를 섬겼지만, 참소하는 사람의 이간질로 곤궁하게 되었다. 신의를 지켰으나 의심을 받고, 충성을 다했으나 비방을 받는다면,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굴원은 이처럼 분통하고 원망스러운 마음에서 이소를 지은 것이다.’

 

이소의 첫 구절은 굴원 자신의 태생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님을 그리는 여인의 을 통해 자신의 심경을 대변한다. 왕과 자신의 관계를 그리운 님과 실연한 여인의 관계로 설정한 것이다. 여인은 님이 자신을 다시 부르기를 간절히 애원한다. 이 서사는 비극적인 서정시의 낭만성을 지니고 있다. ‘이소는 종종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오디세이와 비교된다. 호메로스는 트로이전쟁을 배경으로 장편 서사시를 쓰지만, 굴원은 전쟁과 모험의 세계 대신에 한 여인의 한을 신화와 함께 펼쳐 보였다.

 

글은 간결하고 뜻은 고결하니

 

굴원의 시에는 신화의 세계가 펼쳐진다. 굴원의 시는 중국 신화전설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다. 그의 시 천문은 신화 연구자들에게 열쇠와 같다.

 

묻노니, 아득한 옛날, 세상의 시작에 대해 누가 전해줄 수 있을까?/ 그때 천지가 갈라지지 아니하였음을 무엇으로 알아낼 수 있으랴/ 모든 것이 혼돈 상태, 누구라서 그것을 분명히 할 수 있을까?/ 무엇이 그 속에서 떠다녔는지, 어떻게 확실히 알 수 있을까?//

 

끝 모를 어둠 속에서 빛이 나타나니 어찌된 일일까?/ 음과 양의 두 기운이 서로 섞여서 생겨나니, 그 내력은 어디서 시작된 것인가?/ 둥근 하늘엔 아홉 개의 층이 있다는데, 그것은 누가 만든 것일까?/ 이러한 작업은 얼마나 위대한가? 누가 그 최초의 창조자였을까?//

 

후대의 신화 연구자들은 시인 굴원의 이러한 질문을 염두에 두고 신화의 세계로 들어간다. 고대 동아시아의 신화세계를 굴원은 시로 노래한다. 사마천은 사람이 곤궁해지면 근본을 뒤돌아본다는 말을 했다. 굴원은 곤궁해지자 좌절과 분통한 마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기에 신들의 세상이 있었다.

 

아침에 곤륜산에서 흐르는 백수를 건너/ 신선들이 사는 낭풍에 말을 맨다/ 문득 돌아보니 흐르는 물/ 슬프다 초나라에 님이 보이지 않는구나.//

 

나는 우레의 신 풍륜을 불러/ 구름을 타고 강의 신 복비를 찾아/ 허리 패옥 풀어 언약하고/ 그녀의 신하 건수에게 중매를 부탁하리라.//

 

천문과 더불어 이소는 고대 중국전설의 신화세계를 드러내는 중요한 문헌으로 평가받는다. 사마천은 말한다.

 

위로는 제곡을 칭송하고 아래로는 제나라 환공을 말하고 있으며, 그 중간에는 은나라 탕임금과 주나라 무왕을 서술함으로써 세상일을 풍자하였다. 넓은 도덕적 숭고함과 잘 다스려질 때와 혼란스러울 때의 일의 조리를 밝힘에 있어 빠짐이 없다. 글은 간결하고 문장은 미묘하며 그 뜻은 고결하고 행동은 청렴하다. 문장의 분량은 적지만 뜻하는 것은 매우 크며, 눈앞에 보이는 사물을 인용했지만 그 의미는 높고 깊다.’

 

굴원은 전국시대 초나라, 진나라, 제나라 삼국의 균형을 이루어낸 인물이기도 하다. 굴원은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세력을 확장 중인 진나라를 견제하는 방책을 썼다. 이때 진나라의 장의가 나타난다. 장의는 초나라 회왕에게 땅을 바치겠다고 거짓말하여 초나라가 제나라와 관계를 끊게 만들었다. 뒤늦게 장의의 모략에 속아 넘어간 것을 안 회왕은 군대를 일으켜 진나라와 전쟁을 벌였으나 전세가 불리해졌다. 이때 국교가 단절된 제나라는 초나라를 못 본 척했다.

 

왕이 현명하지 않으니 복이 있나

 

진나라는 초나라와 화친을 맺으려 했으나 회왕은 농락당한 것이 분해 장의의 목숨을 원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장의는 자신이 희생하겠다면서 초나라로 들어갔다. 장의는 노회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회왕의 우유부단함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런 유형의 인간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는 초나라의 권력자인 근상에게 뇌물을 주고 당시 회왕의 사랑을 받던 정수를 통해 감언이설로 왕의 판단을 흐리게 했다. 덕분에 호랑이 굴 같았던 초나라에서 도망쳐 나올 수 있었다. 굴원은 왕에게 장의를 신속하게 처단할 것을 권했으나 이미 장의가 멀리 도망친 뒤였다.

 

굴원은 회왕의 진나라 공격을 반대하다가 추방됐다. 기원전 299년 진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던 회왕이 객사하고 경양왕이 즉위하여 진나라와 국교를 단절하자 굴원은 다시 정계로 돌아왔다. 그러나 초나라와 진나라 사이에 국교가 회복되면서 또다시 강남으로 추방되어, 동정호 남쪽에서 방황하다가 돌을 안고 멱라수에 투신 자결했다.

 

굴원은 진나라의 장의가 꾸민 합종연횡의 함정을 잘 알고 있어 제나라와 동맹하려 했다. 그러나 초나라-진나라 초나라-제나라의 동맹관계가 자주 바뀌면서 그의 정책은 실패했고, 그의 운명도 뒤바뀌었다. 사마천은 말한다.

 

그는 비록 내쫓긴 몸이지만 초나라를 그리워하고 회왕을 생각하며 항상 다시 조정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또한 군주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속세의 나쁜 풍습이 고쳐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군주를 생각하고 나라를 일으켜 약한 나라를 강한 나라로 탈바꿈시키려고(중략) 회왕은 충신과 충성스럽지 않은 신하를 구분할 줄 몰랐으므로 안으로는 정수에게 미혹됐고 밖으로는 장의에게 속았으며, 굴원을 멀리하고 상관대부와 영윤(令尹)인 자란을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군대는 꺾이고 군() 여섯 개를 잃어 땅은 줄었고, 진나라에서 객사하여 그 자신 천하의 웃음거리가 됐다. 이는 제대로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재앙이다. ‘역경에서 말하기를 우물물이 흐렸다가 맑아져도 마시지 않으니, 내 마음이 슬프구나. 이 물을 길어갈 수는 있다. 왕이 현명하면 모든 사람이 그 복을 받는다고 했다. 왕이 현명하지 않으니, 어찌 복이 있겠는가! ’

 

가시투성이 월계관

 

굴원은 왕이라는 절대자에게 자신을 던진 인물이다. 조정에서 멀리 떨어진 좌절한 정치인은 자신의 뜻을 펼칠 공간을 잃었다. 그가 현실에서 벗어나 신화의 세계를 노래하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절대적인 존재가 사라진 세상은 그에게 더는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 유행가 가사처럼 그리움만 쌓이는 것이다. 변방에서 왕이 부르기만을 기다리며 사미인곡을 지어 불렀다. 결국 정치인으로서의 좌절감이 그의 머리에 비극시인이란 월계관을 얹어 준 것이다. 월계관은 가시투성이였다.

 

님 그리워/ 눈물 글썽이며 하염없이 바라보노라./ 전해줄 사람 없고 길마저 끊겨/ 가슴에 맺힌 말 전할 길 없네/ 일편단심 애태우건만/ 수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니/ 아침마다 이 마음 펴 보이려 해도/ 답답한 이 마음 전할 길 없어라.//

 

어느 순간 이 그리움과 희망이 완전히 사라졌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님인 왕이 진나라에서 비참하게 객사한 순간, 굴원의 목숨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어부가는 더 이상 세상 살아갈 의미를 상실한 천재의 비참한 심경을 담고 있다. 굴원은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그린다. ‘강가에 이르러 머리를 풀어헤치고 물가를 거닐면서 읊조렸다. 그의 얼굴빛은 꾀죄죄하였고 모습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여위었다.’

 

신하는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을 위해 목숨을 버리고, 여인은 사랑하는 님을 위해 화장을 고친다. 굴원의 꾀죄죄한 얼굴빛과 마른 나뭇가지가 된 몸은 군주를 잃은 신하의 당연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굴원은 원망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깨인 자임을 알고 있었다. 이 심경을 시 회사로 지어 불렀다. 기세춘·신영복 선생이 번역한 중국 시선(詩選)을 보면 회사 돌을 안고 멱라수에 몸을 던지다라고 번역했다.

 

북망산에 당도하니/ 해는 뉘엿뉘엿 저무는구나/ 걱정도 기쁨도 슬픔도/ 모두 죽음으로 끝내리라.//

 

마지막 이르노라/ 원수와 상수는 호호 탕탕/ 두 갈래로 소리치며 흐르는데/ 나의 긴 여로는 가려 보이지 않고/ 바른 도리는 멀고 아득하구나//

 

미쁜 성품과 고운 마음씨/ 나는 짝 잃은 외톨이/ 백락은 이미 죽었으니/ 천리마를 누가 알아보랴//

 

사람의 삶은 누구나/ 각각 제 자리가 있는 법/ 바른 마음과 큰 뜻을 품었거늘/ 내 무엇을 두려워하랴//

 

이제 실망은 슬픔이 되어/ 길게 탄식하노니/ 혼탁한 세상 나를 알아줄 리 없고/ 인심이란 믿을 수 없는 것//

 

죽음을 물리칠 수 없음을 아노라/ 애석하게 생각지 마라/ 군자들이여 분명히 말하노니/ 장차 나를 본보기로 삼아라.//

 

굴원이 죽은 뒤로 초나라는 날로 국세가 기울어 수십년 뒤에는 결국 진나라에게 망하고 만다.

 

조선의 비극시인

 

사마천은 굴원이 멱라수에 몸을 던지고 100년이 지나서, 한나라의 가생을 이야기했다. 가생이 굴원의 뒤를 이은 중국인이라면, 조선에는 허난설헌이 있다. 나는 허난설헌에게서 굴원의 마음을 보았다.

 

조선시대 여성들은 이름을 가질 수 없었다. 이름을 가진다는 것은 자신을 남과 구분하는 행위인데, 난설헌은 난설헌이라는 당호말고도 초희라는 이름과 경번이라는 자()까지 가지고 자신의 모습을 지키며 살았다.’

 

허미자 선생은 허난설헌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로 허난설헌 연구서를 시작한다. 난설헌은 굴원이 맛본 좌절을 고스란히 품고 태어난 여인이었다. 난설헌의 조선은 어찌할 수 없는, 넘을 수 없는 좌절의 벽이었다. 여자는 글을 배워서 안 된다는 사대부의 세상에서 난설헌은 어깨 너머로 글을 익히고 배웠다.

 

조선의 여자로 태어난 딸의 재능을 안타까워하던 아버지 초당 허엽은 일찍이 영민한 딸의 불행을 짐작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자가 글을 읽으면 팔자가 세다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난설헌의 오빠인 하곡 허봉은 누이 난설헌으로 하여금 자신의 글벗인 손곡 이달에게 시를 배우게 했다. 그녀는 학문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당대 석학이던 아버지와 오빠들의 책을 모조리 읽고 외워 스스로 시세계의 지평을 넓혔다.

 

난설헌의 스승인 손곡 역시 좌절한 조선의 지식인이었다. 그의 울분은 서자로 태어난 신분에서 기인한다. 양반이 첩에게서 얻은 자식인 서자는 뛰어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널리 쓰이지 못했다. 그는 재능이 뛰어나서 한리학관(漢吏學官)이 되었지만,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일정한 곳에 머물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방탕하게 살았다고 한다. 이 손곡을 품어준 곳이 바로 난설헌의 집안이었다. 스승의 이러한 기질이 난설헌에게도 전해졌을 것이다.

 

좋은 집안에서 아버지와 오빠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공부하고 시를 짓던 난설헌의 불행은 안동 김씨 집안의 성립에게 시집을 가면서 시작됐다. 뛰어난 재능의 아내를 맞은 김성립은 어찌된 일인지 밖으로만 나도는 난봉꾼 같은 행태를 보였다. 사람들은 그가 아내의 뛰어난 재능에 질투를 느낀 것이라고 숙덕거렸다. 달콤한 신혼을 꿈꾸었을 젊은 난설헌에게는 한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제비는 처마 비스듬히/ 짝 지어 날고,/ 지는 꽃은 어지럽게/ 비단옷 위를 스치는구나/ 동방에서 기다리는 마음/ 사뭇 아프기만 한데/ 풀은 푸르러져도 강남에 가신 님은/ 여지껏 돌아오시질 않네.//

 

굴원이 변방에서 회왕의 부름을 기다리면서 님에 대한 그리움을 사미인곡으로 노래했다면, 난설헌은 못난 남편을 기다리며 시를 짓는다. 굴원의 님은 왕의 은유지만, 난설헌의 님은 직접적인 현실이다.

 

조선의 고질적인 고부갈등까지 겹치면서 난설헌의 몸과 마음이 병들기 시작하고, 아낌없이 사랑한 아들과 딸을 연이어 하늘나라로 보내야 하는 부모의 한까지 마음에 품으니, 난설헌의 일생이 28년으로 짧은 것을 건강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당대 명문장 집안에서 태어나 탁월한 재능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문집을 간행한 시인 허난설헌. 나는 그녀를 여성시인이라 부르지 못한다. 조선시대에 여성으로 태어나 가슴 깊이 한을 새겼을 시인을 훗날 다른 시인이 여성시인이라 부르면 안 될 일이다. 나는 그녀를 굴원의 대를 잇는 위대한 조선의 비극시인이라 부른다.

 

지상으로 귀향 온 선녀

 

그녀는 대선배 굴원처럼 신화, 신선의 세계를 노래한 시인이다. 중국 시인 주지번은 난설헌의 시집에 머리말을 쓰면서 그녀를 봉래섬을 떠나 인간세계로 우연히 귀향 온 선녀라고 소개하고, 그녀가 남긴 시들은 모두 아름다운 구슬이 됐다고 했다. 천재로 태어난 조선의 여인, 현실에 좌절하고 고통 받은 눈물은 난설헌 시의 구슬이 되었고, 당대 중국 선비들은 난설헌의 시집을 허리에 차고 다니며 읽었다고 한다.

 

난설헌의 시에는 신선과 꿈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현실에 대한 좌절과 분노가 터져 나와 꽃봉오리로 피어난 것이다. 이 꽃봉오리에 신선이 노닌다. 그것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다. 자신의 재능을 펼치지 못하는 울분의 마음이 지평을 넓힌 것이다.

 

어젯밤 꿈에 봉래산에 올라/ 갈파의 못에 잠긴 용의 등을 탔었네/ 신선들께선 푸른 구슬지팡이를 짚고서/ 부용봉에서 나를 정답게 맞아주셨네/ 발 아래로 아득히 동해물 굽어보니/ 술잔 속의 물처럼 조그맣게 보였어라/ 꽃 밑의 봉황새는 피리를 불고/ 달빛은 고요히 황금 물동이를 비추었어라.//

 

바닷속에 있는 신선의 산인 봉래산을 향해 용을 타고 신선의 나라로 가고 있는 난설헌의 모습이 잘 그려진다. 한 시절 나는 동양신화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이 신화의 세계야말로, 내가 궁극적으로 가야 할 고향임을 간절히 느낀 적이 있다. 그땐 삶이 무척 힘겨웠다. 인간관계에 대한 배신감, 재능 없음에 대한 한탄 등의 좌절감을 광활하고도 신비한 신화세계가 다 품어주었다. 밤하늘의 별자리만 천체 망원경으로 올려다보아도, 현실이라는 이 좁고 미어터진 세상에서 한발 떨어질 수 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치열한 삶을 살면서 현장에서 투쟁하고 정치적으로 건강하고 도덕적이어야 하는 것이 정도(正道)지만, 신선이나 신화세계를 통해 인간의 꿈자리를 넓게 펼쳐주는 것 역시 문학이 해야 할 일이 아니던가.

 

좌절한 정치인으로 비극시인이 되어 신화의 세계를 거닐었던 굴원이 살던 초나라, 그리고 허난설헌의 이름 초희, 허초희. 번역하면 초나라 계집이라는 뜻이니,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녀는 굴원의 한을 품고 태어난, 중국 시인의 은유처럼 선녀인지도 모를 일이다.

 

천상의 선녀는 잠시 지상에 내려와 쓴 시를 임종을 맞아 다 태워버렸지만, 여섯 살 아래 동생 허균은 천재적인 머리로 불우했던 천재 누나의 시를 외워 시집으로 엮어냈다. 동생 허균에 의해 편집돼 전해지는 시가 210편이다. 천재 허균은 보는 대로 외우는 비상한 머리를 가지고 있었고, 어려서 누이에게 시를 배웠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 그리고 이 시집을 중국으로 보낸다.

 

인생은 짧고, 글은 길다

 

허미자 선생은 말한다.

 

허균이 오명제와 주지번을 통해 중국에 보낸 허난설헌의 시집은 여러 사람을 통해 여러 차례 간행됐다. 조선에서 문집을 간행할 때는 대부분 집안에서 비용을 내어 주위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주지만, 중국에서는 그의 문집을 무상으로 간행해 나눠줄 만한 후원인이 없었기에 자연히 상업성을 띠게 되었다. 난설헌의 시가 뛰어났기 때문에 문인이나 출판업자들이 자금을 마련해 간행하고 판매하는 식이다. 물론 문인이 엮은 역대 선집이나 여러 시인의 선집에 실리는 경우도 있었는데, 두 가지 경우 모두 난설헌의 시가 뛰어났기 때문에 가능했다. 중국에서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는 자체가 국제적인 수준에 올랐음을 입증하는데, 이처럼 조선인의 시집이 중국에서 제대로 간행된 것은 난설헌이 처음이었다.’

 

조선에 비해 중국은 여성에 대한 편견이 그리 심하지 않았다. 이미 전당시(全唐詩)’에 실린 여성 시인이 109명이나 된다고 한다. 난설헌의 시는 중국에서 몇백 년에 걸쳐 여러 차례 출판되었고, 일본에서도 분다이야 지로베이에 의해 난설헌집이 출판돼 목판본이나 필사본으로 퍼졌다. 동아시아 3국에서 그의 시가 읽혔으니, 난설헌은 국제적인 시인이나 다름없었다.

 

현실에 좌절한 사람은 굴원을 좋아한다. 굴원은 정치인으로서 조정에 나가 뜻을 펼치고 싶었다. 현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은 탓에 지금껏 위대한 비극시인으로 남은 것이다. 그가 만약 초나라의 정치인으로 활동했다면 이처럼 이름이 빛날 수 있었을까?

 

다산 정약용 역시 위대한 군주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신하다. 22세 나이에 정조 7년부터 시작된 그의 관직생활은 정조가 세상을 떠나는 날, 39세까지 이어진다. 이후 17년간의 유배생활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다산은 굴원처럼 생을 마감하지 않았다. 그는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백성을 위한 정치인으로 일생을 살았다. 다산은 한 사람만이라도 이 책의 값어치를 알아주는 것으로 족하다는 심경으로 지난한 세월을 견뎠다. 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도 목민심서를 머리맡에 두고 읽었다고 한다.

 

정약용은 그 세월을 견뎠고, 굴원은 그 세상을 버렸다. 우리는 어떤 생을 살아야 할 것인가? 쉽게 답하기 어렵다. 굴원 역시 위대한 작품을 남겼기 때문이다. 긴 역사의 눈으로 보면 인간의 생이란 얼마나 짧은가. 굴원의 생이나 다산의 생이나 허난설헌의 생 모두 한순간이다. 그 한순간이 남긴 것이 시집이요, 저작물이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 홀가분

 

현실의 좌절을 딛고 위대한 작품을 쓴 굴원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더러운 세상으로 보았다. 마지막 시 어부사는 그런 심경을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굴원이 말하길/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을 털고/ 목욕을 한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턴다오/ 어찌 결백한 몸으로/ 더러운 것을 받아들이리요/ 차라리 강물에 뛰어들어/ 물고기 밥이 될지언정/ 백옥같이 고결한 몸에/ 어찌 속세의 티끌을 묻힌단 말이오./

 

어부사의 마지막 구절은 그렇게 떠난 후로는 그 어부를 다시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어부를 지금도 계속해서 다른 모습으로 만난다. 사마천은 굴원 가생 열전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내가 이소’ ‘천문’ ‘초혼’ ‘애영을 읽어보니 그 내용이 슬펐다. 장사에 가서 굴원이 빠져 죽은 연못을 바라보고 일찍이 눈물을 떨구며 그의 사람 됨됨이를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가생이 굴원을 조문한 작품을 읽었는데, 굴원이 그만한 재능을 가지고 다른 제후에게 유세하였더라면, 어느 나라인들 받아들이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그 스스로 이렇게 생을 마쳤구나. 그러나 복조부를 읽어보니 그는 삶과 죽음을 하나로 보고,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을 가볍게 여겼으니, 나는 마음에 깨달은 바 있어 상쾌해지며 스스로 잘못 살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굴원을 두고 현실도피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현실에의 좌절감과 분통함을 잊기 위해 신화세계를 노래하고, 난국의 더러운 것을 싫어하여 고결하게 죽겠다는 그의 선택에 대해 사마천은 이렇게 평했다. 삶과 죽음을 하나로 보고, 출가와 출세의 길을 가볍게 여겼으니 자신은 마음에 깨달은 바가 있어 상쾌하다고.

 

현대 인물 중에서는 굴원의 맥을 이을만한 이를 찾을 수가 없다. 이미 신화의 자리에 자본이 들어앉았고, 그리움 대신에 순간적인 쾌락이, 위대한 자결이 아닌 우울증에 시달리는 소심한 자결이 만연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변한다. 굴원이 당초 꿈꾸었던 삶이 좌절된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은 무엇일까? 섬진강 위에 배를 띄워놓고 있는 저 어부에게 물어볼까? 다시 박경리 선생의 시를 읽는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 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7. 백기 왕전 열전

 

 

인명살상 담보로 한 명장의 탄생에 하늘이 진노하니

 

 

 

어떤 명분을 내걸더라도 전쟁은 비극이다. 승리하고 돌아온 군인들의 뇌리엔 부정할 수 없는 살인의 기억이 남아있고, 그들이 떠나온 자리엔 죽음과 파괴의 참상이 남아있게 마련이다. 사마천은 진나라의 두 장군 백기와 왕전의 삶을 통해 폭력의 허무와 그 처절한 악순환을 이야기한다.

 

인간은 지구에서 진화한 존재가 아니라, 미친 별에서 온 다른 생명체가 아닐까, 자신들이 살았던 별을 핵전쟁으로 날려버린 뒤 우주선을 타고 지구로 날아온 외계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전쟁 때문에 그렇다. 파괴와 죽음의 전쟁이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생존방식으로 유지되어온 것은 아이러니다. 지구에 사는 어떤 생명체가 무기를 만들고, 생존과 별개의 이유로 살상하는가? 과학자들이 은유적으로 식물이나 동물의 세계를 전쟁에 비유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의 관점에서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다. 자연계의 움직임은 전혀 인간적이지 않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전쟁은 계속 이어져왔다. 인간은 전쟁이라는 바다에 떠있는 섬과 같은 존재다. 전쟁은 그 자체로 지적인 생명체처럼 움직인다. 마치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듯, 전쟁은 죽음을 탄생시켰다. 인생이 삶과 죽음이라는 윤회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그 시간에 전쟁도 함께 살아가고 있다. 국가 간 전쟁은 위대한 장군을 탄생시킨다. 소나무, 민들레, 토끼, 호랑이, 고래와 구별되는 인간이라는 참으로 특이한 존재, 전쟁하는 인간 중에 군인이 존재한다. 그중 우두머리를 장군이라 부르고 어깨에 별을 달아준다. 전쟁이 평화를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 군인이다. 파괴만을 위해 도발하는 군주나 장군은 없을 것이다.

 

히틀러나 무솔리니 같은 전쟁 인간이 다시 태어날 것이다. 역사상 최악의 살인범인 이들 역시 자국의 평화를 위해 거대한 전쟁을 일으켰다. 김일성의 남침도 조국통일이라는 대의명분이 있었다. 전쟁터에서의 승리는 잠시 평화를 가져올지 모르나, 그 악순환은 영원히 계속된다. 전쟁은 불교에서 말하는 무간지옥이다. 강자와 약자의 공격과 방어는 어느 순간 처지가 바뀐다. 전쟁에 대한 문장 중에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는 반전(反戰)에 대한 낭만적인 해석이다.

 

한쪽에서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이 어디선가 그 틈을 이용해 신무기로 무장한 폭력을 준비하는 세력이 있다. 한동안 평화적인 분위기를 즐겼던 우리나라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 전쟁에 대한 공포가 먹구름처럼 전국을 감돌고 있다. 전쟁은 당신이 어떤 상상을 하든 그 이상이라는 광고 문구에 걸맞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폭력, 비참, 우울, 죽음, 모멸, 파괴 등이 그 이상으로 눈앞에서 작렬한다.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는 전쟁이 마치 컴퓨터 게임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전쟁의 폭력성은 인간성이 얼마나 깊이 추락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잔혹한 공포 그 자체다.

 

전설적인 장군의 잔인한 기록

 

사마천은 전쟁에 의한, 폭력에 의한 정치를 반대했다. 그의 눈에 역사적인 전투와 위대한 장군의 탄생은 수많은 죽음을 담보로 했다. 광활한 대륙 중국의 역사 또한 전쟁으로 점철됐다. 주로 영토 전쟁이었다. 하늘의 뜻을 받들어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수많은 왕과 제후, 장군과 군사들이 피를 흘렸다. 고대 요순시절이 지나자마자 춘추전국시대, 삼국시대로부터 마오쩌둥의 대장정에 이르기까지 영토 싸움에 수많은 인명이 억울한 죽음을 맞았다. 역사 이전 시대, 즉 신화시대에도 황제와 치우로 상징되는 전쟁 신화가 있었다. 사마천 역시 흉노를 정벌하러 떠났다가 포로가 된 이릉 장군을 변호하다 궁형을 당했으니 전쟁 피해자이다. 사마천은 사기열전에서 진나라의 두 장군을 통해 폭력의 허무함과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단순한 인과응보의 이치를 강조한다.

 

사기열전에는 백기와 왕전 두 장군이 등장한다. 진나라의 백기와 왕전은 말 그대로 전설적인 장군들이다. 내 생각에 역대 중국 최고의 장수로 꼽히는 항우는 제왕을 꿈꾸다 좌절한 비운의 야심가다. 반면 백기와 왕전은 오로지 군주에게 충성하는 군인의 삶을 살았다. 진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는 데 이들의 공이 컸다.

 

전국시대 진나라 장군 백기는 공손기라고도 불린다. 진나라 소왕 때 대량조라는 큰 벼슬까지 한 전쟁영웅이다. 사마천은 그의 군사적 업적을 이렇게 기록한다.

 

백기는 병사를 다루는 데 뛰어났으며 진나라 소왕을 섬겼다. 소왕 13, 백기는 좌서장이 되어 군대를 이끌고 한나라 신성을 공격했다. (중략) 그 이듬해 백기는 좌경에 올라 한나라와 위나라를 이궐에서 공격해 24만명의 목을 베고, 적의 장수 공손희를 사로잡았으며, 다섯 성을 함락시켰다. 백기는 국위로 승진돼 황하를 건너 한나라 안읍에서 간하에 이르는 땅을 함락시켰다. 이듬해 백기는 대량조에 올랐고, 위나라를 쳐서 크고 작은 성 61개를 차지했다. 그 이듬해 초나라를 공격해 언과 등 다섯 성을 차지했다. 그 뒤 초나라를 공격해 영을 점령하고 이릉을 불살랐으며, 마침내 동쪽으로 경릉에 이르렀다.”

 

백기는 불패의 군대를 이끌고 전국시대, 한나라 초나라 위나라 등 이웃 나라를 휩쓸었다. 이웃 나라들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 소왕 13년에 출정한 그의 전쟁 이력은 30년 넘게 이어진다.

 

소왕 34, 백기는 위나라를 공격해 화양을 함락시키고, 적장 망묘를 달아나게 했으며, 삼진의 장군들을 사로잡고 적병 13만명의 목을 베었다. 초나라 장군 가언과 싸워 그의 군사 2만명을 황하에 빠뜨려 죽였다. 소왕 43년에 백기는 한나라 형성을 쳐 다섯 성을 점령하고, 5만명의 목을 베었다.”

 

백기가 적군의 목을 베었다는 대목엔 24, 13만 등의 목숨이 숫자로 기록돼있다. 심지어 2만명을 강물에 빠뜨려 죽이기도 한다. 이러한 폭력성은 진나라 영토 확장에 이은 시황제 천하통일의 디딤돌이다. 전쟁에서 한 살인은 전쟁영웅의 명성과 후광에 가리어진다. 살인을 살인이라 하지 않는다.

 

전쟁 승리, 하늘엔 죄

 

중국대륙이 여러 나라로 갈라져 세력 다툼을 할 당시 전쟁은 잔혹했다. 살상당한 군인의 육체는 숫자로 셀 수 있을망정, 그 영혼의 무게는 감당하기 힘들다. 한 사람의 죽음은 그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다. 그의 가족과 친구들까지 생각한다면 그토록 많은 인명을 살상한 장군의 이름이 아름답기만 할까? 나는 그 이름에서 피비린내를 맡는다.

 

춘추시대에 공자가 군주의 인()과 덕()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이상을 펼치려 한 모든 노력이 이러한 폭력 앞에서 좌절된다. 군주의 뜻과 장군의 칼이 만나면 선비의 인과 덕은 무너져 내린다. 군대의 지휘권을 가진 장군은 군주에게 자신의 권력을 노리는 가장 위험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뛰어난 군주는 뛰어난 장수를 토사구팽(兎死狗烹)한다. 사나운 사냥개로 부려먹다 적당한 때가 되면 내치는 일은 고금을 막론하고 비일비재하다. 적군을 사납게 물어버리는 사냥개가 언젠가 자신을 물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결코 나눠 갖고 싶지 않은 권력의 속성이 제왕으로 하여금 장수를 토사구팽하도록 만든다.

 

우리 민족의 영웅인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두고도 여러 이론이 있다. 선조가 자신을 정치적 적으로 의심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는 추측이 있는가 하면, 전사한 것처럼 위장하고 여생을 숨어 살았다는 얘기도 나돈다. 이런 추측들은 사기열전에 나오는 백기의 최후가 그 시발점이 됐다고 봐도 된다. 백기 이후 뛰어난 장군들은 비슷한 운명의 길을 걸었다.

 

백기의 뛰어난 전술이 돋보인 전투가 있다. 소왕 26년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할 때, 한나라의 상당이라는 곳에 사는 백성들이 진나라의 군사를 두려워하여 조나라로 피신한다. 조나라는 진나라를 치고 상당의 백성들을 보호해주었다. 조나라를 공략하기 위해 진나라가 다시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지만, 조나라의 염파 장군이 누벽을 쌓고 대적한다.

 

조나라의 염파는 진나라의 거센 공세를 지연전으로 이끄는 전술을 펼친다. 이때 훗날 백기의 정치적 라이벌이 되는 진나라 재상 응후가 조나라에 사람을 보내 이간책을 쓴다. 진나라의 간계에 넘어간 조나라 조정은 염파 대신에 성격이 급한 조괄을 장군으로 임명한다. 진나라는 다시 백기를 대장군으로, 왕홀을 부장으로 하는 군대를 편성해 조나라를 공격한다. 조나라의 조괄은 성급하게 군대를 이끌고 나왔다가 백기에게 대패한다. 이때의 정황은 끔찍하다. 사마천은 이렇게 기록했다.

 

“9월이 되자, 조나라 군대가 식량을 보급받지 못한 지 46일이나 됐다. 내부에서는 서로 죽여 살을 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조나라 군대는 탈출하려고 네 개 부대를 만들어 진나라의 보루를 네댓 번 공격했지만, 포위망을 벗어날 수 없었다. 장군 조괄은 직접 정예군을 이끌고 맨 앞에 나가 싸웠으나 진나라 군대가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 마침내 조괄의 군사가 패배하니 병졸 40만명이 무안군(백기)에게 항복했다. 무안군은 이렇게 말했다. ‘이전에 진나라가 상당을 점령한 일이 있었는데, 상당의 백성들은 진나라로 귀속되는 것을 싫어하여 조나라로 돌아갔다. 조나라 병사들은 마음을 잘 바꾸기 때문에 모두 죽여버리지 않으면 뒤에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백기는 사람들을 (항복한 병사들을 잠시) 속여 모조리 산 채로 땅속에 묻어 죽이고, 남겨진 어린아이 240명만 조나라로 돌려보냈다. 머리를 베인 자와 포로가 된 자는 이때를 전후로 45만명이나 됐다. 조나라 사람들은 두려워 벌벌 떨었다.”

 

세 치 혀가 화근

 

40만 인명을 생매장한 이 끔찍한 전투의 후일담을 적으면서 사마천은, 백기가 하늘에 죄를 지었다고 생각한다. 하늘에 죄를 지으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백기의 출세가도를 질투하는 재상 응후가 불화살처럼 날아가는 백기의 군대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그는 왕에게 진나라 군사는 잦은 전쟁으로 지쳤으니 화친을 맺어 군사를 잠시 쉬게 하라고 간언했다. 왕이 응후의 말을 받아들임에 따라 백기는 칼을 잠시 손에서 놓는다. 재상 응후와는 이 일로 사이가 벌어진다. 그 벌어진 틈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스민다.

 

진나라는 다시 조나라 한단을 공격했다. 이때 병든 백기는 전쟁에 나갈 수 없었다. 진나라 왕릉 장군이 이끄는 군대는 장수 다섯을 잃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 사이 백기가 병에서 회복하자 왕은 왕릉 대신에 백기를 장군으로 삼으려 한다. 하지만 백기는 여러 불리한 정황을 들어 한단을 공격하지 말 것을 청한다.

 

백기는 군대의 진퇴, 즉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명장이었다. 하지만 정복욕에 눈이 먼 왕은 백기에게 계속 출전 명령을 내렸다. 백기는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 말하고, 일부러 병이 든 척하면서 왕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결국 백기의 예상대로 진나라는 수많은 전사자를 내고 대패했다.

 

이때 백기가 말실수를 한다. 세 치 혀에서 나온 한 마디의 말에 진나라 영웅이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선다. “왕이 내 말을 듣지 않은 결과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왕이 이 말을 듣고 진노한 것은 당연하다. 이 말은 최고 권위에 대한 도전이다. 백기는 전쟁 영웅일지 모르나, 정치인은 아니었다.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법은 알고 있었지만, 인생을 잘 살아가는 법은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워낙 뛰어난 장수인지라, 왕은 모멸감을 느끼면서도 백기를 다시 한 번 전쟁에 내보내려 했다. 하지만 백기는 병이 위독하다는 핑계를 대고 명을 받들지 않았다. 왕은 더 참지 못하고 백기의 모든 관직을 박탈하고 병졸로 만들어버렸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4성장군을이등병으로 강등한 것이다.

 

조나라의 공세에 진나라는 위급한 상황에 처했다. 이때 백기의 라이벌이던 재상 응후와 다른 신하들이 나라가 위급한 데도 장수의 임무를 다하지 않은 백기를 탄핵했다. 왕은 곧 사자에게 칼을 쥐어주고 백기에게 보냈다. 왕이 내린 칼로 자신의 목을 찌르기 전 백기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나는 죽어 마땅하다. 장평 싸움에서 항복한 조나라 군사 수십만명을 속여 모두 산 채로 땅에 묻었으니 이것만으로도 죽어 마땅하다.”

 

그는 이렇게 스스로 장수의 삶을 마감했다. 백기의 죽음은 하늘이 내린 것이라기보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백기는 왕의 권위에 도전했다. 이것은 삶의 전쟁터에서 죽는 길이다. 설령 백기가 수백만명을 죽였다 하더라도 그런 이유로 왕에게 죽임을 당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큰 상을 받았을 것이다.

 

백기의 이러한 모습은 훗날 토사구팽이라는 한자성어를 만들어낸 한신의 죽음과도 연결된다. 한신은 항우와 유방, 두 왕을 섬겼지만, 유방이 자신을 인정하자 항우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한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한신은 초왕(楚王)에 봉해져 권력을 잡았으나, 결국 유방에 의해 처단된다. 이러한 권력의 속성을 잘 알고 있던 유방의 참모 장량은 정치에 관여할 생각이 없으며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 속세를 떠난다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그가 신선이 되어 물만 먹고 살다 갔다는 전설로 남았다. 한나라의 뛰어난 영웅이었던 두 사람이 살아간 방법은 사뭇 달랐다.

 

적군보다 더 무서운 왕

 

선배 장군인 백기의 이러한 사정을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나, 왕전의 경우 왕에 대한 처신이 달랐다. 진나라 시황제라는 무시무시한 권력자 밑에서 그는 백기와 같은 공을 세우고도 천수를 다하고 죽었다. 그는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그것도 진나라 소왕보다 수십배는 강력한 권력자인 시황제 밑에서 말이다. 왕전에 대해 사마천은 이렇게 쓴다.

 

왕전은 빈양 동향 사람이다. 젊어서부터 병법을 좋아해 진나라 시황제를 섬겼다. 시황제 11년에 왕전은 장군이 되어 조나라 연여를 무찌르고 성 아홉 개를 함락시켰다. 18, 왕전은 장군이 되어 1년 남짓 싸움 끝에 조나라를 깨뜨려 조나라 왕을 항복시키고, 조나라 땅을 모두 평정해 진나라의 군으로 만들어버렸다. 그해 연나라가 형가를 보내 진나라 왕을 찔러 죽이려 했다. 진나라 왕은 왕전에게 연나라를 공격하도록 했다. 연나라 왕 희는 요동으로 달아났고, 왕전은 연나라 수도 계를 평정하고 돌아왔다.”

 

진나라가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제국을 세우는 데 왕전은 혁혁한 공을 세웠다. 새로운 제국이 건설되면 참으로 아이러니하게 왕은 자신을 도와준 가까운 인물들을 정리하는 속성이 있다. 왕전이 늙은 장수라면 당시 떠오르는 신예 장수 이신이 있었다. 진시황은 두 장군에게 초나라를 공략하는 데 군사가 얼마나 필요하냐고 물었다. 이신은 20만명, 왕전은 60만명이 필요하다고 했다. 왕은 경제적인 전망을 내놓은 이신을 발탁했다. 이신은 초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떠나고, 왕전은 자신의 뜻이 좌절되자 병을 핑계로 숨어 살았다. 왕전의 예견대로 이신은 대패했다. 다급해진 진나라 시황제는 버선발로 왕전에게 뛰어갔다. 두 사람의 대화가 재미있다. 왕전은 백기와 달리 삶의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법을 아는 장군이었다. 사마천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내가 장군의 계책을 쓰지 않아 결국 이신이 진나라 군대의 명예를 떨어뜨렸소. 들리는 말로는 지금 형나라 병사가 날마다 서쪽으로 쳐들어온다고 하니, 장군이 병이 들었다고 하나 어찌 나를 저버릴 수 있겠소?”

 

노신은 병들고 지쳐 정신마저 어둡습니다. 왕께서는 다른 어진 장군을 택하십시오.”

 

그만두시오. 장군은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마시오.”

 

왕께서 어쩔 수 없이 저를 꼭 쓰셔야 한다면 군사 60만명이 필요합니다.”

 

장군의 계책에 따르겠소.”

 

결국 왕전은 병사 60만명을 이끄는 장수가 됐다. 시황제는 몸소 왕전을 전송했다. 왕전은 가는 도중에 훌륭한 논밭과 택지, 정원과 연못을 내려달라고 거듭 요청했다. 그러자 시황제가 말했다. “장군은 빨리 떠나시오. 어찌 가난 따위를 걱정하시오?” 이에 왕전이 대답했다. “왕의 장군이 되어 공이 있었어도 끝내 후()로 봉해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왕의 관심이 저에게 쏠려 있을 때 정원과 연못을 부탁드려 자손들의 재산을 만들어두려는 것뿐입니다.” 시황제는 크게 웃고 말았다.

 

시황제가 크게 웃었다는 것은 뛰어난 장군에 대한 경계심을 풀었다는 얘기다. 왕전은 시황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포악하고 다른 사람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을 믿고 대군을 맡겼다. 이때 권력에 아무런 뜻이 없다는 걸 각인시키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 왕전에겐 이런 계산이 있었던 것이다. 적군보다 더 무서운 적이 바로 왕이었다. 왕전은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권력에 눈이 머는 것을 경계하고 삶을 바라보는 눈을 물고기처럼 뜨고 있었다.

 

그들에겐 단점이 있었으니

 

뛰어난 장수로서 적을 대적하는 것보다 군주를 모시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다. 그는 전쟁터에서도 다섯 차례나 사람을 보내 재산을 요구했다. 자신은 재산이나 조금 있으면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갈 사람이라는 것을 계속 확인시켜준 것이다. 이런 그를 지켜보던 이가 대장군으로 너무 심하게 요청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채신머리없이 무슨 짓이냐는 얘기였을 터. 왕전은 그 사람에게 이렇게 본심을 털어놓았다. “내가 자손을 위한 재산을 만들려고 많은 논밭과 정원과 연못을 요청함으로써 다른 뜻이 없음을 보여 스스로 안전하게 하지 않으면 진나라 왕은 가만히 앉아 나를 의심할 것이오.”

 

왕전은 이신을 대신해 형나라를 공격한다. 왕전의 전략대로 전쟁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왕전은 형나라를 정복해 왕 부추를 사로잡았다. 이를 발판으로 남쪽 백월의 군주도 정복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왕분이 이신과 함께 연나라와 제나라 땅을 평정했다.

 

진시황에게 자신은 권력에 대해서 아무런 뜻이 없음을 확인시킨 덕분에 왕전은 편안한 말년을 보내고 천수를 다한다. 진시황은 재위 26년에 중국을 통일했다. 이때 왕전과 그의 아들의 공로가 단연 돋보였다. 왕전 부자의 명성은 후세까지 계속됐다. 그러나 왕전 역시 3대에 가서는 항우의 손에 사로잡힌다. 왕전 당대에는 죽음을 면했으나, 3대에 가서는 하늘의 벌을 받았다. 평화주의자 사마천은 두 장군을 이렇게 평가한다.

 

세속의 말에 ()에도 짧은 데가 있고, ()에도 긴 데가 있다는 말이 있다. 백기는 적의 전력을 헤아려 기민하게 대응하고 기이한 계책을 생각해내는 데 끝이 없었으므로 천하에 명성을 떨쳤지만, 응후와의 사이에서 생긴 우환은 없애지 못했다.

 

왕전은 진나라 장군이 되어 여섯 나라를 평정했다. 당시 왕전은 노련한 장수가 되어 시황제조차 그를 스승으로 받들게 했다. 그러나 진나라를 보필해서 천하의 근본(인의를 베푸는 것)을 튼튼하게 하지는 못하고, 그럭저럭 시황제에게 아첨하여 편하게 있을 곳을 구하다 늙어서 죽음에 이르렀다. 손자 왕이가 항우에게 사로잡힌 것 또한 마땅하지 않은가. 그들에게는 각기 단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단점이란 전쟁에서의 살상이다. 전쟁터에서 비록 명성을 날렸지만 그로 인해 불우해진다는 것이다. 이는 긴 안목으로 역사를 보고 평가할 때 얘기다. 지금 당장 국가가 위기에 처했는데, 훗날의 안위를 걱정할 수는 없다. 하늘이 무서워 전쟁을 피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전쟁은 대화와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무력을 동원하는 것이다.

 

한국의 장군들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 동상을 보면서 우리나라가 위대한 장군을 모시는 마음을 생각하곤 했다. ‘세계 해전사에서도 이순신 장군의 위치는 독보적이다. 임진왜란에서 패배한 일본은 그때 이순신 장군에게서 배운 학의진 전법으로 제국주의 시대에 러시아 발틱 함대를 격퇴한다. 당시 도고 헤이하치로 일본 함대 제독은 승리를 축하하는 기자들에게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나를 넬슨 제독과 비교한다면 그것은 받아들이겠소. 하지만 조선의 이순신 장군과 비교한다면 거절하겠소. 나는 그분의 부사관 노릇을 할 만한 능력도 없는 자입니다.”

 

우리나라는 이순신 장군을 필두로 을지문덕 연개소문 김유신 계백 온달 장보고 강감찬 남이 원균 임경업 등 시대별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장군들이 줄지어 있다. 그들의 이름만으로도 책 한 권은 족히 채울 것이다. 우리나라는 대륙과 일본 사이에 있는 지정학적인 특징 때문에 외침이 잦았다. 외세의 침략에 대항한 승전 기록은 민족의 자부심으로 남아있다. 임진왜란, 즉 일본과의 전쟁에서 절대적인 전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전략과 전술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다. 임진왜란은 우리 민족의 강인함과 지혜로움을 잘 보여준 전쟁이다.

 

임진왜란의 영웅인 이순신 장군의 전투는 나라를 지키기 위한 전투였다. 왜군을 물리치기 위한 수비형 전투였다. 반면,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은 전형적인 공격형 전투를 감행했다. 광개토대왕의 기상은 우리 민족의 기상을 호랑이로 이미지화한다. 왕이라기보다 장수의 이미지가 더 강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광개토대왕이 활동했던 고구려 지도를 살펴보면 당대 동북아시아의 주도권을 쥔 한민족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북으로 진출해 요동지역을 확보함으로써 만주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고구려 멸망 이후, 다시는 이러한 전투를 볼 수 없다. 영토 확장에 대한 부분을 제외하고, 광개토대왕을 왕전이나 백기와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조선에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면, 일제강점기에는 김좌진 장군이 있었다. 청산리 전투로 유명한 백야 김좌진은 1930년 북만주 산시역 부근 정미소에서 박상실이 쏜 흉탄에 맞아 쓰러졌다. 일제강점기에 호랑이처럼 군사를 움직였던 김좌진 장군은, 허무하게도 이념의 희생양으로 공산주의자 손에 유명을 달리했다. 이 또한 권력 다툼이 아닐 수 없다.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는 이념적으로 혼란스러웠다. 독립운동 권력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이념의 아수라장 속에서 일제가 아닌 독립운동 세력에 의해 김좌진 장군이 어처구니없게 죽임을 당했다. 이 흉탄이 6·25전쟁의 예고였는지도 모른다.

 

생매장에서 핵폭탄까지

 

6·25전쟁에서 맥아더 장군은 5000분의 1이라는 낮은 확률을 무시하고 인천상륙작전을 감행, 역사상 최고의 군사작전 중 하나를 성공시킨 인물로 꼽힌다. 윌리엄 맨체스터가 쓴 맥아더 평전을 보면 당시 맥아더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장군은 여러분의 이번 작전 실현불가능성에 관한 주장이 계획에 대한 내 믿음을 재확인시켜주었다는 말로 시작했다. ‘왜냐하면 적의 지휘관 역시 그런 시도를 할 정도로 무모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이론적 판단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의 허를 찌르는 것이야말로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소입니다고 그는 말했다. (중략)

 

상륙작전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도구입니다고 그가 말했다. 그 작전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우리는 적을 강력히 그리고 깊숙이 쳐야 합니다. 인천에 장벽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극복하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나는 해군에 대해 완벽한 신뢰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나의 해군에 대한 신뢰는 해군의 스스로에 대한 신뢰보다도 더 큽니다고 그가 말했다.”

 

인천 상륙작전의 최종결과는 아군 536명 전사, 2550명 부상, 65명 실종이었다. 비교적 작은 희생을 치르고, 인민군 방어병력 총 3~4만명을 제압한 대단한 승리였다. 맥아더는 이 작전을 군사학이 연구되는 한 오랫동안 기억될 하나의 고전이라며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6·25전쟁은 인천상륙작전을 기점으로 전세가 역전됐다. 그러나 당시 트루먼 미국 대통령과 맥아더 사이에 이견이 생기고 중공군 참전으로 전황이 불리해지자, 만주지역 중공군 기지를 폭격해야 한다는 맥아더의 주장을 워싱턴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트루먼 대통령은 결국 맥아더를 해임한다. 맥아더는 1951 419일 양원합동회의 고별 연설에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갈 뿐이다란 명언을 남긴다.

 

중국이 개입하자 맥아더는 핵폭탄을 사용해 전쟁을 마무리지으려고 했다. 2차 세계대전을 막 끝내고 한숨 돌리고 있는 미국과 영국이 또다시 국제전의 위험을 감수할 리 없었다. 맥아더가 이끄는 유엔군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파견된 군대였다. 맥아더의 위험한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결국 노병 맥아더는 최고 권력자에 의해 군인의 길을 떠나게 된다. 그의 전쟁관에 대해서는 국내에서도 평가가 엇갈린다.

 

핵폭탄은 진나라 백기가 40만명의 인명을 생매장 한 것의 수백배에 달하는 살상 위력을 지닌다. 번쩍 하는 한순간에 말이다. 사마천의 관점에서 이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며, 하늘이 결코 용서하지 않을 일이다.

 

인간의 무한한 파괴력

 

사마천은 진나라의 위대한 두 장군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덕과 인으로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고 믿는 선비의 관점에서 전쟁은 최후의 선택일 것이다. 그 전쟁을 이끈 장군에 대한 평가는 자국의 처지에서만 선을 분명하게 그을 수 있다. 아무리 위대한 장군이라도 내 나라를 침략한다면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는 일이다. 타국의 위대한 장군이 내 나라엔 가장 악랄한 군대일 수 있다. 다람쥐 쳇바퀴이고, 불교의 업보다. 그래서 폭력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하다는 명제가 성립된다.

 

이 폭력의 속성은 모리스 블랑쇼의 인간은 파괴될 수 없는 것이다라는 문장에서도 잘 드러난다. 블랑쇼의 이 문장은 역설적이다. 인간이 파괴될 수 없다는 말은, 폭력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 평화에 대한 의지, 신성함과 같은 것이 파괴될 수 없다는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블랑쇼에 따르면 이 문장은 인간을 파괴하는 폭력에는 한계가 없음을 의미한다. 백기의 40만명 생매장에서부터 6·25전쟁 희생자들, 아우슈비츠의 생지옥 등 날이 갈수록 더 악랄해지는 폭력의 살 떨림을 전하는 문장이다. 과연 그렇다. 고대 진나라의 전쟁이 한 장군의 지휘 아래 칼로 베고 생매장하는 단순한 폭력이었다면, 이제는 핵폭탄이라는 엄청난 규모의 폭력으로 수백만명 이상이 단숨에 사라지는 시대인 것이다.

 

인간의 파괴엔 한계가 없다는 이 무서운 문장은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북 정책이 급변하는 이상하고 요상한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 아직까지 분단 상황 속에서 허구한 날 전쟁의 위기감을 고조시키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폭력과 전쟁의 그림자는 여전히 깊고도 넓다.

 

사마천의 백기 왕전 열전을 읽으면서 나는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법을 다시 생각한다. 낭만적이고 유아적인 생각은 인간이 평화를 진정으로 사랑해서 전쟁을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고대로부터 지금까지의 역사를 보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게 비극적이지만 현실적인 결론이다. 그럼 그 시대에 살아남은 법은 무엇인가? 사마천처럼 하늘을 두려워하고, 어떤 장군이든 대량 살상을 한 자는 벌을 받는다는 고대의 문장이 지금까지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반드시 전쟁이 나지 않더라도, 현재 다니고 있는 직장이 전쟁터 같다면 당신은 어떻게 행동하겠는가? 백기처럼? 왕전처럼? 아니면 이순신처럼? 맥아더처럼?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세상, 이 전쟁터와 같은 세상에서 사마천의 지혜를 배우기 바란다.

 

 

 

 

 

8. 편작 창공 열전

 

 

 

환자에 대한 긍휼, 시대를 초월한 명의의 조건

 

 

 

의사는 부와 명예를 보장하는 직업으로 손꼽히지만, 의사라고 다 같은 대우를 받는 건 아니다. 환자와 보호자는 명의 앞에 머리를 조아리지만, 실력 없는 의사는 범죄자보다 더 멸시한다. ‘사기열전에 등장하는 편작과 창공은 천재적인 의술로 이름을 떨쳤다. 그들의 유명세 뒤엔 의술보다 더 값진 비법이 있었으니, 우리나라의 허준과 장기려 박사도 이를 실천했다.

 

 

 

우리 집에서는 간혹 딸아이가 체하면 아내가 소독한 바늘로 아이의 손가락 끝을 톡 떠준다. ‘아얏 하며 아이가 엄살을 부리고 바늘로 뜬 자리에 검은 피가 몇 방울 맺히면, 아이의 체기가 내려간다.

 

영화 마더를 보면 김혜자씨가 연기한 엄마 수지침을 놓아 푼돈을 번다. 비록 불법 유사 의료행위지만 오랫동안 가깝게 지낸 동네 사람들은 엄마의 수지침 효과를 신뢰한다. 가벼운 병치레로 병원에 갈 형편도 안 되는데다, ‘엄마의 솜씨가 좋고 비용도 저렴하니 동네 사람들은 몰래 소매를 걷고 바지도 내린다.

 

오랜 세월 침을 놓은 그녀는 비장의 침 자리를 알고 있다. 일종의 히든카드다. 허벅지 어떤 지점에 침을 놓으면 인간의 고뇌와 무거운 짐 덩어리 같은 고통, 안 좋은 기억이 모조리 잊힌다. ‘엄마는 순식간에 두 건의 살인사건이 일어나자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살인사건의 전모가 드러나면서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시달리는 엄마는 영화 말미에 자신의 치마를 걷어 올리고 그 자리를 찾아 침을 놓은 뒤 관광버스 안에서 막춤을 춘다.

 

체하면 약국으로 달려가 소화제를 먹고,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은 정신과 상담을 받거나 약물로 치료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에게 이러한 행위는 미신처럼 보일 수 있다. 우리나라에 서양의학이 들어오기 전 한의학이 있었다. 침과 뜸 탕약을 주로 쓴다. 권위 있는 한의사도 있지만, 이른바 돌팔이로 불리며 침을 놓는 사람도 있다. 가정에서 간단히 손가락을 바늘로 뜨는 것도 일종의 의술이라면 의술이다. 한의학은 오랜 세월을 우리와 함께했으니 그만큼 널리 퍼지는 건 당연하다.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지 않으면 불안한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고민과 고통의 기억을 잊게 해주는 허벅지 침 자리까지는 몰라도, 체했을 때 손가락 끝을 침으로 뜨면 효과가 있다는 그런 기억은 너도나도 있다. 이런 의술은 시대를 초월한다. 인간의 몸은 음식 등의 영향으로 겉모습이 변할지 모르나 근본적으로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첨단 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는 중학생 딸아이의 손가락이나 옛날 양귀비의 손가락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이렇게 사소한 집안 처방에까지 영향력을 미친 한의학의 원류는 편작과 창공이다.

 

춘추전국시대의 명의

 

사마천은 편작 창공 열전을 다 쓰고 나서 이렇게 총평했다. ‘여자는 아름답든 못생겼든 궁궐 안에 있기만 하면 질투를 받고, 선비는 어질든 어리석든 조정에 들어가기만 하면 의심을 받는다. 그래서 편작은 뛰어난 의술 때문에 화를 입었고, 창공은 자취를 감추고 숨어 살았어도 형벌을 받은 것이다. 그는 제영이 조정에 글을 올려 사정을 아뢴 뒤에야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래서 노자도 아름답고 좋은 것은 상서롭지 못한 그릇이다고 했다. 이는 편작 같은 사람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창공 같은 사람도 이들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아름답고 좋은 것들을 악착같이 추구하는 사회에서 사마천은 노자의 말을 빌려 의사로서 신적인 경지에 오른 편작과 창공의 인생을 비관적으로 바라본다. 사마천은 역사학자이기에 편작과 창공의 의술보다는 그 의술을 통한 인생을 본다.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편작은 그의 재능을 시샘하는 이에 의해 암살되고, 창공 역시 형벌을 받았다. 어떻게 된 일일까? 인간사는 질병의 역사이기도 하다. 질병과 치료의 역사 속에서 인간은 살아가고 있다. 편작과 창공은 이러한 인간사에 등장해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시기와 모함이라는 질병에 희생됐다고 볼 수 있다.

 

편작과 창공은 동양의학, 즉 한의학의 원류로서 존재한다. 그들이 집필한 책이나 시술방법은 두 사람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건 없지만 한의학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황제내경은 바로 이들의 의료방법을 집대성한 책이다. 한의학은 우리의 몸을 소우주로 보고, 인체의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간주하며, 안색과 진맥으로 만병을 살핀다. 한의학은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물 건너온 서양의학과 공존하며 전통을 이어왔다.

 

춘추전국시대의 전설적인 의사 편작과 창공은 현대의학과는 먼 거리에 있다. 그 먼 거리는 신비한 안개에 휩싸여있다. 자동차 보닛을 열 듯 환자의 몸을 열어 과학적으로 진단·처방하고, 수술하고 회복시키는 현대의학과 한의학은 기본 개념이 다르다. 유능한 의사는 인간의 몸을 굳이 열지 않아도 환자를 척 보면 무슨 병에 걸렸는지 안다. 이러한 경험이 자료로 축적되고, 그 경험을 공부한 의사들에 의한 환자 치료율이 높다면, 그래서 시대에 따라 변하는 질병에 대처할 수 있다면, 칼과 망치를 들고 환자의 몸을 열어 시술하는 외과수술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이것이 가능하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편작은 당대 외과수술이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든 사람이다(편작 이전에 중국에도 외과수술 전문가인 유부라는 의사가 있었다).

 

죽은 태자를 살린다?

 

고대 중국 발해군 막읍에 진월인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마을 여관의 관리인으로 일하던 어느 날 장상군이라는 비범한 인물이 투숙했다. 장상군은 진월인이 비록 여관의 관리인으로 있지만, 보통 인물이 아님을 한눈에 알아봤다. 어느 날 장상군이 진월인에게, 비밀스럽게 전해오는 의술을 가지고 있는데 이제 자신은 늙어 쓸모없게 됐으니 전수해주고 싶다는 뜻을 전한다. , 다른 이에게 알려줘서는 안 된다고 했다. 진월인이 조건을 따르겠다고 다짐하자, 장상군은 품 안에서 약을 꺼내 진월인에게 주면서 말했다. “이 약을 땅에 떨어지지 않는 물에 타서 마신 뒤 30일이 지나면 반드시 사물을 꿰뚫어 볼 수 있을 것이오.”

 

땅에 떨어지지 않는 물 즉 새벽 이슬을 받아 약을 복용하면 사물을 훤하게 보는 능력을 얻는다는 얘기다. 사마천은 계속해서 이렇게 썼다.

 

그리고 비밀스럽게 전해오는 의서를 모두 꺼내 진월인에게 주고 장상군은 홀연히 사라졌다. 아마도 보통 사람이 아닌 듯하다. 진월인은 장상군의 말대로 약을 먹은 지 30일이 지나자 담장 너머 저편에 숨어 있는 사람이 보였다. 이러한 능력으로 사람을 보니, 오장 속 질병의 뿌리가 훤히 보였으므로 겉으로는 맥을 짚어보는 것으로 구실을 삼는 척만 했다. 그는 의원이 되어 제나라에 머물기도 하고 조나라에 머물기도 했는데, 조나라에 있을 때 편작으로 일컬어졌다.’

 

진월인에서 편작이라는 의사로 탄생하는 과정은 고대 전설과도 흡사하다. 이후 편작은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의술을 펼치는데, 가장 유명한 일화는 죽은 사람을 살렸다고 알려진 괵나라에서의 일화다. 괵나라 태자가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태자 교육을 담당하는 중서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편작은 중서자를 통해 태자의 병세를 듣고, 아직 입관을 하지 않은 것을 확인한다. 편작이 보기에 태자는 아직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자신이 태자를 살려낼 수 있다고 자신한다.

 

이때 중서자가 중국 전설시대의 유명한 의사 유부 이야기를 한다. 유부는 편작과 더불어 중국 의술의 양대 산맥이다. 유부는 외과수술 전문이었던 반면, 편작은 사람 몸에 절대 칼을 대지 않았다. 사물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간 중서자는 죽은 자를 살린다는 편작의 말을 반신반의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옛날 유부라는 명의가 있었는데 병을 치료할 때 탕액, 예쇄, 참석, 교인, 안올, 독위를 쓰지 않고 옷을 풀어헤쳐 잠시 진찰해보는 것만으로 질병의 징후를 보았고, 오장에 있는 수혈의 모양에 따라 피부를 가르고 살을 열어 막힌 맥을 통하게 하고 끊어진 힘줄을 잇고, 첫수와 뇌수를 누르고, 고황과 횡격막을 바로하고, 장과 위를 깨끗이 씻어내고, 오장도 씻어 정기를 다스리고 신체를 바꾸어놓았다고 합니다. 선생의 의술이 이러하다면 태자를 살려낼 수 있겠지만, 이와 같이 할 수 없으면서 태자를 살리려고 한다면 말해도 믿지 않을 겁니다.”

 

왕을 위협하는 의사

 

유부는 약을 쓰지 않고 침도 경락안마도 뜸도 뜨지 않고 오로지 환부를 열어 신장이면 신장, 심장이면 심장, 심지어 뇌도 깔끔하게 씻어내고 잘라내서 제자리에 같다 놓고 다시 봉합한다. 그러면 죽었던 사람도 벌떡 일어난다는 것이다. 현대의학이다. 암에 걸리면 악성종양을 떼어내고, 회복시킨다. 맹장수술에서부터 간이식, 심장이식술까지 이어진다. 유부가 이미 고대 중국에서 외과의로서 이룬 경지다. 그런데 왜 이러한 기술이 전해지지 않은 것일까?

 

그것은 바로 편작 때문이다. 중국 의술의 본류로서 편작과 그 계열의 의술을 펼친 무명 의사들의 인체와 질병에 대한 이론을 집대성한 책이 바로 한나라 때 편찬된 황제내경이다. 이 책은 오늘날 한의대 교재로 사용된다. 만약 중국인들이 유부의 이론을 집대성해 황제외경과 같은 외과서를 만들었다면 오늘날의 한의학은 그 위상이 달라졌을 것이다.

 

서양의 의학은 과학이다. 자료를 모아 실험하고 그 결과를 공유해 약을 만들어 환자에게 처방한다. 그 모든 데이터가 쌓이고 쌓여 후대에 전해지고 발전한다. 새로운 질병이 출현하면 그 질병을 다스리는 방법을 과거의 데이터에 기초해 분석하고 연구한다. 암 정복과 같은 대단한 연구결과를 발표하면, 당사자는 천재 소리를 듣고 노벨상을 받는다.

 

반면 동양의 의학은 대단히 개인적이다. 물론 각종 의서를 통해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돼 있지만, 편작이라는 인물을 통해 알 수 있듯 개인의 능력에 따라 환자의 생명이 좌지우지된다. 편작 정도 되는 한의사가 우리나라에 10명만 있다면, 그리고 그 제자들이 활동한다면 우리나라의 의료 수준은 세계 최고가 된다. 그런데 편작 이후에 창공 정도가 그 이름을 남긴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는 것은 노벨상과는 비교가 안 되는 신비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편작의 대를 이은 의사가 창공이라면 유부의 제자쯤 되는 인물이 바로 화타다. 화타의 외과수술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전쟁이 잦은 춘추전국시대에 왕의 몸을 여는 것은 두렵고 불안한 일이다. ‘삼국지를 보면 화타 이야기가 나온다. 화타가 조조의 두통을 치료한답시고 두개골을 열고 뇌를 꺼내 깨끗하게 한 다음에 다시 넣겠다고 했을 때, 늘 암살 위험에 시달리던 조조의 심경이 어떠했을까? 중국 대륙을 통일하겠다는 일념으로 격무에 시달린 조조. 편두통을 달고 살았던 그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아니 내 두개골을 열었다가 안 닫으면 난 뭐야? 죽는 거야? 이런 무엄한 놈이 있나. 저 놈 죽여버려.’

 

이런 식이다. 그에 비하면 편작의 의술은 안전한 편이다. 몸속 질병을 침과 약으로 다스리니 항상 암살 위협에 시달리던 제후들은 그를 신뢰했다. 예로부터 의사는 마음먹기에 따라 군왕의 목숨을 좌지우지한다. 왕의 독살도 의사가 가장 쉽게 할 수 있다. 맘만 먹으면 독약을 보약으로 위장할 수 있으니.

 

살 만한 사람만 살린다

 

유부는 현재 중국 의술의 지류로 전설로나마 존재한다. 하지만 편작이 활동하던 당시에는 유부의 명성이 자자했다. 그러니 중서자가 편작에게 유부 같은 전설적인 인물이 아니라면 죽은 태자를 살려내겠다는 장담 같은 건 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편작은 유부와 차별화된 내과적인 소견을 이야기한다. 이 말에 중국 의술의 본령이 담겨 있다. 유부의 의술이 과학이라면 편작의 의술은 철학에 가깝다.

 

당신이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은 대나무 구멍으로 하늘을 보고, 좁은 틈으로 무늬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은 환자의 맥을 짚고 안색을 살피고 목소리를 듣고 몸의 상태를 살펴보는 등의 일을 하지 않고도 어느 부위에 질병이 있는지 말할 수 있습니다. 환자의 양에 관한 증상을 진찰하면 음에 관한 증상을 알 수 있습니다. 환자의 음에 관한 증상을 진찰하면 양에 관한 증상을 알 수 있습니다. 몸속의 병은 겉으로 나타나므로 천리 먼 곳까지 가지 않아도 진단을 내릴 수 있는 경우가 아주 많으며,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습니다. 당신이 제 말을 진실이 아니라고 여긴다면, 안으로 들어가 태자를 살펴보십시오. 태자의 귀에서는 소리가 나고 코는 벌름거리고 있을 것이며, 양쪽 넓적다리를 타고 음부에 이르러 아직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편작은 전술했듯 신비한 약을 먹고 사물을 투시하는 능력을 가졌다. 심지어 환자의 상태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가 죽지 않았음을 안다. 현대의학에서는 이런 진단이 불가능하다. 최첨단 장비를 동원해 종일 촬영하고, 혈액검사하고, 그 결과를 분석하는 데만도 며칠이 걸린다. 그런데 편작은 이야기만 듣고 관 속에 곧 들어갈 사람을 살려낸다. 태자의 병명은 시궐(尸厥)’, 피가 위로 올라가 환자가 가사상태에 빠진 것이다. 한의학 전문용어가 많아 이해가 잘 안 되지만, 시궐이라는 병의 증세에 대해 편작은 이렇게 설명한다.

 

대체로 양기가 음기 속으로 흘러들어가 위를 움직이고, 경맥(양의 맥)과 낙맥(음의 맥)을 얽어 막히게 하고, 한편으로는 삼초(육부의 하나로 상초, 중초, 하초를 말한다. 상초는 위장의 윗부분으로 호흡이나 혈맥 등에 관여하고, 중초는 위장 부위로 음식물 소화를 담당하고, 하초는 위장 아랫부분으로 배설을 담당한다)와 방광까지 내려갑니다. 이 때문에 양맥은 아래로 내려가고, 음맥은 다투듯이 위로 치달아 양기와 음기가 만나는 곳이 막혀 통하지 않게 됩니다. 이 음맥은 위로 올라가고 양맥은 안을 향해서 내려갑니다. 양맥은 안으로 내려가 고동치지만 일어설 줄 모르고, 음맥은 밖으로 올라가 끊어져서 음의 역할을 못합니다. 음기가 파괴되고 양기가 끊겨 혈색이 사라지고 맥이 어지러워지기 때문에 몸이 죽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태자께서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대체로 양기가 음기 속으로 들어가 오장을 누르는 자는 살지만, 음기가 양기 속으로 들어가 오장을 누르는 자는 죽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은 모두 오장의 기가 몸속에서 거꾸로 치솟을 때 갑자기 일어나는 것입니다. 훌륭한 의사는 이것을 치료하지만 서툰 의사는 의심하여 믿지 않습니다.”

 

양기, 음기, 양맥, 음맥, 삼초, 낙맥 등에 대한 완전한 이해 없이는 편작의 설명은 쇠귀에 경 읽기다. 기와 맥은 또 한 권의 책으로 설명해야 하는 일이니, 편작의 설명을 다 이해하겠다는 욕심은 버려야겠다. 단 음기와 양기의 부조화로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정도로 시궐이라는 병을 조금 이해한다. 하여간 병인을 잘 알고 있는 편작은 침과 약으로 태자를 치료해서 벌떡 일어나게 만든다.

 

곧 관 속에 들어갈 사람이 살아난 이 유명한 일화는 그보다 더 유명한 편작의 나는 죽은 사람을 살려내지는 못한다. 나는 스스로 살 수 있는 사람을 일어날 수 있도록 할 뿐이다라는 말을 남긴다. 서양의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철학을 산파에 비유하고, 또 자신은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알 뿐이라고 한 것과 상통한다. 편작이 보기에 환자가 살 수 있을 때 의술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 때 앎이 가능한 것처럼.

 

명의도 못 고치는 불치병

 

명의 편작도 못 고치는 질병이 여섯 가지 있다. ‘성인으로 하여금 질병의 징후를 미리 알게 하여 훌륭한 의사에게 일찍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한다면 질병은 치유될 수 있다.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은 병이 많은 것이고, 의사들이 걱정하는 것은 병을 치료할 방법이 적은 것이다. 그래서 고칠 수 없는 여섯 가지 병이 있다. 교만 방자하여 병의 원리를 논하지 않는 것이 첫 번째 불치병이고, 몸을 가벼이 여기고 재물이 아까워 병을 치료하지 않는 것이 두 번째 불치병이다. 입고 먹는 것을 적절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 세 번째 불치병이며, 음과 양이 함께 있어 오장의 기가 불안정한 것이 네 번째 불치병이다. 몸이 극도로 허약하여 약을 먹을 수 없는 것은 다섯 번째 불치병이다. 무당의 말만 믿고 의사를 믿지 않는 것이 여섯 번째 불치병이다. 이러한 것 가운데 하나만 있어도 치료하기 매우 어렵다.’

 

편작은 질병과 건강을 둘로 보지 않았다. 그것은 태극 문양의 음과 양처럼 둘이 아니라 하나다. 세상에 완전한 음도 완전한 양도 없다. 음과 양은 서로 어울려 있다. 둘이 각방을 쓰는 순간 사단이 난다. 질병과 건강, 여자와 남자, 산과 바다, 달과 해 모두 마찬가지다. 어떤 질병은 평생을 친구처럼 사귀어야 한다. 병이 생기면 칼을 들고 환부를 싹둑 도려내는 개념과 다르다. 편작의 질병에 대한 여섯 가지 잠언은 질병과 폭력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인생의 고난을 피하는 여섯 가지 방법으로 읽힐 수도 있다. 이렇게 말이다.

 

1. 교만 방자하여 개뿔도 모르면서 저 잘난 척만 하면 인간관계가 무너지고 결국 소통이 부재하게 된다. 벽과 같은 인간이 되어 누가 뭐라고 좋은 말을 해도 듣지 않는다. 불치병 중에서도 아주 심각하다. 이 세상에 저 혼자인 양 주위에 산성과 같은 벽을 친다. 이런 사람의 불치병은 하도 위중해서 그 누구도 치료할 수 없어 보인다. 그래서 결국 사망한다.

 

2. 베토벤처럼 36시간 동안 밥 안 먹고 잠 안 자고 작곡을 하면 위대한 작품을 쓸 수 있겠지만 병이 든다. 당연한 이치다. 자신의 몸을 가벼이 여기면 안 된다. 건강이 있어야 행복도 있다. 하지만 자기 한 몸 희생해서 걸작을 쓰거나 봉사를 하면 위대한 인물이 된다. 인류사회를 위해 제 한 몸 희생했다는 좋은 말도 듣는다. 재물이 아까워 병을 치료하지 않는 우를 범하면 안 된다.

 

3. 여름이건 겨울이건 노출을 일삼는 세상이다. 제 몸 병드는 줄 모르고 노출하고, 먹지 않는 아름다운 여인들이 귀담아 들어야 한다. 다이어트 한답시고 음식을 제멋대로 조절하는 행위는 질병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먹고 입는 것을 적절히 하지 않는 행동의 부작용은 우리 주위에 널려 있다. 옷을 잘 입고 잘 먹는 것은 질병예방의 중요한 조건이다. 내 말이 아니라, 편작 선생의 말씀이다.

 

4. 서로 다른 걸 인정해야 한다. 음이 양을 보고 틀렸다고 하면 끝이다. 양이 음을 보고 틀렸다고 하면 사망이다. 서로 다른 존재니까. 너는 음, 나는 양, 너는 북, 나는 남, 너는 여자, 나는 남자로 우리는 서로 달라 아름답고 사랑한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너 음이야? 이런 XX, 죽어라 한다면, 몸의 음과 양이 그리하면 불치병이다. 편작도 못 고친다. 일부 정치인들은 이런 이야기를 해주어도 듣지 않는다. 들을 귀가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다. 귀가 없는 자들은 듣지 못하니 가망없는 불치병 환자들이다.

 

5. 에이즈에 걸린 매직 존슨은 강한 체력으로 농구장을 누비던 강인한 사람이다. 그는 몸이 워낙 건강해서 어떤 약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서인지 매직 존슨은 에이즈에 걸렸는데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고 있다. 몸이 허약하면 현대의학으로도 치료하기 힘들다. 병도 튼튼한 몸에 깃들어야 고칠 수 있다. 노인성 질병의 경우 때때로 몸의 허약함 때문에 약을 쓰지 못한다. 하여간 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몸이 건강해야 한다. 이걸 굳이 우리 사회에 비교하면, 우리 고유의 문화와 전통, 건강한 시민의식, 환경보호 활동 등이 사회의 건강 척도일 것이다. 우리 사회가 혹시 불치병에 걸린 건 아닌지 모르겠다.

 

6. 편작이 살던 시대와 달리 현대인은 갖가지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한의학과 서양의학을 적절하게 사용해야 할 것이다. 맹장이 터졌는데 한의원을 찾아가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가 건강하기 위해서는 편작이 무당이라고 지칭한, 헛다리를 짚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

 

편작이 말한 여섯 가지 불치병을 마음에 잘 담아두면, 건강한 몸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당대에 통용됐던 개념을 지금의 실정에 맞게 번역하면 잘살 수 있다. 이것이 마음의 예방의학이다.

 

천재 편작의 이름이 온 중국에 퍼진다. 그는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으로서 어떤 지역에 부인병이 창궐하면 산부인과 의사로, 어떤 나라에서 노인을 귀하게 여기면 노인질병 전문의로, 어떤 나라에서 어린아이를 사랑하면 소아과 의사로, 그 지역 풍토에 맞춰 진료 과목을 바꾼 천재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허무하다. 진나라 의학 행정의 최고 담당자인 태의령 이혜라는 자가 자객을 보내 죽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의술이 자신보다 월등하기 때문이다.

 

의원의 최고 경지, 심의(心醫)

 

편작을 읽으면서 나는 우리나라의 두 의사를 떠올렸다. 한 분은 조선 선조시대의 명의이자 동의보감의 저자인 허준이고, 또 한 분은 이 시대의 성자 장기려 박사다. 이 두 분이 우리나라 동서양의학계에서 많은 명의와 더불어 빛나고 있다. 허준에게서는 동양의학의 전통과 신기에 가까운 치료술을, 장기려 박사에게서는 뛰어난 의술과 더불어 힘없고 가난한 환자들을 돌본 착한 마음을 보았다.

 

허준의 일대기는 국가의 난과 연결되어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고난의 시기에 우리 의학계에 큰 별로 떠올랐다. 허준은 1539년 김포 양천에서 허론의 서자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경상도우수사를 지낸 무과 출신이고, 아버지 역시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냈지만, 허준은 무과에 지원하지 않고 의과에 급제하여 내의원으로서 의사의 길을 걸었다.

 

유의태의 제자로 의술을 배우고, 내의원 의관으로 왕자의 병을 고쳐 이름을 알렸다. 이후 선조 임금의 총애를 받으면서 중국 의학서인 찬도맥결을 우리 실정에 맞게 고쳐 찬도방론맥결집성을 펴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임금이 의주로 피난할 때, ‘어의로서 임금을 호송하고 신하들의 질병을 치료해 전란 중에 그 이름이 더욱 빛났다.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맞아 전투를 했다면, 허준은 조정의 건강을 돌보면서 질병과 싸운 것이다.

 

궁으로 돌아온 선조 임금은 허준을 정3품 당상관에 임명한다. 이후 1596년에 선조의 명으로 내의원 의관들과 함께 내의원에 편집국을 설치하고 동의보감을 편집하기 시작했으나, 이듬해 정유재란이 일어나 의원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바람에 잠시 동의보감 저술이 중단된다. 그 뒤 선조는 다시 허준에게 단독으로 동의보감을 편집하게 하고, 내방의서 500권을 고증하게 했다. 허준의 동의보감 편찬은 어의로서 또 내의원으로서 모든 업무를 보면서 이루어낸 집념과 열정의 산물이다.

 

동의보감 1610년인 광해군 2년에 완성됐다. ‘동의보감은 당대의 의학지식을 집대성한 임상의학 백과전서다. 내경, 외경, 잡병, 탕액, 침구 모두 5편으로 구성됐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의학 수준을 동아시아에 널리 알린 책이기도 하다. 일본과 중국에서도 출판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허준은 동의보감 외에도 여러 한방서를 한글로 출판했다. 1601년에는 세조 때 편찬한 구급방 언해구급방으로, 임원준의 창진집 두창집요로 이름을 바꾸어 한글로 간행했다. 1612년에는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을 치료하기 위해 신찬벽온방’ 1권과 벽역신방’ 1권을 편집해 내의원에서 간행했다. 1615년에 세상을 떠난 허준은 당시 의사로서는 최고의 명예인 당상의 부군과 보국의 지위를 가졌다.

 

오늘날 허준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데는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이 크게 기여했다. 의학서 동의보감이 전문가들의 책이라면, 소설 동의보감은 허준이라는 의사의 일생을 통해 질병과도 같은 인간사를 한 인간이 어떻게 치료하고 돌보아주는지 잘 보여준다.

 

이 책 출판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편집장이 원고를 검토하라고 편집부 직원에게 넘겼다. 그날 퇴근을 하는데 동의보감 원고를 읽고 있던 직원이 꼼짝도 않고 원고를 보고 있었다. 그 직원은 이야기에 빠져 퇴근하는 것도 잊고 밤을 새워 원고를 읽었다. 편집장은 다음날 아침, 직원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이 책이 대중적으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올 것이라 직감했고, 결국 그렇게 됐다. 물론 원고를 검토한 직원을 내가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이 소설의 흡입력, 다시 말해 허준이라는 인물의 매력을 잘 보여주는 일화다.

 

이 소설을 보면 심의(心醫)’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편작이 치료할 때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여덟 가지 의원 중에 그 제일을 심의로 친다. 심의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늘 마음이 편안케 하는 인격을 지닌 인물로 병자가 그 의원의 눈빛만 보고도 마음의 안정을 느끼는 경지에 있다. 그건 의원이 병자에 대해 진실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가짐이 있고서야 가능한 품격이다.’

 

병자에 대해 진실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는 의사 중에 장기려 박사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슈바이처’ ‘사랑의 의사’ ‘무소유의 삶 등 장기려 박사를 꾸미는 수식어는 수도 없이 많다.

 

장기려 박사는 191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아버지 장운섭과 어머니 최윤경 사이에서 작은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송도고보와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백병원의 백인제 박사에게 의사로 단련됐다. 당시 병원에 입원 중이던 춘원 이광수가 장기려 박사를 소설 사랑의 주인공 안빈의 모델로 삼았다는 얘기가 있다. 지강유철이 쓴 장기려 박사 평전을 보면 이 부분에 대해 여러 정황이 비슷한 것은 사실이지만, 안빈은 소설가가 창조한 인물이라며 선생은 소문을 부인한다.

 

장기려가 있으면 수술을 맡길 텐데

 

장기려 박사는 1940년 일본 나고야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평양의과대학,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를 지냈다. 이 시절 김일성의 병을 치료했다는 소문도 있다. 역시 평전에 따르면 장기려 박사는 1988년에 쓴 글에서 이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김일성을 세 번 만난 이야기를 자세히 기록했다.

 

맨 처음 만난 것은 1947, 보건부 부국장 이성숙과 소련 고문관을 따라서다. 두 번째 만남은 1948,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를 지낸 김용범의 수술 경과를 알아보기 위해 김일성 주석이 선생을 불러 성사됐다. 세 번째는 김용범의 장례식장에서였다. 이날은 서로 대화는 하지 못하고 멀리서 지켜볼 뿐이었다. 김일성은 머리 뒤의 혹을 떼어내고 싶었지만 누구도 믿을 수 없어서 수술을 못 맡기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장기려가 있으면 수술을 맡길 텐데라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이러한 김일성과의 인연으로 월남한 장기려 박사는 여러 고초를 겪었다.

 

장기려 박사는 1950 12월 처자를 두고 차남 장가용과 함께 월남했다. 1951년 부산에서 천막을 치고 무료진료소 복음병원을 세워 의료행위를 사랑과 봉사 차원으로 승화시킨다. 이는 장기려라는 의사의 평생 사명이 되었다. 장기려는 1968년 한국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인 부산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설립하고, 1975년 청십자의료원을 설립해 직접 환자들을 진료했다. 장미회(간질환자 치료모임)를창설하고 부산 생명의전화를 설립했으며, 장애자재활협회 부산지부 창립에도 맨 앞자리에 나가 일을 처리했다.

 

그의 의술은 병의 치료를 넘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들의 마음까지 돌보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의 헌신적인 의료 활동에 대해 1976년 국민훈장 동백장, 1979년 막사이사이상(사회봉사부문), 1995년 인도주의 실천의사상이 주어졌다.

 

인생의 말년에는 당뇨병에 시달리면서도 숨이 멎는 순간까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봉사해 성자로 불렸다. 1995 1225일 성탄절에 세상을 떠났다. 몸과 마음이 가벼워졌으니 천국으로 가셨을 거라 짐작된다. 묘지는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있다. 사후인 1996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됐으며, 2006년에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바보처럼 산 성자

 

춘원 이광수가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을 당시 담당 레지던트였던 장기려 박사를 가리켜 당신은 바보 아니면 성자라고 했다고 한다. 장기려 박사는 당신을 바보처럼 사는 사람이라고 했고, 그 행위는 성자와 같으니 춘원의 이 말은 장기려 박사의 일생을 잘 정리한 빛나는 표현이다.

 

또한 장기려 박사를 추억하면 반드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장기려 박사는 월남 후 독신으로 수도자적인 삶을 살았다. 고행의 길을 걸어 수행하는 신부나 스님이 아닌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건강한 의사가 반평생 독신으로 살긴 힘들다. 하지만 선생은 사랑의 심지가 매우 굳었다. 인간에 대한 믿음, 인간에 대한 예의를 본능과 일상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장기려 박사의 아내 김봉숙은 희생과 절대 순종을 미덕으로 여기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선생은 내 아내가 절대의 사랑으로 순종했기 때문에 1950 12월 월남한 이후로 북에 두고 온 아내를 마음에 담고 아내에게 죽도록 충성하는 사랑을 주려고 결심하고 그 결심을 지켰다. 장기려 박사에게 구애하던 간호사가 시도 때도 없이 집으로 찾아와 유혹해도, 미국에서 여생을 편하게 지내자는 부자의 청혼도 장기려 박사에게는 쇠귀에 경 읽기였다. 그는 의사로서 인간으로서 할 일이 너무나 많았던 사람이다.

 

편작과 더불어 창공에 대해서도 사마천은 길게 서술한다. 창공은 주로 자신의 의료 경험을 왕에게 이야기했다. 창공의 의료행위에 감탄한 왕이 혹시 그대와 같은 의사도 실수할 때가 있느냐고 묻자 창공은 이렇게 답한다. “제가 환자를 치료할 때는 반드시 먼저 맥을 짚어본 뒤에 치료합니다. 맥이 순조로운 사람은 치료할 수 있고, 거스르는 사람은 치료할 수 없습니다. 제 마음이 맥을 정밀하게 짚어볼 수 없는 상태일 때는 생사를 단정 짓는 일과 치료할 수 있는지를 살피는 데 있어 때때로 실수를 합니다. 저도 완벽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창공 역시 마음을 이야기한다. 고대 중국의 의료기술과 21세기 현대의학은 분명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질병도 인간의 문명과 더불어 꾸준하게 발전한다. 암이나 에이즈가 완전히 정복되면 인간의 능력을 시험하는 또 다른 질병이 출현할 것이다.

 

하지만 그 질병을 다루는 인간은 과연 그만큼 성숙할까? 편작과 창공을 통해, 허준과 장기려 박사를 통해 우리가 배우는 것은 신기에 가까운 의료행위보다는 인간을 귀하게 여기고, 질병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아닌가 싶다. 간혹 병원에 가면 매우 실망스러운 의사들을 볼 때가 있다. 워낙 많은 환자를 보니 그렇겠지만, 우리 시대에 정말 필요한 의사들이 소신을 갖고 진료할 때 질병 투성이인 우리 사회가 조금은 건강해질 것이다.

 

 

 

 

 

 

 

9. 순리열전

 

 

 

공직자가 단순한 원칙만 지켜도 세상이 달라진다

 

 

 

순리(循吏)는 청관(淸官)이다. 일을 투명하게 처리한다. 불의에 따르지 않고 이권을 탐하지 않는다. 오직 국민과 공익의 편에 선다. 이들의 언행은 복잡하지 않다.

 

 

 

언제였던가, 장마가 져서 서울 시내 하수구가 범람한 적이 있다. 하수구 범람은 흔한 일이었지만, 그해에는 수해 피해가 커서인지 서울시의 상하수도 관리가 새삼스럽게 못마땅했다. 술자리에서 우리는 얼굴도 모르는 책임자들의 안이함을 성토했고, 조용히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 선배가 이웃나라 이야기를 했다.

 

일본에 하수도 관리 책임자가 있었다. 그는 매우 강직한 관리였다. 어느 날, 갑작스러운 폭우로 도쿄의 하수도가 조금 넘쳤는데, 그 사실을 안 그 관리가 할복자살을 해버렸다.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지 못한 죗값을 스스로 치른 것이다. 갑작스러운 폭우로 하수도가 조금 넘쳤다고 자살까지 하는 그 관리의 이야기는 극단적이었지만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 이야기의 진위는 파악하지 못했다. 순리열전을 읽으면서 나는 오래전 그 선배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선배는 그때 이런 말을 했다.

 

적어도 관리로서 자기 일에 대한 책임감이 그 정도는 되어야 해.”

 

5명의 청관

 

정직한 관리들이 다스리는 마을에서 사람들은 편하게 산다. 하지만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고, 옛 시절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탐관오리의 학정을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참고 참다가 드디어 봉기를 일으키기도 한다. 세상에 혁명이나 폭동은 관리들 탓이기도 하다. 우리의 근현대사만 둘러보아도 이러한 탐관오리의 예는 수도 없이 많다. 심지어 나라를 팔아먹은 관리들도 있다. 사마천의 순리열전이 각별한 것은 정직한 정치인, 관리들이 우리 곁에서 입법, 사법, 행정의 일을 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순리를 청관(淸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맑을 청을 쓰니 일을 맑고 투명하게 처리하는 관리를 뜻한다. 검소하고 단순해야 한다. 책임감이 강하고 사사로움이 없어야 한다.

 

사마천이 비교적 담담하게 기록한 고대 중국 주대의 봉건국가에서 일한 순리들의 이름을 따로 노트에 적어두었다. 손숙오, 자산, 공의휴, 석사, 이리 모두 5명이다. 사마천은 이 다섯 명의 청관 이야기를 통해 지금 이 시대에 과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한다. 이들은 국가의 절대 권력으로서 왕을 모시고 백성을 보살핀 관리들이다. 이들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사마천은 미리 말한다.

 

법령이란 백성을 교화시키고 선도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형벌이란 간사하고 악한 짓을 금지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법령)과 무(형벌)가 갖추어져 있지 않을 때, 선량한 백성들이 두려워한다. (사람들이) 품행을 단정히 하는 것은 관리가 법 집행을 혼란스럽게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직분을 다하고 법을 지키면 바르게 다스릴 수 있는데, 어찌 위엄이 필요하겠는가?”

 

백성을 억누르기 위한 위엄이나 공권력은 법령과 형벌이 올바로 집행되지 않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즉 정치가 올바르게 되지 않는 나라에는 반드시 탐관오리가 있다. 공자는 힘없는 백성에게 정치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이야기했다. 올바르지 못한 정치란 굶주린 호랑이보다도 무서운 것이다. ‘예기(禮記)’에 이러한 일화가 나온다.

 

공자가 태산 곁을 지나는데 어떤 부인이 무덤 앞에서 슬피 울고 있었다. 공자는 수레의 횡목을 잡고 머리 숙여 조의를 표한 다음 연유를 물었다.

 

부인이 곡하시는 모양이 분명 큰 슬픔이 겹친 듯합니다.”

 

부인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옛날 저의 시아버님께서 범에게 물려 돌아가셨습니다. 또 제 남편도 범에게 물려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 아들마저 범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어째서 다른 곳으로 가지 않으십니까?”

 

부인이 답하였다.

 

여기는 가혹한 정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공자가 돌아보며 말했다.

 

제자들아, 명심하거라. ‘가혹한 정치는 범보다 더 사나우니라!’”

 

관리들이 탐관오리가 되면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백성의 살림살이는 빈곤해진다. 굶주린 선량한 백성들이 도둑이 되어 사방에 돌아다닌다. 밖에 나가 일을 할 때도 집안 걱정을 하게 된다. 이러한 나라에 법질서가 제대로 설 수 없다. 집안의 기둥 같은 사내 3명을 모두 범에게 잃은 여인은 그래도 정치가 편안한 땅을 택하는 것이다. 범이야 산에서 돌아다니는 놈이니 덫이나 함정을 놓아 잡을 수 있지만, 그러나 가혹한 관리들은 날개 달린 범처럼 잡을 수가 없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직 이익 추구에만 급하고 어떻게 목민(牧民)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다. 그래서 백성들은 여위고 곤궁하고 병들어 구렁텅이에 줄을 이어 그득히 넘어졌는데도 목민관들은 아름다운 옷에, 기름진 옷에 혼자 살이 찌고 있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금지법이 없는 나라

 

사마천은 우선 법령을 잘 지켜 나라를 편안하게 한 손숙오 이야기를 꺼낸다. 그가 초나라의 재상으로 재임하는 동안 관리와 백성들이 서로 화합하고 풍속이 아름다워졌으며 정치는 느슨하게 했지만 금지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살기 힘든 나라는 금지법이 많은 나라다. 관리들 중에는 간사한 자가 없었고, 도둑도 생기지 않았다. 가을과 겨울 백성들에게 산에서 사냥을 하고 나무를 베도록 했고, 봄 여름에는 물고기를 잡도록 했다. 백성들은 저마다 편익을 얻게 되었고 생활은 안정되고 즐거웠다.

 

이렇게 시장경제가 안정되자 초나라 장왕은 화폐를 크고 무겁게 만들었다. 이 법령이 발표되자 백성들은 그것을 불편하게 여기게 되었고 시장경제가 혼란스러워졌다. 이 소식을 들은 손숙오는 왕에게 말했다. “전날 화폐를 바꾼 것은 이전의 화폐가 가볍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지금 시령이 와서 시장이 혼란해져 백성들은 편안히 있을 곳이 없고 장사를 계속할지 안 할지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이전대로 회복시켜주십시오.”

 

재상을 신임하는 왕이 신하의 뜻을 허락하자 다시 시장은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이후 왕이 또 수레의 높이를 높이는 법령을 내리자 손숙오는 이렇게 말했다. “법령을 자주 내리면 백성들은 어느 것을 따라야 할지 모르게 되므로 좋지 않습니다. 왕께서 꼭 수레를 높이고자 하신다면, 청컨대 그 마을의 문지방을 높이도록 하십시오. 수레를 타는 사람은 모두 군자이고, 군자는 자주 수레에서 내릴 수 없습니다.”

 

문지방을 높여 수레의 높이를 더 높이게 하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꼭 지켜야 하는 법령보다는 백성이 스스로 알아서 하게 하는 것, 이것이 손숙오가 통치하는 방법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백성들이 문지방을 높인 뒤 반 년이 지나자 백성들 스스로 수레의 높이를 높였다. 높은 문지방에 낮은 수레가 불편하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정치가 위대한 정치

 

손숙오는 백성들이 스스로 움직이게 한다.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고, 그 법령이 필요한 이유를 백성들이 스스로 알게 한다. 특별히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 움직이게 하니 불평불만이 쌓일 틈이 없는 것이다. 사마천은 그의 행적을 사실만 간단하게 적었다. 재상으로 재임하면서 그는 매우 단순하게 일을 한다. 하지만 이 단순함이 바로 위대한 정치다.

 

우리 현대사에서 어려웠던 시절은 각종 특별법이 만연했던 시절이다. 문지방이 낮은 곳에 높은 수레를 만들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특별한 원칙보다는 그때그때 권력을 악용하는 법을 만들어 국민을 불편하게 했다. 매우 복잡하고 강압적이고 폭력적이었다.

 

이러한 세상을 견디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피해의식이 있다. 억압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자신의 삶과는 직접 관련이 없다고 믿고 싶어한다. 그러다가 조그마한 피해라도 보게 되면 비분강개하고 울분을 터뜨린다. 하지만 이미 사회의 법체계는 모든 사람의 숨통을 죄고 있다.

 

손숙오의 몇 자 안 되는 간단한 업적은 글로 쓸 필요가 없는 세상을 만들어놓았다. 그는 재상을 세 번이나 역임했는데 별로 기뻐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재능을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세 번 퇴임했는데 후회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과실이 없기 때문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다는 말은 그의 행적에 비유할 수 있다.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을 우러러보아 한 점 부끄러운 일이 없고 굽어보아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일이 없는 것이 둘째의 즐거움이다.”

 

법령을 잘 지키기 위해서는 이미 법체계가 견고하고 투명해야 한다. 그래서 입법부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다. 만약 손숙오의 시대에 법체계가 어둡고 무서웠다면 그 같은 재상은 등장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어 사마천은 정나라의 재상 자산을 이야기한다. 자산이 재상으로 자리에 앉았을 때에는 전임자가 나라의 정치를 어지럽게 한 후였다. 그가 재상이 되자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1년이 지나 소인배들의 경박한 놀이가 없어졌고 반백의 늙은이들이 무거운 짐을 나르지 않았다. 어린아이들은 밭을 갈지 않았다. 2년이 지나자 시장에서 값을 에누리하지 않았고 3년이 지나자 밤에 문을 잠그는 일이 없어졌다. 길에서 떨어진 물건을 줍는 사람도 없었다. 4년이 지나자 밭갈이하는 농기구를 집으로 가지고 돌아가지 않아도 되었고 5년이 지나자 척적(사방 1척 크기의 나무판으로 군령을 기록함)이 쓸모없게 되었고, 상복을 입는 기간은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잘 지켜졌다.

 

자산은 26년간 공직에 몸담고 세상을 떠난다. 대장부로 태어나 자신의 할 일을 다하고 여한 없이 삶을 마감한다. 명재상인 자산이 세상을 떠나자 백성들은 어린아이처럼 울면서 자산이 우리를 버리고 죽다니, 백성들은 누구를 믿고 산단 말인가라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한다.

 

생선을 좋아하기에 받지 않는다

 

정치는 권력이고 권력은 돈과 연결되어 있어 온갖 추문이 난무하는 나라는 고대의 중국에도 여럿 있었다. 권력과 돈의 관계에서 완전히 투명한 정치인을 국민은 바란다. 세 번째 등장하는 노나라의 재상 공의휴가 그러한 면을 잘 보여준다.

 

공의휴는 재상이 된 후 공무원들이 백성과 이익을 다투지 않게 했다. 많은 월급을 받는 고위공직자들은 머리핀 하나도 선물을 받지 못하도록 했다. 선물과 뇌물의 선이 어디인지를 놓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생선 한 마리도 공직에 있는 동안에는 받지 말도록 한 것이다. 그것이 비록 진심 어린 선물이라 할지라도 받는 순간에 뇌물이 되어버리는 권력의 속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재상으로서 백성보다 잘 먹고 잘살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어느 날, 공의휴가 생선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평소에 재상을 존경하던 사람이 생선을 보내왔다. 하지만 공의휴는 생선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생선을 좋아하기 때문에 받지 않았소. 지금 나는 재상의 벼슬에 있으니 나 스스로 생선을 살 수 있소. 그런데 지금 생선을 받고 벼슬에서 쫓겨난다면 누가 다시 나에게 생선을 보내주겠소. 그래서 받지 않은 것이오.”

 

공직에 있을 때가 아니라면 그는 이 정도의 선물은 받았을 것이다. 때만 되면 우리나라에서도 굴비세트나 갈비세트가 전국적으로 돌아다니지 않는가? 하지만 공직자인 그는 원칙을 세워놓았다. 자신의 권력이 행여 백성에게 피해가 될 것을 염려해서다. 그가 원한다면 수산시장에서 날마다 제일 좋은 생선을 그에게 상납하고 장사에 필요한 이권을 가져갈 것이다. 세상 이치가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게 있는 법이다. 공짜는 없다. 그는 한 마리의 생선도 받지 않고 월급을 타서 사 먹었다.

 

더불어 그는 자신의 집 채소밭에 난 채소가 맛이 좋으면 모조리 뽑아버렸다. 자기 집에서 짜는 베가 좋은 품질의 것이면 불살라버렸다. 그는 자신이 앉은 권력의 자리에서 생기는 온갖 이권을 눈에 보이는 대로 없애버렸다. 그것은 잡초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논에 생긴 잡초를 뽑아야 농사가 잘된다.

 

우리나라에도 청백리가 많이 있었다. 고려 출신의 정승 황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황희는 조선 태조 이성계 시절부터 고위관직을 역임한 뒤 세종 시절 최고위직인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영의정으로 지내면서 단벌의 관복을 입고 조정에 들었다. 어느 겨울밤 관복을 빨아 말리고 있는데 급히 입궐하라는 세종의 명이 전달됐다. 황희는 당황해 부인이 바지 솜과 저고리 솜을 실로 얼기설기 엮어준 여름 관복을 입고 입궐했다.

 

세종은 황희의 관복에 솜이 삐져나온 것을 보고 황희는 청렴한 관리인데, 무슨 돈으로 양털로 된 관복을 입나 싶어 물었다. 황희는 당황해 왕에게 양털이 아니라 솜바지에 넣은 솜이라고 아뢰고 자초지종을 밝혔다. 황희의 모습을 자세히 본 세종은 영의정의 품위 유지도 중요하다고 보고 비단 열 필을 당장 하사하라고 명했다. 황희는 어명을 거두어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백성들은 계속된 흉년으로 인해 헐벗고 굶주리는데, 영의정이 비단 옷을 걸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결국 황희는 세종이 내린 비단을 받지 않았다.

 

법치와 효도의 모순 속에서

 

순리, 청백리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은 수신(修身)이다. 수신에서 모든 것이 나온다. 순리열전에 나오는 관리들은 수신을 한 사람들이다.

 

대학의 8조목에 나오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아직까지 우리의 유전자 속에 흐르고 있다. 수신은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하도록 심신을 닦음을 뜻하고, 제가는 집안을 잘 다스려 바로잡음을 말한다. 치국은 나라를 다스림을, 평천하는 온 천하를 편안하게 함을 뜻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세상사를 다스리는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는 뜻이다. 세상사는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 결국 수신은 선비가 행동하는 정신의 모든 것이 되기도 한다. 고인이 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 스타일에 대해 ()지식이라고 비난했던 가톨릭 원로 정의채(84·사진) 신부는 현 정권에 직언을 하며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말한다. 그는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정부는 정말 심사숙고해서 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을 정해야 한다. 왜 이렇게 민심이 떠났는지 겸손한 마음으로 생각해보고 일대 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민심이 떠난다는 것은 나라가 어지럽다는 뜻이다. 그는 이어 고소영 인사에 촛불시위, 노 전 대통령 서거가 이어지면서 민심, 특히 젊은 층의 이반이 두드러진 것은 걱정스럽다 노 전 대통령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잘 되지 않았다면 이 대통령은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 당조차 화목하게 만들지 못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원로가 지적하는 어지러움의 근본 역시 수신이다.

 

고대엔 정치가 어지러워지면 나라가 어지러워져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친하지 못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화합하지 못한다고 했다. 수신과 치국은 다른 일이 아니다. 어떤 경우 이 둘은 서로 상충하기도 한다. 제가 역시 마찬가지다. 이러할 경우 순리들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막중한 국사에 엄정한 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청렴결백, 강직하게 행동해도 인간으로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일이 있게 마련이다. 사마천은 초나라 소왕의 재상이었던 석사의 예를 들었다.

 

그는 건실하고 정직하고 청렴해 아첨하거나 권세를 두려워하는 일이 없었다. 현을 순시하는 도중 살인사건을 접했다. 재상이 범인을 찾아가보니 바로 자신의 아버지였다. 재상은 아버지를 놓아주고 자진해서 옥에 갇힌 뒤, 사람을 시켜 왕에게 이렇게 아뢰도록 했다.

 

살인자는 저의 아버집니다. 아버지를 처형하여 정치를 바로 세우는 것은 불효이고 법을 무시하고 죄를 용서한 것은 불충입니다. 저의 죄는 죽어 마땅합니다.”

 

왕이 말했다. “범인을 뒤쫓아갔지만 잡지 못한 것이니 벌을 받는다는 것은 옳지 않소. 그대는 전과 다름없이 맡은 일에 힘쓰시오.”

 

그러자 석사가 말했다. “아버지에게 사사로운 정을 두지 않으면 효자가 아니며, 군주의 법을 지키고 받들지 않으면 충신이 아닙니다. 왕께서 저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임금의 은혜이지만 벌을 받아 죽는 것은 신하로서의 직분입니다.” 그러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고대에는 법보다 부모가 더 가까웠다. 효는 유가사상의 핵심이기도 하다. 관리들은 재직 중 부모가 돌아가면 조정에서 물러나 3년간 상복을 입고 지냈다. 국가에서도 이를 어쩔 수 없었다. 고대 사회에서 부자의 관계는 법보다 가까웠다. 순리로서 강직하게 행동하다 큰 걸림돌에 걸린다. 바로 아버지가 살인자라니 법을 따르자니 불충이 되고 법을 지켜 관리로서 행동을 하자니 불효가 된다. 이때 고대의 순리는 자신의 목숨을 버림으로써 지옥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고대의 왕들은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민의 뜻에 따라정권이 탄생한다. 현대 정치사에서 순리를 찾으라면 누구를 꼽아야 할까. 무척 예민한 문제다. 강직하고 청렴하게 일한 공직자 중 일부는 이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는 너무 많아 걱정이다.

 

국무총리를 비롯한 고위공직자들의 인사청문회에서 항상 나오는 것이 도덕적인 문제들이다. 한두 가지 걸리지 않은 인물이 드물다. 정직하지 않은 정치인들이 고대의 순리와 다른 점은 후안무치하다는 것이다. 각종 증거물을 들이대도 온갖 궤변으로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들의 특징은 일은 잘한다고 자평한다는 점이다. 법령과 형벌만을 잘 지키는 자가 순리인가? 자신의 아버지가 살인자라면 과감하게 법대로 처리하고 자신의 가족이 비리를 저질렀으면 법대로 처리해야 하는 것인가? 동양사상에서는 통합적인 사고를 했다. 석사의 죽음으로 초나라의 왕은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개인의 보신을 위해 명성을 위해, 권력을 위해, 모든 것을 감추려고만 한다. 어쩌다 발각 되면 그대로 패가망신한다. 고대 순리들의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그 시절을 평화롭게 했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나라를 위해 일을 하겠다고 큰소리 뻥뻥 치는 행위는 고대로부터 지금 이 시절까지 어느 때를 막론하고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다.

 

하급자에게 떠넘길 수 없다

 

순리열전의 다섯 번째 인물은 진나라 문공의 옥관인 이리다. 죄인을 판결하는 직책인 옥관은 그 엄정성이 칼날 같았다. 그는 하급 관리의 잘못된 판단을 믿고 판결해 죄 없는 사람을 사형시켰다. 이리는 스스로 옥에 들어가 처형을 기다렸다. 뛰어난 옥관인 이리의 인물됨을 알고 문공은 하급 관리의 잘못이니 그대의 죄가 아니라면서 달랬다. 문공에게 이리는 말했다.

 

저는 장으로서 관직에 있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만 하급 관리에게 자리를 양보한 일도 없고, 또 많은 봉록을 받았지만 하급 관리에게 그 이익을 나누어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판결을 잘못 내려서 사람을 죽이고, 그 죄를 하급 관리에게 떠넘긴다는 것은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자 문공은 그럼 그대의 상관인 나에게도 잘못이 있는 것이냐라고 물었다. 고집불통의 이리에게 강한 충격요법을 쓴 것이다. 감히 군왕에게 죄를 묻지는 못할 것이기에 그쯤에서 물러날 것을 간절히 바랐다. 이리는 이렇게 말하고 그 자리에서 칼에 엎드려 죽었다.

 

옥관에게는 지켜야 할 법이 있습니다. 형벌을 잘못 내렸으면 자기가 형벌을 받아야 하며, 사형을 잘못 내렸으면 자기가 사형을 받아야 합니다. 군공께서는 제가 가려진 부분까지 심리하여 어려운 안건을 판결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법관으로 임명하셨던 것입니다. (그 뜻을 받들지 못하고) 지금 잘못 받들어 사람을 죽였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합니다.”

 

순리열전을 읽다보면 어느 순간 눈물이 고이기도 한다. 순리들은 혼란한 시국에 법과 원칙을 지키고 그 한계점에 이르면 과감하게 자신의 목숨을 버려 후세에 귀감이 되었다. 이러한 인간들이 살았던 시절에 공기는 맑고 투명했을 것이다. 환경오염이 심해지자 인간의 본성마저 점점 오염되는 것인가? 교육 방식이 달라 부끄러움이 사라진 것인가?

 

사마천 시절 중국의 정치인들은 요순시절을 그리워했다. 문명이 발달하고 편한 세상이 되었는데 우리 주위에는 먹고 살기 힘든 사람이 너무 많다. 빈부격차가 심하고, 한탕주의가 만연해 있고, 도덕적인 부끄러움이 증발했다. 그러나 관리가 정직하다면 세상은 다시 편안해진다.

 

방송법 처리의 아수라장

 

사마천은 다섯 명의 순리를 이렇게 총평한다. “손숙오는 한마디의 말로 시장을 예전처럼 회복시켰고, 자산이 병으로 죽자 정나라의 백성들은 통곡했다. 공의휴는 좋은 베를 보고 베 짜는 여자를 돌려보냈고, 석사는 아버지를 놓아주고 죽음으로써 초나라 소왕의 명성을 날렸다. 이리는 판결을 잘못 내려 사람을 죽이자 스스로 죽어 진나라 문공으로 하여금 국법을 바로잡을 수 있게 했다.”

 

세상의 원칙은 간단한 것이다. 불의를 용서하지 않고 이권을 탐하지 않고 백성의 편에서 행동하면 된다. 국회에서는 방송법 처리 문제를 놓고 난리법석이 났다. 최소한의 예의도 없고, 아수라장이다. 그 화면을 보면서 두툼한 사기열전을 덮었다. 작업실 창문으로 나비 한 마리가 다가왔다 다시 날아간다. 그 나비가 사라지는 푸른 창공을 보았다. 고대의 영혼들은 저기 구름 위에 떠 있는 듯했다. 그 영혼을 가까이 느끼고 싶다. 답답하고 무더운 여름밤이다.

 

 다음 회 예고

 

골계열전을 이야기합니다. 골계는 익살이라는 뜻이지요. 사마천은 골계열전을 통해 기지와 해악이 뛰어난 순우곤, 우맹, 우전 세 명을 말합니다. 이들이 입을 열면 포악한 군주라도 웃으면서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유머는 현대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방법 중 하나입니다. 유머가 없는 사람은 멋이 없지요. 골계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지혜와 혜안을 배울 수 있습니다. 험난한 세상을 살기 위해선 골계가 바로 비책이 되기도 하는 법입니다. 사마천은 웃으면서 어려운 문제를 풀어내는 지혜로움을 제시합니다.

 

 

 

 

 

 

 

10. 골계 열전 

 

 

인기와 성공 안겨주는 유머의 법칙 

 

 

골계는 우스꽝스러움’ ‘익살’ ‘유머를 의미한다

기지 풍자 반어 해학을 품고 있다. 숭고함이나 비장감의 대척점에 있다

때론 권위를 조롱하고, 엄숙한 상황을 바람 빠진 풍선처럼 헐렁하게 만든다

현대는 유머의 시대이고 유머를 잘 구사해야 성공하기 쉬운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머는 디지털 신호로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웃음에 대해서는 본능적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기다린다

- 내가 기계가 아니고

- 정보가 아니고

- 노예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점을 

  웃음을 통해 확인한다

유머는 인간의 표정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미묘하다.

 

웃음은 타인과 교감하는 신호이고 내 에너지를 긍정적으로 내뿜는 생명감이다

하루하루 각박한 일상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 유머는 일종의 보약이다

유머는 인체에 꼭 필요한 비타민처럼 생활의 활력소다.

 

유머가 곧 실력이다

 

대중문화를 이끌고 있는 스타들 중 개그맨 출신이 많다. 대학교수나 정치인 중에서도 유머가 있는 사람이 권위적인 사람보다 인기가 있다. 실력 있다고 평가된다. 남녀관계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재미있는 이성에게 더 호감을 갖는 법이다. 처음에야 서로의 외모에 끌리거나, 조건을 보고 반하거나, 순간적으로 혹하겠지만, 재미있는 사람과는 애정의 깊이가 더 깊어지기 쉽다.

 

유머가 없는 세상은 사막과도 같다. 세상사가 그러하듯, 유머에는 상중하의 층위가 있다. 지나치게 감정만을 자극하여 폭소를 자아내는 것은 저급하다고 볼 수 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하면 정서가 불안해진다. 지나친 즐거움은 폭풍 같아서 지나간 다음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든다. 웃음도 적당한 그 무엇이 필요하다. 그래서 옛 선비들은 지나친 웃음을 금기시했다. 웃음에도 건강하고 밝고 아름다운 웃음이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웃음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사기열전에는 사마천이 편찬한 세 명의 골계열전과 후대의 인물인 저소손이 덧붙인 여섯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이들은 기지와 재치, 웃음을 통해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한다. 절대왕정 시대 왕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왕이 자신의 실정(失政)을 반성하게 하고, 잘못을 바로잡는 지혜가 뛰어난 사람들이다.

 

이들의 문장은 쉽고 아름다워 듣는 이의 마음에 상처가 나지 않는다. 대나무처럼 올바른 지적이라고 할지라도 상대방이 심한 모멸감을 느낀다면 지적하는 사람의 의도가 바로 전달되지 않고, 오히려 반발만 사기도 한다. 인간관계는 상대적인 것이기에, 상대에 따라 처신을 달리해야 성공할 수 있다. 사람이 잘사는 길이기도 하다.

 

왕에게 낸 수수께끼

 

중국의 춘추전국, 진나라, 한나라 시대엔 데릴사위의 지위가 매우 낮았다고 한다. 법적으로도 공개적으로 무시를 당할 정도였고, 죄수 취급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사마천은 제나라 사람인 순우곤이 데릴사위 출신이라고 밝힌 뒤, 골계열전의 문을 연다. 순우곤은 비록 출신은 비천했지만, 신분의 결점을 잘 극복하고 산 귀인이었고 재상까지 역임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왕 바로 옆에서 의견을 밝힐 수 있을 정도의 지위에 올랐다. 그가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은 유머 넘치는 충언 덕분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나라 안에 큰 새가 있는데, 대궐 뜰에 멈추어 있으면서 3년이 지나도록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습니다. 왕께서는 이것이 어떤 새인지 아십니까?”

 

순우곤이 이 수수께끼를 감히 제나라 위왕에게 낸 것은, 위왕이 국사를 돌보지 않고 방탕한 생활을 하는 바람에 나라가 엉망이 되어버린 까닭이다.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운데도 대신들이 직언을 하지 못하고 왕의 눈치만 보고 있을 때 순우곤은 왕이 평소에 수수께끼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때를 기다려 자신이 하고 싶은 말 수수께끼로 만드는 기지를 발휘한다.

 

왕은 수수께끼를 푸는 심경으로 그의 말을 들었다. 곰곰이 생각하니, “이 자가 네가 3년 동안 정사를 돌보지 않고, 방탕하게 생활을 해서 불만이 많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하지만 재미있다. 그래, 나는 대붕이다. 그렇다면 멋진 답을 주어야지라는 생각을 했는지, 이렇게 대답한다.

 

이 새는 날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한번 날았다 하면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울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한번 울었다 하면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다.”

 

요즘 정치인과는 달리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지는 고대 중국의 왕은 과연 그 다음부터 다른 행동을 했다. 순우곤의 수수께끼를 풀면서 스스로 깨달은 바가 있는 위왕은 자신이 국정을 소홀히 했을 때 각 지방의 책임자를 다 불러 모아 심사한 뒤 한 사람은 사형시키고, 모범적인 관리에게는 상을 주어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했다. 왕이 쉬는 동안 할 일을 한 사람과 그때를 노려 횡포를 부린 자를 처단하여 자신이 건재함을 과시한 것이다.

 

순우곤이 기지를 발휘하여 수수께끼를 내지 않고, “왕이시여, 당신이 방탕한 생활을 하는 동안 국정은 문란해지고,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졌습니다라고 직언했다면 왕의 태도는 어떠했을까? 쾌락에 빠져 있던 왕의 눈에 그는 무례한 인물로 비쳐 엄벌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순우곤의 기지가 필요한 경우도 있고, 목숨을 내놓고 직언을 해야 할 때도 있다. 순우곤은 수수께끼라는 장치를 통해 왕의 심경을 움직였다. 그리고 병사를 움직여 그동안 제나라의 땅을 빼앗았던 주변국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국토는 다시 회복되었고, 이후 36년간 제나라는 번성했다.

 

순우곤은 작은 것을 가지고 큰 것을 바라는 마음을 경계하는 일화도 남기고 있다. 우리가 범하기 쉬운 실수 중에서 복권의식이라는 것이 있다. 복권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적은 돈으로 가장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것은 철저하게 운에 따르는 것이기에 최선을 다하는 일이 될 수 없고, 노력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요행수를 바라는 마음인 것이다. 간혹, 절박한 상황에 처한 사람이 복권에 당첨되어 인생이 뒤바뀌었다는 풍문이 마음을 설레게도 한다. 하지만 이런 복권의식은 은연중에 우리의 마음에 스며들어 상대방으로 하여금 불쾌감을 일으키게 한다. 예를 들어 100원을 주고 1000원의 물건을 사려고 한다면 상거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이러한 복권의식은 있었다.

 

제나라에 초나라가 쳐들어왔을 때, 위왕은 순우곤의 기지를 믿고 황금 100근과 사두마차 10대를 예물로 조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요청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때도 역시 순우곤은 위왕의 성정을 알아서 너무 적은 것으로 큰 것을 바라면 낭패를 본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 대신 하늘을 보고 크게 한번 웃었다. 왕명을 받고 갓 끝이 떨어질 정도로 웃어대는 순우곤을 보고 왕은 눈치를 채고, 이것이 적다고 그러느냐고 물었다. 순우곤이 대답했다.

 

어찌 그렇다 하겠습니까

 

어찌 감히 그렇다고 하겠습니까?”

 

참으로 기가 막힌 대답이다. ‘라고 하지 않는다. 왕이 답답하여 웃는 이유를 재촉하자 그때 저잣거리에서 돼지 발 하나와 술 한잔을 손에 들고 풍작을 비는 사람들의 노래를 불렀다.

 

높은 밭에서는 광주리에 넘치고

 

낮은 밭에서는 수레에 가득 차게

 

오곡이 풍성하게 익어

 

우리 집에 넘쳐나게 해주십시오.”

 

순우곤은 저잣거리 사람들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그처럼 작으면서 원하는 것은 그처럼 큰 것을 보고 그 생각이 나서 웃은 것이다라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 말을 듣고 왕은 황금 1000(), 백옥 10, 사두마차 100대로 예물을 늘렸다. 순우곤은 그 예물을 조나라 왕에게 전한 뒤 정예 병사 10만명과 전차 1000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구원병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초나라는 한밤중에 도망가듯이 군사를 물리고야 말았다.

 

위왕은 순우곤을 나라의 선생으로 극진하게 대접했다. 초나라의 군사를 물리치고 연회에서 왕은 순우곤의 주량을 묻는다. 순우곤은 한잔을 먹고 취할 때도 있고, 많이 마셔도 안 취할 때가 있다고 말한다. 술을 좋아하는 왕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묻는다. 순우곤에게 비법을 배워서 밤새워 술을 먹고 싶은 마음이었다. 왕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순우곤은 때에 따라, 즉 왕과 문무백관이 있는 조정에서 한잔을 마셔도 취하지만, 여인들과 즐거운 자리에서는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술이 극도에 이르면 어지럽고 즐거움이 극도에 이르면 슬퍼진다고 하는데, 모든 일이 이와 같습니다. 사물이란 지나치면 안 되며, 지나치면 반드시 쇠합니다.”

 

이 말을 듣고 왕은 다시 한 번 크게 깨달아 이후로는 술을 밤새워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 왕실에서 주연이 열릴 때마다 순우곤을 곁에 두었다.

 

비유적으로 충고하라

 

순우곤 다음으로 초나라의 음악가인 우맹이 등장한다. 어느 날 장왕의 애마가 늙어 죽자, 말을 매우 사랑했던 왕은 신하들에게 말의 장례식을 대부의 예로서 지내라고 명령하였다. 당연히 올곧은 선비들은 지나친 처사라고 앞 다투어 직언했지만 왕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않고 오히려 더 이상 말의 장례의식에 대해 떠드는 자가 있으면 사형에 처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 소식을 듣고 우맹이 궁궐로 들어가 곡을 했다. 왕이 놀라서 까닭을 물으니 왕께서 아끼시는 애마의 장례는 국왕의 예로서 지내야 한다고 하였다. 솔깃한 왕이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는 물음에 우맹은 이런 풍자시를 쓴다.

 

옥을 다듬어 관을 짜고, 무늬 있는 가래나무로 바깥 널을 만들고, 느릅나무 단풍나무 녹나무로 횡대를 만들고, 병사를 동원하여 무덤을 파고, 노약자들에게 흙을 져 나르게 하고, 제나라와 조나라 사신을 앞쪽에 열을 지어 서게 하고, 한나라 위나라 사신을 그 뒤에서 호위하게 하고, 또한 사당을 세워 태뢰(太牢)로 제사지내고, 만 호의 읍으로써 받들게 해야 합니다. 제후들이 이 소식을 듣는다면, 모두 대왕께서 사람을 천하게 여기고 말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 게 될 것입니다.”

 

그제서야 왕은 정신을 차리고 애마의 말고기를 사람이 먹게 했다. 그것이 짐승에 마땅한 처사임을 깨달은 것이다. 왕은 말의 제사를 대부의 예로서 지내는 것에 의견을 내면 사형을 시키겠다는 생각은 싹 잊어버렸다. 자신의 잘못을 알았기 때문이다. 음악가라고 소개된 우맹은 관료가 아니다. 그가 웃으면서 말한 이 풍자가 왕과 나라의 체면을 세워준다.

 

세상을 사는 일에 부모 자식 간에도 지켜야 할 법도가 있다. 사회구성원의 통제를 위하여 시대별로 형벌이 있어 법대로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 하지만 매사에 이렇게 근엄하고, 원칙만 따진다면 사는 일이 한여름 가뭄 든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져버린다. 유머 풍자 기지 해학은 우리의 일상을 부드럽게 하고, 성내면서 싸우는 토론이 아니라, 자신의 의견을 부드럽게 전하고 상대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게 하는 고수의 화법이다.

 

송곳 세울 땅조차 없고

 

초나라의 재상 손숙오의 기지는 죽어서도 이어진다. 그는 자신이 죽으면 아들이 가난하게 살 것을 알았다. 부잣집 개가 죽으면 문상을 오지만, 부자가 죽으면 상가가 썰렁한 법이다. 그는 자신의 사후에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면 우맹을 찾아가라고 아들에게 유언으로 남겼다.

 

과연 그대로 되었다. 손숙오의 아들은 가난을 견디지 못하고 우맹을 찾아간다. 우맹은 자초지종을 듣고 그에게 자신의 곁에서 멀리 가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리고 일년간 손숙오의 의관을 걸치고 행동과 말투도 흉내 내어, 왕이 우맹을 보고 손숙오와 착각할 정도가 되었다. 손숙오를 그리워한 왕은 우맹을 재상으로 삼으려 했다. 그때 우맹은 아내와 상의할 시간을 달라고 한 뒤 다시 왕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제 아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삼가 재상을 하지 마십시오. 초나라의 재상은 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손숙오 같은 분은 초나라의 재상이 되어 충성을 다하고 청렴하게 초나라를 다스려 초나라 왕을 패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손숙오가 죽자 그의 아들은 송곳조차 세울 만한 땅도 없고 가난하여 땔나무를 져서 스스로 먹을 것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손숙오처럼 될 바에야 스스로 목숨을 끊는 편이 낫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노래로 지어 불렀다. 노래를 다 듣고 난 왕은 손숙오의 아들을 불러 이후 10대가 잘살 만큼의 재산을 내려주었다. 사마천은 이 일화를 이야기하면서 이것은 진실로 말해야 할 시기를 알았다 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우맹은 때를 아는 사람이었다. 왕에게 한마디를 하기 위해 궁리하고 행동했다. 즉 일년 동안 손숙오의 흉내를 내어 왕이 자신을 볼 때 손숙오 생각이 나게 만들었다. 사람은 죽고 나면 그만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가 죽고 난 후에 얼마나 그를 기억할 것인가? 국정에 바쁜 왕의 경우에는 말할 나위가 없다.

 

우맹은 일년을 기다려 왕에게 다가갔다. 이 절묘한 타임은 더도 덜도 아닌 바로 그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 풍자에 뛰어난 우맹은 자신의 재능을 발휘한다. 즉 자신 아내의 입을 빌려 직언을 피하고 풍자를 하였으며, 더불어 시를 지어 불렀다.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했을지 눈에 선하다.

 

사람을 울리는 일보다 웃기는 일이 더 어렵다고 한다. 그리고 골계열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당대 엘리트가 아니라, 마이너 출신들이었다. 순우곤은 데릴사위, 우맹은 가수, 또 이들보다 200년 뒤의 인물 우전은 난쟁이 가수였다. 우전은 진시황 때의 사람이다.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한 최초의 황제로 그 권위나 위엄이 역대 다른 왕보다 무겁고 무서웠다. 천하의 진시황도 우전의 재치 앞에서는 웃으면서 자신의 잘못된 점을 깨달았고, 그의 뜻을 들어주었다.

 

난쟁이 가수 우전은 진시황의 연회에 초대된 자리에서 호위병들이 비를 맞으면서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기지를 발휘했다. 연회에서 진시황의 장수를 빌면서 만세를 부를 때 난간으로 나아가 호위병들을 불러 나는 키가 작지만 연회장에서 편히 쉬고 있고, 너희들은 나보다도 키가 큰데 가련하게 빗속에 서 있으니 키가 큰 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 말을 들은 진시황은 웃으면서 호위병들을 반으로 나누어 교대로 쉬게 했다.

 

일단 상대를 긍정하라

 

같은 뜻을 지닌 말이라도 재치와 풍자를 섞어 이야기하면 듣는 이가 즐겁고 효과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뛰어난 재능을 필요로 한다. 골계열전에 나오는 인물들이 당대 마이너로서 혼자 공부를 했을 것이다. 문학과 경전을 통해 자신만의 화법을 개발하고, 그때그때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을 길렀던 것이다.

 

풍자나 해학은 자칫 잘못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사람을 웃기려다가 냉장고 취급을 받기 쉽다. 썰렁하다. 춥다 등의 표현으로 덜 익은 유머에 대한 지탄을 받는 것이다. 그저 웃자고 하는 이야기면 조금 창피하면 될 일이지만, 국사를 논하는 자리나 진시황과 같은 절대권력자 앞에서는 머릿속에 문장이 빙빙 돌아도 감히 입 밖으로 내지 못할 수도 있다. 이들은 정확한 때를 알고, 또한 배짱이 두둑한 사람들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한다. 우전은 진시황이 궁전 정원을 크게 넓히려 하자 이렇게 풍자했다.

 

좋은 일입니다. 그 속에 새와 짐승을 많이 풀어놓아 길러 적이 동쪽에서 쳐들어오면 고라니나 사슴을 시켜 그들을 막게 하면 충분할 것입니다.”

 

골계열전의 유머 기법이 있다. 일단은 상대방의 말을 긍정한다. 잘못을 바로 알려주기보다는 한번 꺾고 넘어간다. 그리고 거울을 디밀듯,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게 한다. 우전은 일단 좋은 일이라고 하고, 군대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진시황은 평생 암살 위험에 시달렸고, 호시탐탐 적의 칼이 제국을 노리고 있었다. 정원을 넓히는 것도 좋지만, 일의 선후를 생각하게 하는 우전의 말은 진시황의 자존심도 지켜주었다. 수사법인 비유법은 위대하다. 서양의 예수 역시 이 비유법으로 어리석은 제자들을 교육시켰다.

 

황석영의 별명은 황구라

 

우리 문단은 유머가 풍부한 곳이다. 문단에는 유머의 대가가 몇 명 있는데, 그 중에서도 대선배인 황석영 선생을 우리는 당신이 없는 자리에서 감히 이렇게 부른다. ‘황구라!’ 우리나라에는 황구라와 더불어 방구라’ ‘백구라가 있다. 이 세 명은 그 이름만으로도 강력한 울림이 있는 우리 시대의 정신이기도 하다. 방구라는 방배추로 더 알려진 방동규 선생, 백구라는 백기완 선생이다. 이른바 조선의 3대 구라다. 구라는 비속어로 과장된 거짓말이라는 뜻이지만, 이분들은 긍정적인 의미로 단어를 바꾸어놓았다.

 

조선의 선비인 퇴계나 율곡 같은 울림이 있는 구라, 이 시대를 대변하는 또 다른 호인 구라. 어떤 이는 이분들을 조선의 3 라지오(라디오)’라고도 부른다. 라지오가 어느 지방의 방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라디오라고 하면 오기(誤記). 라지오라고 해야 의미 전달이 잘된다. 그럼 구라와 라지오는 무엇인가? 황석영 선생과 방동규 선생이 술자리에서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 저 형, 요즘에 우리들을 위협하는 신진 라지오들이 밀려오고 있습니다.

 

: 그래. , 그런 일이 있어. 그게 누군데? 이름 한번 불어보라.

 

: 유홍준이, 도올, 그리고 이어령 교수지요.

 

: 야야, 갸들이 무슨 라지오야. 인생이 없는데. 갸들은 그냥 교육방송이야.  3대 교육방송으로 하면 되갔구먼.

 

황 선생이 언급한 존경받는 우리 시대의 3대 지성을 단박에 3대 교육방송으로 지정해버리는 방구라의 순발력, 과연 구라는 구라다 싶다. 이분들은 교육적인 분들이므로 뭐 그리 틀린 것 같지는 않다. 이 구라를 곱씹어보면 라지오의 의미가 파악된다.

 

라지오에는 3대 조건이 있어야 한다. 뭐 좀 안다고, 입술을 나불거린다고 라지오가 되는 게 아니다. 콘텐츠가 꽉 찬 방송처럼, 일단은 남다른 인생이 있어야 한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황 삼대 구라의 인생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두 번째가 지성이다. 뭘 알아야 된다. 세 번째가 남다른 경륜이다.

 

이들이 이 구라의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는 그 시대가 각별했다. 전쟁과 분단이 있고, 잔인한 슬픔이 있고, 가슴 찢어지는 이별과 회한이 사무쳐 있다. 방 선생이 설파한 인생이란 그런 인생이다.

 

우선 황구라를 보자. 황구라는 방북·망명·투옥 등으로 15년을 보냈다. 작가로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돈 벌고, 상 받고 하는 그런 세월 동안 그는 단 한 편의 소설을 쓰지 못했다. 그냥 살아남았다.

 

사람은 오늘을 사는 거야

 

방북하기 전, 그는 이미 장길산 삼포 가는 길과 같은 작품으로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다. 황구라가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 황석영은 이제 갔다는 말도 유령처럼 떠돌았다. 15년간을 그렇게 보냈으니 그런 악소문이 돌 만도 했다. 하지만 지금 황석영은 포스가 강한 문단의 어른이면서 동시에 베스트셀러 작가다. 황구라의 저력을 잘 대변하는 구라가 있다.

 

사람은 ××, 누구든 오늘을 사는 거야!”

 

어떤 이는 황구라 최고의 구라가 바로 이 문장이라고 했다. 그는 어제의 고통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어제의 슬픔으로 오늘 눈물 흘리지 않는다. 오로지 오늘을 산다. 그에게 어제를 이야기할 오늘은 없다. 오늘을 진정으로 살아낸 사람은 진정으로 아름다워라.

 

그럼 백구라는 어떤 구라인가? 백 선생의 구라는 장엄한 백두산과 같은 포부와 도도히 흐르는 한강 물줄기와 같은 깊이가 있다. 백 선생이 스물한 살 시절, 스무 살의 방 선생을 만났다. 이 상황은 배추가 돌아왔다’ 39쪽에 잘 정리되어 있는데 그 문장을 인용하는 대신에 내가 술자리에서 어떤 이에게 전해 들은 구라를 그대로 적어보자. 당시 방구라는 이었고, 주먹으로 자신의 나와바리(영역)’를 다스리던 시절이었다.

 

: 자네 주먹 좀 쓴다고 하던데 몇 명이나 상대할 수 있나?

 

: 뭐 그저 한 삼십 명 정도는.

 

그때 백이 벌떡 일어나 방의 싸대기를 올려붙였다. 주먹 제일 방구라는 어이가 없었다. 피죽도 못 끓여 먹은 것 같은 파리한 지식인 청년 백기완은 그야말로 한주먹감도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게 도대체 어떤 시추에이션인가 싶어 방구라가 잠시 어리둥절하고 있자 백구라가 천천히 앉으면서 말했다. “사내로 태어났으면 삼천 명이나 삼만 명은 상대해야지 겨우 삼십 명이야. 에이, 너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마. 어서 썩 꺼져.”

 

백 선생 역시 방 선생의 그릇을 짐작하고 그런 언행을 했을 것이다. 동네 양아치에게 그렇게 했다가는 시쳇말로 뼈도 못 추릴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와 가섭의 염화미소, 선불교에서 임제선사가 스승인 황벽선사에 세 번이나 싸대기를 맞고서야 깨달은 거시기와 같은 구라였다. 백 선생이 황벽선사의 흉내를 낸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대장부끼리의 이러한 구라는 이제는 전설 따라 삼천리가 되어버린 일들이다. 한 시절 당대의 민족방송, 민중의 라지오인 백기완 선생은 그 장대한 구라로 일세를 풍미했다.

 

석영아 들어라. 저 드넓은 만주 벌판의 우리 여인네들이 한번 월경을 하면, 그 설원이 모두 장엄하게 핏빛으로 물들었도다.”

 

한마디로 백 선생의 구라는 민족적이고, 지금은 사라진 수컷들, 대장부의 기개가 넘치는 민중의 방송이었다. 우리 어린 것들은 백 선생의 그러한 구라 밑에서 다 꺼져가는 의협심의 불씨를 다시 지피곤 하였다.

 

나는 아직도 배 고프다

 

백 선생의 전설적인 구라는 히딩크라는 네덜란드의 라지오를 감복시켰다. 2002년 월드컵 국가대표팀의 정신교육 강연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조선 범의 기상을 선수들에게 불어 넣어주었다. 세계적으로 보기 드물게 강인한 조선 범처럼 뛰어라. 그 강연 덕분이었는지 모를 일이지만, 그때 우리 선수들은 조선 범의 기상으로 뛰고, 차고, 날았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히딩크는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룩했다. 히딩크 역시 만만치 않은 구라다.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와 같은 절묘한 구라로 우리 국민의 축구 한을 풀어주었으니, 히딩크를 조선 구라 반열에 넣어도 되지 않을까 싶다. 히딩크는 백기완 선생을 자신이 제일 존경하는 한국인으로 손꼽았다.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어느 해이던가, 연말 모임에서 황석영 선생이 이제 환갑을 맞아 우리에게 마지막 구라를 터뜨린 적이 있다. 일본 여인의 신음소리와 요코하마 항구의 뱃고동소리가 울려 퍼지는 남녀 운우지정의 카세트 테이프였다. 이제 그 음란 방송은 사모님의 간곡한 부탁, ‘이제 당신도 환갑인데 그런 건 좀으로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이렇게 하나, 둘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구라가 있다.

 

말은 글이 아니다. 글은 말이 아니다. 글은 눈으로 읽어서 느낀다. 하지만 말은 귀와 온몸으로 스며들어 심장을 터뜨린다. 그래서 근사한 구라는 예술이다.

 

한편 구라는 독일의 히틀러를 만들어냈고, 미국의 링컨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요즘 뜨고 있는 오바마도 만들어낸다. ‘근사한 구라에는 감동과 몸 울림이 있다. 그 감동을 생방송으로 아주 조금이라도 들은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사기열전에는 사마천의 골계열전이 끝나고 서한 시대의 저소손이 원고를 보충하였다. 저소손은 골계 인물에 대한 여섯 이야기를 전해주는데, ‘이것을 읽어 보면 기분이 유쾌해지므로 후세 사람들에게 보일 만하다라고 쓴다. 그 여섯 편 가운데 위나라의 서문표 이야기는 요즘 개그맨들이 보면 자신의 작품으로 각색해서 쓸 만한 이야기로도 읽힌다.

 

위나라의 업현이라는 마을에 현령으로 부임한 서문표는 그 마을 장로들을 불러놓고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의논했다. 그 자리에서 그는 황하의 신인 하백에게 신붓감을 바치는 일로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막은 이러했다.

 

업현의 관리들이 백성에게서 거둔 세금 중 상당량을 하백에게 여자를 바친다는 명목으로 착복한다는 것이다. 때가 되면 무당이 백성들 집에서 예쁜 여자를 하백의 아내로 지정하고, 마치 살아있는 사람에게 시집을 보내는 것처럼 신부 화장을 시키고, 물가에 제궁을 지어 그곳에 열흘 정도 기거하게 하면서 고깃국과 밥을 준다. 그리고 날짜가 되면 여자를 신부랍시고, 뗏목에 방석을 깔고 강가로 띄워 보낸다. 처녀는 결국 물에 수장되고 만다.

 

이러한 풍습 때문에 딸을 가진 집에서는 무당이 자신의 딸을 하백에게 시집보낼 것이 두려워서 도망치는 경우가 많았다. 성안 백성 수가 점점 줄어들었고, 세금 때문에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어려워진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악습이 계속되는 이유는 하백에게 아내를 얻어주지 않으면, 백성들을 익사시킬 것이다라는 민간의 속언 때문이었다. 장마철 하천 범람에 따른 수해에 대한 두려움이 나은 속언이었다.

 

미신을 역이용한 기지

 

수리시설 부족으로 자주 장마가 지니 백성들의 두려운 마음을 이용한 악랄한 행위였다. 서문표는 그 말을 듣고는 마을 장로들에게 그러한 행사가 있을 때 자신을 부르라고 했다. 그날이 되어 서문표가 물가로 나갔다. 그곳에는 삼로, 관속, 호족, 마을의 부로들이 모두 모여 있었으며, 구경나온 백성도 3000명은 되었다. 무당은 일흔 살이 넘은 노파로 여제자 10여 명이 따르고 있었는데, 모두들 비단으로 된 홀옷을 걸치고 무당 뒤에 서 있었다. 서문표가 말했다. “하백의 신붓감을 불러오시오. 내 그녀가 아름다운지 추한지 보겠소.”

 

장막 안에서 처녀를 데리고 나와 서문표 앞으로 왔다. 서문표는 그녀를 본 뒤 삼로, 무당을 돌아보고 이렇게 말했다. “이 처녀는 아름답지 않소. 수고스럽겠지만 무당 할멈은 황하로 들어가서 하백에게 아름다운 처녀를 다시 구해 다음에 보내드리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려주시오.” 그리고 바로 이졸들을 시켜 무당 할멈을 황하 속으로 던졌다. 조금 있다가 서문표가 말했다.

 

무당 할멈이 왜 이렇게 꾸물거릴까? 제자들은 가서 서둘라 하라며 제자 한 명을 황하 가운데로 던져버리게 했다. 그리고 조금 지나 제자가 왜 이토록 꾸물거릴까? 다시 한 사람을 보내 재촉하게 하라며 또다시 제자 한 명을 황하 속으로 던졌다. 모두 세 명을 던지고 서문표가 말했다. “무당과 제자들은 여자이기 때문에 사정을 말씀드리기가 어려울 것이오. 수고스럽지만 삼로가 들어가서 말씀드려 주시오.”

 

다시 삼로를 황하 물속으로 던졌다. 서문표는 붓을 관에 꽂고 몸을 경처럼 굽혀 물을 향해 꽤 오랫동안 서 있었다. 곁에서 보고 있던 장로와 아전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했다. 서문표가 돌아보며 말했다. “무당과 삼로가 돌아오지 않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다시 아전과 호족 한 사람씩을 물로 들어가 재촉하게 하려 하니, 모두들 머리를 조아려 이마가 깨져 피가 땅 위로 흐르고 얼굴은 잿빛으로 변했다. 서문표가 말했다. “좋다. 잠시 머물러라. 잠깐만 더 기다려보자.” 조금 있다가 서문표가 다시 말했다. “아전들은 일어서라. 하백이 손님들을 오래 머물게 하는 것 같다. 너희들은 모두 돌아가라.” 업현의 관리나 백성은 크게 놀라고 두려워했다. 이후로는 감히 다시는 하백을 위하여 아내를 얻어주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웃음은 가면이다

 

그는 사람들이 신으로 믿었던 하백의 강인 황하를 사람의 강으로 만들었다. 이후 백성들을 동원하여 12개의 하천 공사를 벌여 황하의 물을 백성의 논에 이어주었다. 노역이 번거롭고 힘들었지만, 서문표는 100년 뒤에 자신을 기억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공사를 추진했다. 살아있는 처녀의 목숨을 바치면서, 그 일로 부당하게 세금을 징수당하면서, 풍년을 기원하던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천을 파 수리시설을 정비해서 인 하백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역사는 이렇게 뛰어난 한 사람에 의해 신의 시대에서 인간의 시대로 넘어가는 것이다.

 

이전에 서문표는 사람들이 믿고 있던 하백의 존재를 부정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기지를 발휘하여 구시대 인물들을 제거한 것이다. 자신들의 신념에 의해 사라진 무당이나 마을의 원로들은 희생양이었다. 법으로 강제집행했다면 거센 반발이 있었을 것이다.

 

이 살벌한 골계는 웃음을 머금고 있다. 엉겁결에 강으로 던져지는 무당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우스운 일이다. 그 웃음 속에는 무서운 칼이 숨어 있다. 진정한 고수는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결과를 도출한다.

 

인간의 웃음은 일종의 가면일 수도 있다. 그 웃음 뒤에 슬픔이, 고통이, 죽음이, 번뇌가 숨어 있다. 우리의 하회탈은 그런 웃음의 조각이다. 골계열전은 우리에게 웃음의 탈을 선물하고 있다.

 

 

 

 

 

 

 

11 영행열전

 

 

 

아첨꾼으로 찍히면 말년 안 좋고 비참한 평가 받는다

 

악어의 이빨 사이에 낀 고기조각을 뽑아 먹고 사는 악어새는 권력자 곁에서 기생하며 부와 권력을 누리는 인물을 상징한다. 아첨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러나 어떤 권력자는 아첨꾼에게 많은 사랑과 혜택을 준다. ‘아첨하여 출세하기의 이면을 들여다봤다.

 

원재훈시인 whonjh@empal.com

 

사람의 마음이 항상 뽀송뽀송하고 밝고 환한 것만은 아니다. 중국 고대 인물을 이야기하면서 간혹 옛날에는이라고 회상하는 사마천은 아첨하여 출세한 자들의 인생유전을 열전에 소개한다. 중국 한나라 시절에 옛날이라고 하던 그 시절에도 이런 인물들은 충신열사보다도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절대 권력자 곁에는, 한여름 밤 가로등에 모여드는 날벌레들처럼 아첨꾼들이 맴돈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변화 없는 인간유형 중 하나다.

 

아첨은 칭찬의 왜곡된 형태다. 우리는 누구나 칭찬을 듣고 싶어한다. 유아기의 칭찬은 아이의 인성을 바르고 힘차게 한다. 성장기의 칭찬은 인생의 목표를 향한 젊은 피에 에너지를 공급한다. 어른이 되어서도 칭찬을 듣는 사람은 성공할 확률이 높다.

 

아첨과 칭찬의 공존

 

가만히 세상일을 들여다보면 행복과 불행이 한 자매라는 불교 우화처럼, 선과 악이 함께 기록되어 있는 성경 창세기처럼, 아첨과 칭찬도 아슬아슬하게 공존해왔다. 남녀를 불문하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칭찬을 듣고 싶어한다. 이 속성에서는 우리가 위대한 인물이라고 존경하는, 즉 범인과는 다른 탁월한 권력자도 벗어나질 못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떠돌던 때도 있었다. 칭찬과 아첨은 서로 다른 의미이지만 아첨도 타인을 칭찬하는 행위 중 하나다. 그것이 바르지 못할 때 우리는 아첨이라고 하고, 바르게 가면 칭찬이라고 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경계선이 어디인지 모호할 때가 있다. 확연하게 표시만 나지 않는다면 아첨인지 칭찬인지 듣는 사람은 알 수 없다. 인간은 자신에게 아첨하는지 알면서도 진정인 것으로 생각하고 좋아한다.

 

한나라 효문제 때 황제의 총애를 받는 세 명의 신하가 있었다. 사인(벼슬을 하지 않는 선비)으로 등통과 조동과 북궁백자라는 환관이 그들이다. 북궁백자는 인자한 풍모가 있었고, 조동은 망기술(구름 모양을 보고 점치는 것)이 뛰어나 황제의 관심을 끌었지만, 등통은 별다른 재능이 없었다고 한다. 세 사람은 황제의 수레를 함께 타고 외출했다. 등통은 어떠한 사람이기에 별 재주도 없이 황제의 총애를 받게 되었을까.

 

등통과 황제는 기이한 인연이 있었다. 황제를 만나기 전 등통은 노를 가지고 배를 젓는 황두랑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황두랑은 선주가 노란색 모자를 쓰고 있어 붙은 이름이다. 어느 날, 효문제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효문제는 하늘을 오르려고 애를 썼는데 잘 오를 수 없었다. 그런데 어떤 황두랑이 뒤를 밀어주어 오를 수 있었다. 누가 이렇게 기특한 짓을 하니 싶어 살펴보니 등 뒤로 띠를 맨 곳에 솔기가 터져 있었다. 잠에서 깨어난 효문제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황두랑들의 모습을 살펴봤다.

 

기이하게도 황두랑 중 등통이라는 자가 꿈속에서 본 모습 그대로였다. 효문제는 그때부터 그를 가까이 두고 지냈는데, 등통 또한 행동을 삼가면서 신중한 성품으로 황제의 곁에 머무는 것을 좋아했다. 심지어 휴가를 주어도 조용히 왕의 곁에 머물기를 좋아하니 효문제의 총애는 깊어졌다. 등통은 자신이 재주가 없음을 잘 알고 있어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왕을 모시는 진정한 왕의 남자로서 행동했다. 심지어 효문제가 종기를 앓아 고생할 땐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고 종기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냈다.

 

황제의 혀처럼

 

말 그대로 황제의 혀처럼 굴었다. 황제는 관상쟁이에게 자신이 총애하는 등통의 관상을 보게 하니 가난해서 굶어 죽을 상이라는 답변이 나왔다. 황제는 내가 있는데 그런 일이 있겠느냐면서 등통에게 촉군 엄도현에 있는 구리 광산을 주고 마음대로 돈을 만들어 쓰라고 명했다. 등통이 만든 돈인 등씨전은 온 나라에서 쓰였다. 부자도 이런 부자가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굶어 죽을 상이라는 예언은 점쟁이의 오판이었을까? 정치권력과 관련된 부는 그 권력과 더불어 지는 법이다. 등통의 몰락은 아주 사소한 일에서 비롯됐다.

 

어느 날, 황제는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나를 사랑하는가?”라는 동화 같은 질문을 등통에게 한다. 등통은 주저 없이 물론 태자를 따를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한다. 등통은 별다른 재주는 없었지만, 정치권력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다. 황제가 세상을 떠나면 태자가 천하의 주인이 될 것이니 그에게 미리 잘 보여 두려 한 것이다. 황제는 태자가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지, 등통의 말이 맞는지 궁금해졌다.

 

효문제는 태자가 문병을 오자 자신의 종기 고름을 빨아내게 했다. 태자는 등통처럼 잘 빨지는 못했다. 또한 단 한 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태자는 등통에게 앙금이 남았다. 요즘에도 아첨 떠는 행위를 시쳇말로 빨아준다고 표현한다. 이 말의 기원이 등통이 효문제의 고름을 빨아준 것에서 직접적으로 연유된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고름 빨기 아첨은 의미가 상통하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 ‘장자에도 고름을 빨아주는 우화가 나온다. 자신도 더러워하는 고름을 입에 넣어 빨아주니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느끼는 것이다.

 

효문제가 죽자 태자인 효경제가 즉위했다. 효문제 사후 등통은 모든 벼슬을 그만두고 조용히 집에서 살았지만, 돈을 주조하는 일이 빌미가 되어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많은 빚까지 지게 됐다. 등통을 아꼈던 효경제의 누나인 장공주가 등통을 먹고살게 해주려고 재산을 주었지만 그마저 관리가 몰수해버렸다. 그래서 결국 등통은 재산 한 푼 없이 남의 집에서 얹혀살다 죽었다. ‘가난해서 굶어 죽을 상이라고 한 점쟁이 말은 사실이었다. 솔기가 터져 비단옷이 다 찢어지고 맨살이 드러난 형국이었다.

 

말년이 좋아야 잘 산 인생

 

동양에서는 사람의 인생 중에서 말년이 편안한 것을 최고로 친다. 등통의 말년이 비참한 것을 두고 사마천은 아첨꾼의 최후를 비극적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이러한 비극적인 생애보다 더 비참한 것은 후대의 평가다. 아무도 등통을 모범적인 인물로 보지 않는 것이다. 아첨꾼의 특징은 후대의 평가에 둔감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행동을 당당하게 한다.

 

젊은 날의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지만, 늙어서 고생을 사서 한다는 말은 없다. 젊은 시절엔 기운이 넘치고 할 일이 많으니 고생은 성공의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 늙어서는 그럴 수 없다. 이제 40대부터 노후대책을 생각하고 있다. 대다수 사람은 등통과 같은 운이나 재주가 없어 막대한 부가 없으니 별로 잃을 것도 없다. 그러나 잃을 것이 없다고 즐거워할 일만은 아니다. 회사에서 상관, 거래에서 을 빨아주어야 하는 현실이 등통과 특별히 달라 보이지 않는다. 크건 작건 아첨과 아부는 탁월한 재주가 없는 사람의 삶의 방편이다.

 

영행열전의 인물들은 총신이라고 불린다. 군주의 총애를 받는 신하라는 뜻인 총신은 사사로운 이권을 멀리하고 올곧은 충신과는 차이가 있다. 주로 자신의 일신을 위해 행동하는 아첨꾼을 뜻하기 때문이다. 사마천 당대의 황제인 무제에게도 한왕의 손자인 한언, 환관 이연년이라는 총신이 있었다.

 

한언은 말타기, 활쏘기를 잘했고 황제가 흉노를 치려 할 때 흉노의 군사에 대해 잘 알고 있어 왕의 사랑을 받았다. 더불어 아첨을 잘하여 왕과 함께 기거할 정도가 되어, 부와 권력을 누렸다. 그러나 한언은 무제의 아우에게 미움을 받았다. 왕의 총애로 간이 부어서인지 궁녀와 정분까지 나누어 결국 황태후의 노여움을 사 죽음에 이르게 된다. 황제는 한언의 이러한 일을 다 알고 있음에도 황태후에게 사과했다고 하니 황제가 한언을 아끼는 마음을 알 수 있다. 아첨의 위력은 이토록 대단한 것이다.

 

환관인 이연년은 총신이었다. 원래 춤을 추던 예술인이었는데 어떤 죄를 지어 궁형을 받은 후, 황제의 사냥개를 돌보는 구중이라는 직업을 얻었다. 이연년의 누이동생도 춤으로 황제의 사랑을 얻었다. 이연년은 아첨, , 노래를 겸비한 엔터테이너였다. 그러나 누이동생이 죽자 황제의 마음이 떠나 이연년은 결국 처형을 당하게 된다.

 

우리는 중국 궁중에서 황제의 총애를 받는 인물로 환관을 먼저 떠올린다. 중국 역사에서 환관에 의해 나라가 붕괴되는 일이 자주 있었다. 환관과 외척은 군주에게는 경계의 대상인 줄 알면서도 가까이 해 실수하게 되는 대상이기도 했다.

 

한나라 환관 이연년의 계보는 한나라 말기 영제에 이르러 극치에 달한다. 손자를 예뻐하면 그 손자가 할아버지 수염을 잡아당긴다는 옛말이 있지만, 황제의 총애를 받는 환관이 어느 정도까지 나라를 말아먹을 수 있는지는 열 명의 환관인 십상시(十常侍)’가 잘 보여줬다. 영제는 십상시의 우두머리인 장양을 아버지라고, 그 아래인 조충을 어머니라고 불렀다고 하니 그들의 권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 ‘후한서에는 이들의 행태를 이렇게 비판한다.

 

손으로 왕의 작위를 거머쥐고 입으론 하늘의 법을 머금어 그들의 뜻에 따라 모든 형벌과 상이 결정되었다. 황제의 명을 왜곡해 삼족이 영예를 누렸으며 기분 내키는 대로 종실을 멸했다. 이 때문에 한나라 기강은 크게 어지러워졌다.”

 

달콤함, 망국의 근원

 

여성이 미모로 황제의 마음을 빼앗아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경국지색과 더불어 황제가 환관, 아첨꾼에게 모든 것을 맡기면 나라가 온전할 리 없다. 후한 말 환관들이 이러한 권력을 거머쥐게 된 배경에는 어지러운 정국이 자리 잡고 있었다. 황제들은 10세 미만에 사망한 경우가 3명이나 있을 정도로, 재위기간이 짧았다. 30세를 넘긴 황제는 단지 2명이었다. 즉위 때의 나이도 10대 초반 아니면 10세가 되기 이전이 대부분. 황제의 어머니인 태후의 섭정과 그로 인한 외척 세력이 권력을 장악한다. 어린 황제가 성년이 되어 외척 세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경우에는 자신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환관 세력에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외척 세력과 환관 세력의 다툼이 일고 두 세력에 비판적인 관료집단과의 갈등이 생긴다.

 

유교를 국가 통치이념으로 하는 한나라는 도덕적 교양과 인품, 학식이 있는 선비를 지방관으로 선발했다. 수도 낙양의 태학을 나온 예비 관료들이 후한 시대에 3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선비들이 학연과 지연으로 여러 학파를 형성하면서 세력을 형성했다. 올곧은 선비들은 외척과 환관 세력이 권력을 장악한 현실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세력을 사족이라고 하는데, 사족 출신 정부 관리들은 환관에게는 눈엣가시였다. 환관 세력은 사족들이 사사로이 당파를 지어 국정을 혼란스럽게 한다고 중상모략해 사형, 유배, 금고 등의 형으로 처벌했다.

 

한나라 환제와 영제 때 한 차례씩 일어난 이러한 탄압을 당고(黨錮)’라 한다. 당고는 예비 관료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사족들에 대한 일종의 공포정치이고, 그들의 공적인 활동을 금지하는 조치이기도 했다. 이러한 계략으로 환관 세력의 위치가 더욱 확고해졌다.

 

평생 환관의 품에서 떠나지 못한 영제가 사망하고 소제가 14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어머니인 하태후가 섭정했다. 하태후의 오라버니 하진이 대장군으로서 정권을 장악했다. 환관 세력에서 외척 세력으로 권력이 넘어갈 분위기였다. 우리가 널리 읽고 있는 삼국지의 역사적인 첫 무대가 되는 시기다.

 

하진은 환관 세력을 몰아내고자 원소, 동탁과 결탁했으나 하태후는 오랫동안 권력을 누려온 환관들의 저항이 두려워 하진의 계획에 반대했다. 하진은 환관을 우습게봤다. 고우영 화백이 그린 만화 십팔사략을 보면 환관들이 하진을 암살하는 장면이 나온다. 환관들이 하진 장군을 둘러싸고 칼로 찌르는데 하진이 ! 따가워라고 했다. 침에 쏘인 듯한 표현이었다. 환관들을 우습게 본 하진을 고우영 화백이 유머로 그려낸 것이다. 그러나 권력의 세계는 냉혹했다. 환관 세력은 하진 가문을 몰살시켰다. 환관 10명이 주도한 십상시의 난이다.

 

환관들의 만행에 분개한 원소는 궁성에 진입해 환관 1000여 명을 살해했다. 동탁도 낙양에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진입해 권력을 장악한 뒤, 소제를 폐위시키고 헌제를 즉위시켰다. 소제의 폐위 문제에서 동탁과 사이가 벌어진 원소는 고향으로 돌아가 군대를 모집하고 동탁과 일전을 벌이기 위해 토벌군을 모집한다. 원소가 주도한 토벌군에서 조조, 손견, 유비 등이 등장한다. 환관을 비롯한 아첨꾼들은 한 나라를 무너뜨리는 거대한 독버섯으로 성장하기도 한다. 둑은 바늘구멍 하나로도 무너진다. 군주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 중 하나는 달콤한 아첨이다.

 

조선, 아첨을 논하다

 

조선시대에도 아첨에 대한 흥미 있는 자료가 있었다. 부산대 한문학과 강명관 교수는 오유재집(烏有齋集)’ 필사본 문집에 대한 글을 썼다. 이 문집을 건넨 노인은 자신의 조상이긴 하지만 저자를 모른다는 이상한 말을 했다. 강 교수는 그 문집 중 붕당론이라는 글에 부기된 논아첨 : 아첨을 논한다는 글을 번역해서 소개했다. 강 교수가 혼자 읽기에 아깝다고 한 조선시대 아첨론은 다음과 같다.

 

선비가 출세하려면 공부도 출중해야 하지만, 아첨하는 능력도 있어야 한다. 공부가 있으면 출세할 기본이 마련된 것일 뿐 꼭 출세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남의 질시로 출세를 못할 수도 있다. 반면 공부가 없어도 아첨을 잘하면 출세할 가능성이 높다. 요컨대 아첨은 출세에 꼭 필요한 조건이라 하겠다.

 

아첨을 잘하는 사람은 총명하고 약빠른 사람이다. 세상을 성현의 말씀처럼 고쳐보자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는다. 부자(夫子·공자)와 정암(조광조의 호)이 실패했던 전력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서 비판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날카로운 어조로 권귀(權貴)를 비판한다. 권귀가 앞으로도 장구하게 조정을 쥐락펴락할 것이라고 예상되면, 권귀가 하는 일을 올곧은 어조로 조목조목 비판하되, 넌지시 빠져나갈 구멍까지 일러준다. 당연히 인격적인 비판은 하지 않는다. 권기는 그 사람의 비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안다. 불러 한 자리를 떼어주면, 몇 번 고사하는 척하다가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조정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대고 그 자리에 나아간다.

 

비판하는 척하는 게 최고

 

권귀의 권세가 장구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면, 마치 원수를 대하듯 매서운 비판을 퍼붓는다. 실정(失政)은 물론 인격적인 부분까지 마구 비난한다. 물론 백성을 위해서, 조정을 맑게 하기 위해서 등의 명분도 잊지 않고 곁들인다. 이것은 권세를 잡으려 세력을 키우고 있는 다른 당파의 우두머리에게는 더할 수 없는 좋은 신호가 된다. 이 사람이 펼친 비판은 외견상 무척 정대하지만, 기실은 벼슬을 달라고 칭얼대는 아첨일 뿐이다. 이처럼 비판하는 척하면서 하는 아첨이야말로 아첨의 가장 높은 도인 것이다.

 

하지만 이 아첨꾼은 조정에 들어오면 옳고 그름을 따지던 입을 굳게 다물고, 권귀가 내뱉은 말의 속내를 헤아리는 데 나날을 다 보낸다. 오로지 권귀의 생각을 좇기에 급급할 뿐이다. 아첨꾼이 언관(言官·사헌부와 사간원)이 되면, 올곧은 언론은커녕 권귀의 뜻을 받들어 반대 당파를 공격하는 상소를 올리기 바쁘고, 천관(天官·이조)을 맡으면 반대 당파를 배제하고 자기 당파만 심는 인사를 하고, 지관(地官·호조)을 손에 넣으면 백성의 궁핍한 살림살이를 보살필 생각은 하지 않고, 오로지 권귀로 당파의 재산을 불릴 방도만 궁리한다.

 

포장(捕將·포도대장)이 되면, 도둑을 잡을 생각은 하지 않고, 백성을 잡도리할 꾀만 내는 것은 물론이다. 올곧은 선비와 백성들이 항의하면, 포의(布衣)로서 감히 조정의 일에 간섭하려 한다면서 정거(停擧: 과거 응시 자격 정지)를 시키고, 심한 경우 잡아다 옥에 가두어 매를 치기도 한다.

 

요컨대 아첨꾼은 사직과 백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자리에서 떨려나지 않기 위해, 권귀가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하고, 권귀가 흡족해 할 만한 일만 골라서 할 뿐이다. 아첨의 지극한 도는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오유재가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 문장은 시공을 초월한 정치권력의 행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권력자가 존재하는 한, 아첨꾼의 존재는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 이기붕 역시 그런 권력의 맛을 누리고 즐겼을 것이다.

 

이기붕은 연희전문학교를 다니던 때 선교사 J. R. 무스의 통역으로 일한 것이 인연이 되어, 미국 아이오와주 데이버 대학을 졸업했다. 그 후 뉴욕에서 허정 등과 교포신문인 삼일신문 발간에 참여하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34년에 귀국한 그는 1945년 이승만의 비서로 취직했다. 이승만의 총애를 받으면서 1949년 서울특별시장, 1951년 국방부 장관이 됐다. 절대 권력의 신임을 얻은 그는 정치인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다. 바로 국민의 사랑이었다. 4·19혁명이 발발하자 이기붕 일가는 자살했다.

 

그러나 정치의 상하관계에 있어 어느 선까지가 아첨이고 어느 선까지가 충언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의 인물 중 한명회는 아첨꾼일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마천도 이 열전에서는 비교적 적은 수의 인물만을 아첨꾼으로 규정해 다루고 있다.

 

미모 사라지니 마음 떠나

 

사마천 열전에 따르면 미자하는 춘추시대 위나라 영공의 총애를 받던 여인인데, 자신이 먹던 복숭아를 임금에게 주어도 칭찬을 받을 정도로 임금의 눈과 귀를 멀게 한 미인이었다. ‘한비자에 기록된 미자하의 이야기는 이렇다.

 

옛날 미자하가 위나라 군주에게 총애를 받았다. 위나라 법에 따르면 군주의 수레를 훔쳐서 타는 자는 월형에 처해진다. 미자하의 어머니가 병이 나자 어떤 사람이 이 사실을 듣고 밤에 미자하에게 알려주었다. 미자하는 군주의 수레를 몰래 타고 궁 밖으로 나아갔다. 군주가 이 사실을 듣고 효성스럽구나! 어머니를 위하는 마음 때문에 자신의 행동이 월형에 당할 수 있다는 것도 감내했구나라고 말했다.

 

다른 날 미자하가 과수원에서 복숭아를 먹다가 달자 다 먹지 않고 그 절반을 군주에게 먹였다. 그러자 군주는 나를 사랑하는구나! 자신의 입맛을 잊고 내게 그것을 주는구나라고 말했다.

 

세월이 흘러 미자하의 외모가 전같지 않아 군주 사랑이 식었을 때 그녀는 군주에게 죄를 지었다. 그러자 군주는 이 여자는 과거에 내 수레를 몰래 탔고, 제가 먹던 복숭아를 내게 먹인 적이 있다고 말했다. 미자하의 행실은 처음과 달라진 것이 아니었지만 군주의 마음이 변했기 때문이다.

 

미자하를 빗댄 사마천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은 권력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주변을 서성거린다. 미자하는 자신의 미모로 군주의 사랑을 얻었지만 미모가 사라지자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신하가 군주에 대한 처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한비자에 나오는 역린(逆鱗)’이라는 말은 용의 목 아래에 있는 직경 한 자쯤 되는 비늘인데, 다른 비늘과는 방향이 반대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을 건드리면 용은 그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다.

 

역린은 건드리지 말라

 

군주는 용에 비유할 수 있다. 용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등에 올라탈 수는 있지만, 역린을 건드리면 목숨을 잃는다. 선비의 처신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미자하와 역린을 통해 잘 드러난다. ‘아첨에 의존하지는 말되 역린도 건드리지 않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교언영색을 말한다. “공자는 말씀하시길 듣기 좋게 꾸미는 말과 보기 좋게 꾸미는 낯빛에는 인덕이 드물다라고 하셨다.” 주자는 공자의 이 말을 이렇게 해석한다. “()는 좋게 하는 것이다. ()은 잘하는 것이다. 말을 듣기 좋게 하고 얼굴빛을 잘하여 겉으로만 꾸며 사람을 기쁘게 하는 데 힘쓰면 인욕이 생겨나서 본심의 덕이 없어진다. 성인은 표현이 박절하지 않으므로 드물다고 표현했으니 실상은 인덕이 전혀 없음을 알 수 있다. 배우는 자가 깊이 경계해야 할 것이다.”

 

한 번 더 풀이하면 교언은 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간살을 떠는 것이고, 영색은 고의로 공경하는 모습을 지어 다른 사람에게 아첨하는 것으로, 위선자의 모습이다. 영행열전의 인물들은 교언영색의 달인들이었다. 어쩌면 그들도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심경으로 최선을 다해 아첨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말년이나 후대의 평가보다는 지금 당장이 더 중요했다. 이러한 사람들이 있어 충신과 열녀 그리고 올곧은 선비들의 후광이 더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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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노중련열전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가장 고귀하다

 

 

 

고위 공무원은 여러 가지 사회적인 혜택과 높은 급여를 받는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한지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 그동안 들어간 밑천을 뽑자는 심경으로 악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이런 당연지사의 틀과는 정반대의 인물이 있다. 다른 사람의 고민을 덜어주고 세상을 구하고도 대가를 받으려 하지 않는 사람이 가장 고귀하다.

 

인간의 삶은 무척 복잡하고 미묘하다. 얼굴 모양처럼 성격도 체질도 마음도 제각각이어서 일정한 틀을 만들기 힘들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고대 중국과는 다른 가치관으로 살기에 선악의 기준도, 인품을 평가하는 내용도 다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인물들이 갖는 공통점은 사심이 없다는 것이다. 백범 김구의 마지막 휘호는 사무사(思無邪)’. 김구는 이 글을 쓴 후 흉탄을 맞았다. 그래서 이 휘호에는 혈흔이 남아있다. 선비는 생각에 사심이 없는 사무사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사마천이 이야기하는 노중련은 전국시대 전란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선비의 본분을 지킨 인물의 전형이다. 제나라 사람인 노중련은 뛰어난 인물이었음에도 벼슬에는 나아가지 않고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며 살았다. 그가 조나라에 있을 때의 일이다.

 

진나라의 백기가 조나라 군사 40만명을 몰살하고 승승장구하던 시절이었다. 조나라는 진나라가 무서웠다. 진나라 군사들은 조나라 동쪽 한단을 포위하고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나라 효성왕은 주위 제후국들에 구원을 요청하면서 안전부절못하고 있는데, 조나라를 도와주던 위나라의 객장군인 신원연이 평원군을 통하여 효성왕에게 말했다.

 

40만 몰살하고 포위

 

진나라가 갑자기 조나라를 포위한 까닭은 이렇습니다. 이전에 진나라 소왕은 제나라 민왕과 힘을 겨루어 제()라고 일컫다가 곧 제라는 칭호를 쓰지 않았습니다. 이제 제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