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우회·독립운동

이장춘 2007. 11. 19. 07:29

 

 

 
단파방송연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물망비와
오늘 글 내용을 발표하신 손보기 교수님 ( 원안)입니다.
 
 
손보기 교수가 말하는 민족 항일사와 단파방송 연락운동 
 
 
손보기 교수님은 사학자로 1957년
미국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대학교 역사연구원과
 1958년에는 캘리포니아대학교 국제문제연구원으로 계셨습니다.
 1964년 연세대학교 사학과교수가 되시고 이듬해부터 연세대학교 
박물관장으로 계셨습니다. 1980년 국사편찬위원을 거쳐
한국독립운동사연구회장·국제고인류학회 집행위원·
 한민족학회장 등을 역임하셨습니다.  
 
 1988년 단파방송 연락운동에 관한  
토론회에서 발표하신 글입니다
 
 
 
여기서 오늘의 주제에 대해 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단파방송이라고 하면 방송을
한 것 같이 느껴지며 사건이라고 하면 우연히 일어난
 일같이 풀이하게 됩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은  모든 위험을
무릅쓰면서 겨레의 앞날을 위해 일제를 속이면서
단파를 듣고 겨레에 전하지 않을 수 없어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항거 할 수밖에 없었던
여러분들의 뜻있는 역사 사실을
다루자는 마당입니다.
 
겸손도 좋지만 가볍게 다루면 안 됩니다.
우연한 일이 아니고 겨레의 피 끓는 마음으로
숨기면서 이룩한 빛나는 역사입니다. 일을 하신 분들은
 갖은고생, 두려움 속에서나마 단파를 듣고 나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했던 것입니다.
 
자칫 사그라지는 겨레의
바람을 북돋고 용기를 주었던 것입니다. 일제의
거짓된  선전을 깨닿게  해 주었고   젊은이들에게도
 바람과 힘을 주었습니다. 매우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전해 졌다고 생각 됩니다마는 알려지지 않은
 가운데 넓고 크게 퍼진 것도 사실입니다.
 
항일기의 끝에 와서 겨레의 운동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는 이를 보는눈이
잘못된 것도 많았습니다. “ 잘 못 돼 있다 ” 도
뿌리부터 가려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근대사에서 1930년 지나서
40년 45년까지는 우리 국내에서의 저항운동이나
 민족운동이 거의 사라져 버린 것처럼 이야기 되고
 있었지요. 하기야 저 황국신민의 서사를 지어서
우리들에게 날이면 날마다 모이게 한 것도
일본인이 아닌 한국 사람으로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전쟁분위기가 극에 달했을 때
외국에서 오는 단파를 듣고 겨레에게
전해 왔던 여러 가지 사실을 우리가 오늘
증인을 통해서 뚜렷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항일 정보 전쟁이었습니다.
사건일 수가 없습니다.
 
일제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건이고
그들이 꿈에도 생각 할 수 없었던 돌발 사건입니다.
우리가 일본 사람이 부르던 이름을 그대로 쓴다면
그들의 역사 인식 속에 빠져 들게 됩니다.
 
일제에게 고초를 당한 여러분에게
미안한 일이 됩니다. 우리 역사의 낱말들에
일인들을 주인으로 한 술어가 많은 것은
크게 잘 못 된 일입니다.
 
일본인들의 총칼 아래서 도저히
불가능했던 그 철통 속에서 감시와 탄압 속에서
어떻게 할 수 있었는가? 그리고 무었을 하였는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단파의 내용을 이분들로
말미암아 광복을 염원하던 지도자들과
뜻있는 집안, 학생들에게까지도
퍼져나가게 했습니다.
 
저도 그때 학생이었습니다.
학생이었기에 직접 들을 수 없었고
벽초 홍명희선생의 손주, 위당선생의 자제분을
통해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젊은 사람들도 바람을 가지고
광복은 반드시 찾아온다는 신념으로 살아갔던
 것입니다. 총 칼을 가지고 싸운 싸움이 높고 귀합니다.
그러나 나라사랑의 뜻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는
조직을 지닐 수 없었어도 서로가 마음으로
 통하고 있었습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말이
이 경우에 맞습니다. 서로가 마음을 통했던
 것입니다. 임시정부, 광복군, 카이로선언소식을
뜻있는 집안끼리는 이분들의 노력에 의해서
 다 알고 있었습니다.
 
겨레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러 넣어준
이 숨겨져 있던 뚜렷한 역사를 우리는 더욱
깊이 연구 하고 평가 하여야 합니다.  땅속으로
 들어갔던 국내의 항일운동에 새로운 힙을
 불러 넣어준 것이었습니다.
 
증언 해 주신 여러분들이 하신
그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큰바
있었습니다. 이시기 우리 역사의 새로운
풀이를 해야 할 값진 기회를 만들어 주신
여러분께 고마움을 깊이깊이 드립니다.
 
여러분들이 하신 일이 숨겨지고
나타나지 않아서 가볍게 다루어진다면
역사를 도려내는 일이  됩니다.    그때 일부는
일본의 신민이 되기로 정한 사람도 없지 않았습니다.
절망 속에 빠진 사람도 있었지요. 더 나아가
앞잡이가 된 사람도 있었지요.
 
그야말로 그건 반민특위에서
다루어야 했을 사람들인데 제대로
다루어 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보통
친일파라고 했는데 저는 친일이란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친일이란 어떤 쪽이냐 하면
우리 겨레를 위해 일본사람들과 친하게 해서
우리 이익도 택할 때 그게 친일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그런 부류는 부일입니다. 일본에 붙어
자기들만의 이익을 취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겨레의
역사 평가에서도 여태까지 우리 근대사가
잘못 쓰여진것도 있습니다. 고대사도 잘 못 써져있고
조선 후기가 놈 낳게 풀이되었다고는 하나
일제의 인식을 따르는 것도 나옵니다.
 
우리가 항일 저항한 시대인데
어떻게 일제시대가 됩니까? 독립이란 말은
흔히 하고 보통 쓰고 있습니다만 우리 민족은
일찍부터 독립된 나라를 지녀 왔습니다.
 
1945년에 와서 비로소 독립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잃었던 독립을 되찾은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되찾아야  하는 일은  오늘의
주제입니다. 단파방송사건이니, 도청사건이니 하는데
 이는 일본 사람들 시각으로 본 것입니다.
 
뜻이 없이 저지른 것이 아니고
나라사랑, 겨레사랑의 깊은 샘에서 정보 싸움
이었습니다. 어둠속에서 숨어서 고통하며 부품을
만들고 끼었다 뺐다 하면서 정보를 얻어내는
싸움을 할 수 있었지요.
 
이는 본인들이 겸손해서 얘기 하지 않았던
크나큰 겨레사랑의 실천입니다. 역사는 자기인식이
 있어야 발전하고 자기말로 나타내야 합니다. 사건이라고
합니까? 성립이 안 됩니다. 어디까지나
 단파정보 싸움인 것입니다.
 
말부터 고쳐야 합니다.
송남헌 선생님이 말한 대로 해외 국제정보를
우리에게 전도 해주고 퍼뜨리게 한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어려운 가운데 퍼뜨릴 만큼 퍼뜨린 거죠. 역사책에서
이건 바로 잡아야 합니다.
 
단파정보싸움에 관여하신
여러분을 존경하고 또 그런걸. 더 밝혀서
훌륭하게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너무
느낌이 커서 눈물이 나오려고 합니다. 오늘날의 방송,
이승만 박사 때도 방송을 심하게 제약해서 자유방송이
아니었지요.   편파방송이 얼마나 많아요.
 
왜 오늘 방송사에서는 안 나왔습니까?
여기  나오신 분이  계시면 손들어  보세요.
 ( 이때 KBS직원이 손을 들며 KBS라디오에서
방송토론회 내용을 전부 녹음하고 있다하여
 장내가 다소 웃음이 감돌다 ) 미안합니다.
 
녹음만 가지고 한다고 해도
 안 하시는 것보다 좋겠습니다. 그렇죠,
신문사에서 안 오신 것 같아요. 방송과 신문이
이러하니 우리 역사를 제대로 보자는 뜻이
적은 것 같습니다. 심하게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우리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평가를 하고
우리가 갈 길을 제대로 찾을 수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단파 정보싸움을 하신 여러분에게
거듭 치하를 드립니다.
 
 

 
단파 방송 연락운동에 직. 간접으로
곤련 되신 분들이고 이 분들 가운데는 독립을 맞은
새 나라을 열기 위해 힘을 기울이신 분들이
많으셨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