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방송

이장춘 2007. 11. 26. 04:50

 

 

 

 

 

 
 
 
 
경성방송국 1930년대까지 아나운서들
 
 
 1924년 시험방송시절부터 1930년대 말까지
 경성방송국에서 아나운서로 방송을 하신 분은 20명
내외입니다.윗줄 왼쪽부터, 이옥경, 마현경, 김영팔, 박충근,
 이혜구, 남정준, 이하윤, 김문경, 최아지, 윤태림, 이석훈,
이계원, 송진근, 양제헌, 송영호, 박용신, 이현님이고 
이혜구님과 박용신님은 생존 해 계십니다.
 
 
 
 
이옥경님은 시험방송 때부터 방송을
하신분입니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니고
태어난 님은 국내에서 고녀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음악대학을 다녔습니다. 여기서 만난분이
노창성님이고 그분과 사랑이 익어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노창성님이 방송국 창설에 실무 주역이
되어 시험방송을 하는 동안 여자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필요 했지만 그 시절에는 그런 일에
나서는 여자분들이 없었습니다.
 
마지못해 노창성님이 부인에게 그 일을
해주도록 권유하게 되고 이옥경님은 남편의
일을  돕는다는  마음으로   방송국에   발을  들여
놓았는데 방송이 전파를 타자 장안의 화제가 되고
인기가 치솟아 아나운서를 구경하러 방송국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기도 했습니다.
 
방송국이 개국하던 2월 16일에는
일본인 아나운서와 번갈아 사회를 맡는 영광을
차지하기도 하면서 방송생활에 익숙해 갔지만
아이들이 생기고 가정일이 바쁘게 되어
방송국을 떠나셨습니다.
 
방송국을 떠나신 후에도 남편이
오랜 기간 방송에 종사 했는지라 방송인과는
친분이 있었고 부산 피난시절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들 노대흥님을   KBS어린이 합창단에
입단시켜 KBS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9남매를 둔 이옥경님의 둘째 딸
노명자님은 올해 80세로 우리나라 최초의
패션디자인, 노라노 여사라고 해서 지금도
그 계통에서 열심히 일하고 계십니다.
 
마현경님은 경기고녀를 졸업하고
방송국에 들어와서 방송인이고 소설가이며,
연극 연출가였던 최승일님과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남편 최승일님이 공산주의를 신봉해서 아들딸들과 함께
 월복했지만 님은 월북을 거부하고 신당동 집에서
 여생을 보내셨다고 같이 방송국 생활을 하셨던
신경석님이  전하셨습니다.
 
김영팔님은 최초의 남자 아나운서로
소설가로도 명성이 높았습니다.  남자 아나운서가
 한사람밖에 없던 터라 팔방미인 격으로 방송을 했지만
1935년 지금의 장춘에 있는 만주 신경방송국으로 가시고 
국내를 드나들며 문학 활동을 했지만 공산주의 신봉자로
광복 후 월북하고 6.25전쟁 때 세상을 뜨셨습니다.
 금서목록에 올라 있던 님의 문학작품들이
요즈음 국내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박충근 아나운서는 1931년에
방송국에 들어와 축구중계방송을 비롯해서
우리나라 스포츠 중계방송의 창시자라고 불리
정도로 중계방송에 능수능란했습니다.  1935년
부산방송국 개국때 그곳에 가셨다가 1936년
 9월에 방송국을 떠나 신문사 체육부장을
하셨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혜구님은 1932년 6월에 아나운서로
방송국에 들어와 1933년 4월 이중방송 실시때
연예방송제작에 힘을 기울였고 제2방송과장, 제 2방송부장
직무대리, 해방후의 중앙방송국장을 지내며 우리말을 지키고
우리 문화를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1949년
11월 마지막으로 방송국을 떠나 스스로 창설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학장을 하시면서 많은 후학을 길렀고
예술원 회원이기도 한 님은 올해 99세로
방우회 회원이시기도 합니다.
 
이혜구님과 비슷한 시기에 들어오신
남정준님은 퍽 부드럽고 날카로운 음성으로
오랫동안 아나운서 생활을 하다가 광복이 될 무렵부터
 기획, 편성 등의 일을 하셨는데 공산주의를 신봉한
관계로 6.25때 월북하셨다고 합니다.
 
이하윤님 역시 이혜구님과 같은 시기에
들어오셔서 교양방송을 하시다가 1935년 동아일보로
 가셨고 1940년 동아일보가 폐간된후 문학 활동을 하시며
지내시다가 광복 후 대학 강단에서 후학을 기르시고
이름 있는 문학인이 되셨습니다.
 
김문경, 최아지님은 최초의 공개채용으로
 들어오신 여자 아나운서라고 할 수 있고 최아지님은
 이름을 최정석으로 바꾸어 최정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년 정도 근무하고 소학교 교사가 되어 교장으로
 정년퇴직 하신 분입니다.
 
김석원 장군의 동생으로 널리 알려진
김문경님은 1930년대 중반까지 근무 하시다가
가정으로 돌아 가셨고 미국에 가셔서 사시는 동안
 자주 왕래 하셨지만 1990년대 초부터
 소식이 끊겼습니다.
 
윤태림님은 잘 알려진 심리학자가 되셨고
소설가인 이석훈님은 문학 활동을 하시다가
 6.25때 납북 당하신 후로 소식을 모릅니다.
 
1935년부터 방송과 인연을 맺은
이계원님은 당대 인기아나운서로 장안의
화재의 인물이었고 광복후 방송과장을 거쳐 기감을
맡기도 하셨습니다.   6.25후에 VOA로 가셔서
1960년대 중반에 과로사 하셨습니다.
 
양제현, 송진근, 박용신님은
방송도 방송이지만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으로
옥고를 치루고 방송국을 떠나신 분들입니다.
(독립운동 단파방송편 참조) 
 
이현님은  농구중계방송을 제일 먼저
하신 분이고 단파방송 연락운동 후에  방송국을
 떠나셨지만 1980년대까지 농구계에서 또는
방송관련 단체에서 활동 하셨습니다.
 
송영호님은 6.25전시 방송과장을 거쳐
 4.19후에 방송관리국장을 지내셨습니다.
 
 
 
한편에 많은 분들의 얘기를 쓰다 보니 알맹이가
없어 보입니다. 자세한 글은 제 불로그 방송인물편,
독립운동 단파방송편, 기본테마편을 보아 주셨으면 합니다.
위에 말씀드린 분외에도 몇분 계시지만 방송국 근무기간이 짧고
또 자료도 찾기가 어려워 일단 다음기회로 미루었고 여기 나오신 분들도
제 불 로그 방송인물편이나 독립운동단파방송편, 기본테마편에 개인별로
소개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개별적인 얘기를 일일이 보시기
어려운 분을 위해 괄적인 얘기만 썼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절박했던 우리시대의 삶이 소리없이 잊혀지고 사라지는 가운데 이 장춘 선배님의 열정으로 흘러간 추억을 더듬고 되새기는 아름다운 시간을 만들어 주시는 그 열정에 찬사를 올림니다. 억조창생 후손들에게 길이길이 밝혀줄 역사의 산 증인이 되어 거룩하고 아름답게 남아 천년 세월이 흘러 가더래도 모진 풍상이 휘몰아 치더라도 춘하추동 이 장춘 선배님의 방송이 메아리치며 우리들의 역사를 증언하며 변함없이 지키며 소리없이 말하여라 ! 해와 달과 목숨을 같이하며 변함없이 역사를 전하면서 역사를 지키어라 ! 미주 방송인협회 총무국장 양 방수(Paul Bang Soo Yang)근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