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기술

이장춘 2007. 12. 6. 11:51
 
 

세계에서 가장 큰 대출력 당진 송신소 모습과
10. 26 그날 당진송신소를 찾은 박정희 대통령과 악수하는
당진송신소장 박경환님입니다.
 
  
 
방송기술인 박경환 !
1947년에 방송국에 들어와 서울이
공산군의 발길에 짓밟히던 1950년 6월 27일
중앙방송국 피난길의 마지막 방송을 마치고 그것이
피난길인줄도 모른 체 쏟아지는 폭우를 접해
칠흑같은 밤길을 떠났습니다.
 
타고 가던 트럭이며 비상방송기기를
모두 버린 채 폭파되는 한강다리를 뒤로하면서
 생사 갈림길에서 남으로 남으로 밀려 제주도까지
갔고 그곳에 또 하나의 방송국을 세웠습니다.
 
6.25로 잿더미가 된 방송국을
다시 일으킨 후 정동과 남산, 여의도방송국 시절을
거치면서 세계에서 가장 큰 대 출력의 당진송신소를
세우고 그 시설이 준공을 보던 날 1979년 10월 26일
 흔히들 10. 26이라고 불리는 그날 !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업무수행현장을 목격 하시면서
세계를  향해 전파를 내보냈습니다.
 
한강폭파현장을 목격한 6.25참전 방송인 박경환님
 
 

그날밤 한강의 폭음을 들으며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한강을 같이 건너신분은 9분으로 위 사진은 폭파된 한강다리모습과
 사선을 같이넘으신  박경환님(가운데), 김성배님(오른쪽), 정관영(왼쪽)님
세분의 모습입니다. 이 밖에 왕종현님이 생존해 계시고 박능상,
전주호, 박문순, 김홍린, 하정용님은 세상을 뜨셨습니다.
밑에 있는 사진은 그때를 회상 하시는 박경환님입니다  
 
 

 
 1927년 서울에서 태어나신 박경환님은
 경성공립공업학교를 나오시고 1947년 8월 군정시절에
 방송국에 들어오셔서 정동 연주소에 근무하는 동안 1950년
 6월 27일 밤 귓전에 들려오는 포성을 들으면서, 대전에서
 걸려온 이승만대통령의 전화 목소리를 서울에서
 방송한 것처럼 하는 바로 그 문제의 방송을
몇 차례고 송출할 수밖에 없었던일이
두고 두고 가슴아픈일이었습니다.
 
그날밤 11시 방송을 마치면서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군 트럭에
비상 방송기기를 싫고 잠시의 피신이라고 생각하면서
 폭우속의 칠흑 같은 어둠속에 자신이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정동 방송국을 떠났습니다.
 
한강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자동차길이
완전히 막히고 사람들이 다니기도 어렵게 되었습니다.
9사람의 방송인이 가지고 오던 비상방송기기 마저 버린 채,
칠흑 같은 하늘을 용산에서 영등포를 향해 쉴 사이 없이
날아드는 공산군의 예광탄을 바라보면서 또 다리위에
ㄷ 자로 놓여있는 사과상자(다이너마이트 상자)를
바라보면서 발걸음을 재촉해 한강을 건넜습니다.
 
바로 그 순간 지축을 흔드는 폭음과 함께
 한강다리는 폭파되었습니다. 불과 2- 3분 사이에
삶과 죽음이 갈리는 순간이었습니다. 발걸음을 옮겨
 어둡고 험한 알지도 못하는 관악산 언저리 길을 따라
 안양부근에 도달 했을 때는 28일 아침 7시
습니다. 방송이 나올 리 없었지만 그래도
라디오를 켰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분명 KBS방송에서 행진곡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방송마저 사라짐을
 확인하면서 남으로 향했습니다.
 
쉴 사이 없이 발걸음을 재촉해서 
 30일 대전에 도착했을 때 VOA, VUNC, NHK,
북경방송, 모스코바방송, 평양방송등 우리말로 나오는
들을 수 있는 라디오방송을 모두 듣고 그것을 분석해서
국무회의에 보고하라는 지시가 떨어져 밤낮없이
그 일을 했습니다.    그 방송모니터   보고서가
올라가야 국무회의가 열리던 때였습니다. 
 
7월 14일이 되자 금강 전선이 무너지고
그때부터 방송국은 또다시 대구를 향해서 떠났습니다.
대구에서 비상방송을 하고 있을 때, 부산에서 유앤 한국위원회가
열러 그 방송을 위해 부산에 출장 가 있던 중 제주방송국설립
명령이 떨어진 것은 8월 7일의 일이었고 그 달 14일, 어려운
 항해길 따라 제주에 도착한 일행은 방송시설을 서둘러
 9월 20일부터 제주방송국 전파를 발사 했습니다.
 
불과 한 달도 안 되어 방송국이 탄생했으니
숨 쉴 사이도 없었습니다.  9.28수복으로 서울에 와서
 시설을 복구하고 방송을 했지만 또 1.4후퇴로 밀려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정부로 부터 6.25참전 유공자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길고 긴 역정의 피난시절의 얘기가
있지만 다음 기회로 미룹니다.
 
방송기기정비나 중계방송에 능한 박경환님이
 그런 일에 힘을 기울이는 동안 1978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출력을 지닌 당진송신소 건립책임을 맡았고 1년여에
걸쳐 공사를 마무리하고 박정희 대통령이 첫 방송 송출
스위치를 누르면서 역사적인 당진 송신소 전파가
세계를 향해 퍼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박정희 대통령은
세상을 뜨시고 역사는 바뀌었습니다. 님은 얼마
안 있다가 제 1방송의 송신소인 소래송신소장을 거쳐
 제작기술국장, 그리고 기술이사자리를 맡으셨습니다.
흑백 TV시대에서 칼라방송으로 바뀌는 등 방송환경이
 급변하는 시대에 방송기술의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한 시대를 마감하고 1983년 방송국을 떠나셨지만
 민주화된 방송법이 시행 되면서 1988년 제 1 기
KBS민선이사로 선임되어 3년간 마지막
방송 일을 마무리 지으셨습니다.
 
성실하고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 박경환님은
 급하면 급한 대로 세심해야 할 때는 세심하게 빈틈없는
 인생을 사시면서 동료, 선후배를 막론하고 친근감을
유지하면서 삶을 이어오셨습니다.
 
지금도 건강한 모습으로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깊은 관심 속에 방송의 앞날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방송인들의 모임인 방우회,
KBS사우회, 문공회등에서 모임을
같이 하고 계십니다.
 
 
 관련 사진 모음  
 
 

KBS제1기 민선이사회시절 박경환님 (뒷줄 왼쪽에서 두번째분) 입니다. 
 


부산 피난시절  젊은 박경환님의 모습입니다.(뒷줄 오른쪽)
뒷 줄 오른쪽 분 앞줄 왼쪽부터 김창구, 강문수, 문시형, 이중집님이고
뒷줄은 왼쪽부터 김기형, 김성열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정동에 있던 방송국이 1957년 남산으로 옮기고 얼마 안되어  
정동과 남산을 연결한다는 방송기술인들이 정남회라는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 모임에서 박경환님의 모습입니다. (서계시는 왼쪽에서 세번째분) 사진은 
 앞줄 왼쪽부터 한기선, 이종훈, 이인관, 박명희, 임시현, 오신팔님
둘째줄 왼쪽 부터 정유언, 이현철, 한사람 건너 노익중님
뒷줄 왼쪽부터 김성열, 윤은상, 박경환, 박능상, 정경순,
  김성배, 박준병, 운광로, 한사람건너 이중집님입니다.
 

2006년 6월 1일 KBS사우회 홈커밍 데이날의 박경환님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분입니다.
 
 


1990년경 소래소신소를 찾은 벅경환님 (앞줄 오른쪽에서 세번째분 ) 입니다.
 

정동 연주소 옛 안테나가 서있던 그 앞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2007년 4월 )
 
 
모두 함께하는 방우회 춘하추동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