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이장춘 2008. 8. 14. 10:24

 



매일 오전 7:00/再 오후10:00◆진행: 배창복,김옥경◆연출:서영숙 ◆작가:손정화, 박양정  
 
  
 대북방송에서 한민족방송까지 60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새로 수립되던 바로 그날 밤 !  북한동포들에게 보내는
30분간의 방송을 내 보냈습니다.  그로부터 대북방송,  대공방송,
자유대한의 소리 방송, 사회교육방송,  그 이름은 바뀌었어도 60년간을
  북한 동포들을 비롯한 공산권 동포들에게 친근한 벗이 되었으며 국민들에게
는 공산권에서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의 삶의 모습을  전하고  허울좋은 
 공산주의 정체를  밝히는 등 민족이 한마음으로 이어지도록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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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자유대한의 소리 대공방송 (전편, 후편)
 

 

 KBS, 자유대한의 소리 대공방송 (전편)

 

 KBS, 자유대한의 소리 대공방송 (후편)

 

 국내 최대의 다목적 송신소 KBS 김제송신소

http://blog.daum.net/jc21th/17781044

 

자유의 메아리와 대북방송의 추억

http://blog.daum.net/jc21th/17780196

60년대의 대북방송 「두고 온 형제에게」 시그널과 그 사연

http://blog.daum.net/jc21th/17781304

1960년대 대북방송 「옛동산에 올라」 방송추억

http://blog.daum.net/jc21th/17782368 

 

1960년대 대북방송 자유의 등대 씨그널 / 이혜경

http://blog.daum.net/jc21th/17780738

 

 

 

1961년 5월 16일 반공을 국시의 제1로 삼은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그해 7월 1일을 기해 대공방송과 해외방송을
전담 할 국제 방송국을 탄생시켰습니다. 
 

남북의 장벽,  동서의 장벽이 가로 막혀
사림은 오가지 못하고 부모,  형제 자매, 친지들이
오랜 세월 떨어져 있었어도 전파는 장애를 해치고 장벽을
넘었습니다.  멀리 멀리 압록강 두만강까지! 사하린, 북간도까지 !
더 나아가서 5대양,  6대주를 누비며 마음과 마음을 이어 주었습니다.
이제 장벽은 많이 걷혔어도 한 쪽에서는 아직도 어둠을 걷어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대공방송이 첫 전파를 내 보낸지 60년!
대공방송과 젊음을 같이했던 본인은 하루속히 남과 북이
 하나되는 마음으로 이어질것을 바라면서 글을 씁니다. 
 
 
 
북한에서 월남 귀순하신 분들은 대북방송을 듣고
자유대한을 찾으셨다고 했고 자유대한의 소리 방송을 통해서
 대공 방송에 적극 협조 하셨습니다.  귀순자 중 , 이수근은 방송도 하고
협조하는 척 했지만 결국 이중간첩이었습니다.  위의 사진부터 비행기를
 몰고 월님 귀순힌 노금석, 정락현, 배를 타고 오신 이필은,  1. 21
청와대 습격 미수 후 전향한 김신조이고 맨 밑의 사진은
위장간첩 이수근이 압송되는장면입니다.
 
 
 
 
 
북한은 무력도 무력이지만 전파를 통해서
남한을 적화 시킬 수 있을것이라고 믿었습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이루워져 포성이 잠시 멈췄어도 그들은 곳곳에
대규모의  송신 시설을  갖추고 대남전파를  무제한  발사 했습니다. 
미쳐 손 못 쓰던  대한민국 땅에 밤이면 우리 방송보다도 북한방송이
더 잘들리는 지역이 많았습니다.  우리 전파가 북한보다 우위를 보인것은
1970년대 들어 와서 부터였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남과 북이
극히 제한적이였지만 얘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하린, 북간도 등지에서 일본을 거쳐 동포들의 소식이 전해 졌습니다.
 
 
북한은 얘기를 하면서 제일먼저 서로간에
비방방송을 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대북빙송을
하던  저는 가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위에서
결정된일이라 1년에 여섯번의 기본방송순서를 바꾸고 두번의
방송 체널명을 바꾸면서 남북 공동성명 정신에 따랐습니다.
자유대한의 소리 방송이란 극히 자연스런 방송채널
명칭이  제 3방송으로 바뀌었습니다.  

1972년 11월 10 오후 두시 대한민국에서 대공방송이 끝났음을 알리는 방송을 했습니다.
 
 
이것도 모자라서 3방송이라는 말 자체를
없애라는것이 북한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온것이
사회교육방송이지요.    그때  중앙방송국장은  최창봉님이고
대공과장은 고 전옥배님,  실무 일선에서 제가 그 일을 담당했습니다.
두번의 체널명칭을 바꾸고 여섯 번의 주간 기본방송순서가
 바뀌던 사례는 방송사상 없는 일이었습니다.
 
 
대공방송은 1967년 8월 15일을 기해서 국내에서 최초로 싱야 철야 방송을 실시 했습니다.
 
 
우리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북한은 모든 약속을 깼고 통일 혁명당의 방송이다, 뭐다 하면서
마치 남한에 공산세력이 있어서 그들이 방송 하는 것 처럼 위장 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다 해서 대남방송을 하더니 드디어 노골적으로 남북대화를
일방적으로 파괴하고 본격적으로 대남방송을 실시하면서 남한을 교란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로서는 자유주의를 뒤 엎을 수가 없어서 서울에서
 열린  88올림픽을 계기로 공산주의는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북한  땅에서는  지금도  우리 동포들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 분들도  대한민국  국민이기에 한 품안에서 
살 날이 와야 합니다. 우리는 한마음  한 뜻으로 뭉쳐야
합니다.  이를 위한 방송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앞으로 기회 있을때마다 얘기 할 것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위, 아래 사진은 대북방송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기로 하던때까지
대북방송에 힘을 기울이시던 분들입니다.   
 

 
 
1963년 대북방송을 하던 국제방송국 간부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