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와 방송

이장춘 2009. 6. 25. 19:03

 

 



최초의 방송 종군기자 한영섭의 6.25전쟁 취재록

 


6.25때 대표적인 종군기자라고 할 수 있었던

 韓永燮님은 1949년 2월 KBS에 들어와 1950년 2월

육군사관학교에서 생도들과 함께 지내면서 종군기자 훈련을

 받고  6.25가 일어나자 군 관련 뉴스가 주종을 이루면서

종군기자로 죽을고비를 여러번 넘기면서

바쁜 취재 활동을 했습니다.

 

1956년 KBS 내신부장을 거쳐 59년에는

보도실장을 했습니다. 보도실장 시절 4.19를

 맞이하셨고 4.19가 일어나던 해 10월 방송국을

떠난후 방송현업에서는 물러 났지만

 한국방송인 동우회,  대한 언론인회

등에서 활동을 계속  하십니다.

 

지금은 한국방송인 동우회 회장 과

 6.25종군기자회 회장을 맡고 계십니다.

올해 82세이신 한영섭님은 지금도 건강한 모습으로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50년대 60년대

대표적인 여자아나운서로 이름 있었던

강영숙님과 삶을 같이 하십니다.

 

 

오늘 올린  글은 한영섭 회장님이

6.25 종군기자를  하실 때 얘기로 2003년

월간 대한뉴스에 올라있는 글을

 옮겼습니다.

 


대한뉴스기자와 인터뷰장면입니다.

 
 본지(대한뉴스)가 찾아간 그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 듯 젊고 활기찬 모습으로 언론계

원로들의 모임인 ‘한국방송인 동우회’ 회장의 자리를

 지키며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었다.

 

처참했던 6.25사변 국민과 함께

울고웃고 한영섭 한국방송인 동우회 회장

 1950년 6월25일 북한의 무력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한지 어언 53년이 흘렀다.

 

민족상잔의 아픈 상처를 안고

반세기를 지나는 동안 우리는 세계적인 국가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구축하였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국민 모두가 하나 되어 국가 재건에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나라가 없다는 것, 식민지의 백성이 된다는 것 그것은

 참으로 견딜 수 없는 일중의 하나다.

 

나라를 잃거나 전쟁의 상황을 직면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실감하지 못한다. 우리 국민에게는

 뼈아픈 고통을 안겨 주었던 6.25전쟁은 민족의

비운까지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점점 그 전쟁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들이 또 자라고 있다. 전쟁과는 거리가 먼

세대들이 앞으로는 우리나라의 중심세력이 될 것이다.

그렇다하더라도 나라의 소중함만큼은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에 본지에서는 나라를 위해  전사한 호국영령들을 기리고

이 땅에 그 어디에서도 전쟁이 다시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본 기획을 마련한다.

 

한국방송인 동우회 한영섭 얼마 전

온 세계의 관심이 집중 됐던 이라크 전을 일반인들이

 안방에서 생생하게 접한 것은 죽음을 무릎 쓰고  현장에 뛰어든

종군기자들의 활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 민족이

 同族相殘의 비극을 겪었던 6.25의 비참한 현장도  각국

종군기자들의   용기와    사명감으로    세계만방에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한국전 순직 종군기자 추념비를 참관하는 한영섭

 

그 최전선에 서 있던 대표적인 종군기자,

韓永燮(76) 전 KBS기자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다음해인 

 1949년 1월, 대학3학년 때 공채 1기로 서울중앙방송국

(현재의 KBS) 기자로 첫 출근을 해서  6.25동란 당시

종군기자로 활동했고 1956년 KBS 내신부장을

 거쳐 59년에는 현재 보도본부장에  해당하는

 보도실장을 역임했다.

 

본지가 찾아간 그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 듯 젊고 활기찬 모습으로 언론계 원로들의 모임인

‘한국방송인 동우회’ 회장의 자리를 지키며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었다.

 

전쟁 전부터 종군기자 훈련 그는

KBS에 입사한 이후 국방부에 출입하며 전쟁이

 나기 전인 1950년 2월부터 육군사관학교에서

 2주간 군사훈련을 받았다.

 

종군기자 훈련이라고 해서 별도로

훈련 반을 편성하여 교육받는 줄 알았는데 1년 동안

 이미 훈련을 받았고 1년만 더 있으면 소위로

임관하는 육사10기 생도들의 내무반에

 기자 한명씩 배치되었다고 한다.

 

지급된 군복을 입고 도열하였는데

교관들은 입교할 때의 정중한 말씨는 간데없고

 “너희들은 지금부터...”하는 식으로 명령하기 시작했다.

 고구마 섞은 밀밥에 콩나물국과 김치가 전부인 그 당시 열악한

 육사 급식임에도 불구하고 숟가락 몇 번 움직일 사이도 없이

생도들은  이미 식사를 끝냈고 허기진 배를 움켜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새벽3시쯤 갑자기 기상나팔소리와 함께

완전군장으로 집합하라고 하더란다.

 

침대모포는 자로 잰 듯 정돈해 놓아야하는데

짧은 시간 안에 될 리 만무했다. 한 사람이라도 뒤처지면

내무반 전원이 연대 기합을 받을 판이니 동료들이 몰려와

도와주어 간신히 집합 할 수 있었는데 다른 내무반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고 한다. 4kg이 넘는 M1소총을 ‘앞에 총’하고  태릉에서

청량리까지 구보를 해서 되돌아가는 등 고달픈 훈련의 연속이었으나

교육기간을 통해서 군 생활을 이해할 수 있었고  총기 취급요령부터

 작전에 이르는 교육전반을 이수할 수 있었으니  전쟁이 난 후

종군기자로 활동함에 크게  도움이 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한 직후 함께 훈련받았던

 육사10기 생도들은 최전선에서 분투하다 반 이상이 전사했다.

남은 1년의 교육을 미처 마치지도 못한채 산화한

 이 젊은이들 덕에 인민군의 서울 진입을

 몇시간 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남으로...남으로... 50년 7월29일 국군의 소개명령으로 지게나 소가

끄는 수레에 가재도구를 싣고 남쪽으로 향하는 피란민 행렬

 

종군기자로서 취재하며 죽을고비 여러번

 1950년 6월 25일, 선전포고도 없이 북한 공산군이

 불법남침을 개시했고 9월에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마침내 서울을 탈환하여 북으로 진격해 올라갔다.

 한영섭 회장은 그때 청진으로 진격중인 수도 사단을

따라가기로 하고 11월초에 서울신문사의 정원국

기자와 함께 서울을 떠났다.

 

그러나 종군기자의 취재활동이 결코

순탄치 않다는 것을 출발부터 뼈저리게

체험해야 했다고 한다.

 

철원을 지나 원산으로 가는 길목에

金城 이라는 산악지대의 작은 촌락이 있었는데,

바로 이곳을 통과하다 매복 중이던 인민군

유격대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그 지역에는 낙동강 전선까지 남진하였던

 인민군 정규부대가 원산에서 퇴로를 차단당하고

 태백산맥을 오가며 유격전을 벌여, 국군의 보급로를 끊고 

 후방교란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인민군의 습격에 대비하여 金化에서

차량이 집결되기를 기다려 돌파를 감행하였다.

정 기자와 나는 군 트럭 적재함에서 10여명의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운전석 쪽으로 등을 기대고 있었다.

 

어느 병사가 내 옆에 앉으며 자세를

낮추라고 일러주었다. 차량이 터널을 지나 산 사이의

 후미진 도로를 통과하는 순간 갑자기 양쪽 산비탈에서

일제 사격을 가해왔다. 우리가 통과할 때만이라도

 무사했으면 하던 염원이 무참히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나, 6대 독자인

 내가 여기서 죽으면 안 되는데...”하는 회한과 공포가

 뒤엉켜 눈앞이 캄캄하였다. 그러는 동안 병사들의 총구는

 불을 뿜으며 응사를 계속하였고 트럭은 전속력으로 달렸다.

갑자기 내가 기대고 있던 운전석 쪽이 ‘쿵’하고

둔탁하게 울렸다. ‘아이쿠 맞았구나 ’하면서

살펴보았으나 몸에 이상은 없었다.

 

그런데 옆에 있던 병사가 내 쪽으로

기울어지면서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그 병사의

총을 들어 미친 듯이 언덕을 향해 쏘아댔다.

탄창의 총알이 다 떨어질 때까지...

 

그동안 차량은 그 지역을 탈출하여 계속 달렸다.

사상자는 5~6명이었지만 낙오한 차량은 한대도 없었다.

적이 산위에서 우리 트럭을 향해 쏘았기 때문에

타이어는  손상을 입지 않고 달릴 수 있었다.

 

우리 측 차량 중에서 앞에 가던

한대라도 멈추었다면 모든 것이 끝났을 것이다.

옆에 쓰러진 병사는 끝내 숨을 거두었다. “어머니!”하면서...

 <한영섭의 종군기록 中에서>

시골에 어머니 혼자만 계시다고 했는데

그 어머니가 얼마나 통곡하셨을까. 

 

6.25사변이 일어난지도 50여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어머니!”하고 부르던 병사의

 마지막 외침이 귀에 쟁쟁해 코끝이 시큰해 온다.

 국민과 함께 울었던 전쟁의 끝 그 후 수도 사단  사단장

송요찬 준장의 진격에도 참여하며 중도에 며칠 전 미군이

투하한 거대한 폭탄이 불발인 채 남아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소식에 피해서 간 일, 상륙작전 이전에 목포방송국

방송과장이 적을 피해 방송기자재를 어선에 싣고

 ‘해상이동방송’을 했던 일 등 6.25때

이야기는 끝이 없다. 

 

 

 1950.11   인해전술로 공격하는 중공군 40군단

             

  또 가슴 찡한 이야기도 있다.   

 

 

통일을 눈앞에 두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눈물을 머금고 후퇴하면서 동부전선의 육로가

원산지역에서 완전히 막혔을 때 한국군

 제1군단 지휘부는 큰 혼란에 빠졌다.

 

교전을 하여 퇴각로를 열자니 엄청난

희생을 각오해야 했고, 그것마저도 많은 병력을

 완벽하게 철수시킨다는 보장도 없었기에 해상수송에

 의존하는 수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 해군에는 수송선이 별로 없어

 제1군단장 김백일 소장(사변중 순직)은 황급히

미 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을 찾아갔는데 미 10군단

병력과 한국군 2개사단(수도사단, 제3사단)병력을

 미군 선박편으로 수송시키기 위해서였다.

 

군병력의 철수는 이렇게 해서 계획이 섰지만

 북한 동포들은 어찌할 것인가. ‘제발 이남으로  데려다 달라’고

울부짖는 동포들을... 군병력 수송이 먼저라고 반대하는 미군을

 설득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피난민을 데려가야 한다’고

김백일 장군은 버텼고 수도사단장 송요찬 준장은

‘차라리 우리 병력은 희생을 무릎쓰고라도

원산 육로를 돌파할테니 대신 수송선에

피난민만은 승선시켜 달라’고 했다.

 

 

▲ 1950. 12. 12. 흥남부두, LST 함정에 가득 탄 군인과 피난민들. 미처 함정에 오르지 못한 피난민들이 발을 동동거리고 있다.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원자탄이 투하된다는 말에 피난 행렬에 나섰다고 한다. 몇 날의 피난 길이 50년이 더 지났다.

 

한국군 지휘관들의 비장한 결의는

 미 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을 감동시켰고 남은

공간에 최대한 피난민들을 태우기로 하였다. 그러나

미군의 적극적 협조에도 불구하고  공간에는 제한이

따랐기 때문에 부두에서는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졌는데 한 회장은 그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수송선이 차례로 떠날 때 마다 부두는

 눈물바다로 변했다. 부모 형제가 한 배를 타지 못하고

서로 떨어져야 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배의 목적지는

 각기 달랐다. 철수작전이 끝나는 12월 24일

마지막 수송선이 부두를 떠날때는

더욱 처절하였다.

 


6·25전쟁 중 인천항에 정박해 있는 메러디스 빅토리호 -
흥남철수 성공뒤엔 `기적의 배`가...59명 정원 메레디스 빅토리호

피란민 1만4000명 자유의 품으로 인도. 1만4000명의 피란민은

물도 약도 없이 3일간의 항해 끝에 부산항에 닿았다.

 

 

마지막 배를 향해 한꺼번에 몰려드는 바람에

 수많은 사람들이 영하 25도를 밑도는 혹한 속에서

 바다에 곤두박질했고 수송선에 매달리다 서서히

닫히는  철문에 끼이는 등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

 


한영섭과 강영숙님 젊은시절

 

 

 영원하고 진실한 방송사랑

1958년 KBS 내신부장시절, 아나운서였던

 부인 강영숙 여사와 함께. 한국언론의 산 증인인

두 사람의 언론사랑은 남다를 것이다.

 

그렇게 흥남 철수 작전이 끝나고,

부산 피난시절의 열악하기 그지없는 방송환경과

그 이후의 수많은 정치적 파동을 겪으며 보도업무를

 충실하게 수행해오던 중, 60년 10월경 보도실장으로 있던

 그를 방송 관장 내각사무처 장관이 불러 뉴스원고의

 사후검열을 실시하겠다고 통보했다.

 

민주주의를 모토로 한다는 당시의

민주당 정부에서 말이다. 그는 즉석에서 이를 거부하고

 보도실장직을 사임하였고 ‘방송이 좋아서’ 방송기자가 되고

 싶다던 입사할 때의 꿈이 14년 만에 끝을 맺었다.

 

그러나 그는 “정부수립 후 국립 중앙방송국

초창기에서부터, 보도방송의 기틀을 쌓아올리는데

일조한 것에 대해 아직도 내 나름대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고 덧붙였다.

 

 우리나라 제1호 여성 아나운서인 부인

 강영숙 여사도 세계화된 예절교육이란 것은

 상상도 못할 시절에 ‘(사)예지원’을 설립하고 원장으로서

 우리나라의 문화를 세계만방에 전하고 예절과

 미덕을 선두에서 지켜나가고 있다.

 

슬하에 3남을 두고 일생을 모범적인 가정을

 꾸려온 언론 원로 부부의 모습은 정말 한편의

그림과도 같이 아름다웠다. 방송에 대한 향수(?)때문일까?

 그는 지금 한국방송인 동우회에 참여, 회장직을 맡으며

 방송외각에서 방송을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모범적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전장에서 차에 동승한 병사가 ‘자세를 낮추라’고

 충고해준 덕에 살아 남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다. 그 충고를 가슴에 담고 늘 ‘자세를 낮춘다’는

 마음가짐으로 삶에 임해왔다. 비오는 날임에도 불구, 밖에서

촬영에 응해준 한영섭 회장과 본지 류수민 기자 민족의

 아픈 전쟁을 세인들에게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종군했던 패기 그리고 비민주적인  언론을

거부하며 기자로서의 사명감을 지켜낸

우리나라 기자, 한영섭.

 

그는 무사안일주의가 만연해 있는

우리나라 언론계에서 후배 기자들의

귀감이 될 만 했다.

 

 

대전 현중원에서 분향하는 한영섭

 

 

 

 강영숙님과 관련 사진

 


 

방우회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