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이장춘 2009. 5. 18. 06:43

 

 

 

 

 

 방송기자 1호 문제안/최초의 방송기자   
 

 

문제안은  1943년 아나운서로 방송을 시작한 이래
해방되면서 방송기자 1호가 되고 편성원, 출연자로 또 최초로 

설립된 TV방송국 HLKZ에서 방송을 담당하는등 방송인이고 오랜기간

 신문사 기자로 활약한 언론인이며 대학 강단에서 활동한 한글 학자이기도 하다.

  연극, 영화에도 조예가 깊다. 팔자는 선생님으로 부터 많은 얘기를 들었고

자료를 받아 글 쓰는데 도움을 받았다. 2012년 6월17일 부음 소식을 듣고

블로그에 명복을 비는 글을 올림과 동시에 제가 아는 분들에게

이메일로 소식을 전했다. 지금 들으시는 육성은 이승만

박사를 처음만나셨을 때의 얘기입니다.

 

  

 선생님의 삼가 명복을 빕니다.

 

 

 

 

 

 

‘땡’ 하고 도쿄에서 오는

 
오후 5시 시보가 들어오기 시작해요. 
 
 ‘꺼버려!’ 하고 제가 외쳤습니다.
 
누군가 달려들어 스위치를 끊고,
 
윤용로 아나운서가 스튜디오에 들어가
 
‘한국말 방송은 이제부터
 
제1방송 50㎾로 방송합니다’
 
하고 마이크에 대고 알렸습니다.”
 
 
1945년 9월 9일 미군이 일본 총독으로부터
항복 조인을 받던 그날 !  오후 5시!  제2방송으로 하던
우리말 방송을 제 1 방송으로 바꾸던 그 감격적인 순간을  묘사 하신

문제안님의 말씀입니다. 문제안님은 방송국에서 해방을 맞이하셨고동시에

방송기자 1호가 되셨습니다. 일생을 언론과 함께  하셨고  또   한글연구에 힘을 

기울이셨습니다.  89세가 되셨어도(이 글 쓸 때)  건강한 모습으로 자주 만나 뵈일수

있고 보내 드리는 메일 하나도 빼지않고 보시면서 답글 보내 주십니다. 문제안님이

방송국에 들어오신것은 1943년 단파수신 독립운동 사건으로 20여명의 많은

방송인들이 방송국을 떠나시게 되어 아나운서로 들어 오셨습니다.  

윤길구, 이덕근, 홍준, 장운표님이  아나운서 동기생입니다.
 

 

 

같이 들어 오신  다섯분이 입사때  찍은 사진입니다.

 

 

 1920년 4월 9일 경성부 회동(지금의 회현동)
에서 태어나셔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공덕리( 지금의
마포구 공덕동 )에서 자라셨고 양정고등학교와 일본 명치대학

연극 영화과를 나오셨습니다.  일본 K.S문화 영화부와 서울 동양극장에서

 일 하시다가 방송국 공채가 있어서 들어오셨습니다. 아나운서로 들어

 오셨지만 보도 업무적인 성격을 띤일본어 통신들을   번역해서  

방송 기사를 만드는 등의 일을 많이 하셨습니다.

 
해방을 맞을 무렵부터 많이 바빠 지셨습니다.
총독부를 출입하시던 님은 소련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1945년 8월 9일 무렵부터 해방기미를 눈치 채면서

업무에 임하셨습니다. 8월 11일 아침 문 기자가 총독부 정보과

신문방송계의 무료바야시(無量林) 라는 일본인이 “ 일본의 조선에 대한

 정책이 곧 근본적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 라는 말과 함께 총독부는

 여운형과 안재홍을  찾고 있다는 뜻을 비쳐 님은 해방의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확실하게 감지 하셨다고 합니다.
 
그때  방송국에 들어와  이 말을 하자
모든 직원들이 놀랐고 일본인 직원들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표정 이었다고 합니다.   신문방송을
 장악하고 있는 무료바야시 (無量林)말이라 숨길 것이
 없어서 말 했던 것인데  일본인 직원들의 표정이
굳어져 한때 긴장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방송 뉴스 원이었던  "도오메이 쯔우싱"에
관심을 갖던 중 14일 밤에 해방소식이 들어온다고
해서 보통 때는  방송국에서 이곳에 뉴스를 받으러 가는
경우가 없었으나 이날은 사건이 커서 이혜구 당시
 제2보도 과장님이 문제안 기자에게 직접 가서
본문을 받아오라고 하셨습니다.
 
문기자가  "도오메이 쯔우싱"에 도착
했을떼에는 통신사 안에  원경수기자와
 매일신문의 곽복산 기자 그리고 필경사 두명
모두 다섯 명이 있었습니다. 
 
문제안님의 말씀을 옮깁니다.
 
“14일 밤에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
내용이 들어온다고 해서 조선호텔 근처에 있던
 일본통신사"도오메이 쯔우싱"편집실서 기다렸습니다.
 밤  8시40분쯤  헌병대에서  지금까지  들어온
내용을 모두 불태우라’는  전화가 오더니,
곧 헌병들이 들이닥쳤어요.
 
여기서 붙잡혀 있다가 12시쯤 방송국에 와
볼 일을 잠시보고 새벽 3시쯤에 잠깐 집에 들어갔다가
 아침에 출근하는데, 윤용로 아나운서가 천황 항복선언
 원고를  "도오메이 쯔우싱"에서 받아 들고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더군요. 
 
12시에 일본 천황이 항복방송이 있고 나서 
 일본말 원고를 후쿠다 제1보도과 계장이 방송하고,
이덕근 아나운서가 우리말로 번역한 내용을  몇 차례
방송했습니다. 하지만 라디오가 귀했던 때라
 못 들은 사람이 더 많았을 겁니다.”
 
해방되던 다음날 8월 16일이 되었습니다.
문제안님은 이날부터 방송기자가 되시고 그전에는
방송기자라는 것이 없었는지라 방송기자 1호가 되셨습니다.
방송기자 1호가 되셨을 문제남님의  얘기를  옮깁니다.

 일본  "도오메이 쯔우싱"(同盟通信)만을
의지해왔던 우리 보도과는 그 통신사가 통신을
 끊어버리자 뉴스 방송을 할 수 없게 된 반면, 국내의
소용돌이는 뉴스거리로 넘쳐나, 어제까지의 그
조직으로는 수습할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이에 당황한 이혜구 제2보도과장은 나를
불러, 구두로  "당신을 오늘부터 경성중앙방송국
우리말 방송기자로 임명합니다. 열심히 뛰어, 좋은
뉴스 시간을  마련해주기 바랍니다."    하였다.  
처음에 나는 이 과장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조차도 얼른 짐작하지 못했다.
 
이계원, 민재호 두 계장과 이익녕, 이원구 선배,
이덕근,  윤길구,  홍 준,  장운표  동기 아나운서들,
그리고 전인국, 윤용로 후배 아나운서들… 감청(藍碼)의
 일을 보던 안서(假暗) 김 억선생까지 모두들 박수까지
 쳐주면서 "잘하라"고 격려해주는 것이었다.
 
 1945년 8월 16일 아침 9시 30분쯤
 
그러나 나는 과연 박수를 받아야 할 일인지,
정말 감격을 해야 할 것인지, 그것조차도 느끼지
못한 채 '대한독립만세' 소리로 들끓는 서울의 거리로

우선 뛰어나갔다.  이것이 기자생활 20년이라는 내 인생을

결정하는 순간이라는 것도 까맣게 모르는 채, 역사적인
 
 '한국의 초대 방송기자의 탄생'
 
이라는 감격도 전혀 느껴보지도 못한 채,
나는 한국의 첫 방송기자의 첫 취재 활동을 위해서
힘차게 첫발을 내디뎠던 것이다. "

 

 
문제안님은 밤. 낮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셨습니다. 방송책임을 맞고 계시던 이혜구님은
 그날로 경성방송국의 간판은 그냥 두고 임시로
 
“ 서울 라디오 스테이션 ” 이라고
 명명하셨고 문제안님은 영어로 그 간판을
 써 붙였습니다.  하도 다급하게 써 붙이다 보니
 STATION 을 STAITION 이라고“I"자 하나를 더 넣어
버렸습니다. 이혜구 과장님이 발견하고 바로 잡기는
 했지만 일이 숨 가쁘게 돌아가던 한 장면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 날 뉴스는 미쳐 준비할 사이도 없이
12시 뉴스시간이 되었습니다. 우리방송으로서는
처음 맞이하는 뉴스시간이었습니다. 감격적인
방송을 했어야 할 시간이었는데 그날 나온
연합통신도 워낙 급히 발행 되었는지라
 
해 방   만 세
 
자 유   만 세
 
독 립   만 세
 
이 석줄 만 되어있어서 그 이상의
뉴스를 전할 수 없는 큰 일 앞에 뉴스를 보내지
못하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해방을 맞이하던 때의 얘기를
문제안님으로부터 들어 보시겠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오후 4시쯤 계동 84번지 던가?
대학생들의 감격에 넘치는 첫 '대한독립만세' 소리를 들었다.
 안재홍선생의 "이제야말로 정말 우리가 일할 때가 왔다"는
힘찬 격려의 첫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가슴이 터져라 함께 불렀다.
그 자리에는 경성제대 학생 몇 명과 함께
보성전문, 연회전문, 중앙불교전문 등 검은
학생복에 사각모를 쓴 남자 대학생
40여명이 모여 있었다.
 
편성국 임병현의 부탁을 받고,
건국준비위원회의 산실인 바로 이 집에
임시전화의 전선을 연결시켜 주려고 달려간
기술과의 심상웅을 따라가서 우연히 경험한 소중한
 순간이었다. 그리고서는, 서대문형무소 구치감에서
풀려나온 미결수 50여명(?)이 형무소 문 앞을
나와 언덕을 내려오면서 부른 '대한
독립만세'가  고작이었다.
 
날이 바뀌어 16일. 아침부터 거리는 물론
 종로를 중심으로 사대문 안의 거리거리는 만세 소리로
 뒤범벅이 되었고 방송국에는 건국준비위원회에서 보냈다는
20여명의 젊은 학도대원들이 달려 들어와 "방송국을
 접수하겠다"고 방송국 간부들에게 대들었다.
 
해방 이틀 후인 17일부터 일본군이 방송국을
접수해서 9월 9일 미군이 들어올 때까지 장총에 착검을 한
일본 군인들이 스튜디오와 사무실을 차지했어요. 우린  포로 신세나  
마찬가지였지요. 그 놈들 하는 꼴을 지켜보자니, 보통 기분 나쁜 게
아니었지만, 속수무책이었어요. 18일부터 9월 9일까지
주로 음악만 내보냈지요.”
 
이상은 문제안님의 말씀 이었습니다.

문제안님은 항복조인식을 취재 하러
 민재호님과 현장에 같이 갔셨지만 한 사람밖에
 출입할 수 없다는 미군의 강력한 통제로 중계방송을
 하려는 민재호님만 들어가 방송을 했기에 문제안님은
이때 현장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시지만
역사의 현장에 문제안님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 이었습니다.
 
문제안님은 일생을 바쁘게 사신가운데 특히
1945년 10월 17일이 “내 생애 최고의 시간 ”이라고
70년대에 다음과 같이 글을 쓰신 적이 있으십니다.
 
1945년 10월 17일 오전 11시 30분 !
서울중앙 방송국 제3스튜디오,  3평도
 못되는 작은 방송실에서 윤용노 아나운서가
 “ 본 방송국 문제안 기자가 지금 방송실에 뛰어들어 와
중대 기사를 쓰고 있으니 잠간만 기다려주십시오“
하면서 신나는 행진곡을 틀고 있었다.
 
바로 그 옆에서 나는 전날 10월 16일 금요일
오후 4시에 쥐도 새도 모르게 환국한 후 당시의 주한
 유엔군 사령관 하지중장의 안내로 다음날인 10월 17일
토요일 10시에 중앙청 회의실에서 국내기자단과
첫 회견을 한 이승만 박사 환국 기자 회견
 기사를 쓰고 있었다.
 
첫 장을 다 쓰자 윤용노 아나운서는
더 참을 수 없어 첫 장을 낚아채다시피 해서 방송을
하고는 다음을 기다릴 수 없어서 “다시 한번 말씀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다시 한번
되풀이 읽는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둘째 장을 쓰고
그러면 윤용노 아나운서는 다시 첫 장과 둘째 장을
처음부터 다시 되풀이 하고 나는 계속해서 셋째 장을
 쓰는 그야말로 숨 가쁜 순간의 연속 이었다.
 
바로 내 옆에는 기사를 하나하나 세심하게
검열하던 미군대위 검열관도 너무 흥분한 탓인지
검열할 생각조차 못하고 그저 내 옆에 묵묵히 선채
기사 쓰는 내   바쁜   손끝만 내려다 볼 뿐이었다. 이렇게
쓰여진 나의 기사는 써지는 대로 전파를 타고 전국방방
곡곡에 퍼져 나갔다.  이시간이야 말로 내 일생
최고의 시간이었던 것만 같다.

 

 
 밤낮없이 바쁜 일정을 보내시던 님 이셨지만
모든 것이 군정청의 뜻에 맞출 수는 없었는지라
서로 뜻이 맞지 않아 1946년 7월에
 방송국을 물러나셨습니다.
 
조선통신사, 경향신문사, 중앙일보사
사회부 기자를 하시다가 1947년 말부터 1949년
초까지 잠시 중앙방송국 편성원을 거쳐 국제신문사
 (국도신문으로 이름 바꿈) 사회부 기자를 하셨고 국군이
평양에 들어 갔을때 국방부 정훈국에서 발행한 "평양 일보"
취재 부장을  하시면서 취재와 편집을 도맡아 하셨지만
그 전후해서 평양에 가신적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1.4후퇴 전후 약 3개월간은 공보처
촉탁기자를 하셨고 그 후 여러 신문사에서 일을
하시다가 1957년 4월 한국 일보사에 들어가시면서
한국일보사가 인수한 HLKZ-TV를 통해 방송과 인연을
맺게 되셨습니다.  HLKZ-TV뉴스는 한국일보
뉴스를 받아서 방송하던 때였습니다. 
 

 

HLKZ시절 이승만 박사와 회견하는 문제안님 모습입니다.

 

  
어려움에 처해 있던 HLKZ를 살려 보겠다는
 일념으로 교육방송을 맡아 열심히 일 하셨지만 화재로  

소실된 후 워낙  어려움을  겪던  터라 방송국을 되살릴 수 있는

길은 없었습니다. 그 뒤 여러 신문사를 거치셨고 때로는 강단에서

때로는 영화계에서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습니다. 써 놓으신 글도

곳곳에서 접할 수가 있습니다. 40년대 말부터 50년대에 걸쳐 인기

공개방송 스무고개에 출연, 재치를 보여 주시면서 인기를

누리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때의 방송모습입니다.
 

 

  스무고개는 처음 선생님이 담당 하셨던 프로그램이고 뒷날

이 프로그램에 직접 출연해서 인기프로그램으로 발돋움했습니다.

문제안 선생님을 비롯해서 이덕근, 이경희, 김복경, 노경희님이 출연한

 스무고개 방송 모습으로 동화백화점(지금의 신세계 백화점)에서

임택근 아나운서 사회로 진행되었습니다.  


 

 수  상   경  력
 
 
▶ 금성화랑무공훈장  1955년 1월
▶ 문화영화 시나리오상  1992년 10월 영화진흥공사
▶ 제18회 외솔상(실천부문)  1996년  10월
재단법인 외솔회
 
 
 주  요    저  서
 
 
▶ 종군기 남북 삼천리       1956
▶ 기행문 세계의 뒷골목   1965
▶ 계몽지  한글전용            1970
▶ 계몽지 호적의 한글화   1972
▶ 단행본 산업시청각교육 1974
▶ 학교는 죽었다 ( 역 )        1974
▶ 교육공학화 시청각교육 1977
▶ 일본말 말본(교재)           1978
▶ 일본 옛글 말본(교재)     1980
▶ 일본말 소리글(일본어)   1983
▶ 일본어 음성학                  1983
▶ 기왓가마는 아직도 뜨겁다(시나리오)
▶ 8·15의   기억      한길사              2005.8
▶ 소집단 협동 언어학습방법에 대한 연구
수도여자사범대 논문집 7,  1978.   7. 13
▶ 언어 학습과   교실구조에  관한  연구
원광대 논문집  1983.  11
▶ 글자정책과 한글 글씨꼴의 개발
한국출판연구소 
 
 
  가         훈          
 
 
올바르고, 슬기롭고, 부지런하게 
 
 
  좌    우   명   
 
 
끝없는 전진,   끊임없는 투쟁

취미는 승마와 사격이라고 하셨고
옛날 토기, 기와의 와당을 사랑하는 소장품이라고
 하시면서 특기는 사진이라고 하셨습니다. 

 

 

 

 

 

  문제안님은 방송국일 외에도  신문기자로

한글학자로  한시도 쉴 사이없이 활동 해 오셨고
지금도 방우회 (사단법인 한국방송인 동우회)활동에는
적극적이십지다.  문제안 산생님과 만남은 이나라 최근사와의

만남입니다. 위의 사진은 동서 냉전시대이던 1958년 한국일보사

기자로 있으면서 배르린에서 판문점까지 5만 Km를 자동차로 주행

하면서 취재활동을 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을때. 모습으로

장기영 한국일보 사장등 환영나온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원안은 출발지 배르린 모습입니다.

 

 

 

1947년 11월의 방송과 직원들입니다.

방송과에는 아나운서와 기자가 근무했습니다.

번호따라 1.문제안, 2.이계원, 3.윤길구, 4.민재호, 5.전인국,

6.최용희, 7. 8. 9.김인현, 10.이덕근, 11. 12.강문수, 13.윤용노,

14. 편용호, 15.강준원, 16.이진섭, 17.홍준, 18.이성수,

19. 위진록 아나운서님이 함께 한 사진입니다.

7. 8. 11번은 미확인.

 

 

  2006년 첫 방송터 기념 행사에 나오셨들때 입니다.

앞줄 오른쪽에서 네번째 분이 문선생님입니다.
 

문제안님이 1956년에 쓰신 
종군기 남북삼천리 표지입니다.
 

최초의 방송기자 문제안님입니다. 이승만 박사가
개인자격으로 해방된 나라에 돌아오시고 프란체스카 여사가
우니나라에 처음 오셨을때 돈암장에서기자들과 만나 기자회견을 하고
 기념찰영한사진입니다. 프란체스카 오른쪽(검은양복) 분이 문제안님
이시고그 옆이 70년대초 신아일보 사장을 지내신 장기봉님, 그 옆이 서울신문

제판부장을 지내신 이태연님, 이승만박사 왼쪽분은 이 사진

촬영시 조선일보기자 남기영님입니다.

 

 

유경환(유카리나) 여사님 글

 

격변의 시대를 겪으면서 선구자의

삶을 살고가신 문제안 선생님의 발자취를

따라 머물다 갑니다. 오늘은 문제안 선생님이

 숨가쁘게 해방의 벅찬 순간의 방송을 하신 해로부터
무려 70년이 흐른 2015년의 3.1절입니다. 자라는

 꿈나무들이 이날이 우리 역사에서 어떤 날인지를

가슴에 새기는 날이기를 기대하면서
오늘을 시작합니다.

 

 

2007년 11월 원로방송인들의 나들이 길에서

문제안선생님입니다.( 오른쪽 두번쩨분 ) 1940년대
방송을 같이 하신 박경환님, 전관영님, 유해룡님, 그리고
1960년부터의 엄복영님이 함께 하신 사진입니다.
 
 

이승만의 기억 문제안-1.wma

 

 

- 첨부파일

이승만의 기억 문제안-1.wma  
   
격변의 시대를 겪으면서
선구자의 삶을 살고가신 문제안 선생님의 발자취를 따라 머물다 갑니다.
오늘은 문제안 선생님이 숨가쁘게 해방의 벅찬 순간의 방송을 하신 해로부터
무려 70년이 흐른 2015년의 3.1절입니다.
자라는 꿈나무들이 이날이 우리 역사에서 어떤 날인지를 가슴에 새기는 날이기를 기대하면서
오늘을 시작합니다.
이 새벽에 오셔서
소중한 글을 남겨주심에
형언할 수 없는 강동과.
고마운 아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