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이장춘 2009. 5. 20. 00:23

 

 
평양에서 테어난 강찬선님은
젊은시절 예술가가 되어 보겠다는 꿈을 않고
활동 하던중 해방을 맞으면서  북한 치하의 평양방송에
몸을 담았지만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방황하던차에 6.25를 만났고

1. 4 후퇴길 따라 부산까지 밀려가어려움을 겪다가 부산 피난시절의

KBS아나운서로 들어왔습니다.격동기를 살면서 겪은 아나운서 생활과
그 파란만장안 인생길을 모았습니다. 여기에는 제가 쓴 글도 있고 

 강찬선 아나운서가 쓴 글도 있습니다.  여기에 한편 올리고   

다음 영문자 주소를클릭하시면더 보실 수 있습니다.

 

아나운서 한길로 살다가신 강찬선   

http://blog.daum.net/jc21th/17780891

 

아나운서 강찬선, 부산방송 피난시절

http://blog.daum.net/jc21th/17780861

 

   

 

 

아나운서 강찬선의 평양방송시절부터 그 일대기 

 

 30년 동안 지내온 아나운서 생활에서몇 가지

추억에 남는 것 들을 간추려보면……,작년 말(1982년)  

뉴델리 아시아 경기실황의 TV중계실황을 지켜보면서 느낀 것인데

꼭 24년 전인 1958년일본 도오꾜오에서 열렸던 제 3회 아주 경기대회 때의

일이었다. 그때 아나운서 2명, 기술자 두 명, 모두 네 명으로 구성된 중계반이

 파견되었는데 임택근 아나운서와 나는 제 3회 아시아 경기대회 파견 대한민국 방송단

단장이라는 어마어마한 감투를 쓴 해의 첫 나들이였다. 특히 이창훈 선수가

마라톤에서 1등으로 꼴인 하던 중계방송의 감격은 지금도 새롭다.

 
 “지금 스탠드의 8만관중이 긴장하는 가운데
 스타디움 남쪽 문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동쪽 스탠드에서
 박수가 터져 나옵니다. 지금 막 이창훈 선수가 그 용자를 나타냈습니다.
가슴에 태극기를 단 대한의 건아 우리 이창훈 선수가 지금 당당히 메인 스타디움에

1위로 뛰어 들었습니다.하고 외치고 나서 이창훈 선수의 모습을 보니그게 아니었다.

기진맥진, 허둥지둥 올렸던 다리가 다시그 자리에 내려지는 것 같은- 당장에라도

쓰러 질것만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그리하여 경기장을 한 바퀴 도는 시간의

 흐름이 마치 10년과도 맞먹을 그러한 순간 순간의 연속이었다.

 

제3회 아시안께임에서 골인지점을 향해 달리는 이창훈 선수의 모습

 

그와 같은 이창훈 선수의 모습으로 나는
중계방송 담당이라는 입장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이창훈 선수 여유 있게 지금 제 3코너를 들어와 제4코너에…….
“이창훈 만세” “대한민국만세” 그것은 중계방송이라기보다 금방

쓰러질듯 이를 악물고 금방 쓰러질 듯 한이창훈 선수에게 보내는 

격려의 말이었다. 결승 테이프를 끊은 이창훈 선수는 그대로

쓰러지고 의무 반에 의 들것에 실려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한없이 흐르는 눈물을 금할 수가 없었다.

 

얼마 후 시상식장면, 아시아 경기연맹 조직위원장이었던

이상백씨가 이창훈 선수목에 금메달을 걸어주고 이어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이와 같은 광경을 중계방송 석에 같이 앉아 바라보면서
 왕년의 마라톤 왕 손기정씨는 “내가 지난날 배르린 올림픽에서 우승을 했으나
그때 올라가는 깃발은 일장기였고 울려나오는 국가는 기미가요였습니다.
그리고 올림픽파견을 위한 선발전에서 내가 1등으로 꼴인 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손기정씨의
 눈에는 눈물이 서려 있었다.
 

 

그런데 지난번 뉴델리에서 김양곤선수가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아 당당히 1등으로 꼴인 하는 장면을
TV로 지켜보면서 나는 바로 24년 전 전술한 바와 같은 장면을
 생생하게 회상했다. 그때 이창훈 선수의 승리는 그야말로 사력을 다 한
 인간의지의 승리였다고 하면 지난 김양곤 선수의 비교적 여유 있는 모습에서 

좀 더 기록을 단축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았다. 아무튼 김양곤선수의

아주경기 마라톤 재패는 24년 만에 정확히 말하면 그 다음해 한국일보사가

주최한9.28수복기념 국제 마라톤대회에서 이창훈 선수가 또 우승을

했었으니까 23년 만에 잠자던 한국 마라톤이 이제 기사회생의

 청신호를 발한쾌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중 약..., 

 

박신자 일행 농구선수단 환영회 출처:서울시 언론담당관 촬영일:1967-05-07 
 
다음해 61년 봄 상업은행 여자농구팀의
일본원정에 동행 중계방송을 했던 일도 하나의
유쾌한 추억이다. 도오꾜오를 시발로 나고야, 오미야,
도요하시, 교도, 오쯔등 각지를 순회하면서 상업은행 팀이
 9전 전승의 기록을 새웠거니와 특히 박신자 선수의 

멋진 경기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오사카에서 일본 최강인 나찌보 팀과의
대전 때는 엎칠락, 뒤칠락 하는 시소 끝에 막판에 가서는

우리가 리드를 뺏겨 패색이 짙어졌다.  더구나일본 관중들의

와ㅡ 와ㅡ 하는 열띤 함성에 우리 선수들은위축되어 실수가 속출했다.

그러자 박신자 선수의 독단장이 벌어졌다. 장거리 중거리 슛을 쏘고 재빨리

달려 들어가 노-꼴인 볼을 리바운드 하여 잡아넣고 적이 바싹 달려 들면 요리

저리 재치 있는 드리블로 상대방의 파울을 유도하여 자유투를 얻어 득점하고

그야말로 종횡무진 능수 능란한 프레이로 역전승을 거두자 관중석에서도

 호ㅡ 호 ㅡ 하는 감탄성이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박신자 선수의 전성기 장충체육관에서

 한일전이 벌어졌을 때 박신자 선수의 멋진 경기를 지켜보던

 어떤 관객이 바로 중계석 뒤에서 “야 저건 농구가 아니라예술이야

예술” 하고 감탄하던 일도 생각이 난다. 그런데 제 3회 아시아 경기나

 상은 팀의 일본 원정 때나 모두 아직 일본과의 국교가 정상화되기

 이전의 일이라서 더울 기억에 새로운지 모르겠다. 

 

 

 

바로 그해 61년  5월 16일
군사혁명이 일어난

그날 남산 방송국에서 권총을 찬 장교가 스튜디오까지 들어와 

방송을 명령하고 감시하고 있는 긴장된 분위기속에서 나는 방송 하라고

 넘겨준 원고에서 “중앙계엄소장 육군소장 박정희”를 “박정렬”이라고 오독하자

 옆에서 감시하던 그 장교가 내 귀에 입을 대고 “박정희, 박정희” 하는 바람에

“정정 하겠습니다. 중앙계엄사령관 박정희”하고 정정방송을 하면서 잔등에서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던 일도 하나의 추억감이다. 그때 팬으로

흘려 쓴 “熙”자가 내 눈에는 “烈”자로 보였던 것이다. 

 

 

이 글은 월간방송 1983년 2월호에
 올라있는 세번째 글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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