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우회·독립운동

이장춘 2009. 5. 21. 20:21

 

  
 
단파 방송 해내.외 연락 운동
 
  


단파방송 연락운동으로 옥고를 치루신 분들이다.
 
위의 사진은 2년 징역형을 언도받은
성기석님(위),  허헌님 (왼쪽),  홍익범이고 
 아래는 아나운서 출신 박용신, 양제현, 송진근이다.

( 양재현이 이 일을 할때는 편성원이었고, 

손정봉 사진은 못 구했다. )


 

왼쪽부터 이이덕, 조종국, 송남헌이다. 

 

벌금형을 언도받은 황태영님과 신상운이다.

 
 
1942년 성탄절 !  전야 ! 
 
이 무렵부터 이나라 방송계는 물론
 독립운동을 위해서 헌신하던 애국지사들과
방송인들이 수난을 격으면서 온 나라를 뒤흔든
사건이 발생하고 이 때부터과 1943년 1년동안

350여명이 일본 경찰에 끌려가고 75사람이

형의 언도를 받았으며 이중 6사람이나  

옥사한 사건이  발생하니 

 

“ 항일 단파방송 해. 내외 연락 운동”

이며 방송인들 사이에서는
“단파 수신 사건” 이라고도 불리운다.
단파 수신사건은 우리방송사에 길이 빛날 일이고
방송인은 물론 국민모두가 알아야 할 일이기도하다.

사건은 1942년 말 부터 발생한 것이고 1943년 1년간

방송계와 관련자들에게는 고역의 날이었다.
 

사건이 있은지 50년이 지난 1991년
이 운동이 정식 독립운동으로 인정되어 세분이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으셨고  같은해  9월 9일
이를 기념 하는 비를 세우니 이를 일컬어 !

[ 勿    忘    碑 ]
 
 
KBS여의도 청사 서남쪽 1층옥상에 세워진
이 물망비의 모습을 보면서 그때  그 일을
되돌아 보기로 하겠습니다. 
 



 
동판에 세겨진 물방비 건립의 뜻
 
  


아래글은 위의 동판에 새겨진 글 내용이다.


 
 
일제의 침략전쟁이 2차대전으로
 이어지고 마침내는 우리의 이름과 말과
글마저도 말살 하려는 그들의 단발마적인
 탄압이 극심할 무렵

우리 방송계의 선각자들은
해외에서 단파방송을 수신 청취함으로서
국내외의 애국지사들과 연결 해방과 독립을 위한
 투쟁을 5년여에 걸쳐서 계속 했습니다.

그 사실이 탄로됨에 따라 1942년 12월 8알부터
전국에서 300여명이 연행 되었으며 그중 옥사 여섯 분
수형자 쉰여섯 분이라는 뼈아픈 역사를 남겼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비를 세워서 그분들의
애국심을 기리며 그 어느 누구도 자유민의 귀를
막을 수 없는 진리를  勿忘코저 합니다.

1991년 9월 9일   방송인 세움  
 
 

방송기자 1호 문제안님이 물망비를

참관하고 그날의 얘기를 하고 있다.  

 
 
 방송이 엄격히 통제 되던 시절
외국 방송을 수신 할 수 있는 수신기는 모두
거두워 들이고 국내의 선교사들도 모두 추방되었던 시절!
국내나, 일본내에 있는 방송국들이 전파 관제에 따라 모두
 전파의 출력을 낮추웠던 시절! 국내에서 독립 운동을 하던
 지사들은 해외 소식을 몰라 어찌 할 바를
모르던 그 시절이었다.
 
이때 우리 방송 기술진들은 방송국 단파수신기나
또  자작으로 단파수신기를 제작해서  이 수신기로 임시정부가
있던  중국의 중경에서 들려오는 한국어 방송이나 미국  VOA 에서
 이승만 박사의 육성이 실린  한국어 방송을 듣게 되고  그 얘기들을

 국내독립 운동가 들에게  전해주어  유기적인 관련을  갖도록

하면서 독립운동을  도왔다는데 큰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국내 독립 운동은 효과적으로 아루워 졋지만 애국지사들과 

방송인들을 비롯한 관련자들은 수난을 맞았다.

  그 중에서 실형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은


성기석 ( 기술 ) 징역 2년
송진근 ( 방송 ) 징역 1년 6월  
홍익범 ( 편성 ) 징역 2년 
송남현 ( 편성 ) 징역 1년 6월  
양제현 ( 편성 ) 징역 1년 6월
이이덕 ( 기술 ) 징역 1년 6월  
김동하 ( 기술 ) 징역 1년
염준모 ( 기술 ) 징역 1년  
박도신 ( 기술 ) 징역 1년
박용신 ( 방송 ) 징역 1년
 
( 자료 : 한국방송 70년사 )
 
*.홍익범, 송남헌은 방송 70년사에 방송국 직원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홍익범은 전직 동아일보기자, 송남헌은
소학교교사출신으로 아동문학가였습니다. 송남헌님은 일제가
방송국내부의 사건으로 축소 조작하기 위해 재판기록에
방송국직원으로 기록한 것이라고 증언했다.

 

이 분들중에  성기석, 홍익범, 조종국

세분은 1990년 8 .15광복절에  훈장을 받았고

그 뒤 박용신이 훈장을 받았다.

 
박용신 선생님은 올해 94세로
 
유일한 생존자 이시기도 합니다.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 국내에서

지하독립운동사의  마지막 한페이지를

장식하면서 길이 빛나고 있다.

 
  
 
 
 
아래 관련 사진을 올립니다.
 
 

흰옷에 기를 드신 분이 성기석님이고 이사진은 매일신보에서 찍었다.
단파방송 연락운동으로 2년형을 받고 수감중 해방이 되어 1945년 8월 16일
서대문 형무소를 나오는 장면이다.  1990년 8 . 15일 광복절애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항일단파방송 연락운동으로 끌려가

갖은 고문을 받다가 풀려나온 경성 방송국 아나운서

이현님의  옥중 방송기를 옮긴다.

 
 
1943년 2월 중순경 나는 단파사건에 말려 들어
경성방송국의 다른 아나운서와 편성과원 기술과원등 수많은
방송관계자 들과 함께 경성도경 유치장 감방 여섯방에
 나뉘어 같이게 되었다.
 
특히 아나운서 들은 따로 따로 격리시켜 놓아서
 한방에 담당 아나운서( ? ) 한사람씩 있게 배치 하였다.
하도 혼이 나서 지금도 기억이 생생 한데 동일 감방에는
내가 있었고  동 2 감방에는  송진근 아나운서, 동 3 감방에는
 김준호 아나운서  서 1방에는 양재현 아나운서,서 2 방에는
 박용신 아나운서,서 3방에는 손정봉 아나운서 등이
 포진하고 있었고  방송기계 기술자는 각 방에
 5명 내외씩 있었다.
 
그런데 차례로 끌려 나가 고문받고 들어오기도
 지긋 지긋 한데 유치장 간수들은 갇혀있는 아나운서들을
 시켜서  매일 아침 궁성 요배 (  遙拜 )의 구령을 부르라고
하는가 하면 밤에는 심심 파적 삼아 신문을 갖다 주고는
뉴스 방송식으로 크게 읽어보라기가 일수라 아무리
강제로 목이 매어서 끌려간 강아지 신세 이기로
 그 속에서 아나운서 복습을 할 기분이
날리 만무 했다.
 
그 때 하도 어이없고 기막혀 하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 하다.   그러더니 송진근 아나운서는
간수들에게 졸리다 못해 하루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축구 실황 중계 방송까지도 강요 당해서
 한 일이 있었다.
 
아마 유치장 속에서 까지 방송(?) 해본 아나운서는
 우리들 밖에는 없을 것이다.
 

 이현 선배님의 옥중 방송기였습니다.
 
이 현님은 1938년 경성방송국 22세로

아나운서 공채로 입사해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농구 중계방송을 한 아나운서이기도 하다.농구 협회 전무이사

방우회 결성 초대회장, 사단 법인한국 방송회관  이사장,

덕수 이씨종친회장등으로 활약했다.

 

일제의 탄압애서 어렵던 그날을 생각 하면서
 더욱 자랑 스러운 나라를 이룩하고 더욱 자랑스런 방송사를
 써 나갈 수 있도록  다같이 힘을 기우렸으면한다.
 
 
방우회 춘하추동방송
 
 
물망비 건립에 관한 사진을 모았본다.
 
 
 

물망비 제막모습

 

 
왼쪽으로부터 MBC 최창봉사장, 방우회 문시형회장,
방우회 박경환부회장, 방우회 강찬선고문, 유병은 방우회 회원,
조종국 방우회 고문이고    제막식  모습을  더 확대한 사진이다.

왼쪽부터 이인관, 이현, 황태영, 최창봉,문시형 모습이 보인다.


아래사진의 왼쪽부터 조종국, 송남헌,서기원 KBS사장,

권   전, 손석주 문공회장, 신상운이다.



 제막비를 새우는데 앞장서신 고 문시형회장의 인사말
 

  

아래는 핵심 독립  운동가 송남현님이 마이크앞에 서 있다. 

  오른쪽부터 이인영, 신상운, 이준순,성용현 ( 성기석님의 아들 ) 조종국,

그리고 단파방송 연락운동 사료발굴과 저서를 집필한 유병은이다. 

 

제막된 물망비 모습

 

 

전, 후, 좌, 우에서 본 물망비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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