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와 방송

이장춘 2009. 6. 4. 06:14

 

 

 

 

 

위진록 아나운서가 말하는 6.25 발발 첫 방송뉴스

 

이 글은 직접  6.25 첫방송을 한

위진록 아나운서가  그날의 방송상황과 그때

서울의 분위기를 1996년에 쓴 글입니다. 본인이 직접

 써 놓은 글이어서 6.25 당시의 상황을 읽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인적사항은 뒤에 있습니다.

 

 

 

 방우회 추최로 열였던 출판기념회에는 위진록님과 문시형 방우회 회장님을 비롯해서

 배준호, 김창구, 방흥안, 정항구, 이상만님등 원로방송인들이 함께 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동란이

시작되던 날 새벽 5시경 서울중앙방송국의

당직아나운서였던 나는 방송국 수위가 숙직실로

달려와 깨우는 바람에 단잠에서  깨어났다.

--중략 ---

나를 다급하게 깨운 수위 옆에 극도로

긴장한 군인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저는 국방부에서 온

박 대위입니다,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오늘 새벽 북한 괴뢰군이

 38선 전역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이 일을 즉시

 방송 해 주셔야 합니다. 한 시도 지체 할 수 없습니다.”

 하며 박 대위라는 사람은 나에게 종이쪽지를

건네주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공산 괴뢰군이 공격을

개시 했다는 것과그러나 국군은 건재 하니까 국민은

동요하지 말고 안심하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정규방송시간 까지

한 시간 이른 시간이었다.  즉시 방송 한다고 해도 듣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그보다도 방송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일개

아나운서가 결정 할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한 나는

당시 방송국장 서리였던 민재호 씨에게

전화를 걸어 사태를 보고 하였다.

 

그러나 박 대위와도 대화한 민재호씨는

 상부의 지시가 있을 때 까지 방송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남기고 국방부 정훈국으로 가 (정훈)국장 이선근 대령에게 공산군

 공격 여부를 물었다. “ 사실이다 이미 개성이 함락된 것 같다 ” 이 말을 들은

 민재호씨는 방송국으로 달려와 나에게 공산군 남침에 관한제1보 방송을 하라고

 지시하는 것이었다. 이리해서 제1보가 방송된 것이 7시경이었다.

 

그때의  제1보 내용을 기억나는 대로 적어본다.

“임시 뉴스를 말씀드립니다. 오늘 새벽 공산 괴뢰군이

 38선 전역에 걸쳐 전면 공격을 개시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국군이

 건재하니국민 여러분은 안심하십시오. " 이 임시뉴스를 몇 번이나

반복 하였을까. 그 후에 국방부로부터 연락이 와 주말 휴가로

외출중인 군인은 모두 즉시 부대에 복귀하라는

명령이 첨가 되었다.

 

 

이미 46년전의 일이다.

 

 (내나이 22살) 1947년 KBS아나운서로

채용되어 이미 3년이 경과한 때다. 정동 언덕위의

방송국에서는 서울시내의 대부분이 내려다 보였다. 간밤의

 비에 젖은 지붕들이 아침 햇살을 반사하고 있었다. 공산군 남침의

 임시뉴스가 되풀이 방송 되었으나 일요일 아침은 만양 조용하였다.

그 제1보를 수 없이 되풀이 방송한 나 자신도 그 내용이 내포하는

 헤아릴 수 없는 큰 비극을 통찰하기에는 너무도 꿈 많고 단순한

젊은 이었다. ---중략--- (6.25 첫 방송을 한) 그날도 아침방송이

 끝나면 집에 들어갔다가 서울운동장(동대문)으로

축구경기를 가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이날 서울 운동장에서

대학 축구 결승전이 있었다고 하지만 내 기억으로는

시 대항 축구전의 결승전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축구가 끝나면

 명동을 나가자 그리고 친구들과 차를 마시고 대포집으로 가자. 그런다음

일차회-하는식으로 어느때와 다름없는 예정표를 마음에 그리고 있었다.

서울운동장의 관람석은 가득 아 있었다. 관중들의 표정에서

조금도 동요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3.8선 전역에 걸쳐

공산군 남침 감행되고 있다는 사실보다 눈 앞에

전개되고있는 축구경기가 더 중요했다. 이 터무니없는 무관심은

무었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나 자신도 이날의 공격은 그전에 공산군이

수 없이 기도한 그런 불장난에 불과하리라고 생각했다. 또한 한국정부와

군부도 항시 국군의 우세를 내 세우고 만일 북한 공산군이 무모한

남침을 기도한다면 즉시 격퇴 할 것이라고 강조 해 왔었다.

 

 만일 그런일이 발생한다면 국군은 공산군을

북쪽으로 밀고 올라가 점심을 평양에서 먹고 저녁을

 신의주에서 먹을 것이라고 호언 장담하는 군인이 있을 정도였다.

 시민의 태반은 이 선전을 믿었다. 믿었기 때문에 이미 뒷걸음질 칠 수없는

 비극의 수래 바퀴가 처절한 소리를 내며 들어 닥치는 순간에도 축구경기에

열중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전반전이 끝나고 께임이 후반전에

 접어 들었을때 장내 스피카가 시합 중단을 알렸디.

 

 "관객 여러분, 사정에 따라 이 시합은 중단하고

무기한 연기합니다. 관객 여러분은 즉시 퇴장하여 주십시요,

" 관중들은 잠시동안 불평불만을 털어 놓기는 하였으나 모두들 경기장을 거쳐

 출입구쪽으로 밀려갔다. 나는 흩어져 나가는 수 많은 군중을 보는 순간 처음으로

 형용 할 수 없는 암담하고 불길한 예감에 사로 잡혔다. 경기장속을 감돌며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군중들 속에 나도 뛰어들었다.

 

사람들은 마치 바람에 날리는 낙엽과도 같았다.

 거샌 비 바람을 만나 뿌리채 쓰러진 나무가지에서 떨어져

 나가는 나뭇잎들은 넓은 운동장을 감돌다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날 그때 서울운동장에서 마치 낙엽처럼 흩어져 버린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었을 하고 있을까.

 

그날 아침 공산군 남침의 제1보를 방송한

젊은이는 그 후 쉴새없이 불어닥치는 바람에 날리고

 날려서 이역만리 미국땅 남가주의 작은 타운에서 70을

바라보며 여생을 보내고 있는데..........

 

 

도오꾜오에 있던 VUNC시절 위진록, 최창숙 아나운서 부부입니다.

 

 위진록 아나운서 인적사항

 

해방후 성우가 된 위진록님은 1947년

KBS아나운서 KBS공개모집을 통해서 아나운서가

되었습니다.  6.25가 일어나던 날 숙직 아나운서로 6.25발발 

첫 뉴스방송을 하게 되었고 9.28수복 첫 뉴스도 방송 했습니다.

부산 피난 중 1950년 11월 VUNC에 파견되어 여기에서 오랜기간

방송 했고 1972년 VUNC가 문을 닫으면서 미국에서 수필을

쓰는 등 여러가지 활동을 하고 2008년에는 KBS사우회

회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1928년생으로 올해 82세 이지만

건강한 모습이라고 합니다. 미주방송 5월호

재미방송인 협회30주년 기념호에 2007년

 5월호에 근황이 잘 쓰여있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