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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춘 2009. 8. 12. 03:03

 

 
 
1945년 광복의 날! 방송국에선 (3)
 
 
1945년 광복의 날!
방송현장에서 방송에 직접
참여했던 아나운서들의 글을 통해서
 그날을 되돌아 봅니다.
 

 
 
 제2보도과 이덕근 아나운서 
 
 
일왕 항복방송이 끝남과 동시에 
일본 항복방송 전문은  우리말로 번역되어
 반복해서 방송되었습니다. 우리말로 된 뉴스를
제일먼저 방송한 사람은 이덕근 아나운서였습니다. 
이덕근님이 남긴 글을 봅니다.
 

 
15일 아침 10시에 윤용노아나운서가
출근전에 동맹통신에 들려 새로 들어온 통신
다섯 벌을 가지고 왔다. 그것은 일본 천황이 낮 12시에
항복하는 이른바 “옥음방송” 의 원문이었다.
 
이 통신을 받아든 이혜구 과장님은
통신을 쥐고는 눈을 감고 아무 말 없이 있었는데
한국인 직원들은 자연히 미소가 떠올랐다. 12시가 되자
누군가가 “기립 ” 이라고 하여  모두 일어서서
천황의  방송을 들었다.
 
여자 아나운서가 훌쩍 훌쩍 우는
소리가 들렸고 일본 직원들은 정신 나간 사람 같았다.
이것이 해방된 순간을 맞는방송국 분위기 이었다.
 
이날 오후 7시 40분에는 한국인 직원들
30여명이 제 4 스튜디오에 모여 애국가를 불렀다.
구곡으로 부른 애국가는 오랫동안 불러 보지 못해
 음이 제각각 이었으나 모두 흐느끼면서 불렀고
 일본인 직원들은 풀이 죽어 있었습니다
 
16일에는  출근하면서  우선 방송국
이름부터 새롭게 하고 간판을 걸자고 해서
그 이름을 “ 서울 라디오 스테이션 ”  이라고 하고  우선
경성방송국 간판은 그냥 둔채  문제안 아나운서가 스스로
먹을 갈아 영어로 간판을 써 붙혔는데  너무 다급한 나머지
 그 간판의 철자까지 틀려  STATION 을 STAITION 이라고
I자 한자를 더 넣어서 써붙인 것을 이정섭 과장님이
발견하고 바로 잡기도 했다.
  
 
제2보도과 민재호 아나운서
 
 
경성방송국은 일본 천황의 항복선언 방송을
 도쿄 증앙방송국에서 중계를 받아 방송하는 동시에
녹음했으며 천황의 방송이 끝난 후 녹음한것에다 해설을 붙혀
재방송했다.  제1방송은 오후 5시 30분에 제2방송은
9시 30분에 반복해서 방송 되었다.
 
내용은 포츠담 선언의 요지와 수락의
경위를 해설 한 것이었다.  일본천황의 항복선언
가운데는 한국의 해방을 시사하는 내용은 없었다. 그러나
포츠담 선언의 제8항에 일본의 주권은 본토 등 연합국이
걸정하는 제 도서에 한정한다고 못 박았기 때문에
한국은 일본의 예속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이 조항은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 통치로부터
 자유로워 졌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며 방송에서
이 같은 사실을 자세하게 보도 한 것이다.
 
 
 평성과 송영호 편성원
 
 
 8월 15일 아침부터 기다리던
정각 12시가 되었다.  방송부장실 겸 제1, 
제2보도과장실에 부직원 전원이 모인가운데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일본천황의  떨리는 목소리가
극히 불량한 수신 상태가 울려나오기 시작했다.
 
어귀 마디마디는 잘 들리지 않아
잘 모르겠으나 전체의 뜻으로는 일본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한다는 뜻임에는 틀림없었다.
 실내 모니터 앞에서 부동자세로 서서 근청하고 있던 일본인
 직원들은 방송을 듣자 소리 내어 우는 자도 있고
절망의 긴 한숨과 함께 창백한 얼굴을 서로
쳐다보며 눈치를 보기도 했다.
 
그 꼴이란 측은하기도 하면서도 어찌나
 흥분했던지 그 자리에서 소리높혀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충동을 억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때 우리 한국인 정황은
어떠했던가? 속으로는 통쾌하고 흥분해서 어쩔 줄을
모르면서도  그들 앞에서 서로 흘금 흘금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사실 그 자리에서 일본인들에 뭐라
말을 붙이자니 쑥스럽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겸연쩍고 해서 태도를 어떻게 가져야 할지 몰랐다.
하나씩 둘씩 모여서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웅성이고 있었다.
 
그 시간 이후 우리는 일제의 소위
선전완수를 모토로 한 전반적인 프로그램을
 폐기하고 무슨 방안이 설 때까지 사용할 레코드를
방송과에 맡기고 내일에 대비하기 위하여 근처의
 단골집에서 점심을 먹으며 숙의를 했다. 당분간
뉴스와 레코드음악을 계속하기로 하고
일단 해어졌던 것이다. 

 


제2보도과 윤길구 아나운서
 

 

 

 
일본인 아나운서 등정(藤井)은 낡아빠진  긴 칼에
 기름을 바르며 “이제 쓸 때가 올 것 같다” 고 혼잣말로
지껄이고 있었다.    그는  소위  대본영 발표의 거짓 전황이
오기만 하면 “이기고 말해. 이기고 말이야” 이 소리를 듣고 있던
당시 일본어 방송과장 대사(大飼)는 “너도 일본인이냐” 하고
꾸짖었는데 그것은 상사로서의 말이라기보다는 감정의
화살이었다. 그러나 등정(藤井)은 일본인이든
 아니든 간에 일본이  손을 들게 된 게
아니냐고 대들곤 했다.
 
마침내 8.15 !  나는 당시 직업 탓인지
일본 천황의 말을 똑똑히 들을 수가 있었다.
당시 한국어 방송과장이던 이혜구씨는 일본인은
우리의 손님이 되었으니 한민족의 금도와
관용을 보이자는 말을 강조했다.
 
이 말을 할때 그의 음성은 어느 때보다도
힘찼었다. 그래서 등정(藤井)의 칼은 쓸모가 없게 됐다.
그는 해방  후 난동에 대비코자   칼을 매 만졌던 것이다. 그는
해방 전 일본인에게만 주는 특배품의 하나인  담배를 나에게
곧잘 대주곤 했는데 해방이 되자  이제 담배는 네가
 대라고 하기에 내가 대 주었다.
 
일본인들은 9월까지 머물러 있다가 갔으나
아나운서 나카무라만은 군정청의 요청에 의해 그 해
12월 초까지 머무르게 되었다.  그가 하는 일본어 방송은
뉴스에 한했는데 나는 그 번역을 구술로 해 주곤 했다.
내가  일본  천황 히로히또는 .............하면 그는
 하이하고 원고에 적고는 방송을 할때는
“ 천황폐하께 옵서는 .....”
하는 것이었다.
 
 

 
오늘 올린 글을 남기신 네분은
그 감격어린 광복의 날 방송현장에
계셨던 분들이지만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되셨습니다.
  
이덕근님은 1943년, 방송국에
들어와 해방후 보도계장, 편성계장,
연출과장을 하시고  6.25후에는 신문사,
서라벌 예술대학, 중앙대학교 등에서 후학을
기르시면서 한편으로는 방송평론등을
통해서 방송에 기여 했습니다.

 

민재호님은 1939년에

방송국에 들어와 방송과장을 하다가

6.25가 일어나먼셔 대전 피난시절 VUNC를

급하게 설치 하면서 그곳에 가 방송했고

그후  VOA등에서  활동 했습니다.

 

송영호님은 1938년에 방송국에
들어와 문예과장,  6.25전시방송과장,
5.16후방송관리국장을 하셨습니다.

윤길구님은   1943년에
들어와  방송과장을거쳐,부산방송국장
국제방송국장을 거쳐 4.19후 두차례의
중앙방송국장을 지내셨습니다.
 


조국의 해방을 환호하는 서울역 광장과
 남대문로 일대의 인파 만나는 이마다 서로
부둥켜 안고 목이 터져라 해방 만세를 외치면서
밤이 되어도 흩어질 줄을 몰랐습니다.
 

무조건 항복한다는 일왕의
육성방송을
듣고 있던 일본인들은 (1945년 8월15일)
 항복을 믿지 못 하겠다는 듯 허탈하고
 착잡하기만 했습니다.
 

8.15 조국 해방은 옥중
독립투사들에게 더욱 감격스러운
 것이었습니다.사진은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풀려 나와 해방 만세를 외치는 출옥 애국인사들과
이를 환영하는 시민들의 모습입니다.
 
앞줄 깃발 높히 든분은
경성방송국에 근무하던둥 항일단파방송
해내외 연락운동으로 오랜기간 옥고를 치르다가
이날 출옥한 성기석님입니다.
 
 (1945년 8월16일)
 
 

 
 

방우회의 지도를 받는 춘하추동방송입니다. 

 

 

김승한.mp3

 

 

- 첨부파일

김승한.m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