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기술

이장춘 2009. 8. 19. 05:23

 

 

 

 
 
 
 이인관 선생님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이인관선생님 추모모임을 시작할때 
 올린글입니다. )
 

 

 
 이인관 선생님이 세상을 뜨신지 1년이
가까워지면서 추모에 관한 여러 가지 얘기들이
 있는 가운데 방송기술인들이 추모비  건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실천에 옮기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요즈음 이인관선생님이
 그토록 훌륭한 분이며 방송기술의 상징적인
 인물이냐. 고  물으시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이 글을 통해서 이런 질문에 답이
되었으면 합니다.
 
제가 불로그 글쓰기를 시작하면서부터
이인관 선생님에 관한 글을 쓰고 또  사진자료도
모을 수 있는 데까지 모아 제 블로그에
 올렸고 그리고 이인관 추모 건립추진
위원회에도 옮겨 놓았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인관 선생님은
 
 광석시대에 방송국에 발을 들여 놓으신 이래
 
반도체시대 또 디지탈시대에 진입하기까지  선생님 스스로
 
앞장서 아날로그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디지털 시대를  
 
 준비  하셨으므로 그동안 방송기술이 선생님의
 
머리와 손길이  안 미친 곳이 없습니다.
 
 

 

 
선생님은 1937년 이 나라 방송이
걸음마를 시작 할 무렵 조선방송협회에
발을 들여 놓으셨고 첫 작품이 이리방송국
건설이었습니다. 이 무렵 같이 들어오셔서 오랫동안
 방송기술에 공헌하신 선배님들은 많으십니다.
 
노창성, 한덕봉, 이남용, 황태영선배님은
더 먼저 들어오셨고 선생님을 비롯해서 이규일,
이종훈, 한기선, 김성재, 고종수, 성기석선배님 등이
 비슷한 시기에 들어오신 분들로  이 나라 방송에
혁혁한 공적을 남기신 분들입니다.
 
이 가운데서 이규일 선배는
 1960년 4. 19와 함께 물러 나셔서 사실상
방송과는 인연이  끊어졌고 마지막까지 기술에 몸담고
 힘을 기울이신 분이 이인관 선생님과 한기선
선생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분에 관한 얘기는 제 불로그의
 여러 곳에 있어서 자세한 얘기는 생략합니다.
이인관 선생님은 해방될 때 일본 사람들이 물러가면서
 대출력 연희송신소의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연희송신소의 일본인들이 물러가면서
 이것을 사용할 수 없도록 했기 때문에 이의
복구를 위해 총력을 기울여 1945년 12월 25일부터
 정상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해방되고 우리나라 새로운 정부가
들어 설 때 잠시 체신부로 옮기셨다가 6.25가
 일어나고 서울이 1차 수복되면서 KBS로 돌아오시고
 전쟁복구를 하면서 송신과장을 맡아 잿더미가
 전국의 방송시설을 복구하는데
앞장 스셨습니다.
 
1953년 부산에 있던 임시정부가
 서울로 돌아오면서 직제개편이 있었고
한덕봉 선생님이후 사실상 폐지되었던 기감제도가
 부활되면서 기감자리를 맡으셨습니다.
 
명실 공히 방송기술의 총수가
되셨습니다. 문공부와 KBS를 오가시면서
 기감으로서  방송기술을 이끌어 오시다가
1973년 KBS가 공사로 되면서
기술이사로 기술 총국장을
지내셨습니다.
 
지금 KBS가 사용하고 있는 시설들은
 그 선생님시절에 건설된 것 들이 대부분입니다.
여의도 청사가 그렇고, 남양, 소래, 김제, 당진,
제주, 전국 방송국 또 TV방송의 실현,
난시청 해소시설 등 열거 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선생님의 사전에 쉬는 시간은
없었습니다. 부하 직원들이 잠시도 쉬는 꼴을
 못 보시던  님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방송기술에 계시던
 분들은 한없이 고달팠습니다. 그러나 이나라
방송을 일구어 놓은 보람이 있었습니다.
 
이토록 긴 세월을 그리고 넓게 깊게
우리 방송에 혁혁한 공을 세우신 분입니다.
그의 공로와 정신을 후세에 길이 이어 가는  일이야
 말로 이 나라 방송의 맥을 이어 가는 것이고 앞으로의
 방송발전에 기여하는 일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아울러 지금 추진하고 있는  추모비 건립을 비롯해서
여려가지 계획하는 일들이 뜻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이인관 대 선배님 추념(追念)
 
 
다음글은 이인관선생님이
세상을 떠난 바로뒤인 2007년 3월 12일에
벽산 우제탁님이 쓴 추모의 글입니다.
 
 
 
 
 우리나라 방송기술의 원조? 라던 한덕봉님의
납북 후,  방송기술의 총수 이인관님,,, 극심한 정치 사회적인
혼란 중에서도 흔들림 없이 우리나라 방송기술총수자리를 장기간
전담해온 실력자중의 실력자 였다, 님은 원래 철저한 장인의식이
강한 기술인,,, ,탁월한 능력경륜, 완고한 외골?
 
,,90여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특별한 존경 인정을 받아,
 1937년부터 42년간의 고위 공직자생활 중에서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공보처 문화공보부 기감에서부터 한국방송공사
 초대 기술총국장, 이사 등의 총수자리를 수십 년간, 전담하신
역사? 적으로 전무후무한 거인중의 거인 이였다,
 
그 어른이 게신 한 그 누구도 그 자리를 넘보지 못했고,
 경쟁이 안 되었던 우리 방송기술인의 정신적 지주였다,
해방 후 라디오방송시설도 제대로 안된 우리나라 방송시설,,,
지방방송국 개설, 청사신축, 동양에서 최고라던 대 출력 송시시설,,,
전국 각고지에다 중계소 및 난시청 해소사업 등 오늘의 현대화가
 되기까지의 시설 운영의 총지휘자였다,
 
 그 어른도 노령에는 어찌 할 수없는 삶,,,,
90여년의 생을 마감 한 것,,,이제 우리들 후배방송인
 모두는 깊이깊이 머리 숙여 전무후무한역사적인 거인?
 의 명복을 빌면서,,,회상해본다, 외길,,,철저?,,,어른은 잡담
 농담도 일체 허용치 않았고, 언제나 빈틈없는 엄한자세....
그 많았던 연회 주석에서도 한시도 여유를 안주어
주변사람이 긴장을 하게한 어려운 ?,,,,
 
그리고 언제나 방송관련 업무이야기 밖에
모르시던 어르신 이였다, 언제 어디를 가시던 방송을
 들으시고, 업무에 참고, 업무지시를 하시는,,,, 지나친 욕심?
 독선?,,,, 이제 이승에 가셔서도 그 같은 일을 잊을 수 있을 것 인지?,,,,
 굼 굼 하기만 하다, 거년도, 이제 노령이기에 정신력이 흐렸을
거라 생각했는데 청력이 나빠진 것 외는 정신력 체력 조금도
변함이 없이 정겨운 옛날이야기를 하시던 것,,,
 
호랑이는 죽으려면 그의 굴에 돌아가서
숨을 거둔다고 했다, 회고 해 보니, 자신의 운명을
사전에예상 했음인지, 특별한 나들이,,, 수십 년간 고락을
이하던후배들과 자리를 같이 하고, 정담을 나누시며, 3-40년
후배들까지 손을 일일이 잡아보시고 난후,    그 늦은 밤에
방송시설을 돌아보시겠다고 현장안내 요청,,, 시설현장을
 둘러보신 얼마 후, 병석에 눕더니 다시 돌아 올수
없는 영면의 길로 가신 것,,,
 
 당시 방송시설을 둘러보시는데 동행
 안내 했던 후배의 말,,,“지금도 현대화된 방송시설에
그토록 관심, 잘 알고 게시고 자세한 말씀에 놀았다 ”
 한말 잊어지지 않는다,
 
옛날 김활란박사의 임종을 직혀 보던 측근이
눈물을 흘리니,,,그가 했다는 말,,,,, “ 애야 울지 마라,
나는 이 세상에 태여 나서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유감없이
 하나님 곁으로 가는데왜? 울어,,,찬송가나 불러 다오,,,”
이인관 어르신은 유감없고, 자랑스러운 삶,,,천수를
다 하고이승으로 가신 것 이라고,,,,
 
그리고 님은 역사상 있을 수 없는?
수십 년간을 같은 직종의 최고위직의 공직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그 어떤 비판적인 말은커녕,
절대적인 존경 그리고 복종,,,,이도
 특기 할 사항이라고 말이다,
 
 이제 전무후무할 방송, 기술에 거인은 가셨다,
이제 우리들 후배들이 잊어서는 안 될 일이 있다고
다짐해야 할일은, 공직사회에서 이토록 모범성실, 존경을
 받고, 일생을 살아오시고, 그 공적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이다, 여세 출 이라했던가? 유공자, 훈장을 받은 사람,,, 적과
싸우다 죽은 것만이 국가유공자냐? 공직자로서의,,,사회,
기술발전, 시설개선에 공헌한 사실,,,
 
이는 분명한 국가적인 유공자 인 것,,,,
1960년에 제3회 방송문화상, 1971년에 대통령 표창을
받은 바도 있지만, 어르신의 인격, 공적, 이모두가 부정 할 수 없는
자랑스러운 삶,,,,, 그간 작고한 선배방송인중, 국가유공훈장  또는
후배들의 추모모임 등,,, 이 모두들 어르신과 견주어 생각해 본다,
모든 방송인들이 자랑스러운 거인 선배,,,,우리들은
국가? 사회적인? 예우의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다짐해 본다,
 
 2007, 3, 12, 碧山
 
 
 

 


산유화 -  조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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