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우회·독립운동

이장춘 2009. 11. 18. 06:07

 

 

라디오 보급 30만대였던 시절 1950년대 말

 

 

 먼 세월도 아닌 50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때가 라디오 30만대시절입니다. 

 오늘날 라디오라야 전자제품 같이도 생각지 않지만

그때는 라디오를 갖은 사람들이 큰 부자였습니다.

해방될 때 남한에 있는 라디오는 모두

21만 여대였습니다.

 

그때부터 라디오라고는

 생산도 못하고 부품이 없어 있던 라디오도

 고쳐 쓰지도 못하고 버려야만 했습니다. 수입이라는 것도

없었고 외국인들이 들어오면서 가지고 온 라디오나

어쩌다가 외국에 갔다 오다가 사가지고 들어온

라디오가 고작이었습니다.

 

6.25가 나고 모든 것이 어려워지면서

 라디오 한 대라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더 적어졌습니다.

 이때부터 1959년까지는 통계도 없습니다. 아예 통계 자체가

 무시된 것입니다. 이래서는 나라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웠는지라

 국민들에게 라디오방송이라도 듣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정부나 뜻있는 사람들의 생각이었습니다.

 

1957년과 58년에 삼양전기와

금성사에서 처음으로 라디오를 생산하고

농어촌에 앰프 촌을 만들어 스피카를 보급하고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무상으로 보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1959년에 들어 라디오가 몇 대난 되는지

조사해 보았더니 31만대가 겨우 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서울 경기도에만

 집중적으로 보급되어 70%에 달하는 농어촌에는

 라디오 한 대도 없는 마을이 많았습니다. KBS와 정부가

나서서 라디오 생산 공장을 지원하고 농어촌에 라디오나

스피카를 보내고 농어촌을 돌아다니며 라디오가

무엇인지를 계몽하면서 라디오를 나누어

주었던 것이 60년대까지의 우리나라

 현실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라디오 100만대가

넘은 것은 1962년 무렵이었고 라디오 없는

마을이 사라진 것은 1960년대 말이었습니다.

국민간의 문화적 격차를 없애야 한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인지 10여년

만이었습니다.

 

그때 공보부에서 그 일을 담당하셨던

 방우회(한국방송인 동우회) 고흥복 이사님이

 충청도와 전라북도 일원의 농촌에서 이동식 송신기와

안테나를 설치하고 현지방송을 하면서 라디오를 직접

나누어 주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내 오셔서

그때를  회상하면서 이사진을 올립니다.

 

 

1962년 봄 충청도와 전북지역

국지이동방송을 실시하던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10W송신기, 콘솔, 녹음기, 기타방송장비와 조립식중파

ANT(이동용)끌고 다니며 산간벽지 난청지역에 방하나

 빌리고 동내 집에 트랜지스터 라디오100여대를 나누어주고

 국가정책PR방송을 했다고 사연을 전해 오셨습니다.

 

 

PD, 엔지니어, 아나운서, 운전기사가

한 팀이 되어 활동을 했는데 이때는 이 상익,

고 흥복 홍 기욱님이 한 팀이 되어 활동했는데 당시

동아 방송 홍기욱ANN(KBS 홍기봉 ENG의 동생)는 체격도

좋고 호남 형으로 임택근 아나운서가 왔다고 가는 곳마다

동내 처녀들이 몰려나와 인기가 좋았다고 했습니다.

 

 

우리 세대에 그런 세상이 있었던가.

 할 정도로 세상이 너무 변해버렸습니다. 사실

저도 라디오 없이 살다가 1959년부터 우리 집에

스피카가 설치되어 벽에 걸린 스피카 들으며 살았고

제가 방송국에 들어와 동료 기술직원이 라디오를

조립해서 판다기에 두 달분 봉급 12,000원을

주고 그 라디오 석대를 사서 고향에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방우회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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