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기술

이장춘 2010. 1. 20. 15:00
 
 
 
방송역사의 주춧돌이 된 유병은 / 전 빙우회장 문시형님 유고
 
 
이글은 고 문시형 선생님이
방우회장 시절에 쓰신것을 당시의
방우회 사무총장 정항구님이 보내주신
 글입니다.   이 글은 1990년대 초에  쓰셔서
보실때 년대 등을  감안 하시면서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서울시 서초구 반포2동 주공아파트
228동 102호. 노부부가 오붓하게 살고 있는
아담한 이 아파트에는 주인의 문패가 있어야할
그 자리에 '청원박물관'이라 적힌  낡은 목조현판이
 걸려있다. 청원(淸垣)박물관. 어쩌면우리나라  방송사에
 기록될 최초의 방송박물관일지도 모른다
 
. 채 서른 평이 못 되어 등록된
관인 박물관은 아니지만 소장 품목은
무려 2천여 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청원(淸垣)은
다름 아니라 바로 원로방송인 유병은
(74세.兪炳殷)옹의 호이다.
 
어느새 골동품 할아버지가 된 그이가
방송일을  시작한 것은 1943년 단파방송
해내외 연락운동으로 JODK방송국 요원이
대부분 검거.투옥된 바로 뒤였다.
 
 일본 제일고등무선학교에
재학 중이던 유병은 옹은  일본
동경에서 실시된 JODK 직원 결원
보충을 위한 기술자 공채에 응시,
중계 녹음반에 입사했다.
 
1917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방송일 에
종사하면서 1950년 대전방송과장, 61년 서울중앙방송국
기술과장을 지내는 동안 현대사의 질곡에서 방송 수난사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왔다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방송과 함께 파란만장했던 유병은 옹의 인생역정을
 통해 잊지 못할 가슴 아픈 얘기가 있다.
 
 1961년 서울시 문화상 방송부문
초대수상자가 되어 열 돈짜리 순금메달을
받았건만 기념품을 간수할 새 없이 방송골동품
수집을 위해 명동 금은방으로 가야만했다.
 
금을 팔려니 금은방 주인은 세상이
하도 어수선해 가짜가 많아 메달을 쪼개봐야
하겠다고 한다. 돈이 아쉬워 하는 수없이 쪼갤 것을
수긍하니 눈앞에서 금메달은 인정사정도 없이
두 동강이 나고 만다.
 
그 순간 심장이 쪼개지는 아픔으로
현기증이일어  진열대 유리를 의지해야 할
지경이었다. 유병은 옹이 방송유물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쏟게 된 것은  1946년 당시 중앙방송국
부과장을 지내던 한덕봉선생을  
만나면서부터라고 한다. 
 
한국의 마르코니라고 불리울만큼
방송기술에 통달했던 그는 그 당시에  
이미 세계의 방송기기  부속품을
 상당히 수집하고 있었다.
 
방송기술계의 대부 한덕봉 선생으로부터
서너 점의 방송유물을 선사받고 방송의 역사를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서의 방송기기와  방송관련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던 것이다. 유병은 옹이 이렇게 금메달을
내다 팔아야만 했던 것은 그때의 방송인의 월급이
적었던 때문이기도 하지만 해마다 KBS가
노후된 기계를  일반에게 불하했었다.
 
그러나 방송유물에 관한한 '광'이 된
 유병은 옹이 업자의 손에 한 점이라도 넘어가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지도 모를 낡은 기계들을 그대로 놓칠 리가
 만무하다. 어떻게 하다 업자의  손에 이미 넘어간 물건들은 그들에게
 머리 숙여  사정을 하고 애원을 해서 가격을 지불하고
한 점 한 점 확보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스물댓평 남짓한 유병은 옹의
 청원박물관은 기관총 같은 집음기를 비롯해
자석식 라디오,돌지 말지 하는 턴테이블, 갖가지
종류의 기념메달과 방송국 배지들로 가득 차 있다.
기관총 같은 집음기를 보면  웃지 못 할
얘기 하나를 빼놓을 수가 없다.
 
 "2층 방청석에 뻗치고 있는게
기관총이요, 뭐요. 집어치워요." 자유당 말기
 국회에서 벌어진 촌극이다. 의정 석상에서 벌이는
국회의원들의 발언내용을 정확히 수록할 심산으로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간   한 묶음의  집음기
(녹음기)가 흡사 기관총을 뻗대 놓은듯해
벌어진 웃기는 일이다.
 
유병은 옹의 평생에 있어서 가장
서운한일 가운데 하나는 6.25난리 통에 희귀 수집품
쉰 여섯 점을 분실하고 만일이라 한다.  피난을 가면서 관사천정을
뜯고 숨겨둔 방송기자재들이 돌아와서 보니  한 점도 없더라는
것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난후에 청계천 일대 고물상을
 다 뒤져 수집을 시작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청원박물관을 설립한 것은 1969년 10월 2일
 그때까지 수집한 물건들을 자택에 전시하여 현판을 내걸고
 사설박물관을 만든 것이다. 흔히 한 가지 일에 열중하는 그중에서서
 지속적으로 열중하는 사람을 가리켜 좋은 뜻으로 '미친 사람'이라고 한다.
 청원박물관에 소장된 품목을 보면 그가 방송기술인 출신이라 하여
단순히 방송기자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방송관계의 각종 문서와
 서적에 이르니, 지금에 와서는 소장품의 수량이
정확히  얼마인지 헤아릴 수가 없다.
 
 '골동품광' 유병은 옹은 오래전에 이미
우리나라 방송에 관한한 역사 통이 되었으며 특히
 '단파방송 해내외 연락운동'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자타가 인정하는 독보적인 증인이면서 역사가이다.
1974년에 한국방송 50년사 편찬위원회 사무국장을 역임하면서
실제로 우리 방송사 정리에 큰 힘을 기울이기도 했다.
 
단파방송 사건과 관련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고인이 된 성기석 선생과 홍익범 선생 그리고 조종국 선생이
 지난해 8.15해방 기념식에서 국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늦게나마
 받게 된 것도 유병은 옹이 국사편찬위원회, 중앙도서관, 법원 등을
 두루 살펴 발굴해낸 사료를 근거로 이루어진 하나의 개가였다.
 
"아, 글쎄 공판기록엔 성기석씨에 대한 기록이
다른 사람의 진술서에는 나오는데 정작 본인의 진술서하고
재판기록이 없잖아요." 독립운동사에도 기록되어 있고  이인 선생의
 '애산여적'에도 단파방송 연락운동을 한 성기석 선생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보훈신청을 하려고 사실을 입증할 만한 근거서류를
찾으니 정작 본인의 재판기록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치안국 감식과에서
지문조회결과 성기석. 홍익범. 조종국 세분의
전과기록이 확인되었으니 유병은옹의 기쁨은 말로는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일이 있은 지가 벌써 1년이 넘었다. 
단파방송 연락운동으로 수난을 당한 몇 분 선생들이 늦게나마
국가로부터 서훈을 받게 된 것은 바로 청원박물관과  유병은
 옹의 방송에 대한 남다른 애착의 소산일 것이다.
 
1977년 8월에 환갑을 지낸 그는
 남과 같이 호화스러운 잔칫상을 차리는 대신에
대학로에 있는 한국문예진흥원 대강당에서 조촐한
소장품 전시회를 개최한 바 있다.  이 첫 번째 전시회를 연 이후
 1979년에 있었던 전자박람회에서 방송기자재 특별 전시를 했으며
 81년에는 MBC 예쁜 엽서전시회에 진귀한 방송유물을 전시,
 젊은이들에게 옛날 방송설비를 보여주기도 했다.
 
또한 1983년 '세계통신의 해' 기념과
한국전기통신공사 1백주년 기념행사에도
특별 전시를 했다.  뿐만 아니라 지난 1987년
9월에는 서울 마포에 있는 성지빌딩  대강당에서
고희를 기념하는 방송골동품 전시회를 가져
관계 전문가와 단체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어린이회관, 서강대학교를
비롯해 여러 방송유관기구들이 소장품을 기증해 줄 것을
 간곡히 요구한 바 있지만 유병은 선생은 그 물건들은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한다며 한사코 거절해 왔다. 그가 말하는 방송골동품이
있어야 할 '그 자리'는 다름 아니라 KBS이다.
 
 KBS에 몸담아 30년이 넘게 봉직했기로
 '친정'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게 깊다. 만약 KBS가
방송박물관을 세운다면 이에 수집품을 기증하리라 공공연히
 애기해 왔었다. 마침 92년 한국방송공사가 박물관을
건립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주름진
노안에 희색이 피었다.
 
현재 그는 KBS 사우회가 마련한
한국방송사료 편찬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소장 품목을  정리하느라 연일 눈코 뜰 새 없이
작업을하고 있다.  골동품 할아버지 유병은 옹은
하마터면 경범죄로 경찰신세를 질 뻔했던
일화 하나를 들려준다.
 
1927년 JODK가 개국할 당시에는
라디오를 구입하면 체신국에서 그 청취자에게
청취허가증을 내주어 대문에 붙여 표시를 하도록 했었다.
바로 이 청취허가증이 몇 년 전 그를 혼비백산하게 만든
주인공이다. 경기여고 뒷담 길을 지나는데 낡은
 기와집 대문에 시선이 가게 되었다.
 
문득 보니 익숙한 문장이어서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고 더듬어 본 결과
 JODK 청취허가증임을 알 수 있었다. 비록 페인트가
 두껍게 발라져서 뚜렷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식견으로는
 그것이 분명했다. 주인을 불러 사정얘기를 하고 떼어갈 것을
 간청했으나 매몰차게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
 
흥분된 기분으로 골동품 할아버지는 그날 밤을
뜬눈으로 새다시피 하고 다음날 변호사 친구를 찾아가
사정얘기를 했다한다. 그 친구가 제시한 해결책이란  일금
 5천원과 드라이버를 준비해서 새벽에 그 집을
찾아가 떼어오라는 것이었다.
 
그 말대로 단단히 마음을 다져 먹고 그렇게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경범죄로 경찰신세를 지진 않았지만
 어찌나 가슴이 두근거렸던지 아직도 그 기분이 가라앉질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JODK청취허가증은 그가
 특별히 아끼는 역사적인 물건의 대열 속에 낀다.
 
유병은 선생은 부하직원을 내 몸같이
 위하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의 과제가
 떨어지면그 완성을 봐야만 하겠기에 '진득이'라는
별명이 붙여질 만큼매사에 대단히 열심이었다.
우리나라 방송기술사에서 기억할만한
재미난 얘기하나를 해야겠다.
 
1962년의 일이다.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은
 불과 30분이 못되는 공중집회 석상에서 가진 대중연설
도중에 건강관리를 잘못 했던지 기침을 두 번이나 하게 된다.
최고회의 의장의 연설인지라 저녁시간에 재방송을 하지 않을 수
없으니 기침소리를 빼고 방송하라는 엄명이 내려진다.  유병은
선생은 그 당시 기술과장으로 기술과원들과 함께
소위 기침소리를 빼고 편집을 하게 되었다.
 
이 편집과정은 녹음된 테이프를 중계방송 때
 동시 녹음한 암펙스 녹음기에 걸어 편성과에 비치된
 편집용 암펙스 녹음기에 의해 재생되고 또 복사되어 방송으로
 나가게 되는 부조정실의 녹음기에 기침소리를 뺀 녹음테이프가
 걸리게 된다. 그러니까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대중연설은
받고 뱉고 또 받아 무려 암펙스 녹음기  
4대를  거쳐 전파를 탔다.
 
전파가 나간 후 경향신문의 고십란이
화려했다. "채신머리없게 빨라진 최고회의
의장연설?" 그때 상황으로서는  책임추궁이 없을 수
없었다.  원인은 암펙스 녹음기에 있었다. 편집에 동원된
4대의  암펙스 녹음기의  회전속도가  제각기  달랐으니
 말소리가  채신머리없이 빨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 한바탕 소동을 겪게 했으니
 당시엔 웃지 못 할 큰 사건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야말로 코미디 같은 얘기가 되었다.
 
 
1974년 유병은 옹은 정년을 맞아
방송계를 물러났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그 강산이 세 번은 변했을 30년 세월을 한결같이 짝사랑만 했던
 방송 실무에서 은퇴를 한 것이다. 서운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지만
 평생을 바쳐온 '방송인생'은 그 주변에서 아직도 뜨거운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우리나라 방송계에서 제일 먼저 할일은
 방송연표부터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방송사의
 정통성을 정립할 정사가 나올 수 있습니다.
 
" 우리 방송의 기원을 해방이후로 하자는
 후배방송인들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섭섭한 마음을
 감추지 않는 유병은 옹의 주장이다. 후배들은 1943년
단파방송 연락운동 같은 방송인들의 독립운동을
하찮게 여기거나 모르고 하는 얘기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방송사의 살아있는 증인이자
 걸어 다니는 '역사'이기도한 유병은 옹이 소원한 대로
우리방송역사를 한눈에 살필만한 의젓한 방송박물관이 세워지길
 바란다.    그래서  선생의  귀한소장품이  연대별로   진열되고   최소한
유병은 옹의 흉상이 그 전시대 옆 한자리에 놓일 수 있다면  좋겠다.
일흔넷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젊은 마음으로 활기차게  생활하
유병은 선생이 오래오래 건강하길 빈다. 
 


1966년 제 9회 방송문화상을 받으실때의 유병은님입니다
( 오른쪽분) 1958년부터 1968년까지 시행된 방송문화상은 당시로서는
 방송인이 받는 가장 영광스러운 상이었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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