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이장춘 2010. 3. 17. 20:43
 
 
 
 경성방송국과 최초 아나운서 이옥경님
 

이옥경님은 우리나라 최초의

아나운서로 시험방송을 하던 1926년

6월부터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라디오를

요술 상자라고도 하고 하늘에서 신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라는 얘기를 할 때여서 방송국에는

연일 관광객이 몰려들어 때로는 유리창이 깨지는가

하면 출퇴근때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인력거를

타고  해야 할 정도로 그 인기는 대단했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1927년 2월 16일 한시부터 진행된

경성방송국 개국식은 이옥경 아나운서와

방송부 주임 일본인 미쓰나카가 한국어와

일본어를 번갈아 가면서 사회를 보아

관심을 집중시켰습니다.

 
 
 

 이옥경님은 1901년 9월 7일 서울에서

구한말 과거에 급제한 관리로 영어를 할 수 있었던

이학인  (李學仁)님의 무남독녀 외동딸로 테어나 아버지

직장따라 인천으로,  또 만주로 옮겨가 살았고

만주에서 소학교를 나왔습니다.

 

뒷날 이옥경님의 남편이 된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인 노창성님은

만주 소학교시절 같은 학교 선후배로 만나

그 인연으로 뒷날 결혼으로 이어져

일생을 함께 했습니다.

 

만주나 국내에 한국인 여학생이

다닐 수 있는 학교가 없어 부득이 일본 큐슈

뱃부에 있는 미션 스쿨에 입학 해 학업을 계속하게

됐지만 재학중 아버지가 새상을 뜨심에 인천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일본에 있는 딸을 인천 여학교로 옮겨

오늘날의 인천 여자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둘쩨딸 노라노(노명자)님의 말에 따르면

 

이옥경 아나운서는 학창시절

 공부뿐만 아니라 명문에 명필, 리고

마라톤 대표, 전교 테니스 선수, 압록강에서

연마한 아이스 스케이팅 선수 등 노래만 빼고는

모든 분야에서 특출 했었다. 졸업 하던 해

일본신문에서 어머니를 ‘꽃 중의 꽃’

이라고 대서특필했다. 고 합니다.

 

 

인천여고를 졸업한 이옥경은

도쿄 의과대학 유학을 떠났고  그 무렵

만주시절부터 인연을 맺었던 구라마에 공업대학

노창성님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두 분의 멋진 로맨스는

 훌륭한 문학작품의 소재가  될 수도 있는 아름다운

얘기가 있습니다.  (이 부문은  딸 노라노님이 

쓰신 뒤에 있는 글로 대신 합니다.)

 

노창성님은 구라마에를 졸업하면서

이 땅의 방송국 설립을 위해서 체신국 공무원으로

채용되었고 천성적인 미모와 아름다운 목소리의 주인공

이옥경도 아직 정식으로 방송국의 문을 열기전, 시험방송시절

 1926년 7월, 음성 심사를 거쳐 경성방송국 아나운서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첫 아나운서가 탄생했고 1927년 2월 16일 최초의

방송국 개국식 사회를 영광을 누렸습니다.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이 적었고

 남성 우위이던 시절, 방송에서는 여성의 목소리가

청 전파를 탄 영광을 가졌습니다.  님은 둘째 아이 노라노가

테어 나면서 얼마 안되어 가정으로 돌아 가셨습니다.  9남매의

어머니로 가정생활을 하면서 오랜 세월 방송인과 함께

 하시다가 1982년 5월 1일 세상을 뜨셨습니다. 

 

님의 아나운서 생활은 님이 쓰신 글로

대신하고 또 더 자세한 사항은 둘째 딸 노라노

(본명 노명자)님의 글을 함께 올립니다.  노라노님은

1928년에 테어나  우리나라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로

널리 알려지신 분이고 미국이나 일본 중국에서도

 그의 명성이 알려지신 분입니다.

 

 

 

이옥경님의 아나운서 생활

 

  이옥경님 친필   

 

방송국이 서울에 처음 창설되고

방송을 시작한지 며칠 후인 어느날이었다.

저녁에 방송국에서 돌아온 남편(고 노창성씨)이

나에게 아나운서가 되어서 한국방송 사업을 도와

달라고 했다.  방송을 시작한후 얼마동안 남지 직원들이

돌려가며 아나운서가 되었는데 그것이 불만이고

아무래도 상냥한 여자 아나운서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시절도 빈약하였고

마이크도 왜 그렇게 미련스럽게 생겼는지

징그러운 생각이 들었다. 음성테스트에도 다행이

합격이 되어 그 다음날부터 정식 아나운서로

매일밤 두시간 30분 동안 일하게 되었다.

 

나 개인적으로는 물론 어떤 의미에서

이날은 여성 전체에게 의미있는 일이라고

할 수있다.  그것은 여성을 위한 직업이 한가지

늘은 까닭이다. 아나운서직은 그 당시로서는

일종의 인기직업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이 당시는 방송자체가 기이한 소리였다.

말소리가 공중을 통하여 들린다는것도 믿기

어려운데 여자의 말 소리가 들려온다는 화제거리가

 된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 호기심에서 정동방송국으로

 나를 일부러 모러 오는 사람도 꾀나 많았다. 더우기 양장에

모자까지 쓰고  마이크를  상대하는  내 모양이   창밖의

구경꾼들에게 좋은 구경거리였을 것이다. 양장덕인지

팬도 많았고 인기도 높아서 기실 나자신도

슬그머니 기쁘기까지 했었다.

 

한일어 두가지로 방송하던 시절인데다가

재정 여유가 없어서 나를 겸용 아나운서로 만들기도

했다. 처음에는 상대자도 없이 혼자 말해야 하는 쑥스럽고

허전한 감도 있었고 더구나 2시간 30분씩이나 교대도 없이

 일라고 나면 피곤하기도 했다. 또 경험이 없어서

일어나는 웃음거리도 가끔 있었다.

 

제일 재미 있었던 것은 아마

제청 제도였을 것이다.지금 방송한 프로그램이

재미있는 프로그램이었을 때는 청취자가 전화나 그밖의

수단으로 재청을 요구해 왔다. 방송국으로서는 그럴 때마다

큰 성공이다 싶어 미리 준비된 프로그램이 없을 때는

즉석으로 다시 프로그램을 짜서 방송했다. 물론

이동안 기다리는 10분쯤은 예사였다.

 

 

 

 최초 아나운서 이옥경님의 생애

 

둘째딸 노라노님의 글 

 

  

 

 들 어 가 는  말

 

나의 어머니 이 옥경 여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아나운서이다. 어머니가 첫 방송을 시작한지는

 벌써 80년이 넘었고 세상을 떠나신지 만 27년이 된다. 그러나

아직도 방송 역사를 말할 때는 반드시 어머니 이 옥경 여사의

 이름이 오르고 KBS 아나운서실에는 최초의 아나운서로 이름

석 자가 걸려 있다. 어머니는 82세로 1982년 별세하셨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돌아가신 해까지 매년 방송의 날이

 되면 반드시 KBS 방송국에서 연락이 와서 특별

TV 방송에 출연 하신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알기로는 어머니의 첫 방송은

1926년 7월 아직 정식으로 방송이 시작되기 전

시험방송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여성들의 사회진출은

거의 없을 적이다. 모친의 활동은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었다.

특히 길에서 방송을 통해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면 길 가던

많은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모친은 1928년 둘째 딸인 내 (노라노)가

태어나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어 린  시 절  

 

 어머니는 1901년 9월 7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무남독녀로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어머니의 부친(李學仁), 나의 외조부님은 구한말 과거에

 급제했고 영어를 공부한 것으로 알고 있다.

 

늘 외조모 말씀이 “너의 외조부는 천주학을 하느라

부모님의 감시를 받아 담을 넘어 다니며 공부를 했다.”고 한다.

혹시 천주교 신부님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학인 외조부님은 일찍이 정삼품(正三品) 벼슬을 하시고

 황태자 영어 교사를 지냈다.

 

어머니가 태어난지 얼마 안돼서

인천세관장으로 임명돼 인천으로 이사를 갔다.

1910년 8월 22일 한일 합방이 되자 외조부는 미국

망명길에 올라 상해(上海)로 가려고 만주 안동에 도착했다.

마침 그곳에서 영국인 친구를 만나 영국 세관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만주에 머물게 됐다.

 

 

 

 

  학 창  시 절  

 

 어머니는 만주에서 그곳 일본인 소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중학교로 갈 나이가 되자 외조부께서는

 어머니를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시기로 결정했다.  만주에서는 아직

여자 중학교가 없어 고민 끝에 결정 한 것이다. 아들이 없는 외조부는

 어머니의 어린 시절 남복을 입혀 키웠다.   “여자라고 학업을 계속

못할 이유가 없지.” 하시며 “일본까지 가서 일본 공부를 하는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어쩌겠냐.” 하시며 한숨을 내 쉬신 것을

어머니는 감명 깊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큐슈 뱃부에 있는 미션 스쿨에

입학 해 학업을 계속하게 됐다. 일본 학창 시절의

에피소드가 있다. 어느 날 아침 조회에서 학교 앞 빵집에서

 빵을 사먹은 적이 없는 학생은 손을 들어 보라고 하니까 

전교생 중 어머니 한 명뿐이었다고 한다.

 

또 한 가지 어머니의 자랑거리가 있다.

아침 조회에서 미국인 교장이 이 옥경 학생 부친의

편지라며 영문 편지를 낭독하시고 이런 명문은 일찍이

 접한 적이 없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16살 되시던 해 여름방학을

지내러 만주 부모님을 방문 중이던 때 저의 외조부께서

폐렴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다. 37세에 미망인이 된

외조모께서는 만주에서 눈물로 외조부의 유골을 안고 인천으로

돌아왔다. 외조부님의 별세 후 양복 70여벌이 남겨 졌고

우표수집 하신 것이 꽤 많았던 것으로 전해 들었다.

 

외조모께서는 그 우표를 관에 넣어 시신과

 같이 태웠다고 한다. “당신이 그토록 좋아하신 것이니

 같이 가져가세요.” 라고 시간이 지나가며 외조모는 슬픔과 외로움에

견디지 못해 일어를 하는 사람을 사서 데리고 뱃부에 어머니를 찾아 갔다.

학교에 사정을 말하고 어머니를 대동해서 다시 인천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문제는 조선에는 아직 여자 중학교가 존재하지 않았다. 생각 끝에

일본인 여학교 인천고녀를 찾았으나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 시절이니 아무도 조선인 여학생의

사정을 들어 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매일 아침 학교 교문 앞에서

교장선생님을 기다려 사정을 했다. 한 달이 지나자

교장 선생님은 어머니를 데리고 학교에 들어가 시험을 치자고 했다.

이렇게 입학을 하게 된 인천여고가 금년 100주년을 맞아 행사를 했다.

 어머니는 인천여고 재학 중 늘 일등을 했고 외조모 말씀을 빌리자면

학기말이 되면 졸업식에 지게꾼을 데리고 가야 할 정도로

많은 상품을 받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공부뿐만 아니라 명문에 명필,

리고 마라톤 대표, 전교 테니스 선수, 압록강에서

연마한 아이스 스케이팅 선수 등 노래만 빼고는 모든 분야에서

특출 했었다. 졸업 하던 해 일본신문에서 어머니를

‘꽃 중의 꽃’ 이라고 대서특필했다. 

 

 

  결혼을 하던 때 얘기 

 

어머니는 여고졸업을 앞두고

도쿄 의과대학으로 유학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무렵 경성의과대학을 다니고 있던 옆집 일본인

청년의 혼담이 들어 왔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과 한국인의

결혼이란 생각지도 못하던 일이었다. 청년 부모님의 절대 반대로

청년은 속병을 앓고 일 년 휴학을 할 지경에 이르렀다. 하는 수 없이

청년 부모님은 결혼을 허락했고 약혼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 때 인천의 한 조선인 일본 유학생이

사각 모자에 망토를 휘날리며 나타났다. 이 청년은 어머니와

만주에서 같은 소학교를 졸업한 졸업생이었다. 어머니는 소학교 시절

조선 이름을 가진 남학생이 행사 때면 늘 앞에서 교기를 들고 걷는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어린 마음에 이 학생을 존경했고 남학생은

미모의 조선 여학생을 마음속에 새겨서 반드시 성공해서

저 여학생과 결혼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어머니는 도쿄 의과대학으로

이 청년은 구라마에 공업대학으로 진학 했다.

어느 해 여름방학에 그 청년이 인천으로 어머니를 찾아 온 것이다.

청년이 어머니의 행방을 찾고 있던 중 만주 소학교 교지에 실린

어머니의 글을 읽고 주소를 알게 된 것이다.

 

청년의 멋진 모습에 어머니의 마음이 움직였고

더구나 홀어머니를 모셔야 할 처지라 역시 조선 청년하고

결혼을 해야 옳다고 마음을 굳혔다.  이 청년의 이름은 노창성(盧昌成)

 나의 아버지다. 일찍이 마음에 품고 일방적인 사랑을 해 오던 일본 청년은

후에 아버지를 찾아와 말하기를 “당신은 조선인 나는 일본인

 우리의 싸움은 시작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앞으로 당신이 ‘리상’을

불행하게 한다면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야.”

라고 했다. 그 후 해방 직전 나의 아버지가 곤경에

처했을 적에 이 청년(마쓰오가 박사)은 

큰 도움을 주었다.

 

 

 

 방 송 국  시 절

 

 1924년 초 우리나라에서 방송국을 세운다는

계획이 있었다.  아버지는 당시 총독부 관비생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총독부 체신국에 근무하고 있었다. 학교 선배이자

직장 선배가 되는 시노하라(蓧原昌三)씨의 추천으로

조선에 방송국을 설립하는 일을 같이 하게 됐다.

 

1924년 초 우리나라 보다 한발 앞서

일본에서는 방송국을 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일본으로 건너가 견학을 하고 시험방송에

필요한 기계를 주문하고 돌아왔다. 그 해 11월에는

시험방송이 준비돼 체신국 안에서 보도진들과

관리들이 모여 시험방송을 했다.

 

 12월 9일 드디어 일반인들이 보는 가운데

처음으로 시험방송을 하게 됐다. 당시에는 아나운서라는

 직업도 없었고 하겠다는 사람도 없어서 남자 직원들이

 돌아가며 아나운서 역할을 했었다.

 

아버지 노창성은 여성 목소리가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되어 사람을 구했으나 일어도 겸할

여성이란 찾을 수가 없었다. 드디어 어머니 이옥경에게

화살이 꽂혔다.  1927년 2월 16일 

1시부터 개국식이 열렸다.  

 

  

개국 사회는 경성일보에서 온 방송주임

‘마쓰나가’ 라는 분과 어머니 이옥경이 번갈아서 진행 했다.

이렇게 이옥경 여사는 이 땅에서 처음 정규 방송을 하는 날 첫 전파를

 내보내는 영광을 안게 된 것이다.  방송시간은 매일 밤 2시간 30분이었다.

 사람들은 사람 목소리가 공중에서 날아 온다며 장안의 화제꺼리가 되고

 특히 부드러운 여성의 말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흥분하고  정동

방송국으로 직접  찾아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새로이  아나운서라는  여성 직업이  탄생했고

당시로는 가장 인기 직업으로 꼽혔었다.

 

 

 

 

 한국말과 일본말  

 

방송은 두 시간 반 아나운서의 교체가 없이

 계속 되었고 언어는 일어, 조선어 두 가지로 방송을 하게 됐다.

당시 예기치 못한 일들이 종종 일어나곤 했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재청제도였다고 한다.

 

프로가 재미있으면 청취자가 전화나

그 밖의 수단으로 재청을 요구해 온다. 방송국에서는

그럴 때마다 큰 성공으로 여기며 미리 준비된 프로가

 없을 때에는 즉석에서 다시 방송을 하곤 했다. 물론

그 동안 10분쯤 기다리게 하는 것은 예사였다.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지만 당시

영업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방송국으로서는

희망적으로 생각됐던 것이다. 라디오를 팔고 청취료를

걷던 일은 당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 정  생 활

  

가정 살림은 어머니의 모친이신

 나의 외할머니가 돌봐왔으나 둘째(노라노)가

생기면서 직장을 접기로 결정했다. 방송국도 자리가

잡혀가고 있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서 아버지는

외할머니의 도움으로 계동에 멋진 양옥집을 짓고

 임시 살던 내수동에서 이사를 했다.

 

계동에는 주로 한옥이었고 우리 집이

양옥으로는 가장 먼저 지어진 것으로 안다.

우리들 9남매는 여기서 자랐고 이 집은 부모님의

보금자리이며 우리 형제에게는 많은 추억과

 기쁨을 안겨 주었다.

 

그린 색 2층 옥상에는 베란다가 있었고

등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우리는 여름 주말 식사를

늘 이 베란다에서 했다.  아침 일찍 아버지가 손수 장을 보고

 요리를 했다. 우리들이 가장 즐기든 메뉴는 아버지의 스끼야끼였으며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입을 열어봐라 하고 고기를 직접 입에

넣어 주었다. “참으로 귀여운 새 새끼들 갔구나.” 하신

말씀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집 문 앞에는 계단이 있고 입구에는

 아코디언 철문이 동네 화제꺼리였다. 앞마당에는

자그만 연못이 있고 잘 가꿔진 나무들 그리고 내방 바로 밖에

 있었던 포도나무가 생각난다. 그 후 바로 뒷집에는 이조 17대

효종의 형이기도 한 소현세자 후손들이 집을 짓고 이사를 와

살게 되고 아랫집은 당시 중앙일보 사장을 지낸 여운형씨,

뒤 언덕 밑 지금 현대사옥 자리인 뒷집에는 민대감이

살았고 아침마다 언덕을 산책하던 민대감의

고귀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골목 위로는 후에 조선은행 총재,

일제시대 자작, 그리고 또 다른 민대감, 당시 일본에서

 돌아와 이름을 날리던 성악가 마금희 여사 등등 이름 있는 분들이

 살고 있었다. 우리는 해방 후 까지 여기서 살았는데 4남 5녀로

식구가 불어서 일제말기에는 식량난으로 어머니가

 많은 고생을 했다. 어머니 비로드 치마가

물물 교환의 주 품목이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퍼가요~!
흥미로운 글 잘 읽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