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 남산시절

이장춘 2010. 4. 8. 05:16

 

 

 

 
 KBS 남산시절 뉴스와 기자 (1) 전편

 


라디오와 스피카만 있으면 어느 곳에서나
어느 때나,  글을 알거나, 모르거나, 누구든지 자유롭게
 방송을 들을 수 있었기에  KBS 뉴스는 모든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글을 모르시던 분들이 많았던 시절이라 더욱 그랬습니다.
신문이 장점이라고 자랑 하는 기록성 같은 것은 중요 하지도 않고
 그저 듣고 알고 살아가면 되었습니다. 뉴-스는 하루의 방송시작과
 함께 방송되고 마감방송도 뉴스로 끝날 때가 많았습니다.
 뉴스는 국민들의 생활과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친근했었습니다.

신문도 배달 받기 어렵고, 통신수단도
여의치 않고 물론 인터넷도 없던 시대에 KBS뉴스는
매 시간마다 들려오는 매신져였고, 생활의 안내자 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뉴스는  우리  생활의  중심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 강점기를 포함한 방송초기에는  뉴스를
중요시 하지도 않았고 기자도 없었습니다. 일본어로 된
방송뉴스나 통신을 우리말로 번역해서방송하면
그것으로 끝났던 시대이고 이런 일은 
아나운서들이 하고 있었습니다.

해방전의 초기 방송국은 엔지니어와
아나운서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서 한국인
 PD나 기자는 없었습니다. 1927년 발족한 경성방송국
직원  50 여명 가운데 방송을 담당했던 한국인은 5명이었고 
이 가운데 엔지니어 2명 여자아나운서  2명
 프로제작  1명이었습니다.

해방될 때 까지도 기자는 따로 선발하지
않았습니다. 필요하면 아나운서가 했고 해방정국의
 취재를 했던문제안님, 이덕근님, 민재호님,
장운표님 모두 아나운서 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해방되던 다음날 비로소
기자의 필요성을 느껴 처음으로 취재기자로
활동 하시게 된분이 문제안님이고 혼자 동분서주하다가
얼마후 만주 신경(지금의 장춘)방송국에서 기자로 활동했던
조동훈님이 기자활동을 하면서 방송전문기자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문제안님을  우리나라
방송기자 1 호라고 부릅니다.

 


해방되면서 우리뉴스를 해야 했고
6.25가 일어나취재해야 할 대상이 늘어났는가 하면
외신의 중요성이 더해지면서  1955년 텔레타이프가 설치되고
외신부가 마련되고 외신기자를 선발하면서 기자는
차츰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뉴-스기사는 보도실의 기자들이 취재 작성 했지만

 60년대 까지만 해도 아나운서의 입을 통해서 전달되었습니다. 
 해방되고 나서 처음에는 취재기자의   내임싸인이 들어간 적도 있었지만
차츰  아니운서  내임 싸인만 들어갔고  특별취재의  경우에만   기자의
내임싸인이 들어 갔습니다.  방송만 듣고는 뉴-스를 아나운서들이
취재해서 방송하는 줄 아는 청취자들이 많을때였습니다.
  
 
KBS 남산시대는 1957년 12월부터 열립니다.
방송과장은 윤길구님이었고 오랜기간 보도실장을
맡았던 조한긍님이 이때도 보도실장으로 계셨습니다.
1958년 조한긍님이 떠나면서 현재 방우회 회장으로
계시는 한영섭기자가 보도실장이 되어
4.19후 까지 계셨습니다.
 
1961년 한영섭실장이 떠난 자리에
윤태로기자가  오셨고 5.16 얼마 안있어
최규정님으로 이어졌지만 갑자기 세상을 뜨심에
미국에서 연수중이던 박상진님이 발령을 받아 1963년
귀국,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오랜기간 보도실을 지켜오던

박상진기자가 1966년 서기관이 되어 광주방송국 방송과장

으로 옮기면서 그 자리는 박종국님이 이어 받았습니다. 

 

1962년부터 1963년까지 미국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보도실장이 된 박상진실장은

보도의 선진화를 위해서 새로운 인재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공개채용을  통해서  보도기자를  선발했고

이때 황규환, 나형수, 배학철, 임연택 등  10명의 기자가

선발 되었습니다. 이때 들어온 기자들이 KBS는 물론

민영방송까지 진출해서 오랫동안 방송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 했습니다.  

 

 

 

 

 광주방송국에 가 있던  박상진기자가

1967년 방송과장으로 오면서 송영호, 윤길구,

노정팔, 장기범, 박영선등 오랫동안 아나운서나 PD출신이

멑어오던 방송과장을  방송사상 처음으로 기자출신이 맡게

되었습니다. 박상진 방송과장,  박종국 보도실장 체제는 

1968년 7월, 중앙방송국, 국제방송국, TV방송국의

  직제가 통합 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1968년 3국이 통합될때  보도과가 신설되면서

박상진기자가 보도과장을 맡게 되어 명실공히 기자출신

보도과장이 탄생한것입니다. 1969년 보도부에 과가 폐지되고

차장제도가 신설되면서 KBS보도방송을 이어오던  박상진기자는

해외공보관장을 맡아 국위선양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1963년 제가 방송국에 들어오던때

 보도실 풍경과 인원구성을 간략히 살펴
보겠습니다.  남산청사 1층 그렇게 크지 않은 방에
 아침이면  20명 내외의 기자들이 모입니다. 한쪽에서는
텔레타이프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오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열심히 얘기를 합니다.  곁에는 방송과장실이 있었습니다.
방송과장은 장기범님이시고 보도실장은 박상진님이신데
또 한분의 계장이 있었습니다. 부르기는 계장이라고
부르지만 국제방송국 뉴-스 편집책임자였습

 니다. 황태수님이었습니다. 

 
1963년 보도실 구성원

 

 

 

실장   박상진
 
중앙방송국 소속으로는 이경수,

신영호, 곽노환, 주창순, 송형근, 김명진, 송정기,

김운찬, 최석진, 박성열, 김귀영, 이창열 한영준, 최이자님

국제방송국 소속으로는 (해외과 소속) 황태수, 서종화,  노영대, 

 강윤영, 김경호, 김창식, 전재만님 (편의상 국제방송국 소속으로

  봉급은 국제방송국에서 수령했지만 실제 업무는 중앙,

국제방송국이 같이 수행해서 업무의

구분은 없었습니다. 

이분들은 공사가 될 무렵까지 대부분 

보도실을 떠나셨습니다.
 
서종화님은 1968년 통합될 무렵 문화공보부로
떠나셨고  노영대님 주월특파원을 거쳐  문화공보부로
 김명진님은 제작 부서로 송형근, 강윤영님은 시청료 징수
사무소장으로 이렇게 해서 공사 발족 전.후에는 옛날 분들은
거의 다 바뀌셨지요. 그 시절에 보도실에 계시던 박상진,
서종화, 신정호, 노영대,김명진, 안현태님등은 오늘날의
방우회(한국 방송인 동우회)회원으로 계십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