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이장춘 2010. 10. 30. 03:58

 

 

 
대한민국 PD 1호 노정팔님의 방송 50년
 
 
 해방된 후 첫 아나운서 실험을 거쳐
1945년 11월 방송에 입문한 노정팔님은
2002년 7월 31일 세상을 뜨실때까지 방송과 함께
하셨고 방송을 생각하시며 사셨습니다.  아나운서 시험을
치르고 입문했지만 아나운서라고는 해본적이 없이
프로르램 제작 편성에 임했던 님은 그래서
대한민국 PD1호로 불리시며 이나라
방송과 함께 해 오셨습니다.

 

 
 

 

 한번 보고 들으면 잊지 않는
뛰어난 기억력, 한번 붙들면 놓지않는 집착력,
자상하고 꼼꼼한 성격에 빈틈없는 업무추진으로 일관한
님의 인생은 방송으로 시작해서 방송으로 끝났습니다. 
 님의 머리속은 방송에 관한 생각으로 메워져
 있었고 늘 방송으로 구현되었습니다. 
 

 

 

 
 생각과 체험은  1995년에 펴낸
한국방송과 50년이라는 자서전에 기록되어
 후세에 전해집니다.  지금 들려오는 노래 그리운 금강산은
1995년 노정팔선생님 저서 한국방송과 50년 출판 기념회에 1950년대
 KBS음악 PD였던 소프라노 김명희님을 초청해서 이북이 고향인 임께서 
이노래를 불러주시도록 요청하셔서 부른 축가라고 하십니다. 
아래사진은 그때 축가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4.19 후에
잠시 민영방송 창설에
손을 대기도 했고 1976년 부산 MBC전무를
지내시기도 하셨지만 그 기간을 제외하면  1945년부터
1993년 KBS이사회 이사장직에서 떠나실 때까지
 문화공보부나  KBS와 함께 하셨습니다. 

 

 

최초의 KBS어린이 합창단은 1947년 9월 노정팔님이 편성계장 재직시 구성되었습니다.  

 

 
1919년 8월 28일 함경남도 갑산에서 태어나
1944년 만주 할빈 농업대학을 나오시고 얼마 안 되어
해방이 되었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이 궁금해서 서울에 들렸다가
방송국에서 아나운서를 뽑는다는 얘기를 듣고 응모한 것이
그로부터 50년간 방송과 함께한 인연이 되었습니다.
 

 

 

 

아나운서보다도 방송에 관심이 있어서
시험에 응시한 것인데 면접시험때부터 편성을
해 볼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을 받고 그것은 본인이
더 바라는 것이어서 합격만 된다면 어느 분야던지
열심히 해 보겠다고 대답한 것이 합격과 동시에
편성과 배정을 받고 그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방송국에 들어온지 2년이 채 못되어
조사계장 직책을 잠시 거쳐 편성계장을 맞게 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탈을 벗고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고 새로운 포맷의
프로그램을 편성 할 때라 바쁜 가운데 어려운 일들이 많았습니다.
해방과 더불어 일제의 틀을 벗어 나면서 새로운 씨스템을 갖추는데
온 힘을 다 기울였습니다.  이때의 편성씨스템은 그 이후 
우리나라  방송의 기틀이 되었습니다.

 

 
 

부산 피난시절 방송프로그램의 사회를 보고 있는 모습입니다. 
 

 

 6.25때 부산 피난지에서는 방송국이
방송과와 기술과 중심으로 운영되면서 잠시
방송국을 떠나있던  송영호 방송과장과의 만남이
 다시 이루어져 호흡을 맞춰가며 어려웠던
 전시방송을 일사분란하게 수행 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때도 편성계장으로 계셨지만 방송인이
적던 시절에 방송프로그램 제작에  직접 참여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방송국이 서울로 돌아온 후 1956년에는 전국의 방송국을
 총괄하는 방송관리국의 지도계장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 무렵에
그 유명한 오재경장관이 부임했습니다.  30대 중반의 야심찬
오재경 장관은 방송을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
시키려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미국 연수를 떠날때 여의도 서울공항입니다, 최창봉님과 같이 출발 하셨고
 이규일님, 황태영님, 이인관님이 나오셨습니다. 아래는 연수중 VOA에서의 모습입니다.
안익태님, 박경호, 황재경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때마침 미 국무성 초청 방송연수 기회가
 마련되어 1957년 6월부터 민영 TV HLKZ 방송부장
최창봉님과 함께 5개월간의 미국연수를 다녀오면서
방송관리과장이 되셨습니다. 미국에서 보고,   듣고
 배운 지식을  우리나라  방송에  접목시키려는
본인의 의욕과 오재경장관의 생각이 
맞아 떨어졌습니다.

 

 
오재경 장관의 생각은 노정팔 방송관리과장을
 통해서 실현 되어 갔습니다. 우선 방송의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방송문화상 제도와 방송장려상 제도를 마련
했습니다. 방송 문화상 제도는 여러번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방송 장려상 제도는 우수한 방송 제작자를 발굴해서 상도 주고, 
신분상의 우대도 하고, 또 중앙방송국에서 일 할 수 있도록
해서 방송의질을 행상 시키려는 제도였습니다. 

 

 

앰프촌아 처음 생겼을때 여러모습을 담았습니다.   

 

 
라디오 보급률이 낮던 시절에 앰프를 통한
스피카 방송을 개발하고 농어촌 스피카 보내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해서 전 국민이 라디오를 들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방송채널을 1방송과 2방송으로 나누고 낮 종일방송을
 처음으로 실시해서 하루 31시간이던 방송시간을 37시간으로
 대폭 늘렸습니다. 방송의 공공성과 공영성을 살려 나가기
위한 프로그램의 제작기준을 새로 만들었고 속보성을
 살리기 위해 중계방송 등을 대폭 늘려 나갔습니다.
 
일본방송으로 부산이 일본권이라는
말이 돌던 때에 이를 해결하는 방안의 하나로
 부산에 문화방송을 처음으로 허용한 것도 이때였습니다.
민영 상업방송이 부산에서 부터 발족한 연유이기도 합니다.
남산 방송국을  새로  마련해서   남산 방송시대를  열고 레코드를 
방송국에서 직접 만들어 국민가요 등을 보급하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오재경장관이 떠난 뒤  중앙방송국의 제 1 방송과장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아나운서가 하던 방송과장을 오랜만에
 PD출신이 한 사례이기도 합니다.

 

 

중앙방송국 방송과장시절 1960년 유네스코 주최 아세아지역
 방송 쎄미나에 부산방송국장 한남석님과 함께 참석한 모습입니다.

 

 
 
KBS에서  방송에 힘을 기울이고 있을 때
 4.19가 일어나고 민주주의 바람이 불면서 여러 개의
 민간방송이 한꺼번에 허가가 나왔습니다. 지금의 MBC를
비롯해서1980년에 KBS에 통합된 RSB,  동아방송, 또
세상에 태어나지 못한 서울 문화 방송 등이
각기 방송국 설립허가를 얻고 방송국
문을 열기 위해 서둘렀습니다.

 

님은 그때 허가를 받고도 유일하게 태어나지 못한
 서울 문화방송 창립 작업에 뛰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곧 이어
 5.16이 일어나자 그 창립주는 앞으로 정세를 판단 할 수 없었던 지라
 엉거주춤하고 있을때 님은 국제방송국으로 돌아왔습니다.

 

 

 

 
 
 1963년 국제방송국장이 되셨
습니다.  6개월이 멀다하고 바뀌던
국제방송국장 자리는 님이 처음으로  3년을
지키셨습니다.  님은 일생을 통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을 꼽으라면 국제방송국
시절이라고 하셨습니다.

 

 
중앙방송국 방송과장시절 이규영, 송영필, 김인숙 아나운서와 함께 한 사진입니다, 

 

 

 

여기서 옮긴 곳이 대구방송국장 이었습니다.
 서울 3국은 부이사관에서 이사관으로 도청 소재지 방송국장이
서기관에서 부이사관으로 직급이 조정될 때 서기관으로 국제방송국장
직무대리를 맡아 오던 터라 그 자리에서 서울의 방송국장이 아닌
지역의 부이사관 방송국장이 된 것입니다.
 
 지역국 생활이 처음에는 마음 내키지 않았지만
 그런대로 의미 있는 생활들 했다고 합니다. 1968년 서울의
 중앙, 국제, TV의 3국으로 나뉘어 있던 방송국이 중앙방송국으로
 통합되면서 각 부가 생기고 그 부장이 부이사관이 되어 라디오부장으로
오셨고 얼마 안 있어 방송관리국장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로부터 KBS를 공사로 바꾸는 일이 추진 되면서
 KBS공사 창립 주역이 되었고 공사 창립과 동시에  KBS의
감사를 맡으셨습니다.  직책이 감사이기는 했어도, 전 사원의
방송 선배로 마음을 주고 받으면서 방송발전에 기여 하셨고,
전국을 돌아다니시면서 일을 하나 하나 챙기셨습니다.
 

 

 

 

감사 2기 임기가 미처 끝나기
전에부산 MBC전무로 전직되심에 주위에서
보기에는 격이 안맞는다고 했지만 본인은 방송을
떠나지 않는 것만으로도 만족감을 표하면서
임무를 마치셨습니다.
 
 세월이 지나 1980년대 후반, 방송민주화
 바람을 타고   KBS자율 경영이라는 대 명제아래
KBS 경영의 최고 의결 기관인 이사회가 탄생함에
KBS이사가 되시고 이사장으로 선출되어  2기에
 걸쳐 KBS이사장을 지내셨습니다.
 

 

KBS이사장 시절 노정팔님입니다. (앞줄 오른쪽에서 세번째분)
 
 
KBS이사장 자리를 물러나신후  50년 
  방송생활에 겪었던 일들을 정리하시겠다고 원고지
 펴 놓으시고 날마다 글을 쓰시더니 1995년 한국방송과 50년이라는
님의 방송생활 결정판을 내 놓으셨습니다. 많은 자료를 활용 하셨지만 기억을
더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1963년에 처음 만난 필자의 풋내기 공무원의 인상을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990년대에 정확하게 기억 하시며 말씀 하시는 모습을
보며 역시 노정팔 이사장님의 기억력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방송과 50년 자서전에 필자에 관한 기록이 몇줄 있는데 
입사 연도만 조금 다를뿐  내용은 정확하셨습니다.
 

 

 
 
 
 
노정팔 선생님은 1945년부터
2002년 7월 31일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길고 긴 세월   오직 방송만을 생각하시

 

다가
 떠나신 분입니다.
님이 떠나셨어도 따르던
후배들은 기일이 돌아오면 함께 만나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님의 명복을 빕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왼쪽부터 방흥안, 최종채. 노정팔, 조한긍, 정남조, 남학현님과 함게 새로 이사간 남산연주소 현관앞에서  
 

 

 

 

김명희님의 그리운 금강산

 

 

그리운 금강산1.wma

 

 

 

- 첨부파일

그리운 금강산1.w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