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기술

이장춘 2010. 10. 30. 23:29

 

 

 
초기 방송 기틀을 다진 방송기술인 이남용님
 

경성전기학교 (후에 수도공고로 됨)에
다닐때 에디슨의 꿈을 키워 오던 중 1929년 JODK에서
실시한 방송 강습회에 참여 하면서 방송기술과 인연을 맺게되고
기회만 되면 방송국에들어 오려던 차에 1932년 제2방송을
위해 시설을 확장하면서 직원을 공개 모집이 있어 
이 시험에 합격, 방송기술자가 되고 그때부터
동분서주 바쁜생활이 계속되었습니다.
 
연희의 제2방송시설이 끝난뒤에도
4명밖에 안된 우리 기술자가 중심이 되어 
제2방송을 운영해야 했고  또 부산, 평양등 
지방방송국 시설에도 힘을 기울여야
 님의 역할은 더 컸습니다.
 
 
1942년 단파방송 사건이 일어나기 전
우리 기술자는 13명으로 늘어났지만 한덕봉선배가
이미 함흥이나 평양에서 기술과장을 하고 있을때라
님은 우리 기술자로서는 최 선임이기도 해서 
중심역할을 했습니다.
 
단파사건으로 엔지니어들이 
다 끌려 갈때 님도 명단이 들어 있었지만
 님이 끌려가면 방송을 중단해야 되는 상황에서
갖가지 협박과 공갈을 받으면서 곤욕을
 겪었어도 감옥살이는 면했습니다.
  
해방후 한덕봉님이 이끄는 기술부의
기술과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던중 1946년
방송기능은 군정청으로 넘어가고 조정, 송출기능만
조선방송협회에 남게되는 직제개편이 있어 조정과장을
맡았지만 이 무렵 살기가 어려워진 조정과, 송신소 
직원들을 중심으로 한 방송기술자들은 파업을
 하는 등 극단적인 행위를 했습니다.
 
일은 수습되었지만 님은
책임을 지고 1946년 8월! 14년 동안
 키워 오시면서 지켜 오셨던 KBS를 떠나
국립경찰 창설시 경찰에 입문하셨고 뒤에
서울시 공무원이 되어시민회관
관장 자리를 맡았습니다.
 
그러던중  1972년 12월 2일
 서울 시민회관을 모두 불테워버린
시민회관 대 화재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날 성황리에 열렸던 문화방송 개국 11주년
 기념행사  “10대 가수 청백전”이 끝난뒤 일어난
불로 51명이 사망하고 76명의 부상자를 냈을때
님은 그 불길속에서 세상을 뜨셨습니다.
 
 
님은 말소리 높이지 않고
조용조용 하면서도 할 말은 다하셨던
성품이라고 하며온화한 품성에 원만한
인간관계나 부서간의 협조를 중시
하신분이었다고 합니다.
 


님이 남기신 몇편의 글이 있습니다.

 

두편만 골라서 간략히 옮기겠습니다.

내가 입사 당시는 이중 방송을 위해
출력이 1KW에서 10KW로 대폭 증강 되고
새로운 기계가 도입되어서 한덕봉씨를 비롯해서
나까지 네 사람밖에안되던 기술자들은
 몹시 분주 했다'
....중략....
1935년 9월21일 부산방송국 개국을
 필두로평양, 이리, 청진등의 지방네트워크가
형성되자기술자들의 업무가 더욱 확대 되었다.
지방국의 중계는 유선과 무선(단파)으로 했는데
재미있는 것은 낮에는 일반전화 사용횟수가
높아 주로 무선을 사용하고 밤에는 그
반대로 유선을 사용하는 점이었다.

기술자가 PD까지 겸했다는
 
 또 다른 한편의 글입니다.

JODK시절의 기술자들은 직접 큐도 주고
지금의 프로듀서 일까지도 겸할뿐더러 효과까지
직접 담당하는 그야말로책임과 권한이 막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당시에도 중계방송이 많았는데
 이 때는 전화선을 이용한 유선중계였었다.
.....중략....
이 당시 중요한 방송이 있을때 자칫
실수라도 저지르면 형무소행이었다. 예를 들면
방송공백이 3초 이상 이유서,30초 이상 시말서를
써야 했고 1분이상이면 잡혀가야 했다. 특히 태평양
전쟁 중에는 방송실수에 대한 처벌이 더욱 강화
되어 이유가 분명하고불가항력 이라는 것이
나타나지 않는 한 형무소로 가야 했다.

조정과 파업사태란 무엇인가?
 
-노정팔님의 한국방송과 50년 책에서 간단히 인용하겠습니다.-

해방되고 군정이 실시되면서
45년 9월 15일부터 방송은 군정청에
접수되었습니다. 1946년 4월을 기해 군정청
직제개편에서  방송기능은 군정청으로 흡수 되었으나
 기술은 조선방송협회에 그대로 남아 있었고 협회는
청취료를 받았지만 운영이 말이 아니었
습니다.협회소속 직원들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군정청에서는 구호물자 등의
 명칭으로 다소의 도움도 주었지만 협회에서는
그렇지도 못했고 보수도 적어서 방송기술자들의 생활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방송을 수행하는 기술자들이 차별대우를
받으면서 생활에 어려움을 겪자  협회소속 직원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1946년 8월부터조정과 전원이 파업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 일로 많은 방송기술자들이
 방송국을 떠났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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