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우회·독립운동

이장춘 2011. 4. 11. 20:37

 

 

 

 

항일 단파방송 해내외 연락운동 (종합편 2)

 

 

1. 운동의 본질

 

 

일제 강점기, 칠흑 같은 암흑세계에서

방송인들이 단파 수신기로 청취한 미국 VOA나

중국 중경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방송내용을

국내의 독립 운동진영에 전달해서 독립운동의 기초자료로

활용함과 동시에 이 소식을 전 국민에게 알려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일방적인 선전을 무력화 시키고 독립운동가들을 비롯해서

전 국민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면서 항일 투쟁의식을

하나로 모아간 강력한 지하 독립운동이다.

 

 

2. 운동으로 나타난 실례

 

 

단파방송 연락운동이 있을 무렵부터

“전쟁에서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은 이기고

있다,  전쟁에서 연합군이 이기면 우리는 독립

할 것이다. 중경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으며

미국에서는 이승만 박사를 비롯한 애국지사

들이 독립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미군 비행기를 무서워하지 마라.

조선옷을 입은 사람에게는 폭격하지 않는다.

일본에 협조하지 마라. 일본이 망해야 우리나라가

독립한다.” 이런 소문이 국민들 간에 널리 퍼져

있었는데 이것은 해외에서 실시한 방송

내용과 일치한 것이었다.

 

실제로 해방 되던 날 일본 방송인 간부

뱃쇼(경성방송국 설립 때부터 근무했고 해방될 때

 조선방송협회 업무부장)는 조선옷을 입은 사람에게는

폭격을 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나돌더니 및기지 않던

이 소문이 현실로 다가왔다면서 한숨을 지었다.

 

 

 

 

 

3. 단파방송의 청취

 

 

국내에 있는 선교사들이 추방되고

일반인이 가지고 있는 단파수신기가 모두

회수되었지만 방송국에는 업무용 단파 수신기가

있었고, 방송기술자들은 개인적으로 단파수신기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단파방송을

들은 방송인들은 많다.

 

성기석과 이남용, 이이덕이 1941년

이른 여름부터 중경방송을, 1942년부터 미국의

소리방송을 듣기 시작하면서 단파방송에 관한 관심이

증폭되어 대부분의 우리 방송기술자들과 아나운서, 편성원,

업무요원들까지 이 방송을 들었으며 그에 관한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지방방송국에서도

이 방송을 들었다.

 

 

1942년 개성방송소가 문을 열면서

우리 방송기술자 세 사람만 있게 되어 (이이덕-소장-,

성기석, 김동하) 방송을 자주 들을 수 있게 되었고 개성이 고향인

양제현, 송진근 아나운서가 수시로 고향에 들려 방송소에서

같이 방송을 들으면서 얘기를 나누었다.

 

 

 

 

 

4. 독립운동 진영에 전달된 경로

 

 

주로 선교사들을 통해서 해외소식을

들어오던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1940년부터

선교사들이 추방되고 단파라디오가 몰수되어 해외소식이

 단절되자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 독립 운동진영에서는

유일하게 방송을 들을 수 있는 방송국직원들과의 접촉에 나선 것이다.

독립운동 진영과 친분이 있고 방송국에서 어린이 프로그램의 글을

쓰던 송남헌을 통해서 어린이방송 담당 편성원 양제현과

 연결되고 양제현은 방송국 직원들로부터 수집한

해외방송내용을 독립운동 진영에 전달했다.

 

이밖에도 방송을 청취한 방송국 직원들은

 해외소식에 목말라 하는 뜻있는 분들에게 단파방송내용을

 전달했다. ( 항일단파방송 체계도 첨부물 참조)

 

 

 

 

 

 

5. 검거선풍과 취조심문, 재판

 

 

밑도 끝도 없이 흘러 다니는

소문이 일본의 일방적인 선전을 무력화

시키면서 항일의식이 강화되자 이에 당황한

 일본은 그 진원지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그 중에서도 단파수신기가 있는 방송국을

 요시찰의 중심에 두었다.

 

1942년 12월 8일 박용신 아나운서를

시작으로 검거와 취조가 진행되면서 150여명의

 방송국직원을 포함해서 독립운동인사, 라디오나 부속품 상회,

이밖에 단파방송을 들었다고 의심되는 민간인등 모두

 350명 정도가 경찰에 끌려갔다.

 

 

 

 

경찰에 끌려가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혹독한 심문이 진행되었고 단파라디오를 만들

었거나, 내용을 이웃에 전파한 혐의가 있는 사람에게는

 더 가혹한 고문이 수반되는 심문이 행해졌다. 크게 의심받은

 사람은 유치장에서 1년 가까운 세월 날이면 날마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고문을 받았다.

 

변호사도 가족면회도 허용되지 않았다.

민족 신문도 없을 때라 보도도 없었고 모든 것

자기들 마음대로였다. 보훈처에서 발행한 독립운동사는

 이일로 옥중에서 사망한 사람이 6사람이나 된다고 했다.

신상운님은 가혹한 고문으로 시체가 되어,

버려졌다가 살아났다고 하셨다.

 

  이 분들을 오랜 기간 유치장에 가두어 놓고

가혹한 심문을 계속 한 것은, 이 운동과 연결고리가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면서 아울러 이 운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상범이라고 일컬어지는 이분들이 옥중에서

죽어 나가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았다. 아니

그것을 바랐는지도 모른다.

 

2009년까지 유일하게 생존하셨던

박용신 아나운서가 생전에 말하기를 감옥은

호텔이라고 했다. 그만큼 유치장은 가혹한 것이었다.

  이런 심문과정을 거쳐 많게는 2년으로부터 적게는 벌금형에

 이르기까지 70명이 형의 언도를 받았다. 유치장의 예심기간이

 아무리 길어도 형기에는 산입되지 않아서 실제로는

3년 가까운 세월, 유치장과 감옥살이를 하다가

해방된 다음날 풀려난 사람도 있었다.

 

 

 

 

 

6. 기록

 

 

성기석님의 효암행장기, 이남용, 이현,

이혜구님등 그 시대에 방송국에 근무하시던 분들의

기록을 비롯해서 뒷날 여러 재판서류와 증언을 토대로

 내용을 정리한 유병은 선생님의 “단파방송 연락운동”이라는

 책이 있고 한국방송사와 1988년 방우회가 실시해서

정리한 세미나 기록이 있다.

 

방송국에서 방송한 기록물이 있고

2009년에 고인이 되신 박용신아나운서의 증언이 있다.

  방송국 밖의 인사가 쓴 기록으로는 초대 법무부장관을 지낸

이인회고록 애산여적, 송남헌 회고록, 허헌의 딸 허근욱이

쓴  허헌 회고록, 고하 송진우, 보훈처 발행 한국

독립운동사 등이 있다.

 

 

 

7. 관련자 포상

 

 

그 많은 항일단파방송 애국지사들 가운데

훈, 포장을 받으신 분은 일곱 분이다. 1990년 광복절에

항훈을 받은 성기석, 조종국, 홍익범선샌님과 1993년 광복절에

건국포장을 받은 이창득(이준순).  2005년 3.1절에 건국포장을

 받은 박용신, 그리고 2010년 8.15광복절에 대통령 표창을

받은 김동하, 2012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이근창 (이고길)

선생님이 이분들이다.

 

이 운동이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이나

 그때 그분들의 희생과 애국심등을 고려해 볼 때

이 정도의 포상으로는 턱 없이 부족하다. 앞으로도

더 많은 포상과 보상이 주어져야 할 것이고

이 일과 함께 그 분들의 업적이 길이

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8. 기념

 

 

사단법인 한국방송인 동우회는

 KBS에 勿忘碑를 세워 이 운동의 의미와 함께

그 운동을 벌렸던 그분들의 애국심을 기리고, 어떠한

단발마적인 횡포도 국민의 귀와 눈을 가릴 수

 없다는 진리를 일깨워주고 있다.

 

 

9. 독립운동사적 의미

 

 

방송인들이 단파방송을 통해서

 접한 해외소식이 독립운동과 접목 되었을 때

국민들의 항일의식은 불길같이 번져나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일본의 총칼과 철통같은 감시의

눈초리가 번득이던 시절에 행한 이 운동은 목숨을

걸지 않고는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동아, 조선, 중앙 등 민족지가 모두 폐간되고

선교사 등 해외소식과 접할 수 있는 인사들이 추방되었으며

단파수신기가 모두 몰수되어 암흑세계가 되었을 때 이 운동이야 말로

생명의 소식, 희망의 소식을 전달하는 메신저로서 알게 모르게 국민 속에

 깊이 파고들면서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었다. 일본의 일방적인

선전을 무력화 시키면서 국민들의 힘을 하나로 결집,

 이 나라 독립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승만 박사의 말대로 단파방송이

우리에게는 희망의 소식, 생명의 소식, 독립의

소식이 되었고 일본에게는 패망의 소식이 되었다.

우리나라 방송사는 물론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날 일이다.

 

 

 

 

 

 

단파방송 독립운동자 발굴, 정리등의 과제

 

 

단파방송 독립운동은 주로 중국 중경의

 임시정부에서 실시하는 방송이나 미국의 VOA등의 방송을

단파수신기로 듣고 국내에서 독립운동에 활용하거나 국민들의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던 일련의 운동을 말합니다. 수신뿐만 아니라

 송신도 생각했지만 그것은 불가능 하던 때였습니다. 이 운동은

일제 말에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게 전개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방송국직원들이 개인의 필요에 의해서,

또는 막연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일지라도 시일이 지나면서

서로 얽힌 인간관계와 나라의 독립을 앞당겨야 된다는 공감대 속에서

 방송국 직원들과 독립 운동가들이 뜻을 같이 하면서 일제의 서릿발 같은

 위협을 무릅쓰고 서로가 서로를 돕고 보호하면서 오직 일제에

항거하던 조직적인 운동이었습니다.

 

독립을 갈망하는 조선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로 통일 되었을 때 서로 간에 믿음 속에서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고 단파방송을 통해서 국제정세와

 해외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 소식에 접하면서 우리 동포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갔습니다. 전쟁에서 일본이 이기고 있다는

일본 대본영 발표와는 달리 일본이 지고 있다는 소문이나

조선옷을 입은 사람은 폭격하지 않는다는 소문은

 실제로 VOA에서 또는 중국 중경에서 지속적

으로 방송한 내용이었습니다.

 

그 범위와 영향력이 컸던 만큼

 350여명이나 되는 관련자들이 끌려가

 온갖 고초를 받으면서 조사가 이루어 졌습니다.

형을 언도 받지 않은 분도 끌려가면 사상범이라고 해서

 이루 말로 형언할 없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전기고문, 물고문,

고추 가루 고문 등등 동원될 수 있는  고문 방법이 다 동원

되었습니다. 고문을 받고 난 뒤에는 실신상태에 이르러

 몸을 가눌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또 이렇게 조사를 받는 기간이나 기소기간 중에는

 형기 산입도 되지 않아 형식상으로는 1년이나 6개월 징역언도를

 받아도 유치장이나 감옥에 있었던 기간은 2년 이상이 걸리는 경우도 있었습

니다. 이렇게 해서 최종적으로 형을 언도 받으신 분은 2년 징역 3분, 1년 6개월

 징역 4분, 1년 2개월 징역 두 분, 1년 징역 18분, 10월 징역 한분, 8월 징역 3분, 8월

 금고 한분,  6월 징역 5분, 300엔 벌금 5분, 200엔 벌금 한분, 100엔 벌금 한분, 형을

언도 받은 것은 확실하지만 형량이 확실치 않으신 22분, 형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확실한 내용이 파악 되지 않은 분 12분을 포함해서 지금까지 모두

68분입니다.  이 일은 워낙 방송국 뿐만 아니라 독림운동가, 라디오

상회 등 인간인들, 또 지방에서도 있었던 일이어서 

일려지지 않은 경우도 있을 것으로 봅니다.

 

 또 이 분들의 죄명이 무선 전신법, 육군형법,

해군형법, 치안유지법, 조선 임시 보안령등이 적용

되었기에 실제로 단파방송 독립운동으로 형을 살았던 분도

이 운동으로 분류되지 않은분도 많이 있을 줄 압니다. 

더 믾은 확인노력이 요망되는 일입니다.

 

 

 

 

  

 

방우회 (한국방송인 동우회) 이사 이장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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