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이장춘 2011. 1. 7. 01:23

 

 

최후의 조선방송협회 회장 이정섭님

 

  
이정섭선생님은 1938년 5월 1일

 경성방송국 편성원으로 들어 오셔서  프로그램

 편성과 강좌등을 맡으셨고 1941년 11월 제2방송부 

보도과장이 되었다가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으로 제 2방송부가

 폐지되면서 기획과장을 맡다가 해방된후 일본인이 물러가면서

우리손으로 뽑은 조선 방송방송협 회장이 되어 1948년

10월 국영방송국이 될때까지 재직하셨습니다.

 

 

 

 

  

1900년경 함흥에서 태어난
경곡 이정섭님은 일제시대  프랑스

소르본대학을 졸업한 인텔리로 조선 중앙일보

(뒷 편에 조선 중앙일보에 관한 얘기가 있습니다.)

기자로 들어가 근무하던중 1927년 중외일보 논설위원시절

「세계 일주기행, 조선에서 조선으로」를 집필 연재하던 중

 1928년 2월23일자(제88회)가 문제되어

필화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때 총독부는 이정섭님의 기행문을 문제삼아

 연재를 중단시키는 동시에 발행인 이상협과 집필자

李晶燮을 재판에 회부되어 경성지방법원은 이상협에게 징역

4개월, 이정섭에게는 보안법위반으로 6개월을 선고했으나

복심법원에서는 이상협은 벌금 200원, 이정섭은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된적이 있었습니다.
 
  1932년 8월에는 조선일보 정치부장이

되었다가  1938년 5월 1일 방송국에  들어 오셨

습니다.  방송국에서는 주간정보 등 주로 시사강연을

 맡으셨고 곧은 성격에, 몸가짐역시 흐트러짐이 없으셨다고

합니다. 이정섭님은 일본인 상사앞에 서서 왼손은  뒷짐을 지고

 오른손은 담배를 피워들고 이치를 따지면서 시비를 가리는 등

 옳다고  생각한 일을 궆이지 않는 성품을 지녀 일본인과 논리

대결을 하는 경우가 많아 때로는 눈총을 받기도
했지만 워낙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인지라
대접을 받기도 하셨습니다. 

 

방송내용이나 시설에 관해서 얘기 할때는

입버릇처럼  “ 프랑스의 방송은 ...”  하며 모든 것을
외국의 시설, 기술, 제도와 비교하다보니 주위 사람들에게
 현실을 잘 모른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지만  나름대로  
뜻을 펴나가시는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이정섭님 성격의 단면을 보여주는
이혜구선생님의 글을 보면  " 일본인 상사에게
 대들때는  박력이 있었지만 평소에는 무슨 사색을
하시는지   혼자 이마를 찡그리고 한참 빈 책상과
 눈 싸움  하다가 옆에서  한참 이야기가  왔다 갔다
하는판에 기웃이 참견하고 딴청소리를  할
때에는 폭소를 맞았다." 고 하셨습니다.  

  
 
방송국에서는 님의 특유한 성격으로 융화가

안된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지만 헤빙정국에서

 방송의 최고 책임자인 조선방송 협회회장까지 올라 

해방정국의 어려운 일을 잘 해내셨습니다.

 

님이 이끌던 조선방송협회는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을 앞두고 

 8월 7일을 기해서 대한방송협회로 바꾸어 

사단법인으로 계속  남으려고 했지만 정부조직법을

 제정하면서 방송국을 정부의기구로 편입, 국영화해서

 1948년 10월 7일을 기해 대한 방송협회가 해산되고 

자리를 뜨신후 불행히도  6.25때 피난하지

못하고  납북된 후 생사를 모릅니다. 

 

이정섭님과 홍양명님은 자리를 뜨셨고 한덕봉님과

권태웅님은 중앙방송국에서 계속 일을 하셨습니다.

 

 

 

참고사항
 
 
해방전에 있었던 조선중앙일보는
1922년  최남선 선생님이 동명주보를 
 창간하는데서 부터 시작되어  1924년 3월
시대일보로 재창간되고  1926년 11월 중외일보
1931년  10월 중앙일보,  1933년 조선중앙
일보로 바뀌었습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함께 민간신문으로
민족지로 커 왔지만  1936년 8월 13일 배르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힌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가슴에 단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와 함께
 9월 5일 정간 되었다가 폐간되었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대한 방송협회가 해산되기전 4일전에
기술사원들의 야유회 장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가운데 흰 옷 입으신 분이 이접섭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