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이장춘 2011. 1. 31. 07:58
 

 

 
일제 강점기 독보적인 아나운서  이계원님의 방송인생
  
 
1936년에 경성방송국에 들어와
1968년 VOA에서 과로로 세상을 뜨실대까지
오직 방송만을 위해 일생을 살아오신 분이었습니다.
박충근  아나운서에 이어  1948년 말 방송과장직에서
물러날때까지 중앙방송국의  아나운서를 이끌어 오셨고
1949년에는 기술직의  기감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KBS를 떠나신 뒤에도 1968년 2월 53세로
세상을 다 하시던 날 까지 님의 삶은
오직  방송이었습니다.  
 

 

이      계     원    님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
1936년 6월 21살의 젊은 나이로 경성방송국
아나운서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때 제2방송과장은
 상록수로 명성이 높은 심훈님의친 형님이신 심우섭
과장님이었습니다. 심우섭과장님은 이계원 아나운서를
 특별히사랑 하셨다고 합니다.  이계원님의 현암이라는
호도  심우섭님께서 얼굴이 가무잡잡하다고
해서그렇게 불러 주셨답니다.
 
현암은 그날의 뉴스를 점으로
동강 동강처리하여 버리지 않고 전일
뉴스와 선으로 연결하여 앞으로 귀추를
내다 보려고 드는 예리한 머리의소유자였습니다.
심과장님이 현암을 보시면 꼭꼭 시사전망을 들어
보자고 청하셨고 현암은 마치 그럴 줄 알고
준비나 한것처럼 서슴치 않고 응했습니다.
 
님은 방송과장 시절에도 뉴스해설도 하시고
다른 방송도 하셨는데 좌.우의 대립이 심하던 때로
 보도의 공정성에 관심을 기울여 시비에 말려드는
 경우는 적었지만 뉴스에 맥이 빠진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고 합니다.
 
목소리는 맑고 깨끗했으며,
우선 발음이 정확했습니다. 음의 고
저와 장단을엄격하게 지켜, 한국어 발음
사전이라고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또한
어휘를 적재적소에 잘 활용해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높였습니다.
 
해방이 되고 한달이 지나
 일본방송인이모두 해직되던 날!  1945년
 9월 15일 그때 근무하던 직원들이 모여 간부진을
구성 했습니다. 이때 이혜구님이  중앙방송국장으로
선출 되었을때 조선방송협회안에 중앙방송국도
있고 기술부도 동격으로 있을 때 이었습니다.
기술부장은 한덕봉님이 뽑히셨지요.
 

 

1947년 정동방송국 현관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윤용노,

이계원, 문재안, 전인국, 윤길구님이 같이 하셨습니다,

 

 

국장을 뽑고 과장을 뽑을 때
이계원님이 방송과장으로 뽑혔습니다.
편성과장으로는 백설부(白雪賦),주부송(主婦頌)
등으로 세상에 알려지신 김진섭님이셨고 업무과장역시
 김진섭님의 동지로시인이며 언어학자이신 김억님이셧지요. 
이 네분 모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인재였고 이 분들이
일제 때부터 군정 때까지 방송국을 키워 오신
중추적인 인물 이셨습니다. 
 
이계원님이 방송과장을 맡아서 열심히 일하고
 계시던 중 이혜구님이 물러나시고 또 그 뒤를 이은  
홍양명님도 정부수립 후 방송국이 정부기구로  흡수 되면서
떠나신 후 정부에서 내려 보내 신분이  이관희님 이었습니다.
우리나라 국영방송의 초대 방송국장 이셨습니다. 이때
방송을 잘 모르는 이관희 방송국장과 뜻이
맞지않아 방송국을 떠나셨습니다.
 
 

 

방송국장 적임자가 없던 1949년 8월
이혜구님이 중앙방송국장에 다시 취임하면서
이때 이계원 아나운서는 새로 마련된 기술직의 기감이
되셨지만 중앙방송국장 자리에 뜻이없던 이혜구님이 
그해 11월에 중앙방송국을 떠나심에 이계원님도
기감자리를 물러나셨습니다.
 
 6.25가 일어나고 VOA가 한국어방송을
 확대하면서 그곳으로 옮겨 방송을 계속하시면서
 오랜기간 대한민국 국민의 벗이 되셨습니다. 한국의
푸에불로호사건등으로 과로에 지친 님은  1968년 2월
 어느 날 방송을 마치고돌아오시던 중 뇌출혈로
 세상을 뜨셨습니다.
 
 

 
 
이계원아나운서를 곁에서
지켜보셨던 이혜구선생님은
1930년대의 이계원 아나운서와 송진근
 아나운서에 관해 다음과같은 기록을
남기셨습니다. 
 
 이계원 아나운서의 능숙한 말씨와
 송진근 아나운서의 깨끗한 말씨는 각기
팬을 끌었고  이계원 아나운서의 자질구레한
말과 송진근 아나운서의 맥맥한 말씨는
각각 반대의 구실을주었다.
 
또  좋고 싫은 것은 듣는 사람들의
식성에 달린 것이지만 하여간 아나운서가
시중의 화제에오른 것만은 전에 없던  사실이었고
  현암 이계원은 연회석상에서기생한테서 소리가  아니라

뜻밖에 아나운서를 하라고 졸리어  매우난처하였다는

것을 자랑 반 불평반 이야기 한 일이 있었다. 

 

 

노정팔님이 VOA에 가셨을 때의 사진입니다. 오른쪽에서 두번째 분이 노정팔 님입니다. 

 

 

마지막으로 노정팔님의 글을 옮깁니다.
 
 
음성은 맑고 쟁쟁 했으며 발음이
정확했다. 음의 고저와 장단을 잘 지키고
알맞은 어휘를 잘 골라서우리말의 아름 다움을 십분
발휘했다. 뉴스, 해설, 사회, 실황중계 무었이나 척척 해 냈으며
프로그램에 따라 음색을 바꾸고 억양을 달리 하여 청취자로
 하여금 방송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중략.....스포츠
중계의 불모지에 혜성처럼 나타나 선배인
박충근과 쌍벽을 이루었다.
 
축구 중계는 더욱 일품이어서
발음의 강약에 따라 골인 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라고당시의 잡지에 기록되어
있으니 얼마나 정확하고인기있는 아나운서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감색 겨울복에 약갼 검은 얼굴을 하고
 종일자리에서 떠날 줄 모르고 붓만 놀리던
현암 이계원은패기가 있어 보였다.
 
눈초리가 날카롭고 샌스가 빨라
방송을하는분은 저래야 하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방송을 위해 세상에 태어 났다는
 말을 들을 만큼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정확하여
 아나운서의지침이 되었다. 과장자리에 앉은 후 부터는
 일주일에 한두번민주주의 해설이나 시사해설을
 하는정도에 그쳤고 후배 양성과 뉴스 편집에
전력을 기울였다.
 
방송을 하던 뉴스편집을 하던 치밀하고
조심성이 많아 일에 실수가 없고 꾸준했다.
커피를 좋아해서 다방에도 가끔 갔는데 조용한
자리에 앉으면 명상에 잠기는 것을 즐겼고
음악, 문학, 연극에도 이론이 밝았다.
 
야인으로 있던 이계원은
부산 피난시절 미국의 소리 방송 초청으로
가족을 동반하고 도미했다.
 
---이하 생략 합니다---- 
 

 

1962년 원로방송인 이계원, 윤길구, 문시형, 이상만, 조경희님등이 함께 한 사진입니다.

 

  

이계원님 추도식 장면 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