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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춘 2011. 4. 8. 19:45

 

 

 KBS 중앙방송국시절 김억님을 비롯해서  

민재호, 윤길구, 조동훈, 전인국님이 함께 한 사진

입니다.  지금 들려오는 가곡은 김억선생님이 번역한

 동심초를 부산 피난시절 KBS어린이 합창단원

이었던 성악가 이규도님이 부릅니다

 

 

 신시(新詩)의 선구자였던 시인이자 지성적인 방송인 김억
 
 전 방우회장 문시형님 유고

 

 
 
방송인물사의 주인공으로 안서(岸曙)
김 억(金 億)선생이 등장한다는 것은 아마 세인들이
 생각하기에는 의외일 것이다.   김 억선생은 소월의 스승으로
또는 시인으로 널리 알려졌기 때문인지 방송인으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게다가  12년이나 되는 방송국 생활의
 발자취가 기록으로 남은 것이 없고 시인으로서
주옥같은 시가 활자로 전해져 우리들 마음속에
 숨 쉬고 있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특히 그의 문단에서의 역할은 지대했다.
서유럽과 상징주의 시인들을 우리문단에 최초로
소개했으며 '해파리의 노래' '봄의 노래' '금모래' '지새는 밤'

 '먼동이 틀 때'등의 자작시집과 역시집(譯詩集)으로

'동심초(同心草) '야광주(夜光珠)'

 '타골'등이 있다.

 
이렇게 근대한국의 시인으로 크나 큰
발자취를 남겼기에 방송인이라고 항변하는 게
지나친 욕심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방송인으로서
안서 김억선생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고 불만 아닌
불만을 털어놓게 된 연유는 방송이라는 근본이 말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매 또한 말로서 이루어지는
  시를 방송이 수용하고 있어서이다.
  
안서김억선생은 그가 펴낸 시집
'야광주(夜光珠)'의 서문(序文) '변언(弁言) 멧마듸'로
 시를 다음과 같이 규정짓고 있다.   '만일 문예 품이라는 것이
언어(言語) 그자신이 가진 고유한 미(美)와 정(情)과의 옷을 사상(思想)으로써
 입힌 것이라 한다면...(중략)  시가(詩歌)와 같은 것은 보통 문예물의 그것과도
달라서 가장 단적으로 가장 입체적으로 언어예술품의  극치라 할 만한 미와
 정의 옷을 입힌 것.'  시는 말이기에 글로서 눈으로 보기보다 듣는 맛이
 좋을 것이고 오늘에 와서는 텔레비전이 있으니 아름다운
자연과 배경으로 꾸미는 시낭송은 어떠할지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방송인 안서 김 억선생.... 1893년에
태어났으니 앞으로 2년만 지나면 백수가 되신다.
김 억선생의 출생지는 평안북도 정주이다. 오산고보(五山高普)를
 졸업하고 일본 게이오대학 문과에 수학했다.
 
그 시대를 참작하면 그 학력에 감탄치 않을 수 없다.
그 당시 즉 해방이전 우리나라의 학력수준을 볼 때 옛 고등보통학교,
지금으로 치면 고등학교를 졸업한 인구비율이 0.002페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김억선생은 물론 0.002퍼센트에 속하는
 엘리트였음은 틀림없는 일이다.
 

 

 

작고한 시인 이하윤(異河潤)선생이 쓴 글에 의하면
동경 유학시절 외국문학 연구회를 조직하고  '해외문학'을 발행할 때
일곱 명의 동인 중 한사람이  안서 김억선생이셨고, 나머지 여섯 사람은
 우리들 귀에 익은  김진섭(金晋燮), 정인섭(鄭寅燮), 손수성(孫守聲),
이선근(李瑄根), 김명엽(金明燁), 이하윤(異河潤)등이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1938년경의 JODK
 제2방송자료와 직원명부를 입수하게 되어 대선배님들의
존함에 접할 기회가 있었다. 오늘에 와서 그분들의 이름을
 살펴볼 때 새삼 대단한 선배들이었음을 느끼게 된다.
 
 I .  제2방송과장 심우섭(沈友燮)은 제2방송과의  
세 번째 과장 (초대 윤백남, 2대 김정진)으로
우리말 방송에 일본말을 혼용할 것을 강요당해
사표를 내고 방송국을 떠나신 지사이다.
 
II .  과장대리 이혜구(李惠求)박사는
서울중앙방송국장을 두 번이나 역임했는데
방송인의 대부라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다.
 
 III .  과장대리 김 억(金億)선생은
오늘의 방송인물사 주인공이다.
 
IV .  과원 이서구(李瑞求)는 세상이 다 아는 사극작가.
 
 V .  과원 이정섭(李晶燮)은 중앙일보
논설위원으로 필화사건의 주인공.
 
VI .  과원 이계원(異啓元)은 우리나라 아나운서 대부.
 
VII .  과원 이현(李玹)은 농구 중계방송을 처음으로 한 아나운서.
 
VIII .  과원 고재경(高재經)은 언론계의 원로.
 
IX .  과원 김문경(金文卿)은 공채에 의한 최초의 우리말 아나운서.
 (이혜구,이현,김문경 선생은 본지 방송 인물사에 소개된바 있음.)
  
그 당시의 김억선생은 최고의 지성인,
 기라성 같은 방송인으로 표현하기에도 부족함이 있어
달리 표현할 수 없기에 대단한 선배님이라고 표현했다.
1938년 경 JODK 제2방송과에 같이 근무한 이현(李玹)선생은
 직원명부만 보아도 옛일이 생각나는 듯 감회에 젖어
 
 안서 김억선생을 '참으로 성실하고
인자하신 분이었다.'는 한마디로 찬사를 했다.
1938년하면 지금으로부터 53년 전이다. JODK 제2방송과의
 참모습은 이현 선생의 기억에 따른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가족적인 분위기였던 것 같다.
 
"과장인 심우섭씨는 천풍(天風)이었고,
 이혜구씨는 만당(晩堂), 김억씨는 안서(岸曙),
이서구씨는 고범(孤帆), 이정섭씨는 경고(鏡告),
김진섭씨는 청천(廳川), 양재현씨는 미림(美林),
이계원씨는 현암(玄岩), 고재경씨는 양훈(揚熏),
나 이현은 지봉(砥峯).... " 아호를
 줄줄이 대어 주신다.
 
53년 전의 상사와 동료의 이름을 보고
 아호를 생생하게 외는 이 현 선생님의 기억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으나 그보다 특시(詩)와도 같은 미(美)와
 정(情)이 넘치는 가족적인 JODK 제2방송과의 정경이 연상되어
 막힘없이 줄줄이 외어 주신 것이라고 생각된다.
 
안서 김억선생이
번역한 시한수를 되뇌어 보고싶다.   
 
 동심초(同心草)  
 
바람에 꽃이 지니 세월 덧없이
 만날길은 뜬구름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닢만 맺으려는고
 
이슬방울이 맺힌 풀잎이 바람에 나부켜
하늘하늘하는 모습이 눈앞에 아물거리듯
 벗님을 그리는  심정이 가슴에 와 닿는다.
 
안서 김억선생은 한시(漢詩)를 우리말로
 옮기는 일에 대해 '난중난(難中難)이며 아무리 하여도
 옮겨 놓을 길이 없는, 그야말로 털끝만치라도 건드릴 수 없는
 것이외다.'라고 겸손해 하셨는데, 이를 보아 이현선생이
'성실하고 인자한분'이라고 안서 김억선생의 인품을
평가하는데 아마 바른 표현으로 예측된다.
 
안서 김억선생의 성품이 인자함은
계용묵(桂鏞黙)선생의 글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계용묵 선생은 전 조선일보 기자이며, 1922년 조선문단(朝鮮文壇)의
추천작가로 문단에 데뷔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선생은 1904년생으로 김억선생과는
 11살 차였으나 친교가 매우 두터워 그 사이를
계용묵 선생은 그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안서 선생과 나는 자유롭게 서로 마음의 문을 터놓고 못하는
 이야기가 없이 괴로우면 같이 괴로워하고 즐거우면
 같이 즐거워하며 지내오는 처지였다.
 
" 이같이 계용묵씨는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하는 분이 안서 김억선생이라고 한다.
 "일제가 패망의 꿈속에서 소위 대동아 전쟁을 일으켜
 한참 숨이 가쁘게 되자, 전쟁에 협력하지 않는 기관에는
 가차 없이 탄압의 방망이가 나리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조선일보도 폐가의 비운을
 면치 못하게 되어 해직하지 않을 수 없게 된
나의 생활보장과 신변보장을 위하여 안서 김억선생은
 나를 자신이 근무하고 있는 방송국 제2방송과에 취직을 알선하였다
....(중략)일본사람에게 2중의 천대를 받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짜놓은 방송 프로를 정리하는 꼭 같은 사무를, 같은 전문학교 출신의
 이력으로 나보다 며칠 먼저 들어온 제1방송프로의 일본사람은
 봉급이 1백5원이오, 제2방송의 나는 83원이었다.
 
" 계용묵선생은 발령을 받은 날 2중으로 상한
자존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더욱이 취직을 알선해 준
안서 김억선생의 체면도 아랑곳없이 그날 일을 마치고 다음날부터
출근치 않았다고 한다. 그는 안서 김억선생과 상의하다가 결론도
내리지 않은 상태에서 독단적으로 실천에 옮긴 것인데
이러한 결과가 오기까지의 대화가
흥미로워 소개한다.
 
"시국이 시국이라 저만이 받는 천대가 아니니
, 한 가지 천대만은 각오하고 들어온 바이나, 봉급으로
 말미암아 받을 천대는 구태여 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매일신보 학예부에서 들어오라는 것을 거절한데 대해서
 선생께서는 저를 칭찬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실로
선생에게는 죄송한 일이오나 노예로 살기는
 차마 자존심이 허락치 않습니다."
 
"자네 마음은 잘아네만, 나를 보아서 그럼
한 달만 참아주게. 나도 여길 있고 싶어 있는 것은 아닐세.
우리 얼마쯤 지내보다가 같이 그만두세."하였다. 간곡한 만류에도
 사직의사를 표명하고 집에 있는 계용묵씨를 찾아간 안서
 김억선생은  "자네 참 장하네, 더할 말이 없네."하였다.
 
취직을 주선한 사람을 말하자면 배반한 꼴이다.
그런데도 후배인 게용묵씨에게 '자네장하네'하면서 우려 아닌
격려하였다는 사실..... 그런 일이 나면 왕래가 끊어질 것 같은
상황인데 안서 김억선생은 후배를 아끼고자 하는  마음에서
새로운 취직 처를 알선하려 하여 그 성심에 계용묵씨는
'나는 눈언저리가 뜨거워 옴을 느끼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일은 아마 1942년에 있었던 일로
 추측이 되는데 당시로는 83원이란 봉급은 당시
 총독부 고급관리 월급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은 액수는
아니었다. 봉급의 많고 적음이 문제일수는 없고 같은 직급으로
일본 사람들에게 천대를 받는 것이 참을 수가 없어 이를 물리친
계용묵씨의  의지도 대단하다고 하겠으나 이를 두고 자기체면이
 말이 아닌 것으로 되었건만 '장한일이네'하면서 후배를 아낀
안서 김억선생의 일면을 높이 사지않을수 없다.
 
난처한 처지로 몰아넣은 후배의 행동을
나무라기보다 2중으로 차별 천대하는 일인들이
작태를 지적하고 항의한 후배의 기개를 장한일이라고
 격려한 것은 그 당시 상황으로는 쉬운 일은 아니다.
 
 1943년에서 1945년 해방 직전까지
상사로 모시고 지도를 받았다는 문제안씨는
 (본지 91년 2월호 방송인물사난에 게재) 안서 김억선생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1943년 당시 안서 김억선생님에게서
 인자한 아버님 같은 인상을 받았지요. 나는 20대이고
 선생은 50대였으니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 인격에 따라
 직장에서의 상사에 불과한 사이임을 감안한다면 나이가 많다고 해서
인자한 아버지와 같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자네 영어공부는 얼마나 했지?" 이 같은
질문을 받은 문제안씨는 순간적이나마 안서의 표정을
 살피기에 바빴다고 한다. 대학을 나온 사람에게 영어를 얼마나
배웠느냐는 질문은 때에 따라서는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족한 말이다.
"교육을 받은 사람일수록 우리말을 영어식으로 하는 사람이 적지 않아."
순간적이나마 거부감 같은 것을 가졌던것이 후회스러웠고
 죄송스런 마음까지 느꼈다고 한다.
 
엄격한 사전 고사제도는 아니지만
당시 뉴스원고는 만당(晩堂) 이혜구(李惠求)선생이 보았고
 콩트.스포트등 안서 김억선생이 보았다고 한다. 자세히 그리고
구체적으로 낱말 하나 하나를 보아주신 안서 김억선생이 '영어공부를
 얼마나 했느냐'고 물은 것은 연유가 따로 있었다.  우리말에도
진행형(進行形)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다지 많이
사용하지 않는 게 상례이다.
 
영어에 있어서는 1인칭 2인칭 3인칭이 분명하나
우리말에서는 그다지 문제시 되지 않고 있으며 더더욱 시점을
표시하는 말이 중요시 되지 않는다. '어머니가 빨래를 하고 계십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어머니 빨래해요'라고 대답하는 게 우리말의 모습이다. '.
...하고 있어요.'라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진행형을 대개 안 쓰고 있고
꼭 필요성이 있을 때에만 쓰는 것이 우리말의 통례이다.
 
'어머니 지금 무엇 하시니'하는 질문에
영어로 대답한다면 '그녀는(She) 빨래를 하고 계십니다.'라고
 해야 옳은 영어일 것이다. 원고를 살펴주면서 진행형으로 필요 없이
 표현하는 것을 깨우쳐 주기위해서 '영어 얼마나 배웠지?'하는 물음은
얼마나 구체적이고 자세한 그리고 자상한 질문인가. 요즈음 말로
 PD생활을 했던 필자의 입장에선 참으로 부럽기만 한일이다.
 
물론 이글을 쓸 수 있는 바탕은 학교교육이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같은 분야에서 일 해온 선배님들
 덕분이기도 하다. 더욱이 오늘날 방송에서 발음이 엉망이다라고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노골적으로 말해 미국식 말로 우리말이
오염되어 가고있는게 아닌가 걱정이 된다.
 
안서 김억선생은 지금으로부터 반세기전에
오염이란 표현을 아니지만 고등교육을 받은 지성인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무심코 저지른 말의 오용을 일깨워 주셨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어
말씨름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6.25인 한국전쟁 당시 납북이 되어
살아계신다면 내후년이 백수가 되는데 '백수기념잔치'라고
올리고 싶어진다. 1950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람다운
 아름다움과 훈훈한 정을 찾아볼 수 없는 땅에서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급하다기보다 안타깝기만 한다.
 
안서(岸曙) 김억(金億)선생이 시집
동심초(同心草)를 펴내시면서 맨 처음으로 실은
자야(子夜)원작 '북두칠성'(北斗七星)
시(詩)로서 이글을 마친다.
 
이내몸은 빛나는 밤의 북두칠성
긴 세월 같은 곳을 그저 지키나
님의 맘은 하늘을 도는 해련가
 아츰 저녁 동서로 자리변하네

 

 

유경환 (유카리나) 여사님 글

 

 일면식도 없었던 분들의 오래전

사진이지만,맨 아래 사진속의 어른들의

곧고 깨끗한 시선을 느끼며,세상 바르게

살아야한다고 말씀하시며 지켜 보시는 것 같아
마음을 가다듬게 되기까지 합니다.

 
  


 문시형님

 

이 김억님 글은 고 문시형선생님이
 방우회장시절 쓰신유고를 당시  방우회 사무총장
 정항구님이 저에게 보내 주신 글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동심초 이규도-1.wma

 

- 첨부파일

동심초 이규도-1.wma  
   
"굿-럭" 내가 찾던 글이네요 감사요^^... 펌해가도 될까염 ㅎㅎ
그렇군요.
진즉 올려 놓을것 그랬습니다.
스크랩은 어용되어 있습니다.
일면식도 없었던 분들의 오래전 사진이지만,
맨 아래 사진속의 어른들의 곧고 깨끗한 시선을 느끼며,
세상 바르게 살아야한다고 말씀하시며 지켜 보시는 것 같아
마음을 가다듬게 되기까지 합니다.
곧은 분이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