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이장춘 2011. 4. 9. 21:38

 

 

 

 
 초창기 방송기술의 영역을 확대한 방송기술인 김성재

 

 전 방우회 회장 문시형님 유고
 
 
 말없이 조용하기만한 아니 그보다도
학구적인 방송인이라는 게 옳은 표현일 것인데,
한마디로 말해 선비이다. 1917년 9월 19일생인 그는 금년으로

고희가 지난지 4년, 우리 나이로 75세이다. 김성재옹 이라고

하는게 마땅한데 어쩐지 선생 아니면 씨라는 존칭으로

 붙이고 싶다. 그냥 보기에 할아버지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은데 겉으로 보기엔 50대 후반으로

보이니 존칭을 어떻게 붙이는게  

타당한가. 망설여졌다.

 
1938년 일본 도코전기대학 전기과에서
약전을 전공한 전통파 엔지니어로서 방송기술인의
 대부 격인 이인관 선생과는 동문이자 선후배 관계로
1년이 늦다. 김성재 선생이 방송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38년 JODK지휘소에 적을 두고부터이다.
 
지휘소라는 명칭 자체가 어마어마한
느낌을 주고 있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주조정실에
해당할 것이다. 그를 일컬어 이미 서두에서 조용하고
 말없는 선비라고 표현했다시피 실은 외양만 그렇지
속은 꾿꾿하고 불의에는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기질을 가진 사람이다.
 

 

일례로 그는 1938년 JODK에 입사한지
불과 한 달 만에 사표 소동을 일으켰다. 그의 본적은
경북 선산이고 대구에서 태어난 경상도 사나이기질(?)이
표출되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사연인즉 같은 도쿄전기대학을
 졸업하고 날짜로 발령을 받아 JODK지휘소에 입사한
그가 일본인과의 봉급차가 컸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별대우가 심해서였다.
 이 사표소동은 선배들의 만류로 진정되었지만 후일 황태영 선배의
 가르침에 힘입어 한국인 기술자로서 긍지를 세었다.  특히 한덕봉
 선배가  기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황태영 선배가
성공을 거두는데 한몫을 하게 된 것이다.
 
1938년 당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방송전파전을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하여 마침내
 JODK연희송신소에 50KW 대전력 송신기가 설치되었다.
말하자면 중국에서 발송되는 전파, 소련에서 침투하는 전파,
그런가하면 미국에서 들어오는 방송전파를 억제하거나
방해할 목적으로 JODK전파가 대폭 증강된 것이다.
 
일본 도쿄의 NHK가 일본의 첫방송국이고
서울에서 세워진 방송국은 4번째 생긴 방송국이다.
서울에 세워진 JODK의 출력이 50KW로 대폭증강된 것은,
그것도 일본 본토방송에 앞선 것은 당시의 방송을 통한
 전파전이 가열되기 시작하였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50KW 대출력-- 사실 말로는 쉽게  50KW 라고
하지만 진공관 하나가 거짓말 조금보태 집채만 한 높이
3M가량이나 되었으니 신기하다기 보다 경이적인 존재였다.
당시로서는 처음 대하는 50KW송신기, 다행히도 우수한
엔지니어가 있어서 가동이 가능했고
기능이 발휘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마르코니라고 애칭을 가졌던
한덕봉 선생과 우리나라 텔레비전 방송시대를 연 황태영,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 김성재 엔지니어가 있으므로해서 가능했다.
 막상 50KW송신기를 설치하고 전파를 발사하고 보니 햄(HAM)이
성행해 원래 음성방송의 내용을 전달하기가 어려웠다.
 
햄을 없애야 한다는 게 전 연희송신소
 엔지니어들의 과제였다. 묵묵히 연구에 몰두하기만 했던
학구파인 엔지니어 김성재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짜낸 햄(HOD)소멸
 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기술적인 문제로써 표현하기 어려운 문제이나
 쉽게 표현한다면 송신기에서 나오는 모든 소리를 분석하고 햄에 속하는
 전파를 측정하여 인위적으로 갈은 종류의 햄 전파를 만들어 180도 각도
 즉, 정반대 방향에서 50KW의 송신기에 주입시키면 햄이  서로
상쇄되어 방송이 깨끗해진다는 것이다.
 
이 같은 원리를 발견해 시도한 사람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김성재 엔지니어였다. 학교를 나오자마자
 불과 만20세의 나이로 JODK연희송신소에서 2년간 근무하는
 사이에 세운 기술적인 그이 공헌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김성재 선생은 젊은 날의 추억을 더듬으면서
회상에 잠기기도 했다.
 
"당신이 해당되는 분야가 아닌데 왜 관계를 해요?
손을 떼시오."하는 선배 엔지니어의 시기 아닌 일종의  충고를
수없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구경꾼 노릇은 할 수도 없고
 크게는 송신소 전체의 일이니 방관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50KW대 출력의 그야말로 집채만 한 진공관은
열을 크게 받아 공냉식이 아닌 수냉식으로 물을 순환시켜
 열을 식히고 있었다 한다. 이 과정에서 한시반시 냉각수의 순환이
끊어져서는 안 되는데, 순간적인 정전으로 물의 흐름이
중단되는 경우가 종종 생기곤 하였다.
 
 만의하나 엔지니어가 발견하지 못하면
그야말로 집채만 한 진공관이 폭발하게 되기 때문이다.
송신기를 조작하는 엔지니어의 긴장은 말로써 표현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한다. 엔지니어 김성재는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일본인 소장에게 의견을 제시했다. 소장은 반신반의하면서도
하나의 과제로서 연구해 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는 자기소관이 아닌 강전분야의 일이어서
 선배들의 핀잔을 받을까 망설였지만 소장의 승낙을
받았기에 연구에 몰두하였다. 오늘날의 기술수준으로는
 지극히  간단한 릴레이 방식에서 착안한 것이었다.
 
당시로 말하면 최첨단 기술을 착안하여
 도전한 것이다. 릴레이 장치를 함으로써 순간적인
정전으로 인한 기계의 작동이 멈추는 일 없이 진공관을
 냉각시킬 수 있었다.  말하자만 개가를 올린 것이다.
 
그는 자신의 끈질긴 연구결과를 오늘에 와서도
 내세우지 않는다. 당시 엔지니어 황태영의 기술적인 지원과
 협조 없이는 이루지 못했을 것이라며 공적은 동료에게 돌리곤 한다.
1945년 28세가 되어 경우 총각신세를 면한 그는 신혼여행이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다고 한다. 김성재씨는 사연을
털어놓기도 전에 웃는다. "생각해봐요.
 
해방 후 혼란기이니 여객열차가 제대로

운행되었겠어요? 엉망이지요. 겨우 얻어 타고 간

기차가 지붕 없는 무개차, 화물차였지요." 화물열차라니
그것도 뚜껑이 없는 화물차를 너 댓 시간 타고

갔다하니 그 광경이 어떠했을까? 상상만

해도웃음이 절로 나온다.

 
 예쁘게 단장한 신부의 모습은 검정으로
 뒤범벅이 되지 않았을까? 웃음이 저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막상 백천온천에 도착하여 숙소를 정하고

신혼부부의 꿈같은 세상을 누리려 했는데 때 없이

들이닥치는 임검반의 노크소리에신혼분위기가

송두리째 달아났지요.

 
" 일단의 불만을 표시하면서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38선 접경지역에 위치한 백천온천에서의 임시검문을
무리가 아니었다면서 원망하진 않았다. 무개차를 타고 간
신혼여행 길. 남북이 갈려진 한국에서만 있을 수 있는
신혼여행이어선지 지금 생각에는 아름다운
추억이 된 모양이다.
 
1944년 한때 방송을 떠났던 그는
조선통신기 주식회사를 선배들과 설립하였으나
 JODK퇴직금만 날리기도 했다. 그러나 1945년 해방된 이후
 KBS 방송국 기술부에 복직하여 1946년에 중앙방송국
 조정과장 자리에 오른다.
 
해방 후 1년이 지난 그때 당시에는
방송기재가 부족하였고 더더욱 녹음방송용
녹음판(알미늄판)의 품귀현상이 극심하였다. 1946년
미군정 아래의 방송이었으므로 허울 좋은 민주주의라 하여
 정당방송시간에 공산당 방송도 편성되고 있었다. '이 방송은
본 방송국의 의사와 전혀 관계가 없는 내용입니다.'라는
 주석까지 달았던 각 정당 방송은 출연하는 인사가
거물일 뿐 아니라 그 방송내용이 중요했으므로
 극히 예외적인 배려로 녹음판 커팅
(CUTTING)하여 방송하였다.
 
든 방송이 생방송으로 진행되던
 당시로서는 지극히 특별한 방송이었다.

김성재 선생은  당시를 회상하면서 참으로

곤혹스러운 일을 난생처음 당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공산당 방송이 나가는 날이었어요.
정당강연을 한다는 공산당원이 주조정실에 들어와
 행패를 부렸지요. 왜냐하면 재고품으로 남아있던 녹음판이
 떨어진 것이에요. 아니 떨어졌다기 보다 마지막 한 장이 있는데
그게 막상 녹음하려 하니 불량품이었어요. 녹음판이 없다는
사정을 간곡히 말하고 생방송할 것을 부탁했는데도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며 행패를
 부리지 뭡니까? 지금 와서 생각하니
참으로  통쾌한 일이었어요.
 
공산당이면 공산당이지 행패를 부리고
 야단했으니 천벌을 받는 게 당연하지요." 그때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하던 그는 잠시 미간에 웃음을 머금고 회상에 잠긴다.
그러나 곧은 성격의 주인공인 김성재씨는 녹음판이 없어 일어난
해프닝이라고 하지만 방송인으로서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궁여지책으로 뉴므판에 덧씌운
 '아세테이트'를 재생하는 방법은 없을까? 연구에
몰두하게 됐다. 맨 먼저 KBS 정동연구소 2층에 자리 잡은
 주조정실 옆에 있던 한 평 남짓한 방을 연구실로 꾸몄다.  실험실을
만든 것이다.  한번 쓰고 나면 거의 사용 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된
녹음판의 재생작업을 시작했다. 뉴므판에 입혀진 아세테이트가
거울과 같이 일매진 평면이 된다면 이를 전파에 의해
깎으면 될 게 아니가? 아세테이트는 아세톤에
 의해 손쉽게 녹는 것을 발견했다.
 
녹은 아세테이트를 뉴므판에 입히면 될 게 아닌가?
입혀도 일정한 두께로 입힌다면 이를 다시 깍아 방송용으로

쓸 수 있다. 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아세톤에 뉴므판을 반쯤 담그고

 회전을 시켰더니 과거에 방송하기 위해 깎은 녹음판의 홈이 없어졌다. 

전기로 플러스 마이너스를 전도시켰더니 (일종의 도금형식)아세테이트를

뉴므판에 다시 입힐 수 있었다.문제는 회전속도였다. 김성재 선생은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멀쩡한축음기를 부숴 그모타를 이용했어요.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결국성공했지요. 실같이 깎아낸 아세테이트를

 모아 아세톤에녹이고 회전을 시키면서 전극을 넣으니까  

뉴므판에 아세테이트가 깨끗하게 입혀지지 않겠어요.

 
성공한 것이지요." 말을 잇지 못한 채
눈을 감는 김성재씨. 뉴므판으로 된 녹음판의 재생성공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개가가 아닐수 없었다. 살려고해도 살수없던
녹음판 구입 문제를 일부 해결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기술에는 문외한인 필자가 기술적인

내용을  기술하니 다소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많겠지만녹음판의 재생 사용은 방송의 질을

정비례적으로 향상시킨 일이었다.

 
HAM의 전파방해제거, 릴레이장치에 의한
 냉각수 문제해결, 그리고 녹음판의 재생 등 일련의
방송시설의  개선과 창의에 의한 연구노력은 1947년
KBS조정과장 자리에 있던 그를 연구과장

자리로 옮기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미군정 아래의 KBS직제는
편성, 제작, 보도 분야는 미 군정청 공보처

소속으로 되어있고 조정, 중계, 송신 등 엔지니어 파트는

 체신부 소속,  일반 업무 계통은 방송협회 소속이었다. 이러한

관계로 김성재 선생은 체신부 소속으로 있다가 방송협회 소속인

연구과장이란 직책을 맡게 된 것이다. 당시 그는 현업을 떠나

방송기술에 과한 연구에 몰두하였으나 내부적인 갈등으로

인해 별다른 성과가 없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기술 분야의 비리문제를 제기하는
 지원지가 연구과로 지목되기도 했다. 정부수립과
동시에 시행된  기구개편과 감원소동으로 모처럼
연구 분야가  소멸되고 말았는데  방송기술

향상이란 측면에선 안타까운 일이었다.

 
해방 후 특히 정부수립 후 체신부는
시대에 부응하는 기구의 설립이 절실해짐에 따라
김성재 선생은 국제 전신전화국 창설을 지원하기 위하여
 1949년 체신부로 본의 아니게 차출되어 체신부 전무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10년 가까이 심혈을 기울여

봉직한 방송분야를 떠났던 것이다.

 
체신부로 자리를 옮긴 후 우리나라
민간방송의 태동기에 전파관리과장 그리고
무선기술과정으로서 전파행정의 기틀을 잡고 1960년
 9월 18일 중앙전기 주식회자를 설립하였다.
 
평균 수명이 길어졌다고는 하나
74세란 나이는 고령이 아닐 수 없다. 74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건강하니 아마도 평생을
엔지니어라는 외길을 충실히 걸어온 것이
그 비결이 아닐까 싶다.
 
중소기업으로서 탄탄히 자리 잡은
기업임을 자타가 인정하는 중앙전기 주식회사
회장직을 맡고 있는 김성재 선생은 딸만 여섯인데 남들이
뭐라고 하든 행복하기만 하다고 한다. 큰딸이 서울에 살고 다섯째가
 연세대교수, 그리고 차녀는 미국에 막내딸은 불란서 파리
제7대학에 유학중이라고  딸 자랑을 늘어놓는다.
 행복한 그의 표정에 그만 부러움이 앞선다.
  
 

문시형님  
 
이 글은  고 문시형 선생님이 방우회  
( 한국 방송인 동우회 ) 회장 시절에  쓰신 
한국 방송 인물사를 당시 방우회 사무총장이던 
정항구님이 보내 주셨습니다,

 

 

 

위의 사진 두번째 줄 오른쪽에서 두면째분이
김성재 님입니다.  1987년 9월 3일 첫 방송터 제막식에
참석 하셨을 때 모습입니다.

 

 

 

이 사진은 1948년 10월 3일 방송기술인들의 야유회기념으로
찍은 사진이고 대한 방송협회시절에 마지막 남긴 사진이기도 합니다. 연구과장 김성재님을

 비롯해서 박노현 서무과장, 한덕봉 기술부장, 이정섭 대한방송협회 회장, 이규일 기술과장,

고종수 조정과장, 김익모, 볓천수님이 함께한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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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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