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와 방송

이장춘 2011. 6. 20. 03:51

 

 

 

모윤숙과 노천명, 6.25와 방송

 

 

같은 시기에 태어나 시단, 문단, 방송계 등

여러 방면에 걸쳐 같은 길을 걷기도 했던 두 시인!

6.26전쟁은 한때 두 분의 가는 길을 갈라놓았습니다.

 6.25가 일어나던 때 모윤숙시인의 애국시가 방송을 통해서

 울려 퍼지는가 하면 최전방 미아리의 격전지까지 가서 확성기

 방송을 하는 등 군 사기를 높이는데 힘을 기울이다가

한강을 건널 기회를 잃어 3개월을 산속에

숨어 살았다고 했습니다. 

 

피난을 못한 것은 노천명 시인도

마찬가지였지만 공산군의 손아귀에 들어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협조를 했습니다. 3개월 후

 서울이 수복되었을 때 모윤숙시인이 떳떳한 모습으로

 나타나 그간의 어려웠던 얘기를 들려주면서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지만 노천명시인은 씻을 수없는 부역의 탈을

 썼습니다.    그리고 부산 임시수도에서 20년 장기

복역수가 되어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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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노천명님의 방송생활과 삶 

http://blog.daum.net/jc21th/17781347

 

모윤숙과 방송 &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http://blog.daum.net/jc21th/17780780

 


 

 

 

 노천명을 구하자는 문학인들을 비롯한

 동료들의 열화 같은 바람과 아까운 재능, 전쟁 중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상황 등이 참작되고

 본인이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 할 것을 다짐하면서 감옥살이는

6개월로 끝났고   그 길로 부산 피난시절의 KBS를 찾아 방송인

들과 삶을 같이 했습니다. 전쟁 기간 중 노천명시인이 쓴 애국 시와

가정메모가 전파를 타고, 각종 프로그램에 출연, 방송되면서 

어렵고 힘든 국민들과      국군의 사기를 높여주고

 국민들에게 웃음을 주고 희망을 주었습니다.

 

방송국의 분위기를 밝게 하고 직원들의

친구이고 누나같이 살았습니다. 대한민국 순직방송인

제1호 이성실님이 링크용  비상 단파송신기 제작 중 순직했을 때

누구보다도 슬픔에 잠겼고 그 묘비를 스스로 썼으며 그 덥던 날 그

묘에서 명복을 빌었습니다. 6.25가 끝나고 방송국이 서울로 돌아온

뒤에도 방송과 인연은 계속되었지만 다른 여러 일로 바쁜 나날을

 보내다가 결국 뇌출혈을 일으켜 1957년 12월 10일

 45년간의 짧은 삶을 마쳤습니다.

 

 일제강점기 약혼님 김광진이 왕수복과

 마음이 맞아 님의 곁을 떠남에 세상을 떠날 때 까지

혼자 살면서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좋은 사람과 살고 싶다는

시를 쓰기도 했지만 그 소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님의 시들은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 그리움을

간직한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져 지금도 깊은

감동과 여운을 남겨 주고 있습니다.

 

 

 

 

시인 모윤숙! 뜻하지 않은 6.25로 모윤숙은

마이크를 들고 방송국에서 또는 국군이 싸우는 최 일선을

누비면서 눈, 코 뜰 사이 없이 외쳤습니다. 6.25가 일어나던 다음날

아침부터 문화 예술인들이 문총비상 대책위원회를 결성해서

집단적으로 전쟁에 참여했고 모윤숙이 앞장섰습니다.

 

모윤숙은 즉각 행동을 개시해서 KBS 마이크를

잡고 애국시를 스스로 지어 낭송했습니다. 군 짚 차를 타고

 아군의 주 저항선인 미아리고개 밑에까지 가 적과 분전하는 국군장병들을

격려했으며, 목매인 시인의 외침은 밀리기만 하던 국군의 사기를 높였습니다.

27일 북한군이 방송국을 점령하기 직전 KBS중앙방송국의 끝 방송은 모윤숙여사의

 애국시 낭송이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주 일본 김용주 전권공사는 1950년 6월

27일 밤 전화통과 라디오 앞에서 밤 10시경 모윤숙 여사의 애국시

낭송을 끝으로 서울 방송이 끊겨 버리는 상황에 접하면서

즉시 VUNC방송을 추진했다고 했습니다.

 

 

 

 

최후까지 국군의 사기를 올려

남침 저지에 힘을 기울이던 님은 피난길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위 사진은 유엔군이 공개한

사진으로 서울이 함락된 3개월간 모윤숙님

자신이 어떻게 지내왔는지를 얘기하는

장면이라고 했습니다.

 

 

 

 

모윤숙시인은 6.25 전 기간을 통해서 국군과

국민의 사기를 높이는 시를 쓰고 얘기를 들려주며 

활동했습니다. 전쟁 중 1951년에 쓴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그 시를 압니다. 내용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그 제목은 알 것입니다.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고은하님의 낭독으로

듣고 계십니다. 노천명시인은 1957년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모윤숙시인은 

1990년까지 살면서 펜클럽 한국본부 회장. 예술원 회원. 유엔 한국대표.

 한국문예총연맹 최고위원.국회의원 등 화려한 직책을 수행하면서

살다 갔습니다. 1930년대 경성방송국 시절부터 활동하던 시인,

문학가 모윤숙과 노천명 더 자세한 예기는 다음 영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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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기회주의에 익숙한 자들일뿐...
    일제때의 모윤숙이 행태를 모르시나요? 우리 젊은이들을 일본넘들의 전쟁터로 몰아넣은 친일파입니다.. 6.25때 행동은 해방후 득세한 친일파넘들의 연장된 행동과 무관하지 않을듯...어떻게 다시잡은 권력인데..
    둘다 친일로 극강을 다투던 자들입니다.
    노천명 시인의 시 '이름없는 여인되어' 인가 '사슴'인가 무척 슬픈느낌의 시였는데, 그분의 생도 슬픈 생이였군요.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먼~데 산을 바라본다" 왕수복이라는 大적수를 이길 수가 없었나봅니다. 전설같은 사랑도, 변질될 수 있으니, 예나 지금이나 슬픈 일이지요.
    기구한 운명에 열심히 살다간 인생이지요.
    노천명이 전쟁 중 인민군에 부역한 까닭에는 김광진과의 사랑이 좌절된 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노천명이 김광진과 헤어진 까닭은 왕수복 때문이 아닙니다. 김광진이 부인과 이혼하는 과정이 길어지면서 노천명과 헤어지게 되었고 , 김광진은 이혼 뒤 왕수복을 만나 결혼하였습니다. 그리고 노천명은 전쟁이 끝난 뒤 부역의 까닭을 변명으로 일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