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와 방송

이장춘 2011. 6. 22. 08:42

 

 

 

 

위진록 (6.25 첫방송)아나운서, KBS시절

 

  

2007년은 내가 KBS 아나운서가 된지

 60년이 되는 해다. 1947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이니까 좌우익의 테러가 빈발하고, 그 대립이

격하여 암살과 폭력이 자행되고 있을 때다. 해방의 감격과 기쁨은

물 건너가고, 38선의 장벽은 높아 가기만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3년 후에 닥쳐 올 6.25라는 엄청난 민족의 비극을 전혀 짐작도 못한 채,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타고 물밀듯이 흘러드는 방자한

서구 문명의 소용돌이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당시 19세였던 나 역시 앞날에 대한

확고한 목표를 세우지 못하고, 격동하는 사회의

움직임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해방 전, 사범학교에 같이 다닌

친구들은 군인이나 학교선생으로 이미 사회에 진출하였으나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라디오에서

그지없이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애절하기 이를 데 없는 꿈같은 멜로디가

 내 마음을 쥐어짜는 듯이 안타깝게 흔들어 놓고 말았다. 나중에 그것이 차이코프스키의

 저 유명한 교향곡 ‘비창’의 제 1악장 제2주제 안단테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우리나라 방송 최초의 낭송 시, ‘꽃다발’ 시간의 주제곡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이 음악이 그만 내 마음을 사로잡고 놓지를

않았다. “아, 이런 세계가 있었구나, 내가 기다리던

세계가 바로 방송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런 내가 그 해 8월에 있었던

 KBS 아나운서 채용시험에 뛰어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3명 채용에 300여명이

몰려 왔으니까, 합격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

게다가 나에게는 몇 가지 불리한 점이 있었다. 19세는 응시자 중,

최연소였고 나의 학력은 구제전문학교 혹은 신제대학 졸업자에 한한다는

자격에 미달할 뿐 아니라, 이북에서 태어나고 자란 탓으로 평안도 사투리가

남아 있었다. 치명적이라면 치명적인 그런 난관들을 무사히 통과하고

 합격할 수 있은 데에는 시대 자체가 과도기여서 예외라는 것이

 어느 정도 용납되었기 때문일 것이고, 낭독력과 음성 테스트,

면접시험, 학과시험 및 논문 작성 등에서 운 좋게

최고 점수를 땄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특히 ‘방송사명의 시대성’이라는 제목을

다루는 논문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과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방송을 심리 작전에 이용하고, 소련 등

독재 국가들에서는 국민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방송을 악용하였으나

앞으로는 국민의 자유와 평화, 그리고 사회 문화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고

 역설함으로써 시험관들의 공감을 샀던 것 같다. 이렇게 해서 나는 19세에

 한국 방송 최연소의 아나운서가 되었다. 이 기록은 그 후 60년 동안

 변동이 없었고, 모르긴 하지만 앞으로도 좀처럼 깨지지

 않을 기록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결코 자기 자랑을 하려고 한 말이 아니다.

60년 전에는 그런 일도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해 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한국을 떠나 해외에서 살기 시작한 것이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해 가을이었으니까, KBS 아나운서로

일한 것은 만 3년, 그 3년 동안에 한 일이 참으로 많다. 1948년,

이른바 5.10 선거의 투표 결과를 당시의 중앙청에서

중계 방송하였고,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식전을 중계 방송하였다.

 

 

이듬해 이승만 대통령의 영남, 호남 지역

 초도순시 때는 수행 아나운서로 지명되어, 그 분 가까이에서

 1주일을 지냈고, 백범 김구선생 장례식 때는 효창공원에서의 하관식

중계방송을 담당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무대극 중계를

한 것이 나였고, 1949년 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연주된 라벨의 ‘볼레로’를 중계한 것도 나였다.

 

  

 당시 방송국에 자주 출입한 인사 중에는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선생, 시인 김안서선생,

국악인 성경린선생, 한 때 방송국 편성과에서 일한 적이 있는

노천명, 모윤숙 등 여류시인, 국사 강좌로 유명하던 김도태선생,

국문학자 이숭령선생, 민속학자 이서구, 극작가 유치진, 연예인으로는

 복혜숙, 황정순을 비롯해, 6.25 때 월북한 김양춘, 남궁 연, 유경애 등

 여배우가 생각나고, 이백수, 서월영 등, 한국 신극 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한 ‘토월회’의 멤버들, 소프라노 김자경, 마금희, 김천애,

테너 이인범, 첼리스트 이강렬 등. 이제 거의 세상을 떠났으나

 60년 전에 직접 만나고, 인사하고, 얘기를 주고받던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러고 보면 선생님은 대한민국

역사의 산 증인이시군요”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역사의 증인 이라면 좀 거창하지만, 당시 일어난 사건들을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목격하고, 분석하고 보도하였기 때문에 또 당시의 문제의

인물들을 직접 만나 얘기하고, 관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에 와서 그 때의

 일들을 왜곡하고 날조하려는 사람들의 허위성을 밝혀낼 수는 있다. 가령,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6.25전쟁. 현 정권의 지도자들은 미국이 도발한 전쟁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김일성 수상의 조국해방 전쟁이었다고 찬양하는

 대학교수가 있는가 하면, 국정 교과서도 그런 사상과

이념을 바탕으로 편찬되고 있다. 

 

 

 

 

 

그날, 1950년 6월 25일 아침,

공산군의 남침 소식을 처음으로 방송한 것은 나다.

아침 방송이 시작되기도 전에 국방부 정훈국 소속의 장교가

당직 아나운서인 나를 찾아와, 저들의 남침 소식을 당장 방송하라는 것이

었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뉴스를 확인하기도 전에 방송할 수는 없다고 거절하고,

방송국 책임자와 당시 국방부 정훈국장이었던 이선근 대령에게 문의, 확인한 후, 임시뉴스로

 전국에 방송되었다. “임시뉴스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임시뉴스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 새벽

북한 공산괴뢰군은 38선 전역에 걸쳐 남침을 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우리 국군이 건재합니다.” 몇 번이나 거듭하였을까. 그러면서도 이것이 처참한 민족의 비극으로

확대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지 못하였다. 그것은 틀림없이 당시의 종주국이었던

소련의 사주에 의해서 면밀히 계획된 침략 전쟁이었다.

 

미리 준비된 작전계획과 철저히 훈련된

군대 앞에 남한 영토의 태반이 삽시간에 점령되고 말았고,

나는 그들 점령 하에서 9월 28일, 서울 탈환까지의 3개월은 숨어 살면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는지 모른다. 내가 당시 일본 도쿄에 있던 UN군

총사령부 방송의 초청을 받아 일본에 간 것은 같은 해 11월. 애초에 1개월 예정

이었던 것이 22년 후인 1972년에 일이 끝나고 곧 바로 미국으로 이민 와,

오늘 날에 이르렀다. 19세에 아나운서가 되어 3년 후인 22세에 한 달

예정으로 고국을 떠난 사람이 평생을 외국에서 살게 되었으니

문자 그대로 기구한 인생이었다. 그것은 60년 전 어느 날,

라디오에서 우연히 흘러나온 그지없이 아름다운

음악에서 비롯된 인생이었다.

   

 

 

 

위진록 아나운서는 1927생인 위진록 아나운서는

지금도 건강한 모습이고 저서도 내 출판기념회도 같습니다.

이 글은 미국에 있는 코리아 모니터에 2007년 1월 19일자로 올라 있는

글입니다. 사진은 제가 보유하고 있는 자료를 활용했습니다. 오늘 배경응악은

위진록 아나운서가 감명을 받고 아나운서 길을 택했다는 우리나라 최초로

편성된 "꽃다발" 주세곡 차이코프스키 비창 제 1악장입니다. 위진록

아나운서에 관한 글은 다음 영문자 주소를 클릭하시먼

더 보실 수 있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위진록 아나운서가 말하는 6.25 발발 첫 방송뉴스 

http://blog.daum.net/jc21th/17780760

 

 6.25첫 방송 아나운서 위진록 / 전 방우회장 문시형님 유고

http://blog.daum.net/jc21th/17780758 

 

 

 

 

비창.mp3

 

- 첨부파일

비창.mp3  
   
이제 세월이흘러 아름다운 추억속에 담아
들려주시는 위진록 아나운서님께 존경을 보냅니다
영상을 보면서 옛일을 거슬러 돌어볼수 있게 되네요
불러그를 통해 뵙게된것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자주 들리겠습니다.. 즐겨찾기 하겠어요
고맙습니다.
미국에 계시지만 자주 오십니다.
늘 행운을 빕니다.
66년 전 쯤 1947년 19세의 최연소의 나이로 아나운서가 되셨던 위진록 대선배님을 여기서나마 만나뵙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광재 아나운서와 김무생 아나운서의 생생한 체험 기록>이라는 글에서 저는<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KBS 라는 콜사인을 외치고 다녔다.
지금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한 마디는 멋있게 말하는 KBS 이다!>라고 했듯이 위진록 대선배님께서 <KBS는 19세부터 오늘까지 내 마음의 고향>
이라는 그 말씀이 제 마음에 진하게 와 닿습니다.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지금 메일 한편을 발송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