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음악 백년

이장춘 2011. 7. 11. 02:18

 

 

 

경성방송국 양악을 이끌었던 사람들/ 홍난파, 박경호, 김생려

  

방송국이 이 땅에서 처음으로 문을 연 것은

1927년 2월 16일이지만 방송국 설립을 위해서 시험방송이

시작된 것은 1924년 12월이었습니다. 그때 총독부와 조선일보가

각각 시험방송을 했고 그 시험방송에서부터 양악이 방송되었습니다.

9일과 10일에 실시된 총독부 시험방송 때는 자세한 기록이 없지만

17, 18일에 실시된 조선일보 시험방송 때는 홍난파가 출연해서

 바이어린 연주를 한 기록도 있고 사진도 있습니다.

 

리나라에  양악이 들어온 것은

 1910년대라고 볼 수 있으며 홍난파의 활동

시기와도 맞물립니다. 국악이나 또 창가라고 불렸던

동요, 유행가, 가곡 등과는 달리 양악은 한국인이나

 일본인들이 비슷한 감각을 갖는 것이어서 자연

스럽게 방송전파를 탔다고 볼 수 있습니다.  

 

 

 

 

 1919년 京城樂友會가 조직되면서

오케스트라 싹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방송국

개국을 앞두고 1926년 중앙악우회가 결성되었고

중앙악우회가 경성방송국 개국 축하음악을 연주했습니다.

그때는 홍난파가 일본 유학중이라 이화여전 (해방공간의 KBS,

기획과장, 편성과장)박경호와 붓스(Boots)부인이 주축이 되었고 

홍난파, 김형준, 홍재유, 최호영, 이영세, 홍성유, 고봉경, 안병소,

김재호,  김영환등 15명 정도였습니다.  중앙악우회의 지휘를 맡은

 부스부인은 미국, 피츠버 음악학교 출신으로 파이프 올간, 피아노, 

바이올린등에 능숙해서음악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1973년 3월 20일 경향신문)  이 악단이 초기

 경성방송국과 깊은 인연을 맺었습니다.

 

1928년 4월 13일 최초로 JODK

오케스트라가 조직되어 초창기 음악방송을

빛냈습니다. 이 방송 관현악단은 아마추어 모임에서

벗어난 프로페셔널한 연주단체로 처음으로 단원들에게 보수가

 지급되기도 했습니다. 이때의 멤버는 박경호 홍난파를 비롯해서

 약 18명 정도로 월 2, 3회 정도 방송에 출연했습니다.

 ( 1977년판 한국방송사 P.72 참조)

 

 

 

 

1929년 홍난파가 일본 유학길에서

돌아오면서 양악계가 더 활기를 띠었습니다.

중앙보육학교 교수로 강단에 서서 교육에 힘을

기울이면서 연악회를 부활시켰고 째즈 밴드

(Korean Jazz Band)를 구성해서 적극적인

방송활동을 전개했습니다.

 

 

트럼본 박건원, 오른쪽 스저폰 백병곤이라고 했습니다.

 

위, 아래 사진은 1929년 여름 코리아 재즈 뺀드를

구성하고 처음 방송을 할 때 촬영한 사진으로  위는 연주 장면이고

아래 사진은 쉬고있는 장면인데 아래 사진이 좌, 우를 바꾸어 놓은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아래 사진은 나운영선생님 홈에 있습니다. 아래 홈

바로가기 안내가 있습니다.  나운영 선생님은

KBS 음악계장을 하신적이 있습니다.  

 

 

 

홍난파 조선동요 100곡집 상권이 발간 된 것도

 이 무렵으로 경성방송국의 음악방송에 활기를 불러

넣었습니다. 1931년 홍난파가 미국 유학길에 올랐을 때도

그 바탕은 흔들리지 않았고 1933년에 유학길에서 돌아올

무렵 우리말 전담방송인 제 2방송이 실시되면서

양악은 더 활기를 띠었습니다.

 

  

 

 

홍성유, 이영세와 함께 구성한 바이올린 3인

트리오를 비롯해서 바이올린 전수린, 크라리넷 김교성,

기타 백견, 드럼 문호월, 그리고 백병곤, 이병삼, 이철, 김홍태,

최호영, 김상준, 박건원 등 그 시절의 최고 작곡가 반열에 올라있던

 분들이 작곡활동 뿐만 아니라 방송 관현악단이나 째즈 단의 멤버로

방송국에서 경음악 연주도 하고 또 유행가 가수가 노래를 부를 때는

반주도하면서 방송음악에 참여했습니다. 지금과는 양상이 많이

 달랐지요. 클래식과 유행가, 동요 등의 경계를

중요시 하지 않을 때였습니다.

 

 

 

 

홍난파가 흔히 동요나 클래식만 했던 것으로

아시는 분이 많지만 예명으로 발표된 대중가요들도 있습

니다. 방송과 학계에서 적극적인 음악활동을 하던 홍난파가

 경성중앙방송국 JODK오케스트라를 결성한것은 1935년 4월 13일의 

일이었습니다.  이 오케스트라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벌였고 경성

방송국의 양악은 그 폭이 넓어지고 깊어졌습니다. 1985년 한국 예술원에서

발행한 한국 음악사에는"1939년 전조선 창작음악제에 홍난파ㆍ채동선

임동혁 등의 관현악 작품을 연주해서 우리나라 창작음악 연주에도

 기여하였다. 특히 홍난파의 연가곡 「나그네의 마음」은

 이 관현악단이 있었기 때문에 창작될 수

 있었다." 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홍난파, 홍성유, 김원복, 홍재유, 홍은유, 박경호,

현제명, 독고선 방송국과 더불어 활동을 한 당대의 음악인들이

함께 한 사진입니다. 홍성유, 김원복부부는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만난

 명 콤비로 연주회등 많은 활동을 했고 현재명은 미국 유학을 다녀와 1929년부터

 연희전문 교수로 1930년에 결성된 조선음악협회 초대이사장을 지냈으며 1937년에는

 성악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홍난파가 일찍이 세상을 떴지만 현재명은 해방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을 세우는데 힘을 기울였고 1970년 세상을 뜰때까지 음악계

 대부로 활약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분들 외에도 김영환, 채동선, 안기영, 

윤성덕, 김인식, 박태준, 김동진, 권태호, 이인선, 한기주, 김재훈, 정훈모, 

채선엽, 이흥렬, 박태현 홍종인 등이 방송인연이 있었습니다.

 

다음 사진은 현제명이 연희전문 교수로 있던

 1932년 연희전문 4중창단이 경성방송국 방송출연을 하고

 촬영한 사진으로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분이  현제명 교수이고

4중창단의 구성원인 황재경, 테너 이인범,  제 2 테너 최성두,

제 2 베이스에 신영균님의 모습입니다.

 

 

 

활발하게 전개되던 경성방송국의 음악활동은

 홍난파의 사망과 때를 같이해서 발발한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차츰 빛을 일어가게 됩니다. 홍난파가 세상을 떠난 뒤 방송 관현악단의

 악장으로 홍난파를 돕던 김 생려가 운영을 맞고 계정식을 임시지휘자로 해서

 이어갔지만 일본인 中川英治가 책임지휘자로 오면서 지휘에도 문제가

생기고 또 때가 전쟁으로 치 닿던 때라 경성방송국의 양악도

유명무실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그때

방송 교향악단의 책임을 맡았던 김생려님의

 글이 있어 뒤에 옮겼습니다.

 

 

 

홍난파의 발자국이 워낙 크고 깊어서

 다른 분들은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많지만 

많은 분들이 경성방송국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이 중에서도

박경호나 김생려를 놓을 수 없을 줄 압니다.   박경호는 끊임없이

 경성방송국의 음악과 함께했고 특히 홍난파가 해외에 가 있을 때는

그 중심역할을 했으며 그 중에서도 1927년의 경성방송국 개국

축하연주회나 1933년 4월의 제2방송 출범 축하 연주회를

박경호님이 앞장선것은특기 할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해방되어 1946년 KBS 지금의 편성역할을 하던

 기획과장을 했고 1949년 6월에는 방송사상 최초로 6개월간의

미국연수를 떠났다가 VOA에 머물러 1950년대 그곳에서 방송을 했습니다.

김생려는 1912년에 테어나 연의전문학교 재학중이던 1939년 홍난파가 이끌던

경성방송국의 방송교향악단 악장을 맡았고 1941년 홍난파가 세상을

떠난 뒤 그 교향악단의 책임을 맡기도 했습니다. 해방 후까지

KBS악단의 책임을 맡아 활동했습니다.  

 

 

 

 

김생려님의 회고담 (1977년 판 한국방송사에서)

 

 

내가 방송관현악단의 악장직을 맡은 것은

 1939년 봄 JODK시절이었다. 10여명의 단원으로

노래반주나 하던 관현악단을 홍난파선생이 JODK 음악책임자로

 임명되면서부터 확장하기 시작해서 일본에서 악기를 구입하고 악단도

 25명으로 증원하여 하이든 모차르트 심포니를 처음 생방송으로

내 보내기도 했다. 직업적인 관현악단으로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40년 5월 16일

홍난파 지휘 방송 관현악단의 방송

연주곡목은 다음과 같다.

 

0. 스페인 소야곡 (비제 작곡)

0. 유모레스크 (드보르작 작곡)

0. 금혼식 (마리작곡)

0. 작은 장난감 병정 ( 로세이 작곡)

0. 춤추는 인형(폴디니 작곡)

0. 사막의 대상 (자메니크 작곡)

 

얼마 되지 않아서 홍난파선생이 불행히도

병석에 눕게 되자 내가 1944년부터 촉탁이란 직명으로

 난파선생의 일을 대신하게 되었고 상임이 되었다. 난파선생이

 작고한 뒤 계정식선생을 임시지휘자로 모시게 되고 방송국의 전속단원

외에 약 20병의 증강단원을 모집해서 대외 연주활동을 시도 했었다.

 25명의 전속단원 예산으로 40명의 오케스트라가 된다는

 것은 JODK로서도 유익한 것이었다.

 

이사이 당시 업무과장으로 있던 일본인

小野田이 빈에서 지휘공부를 했다는 中川英治를

책임지휘자로 초청해 왔다. 이것이 1942년인가 보다.

우리의 기대가 컸었지만 처음 연습 해보고 실망을 하고

 말았다. 그래서 40여명의 음악동지들은 桂貞植선생을 받들어

대외연주에 노력을 경주했었다. 그러나 小野田은 민족적인 

감정에서인지 대외출연을 호락치 않았다.

 

우리는 小野田에게 여러 차례 교섭하기를

 20여명의 무보수 단원들도 中川英治지휘로 방송을

여전히 할 터이나 대외 출연만은 계정식 지휘로 해 달라고

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하고 말았다. 비로소 처음으로 싹 트려던

 우리나라 오케스트라 운동이 일본인 한 과장의

편견으로 좌절될 운명에 놓였었다.

 

 결국 10여명의 전속단원을 제외한

 모든 단원이 JODK를 물러나게 되었고 나도

사의를 표하고 물러나게 되었다. JODK를 물러난 동지들이

모여서 따로 별개의 오케스트라를 만들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JODK 오케스트라는 이 사전이후 다시 10여명으로 된 노래

반주 오케스트라로 전락했다가 8.15후 없어졌고 1949년부터 지금의

시향의 전신인 서울 교향악단이 정동방송국에 자리 잡고 당시

 미국인 고문 롤포 자코비씨 지휘로 본젹적인 방송

교향악 운동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다음 영문자 주소를 클릭하시면

홍난파님과 안익태님에 관한 글을 더

보실 수 있습니다.

 

 경성방송국과 현대음악의 선구자 홍난파님 

http://blog.daum.net/jc21th/17780255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선생님과 방송

http://blog.daum.net/jc21th/17780256

 

나운영 선생님 홈 바로가기

http://www.launyung.co.kr/

 

http://www.launyung.co.kr/index.htm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봉숭아 바이오린.mp3

- 첨부파일

봉숭아 바이오린.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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