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이장춘 2011. 10. 4. 01:57
  

 

황우겸 아나운서! 1950년대 야구중계방송과

 공개방송 스타탄생 등의 프로그램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확립하면서 명성을 떨치던 황우겸 아나운서는 4,19가 일어나고

나라의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면서 거수기(擧手機)가 아닌 거구기

(擧口機) 노릇은 할 수 없다고 아나운서 일동이 궐기하던 바로 그 후
 주위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천직으로 알았던 아나운서 생활을 
단념하면서 방송국을 떠났습니다. 오늘 들으시는 육성은
 
2015년 2월 4일 한국아나운서클럽 8대회장
임국희 아나운서 취임식장에서의
축사전문입니다.

 

 

황우겸, KBS TV 첫 아나운서 실장 (야구중계방송, 스타탄생)

 

 

 

 

 5,16직후 오재경 공보부장관이

 KBS TV방송국을 설립할 때 개국요원으로

황우겸 아나운서를 다시 영입하면서 새롭게
떠오르는
시대의 총아 TV방송에서 역량을 발휘 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TV방송 개국에 참여하고
첫 아나운서 실장이되었습니다.

2년 반에 걸쳐 TV방송의 틀을
확립하는데 힘을 기울인 황우겸님이

다른 꿈을 안고 방송국을 떠나면서 TV방송의 개국과
초창기
TV 방송에 얽인 얘기들을 “바보상자” 라는 책에
생생한
기록으로 남겨 그 시대의 귀중한 방송역사
자료로 널리 활용되고 있습니다.

 

 

   

황우겸 아나운서는 6.25 포성이 울리던

 1951년 9월 부산 피난시절 임택근, 강찬선, 이수열,

 정순형 (여, 정순향)아나운서와 함께 방송국에 들어와

아나운서가 부족하던 시절, 초년시절부터 여러 방송에

임했지만 중,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시절까지 야구
선수였던 님은 야구 중계방송을 누구보다도

 잘 해보려는 꿈이 있었습니다.

 

 

 

 

6,25가 일어나기 전에 시작된 조선일보

 청룡기 야구대회와 동아일보 황금사자기 야구대회에

 1회부터 4회까지 출전했던 고등학교시절의 선수생활과 성균관

대학교 야구선수로 대학 야구선수권 대회에 참여했던 선수생활을
바탕으로 야구중계방송의 수련을 끊임없이 쌓았지만 그 기회는
서울
수복 후에야 주어 졌습니다. 야구 중계방송의 여건도
안 좋았지만
야구 중계방송의 독보적인 아나운서

 윤길구 선배가 좀처럼 마이크를 넘겨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1954년부터 야구중계방송의 마이크를 받기 시작한

 황우겸 아나운서는 야구중계방송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국내 야구 중계방송은 물론 해외에서 열린 야구대회에도 참여
해서
1955년 12월 마닐라에서 열린 제 2회 아세아 경기대회와 1959년

9월 일본 동경에서 열린 제3회 아시아 바로 황우겸 아나운서의 중계방송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무렵 재일 교포 북송문제가 큰 화두로 대두되던 때
이 중계방송을 위해 일본에 있던 황우겸님이 조총련의 북송기만책을
 폭로하는 재일동포들의 육성을 녹음오로 담아 방송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대회에 대해 황우겸 아나운서의
 기록이
있어 이 글의
끝 부문에 올립니다. 
 

 

 

 

방송국 마이크 그 중에서도 야구 중계방송은

아나운서 생활에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또 가슴 아픈  얘기가 곁들여 있습니다.
1956년 7월 29일! 황우겸
아나운서로서는 일생동안 그날
그 일은
잊을 수없는 날이고 잊히지 않는
 날입니다. 미국
남가주대학교
 야구 원정팀이 서울(동대문)운동장에서 
한국대표와
야구 결승전을 벌리는 날, 님은
그 중계방송을
했습니다. 

바로 그 부근의 이화 여자대학교
 부속병원에서는 새로 태어나던 한 생명이
죽어서 태어나던 날이었습니다.
부인 권경애 여사가
 첫 아기를 출산하기 위해서 그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중계방송은 진행되었고 출산에
문제가
 생겨 중계방송중인
보호자 황 아나운서에게는 빨리 병원으로 오라는
성화가
빗발쳤지만
 마이크를 버릴 수 없었던 터라 그 중계방송을
마쳐야 했습니다. 
그리고  중계방송을 
끝내고 병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새로       태어난 아이는 출산에
문제가 생겨
 생명을 잃었고 부인은 실신상태로
있었습니다.   중계방송 중 마이크를
 놓을
수 없었던  뼈아픈 얘기! 님은 지금도
그 얘기를
생생하게 들려주십니다.
  

 

 

이때는 야구 중계방송을 하던 윤길구 아나운서가

방송 책임자로 있던 시절이라 다른 일에도 바빴고 또 그

중계방송을 할 때는 미국 유학을 떠났기에 야구중계방송
마이크를
잡을 수 있는 아나운서가 없을 때 이런 가슴 아픈 일을
당한님은 후계자
양성에도 관심을 기울여 야구중계방송에 뜻을 둔
후배 박종세 아나운서를
 야구중계방송의 마이크 앞에 함께
않도록 해서       
박종세       아나운서는
이로부터

야구 중계방송의 대명사가 붙을 정도로 훌륭한

 야구중계방송 케스터가 되었습니다.

  

 

 

 

황우겸 아나운서가 담당했던 그 많은
 프로그램
중에서도 공개방송 스타탄생은 1957년
이 프로그램이
생길 때부터 끝날 때까지 3년 여에 걸쳐 
황 아나운서의
전담
프로그램으로 스타탄생이라면 황우겸을
연상 할 정도로 깊은  인연을
 맺었고 본인도 애착을 가졌던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시작 할 때
 프로듀서는
김규대님
 이었지만 얼마 안 되어 담당 PD가 세상을 뜨심에
님은
프로듀서, 
작가 등 모든 역할을    직접 담당하면서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황일청이라는 이름으로
작품을
썼으며 
출연 연사를 섭외하면서        프로그램을
제작했기에  힘은
들었지만       애정이 가던
프로그램이고
 또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방송역량을 넓혔습니다.

  

 

 

그때의 스타탄생은 마이크 앞에 나와

 연기를 해보고 싶은 신인들을 뽑아 기성 배우들과 함께

공개방송을 엮어가는 30분 프로그램으로 게스트 스타로는 복혜숙,

박상익, 노경희, 이향자, 구민, 주상현, 오정한, 김상운,

이혜경, 박순옥님등이 번갈아 출연 했습니다.  

 

 

1960년 4.19후 거구기((擧口機)를 할 수 없어

 방송국을 그만둔 황우겸 아나운서! 1년여의 공백끝에

시대의 총아 TV방송의 매력으로 1961년 9월 발길은 다시

방송국으로 옮겨져 TV방송의 개국 준비를 하고 KBS, TV방송

첫 아나운서 실장의 직책을 맡아 10여년간 라디오방송을 통해서

쌓은 방송의 역량을 발휘하면서 뉴스, 제스츄어 께임,  당신의
판단,
 축복합니다 등 프로그램에 출연했습니다. 아래 사진은
1962년 초   웨곤       승용차 위에 TV가메라를 설치하고
중계방송 하는 아나운서
 황우겸님과 우리나라 최초의
TV방송
 카메라멘 마종훈님의 
모습입니다. 아직
TV중계방송차가
마련되기전
이 아슬 아슬한
모습으로 중계방송을

이어갔습니다.

 

 

 

 

그 체험과 TV방송의 초창기에 있었던

생생한 얘기를 담은 책 바보상자는 TV방송

 초기의 산 역사 교과서입니다.  님이 1963년
방송
국을 떠나신 뒤에도 여러 활동을 전개해서  한국
J. C
 (청년 회의소) 제 13대 중앙회장을 지내셨는가
하면 
기업인으로서도 활약하셨습니다.
 

 

 

 

한국 아나운서 클럽을 결성,

회장으로 아나운서들의 친목을 도모 하면서

마음의 끈을 이어주는데도 힘을 기울였고 원로방송인
모임인 사단법인 한국방송인 동우회 (방우회)
 부회장을 지내시기도 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조화로운 체격에 언제나

 잘 어울리는 복장을 갖추어 말쑥한 모습으로

지금도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2011년

9월 30일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 기념 행사가 있던날 KBS

 아나운서실을 들렸더니 2010년 새내기 아나운서들이 인사를 
하러왔기에 기념사진을 촬영했습니다.
아나운서 클럽 김규홍
부회장, 황인우 회보 편집장과 이슬기, 조중현, 김민정,
상헌, 정지원 새내기아나운서가 함께 했습니다.
     

 

 

방송 1959년 가을 호에 게재 된 

 

황우겸 아나운서 글 한편을 옮깁니다.

 

 

  제2회 야구대회 (1955년 12월)가 열린  
필리핀 마닐라 시는 먼 곳이기 때문에 관연 내목소리가  
국내에까지 들릴 수 있을까. 반신반의 했었다. 경험이 없는데다
 전파에 깊은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아나운싱을 잘하려는 욕심 때문에
 내 목소리가   고운 상태로 수신될 수 있을까. 가 걱정되어 처음 등장하는
 국외서의 중계방송에 소리를 너무 크게 질렀었다. 더욱이 경기장에서 
시시각각으로 진전된 4개국의
 
희비 얽힌 장면 묘사에는 흥분
안 할 수가 없었고 민족의식을 북돋우느라 냉정을
 찾지 못하고 마구 큰 소리를 질렀었다.

    후에 생각 해 보니 잘한 중계방송은
못된 듯 해 
 
웃음이 절로 났다. 마닐라에는 윤길구
선배를 모시고 갔기 때문에 
 
불안스럽지 않았지만 기후와 음식이
맞지않아서인지 그곳에 도착한 날부터
 
병석에 눕게 되었다. 물론 윤길구
선배 혼자서도 중계방송을 잘 할 수는 있었으나
 
외국에서 중계라는 책임감
때문에 나는 연방 주사를 맞아가면서 방송을 하게 되었다.
 
정신 차릴
사이 없이 접전하는 우리 대표 팀과 필리핀과의 대전 때 우리
대표 팀이
  
리드 하다가 역전 당하기를 서너 번…….
분통한 장면이 연이어 전개되지 않은가. 
 

가뜩이나 몸이 아파 짜증도 나는데
우리 선수들이 공연한 실수로 역경에 
 
빠지게
되니그 순간 메모하던 만년필을 나도 모르게 휙 내 던져 

버렸다. 국제경기의 경험이 없었던 경솔함이었다.
    그러나
제3회 아시아 경기대회 (1959년 9월 동경) 때는 
 
4년 전 미흡했던
점들을 무난히 해 낼 수 있었다. 그 예로 동경 대회 때는
거리가
가깝다는 요인도 있었지만 내가 중계하는 것이 곧 송파 되는
것을 수신하면서 
 
방송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마닐라 대회
때처럼목소리를 높여 고래고래 소리 지르지
 
않았거니와
마이크 감도 조절을 생각하면서 아나운싱
할 여유도 있었다. 
 

 

또한 마닐라 대회 때는 승패에만
주안을
두어 감정에 휩쓸린 흥분상태였으나
동경대회에서는
20대 1이라는 큰 차로 입본에게 참패
당할 때도 아나운서로서
 끝내 감정을 사로잡히지 않고 
침착성을 잃지 않았던 것은 역시 경험이 말 해주는 것이었다.
러나 국제 경기에  우리 팀이 일방적으로 압도당해
패해가는 께임
내용을 중계 할 때는  아나운서의
심리도 무척
비참하고 괴롭기만 했다.

 

 

 

동영상 보기

 

 

동영상을 보시기 전에 음향을 끄셔요.

 

 

 

 

   

 

 

 

 

 

 

위 아래사진은 KBS저널

편집장을 맡았던 한지은기자가

황우겸아나운서를 취재할때 촬영한 

사진을 보내주어 올렸습니다.

 

 

   

 

 

관련글 보기 영문자 클릭  

 

 

1951년 동기 아나운서 황우겸, 강찬선 임택근,

http://blog.daum.net/jc21th/17780813

 

 

화      보

 

 

  당당신의 판단은 프로그램 제작 광경

 

 

 

황우겸 아나운서와 함께 입사한

임택근, 강찬선, 이수열, 방우회 문시형

회장님이 함께 했습니다.

 

 

  

 

한국 아나운서 클럽에서  2004년 아나운서 출신 국회의원 당선자

 한선교, 박찬숙, 이계진의원을 초청 환영연을 열고 촬영한 사진입니다.

   

 

  1959년 문화인 야구대회에서 우승한 KBS야구팀이
 방송국 직원들과
 함께 한사진입니다. 이운용 중앙방송국장을
비롯해서 노정팔 방송과장, 강찬선, 박종세아나운서,
 성우 오정한님등
이때의 많은 방송국 직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958년 봄 남산 중앙방송국 스카이라운지에서 촬영한

 사진입니다. 민병연 아나운서와 장기범 아나운서실장을 비롯한

아나운서들, 그리고 이승만대통령의 아들 이강석이 함께 한 사진이다.

1.최두헌,  2.유창경, 3.최세훈, 4.한경희,  5.민병연, 6.문복순, 
7.황우겸,
 8.장기범, 9..이강석, 10.강익수, 이강석은 
틈이나면 남산에 있는 방송국을
들렸다. 이강석과
 남산의 방송인들과 촬영한 사진이 많다.

 

 

명사를 찾아서 프로그램을 위해 채신부장관과
인터뷰하는 황우겸 아나운서입니다.

 

 

 

 KBS TV 50년 특집방송 12월 31일
오전 9시 40분무터 방송한 생방송 남산 송신소에서
방송을 하셨습니다. (위 아래사진)

 

 

  KBS TV 50년 12월 31일 오후 7시 10분무터
스포츠 50년 특집방송에 참여 하셨습니다. 

 

 

앞줄 왼쪽에서 네번째 황우겸 아나운서

  

2014년 4월 7일 박종세 아나운서

 조형미술의 선구자 최만린 선생님 현대미술관 초대전에서     

앞줄 왼쪽부터 문복순, 박종세, 황우겸,

 최만린, 박찬숙, 뒷줄 왼쪽부터 윤영중, 황인용, 

이헤옥, 박민정, 이혜옥, 김규홍 아나운서

   

왼쪽부터 문복순, 탤런트 김민자, 최불암 내외분,
김규홍, 박찬숙, 황우겸, 윤영중아나운서 

 

 

 황우겸 원로아나운서와 김동건

 

 

황우겸 아나운서와 박종세 아나운서

 

KBS TV 50년 개국에 참여 하셨던
분들이 만나 그날을 기기셨습니다. 2011년 12월 31일

사진은 개국요원 황우겸아나운서를 비롯해서 연출가
황정태, 엔지니어 정항구님입니다.

   

2012년 6월 13일 6.25 첫방송 아나운서와 함께 한 원로방소인입니다.

시계방향으로 황우겸, 위진록, 한영섭. 홍기욱, 임택근님입니다,


 

2021년 5월 2일 쓴 글

 

어제 큰상자 두 개가 택배로 배달되어
열었습니다.
황우겸 선배님으로부터 보내오신
일생동안 모으신 방송 사료였습니다.
황우겸 선배님이
KBS-TV 창립요원으로 또 초대 아나운서실장으로 직접
체험하고 자료를 모아 쓰신 「바보상자」가 몇 겹의
종이봉투로싸인 체 들어 있었습니다.

이 바보상자는 오래전 제가 좀 빌려 주시라
했을때도 절대 안 된다고 하셔서 겨우 복사를 하고
돌려 드린 적이 있는데 그 바보상자를 보내주셨습니다. 물론
저에게주신 모든 방송 사료는 제가 활용하고 방송박물관이
설치되면 거기에 다 돌려 드릴 것이지만 어찌되었던
그 고마움이야 어찌 해아 릴 수 있습니까.

오래 전 KBS저널 한지은 기자가 원로방송인
한 분 추천 해 달라는 의뢰가 와 서슴지 않고 황우겸
선배님을 추천했을 때 그 한 기자가 취재하면서 촬영해서 넘겨 준
자료사진도 저에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벌써 10년 정도의 세월이
지난 이야기입니다.     황 선배님은 저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자식들에게 유언을 했어,     내가 간 뒤 나 보고 싶고
내 목소리 듣고 싶거든 춘하추동방송에 들어 가 보아라.」
하셨다는 거예요. 저에게 얼마나 큰 힘을 주셨는지
몰라요. 김규홍 부회장님도 함께 들었어요.

오늘은 이만 하고 기회 될 때마다
보석 같은 사료를 활용하도록 하겠습니다.
황 선배님,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선배님의 뜻에
따라 잘 활용하고 또 영원히 보존 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황우겸 원로아나운서님 임국희 회장 축사.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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