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이장춘 2015. 3. 23. 11:19

 

 

 

방송인 서규석(徐圭錫)님! 1958년부터

1990년대까지 길고 신 세월,  방송과 함께 해

오면서 방송역사에 큰 발자국을 남기신 분입니다. 마침

MBC사우회 (회장 김수량, 사우회보 편집장 김상옥) 가  창립

25주년을 맞아  특별기획으로 사우회보 28호 (2015년 3월 15일 발행)에

서규석선생님과의 인터뷰 글을 싫었기에 춘하추동방송에도 함께 올릴 수 

있도록 요청했던바 기꺼이 응락 해 주셔서 고마운 마음을 담아 올립

니다.  2005년 방송인 명예의 전당 헌정식에서 선생님의

육성과 추억의 사진을 골라 함께 올립니다.

 

 

방송인 서규석,  MBC문화방송 사우회 제공 

-대담, 정리-MBC사우회보 편집장 김상옥-

 

 

 

 

-젊은 시절은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고 려 대 법 대 2 학 년 때 6.25가 나서

 통역장교로 복무했는데, 휴전이 됐는데도 보내주질

않아 그래서 1955년에야 예편하고, 다시 학교 로 돌아가

그동안의 공부에 대한갈증 때문에 2년 동안 매일 하숙집-강의실

-서관 생활만 했더니 폐결핵에 걸려서 친구의 주선으로 마산요양소

에서 1년 정도 치료받고나았어요. 서울로 올라와 ‘女苑’사에 잠시

근무하면서 당시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 ‘닥터 지바고’의

 번역대조와 출판에도 참여하고 그랬지.

 

 

-방송과의 인연은 어떻게 맺게 되셨나요?

 

1958년 어느 날에 공보실에서 3급 공무원을

공채한다는 소식을 듣고 응시했는데 엄청난 경쟁 속에

 4명중의 한명으로 합격해서 1959년에 방송관리국 관리과

 사무관대우 촉탁이 돼서 ‘방송문화연구실’에서 근무를 했어요.

여기는 방송의 제도, 편성, 제작 등 모든 분야에 걸친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 연구기관이라서 방송에 관해 본격적인 공부를

하는 계기가 됐는데 월간지, 주간지, 모니터誌 등을

발행하느라고 척 바빴어요.

 

1961년에 서울중앙방송국 편성계장으로

 2개월 근무하다가 콜롬보플랜에 의해 호주에 가서

 6개월 연수를 받게 됐는데, 이때 호주방송(ABC)에 대해

자세히 공부하게 됐지. 1963년 공보부 지도계장을 하는 중에

당시 민방들의 프로그램 내용에 대한 비판여론이 높아서

자율적인 기구로 ‘방송윤리위원회’(위원장 姜元龍)를

 조직하고 그 뒷바라지를 내가 했어요.-

 

 

공보부 계실 때 승진을 사양한 에피소드가 있던데요?

 

그게, 어느 날 고등학교 동기인 임성희

(前 중앙대 총장)씨가 장관으로 왔는데, 같은

층에서 매일 보는 게 불편했던지 날 승진시켜서 KBS

의 TV편성과장(서기관)으로 보내려한다고 인사과장이

귀띔을 하는 거야. 그래서 장관실로가서 “내가 공채로

들어왔는데 동창이 장관으로 왔다고 내가 좋은 자리로

 가면 그 꼬리표가계속 내게 붙어다닐 거 아닌가.

호의는 고마우나 난 싫네”라고 사양했는데

그 얘기가 어떻게소문이 났어요, 허허

 

 

-MBC에 오신 때가 1964년이셨죠?

 

그렇죠. 당시 MBC에서는 회사가

5.16장학재단으로 편입되는 것에 불만을

 갖고 있던 직원들이 꽤 많았던 상황인데, 三星이

‘라디오서울’이라는 民放을 시작하면서 좋은 조건을

제시했는지 정환옥전무를 비롯해서 많은 직원들이

그쪽으로 옮기는 바람에 회사가 초토화됐어요. 사실은 내게도

 그 쪽에서 오라는 권유가 있었는데 나로서는 첫째, 방송이 일개

 私企業의 앞잡이가 될 것이 뻔한데 내가 거기에 충성해야하는

상황이 싫었고, 두 번째는 내가 공보실에 있을 때 함께

 근무했던 金某씨가 거기 조직책임자로 있었는데

날더러 와서 조사업무를 라는 거야

일언지하에 거절했지.

  

또 하나, 당시 全모라는 공보부장관이

 경향신문 ‘여적’의 필화사건을 빌미로 신문을 폐간

시킨 뒤 전 직원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경향신문이라는

호랑이를 내가 가진 권총으로 사살했다”고 호언하는 모습을 보고

‘장관이라는 사람의 언론관이 저런 수준인가’하고 엄청 충격을받아서

‘이런 정부에서 공무원을 해야 하나?’라는 회의감에 젖어있던 때였어요. 

그런 상황인데 MBC에서 편성책임자로 오라는 제의를 받으니까 나로서는

 “장학재단이 운영하는 방송국 이라면 ‘방송의 공공성’을 발현하는데

 더 적합하지 않겠나”라는 생각 때문에 흔쾌히 수락한거지요.

박종민씨랑 둘이서 고원증사장을 만난자리에서 “나는

 직위나 직책을 따지지 않겠다. 다만 좋은 방송을

할 것인지만 약속해달라”고말했어요.

 

 

 

 

-MBC에 오셔서 처음 하신 일은 뭐였나요?

 

와서 봤더니 한마디로 쑥대밭이더라구.

간 사람들이 당장 내일 나갈 방송 테잎도 안

겨주고 가서 펑크가 나게 될 지경이었어요. 이성규

아나운서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방송을 하는데

도무지 들어줄 수가 없어.   당시에는 아나운서가 회사의

 얼굴인데 얼굴이 없으니어떡해. 할 수없이 옛날에 근무했던 

인연으로 KBS로 갔지.    고려대 선배 장기범 아나운서

장을 만나 ‘새로운 출발’을 해보지 않겠냐고 권

했더니 “나도 생각은 있지만 명색 KBS의

 간판인데 어떻게 옮기나”고 사양해요.

 

 그래서 “그러면 후배 중에서 누구를

 데려가도 허락해주겠소?”했더니 “그러라”는

 거야. 그런데 다음 날엔가 임택근 아나운서가 ‘만나자’고

 연락이 왔어요. 종로2가 YMCA 지하 다방에서 만났더니 “MBC

로 오라는 제의를 받았는데 아시다시피 우리는 회사의 ‘얼굴마담’이니까

 거기에 걸맞는 대우가 필요하다. 모든 기획이나 실무는 서兄이 하시되

 대외적으로 필요한 타이틀을 내게 줄 수 없느냐.”라고 ‘신사협정’을

 제안하는 거야. 그래서 고 사장에게 가서 “회사에서 당장 필요한

 사람이 아나운서인데 임택근씨가 명분만 주면 오겠다고 하니

 그에게 방송부장을 주고 나는 차장으로 일하겠소”라

고 했더니 내 손을 움켜쥐면서 “그렇게 해주면

 정말 고맙겠다”고 반색을하는 거야.

 

그렇게 해서 임택근씨가 MBC로

는데 여담이지만, 그 때의 ‘신사협정’이

그 분과 일하는 동안 줄곧 지켜졌어요. 80년도

 해직 당할 때까지 여러 직책으로 그 분과 어울렸

지만일하는데 있어서만큼은 내 의견을 늘 존중

해주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어요.

 참 확실한‘신사’였지.

 

 

-1964년 개편 때부터 편성이 종전과

는 확연하게 달라지던데요?

 

솔직히 말하면 그 당시 편성은

일본 민방의 복사판이었지. 음악, 코미디,

 공개오락이 주축을 이뤘고 프로그램의 제목도

예컨대 ‘석양의프롬나드’ 식으로 겉멋에 치우친 것들이

수두룩했어요. 이런 오락 프로그램을 줄이면서 당장 필요한 게

 편성의 기본 틀을 세우는 건데, 내 평소의 지론은 ‘나라가 분단된

 상태에서 대중매체가 해야 할 역할 중의 하나는 ‘한국의 근대화’를

이루는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이른바 계몽사상이라고

 할까. 당시의 근대화는  8할이  농민인 이 나라에서 가급적  농민의

숫자를 줄이고 사회도 대중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라서,

그러자니 교육적, 교양적인 내용이 주를 이룰 수밖에.

 

대표적인 게 농어촌 대상 프로그램 ‘

밝아오는 우리마을’인데 이프로그램 하나를

 위해서 농촌진흥청 연락관이상주하다시피 했어요.

조증출사장이 와서는 이프로그램에 특별한 관심을 보여서

 본인이 밖에 나가 홍보도 하고 아는 분들을 방송에 소개하고

 했지. 자문위원회도 만들고....상업방송치고는 방송규모가 KBS를

능가할 정도였으니까.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대상방송’을 시작했는데,

새벽에 “밝아오는..”을 방송하고 아침이되면 “영이네 집”이라는

대화극(對話劇), 출근시간에는 “푸른 신호등”에서 교통

정보와 문제점을 토론하는 등 탄력성 있

 편성을 꾸렸어요.  

 

오락도 경박하지 않은

 ‘한밤의 음악편지’라든지 ‘고전의 향기’,

‘일요잡지’ 등을 심었고. 그때 내가 가장 역점을

 뒀던 게 ‘절망은 없다’라프로였어요. ‘폭풍이 지난

들에도 꽃은 피고지진에 무너진 땅에도 맑은 샘은 솟아

흐릅니다’로 시작되는 ‘절망은 없다’는, ‘절망’이라는 否定을

‘없다’라고 다시 한번 否定하는 즉 ‘부정의 부정’의 철학이 담긴

프로그램으로 처음엔 취재해서 방송하고 이어서 소재공모를 했는

데 절망을 극복한 갖가지 사례들에 대한 반응이 폭발적이어서 회사의

 품격도 높이고 청취율도 올리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어요. 처음 편성

제안할 때 경영진에게 ‘自主放送(sustainingprogram)'을 하자고 시작한

 거라서 광고가 없었는데 인기가 올라가니까 광고주들이 난리가났어요.

할 수 없이 나중에 유한양행 단독 스폰서를 붙인 걸로 기억나는데

박수복, 김진희, 최원PD들이 애를 많이 썼지요. 나중에 책으로

왔는데 내가 총무국장 하면서 판권도장을

찍어준 게 생각나네.

 

 

-다음 해에 駐日특파원으로 가신 거죠?

 

초대 정순일씨 다음으로 일본 특파원이

됐는데 조증출사장께서 하시는 말씀이 “뉴스야 뭐

통신이 잘 전하고 있으니까 당신은 가서 장차설립할 TV에

관해서 공부 좀 해와요”그러더라구. 근데 내가 일본에

가는 것 관련해서 어이없는 說이 있었어요.

 

 

 

 

당시 尹전무라고 새로 왔는데 그 분이

출근부를 수위 앞에 놔두고 사원들에게 거기

다 도장을 찍으라고 한거야. 마치 수위가 감시하는

 격이 된거지. 그랬더니 어느 날 사원들이 내 방에 와서

 ‘모욕적인 조치라서 앞으론 출근부에 도장 안 찍겠다’고

 반발하는데 나도 뭐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어요. 그랬더니

위에서는 ‘서 아무개가 사주한 거 아닌가?’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야. 그래서 찍혀서 일본으로 간거다 이런

 소문도 있었는데 그건 아니고. 암튼, 일본에

 있으면서 일 참 많이 했어요.

 

틈나는 대로NHK,TBS,후지TV에

가서 제작현장을 답사하고 조직 현황도

살펴보면서 TV공부를 많이 했지. 당시 우리나라

에서는 팝송 음반을 구하기 어려워 일본에서 구입하곤

 했는데 음반 조달업무도 직접 했고, 이 종환씨가 진행하는

 ‘세계의톱싱거’라는 음악프로그램에서 일본을 연결하

면 내가 받아서 당시 일본의 팝송 인기순위를

전해주고 그 음악도 보내주는

식의 리포터도했어요.

 

 

 -2년 후에 돌아오셔서 편성국장이 되셨죠?

 

그렇지. 여담인데, 정순일씨와 나는

방송문화연구실 때부터 나중에 방송위원회까지

다섯 번에 걸쳐서 자리를 주거니 받거니 했어요. 1967

년에 서울로 돌아와서 또 그 분이 하던 편성국장을 맡게 됐지.

 그 무렵 TV개국이 임박하다보니까 TV준비위원회에서 기간요원을

 뽑는데 라디오 사람들 가운데 유능한 친구들만 골라간단 말이야.

그렇게 되니까 라디오가 제대로 안되겠더라구. 그래서 조사장에게

“사장님, 라디오 PD 열 사람만 뽑게 해주시고 저에게 3개월만

시간을 주세요. 그러면 3개월 이후에는 누구를

 데려가도 좋습니다”라고 했지.

 

그렇게 라디오PD 2기생 열 사람을

한꺼번에 뽑아서 맹훈련을 시켰어요. 그 중에

 고무송씨 같은 분은 신문사 기자를 하다가 온 사람인데

인쇄매체에서 온 사람은 방송에 대해서 뭔가 허허로움을

느낄 것 같더라구. 그래서 라디오 매체는 이런메리트도 있다는

 뜻으로 롱펠로우의 詩   “화살과 노래”를 일부러 들려줬는데

나중에 얘길 들으니 그게 그렇게 인상적이었다고 하드만

. 암튼 그 열 사람 중 명도 TV쪽으로는 안갔고이들이

결국 TV시대에 라디오의 중심 인력이됐어요.

 

 

-TV개국 임박해서는 TV편성국장으로 가셨구요.

 

그렇지. 정순일씨하고 또 자리바꿈을

한건데 TV편성국장은 오래 못했어요. 왜 그런고니

TV개국요원을 뽑는데 나는 가급적 이쪽 직급과 맞는 사람들을

 선별적으로 스카우트하려다보니까 시간이 좀 걸린단 말이지. 근데

경영진에서는 ‘아니, 개국은 다가오는데 언제 다 하려고 하느냐’면서

 어느 날 TBC에서 이기하씨 외열 몇 명을 무더기로 데려오는 거야. 내가 뒤

통수 맞은거지. 게다가 이기하씨가 국장급이라서 대우를 해야 한다고 TV제작국을

신설해서 그이를 국장으로 하고 나는 편성국만 하는 걸로....그렇게 되니까 내부적인

 반발도 있었고 나도 경영진과 갈등이 생길 수 밖에. 경영진과 갈등이 생겨서 내가

 이틀인가 회사를 안 나갔어요. 그랬더니 조사장이 좀 보자고 하더라고. 그

 만나서 “좋은 사회 만들자고 하면서 이런 야바위 짓까지 하면서 TV를

 하면 뭐합니까?”라고 사정없이 대들었지. 그랬더니 “당신 기분은

알겠다. 일본 속담에 ‘능력있는 매는 발톱을 감춘다’는 말이

있어. 다른 생각 말고 낼부터 나와” 그러는

 거야. 할 수 있나, 내가 졌지.

 

 

<국민훈장 석류장 수상 후 이환의 사장,

임택근 전무와 함께>

 

 

-총무국장과 관리국장도 하셨나부죠?

 

그게 글쎄, 정동으로 사옥을 옮긴 뒤에,

당시경리부와 자재부에 조사장과 가까운 사람을

 책임있는 자리에 앉혔었는데 두 군데 모두에서사고가

 발생한 거야. 어느 날인가 사장이 날 부르더니 ‘당신

총무국장을 좀 맡으라’고 간청하는 거라. 내가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라’고 하면서 두 번이나 거절했더니 일방적으로

발령을 내버리더라구. 한술 더 떠서 관리국장까지 겸직이야.

 할 수 없이 두 가지 일을 하고있는데 하루는 지하 기계실

방수가 잘못돼서 비상 발전기에 물이 들어가는

바람에 몇 초간 정파사고가 있었어요.

  

관리국장이 책임을 져야 할 거 아냐.

그래 징계위원회를 열어 2개월 감봉을 결정해서

공고를 했는데 그렇게 되니까징계를 당한 사람은 관리국장

서규석, 징계 사 항을 공고하는 사람은 총무국장 서규석, 이렇

게 되는 웃지못할 사연도 있었어요.   총무국장으로 있을 때는

 정동 사옥 건설할때  끊었던 어음이 매일 돌아왔는데   조사장은

돈 문제에 대해서는 완전 ‘나 몰라라’하니까 갚을 수가 없는 거야.

 할 수 없이 김석겸전무랑둘이서 재무부 이재국장을 찾아가서

 “방송국이부도가 나는 꼴을 보고만 있을거요?”하고 협박

반 애원 반으로 매달려 겨우 돈을 융통해서 여

러 건의 어음을 해결할 수 있었지.

 

그래도 빚이 정리가 안됐는데

이환의사장이 와서 이후락씨의 도움을

 받아 MBC 주식을 열 개 기업들에게 강제로 인수

시켰고, 그 바람에 나중에는 흑자가 나서 세금을 22억

 냈다고 사원들이 ‘자랑스런 22억’이라는 리본으로 비꼬는

일도 있었어요. 암튼 흑자로 전환된 것이 나중에 경향신문

을 인수하게 되는 빌미가 되기도 했지. 총무국장 시절에

 했던 일 중에 회사의 모든 규정들을다 뒤져서

재정비한 것도 업적이라면 업적이라

고 볼 수 있지 않을까.

 

  

-1년 후에 다시 TV로 옮기셨죠?

 

이기하씨가 모종의 문제로 퇴사를 하자

TV제작국장과 편성국장을 합쳐서 TV총국장으

만들고 거기로 간 거지. 이때에 했던 일들이 많은데, 뉴스를

제외한 모든 프로그램의 제목을 우리말로 정한 거라든지(예: 웃으면

복이와요) 심야에 하는 ‘명교수 명강의’에 출연하는교수들에게는

출연료를 악 소리나게 드린다든지, 허허.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개국 초기에는‘사랑하는 갈대’라든지 ‘개구리 남편’ 같은

적으로 비난을 받은 드라마가 많았는데, 나는

그런 드라마 대신 일상의 생활을 그리는 건전

한 홈드라마를 하고 싶었어요.

 

 주일특파원 때일본TV에서 방영된

홈드라마를 재미있게 봤던 기억도 있고 해서

 김포천씨, 김수현씨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여 만든 게

 김수현씨의 ‘새엄마’라는 드라마였어요. 내용은, 새 엄마가 한

가정에 들어가서 그 가정을 부흥시킨다 뭐 그런 평범한 얘긴데

 그러다 보니까 주위에서 ‘그런 게 먹히겠냐’고 많이 우려를 하는 거야.

래서 내가 그랬지.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실패해도 좋으니까

 실패를 겁내지 마라’. 이건 내지론(持論)인데 “윗사람에게는

 내게 실패할 수있는 자유를 주시오. 아랫사람에게는 모든

임은 내가 질테니 옳다고 믿는 바를 밀고 나가

라”. 이게 한 조직의 리더가 갖춰야 할

덕목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암튼, 그렇게 해서 ‘새엄마’가

 나가게 됐는데, 맨날 치정과 갈등에 얽힌

드라마만 보다가 쌈박한 드라마를 보니까 신선

했던지 당장 신문評이 달라지고 요즘 말로 대박이

 난 거야. 근데 이 드라마 땜에 이환의사장과 갈등이

 생긴 게, 당초 예정은 100회였는데이게 뜨니까

 사장은 연장하자는 의견이고, 는 일단

100회로 끊고 다른 드라마를 하겠

다는거로 여러 차례 다퉜어요.

 

  

<방송문화상 수상식장>

 

 

-꽤 오래 했던 걸로 기억나는데요?

 

그럼. 장장 411회까지 갔으니까 오래 했어요.

그 이후에 같은 작가의 작품 ‘신부일기’‘강남가족’ 등이

연속적으로 인기를 얻으면서 ‘홈드라마’라는 장르가 자리를

잡았다고 볼 수 있지.근데 작가가 홈드라마만 쓰다보니까 지루

했던나중에 ‘청춘의 덫’이라는 멜로드라마를 썼는데 불과

 몇 회 만에 ‘윤리의 덫’에 걸리고 말았지. 허허.

 

 

-RR30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만드셨는데요.

 

그게 1 9 7 3년인데, 회사가 TV개국

하느라라디오 쪽에 신경을 덜 썼더니

청취율 사가 형편없게 나왔나봐. 사장이 부르더니

‘가서 라디오 살려내라’는 거야. 그래서 다시 라디오국장으로

갔지. 가자마자 ‘RR30’(RadioRenaissance로 청취율 30%를 이루자)을

 기치내걸고 SONY社가 신제품 개발할 때 쓴다는법을 원용했어요. 뭐냐면,

토요일 오후에 전직원을 회의실에 모아서 몇 개의 그룹으로 나누고, 주제를 정해서

그룹에 속한 각자가 의견을돌아가면서 개진하는 거야. 나온 의견들을 여러 장의

 카드에 익명으로 모두 기재한 다음에그걸 모아서 몇 개로 분류해서

 정리하면 어느정도 문제점의 윤곽이 나온다 이거지.

 짧은 시간에 한 것치고는 효과가 좋아요.

 

 

-그래서 나온 문제점들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당시 회사의 관심이 TV에 쏠리다 보니

라디오는 완전히 무풍지대가 돼서 해먹고 싶은 거

다 해먹고, 특히 일부 간부들의 행태를 예로 들면 ‘내일이

 내 딸 생일이야’라고 직원들에게 공표하는 사람도 있더라구.

그래서 내부적으로는 그런 부정적인 요소를 정리하고 외부적으로는

라디오와 국민들과의 접점을 찾는 일에 주력했지. 그  때 나온 게 

‘가을맞이 가곡의 밤’같은, 방송도 되고 사업도 되는 일이었어요.

 암튼, 30%취율 달성은 다 못했지만 새로운 기풍, 라디오의

 활력소를 찾는 일 등은 큰 수확이었어요.

 

 

-MBC의 사시(社是)를 고문님께서 지으셨다면서요?

 

이환의 사장이 오셔서 간부사원들을

대상으로 사시 공모를 했는데 난 평소 ‘매스컴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던 ‘자유, 책임, 품격’을 쓰고 설명까지

 덧붙였어요. 그런데 내 기억에, 같이 있던 박근숙씨가 ‘나라가

 분단상태이고 사회통합을 이루는데 언론도 큰 역할을 해야 하니

까 단합을 추가하면 좋겠다’해서 ‘자유, 책임, 품격, 단합’이 사시로서

 오늘까지 내려오고 있는 거지. 지난번 신사옥에 가보니까 로비에 ‘飮水思

源’을 크게 써놨던데 그것보다는 社是를 거기에 걸어야 한다고 생각

해요.  내가 ‘자유, 책임,품격’을 거론한 뜻은 그것이 매스컴이

져야할 ‘정신’인 동시에 실천을 통해 그것을 우리 것

으로 만들자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거든.

 

 

-임원이 되신 때가 1974년이죠?

 

라디오국장을 하던 어느 일요일에

 등산을 갔는데 사장이 좀 보자고 하더니 ‘이번

주총에서 당신을 이사로 선임하려고 한다’고 통보를

 받았어요. 그때 두 사람이 이사가 됐지, 나는 내가 방송담당을

하겠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사장이부르더니 ‘당신은 총무국장도

해봤고 하니 기술과 관리담당을 시킬테니 양해하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아니 제가 언제 뭐 시켜 달라고 한적 있습니까? 그렇게

하시죠’라고 대답했는데, 그런 일이 나중에 경향신문 합병

했을 때도 반복됐어요. 신문담당 이사를 정하는데 전혀

문 경험이 없는 날더러 신문담당을 하라고 하면서

 또 양해를 구하는 거야.   어이가 없었지만

‘저는 여러 분야를 하니까 좋습니다.

 

제가 언제 뭘 시켜달라고 합디까?’라고

 허허 웃었지. 사실나는 회사에 근무하는 동안은

언제나 주인의식을 갖고 임했기 때문에 보직에

대해서는 크게신경 쓰지 않았어요. 뭐든

열심히 한다는 생각이었지.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시절>

 

 

-신문담당 이사를 하시면서 애로가 많으셨죠?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제일 큰 문제가

봉 조정문제였어요. 당시 MBC는 근무년수(年數)에

따른 호봉을 받고 있었는데, 초도순시 때사장이 신문도 MBC와

 같은 호봉을 적용하겠다고 별 생각없이 약속을 해버린 거야. 근데

향은 오래 된 신문이다 보니 근무기간들이 많잖아? 호봉 조정하던

 관리 쪽에서 난리가 난거지. 너무 차이가 나거든.     그걸 조정하느라고

1월 초부터 시행하려던 계획이 4월로 미뤄지니까 신문 쪽에서 또 야단이야.

내가 그 차액을계산해보니까 몇 백이 나오더라고.  그래 가불증을 써서

조용중전무와 내 도장을 찍은 다음에 전재옥 관리상무에게 ‘현금으로

이 돈을 가해주시오’해서 받아가지고 편집국장에게 전해주는

 것으로 해결을 했지. 그러다가 방송담 당 상무로 가게 됐고

 그게 MBC에서의 마지막 보직이었어요.

 

 

 

<후기>

 

 

1980년, 서 고문께서는 신군부에

 강제로 방송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실무에능할 뿐 아니라 끊임없이 공부하는 방송인으

 유명한 그를 대학들이 그냥 놔둘 리가 없어서 이후 18년간은

 교수님으로 변신했고, 1988년 방송위원회 상임위원을 시작으로

 시청자불만처리위원장,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MBC시청자주권

위원장 등 방송계의 요직을 섭렵하시고 2004년에 ‘방송인 명예의 전

당’에 오르셨다. 1929년생이지만 아직도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

등산을 즐기고 방송에 관한 얘기에 열을 올리는 ‘영원한 청년’

서규석고문님의 만수무강을 기원합니다.

 

 

대담.정리: 편집장 김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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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추억의 사진을 골랐습니다.

 

 

  

 

  

2009년 제 6회 방송인 명예의 전당 헌정식에서

 

 

 

1968년 제 11회 방송문화상을  수상하고

 

 

 

2014년 문공회 송년회, 서규석님과(가운데)함께  전영효님

 

 

 2013년 문공회 송년  이종봉, 김종설, 한영섭, 성낙승, 이철호, 이시우, (     ), 원용철, 서규석님

 

 

 

 

2013년 문공회 송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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