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이장춘 2015. 5. 26. 18:10

 




유투브에서 보기 https://youtu.be/q58oe4HKErQ

 

 

김천애 金天愛! 1940년대부터 봉선화를

 비롯해 수많은 주옥같은 노래로 한겨레, 한민족의

 가슴을 울리며 마음을 모아 온 천재성악가다, 그 김천애로부터

악을 전수한 민동옥! 그는 1962년 김천애가 교수로 활약하던 숙명

여자대학교 음악과를 찾아 음악을 공부하고 그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랜세월 그 마음은 김천애와 함께한다. 그런 인연으로 민동옥은 춘하추동

방송에 글을 쓰는 이장춘과 만났고.  이 만남으로 오랜 세월  김천애가 부른

「봉선화」,  「그리운 강남」,「애국가」를 들으며   그의 삶을 생각해 오던 

 이장춘은 민동옥과 더불어 춘하추동방송에 더 깊고 넓은 김천애의 얘기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지금도 필자의 귀에는 김천애의 봉선화, 그리운

 강남이 수 없이 반복되어 들려오고 있다. 들으면 들을수록

감동이 오고 더 듣고 싶어지는 노래다

 

 

김천애와 민동옥 천재성악가 방송음악프로듀서

 

 

1919년 6월 11일 평안도 강서에서

김진탁 목사와 윤태화 권사의 장녀로 태어나

평양 정의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일본유학길을 떠나

음악에 뜻을 둔 우리 동포들이 많이 찾던 일본 무사시노 대학

(校)갔다, 대학에 다니던 시절 민족 신문 조선일보사

개최한 1940년 신인음악회에 당당히 입선했다. (조선일보 50년사

 p375) 이 음악회는 1940년 8월 10일 조선일보 폐간으로 3회에

 그치고 말았지만 대한민국 음악계에서 이름을 떨친 이경희,

 이관옥, 김동진, 김순복, 김형로, 이진섭, 김자경 등,

이 음악회에서 데뷔한 음악가들이다.

 

 

 

 

김천애란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그가 1942년 일본 무사시노음악학교

(校) 졸업하던 때  히비야 공회당(

堂) 「전일본신인음악회(會|에서

「봉선화」를 불러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 

봉선화는 원래 1920년 홍난파가 「애수」라는 노래에 붙혀 연주

되었던 곡을 1925년 홍난파와 이웃에 살면서 함께 활동했던

 김형준 봉선화 가사를 쓰면서 여기에 곡을 옮겨 붙여

 연주되어온 곡으로 이때 김천애의 노래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아래 민동옥이 작성한

김천애 연보 1942년 참조

 

 

 

아래는 민동옥이 작성한 김천애의 초기 연보.

 

 

 

 

1942년 일본무사시노 대학교 성학과

최 우등으로 졸업한 김천애는 그해 전일본 음악

 콩쿠르에 참가해서 성악수석 입상하는 영예를 차지

하면서 전 아시아 성약계에 혜성같이 나타난 것이다.  국내에

 돌아와 현제명 등과 함께 활동했다. 1943년 현재명박사, 테너 이인범,

 앨토 김혜란,  베이스 정영재, 등과 함께   4중창단 및    현악 4중주단으로

경성후생악단을 창립,  한국,  일본,  만주 등지의 각 도시를 순회 공연해서

 명성을 떨침과 동시에  전 아시아 최고의 악단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경성 후생악단에서 만난 이가 바로 김생려로 길고 긴 세월 깊은

사랑과 미움으로 이어지면서 남다른 삶이 이어졌다. 

 

 

 

 

김생려는 1939년 JODK교향악단 악장으로

취임, 1941년 홍난파  사망후에도 악단을 살리려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2차대전과 맞물려 악단 운영이 유명무실해지자

  결국 JODK 교향악단을 뒤로하고 본인의 주 연주악기 이올린을 들고

 경성후생악단 현악 4중주단 일원으로 참여한 것이다.  경성후생악창립운영에

주도적 역할을 한 현제박사와는 연희전문하교 교수시절부터 부터 깊은 인연이

 있었다. 경성후생악단에서 김천애는 가는 곳마다 무사시노 졸업 「전일본신인음악회

에서  선을 보여 참여자들의 가슴을 뭉쿨하게 했던 봉선화를 불러 나라잃은 설움에 신음

하던 동포들의 울분을 달랬다. 김천애에게는 일본경찰의 감시 눈초리가 집중 되었고 

노래의 핵심인 3절을 부르지 못하도록 강요받기도다. 아래는 현제명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있던    1932년 연희전문 4중창단이   경성방송국 방송출연을 하고 촬영한

 사진으로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분이 현제명 교수이고 4중창단의 구성원인

황재경, 테너 이인범, 제 2 테너 최성두, 제 2 베이스에 신영균님의

모습이다.이 무렵 김생려는 연희전문에서 음악공부를 했다.

  

 

 

 

 

해방되면서  현제명이 1945년 9월 15일

 경성후생단을 주축으로 고려교향악단을 창설하고

 해방공간에서 활동을 벌려 나가면서 김천애와 김생려는

그 중심적 역할을 하면서 활동영역이 더 넓어졌고 방송국과의

관계도 더 깊고 넓어졌다.  해방된 나라에서 김천애의 노래는 자주

방송전파를 탔다.「봉선화」 레코드가 제작되어 있어서 해방과 동시에

바로 방송 할 수 있었고 일제 강점기 금지곡으로 묶였던 「그리운 강남」이 

김천애의 노래로 불렸으며 애국가 등 국가적인 기념일에는 그의 노래기 

전파를 탔다. 김천애가 부른 노래는 대한민국 모든국민이 함께

불렀고 김천애는 널리 알려졌다. 김천애가 현재명, 김원복

선생과 함께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전신인 남산음악

학교를 창설한 것은 1946년의 일이다.

 

  

 

 

현제명, 김천애와 함께 남산음악학교를

세운 김원복 교수 사진을 올리면서 설명을 인다..

위 사진은 1930년대 당대 이름있던 음악인들이 함께 한 사진이다.

피아노의 제 1인자라고 했던 김원복은  바이올린 홍성유와 부부간으로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만난 명 콤비가 되어 연주회 등 많은 활동을 했고 특히

홍성유는 이영세와 더불어 홍난파 바이올린 트리오로 불리며 활동을 함께 했던

분이다. 김생려는 현제명 박사의 연희전문 입학 전부터 그 실력을 인정하며

사랑하던 제자이고 김천애는 경성후생단에서 만난 파트너였다.  이

사진에는 없지만 봉선화 작사자  김형준은 홍난파와 긴말한

 관계임은 더 다시 말할 필요가 없고 김생려와도 가까운

사이였으며 김천애와는 노래 작사자와 그 노래를

민족의 노래로 승화시킨 인연이 있다.

 

 

  

 

현제명, 김천애, 김생려, 김원복 등

일제감점기부터 음악활동을 애 오던 분들이

해방되면서 뜻을 같이해서 해방공간의 음악계를 이끌

간 것이다,  1945년 9월 15일에 결성된 고려교향악단을 이끌가던

분들이 1946년 6월 김생려를 중심으로 서울 관현악단이라는 새로운

악단을 구성하고 활동하던중 고려교향악단 이사장 현제명이 미국으로

 떠나면서 고려교향악단은 점점 어려워지고 마침네 1948년에 이르러 

해체되자 고려교향악단 단원들을 받아들여 40명의

 단원으로 당당한 교향악단으로 가듭닜다.

 

천재성악가 김천애와 김생려

 경성후생악, 고려교향악단, 서울교향악단 

 에서 함께 활동하게 되면서 인간적으로도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이때 김생려의 서울 교향악단은 KBS전속

교향악단이기도 했다. (노정팔 저 방송과 함께 50년) 이 악단은

 KBS중앙방송국의 연주실을 연습장으로 활용하면서 앙방송국 미군

고문관 자코비 (Rolf Jacoby)의  지휘로 정기 연주회를 갖기도 하는 등 

방송국과는 더 가까운 한 가족처럼 되었다. 그러던 중 자코비는 귀국하고 김생려가

지휘와 운영을 맡아 활동하던중 6.25가 발발했다.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악단 지휘,

운영자로 자리매김  김생려와 경무대 등 막강한 파워가 형성된 김천애는

 부산 피닌시절, 손원일 제독이 이끄는 해군에서 정훈음악대를 창설하고

 김생려는 그 음악대장이 되었으며 김천애는 그 운영에 큰 도음을

 주며 많은 음악인들이 김생려의  음악대에 편입되었다.

  

김천애는 물론, 조민구, 안병원, 권길상 등

뒷날 대한민국 또는 미국 땅에서 활발한 음악활동을 한

 음악가들이 이 정훈음악대에 속하게 된 것이다. KBS어린이

 합창단을 그 시절에 해군 정훈음악대라고 이름을 고쳐 부른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다. 그 시절 정훈음악대에서 활동하던 분들 중에서

 유명한 음악가들이 많이 나왔다, 이규도, 안희복, 송현식, 전영자 등도

 해군 정훈음악대 어린이 합창단 출신이다. 이때의 인연, 김생려,

김천애, 권길상, 조민구, 안병원 등 이야기는 길고 긴 세월

 그 인연이 이어진다. 여기서 다시동옥이  작성한

 1951년 부터의 김천애 연보를 인용한다.

 

 

2015년 5월에 만난 민동옥 여사

 

 

 

 

이토록 국내에서 깊고 넓은 사랑을 받으며

동하던 김천애가 1972년 시민회관의 공연을 마지막으로

미국으로 떠나 버렸다. 거기에 대해서 궁금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많은줄 알지만 더 넓은 세상에서 더 큰 뜻을 펴기위해 떠난 것이라고

보면 좋지 않을까. 한다. 어찌 되었던 미국에서는 또 한사람의 음악인이

김천애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이름 조민구! 조민구는 젊은시절부터

김생려, 김천애 등과 함께 음악활동을 했고 1956년 KBS가

교향악단을 처음 창설할때 그 악단의 한사람이었다.  

 

 

 

 

조민구는 KBS 교향악단 플루트단원과

플루트연주자로 활약 중 미국으로 유학,  California

 Institute of Arts에서 학사, 1965년 석사학위(Major: Flute)를

 받았고 미국고등학교 음악선생, Sherman School of Music, 유뱅크

 음악대학 학장을 지내며 많은 음악인을 양성해서 그 제자들도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LA 코리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Los Angeles Korean Philharmonic

 Orchestra) 약자로는 「LAKPO」라고 하는 오케스트라를 결성한 것은 1969년의 일이다.

김천애는 미국에서 이미 자리가 잡힌 조민구, 권길상 등과 음악활동을 열어갔다.  김천애는

LA 코리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무대에 서서 열창하고 열열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미국의 여러곳을 돌며 공연무대에 섰다. 국내에 오고 싶어도 올 수 있는상황이

 아니었다.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미국 이주민들은 한국의 유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김천애도 그 대열에 섰다. 그래서 국내에 돌아 올 수

없었던 김천애는 대한민국이 어느정도 민주화가 이루어진

 1990년에 잠시 돌아와서 TV방송 대에서 공연도

 하고 인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이때 방문길에서 남긴 경향신문 글 한편을 인용했다.

-1990년 11월 23일자-  

 

 

 

 

 

 미국에서 활동상 연보 / 임동옥작성

 

 

 

 

미국에서 활동상은 누구보다도

조민구가 잘 안다. 미국에서 함께 활동을 했고

그 무대에서 공연을 가졌으며 가장 큰 후원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김천애에 관한 많은 기록 자료를 보유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있다.   조민구는 1960년대부터 미주동요사랑회 권길상회장과

오랜세월 친분을 이어왔고 권길상이 세상을 뜨면서 미주동요사랑 

회장직을 이혜자에게 물려주었다. 이혜자는 오랜기간 춘하추동방송과

 함께 해온 터여서 조민구에 대해서는 잘 알고 다.   우선 1972년

 LA교향악단 창단공연에 관한 신문기사를 보내 오셨기에 올리고

아울러 조민구선생님과 이혜자 회장님이 함께 촬영한

사진을 올린다. 보내오신 사진, 동영상등을 모아

 또 한편의 글을 쓸 것이다.

 

 

 

조민구 선생님과 이혜자 회장님

 

 

다음은 1965년 미국에서 한국어

방송을 최초로 시작해서 50년동안 이끌

어온 김영우선생님이 김천애선생님과

 함께 했던 얘기입니다.

 

 

이 국장 님! 불록에 올리신 김천애 여사의

이야기를 읽다가 문득 생각이 떠올라  추억을 되살려

봅니다. 한인사회에서 최초로 교향악단을 창설한 조민구 선생과

저는 절친한 사이였으며 한인 교향악단의 연주등 초창기 행사때 마다

제가 사회를 많이 보았습니다.    김천애 여사 무대 공연 당시에도 시내

슈라인 오디토리엄 에서 소푸라노 김천애 여사 를 소개한 기억이 납니다.

우리나라 성악계의 대가요 아름다운 음성의 미인가수 소프라노 김천애

 교수를 소개합니다..........  라는 사회자의 소개와 함께 우뢰와 같은

 박수 갈채를 받은 김천애 여사!   그 후 다시 뵙지는 모했어도 그

 고운 음성과 향수어린 고국노래로 관중들을 열광시켰던

 그 당시 그 감회 아직도 그 여운은 가시 않고 있습니다.

 

 

 

 

 김천애는 그를 아는 사람들, 그의 노래를

 아는 국내외 대한민국 동포들의 사랑을 받고 또

 수 믾은 제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그는 음악을

사랑하고 대한민국을 사랑하며혼도 하지 않은제 홀로

살았다. 그가 세상을 다하는 날 까지 오직 대한민국과 음악을

 사랑했기에 그는 한겨레 한민족 모두에게 사랑을 받는다.

그 중에서도 가족이 없었던 그에게 기장 오랜세월

인간적으로 마음을 의지하며 얘기를

 나누었던 세분을 들고 싶다.

 

그 이름 김생려, 조민구, 동옥 세 분이다.  

김생려 선생님은 1995년천애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던 해 우연인지, 필연인지? 같은 해에 세상을 뜨셨다.

조민구 선생님은 지금 미국 이민사회의 중심축이 되어 계신다.

민동옥선생님은 필자와 함께 이 글을 쓰고 계신다. 이 글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동옥선생님의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이 있고

어직도 보유하고 있는 자료들이 많다고 했다. 조민구 선생님은

김천애 선생님의 미국에서 23년 활동상을 모두 아실 수

있을 정도로 많은 것을 알고 계실 것이고 또 기록

자료도 보유하고 계실 것이다.

 

 김천애 선생님을 존경하고

서렁하는 많은 제자들, 친지들에게도

 보유하는 자료가 있을 것이며 생각하는 얘기들이

있을 것이다. 모든 얘기들을 모아 정리하고 쓸 것이다.

선생님의 하늘 나라에서 편안 하심을 빌며 김천애 선생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들의 복을 빈다. 오늘 필자의 글을

마치면서 민동옥 선생님 쓴 글과 그동안

쓴  관련 글들을 연결한다.

 

 

민족음악가 김천애 민동옥 씀

 

 

 

 

 

김천애 기념 음반을 내면서, 1995년 민동옥 씀

 

 

 

 

김천애 기념 음반집 목록

 

 

 

 

 

 

관련글 보기 영문자 클릭

 

 

김천애 2, 조민구 (LAKPO창설지휘) 선생님이 말하는 민족의 성악가

http://blog.daum.net/jc21th/17782549

 

 홍난파 현대음악의 선구자 불후의 명곡 노래 봉선화 봉숭아

http://blog.daum.net/jc21th/17781834

 

경성방송국과 현대음악의 선구자 홍난파님 

http://blog.daum.net/jc21th/17780255

 

홍난파작곡 민족의 노래, 봉선화인가. 봉숭아 인가.

http://blog.daum.net/jc21th/17780939

 

경성방송국 양악을 이끌었던 사람들/ 홍난파, 박경호, 김생려

http://blog.daum.net/jc21th/17780883

 

JODK오케스트라(교향악단)에서 KBS교향악단까지

http://blog.daum.net/jc21th/17780948

 

김형원 작사(김석송), 안기영 작곡 그리운 강남, 노래 왕수복, 김용환, 윤건영 (원곡) 

http://blog.daum.net/jc21th/17781172

 

음악가 안기영 인물발표회 생질 이화옥 노래 김천애 그리운 강남

http://blog.daum.net/jc21th/17782154

 

LA 코리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LAKPO 창설자 조민구님

http://blog.daum.net/jc21th/17781870

 

김영우 (미국 최초의 한인방송 개설) 선생님 글

 

 

1965년 미국에서 한국어 방송을

최초로 시작해서 50년동안 이끌어온

 김영우선생님이 김천애선생님 관련

 글을 보내오셔서 이 글과 함께

 올렸습니다

 

이 국장 님! 불록에리신 김천애 여사의

이야기를 읽다가 문득 생각이 떠올라  추억을 되살려

봅니다. 한인사회에서 최초로 교향악단을 창설한 조민구 선생과

저는 절친한 사이였으며 한인 교향악단의 연주등 초창기 행사때마다

제가 사회를 많이 보았습니다.    김천애 여사 무대 공연 당시에도 시내

슈라인 오디토리엄 에서 소푸라노 김천애 여사 를 소개한 기억이 납니다.

우리나라 성악계의 대가요 아름다운 음성의 미인가수 소프라노 김천애

 교수를 소개합니다..........  라는 사회자의 소개와 함께 우뢰와 같은

 박수 갈채를 받은 김천애 여사!   그 후 다시 뵙지는 모했어도 그

 고운 음성과 향수어린 고국노래로 관중들을 열광시켰던

 그 당시 그 감회 아직도 드 여운은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북 가주 덴뷜에서  김영우 드림

 

 

윤후현 (팔방미남) 선생님 글

 

 

천재 성악가 김천애를 깊이 있고

 세심 하게잘 조명 해 주셨습니다. 이장춘

사장님!...일제 강점기, 동경 한 복판에서 '봉선화"를

불러 나라 잃은 3,000만 민족의 설음을 노래 했지만, 일본

정부의 금지곡, 이었다고 옥살이도 하였다 하니그 시절 수난의

 역사가 가히 짐작이 갑니다. 기념 음반집,에는 봉선화, 봄이오면,

봄처녀, 그리운 강남 등 귀에 익은 노래들이 많이 실려 있구만요.
천재 성악가 김천애의 제자이신 민동옥 교수님!과 방송 연예

정보의 일인자 이장춘 사장님!, 두 분의 만남은 만남! 그

 자체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 됩니다. 두 분이 깊은

인연을 가지고 함께 나가신다니 가슴 뿌듯합니다.

천재 성악가 김천애, 소식 감사합니다

춘하추동방송 이장춘 사장님!


~가수 김미성 팬카페 회장 팔방미남 윤후현~

 

 

유경환(유카리나)여사님 글

 

 

오직 노래만을 위해 전 생애를 불태우고

가신 분의 기사를 읽으며, 혈족에 못지않는 훌륭한

 업적을 남기고 가셨음에 찬사를 보냅니다. 자연의 순리는

어쩔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아직 우리들의 곁에 계셔서,

이렇게 글을 써 보내실 수 있는 분들이 계셔서 다행입니다.
민동옥 여사님, 김영우선생님 오래도록 건강하시고

편안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강지 선생님 글


고등학교 1학년때 김천애님이

 우리학교(마산고등학교)에 오셔서  

'봉선화'노래도 들려 주셨고, 이은상님의

 '오오 낙동강'을 가르처 주셨습니다. 잊을 수

없는 일은 당시 말을 참으로 많이 하셨는데
그 모두가 대한민국의 장래는 여러분에게 달렸

으니 열심히   공부하여     모두 애국하라는

 내용으로 지금도 당시의 김천애님이

 생생하게 떠 오릅니다.


 

봉    선   화

 

 

작사 김형준

작곡 홍난파

노래 김천애

 

 

1.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2.어언간에 여름 가고 가을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3.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그리운 강남

 

 

작사 김석송

(김형원)

작곡 안기영

노래 김천애 

 

 

1) 정이월 다 가고 삼월이라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면은

이 땅에도 또 다시 봄이 온다네

(후렴)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강남에 어서 가세

 

2) 하늘이 푸르면 나가 일하고

별 아래 모이면 노래 부르니

이나라 이름이 강남이라네

후렴)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강남에 어서 가세

 

3) 그리운 저 강남 두고 못감은

삼천리 물길이 어려움인가

이발목 상한지 오램이라네

후렴)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강남에 어서 가세

 

4) 그라운 저 강남 건너 가랴면

제비때 뭉치듯 서로 뭉치세

상해도 발이니 가면 간다네

후렴)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강남에 어서 가세

 

 

 

 

 

 

  2007년 촬영한 민동옥의 사진 한장을 올렸다.

전영우님이 천원교육상을 받던날 이장춘이 촬영한

사진으로  최창봉, 조동화, 김영효, 안평선님등 옛날 같이

 계시던 분들이  축하 해 주시러 오셨을때 사진이다. 오래

전에 만났던 분 민동옥! 지금부터 춘하추동방송과

깊은 인연속에 함께 해 나갈 것이다.

 

 

 

봉선화 2.wma

 

 


- 첨부파일

봉선화 2.wma  
   
천재 성악가 김천애를 깊이 있고 세심 하게
잘 조명 해 주셨습니다. 이장춘 사장님!...
일제 강점기,동경 한 복판에서 '강남달"을 불러
나라 잃은 3,000만 민족의 설음을 노래 했지만,
일본 정부의 금지곡, 이었다고 옥살이도 하였다 하니
그 시절 수난의 역사가 가히 짐작이 갑니다.
기념 음반집,에는 봉선화,봄이오면,봄처녀,그리운 강남등
귀에 익은 노래들이 많이 실려 있구만요.
천재 성악가 김천애의 제자 이신 민동옥 교수님!과
방송 연예정보의 일인자 이장춘 사장님!,
두 분의 만남은 만남, 그 자체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 됩니다.
두 분이 깊은 인연을 가지고 함께 나가신다니 가슴 뿌듯합니다.
천재 성악가 김천애, 소식 감사합니다. 춘하추동방송 이장춘 사장님!
~가수 김미성 팬카페 회장 팔방미남 윤후현~
오직 노래만을 위해 전 생애를 불태우고 가신 분의 기사를 읽으며,
혈족에 못지않는 훌륭한 업적을 남기고 가셨음에 찬사를 보냅니다.
자연의 순리는 어쩔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아직 우리들의 곁에 계셔서, 이렇게 글을 써 보내실 수 있는 분들이 계셔서 다행입니다.
민동옥 여사님, 김영우선생님 오래도록 건강하시고 편안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셨습니까!
건강한 모습으로 여향을 다녀오신것 같아
6월 초하루 마음을 흐뭇하게 합니다.
고등학교 1학년때 김천애님이 우리학교(마산고등학교)에 오셔서 '봉선화'노래도 들려 주셨고,
이은상님의 '오오 낙동강'을 가르처 주셨습니다.
잊을 수 없는 일은 당시 말을 참으로 많이 하셨는데
그 모두가 대한민국의 장래는 여러분에게 달렸으니
열심히 공부하여 모두 애국하라는 내용으로
지금도 당시의 김천애님이 생생하게 떠 오릅니다.
고맙습니다. 본문에 옮겨 기록으로 남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