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이장춘 2016. 6. 12. 03:45

 

 

 

방우회! 사단법인 한국방송인동우회!

2016년 6월 12일 오늘로 첫발을 내디딘 지 50년

반세기를 맞았다. 1927년 2월 16일, 이날로부터 한국방송

역사는 시작되어      2017년 2월 16일이면 90년을 맞는다.   

이 나라 방송의 초창기로부터 방송과 함께 하면서 방송역사

 틀을 다져온 원로방송인들!   세월이 지나 80, 90대

 되어 그날의 방송을 되돌아 보고  내일의  

방송을 생각하며 오늘을 맞았다.



방우회 역사 50년! 한국방송역사 90년!



방송인 한분, 한분의 발자취, 발자국은

 바로 이 나라 방송역사다.  방우회는 50년간

그 소중한 발자국을 보존하고 지키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방송의 역사적 가치가 있는 사료를 모아 방송

박물관 기초자료를 제공했고,  첫 방송터에 유허비를 세워

그 자리를 찾으며 역사적 의미를 기려왔다.     방송의 소중

역사 항일단파방송 연락운동     (일제하 방송인들의 지하 독립

운동)기록을 발굴하는 한편 그 역사적 사실을 기리기  위해

 물망비를 세우고  그 물망비를 찾는다.   바른말을 지켜가기

위해 힘을 기울이고 해마다 바른말 쓰기에 모범이

방송인을 찾아 시상한다.


방우회 역사의 기원은 1966년

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퇴직방송인들로

구성한 최초의 방송관련 단체였다. 불과 3-4만대의

 TV수상기 밖에 보급되지 않았던 그 시절, 라디오 방송이

주종을 이루던 시절이었고      민영방송이 첫 걸음마를 하던

시절이었다.  오늘날 각 방송사별로, 언론사별로 구성되어 있는

사우회도 전혀 생각되지 않았던 시절에 방우회는 탄생했다. 

 1980년대부터 방우회 사무총장을 역임 하는 등 오랜 세월

방우회와 함께 해 오신 정항구 방우회 이사

께서 요약한 방우회 연혁이다. 






방우회 (사단법인 한국방송인동우회)

그  결성의 동기는 오랜 세월 방송과  함께 해온

방송계의 별이라고 불리던 윤길구선생님 세상을

뜨면서 비롯되었다. 일생을 방송과 함께하며 두차레나 

중앙방송국장을 지냈고 세상사람 들이 알아주는 윤길구

 아나운서였지만   그가 세상을 뜨자 그 집안에는

장례비조차 마련하기 힘들었다.  이때

방송인들은 뜻을 모았다.


윤길구 선생님의 장례를 방송인들이

치르고 앞으로 이 모임 체를 계속 이어나가자는

 것이었다. 그 시절 방우회는 일제강점기부터 이 나라

방송을 지켜온 이혜구, 이현, 황태영, 민재호, 정환옥,

송영호,  신경석,  성기석,  조종국,  이인관,  한기선,

문제안, 유병은 선생님을 비롯해서 이나라 방송계에

몸담고  헌신해온 150여명의 원로방송인

들이 뜻을 모아 출발했다.


2010년 102세가 되어 세상을 뜬

 이혜구 선생님은 1932년 조선어 전담

방송을 실시하면서 선발된 방송인이고 문제안

선생님은 대한민국 방송기자 1호이시며 정환옥 선생님

최초의 상업방송    부산 MBC, 서울 MBC, 라디오서울

 RSB창설의 주역이시다. 한분, 한분 그 성함 앞에는 자랑

스러운 수식어가 붙는 분들이다. 춘하추동방송에는

그 분들의 방송 발자취가 일일히 기록되어

 방송 인믈 편에 올라있다.


이때 선발된 초대 방우회 회장은

이현 선생님이고 실무적으로 힘을 기울인

 분은 문시형 선생님이다. 이현선생님은 20년간

 방우회 회장을 맡아 그 길을 닦았고 문시형 선생님은

 이현선생님으로부터 회장직을 이어받아 1995년 세상을

뜨실 때까지 방우회의 틀을 확고히 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이현! 1938년에 아나운서로 들어와

어렵던 농구중계방송을   최초로 실시했고

1943년 단파방송사건으로 방송국을

 물러난 분이다.



 

 


이현님을 첫 번째 회장으로 해서

 출범 방우회는 방송인들의 친목도 친목

이었지만  이 나라 방송역사를 발굴, 정리, 보존

하는데 힘을 기울여 왔다. 1977년 방송 50년을 맞아 KBS가

 우리방송사를 집대성해서 처음으로 「  한국 방송사 (일명 한국방송

50년사)를 펴낼때 그때까지 지엽적이고 산발적으로 기록되어 있던 자료

들을 모으고 정리하는데는 이 나라 방송과 함께 해 오신 분들의 모임 방우회

 회원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오랜 기간 자료를 모으고 정리해 오신 유병은

선생님이  편찬위원회 초대 사무국장을 맡으면서 그 틀을 확립했고 이혜구

선생님이 쓴 "문채록(文債錄)" 이덕근 선생님의 중앙일보 기고문

“남기고 싶은 얘기들”    그리고   그때까지 각종 신문이나

 잡지에 수록된 방송에 관한 얘기는 대부분 방우회

 회원님들이 남긴 글, 자료들이었다.  

 

 

 

 

1977년에 발행된 한국방송사는

우리나라 방송사의 근간이 되어 그 뒤로도

10년 주기로 1987년에 한국방송 60년사1997년에

 한국방송 70년사 쓰였다.   방우회 핵심 원로회원 유병은

선생님은  방송역사 자료를 모으고  정리해서  청원박물관을 열고 운영

하면서 "항일 단파방송 독립운동사"를 체계화 해서 KBS를 통해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 책자를 발간했고  항일 독립 운동가들이 국가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다. 1991년 방우회가  KBS안에 물망비 (勿忘碑)

 세우는데  그 역사적 사실의 입증과 이론적 바탕이 힘이 되었다.

 방우회는 해마다 9월이 되면   그 물망비 앞에서

「항일단파방송 연락운동」을 기린다.

 

 

 

 

방우회는 6.25전쟁으로 이 나라

첫 방송국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음을 아쉬워

하다가 1987년 회원님들의 뜻을 모아 옛 방송국이 있던

 자리에 유허비 ( -선현의 자취가 있는 곳을 길이 후세에

 알리거나, 이를 계기로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 세우고 

방송역사의 현장을 보존 하면서 해마다 그곳을 찾고 있다. 그때만 해도 

일제 강점기부터   이 나라 방송을 지켜온 많은 분들이 방우회에서

 활동 하던 때라 마음이 하나로 모아져 상당한 성금을 모으고

방우회 회원이자 조형미술의 선구자 최만린 선생님의

설계와 헌신적인 노력으로 뜻을 이룬것이다.

 

 

 

 

두 번째 방우회장을 지낸 문시형선생님은

이 나라 방송에 혁혁한 공적을 남긴 방송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한국방송인물사 27편을 써서

 1980년대 말부터 월간 방송지에 실어. 이분들의 행적이

길이 보존될 있도록 했다,  2001년부터 실시한 한국 영상

 산업진흥원의 방송인 명예의 전당 헌정 기초자료가

되었다. 그 글중 CD로 보관되어 있던 13편은 당시의

방우회 사무총장 정항구 선생님이 전해주셔서

 춘하추동방송에 올라았다.

 

 

 

 

방송의 중요한 역할의 하나가 

방송을 통한 바른말 실천이다. 방우회는

이 일을 위해 1990년부터 24회를 이어오며 해마다

 각 방송사의 바른말 실천에 공헌한 방송인선발해서 

시상하고 있다. 2015년까지 70명에 달하는 수상자들

가운데는 방송계에서 활동하는 분도 계시고

각계 각층에 진출해서 바른말 실천에

앞장서고 있다.  

 

 

 

 

이밖에도 방우회는 지난날 각 방송사의

방송을 모니터 해서 방송의 방향과 내용을 바로

 잡기 위해 노력했으며 각종 세미나를 개최했고, 출판사업

 등을 통해 방송발전에 기여해 왔다. 독도문제가 국가적인 이슈로

등장했을대  책「독도」를 발간해서 국민들에게 독도에 관한 국민적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각 방송사 방송 모니터를 실시해서 올바른

방송을 할 수 있는 기초자료를 제공하고해마다 전국 방송

가시청상황을 도면으로 그려 책자를 발간

 방송의지초자료로 삼도록 했다.


경성방송국에 근무하다가 해방되어

 일본으로 돌아가신 분들의 모임인 조방회와

 상호 교류를 했고,    1993년, 오사카에서 있었던

  21번째 한,일조방회 모임에서는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 (독립운동) 으로 곤욕을 겪으셨던

가운데 이미 세상을 뜨신 분들의 명복을

비는 천도 제올리기도 했다.

 

 

 

 

방우회는 초대 이 현 회장이래.

문 시형, 한기욱, 강정도, 한영섭 회장으로

 이어오면서 그 뜻을 이어가고 있다. 현 한영섭 회장

 1949년,  방송국에 들어와 1960년 10월까지 기자로 활동

한 분이고 KBS보도실장을 끝으로 퇴직 하신 분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방송종군기자이 현 6.25 참전종군기자회 회장직도 맡고

있는 분으로   흥남철수작전을 증언 할 수 있는 생존하는 유일한

기자이기도 하다. 반세기 50년 이라는세월 방우회가

 방송에 공헌할 수 있는 일이라면 발 벗고 나셨다.

 

 

방우회를 이끌어 온 역대회장

 

 

이 현 (1966 - 1986)

 

 

 

문시형 (1987 - 1995)

 

 

 

한기욱 (1996-1998)

 

 

 

강정도 (1999-2001)

 

 

한영섭 (2002-2017, 9월)

 

 

장도형 (2017-현재)





방우회를 처음 구성 하던 때  

 

 

 1966년  5월 16일! 이날이 방우회의

기원이다. 그날 방송계의 큰 별! 윤길구선생님이

세상을 뜨셨고 그 빈소에서 만난 방송인들의 뜻이 모아져

가칭 철탑(鐵塔)회를 구성하기로 했다.  윤길구 선생님이 방송국

생활 20년을 포함 24년의 공직생활을 했어도 모아놓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어 장례를 치르기 조차 어려웠을때 그 자리에 모인

 방송인들은  선생장례식을 벙송인장으로 하고  이것을 계기로

방송인들이 친목모임을  갖자고 한 것이 오늘의 방우회

기원이다.  방송인 장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1966년 5월 16일 그 자리에서 가칭

철탑(鐵塔)회 창립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한국방송인협회 시형 상무이사의 추진으로 발기취지문이

 채택 된 것은 5월 24일의 일이었그때부터  매달 준비총회가

 열렸고 ,  9월 총회에서는 임시로 쓰던 철탑회 명칭을 방우회로 하기로

해서 그 이름 오늘에 이른다. (철탑회 그 이름은 때마침 방우회 핵심회원

정환옥선생님이 남산에 거대한 철탑을 게우고 있을때라 문득 그 이름이

떠 올랐던 것이다. 정환옥 선생은 그 철탑이 완공 된 뒤 체신부에

 넘기고 의정부에서 조용히 지내시다가 세상을 뜨셨다.)

 

 

 

 

방우회 탄생에 물심으로 힘을 기울인 

원로방송인 이 현님을 초대회장으로 추대하고

부회장에 이규일, 박화목, 상임 이사에 문시형님을 임명

해서 실무적인 일을 담당했다. 창립당시의 고문으로는 이혜구

선생님을 비롯해서 이서구, 권태웅, 정완규, 이하윤, 신경석 등

일제강점기 이나라 방송을 지켜온 쟁쟁한 인사들이 추대되었다 

 이사로는 송영호, 양재관, 노정팔, 최창봉, 황우겸님, 감사

로는 이덕근, 이관희님이 맡아 주셔서 일제 강점기

부터 이어온 이 나라 핵심 방송인들이

모두 참여했다.

 

 

 

 

처음에는 방송인과 그 가족의 원호사업,

 상호친목을  목적으로 했지만 차츰 범위를 넓혀

 방송 사료의 수집,  연구,  개발,  보존 이밖에  방송문화

발전에 기여하는 일을 해 나갔다.  1967년,  방우회가 주축이

 되어 모든 방송관련 단체의 집합체로 사단법인 국방송

회관 설립을 추진해서  그 이사장은 방우회장이던

이 현 선생님이 맡았다. 사단법인 방송회관은

 그 시절 방송에 많은 공헌을 했다.  

 

 

 

 

춘하추동방송 블로그는 이런 방우회의

뜻을 받들어 정보화 시대, 디지털 인터넷 시대에

 누구든지 방송역사를 쉽게 접근해서 자세히 알 수 있고

또 활용 할 수 있도록 하기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여 사진, 음향물,

영상물을 포함한 생생한 자료를 모아 정리하고 또 글을 써서 필요로 하신

분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어느 곳에서든지 포탈사이트 검색창에 “춘하추동 방송”

 쳐 넣으시면 춘하추동방송 블로그에 연결되어 생생한 방송역사 기록에 접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분들이 찾아 생생하게 살아있는 자료를 제공해 주셨고 수정 보완 할 수

있도록 해 주셨으며 성원과 격려를 보내 주셨다. 모은 글들은 카테고리 별로, 기본테마, 

 방송인물,  단파방송독립운동,  일제강점기 방송,  해방공간의 방송, 6.25와 방송,

남산시절의 방송, 민영방송, 지역방송, 역대 대통령과 방송, 방송음악 100년

 (방송으로 자주 방송 되었던 옛 노래), 회원님과 함께, 춘하추동 여행기,

 춘하추동단상, 등으로  나누어 정리되어 있다. 아직 미흡한 점이

 많지만 힘이 미치는데 까지 이 일을 계속 할 예정이다.

 

 

방송인 한분, 한분의 활동상이 이 나라

 방송역사라는 점을 이해 하셔서 크던 작던 방송을

해서 확보된 자료를 제공 해 주시고 또 기회 되실 때마다

 말씀 해 주시면 이 나라 방송역사를 써 나가는데 큰 힘이 될

것입다. 부탁 올립니다. 소장하신 사진, 동영상, 음향, 글 등

모두 모두 제공 해 주시면 성심성의 껏 관리하며 방송

역사를 정리하는데 큰 힘이 되겠습니다.

 

 

화        보

 

 

위에서 다 못 쓴 내용은 사진설명과 함께 씁니

 

 

 

 

  

1927년 2월 16일 우리나라에서

첫 전파를 발사한 경성방송국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KBS 중앙방송국으로 이어졌지만

6.25 전란으로 완전히 폭파되어 흔적마저 사라졌다.

일제 강점기부터 이 나라 방송을 지켜온 방송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이 역사적인 자리에 첫 방송터 유허비를

 세우기로 마음을 모아 1987년 5월에 첫 삽을 뜨고

 그 해 방송의 날 9월 3일을  기해서 제막식을

 가졌다.  첫 삽을 뜨던 그때 그 장면이다

 

 

 

 

1927년 2월 16일 처음부터 방송국에

근무하신분은 방송, 기술인 다섯분과 업무요원

몇분이 계셨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후 우리말 전담방송

제2방송 체널이 생기고 지역방송이 확장되면서 우리방송인들도 

늘어나 방송국 설립후 18년이 지난 해방 될 때까지 우리방송인들은

상당수에 이르렀고 이분들이 우리 방송을 이어왔다. 그때는

방송국이 출발한지 얼마 안되었을 때라 방송인들은 

대부분 40대 미만이였다.

 

 6.25를 거치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고

세월이 흘러 1960년대에 이르자 오래된 방송인들은

연세가 들었거나 또는 다른 여러사정으로 방송계를 떠나시는  

분들이 늘었으며 또 세상을 떠나신분도 종종 계셨다.  이런 가운데

방송인들 모임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을때 윤길구 선생님이 세상을 뜨면서

그 자리에 모인 방송인들이 자연스럽게 얘기가 진행되어 출발한 단체가 방우회

 (한국방송인 동우회)이고 이 방우회를  중심으로 퇴역 방송인들이 모여

친목을 도모하고 방송역사 보존이나 방송발전을 위한 뜻있는

일을 벌리기도 했다.  그때는 각 방송사별 사우회가 없었을

 때여서 모든  퇴역방송인들은 방우회  한 깃발아래

모여 뜻을 같이 했고 첫방송터 유허비도,

물망비도 함께 세웠다.

 


 

 

첫 삽을 뜬지 3개월 여가 지나

옛 방송터에 유허비가 서고 1987년 9월

 3일 방송의 날에 많은 방송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제막식이 있었다.   제막식에 나와 주신분들의 성함을 옮긴다.

박규진, 박경환, 남상국, 김석호, 이춘사, 강정도, 왕종현, 임석규, 이현,

최만린, 유해룡, 송영수, 김창희, 최순용, 김영우, 최수진, 김영효, 강신철, 문제명,

민중기, 이병인, 000, 이용선, 이인관, 시노하라 아들 부부, 고가 도에, 문제안, 김봉렬,

 김성배, 조한승, 권오진, 이해상, 곽진상, 김용택, 김영완, 서규석, 최당, 조종국, 이상만,

문시형, 이인영, 성기석, 김익진, 배준호, 장두원,  이수열, 강찬선,  김영진, 서명석,

박근주, 한희동, 전옥배, 정항구, 김집, 김덕수, 강신조, 최종채, 김소원, 조남두,

김인태, 조돈준, 박한준, 유경환, 권혁래, 김정현, 천영조, 김명희, 이덕근,

 송영호, 김성재, 최학수, 손석주, 최영신, 남학현, 김창구, 김성열(렬),

 박찬숙, 박종민, 황우겸, 임택근, 유병은, 최삼경, 이준순,

김상헌, 조부성님등 86분의 퇴억방송인들이

 함께 한 사진이다.

 



 

 

그때 첫 방송터 건립에 뜻을 같이 하신 분 가운데

위 사진촬영에서 빠지신분들의 성함을 올린다. 강신조, 강영숙,

권오룡, 김광모, 김덕수, 김봉렬, 김석호, 김순철, 김익모, 김익진, 김재연,

김준문, 남상국,남정휴, 남학현, 노정팔, 도태흥, 라은선, 민유동, 문제안, 박영선,

 박종민, 박한준, 박호준, 배준호, 서규석, 서명석, 손영호, 신정휴, 심구섭, 이계원, 이범신,

이상만, 이성철, 이시우, 이용실, 이용선, 이용찬, 이인재, 이준순, 이춘사, 이해상, 이혜구,

임석규, 임한구, 장기범, 장두원, 정구호, 정환옥, 조규택, 조병희. 조종국, 조한승, 천영조,

 최덕수, 최삼경, 최수진, 최순용, 최장섭, 최창봉, 최학수, KBS ANN실, 한기선, 한영섭,

 한운사, 한희동, 함영복, 홍두표, 홍순구, 황병찬, 황선필, 황태영, 고 노창성,

고 시노하라, 일본 조방회, 실로 일제강점기부터 1987년 그 시절에

이르기가지 모든 퇴역 방송인들이 참여했다. 유허비의

뒷 면에는 위 성함이 새겨진  동판이 있다. 

 

 

 

 

제막식에는 그 전에 세상을

 뜬 경성방송국 설립자이자 마지막 방송

국장이기도 일본인 시노하라 쇼죠 대신 그의

 아들   부부와 경성방송국  마지막  일본인   여자 

아나운서 고가 도애꼬도 참여 다.  유허비에는 

시노하라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당시의 방우회장 문시형님이 남긴 글

 

 

비문에 남긴 깊은 뜻을 되새겨 볼 필요도

 없겠으나 겨레의 마음을 싣는다는 큰 뜻을 우리는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보매 오늘의 방송인 특히,

 PD의 좌우명이 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첫 방송터' 기념비

이야기를 꺼낸 김에 한가지만 더 강조해 보고자 한다. 너비 5m 30Cm,

가로3m가 넘는 기념비 건립은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퇴역방송인의 자발적인

 성의로써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출연금에 대한 상한선도 없고 하한선도 없었다.

단 한가지 조흥은행 계좌번호 344-1-008009 방우회란 저금통장 하나가 방우회 회원

들에게 알려졌다. 단돈 5,000원에서 백만원에 이르는, 형편에 따라 '첫 방송터'

기념비 건립 기금이 모아져 그 금액이 무려 1,200만원에 이르렀다. 연인원

122명의 퇴역방송인이 뜻을 모은 것이다. 방우회장이라기 보다

한 PD의 아이디어가 퇴역방송인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고

참여의식을 고취시킨 결과이다.

 

 

 

 


 

 1991년, 여의도 KBS안에  물망비를 세웠

 

 

방우회 회원들과 유족 그리고

KBS 사원들은 해마다 이곳에 모여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을 기린다.

 

 

 

 

 

제 2 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  일본이 일방적인 선전만 하던

암흑 세계에서 방송인들은 단파수신기로 외부 세계의

방송을 듣고 독립운동가들에게 또는 주위 사람들에게  전해

주어  독립운동의 불씨를 살려 나가던중  경찰 감시망에 걸려

 350여명이 끌려가 곤욕을 당하고 75명이 형의 선고를 받았으며

6명의 옥사자를 낸 지하 독립운동이었다 일컬어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 방우회는 그 일을 재조명하기 위해 1988년 6월 3일

프레스 센터 기자 회견실에서 세미나를 가졌다.

 

 

 

 

 

  

 

이 세미나에는 토론자로 그 때 그 일로

 형을 받으셨던 분을 비롯해서 손보기 교수, 원우현

교수님등이 참여했고 많은 방송인들이 참여해서 이 역사적인

일의 뜻을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KBS안에 물망비를

세웠다. 그리고 단파방송 해내, 외연락운동을 주도적으로 벌려나갔던

 성기석, 조종국, 박용신, 홍익범, 이근창, 이준순, 김동하,  

선생님에게는 국가로부터 훈, 포장이 수여 되었다.

 

 


 

 

 

 

1991년  9월 9일 물망비

 제막식에는 방우회 회원님들은 물론

 서기원 KBS사장님, 최창봉 MBC사장님을

비롯해서 현직사원들도 참여했다.  

 

 

 

   

 

물망비 앞에서 기념사진.

 

 

 

 

 


바른말 보도상

 

방우회는 방송을 통한 바른말

쓰기를 생활화 하기위해 1990년부터

바른말 쓰기에 장서온 방송인을 선정,

바른말 보도상을 시상하고 있다.

 

 

 

 

 

방우회 출판사업

 

 

방우회는 해마다 난시청 전계강도

책자를 발간 하고 독도의 역사적 배경에 관한

 출판물을 발간하는 등 방송관련 출판사업을 벌려왔다.

다음은  우리나라 TV방송이 실시된지 20년이 되던 1976년

 5월 12일과 1986년 5월 12일을 기해서 그때의 사진 기록물을

모아 "눈으로 보는 TV 30년" 이라는 제목으로 책자를 발간하고

 출판 기념회를 가졌을 때의 사진이다.   초기 TV방송의

면면을 보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당시의 이 현 방우회장님을

비롯해서 최초의 TV방송국 HLKZ를

창설하신 황태영선생님,  출판을 주관한

문시형선생님, 원로 방송인이자 영화배우

황정순여사를 비롯해서 많은 원로

방송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방우회 주추최로 서울신문회관에서

열었던 1979년 "하이 미스터 위" 출판기념회!

위 사진에는 위진록님,  문시형 방우회 회장님을 비롯

 배준호, 김창구, 방흥안, 정항구, 이상만님 등 원로방송인들이

 함께 했다. 이때 국내판은 문시형방우회회장이 직접 운영하는

 광보문화원에서 3,000권이 발행되고 곧이어 박정희 대통령 영애

박근혜님이 이사장장으로 있던 새 마음회에서  60,000 권을

주문 공급키로 했지만그해 10월 26일 박정희대통령

 서거로 뜻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하이 미스터 위 출판기념회에서

 만복혜숙, 황정순, 위진록님(위 사진)

아래는 박종세, 강찬선, 위진록, 장기범,

 임택근, 황우겸, 이수열 아나운서

 

 

 

  

 

위는 하이 미스터 위 출판기념회에서  만난

왼쪽부터 이근삼(극작가), 함명수 전 해군참모총장,

한원조 평양사범동창, 김규환(작곡가), 위진록, 안봉빈, 이치순,

신인섭, 안중원님이고 아래는 1993년 4월 28일서울 신문회관에서

"잃어버긴 노래" 출판기념회로  왼쪽 두번째부터 고은정,

이은주(경기민요 인간문화재), 최창봉, 이혜경, 김소원,

 박용기, 이경재님이 함께 한 사진이다.

 

 

 

 

 

1981년 10월 24일 우이동 야유회장에서 만난

퇴역방송인들의 모습이다. 그로부터 34년이 지난 오늘은 

 뵈일 수 없는 분들도 많으시다.  사진 뒷면에 성함과 도면이 있어

여기에 옮겨 보았다.  왼편에서 부터 김영철, 서명석, 이범신, 윤기범,

문시형, 박광서, 박중서, 하용득, 최수진, 전옥배, 김창구, 김포천, 송영수, 

문돈식, 한재수, 최선욱, 임학송, 박규정, 성기석, 정경순, 박용명, 송정기,

곽진상, 임한규, 이인영, 이두희, 이달형, 정영규, 심재영, 방흥안, 이병섭,

허환, 김기호, 신상운, 신병운, 이현, 김홍태, 이준순, 조병희, 신현석,

김영진, 권혁래, 조규택, 박찬응, 배준호, 김광모, 강찬선, 송영호,

한승은, 양한석, 김석모, 강기경, 한영수, 강래식님등

우리나라 방송을 키워오신 원로방송인들이다.

 

 

1990년 10월 10일자 연합통신에는

다음과 같은 보도가 있다. 위의 사진은

1981년 10월 24일 촬영했고 그 뒤 1990년에도

우이동 모임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서울=연합(聯合)) 원로 방송인들의

모임인 방우회는 13일 하오1시 서울 우의동

  청산휴게소에서 야유회를 개최한다. 이날 야유회

에서는 희수(喜壽)와 고희(古稀)를 맞은 원로

방송인에 대한 경로잔치도 베푼다.

희수와 고희를 맞은 방송인은 다음과 같다.

희수 : 이인관(李寅觀), 박종명(朴鍾鳴)


 
고희 : 유  호(兪 湖), 조종국(趙琮國),

권혁래(權爀來), 정경순(鄭慶淳), 김영진(金永鎭),

이보라(李寶羅), 조성길(趙星吉), 양중석( 梁重錫),

조영휘(趙永輝), 김성재(金聖在),

 

 

 

  

여기 모이신 방송인들,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은 못하셨어도 방송과 함께 하셨던 방송인들의

피와 땀으로 오늘날의 우리나라 방송이 있게 되었다. 그

발자취를 더듬어 방송역사의 흐름을 안다. 그때 있었던 그 일들

 하나 하나가 이나라 방송역사의 기초다. 많은 선배 방송인들이 세상을

 떠나셨지만 지금도 그때를 예기 하실 수 있는 선배 방송인들이 계시고 또

사진이나 영상물등 기록을 가지신 선배님도 계실 것이다. 한건이라도

 더 소중히  다루어 후세에 전 할 수 있었으면 한다.  방송박물관의

꿈이 조속히 이루워져 이런 기록물들이 집대성

 될 수 있었으면하는 마음 간절하다.

 


방우회 50년의 날에





이나라 방송역사와 함께 해온 방우회

(현 회장 한영섭)회원님들이 뜻 깊은 날을 맞아

자리를 함께하며 방우회 50년 방송역사 90년을 기렸다.

앞 왼쪽 한분 민경원, 앞줄 왼쪽부터 김기호, 박민양, 김선초,

권영원, 고흥복, 박종세, 한영섭, 김은구, 전영우, 이철호, 김영효,

이상만, 이보길, 계원준, 한영신, 뒷즐 왼쪽부터 이정오, 정항구,

조옥래, 민흥식, 김성식, 이용억, 한이수, 정관영, 엄복영,

오승룡, 이종순, 김영우, 장도형, 변용규,

노익중, (강영숙, 이장춘)



박서림 선생님 글
(장마루촌의 이발사)


이장춘선생  공들인 기록이군요.

 50년과  90년.  그 역사  속에 나도  한 

반세기 들어 있지요.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정말 여름이죠?      " 춥거든 왜  더 추은 곳을

찾아가지 않느냐.  덥거든 왜 더 더운 곳을 

 찾아 가지 않느냐 " 이런 말이 있죠. 

 건강하세요.


 박서림



최홍준 선생님 글

 (원로 방송작가)



방우회 귀한 분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성화 최초의 민영 상업방송 부산 mbc 개국아나운서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습

니다. 먼저 보물창고를 만들고 계신 이장춘

 춘하추동 방송사장님께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드립

니다. 저는 지금 이 자료를 읽으면서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나의 21살 시절 빛나던 청춘때 마이크 앞에서 두근 거리던 가슴에

 겹쳐졌습니다. 저보고 민간 최초의 상업방송 아나운서라고 상업방송

역사의 작은 줄기가 배어 있다고 하시지만 사람 마다 가슴 속의

잊혀지지 않는 감동이 있습니다. 지금 그 말을 하고싶습니다.

1959년 제가 HLKU에서 명랑한 목소리로 방송의 인기가

있엇던 때 였나봅니다.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KBS윤길구 사장님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우리 방송국에 와서 소설 낭독을

해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정말 사회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시절, 나의 처신이

 어떤 것이 발전 적이면 ,무슨 설계가 필요하다는

것 조차 모르던 순진무구의 사회 초년생일 때

 '소설낭독'이라는 그 말에 대번에

 가슴이 뛰었습니다.


'목소리로 예술을 한다'는

그 기쁨의 두근거림이엇습니다.

윤길구 국장님을 처음 뵜을 때 좀 둥근

 듯한 인상 이 후 오늘 이 글에서 옛날 사진을 한참

 응시했습니다.     방우회 역사에 몇십년 못 미치는 나의

 인생 역정에 그시절 소설 낭독 때의 두근거림이 아직도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마 끝까지 계속 됐고 아나운서와

성우도 겸해서 나갔더라면 지금은 아마 연극배우를

 거쳐 노년의 탈렌트로 살지않았을가 하는

공상도 할 때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이 길게 가는 이유는

 '잘되는 사람을 밀어  주지 않는 어떤

풍토였지않나'하는 생각도 들고 나는 가슴만

 뛰었지 대응 법을 몰랐습니다. 자랑 같지만 펄벅의

 '영원한 사랑'에 등장 하는 16사람? 의 오고가는 대화를

 최대한 변화를 주면서 읽을 때의 좋은 기분은 지금도 생생

하네요. 결국 "다른 방송국 출연은 안된다"는 한마디에 그 한권

으로 끝내게된 것이 못내 아쉬었던 일은 나이 들어가면서 보니

 결국은 나의 세월이 그랬었다는 사회와 환경의 이해로 혼자

사귀게 됬는데 오늘 윤길구 당시 부산 KBS국장님이 다른

 방송국 성우들도 많았건만 나를 발탁해주심에 본인도

모르고 지내던 나의 재능을 인정해주신 분이라는

때늦은 감사를 마음속에 갖고 있었습니다.


춘하추동방송의 이런 방대한

 자료속에 이미 하늘나라에 계신 분이지만

당시의 소설낭독의 기회를 주신 행복했던기쁨을

다시떠올리게되고 몇십년 뒤에나마 진정으로 감사의

말씀을 올릴 수 있게됨을 감사드립니다.   춘하추동

방송에 거듭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이장춘

2016.06.12 11:43


이 선배님! 이 글은 이 글은

댓글은 댓글이되 단순한 댓글이 아니라,

또 한편의 훌륭한 독립된 글입니다. 이런글로

 해서 춘하추동방송은 이어갑니다. 많이 많이 고맙

습니다. 머릿속에 잘 간직하고 있다가 다음 기회될때 

잘 인용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윤길구 선생님에

관한 글을 카톡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정근춘 KBS사우회 전 회장님



방우회 50주년을 축하드림니다.


대한민국의 방송역사를 만들고 지켜주신

 원로 대 선배님들과 방우회를 결성하여 반세기를

 지켜주신 원로님들게 인사를 올립니다.

2016년  6월  12일    

               정  근  춘 배상



계원준 선생님 글



방우회50주년과 방송90년사를

너무나 자세이 잘 쓰셔서 잘 읽어보아

 다시한번 선배님들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많은

사료와 기록을 보전 공유할수있게 노력하신

 이장 춘님게 감사드리립니다.







 

 

 





노익중 이사님이 보내주신 사진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습니다. 먼저 보물창고를 만들고 계신 이장춘 춘하추동 방송사장님께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지금 이 자료를 읽으면서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나의 21살 시절 빛나던 청춘때 마이크 앞에서 두근 거리던 가슴에 겹쳐졌습니다. 저보고 민간 최초의 상업방송 아나운서라고 상업방송 역사의 작은 줄기가 배어 있다고 하시지만 사람 마다 가슴 속의 잊혀지지 않는 감동이 있습니다. 지금 그 말을 하고싶습니다.
1959년 제가 HLKU에서 명랑한 목소리로 방송의 인기가 있엇던 때 였나봅니다.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KBS윤길구 사장님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우리 방송궁에 와서 소설 낭독을 해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정말 사회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시절, 나의 처신이 어떤 것이 발전 적이면 ,무슨 설계가 필요하다는 것 조차 모르던 순진무구의 사회 초년생일 때 '소설낭독'이라는 그 말에 대번에 가슴이 뛰었습니다. '목소리로 예술을 한다'는 그 기쁨의 두근거림이엇습니다. 윤길구 국장님을 처음 뵜을 때 좀 둥근 듯한 인상 이 후 오늘 이 글에서 옛날 사진을 한참 응시했습니다. 방우회 역사에 몇십년 못 미치는 나의 인생 역정에 그시절 소설 낭독 때의 두근거림이 아직도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마 끝까지 계속 됐고 아나운서와 성우도 겸해서 나갔더라면
지금은 아마 연극배우를 거쳐 노년의 탈렌트로 살지않았을가 하는 공상도 할 때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이 길게 가는 이유는 '잘되는 사람을 밀어주지않는 어떤 풍토였지않나'하는 생각도 들고 나는 가슴만 뛰었지 대응 법을 몰랐습니다. 자랑 같지만 펄벅의 '영원한 사랑'에 등장 하는 16사람? 의 오고가는 대화를 최대한 변화를 주면서 읽을 때의 좋은 기분은 지금도 생생하네요. 결국 "다른 방송국 출연은 안된다"는 한마디에 그 한권으로 끝내게된 것이 못내 아쉬었던 일은 나이 들어가면서 보니 결국은 나의 세월이 그랬었다는 사회와 환경의 이해로 혼자 사귀게 됬는데 오늘 윤길구 당시 부산 KBS국장님이 다른 방송국 성우들도 많았건만 나를 발탁해주심에 본인도 모르고 지내던 나의 재능을 인정해주신 분이라는 때늦은 감사를 마음속에 갖고 있었습니다.
춘하추동방송의 이런 방대한 자료속에 이미 하늘나라에 계신 분이지만 당시의 소설낭독의 기회를 주신 행복했던기쁨을 다시떠올리게되고 몇십년 뒤에나마 진정으로 감사의 말씀을 올릴 수 있게됨을 감사드립니다. 춘하추동 방송에 거듭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이 선배님! 이 글은 댓글은 댓글이되 단순한 댓글이 아니라,
또 한편의 훌륭한 독힙된 글입니다.
이런글로 해서 춘하추동방송은 이어갑니다.
많이 많이 고맙습니다.
머릿속에 잘 간직하고 있다가 다음 기회될때 잘 인용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윤길구 선생님에 관한 글을 카톡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잘보고 감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