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음악 백년

이장춘 2015. 12. 14. 00:28

 

 

 

1957년 라디오 (목포의 눈물-이난영)

 

 

 

 

 

195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던

여성 보컬그룹 최초의 한류스타 김씨스터즈! 

숙자, 애자, 민자 김씨스터즈의 리더 언니 김숙자가

 2015년 11월  2015년 11월 18(방송 16일)가요무대 30년을

 맞은 특집프로그램에 출연 감동의 무대를 가젔습니다. 어머니의

노래 "목포의 눈물", 다방의 푸른꿈, 그리고 자신의 노래 김치깍두기를

 르며 사회자 김동건 아나운서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사회자

김동건은 가요무대에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을 수 많이 불렸어도

오늘의 뜻깊고 감동적인 무대라고 했습니다. 이난영의

 딸이고 김해송의 딸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대한민국인으로는 최초로 미국 명예의

 전당에 올랐던 그 김씨스터즈의 리더 언니 김숙자!

그는 파주에 있던 어머니 이난영의 유골을 목포에 옮겨

수목장을 하러 왔다간지 9년만에 찾은 조국 대한민국에 와서

이날 무대에 섰다고 했습니다.  1957년, 고복수의 은퇴공연에서

불렀던   어머니 이난영의 노래가  녹음으로 울려 퍼지자 참았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눈 섶을 달고 나왔지만 흐르는 눈물은 어찌 할 수 없었다. 고

했습니다.     그날 그 영상과 사진에 얘기들을 모으고

 가요무대 30년 글을 연결했습니다. 그리고 지난날

 올렸던 글 한편을 함께 실었습니다.

     

   

 

 

 

 

김시스터즈 이난영 딸 김숙자 김씨스터즈 최초 한류 보컬그룹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제작한 드라마나

영화가 세계각국에서 방영되고 한국의 가수들이나

배우들이 세계각국을 누비며 한류열풍으로 대한민국의

문화를 세계만방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KBS는 작년과 금년

 2년간 미국, 월남, 중국 등 각 나라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빋으며

공개방송을 통해  K-POP를 선사했고 프로듀서 이수만을 비롯한

소녀시대등 많은 가수 연예인들이 각종 훈,표창을 받았습니다.

최근에 와서 모두의 입에 오르내리는 한류를  일제 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1930년대의 최승희를 들 수 있습니다.

최승희는 그 시절 미국이나 유럽에서 대단한

열풍을 일으키며 한국의 춤 문화를 

만방에 알렸습니다. 

 

 

 

 

우리나라가 해방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래 1954년 KBS어린이 합창단이

3개월간에 걸처 미국을 순회하면서 한국문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등 어찌보면 이들도 한류의 원류라고 할 수 있겠지만

 본격적인 한류스타의  원류는 김시스터즈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만능 천재 연예인 김해송과 가수 이난영의 딸로 태어난

 세 자매는 6.25 전쟁 기간중 어려운 생활을 거치면서 1950년대 중반부터

이름있는 여성 보컬그룹으로 성장해서 1959년 미국으로 건너간 이래

미국 유럽등을 무대로 활동하면서 세계적인 가수가 되었습니다. 

1939년에 태어난 첫 아이로 부터 1940년대 초에 태어난

김씨스터즈가 대중 앞에서 처음 노래를 부른 것은 

1951년 부산가는 미군열차에서였습니다.

 

 

 

 

열 살을 갓 넘은 영자, 숙자, 애자, 새 자매는

 열차에 탄 미군들을 상대로 노래의 뜻도 모르는 영어로 된

세계적인 히트 곡 두곡을 흉내 내어 불렀습니다. 가사도 틀리고

노래가 서툴렀겠지만 어쨌든 그로부터 그들은 대중들 앞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6,25로 아버지를 잃고 먹고 살길이 없던 부산 피난

시절에 먹을 것이 생긴다면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불렀고

렇게 시작된 이들의 노래생활은 혹독한 어머니

이난영의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와

미 8군에서 노래를 부르던 김시스터즈의

 노래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방송국 공개방송에도

 출연했고 극장무대에도 섰습니다. 오늘의 동영상은

그때 김씨스터즈가 KBS 공개홀에서 부른

"닐리리야" “봄 맞이" 입니다.

 

 

동영상 보기

 

 

닐리리아

 

 

 

 

봄 맞이

 

 

 

 

청춘목장을 처음 부르던 때 1956년 손석우 송민영 송민도 김씨스터즈'

 

 

 

 

국내에서 한참 인기를 끌던 김씨스터즈가

미국으로 떠난것은  1959년의 1월의 일입니다. 큰 언니

 영자 대신에 외사촌 민자가 팀에 합류한 것은 이때였습니다. 

 39년생 딸 숙자와 40년생의 냇째 딸 애자 41년생의 외사촌 민자로 

팀이 구성되었습니다. 동양 쇼의 메니져 톰 볼스와 18개월 계약

으로 라스베가스에서 공연을 했습니다. 주급 500불을 받아서

적은 돈이 아니었지만 워낙 써야 할 곳이 많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국내로 돌아오고 싶었지만 성공하기

 전에는 돌아 올수 없다는 어머니 이난영의

완곡함으로 어려움을 이겨냈습니다. 

 

 

 

 

그의 명성이 알려 지면서 1964년에는

주급 20,000불을 받기로 이름 있는 쇼단과 계약이

채결되어 일약 대 스타가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전 미국에 

알려져 미국을 돌며 공연을 가졌고 그때마다 갈채를 받았습니다.

미국에서 뿐만 아니라 로마, 파리, 런던 등 전 유럽을 순회하며 공연을

가졌고 가는 곳 마다 아리랑을 불러 갈채를 받으면서 대한민국을 알렸습니다. 

막내 민자가 사정이 생겨 탈퇴하고 큰 언니 영자가      다시 팀에 합류 한 것은

 1973년의 일이고 1975년,    1980년에는 내한 공연을 가져 갈채를 받았습니다.

우수한 재능과 부지런한 성품을 지닌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아들 딸들은

 지금도 세계만방에서 대한민국을 알리고 대한민국의 문화를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제가 못다 쓴 부분은 아래 영문자 주소에 가사셔

보실 수 있습니다.   그곳의 동영상을 링크함과

동시에 엮인글로 연결 해 놓았습니다.



외국공연 동영상 더 보기

  

 

 

 


화     보

 

 

 

  

 

 

 

 

 

 

 

 



관런글 보기 영문자 클릭

 

 

가요무대 30년특집 동영상 모음 1443회 KBS 2015년 11월 16일

http://blog.daum.net/jc21th/17782673  

 

이난영, 목포의 눈물, 목포는 항구다, 목포 시립교향악단 동영상

http://blog.daum.net/jc21th/17781371

 

저고리 씨스터와 아리랑 보이스, 김 시스터즈와 김보이스, 김해송과 이수만

http://blog.daum.net/jc21th/17782221

 

이시스터즈

http://blog.daum.net/jc21th/17782697

 

 

윤후현(팔방미남) 선생님 글

 

 

대한의 딸들, 보컬그룹 김 씨스터즈,

자랑스럽습니다.특이 목포의눈물, 노래의

 주인공이신 불멸의 가수 이난영의 딸들이라 더 빛이

 난 것 같습니다. 미국,영국, 프랑스등 세계무대에서 노래로써

 대한민국을 홍보하고 그 들의 가치를 인정 받았다고 하니 고무적

입니다.이제 반백의 나이에 다시 고국의 가요무대에 서서 어머님의

 노래를 부르면서 눈시울을 젹시셨다 하니 이 프로를 보는 나의
가슴에도 아련한 추억이 떠 올라 눈시울이 졎어 듭니다..
노래 흘러 한 평생, 인생 흘러 한 평생, 입니다.
고운 소식 감사합니다. 이장춘 사장님!...

 

 

유경환(유카리나) 여사님 글

 

 

60.11.20이라고 사진에 찍흰 글자로 보아

60년 11월 20일 사진인데 제가 15살 때여서 이분들에

대한 기억이 뚜렷하거나 많지는 않지만, 그분들이 불렀던

 노래들은 기억속에 살아있는 노래들도 있어요. 악기를 20여종의

악기들을 다룰 수 있다는 사회자의 소개가 있었듯이 역시
마림바를 두드리는 솜씨가   그분들의   재능을

 말해줍니다.  한류스타의 시발이였군요

 





위,   이냔영과 김 시스터즈

아래 : 목포시가지와 삼학도 지금은 육지오 되었다.

 




 자원순환사회연구소


글 한편을 인용했습니다.

한류의 원조 김시스터즈



2015. 12. 27. 13:38  





한국전쟁 중 당대 천재 작곡가 김해송이 납북되고 만다. 그대로 활동을 계속했더라면 이후 한국의 대중음악사는 달라졌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던 뮤지션이었다. 당장 남겨진 부인과 일곱명의 어린 남매의 생계가 곤궁해졌다.

남겨진 김해송의 부인은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이었다. 알콩달콩 살면서 딱 스무명의 애들만 낳아서 기르자고 하면서 부지런히 애들을 낳았건만, 남편은 납북되어 버리도 연년생 줄줄인 어린 일곱남매만 이난영에게 남겨졌다. 하늘이 무너지고 눈앞이 하얗게 되었을 것이다.


살 길이 막막해진 이난영은 암시장에서 외국 음반을 사다가 딸들에게 들려주면서 무조건 노래를 외우게 했다고 한다. 부모들의 음악적 재능을 물려받았는지 딸들이 노래를 곧잘 했다. 가능성을 확인한 이난영은 1951년 열살 전후의 연년생 딸들인 영자, 숙자, 애자를 멤버로 '김시스터즈'를 결성해 미군 클럽에 진출시켰다. 우리나라 최초의 '아이들' 걸그룹이지 않을까 싶다. (우리나라 최초의 걸그룹은 1939년 결성된 저고리 시스터즈였다. 목포의 눈물을 불렀던 이난영, 오빠는 풍각쟁이야로 유명한 박향림, 연락선은 떠난다의 장세정, 민요가수 이화자로 구성된 4인조 걸그룹이었다. 이들 걸그룹은 당대의 오빠부대를 이끌었던 김정구와 함께 일본 공연도 함께 가고 그랬더랬다...)

이난영은 우리나라 최초의 걸그룹 멤버이면서 이수만이나 박진영을 능가하는 연예기획능력을 가지고 있었지 않았나 싶다. 딸들로 구성된 김시스터즈를 대박시킨 것뿐만 아니라 아들들도 김브라더스로 데뷔시켰으니 말이다.

 


 (저고리 시스터즈)


세 자매는 클럽에서 2차대전 직후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미국의 여성 보컬그룹 '앤드루 시스터즈'의 히트곡을 뜻도 모르고 무작정 외워 노래했다. 앙증맞은 아이들 노래에 미군들은 열광했고, 미군들 사이에 김시스터즈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김숙자씨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미군클럽 공연 때 출연료 대신 위스키 몇 병을 받았고, 이난영이 시장의 암상인들에게 연락해서 쌀과 바꾸곤 했다고 한다.


김시스터즈는 휴전 직후인 1953년 가을, 수도극장(스카라극장)에서 자매 트리오의 탄생을 공식적으로 알렸다. 김시스터즈가 부른 앤드루 시스터즈의 노래는 발음은 엉망이었지만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미8군 클럽의 나름 스타였다.


1958년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아시안쇼를 기획하고 있는 톰 볼이 새로운 흥행거리를 찾기 위해 일본을 찾았다가 그곳 미군들로부터 김시스터즈의 명성을 듣게 된다. 톰 볼은 1958년 한국으로 건너와 김시스터즈의 잠재력을 확인한 후 이난영과 계약을 체결했다. 키가 큰 장녀였던 영자 대신 이난영의 오빠 이봉룡(역시 작곡가였다.)의 딸 이민자(김민자로 개명...어쨌든 김시스터즈의 일원이 되어야 했으니)로 새롭게 그룹을 구성한 후 1959년 1월 9일 미국땅을 밟는다. 해외진출 1호 보컬팀이었다. (최초로 미국에 진출한 한국가수는 옥두옥이다.)

김시스터즈는 라스베가스 선더버드 호텔의 쇼프로그램 '차이나 돌 레뷔'에 둥지를 틀었다. 김시스터즈는 첫 4주동안 매일 밤 2개 쇼에 출연했고, 관객의 반응이 시원치 않으면 4주 후 한국으로 돌아가는 조건이었는데, 다행히 선더버드 호텔공연은 대박이었다. 다른 호텔에서도 공연 요청이 쇄도했다.

이런 대박은 우연히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물론 아시아인에 대한 미국인들의 신비감 등이 작용하기도 했겠지만 세 자매의 각고의 노력이 뒷받침된 결과였다. 이들 자매는 노래에 대한 재능 뿐만 아니라 색소폰, 베이스, 드럼, 가야금, 장구, 북 등 10여 개 이상의 악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다.  


김시스터즈가 라스베가스를 넘어 도약하게 된 계기는 당시 미국 최고의 TV 버라이어티쇼였던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하면서부터이다. 에드 설리번 쇼 출연 이후 세 자매에게 음반 제의가 들어오고, 그룹 코스터스의 히트곡을 리메이크한 '찰리 브라운' 등 12곡을 수록한 첫 음반이 1960년에 출시된다. 거의 모든 곡이 영어였으나, '아리랑'과 이난영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봄맞이'만은 한국어로 했다.


​(미국 TV프로그램에 이난영과 같이 출연한 김시스터즈)


음반출시 이후 '라이프지' 1960년 2월호에 특집화보 기사로 소개되고 '찰리 브라운'은 1962년 빌보드 싱글차트에 오를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공연무대도 라스베가스를 벗어나 뉴욕,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등으로 넓어졌고 주급도 500달러에서 2만 달러를 넘었다. 1967년에는 50만 달러의 세금을 납부해 라스베가스 고액 납세자 중 6위에 랭크될 정도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김시스터즈는 1968년 민자와 애자가, 69년엔 숙자가 결혼하면서 활동이 뜸해졌고, 1970년 한국 귀국공연을 끝으로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았다. 1973년 사촌인 민자가 탈퇴한 후 1975년 큰언니 영자가 합류하면서 1951년의 구성원으로 돌아가 10년간 활동했고, 오빠동생들로 구성된 김브라더스와 함께 6인조로 활동하기도 했다.


애자는 1987년 폐암으로 사망하고, 숙자는 라스베가스에서 부동산업을 하고 있고, 민자는 헝가리계 재즈뮤지션과 결혼한 후 현재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살고 있고 여전히 남편과 함께 공연을 하고 있다고 한다.


올해 제천국제음악영화제 개막작으로 김대현 감독이 김시스터즈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다방의 푸른 꿈 : Try to remember"이 상영되었고, 김시스터즈를 회고하는 조용한 붐이 있었다. 장기하와 얼굴들에서 활동했던 미미시스터즈 자매는 김시스터즈에 대한 헌정공연도 하기도 했고, 이에 맞춰 헝가리에 살고 있는 김민자씨가 방한하기도 했다.



(다방의 푸른 꿈 중의 한 장면)

 

이난영은 미국으로 가는 딸들과 조카에게 "연애를 하지 마라" (그래서 공연끝나고 커피마시자는 은밀한 제의가 들어오면 세 명이 한꺼번에 움직이면서 판을 깨버렸다고...)는 잔소리와 함께 "단계를 밟으면서 위로 올라가라. 그러면 떨어지더라도 붙잡을 것이 생긴다"는 연예계 선배로서의 조언을 했다고 한다.


김시스터즈의 성공에 대해 미국 컴플렉스에 찌들어 있는 한국인들이 너무 주관적으로 열광한다는 비판도 있지만,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가 그만한 성공을 거둔 것에 대해서는 인정해 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김시스터즈의 공연영상을 보고 싶으면 아래 사이트 참조>


http://www.basegrnd.com/bbs/board.php?bo_table=ent&wr_id=360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김시스터즈 아리랑1.mp3

 

 


- 첨부파일

????? ???1.mp3  
   
비밀댓글입니다
대한의 딸들, 보컬그룹 김 씨스터즈, 자랑스럽습니다.
특이 목포의눈물, 노래의 주인공이신 불멸의 가수 이난영의
딸들이라 더 빛이 난 것 같습니다.
미국,영국, 프랑스등 세계무대에서 노래로써 대한민국을 홍보하고
그 들의 가치를 인정 받았다고 하니 고무적입니다.
이제 반백의 나이에 다시 고국의 가요무대에 서서 어머님의 노래를
부르면서 눈시울을 젹시셨다 하니 이 프로를 보는 나의
가슴에도 아련한 추억이 떠 올라 눈시울이 졎어 듭니다..
노래 흘러 한 평생, 인생 흘러 한평, 입니다.
고운 소식 감사합니다. 이장춘 사장님!...
60.11.20이라고 사진에 찍흰 글자로 보아 60년 11월 20일 사진인데
제가 15살 때여서 이분들에 대한 기억이 뚜렷하거나 많지는 않지만,
그분들이 불렀던 노래들은 기억속에 살아있는 노래들도 있어요.
악기를 20여종의 악기들을 다룰 수 있다는 사회자의 소개가 있었듯이 역시
마림바를 두드리는 솜씨가 그분들의 재능을 말해줍니다.
한류스타의 시발이였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