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방송역사 90년

이장춘 2017. 2. 23. 13:15

 

 


1945년 광복의 해가 저물어 가던

 12월 27일 청천병력 (靑天霹靂) 그야말로

날벼락이 떨어졌다. 일본이 물러갔으니 독립이

 올 것이라는 국민들의 가슴에 찬물을 껴않은 것이다.

 처음에는 전 국민이 하나 된 마음으로 반대의 깃발을

들었다. 그때의 방송도 당연히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

했어야 했지만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를 못았다.

군정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한국방송 역사 90년 (13) 신탁통치와 방송



그런 가운데 해가 바뀌면서

1946년이 되자 소련의 사주를 받은

좌익세력은 뜬금없이 신탁통치 찬성을 들고

 나왔다. 정국은 어수선해졌다. 그때 두 명밖에 없던

방송국 기자 문제안이 취재해서 올린 신탁통치 반대를

왜치는 국민의 목소리는 검열과정에서 사라져 버리고 그에

항의하던   문제안 군정으로부터 눈 안의 가시가 되어 결국

얼마 안 있어  군정에 의해서 파면되고 말았다. 대한민국 땅에

있던 방송은 군정의 휘하에서 대한민국 국민을 대변하는 방송이

아니었고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하기 시작했다.    우익진영과

좌익은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대치하면서 민족분열은

 가속화 되었다.   그 역사의 소용돌이 그때의

신탁통치와 방송을 요약해서 올린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코바에서 열린

3상회의에서 미, 영, 중, 소 4개국이 우리나라를

신탁통치하기로 했다는 내용이 국내 각신문과 방송을

 통해서 전해지면서 해방정국을 강타했다.      일본군이

 물러나면 해방이 온다는 국민들의 기대에 찬물을 껴않는

소식이어서 이로부터         신탁통치를 놓고 온 나라가

들끓었다.      12월 30일 송진우선생이 암살당하면서

해방공간의 첫 희생자를 냈고 김구선생님은 목숨을

 걸고 신탁통치를    반대 한다면서 대대적인

 신탁통치 반대시위를 준비했다.





1월 1일 이 나라를 통치하던

하지는 김구선생님을 불러 설득했지만

 김구선생님은 끝까지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처음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이던 좌익계열

에서는 새해 들어 찬탁 쪽으로 기울어

졌다.  이로부터 나라의 뜻은 완전

둘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신탁을 반대하는 우익진영과

찬성하는 좌익진영은 극명히 갈라지고

 경축분위기 속에서 치러졌어야 할 행방 후

처음 맞는 3.1절 행사마저도 둘로 갈라져 치러졌다.

군정청과 국민들의 추앙을 받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이 大韓國民 代表民主議院을 구성하고 거국적인 3.1절

 행사를 하려고 했지만 신탁통치를 놓고 생각이 달라진 좌익

계열 사람들은 다른 장소에서    다른 생각으로 기념행사를

가졌고 민족의 비극은 깊어 갔다.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렸던

 독립을 맞았건만 3.8선이 굳어지고 신탁통치라고 하는

 생각치도 않았던 걸림돌로 나라가 갈라지고

생각이 달라져가고 있었다. 



서울운동장 삼일절 행사장에 나온 인사들

 오른쪽에서부터 오세창, 신익희, 이범석, 윤치영,

임영신, 뒤에 얼굴 보이시는 장택상



삼일절 행사는 서울에서만도

네 군데에서 열렸다. 군정청과 우익

진영의 대표들이 모여 개최한 보신각에서의

3.1절 행사가 주를 이르는 가운데 좌익계열로

 구성된    3·1記念全國準備委員會는 남산에서,

민주주의민족전선은 탑골공원에서, 또 일부

우익단체는 보신각의 행사와는 시간을

 달리해서 서울운동장에서

행사를 가졌다.





삼팔선이 그어지고 1946년

 들어 찬탁, 반탁하면서 서로가 등을

돌리고 돌아선 가운데 처음 맞는 삼일절 

행사는 민족의 분열이 깊어지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고 곧이어 1946년 4월 터진  남노당의 정판사

 사건이 터지면서  공산당은  불법화 되고 

·우가 완전히  갈라서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 유명한 조선정판사위폐사건

 朝鮮精版社僞幣事件이란   1945년

10월 20일부터 6회에 걸쳐 조선정판사

 사장 박낙종(朴洛鍾) 등 조선공산당원 7명이

 위조 지폐를  마구 찍어내어 그들의 자금줄을 

 마련함과 동시에 경제질서를 교란시킨 사건

이다. 1946년 7월 28일자  동아일보

한면을 올렸다.






신탁통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 소  공동위원회를 결성 해결

코저 했지만  그 위원회는 계속 공전되고

국민의 마음이 갈라지면서 남과 북이 더 멀어

졌다.   1947년 8월 10일 미소 공동위원회 미국 측

 수석대표 브라운 소장은   “한국 국민이 신탁통치를

 반대하면   그 민의에 따르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는

의사를 밝혔고 9월 17일 이 문제는 UN총회에 회부되어

11월 14일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는 것으로 낙착

되었다. 그에따라 남한만의 총선을 거쳐 정부가

수립되었고 북한정권이 따로 세워져 남과

 북은 완전히 둘이 되었다.

 

 

 

 

 

그때의 방송국 사정은 군정의 지휘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보도는 가능했지만

모스코바 삼상회의를 실현시키려는 군정의 뜻에

 어긋나는 방송을 하는데는 한계가 있어서 어려움을

었다. 당시의 문제안 기자는 1945년 12월 말 신탁통치

소식이 전해 졌을때 각 단체 대표들의 목소리를 담아 30분간

방송 할 수있는 기사를 썼다가 불발되기도 했다. 그때까지는

공산당도   반대 입장을 표명해서   모두가   한 목소리를

 냈을때였다. 방송인들은 국민의 뜻을 받들어 국민과

 함께 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 했지만 그것이

실현될 리가 없었다.

 

이로부터 방송은 국민들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고 방송이 국민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입장에 앞장 서 온 문제안기자는

군정청의 눈총을 받다가 6개월 후 파면당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문제안 기자의 그때

얘기와 모스코바 3상회의 내용을

 함께 올린다.

 

 

문제안 선생님의 그 때 그 얘기

 

 

 

 

 

신탁통치 문제가 터지자, 서울 거리는

8·15 때보다도 더 무섭게 또다시 폭발했다.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함성이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나는 12월 30일 아침부터 경교장의 김 구선생,

돈암장의 이승만박사, 근민당의 여운형 선생, 공산당의

박헌영 선생 (선전책 정태성 대변인) , 김규식(경교장

에서) 선생 다섯 분에게서 골고루 다 담화를

 들어 30분짜리 정치 기사를 썼다.

 

그러나 글자 하나 빼지 않고 번역까지

 해서 제출한 내 기사는 미군 감독관으로부터

검열이 나오지 않았다. 방송국에 파견 나온 미군

소령까지도 너무 중대한 기사이기 때문에 책임질 수

 없다고 공보처장인 뉴먼 대령 사무실을 거쳐, 하지 중장

 사무실까지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6시 뉴스 시간에

방송할 예정이었으나, 검열이 나오지 않아서 7시, 9시,

 10시, 11시. 이튿날인31일 아침까지도 내 기사는

 돌아오지 않았다. 신탁 통치에 대한 그 불같은

 반대 소리는 이렇게 해서 중앙방송국의

전파를 타지 못하고 말았다.

 

이것이 우리 방송국이 우리 겨레와

멀어진 첫 사건이었다. 그렇게도 민중의

 지지와 환호를 받아온8. 15후의 우리 방송은

'미국의 앞잡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나를

비롯한 한국인 전 직원들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 사람을 위한 방송' 으로  되돌아  가자고,

 권고도 하고, 애걸도 했다.   그러나 미군들은

'오만한 주둔군'의   껍질을 벗어 던지지를

못하고 사사건건 간섭을 하려 들었다.

 

방송은 점점 인기가 떨어지고,

결국에 가서는 미군 감독관들은'한국 방송

 개선책'을 현상 모집까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국인 직원들은 열심히 의견들을 써 내놓았다. 나는

 배알이 뒤틀려서 내놓지를 않았다. 6월 하순의 어느

 일요일 날. 홍수가 휩쓸고 지나간 영등포 저지대

-지금의 목동일대-의 이재민들이 힘차게


 일어서려는 복구 작업 현장의

현지답사 기사를 쓰고 있는데, 미군

 감독관 한 사람이 "당신 기사는 시와 같다"고

비행기를 태워가며 한국 방송 개선책을 쓰라는

 것이 아닌가.    아니꼬워서 3년 전에 먹은

송편이 곤두선 채 튀어나올 판이었다.

 

그래서 나는 남이 말할 때에는

 콧방귀도 안 뀌다가, 새삼스럽게 개선책을

 말하는 그 '오만'과 '위선'에 분통을 터뜨리고

말았다. 솔직하게 그 오만과 위선을 지적하는

건의서를 휘갈겨 써서 내놓고 말았다. 그것은

 미군 방송정책에 대한 통렬한 공격이었고,

나의 결연한 '일인 투쟁 선언'이었다.


 (달걀로 바위를 때린 것이었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나는 그렇게도

떠나기 싫던 서울방송국에서 ‘파면’

이란 이름으로 쫓겨났다.

 

내쫓긴 바로 그날 오후 2시에

조선통신사 기자로 취직해서 신문기자

 20년의 내 인생이 새로 시작되었다. 그 때,

그 건의문을 지금도 나는 갖고 있다. 그러나 반미

감정이 수그러져서, 우리겨레가 모두 다 어른스러워

졌을 때, 천천히 공개할 생각이다.   어쨌거나, 한국

초대 방송기자의 생명은 1년을 채 채우지 못하고

그 역사적인 막을 내리고 만 것이었다.

 

 

모스코바 3상회의 결정내용

 

 

 

 

1945년 7월말에 열린

〈포츠담회담〉에서는 전후 처리를

 위하여 미·영·소 3국 외상회의를 개최하기로

 한결정에 따라 1945년 12월 16일에서 25일까지

 회의를 열고, 12월 27일조약 문서에 서명해서

모스크바 현지 시간으로 12월 28일 오전

 6시에발표된 결정서 3항의 한국

관계 전문(全文)이다.

 


1. 코리아를 독립국가로 재건하고

또한 민주적 원칙에 바탕을 둔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여건의 창출을 위하여, 그리고

 장기간의 일본지배로 인한 참담한 결과를 가능한

 빨리 제거하기 위하여, 코리아의 산업과 운수 및

 농업     그리고  코리아인의   민족문화 발전에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임시적인 코리아

 민주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2. 임시적인 코리아 정부의 구성을

 돕기 위하여 그리고 적절한 방책을 미리

만들기 위하여, 남부 코리아의 미군사령부와

 북부 코리아의 소련군사령부의 대표들로써

구성되는공동위원회를 설립할 것이다.


공동위원회는 그 제안들을 준비함에

 있어서코리아의 민주적 정당·사회단체들과

협의할 것이다. 공동위원회가 작성한 건의서는

공동위원회에 대표권을 가진 양국 정부가 최종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소·중·영·미 정부들의

심의를 위하여 제출되어야 한다.

 

3. 임시적인 코리아 민주정부와

 코리아의 민주적 단체들의 참여 아래,

 코리아의 정치-경제-사회적 진보와 민주적인

 자치정부의 발전 및 코리아의 민족적 독립의 달성을

위하여 협력·원조 (신탁통치) 할 수 있는 방책을 작성하는

것이 공동위원회의 임무이다.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코리아

임시정부와 협의를 거친 후에, 최고 5개년에 걸치는

코리아 4개국 신탁에 관한 협정의 체결을 위한

미·소·영·중의 공동심의에 회부될 것이다.

 

4. 남부 및 북부 코리아 모두에

영향을 미칠 긴급한 문제들을 심의하기

위하여, 그리 고 행정·경제적 문제들에 있어서의

 남북 양 사령부 간의 영구적인 협력을가능케 할 방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코리아에 있는 미국사령부와 소련

사령부의 대표로 구성된 회의를 2주일

 내로 소집할 것이다.

 

최초로 생긴 3.8선 경계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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