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기술

이장춘 2016. 3. 28. 05:35





포항방송국 기술과장시절 울릉도

TV중계소 업무수행을 위해 성인봉을 오르는

고세혁선생님 70년대 모습이다. 1950년 6.25사변으로

국가운명이 위기에 처했을때 만약에 대비해서 그해 8월부터

긴급히 제주에 방송국을 세우기 시작해서 9월 10일 방송전파를 

내 보냈다.  1950년 1월 대한해운공사 제주지사에 근무하던 고세혁은

 새로 세운 제주방송국 개국요원으로 특채되어 방송국 기술자가 되었다.

 그 무렵 촬영한 아래 사진을 66년의 세월이 지나 93세가 된 오늘 확대경을

통해 보며  그 사진속 인물들의 이름을  기억해서 부르는  고세혁 선생님의

육성녹음을 듣고 계신다. (이하 존칭생략), 방송역사의 현장을 기록으로

 보존하고 계시는고세혁 선생님을 찾아 2016년 3월 17일 부산에서

  방송사료를 받으며 얘기를 들었다. KBS사우회장을

지낸 정근춘님과 함께서다.





위 사진은 1.4후퇴로 부산으로 옮긴

중앙방송국에서 피난 車에 싣고온  500W송신기를

제주방송국에 설치하고 촬영한 기념사진이다(1951년 3월

10일). 앞줄 왼쪽부터 하정식(하점식),  이성실,  이덕빈, 문종학,

김인지(국장), 박능상(방송국 건립책임자-기좌), 이길선, 정경순, 현승국,

 강남수, 뒷줄 왼쪽부터 유해룡, 노석인, 장병양, 이순길, 고두천, 고세혁, 권중훈,

정관영, 김문석, 고세혁 육성중, 박과장이란 위 박능상을 말함이다.  1952년 9월

개국  2주년 기념방송에 불만을 품은 공비들이 방송국을 침입 방송인들을

 납치 학살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방송과장 김두규를 비롯해서

 채종식,  김석규님이 학살당한 것인데   육성으로 듣는 본인 

대신에 다른 사람이 죽었다는 말은   이때를 두고 한

말이다. 자세한 예기는 제주방송국편에 있다.   



방송인 고세혁선생님 방송역사를 말하다. 1950년부터 사진과 육성 



1924년 제주에서 태어난 고세혁은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학교를 다녀 1944년

일본 나가노 고등무선전신학교를 나왔다. 1945년

해방 될 무렵 동경 신일본 인쇄주식회사를 다니다가 1946년

국내에 돌아와 교통부 해사국에 근무했다. 1950년 들어 이 직제가

폐지되면서 대한해운공사 제주지사에 근무하던 중 6.25가 일어났을때

급히 제주에 방송국을 세우면서 특채되어 근무했다.   제주방송국 최초의

 현지채용 직원이기도 했고 현존하는 6.25때의 방송인중 몇분 안되는 분이기도

하다.    6.25전에 방송국에 들어 온 분으로는 호기수, 박경환, 위진록, 김성배,

정관영, 김일영, 한영섭 님이 생존하신다. 아래 사진은 제주방송국 창립 두돌을

맞아 노창성 중앙방송국장이 함께 한 사진이다.   김인지 제주방송국장을 

비롯, 앞줄   왼쪽부터  이사동,  김인지(국장)  노창성  (중앙방송국장)

박능상(개국책임자), 김두규(방송과장) 뒷줄 왼쪽부터 강방자

김춘자, 정의진, 고두진, 고세혁, 장병량, 김홍린, 권중훈,

 김석규, 현승국님과 함께 촬영한 사진이다.





이 사진은 세사람의 방송인이 학살당하기

직전에 촬영한 사진이기도 하고 또 고세혁은 이

사진을 촬영한지 얼마 안 있다가  제주를 떠나 이동방송

차를 탔다. 이동방송차란 전국의 방송국이 제 기능을 발휘 할 수

 없던때  장비를 차에 싣고 옮겨 다니면서 방송을 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어 미국에서 들여온 차로 1952년에 처음 들어왔다.   주로

전선띠라 옮기면서 방송을 실시한 이 방송차는 군 요충지

원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위 사진은 1952년 11월 원주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이 차에는 일제강점기

초기 방송시절부터 방송국에 근무했던 신경석을

국장으로 기술자, 아나운서, 행정요원, 운전기사로 팀을

이루웠다. 앞 중앙에 앉은분이 신경석 국장이고 앞줄 왼쪽은

운전원 이길선, 맨 뒷분 고세혁, 중앙의 샤쓰 입은 분은 서무 유해룡,

그리고 오른쪽 아나운서 이순길, 또 한분 이름이 생각나지 않은 민씨라고

 했다.   필자가 이 이동방송차 사진을  보유하고 있지만 이처럼 사진 촬영

날자와 구성원 성함이 명시된 사진은 고세혁 사료를 통해서 처음 본다. 

아래는 1953년 11월 춘천이동국이라고 쓰여있다.  차에는 공보처 이동

방송대 라고 쓰여있다. 이때는 고세혁이 춘천방송국에 배속되어

있을때라 이 이동방송차가 춘천에 왔을때 함게

 촬영한 사진이라고 생각된다.





 이 차는 뒷날 속초에 정착하면서

속초이동방송국이 되었고. 따라서 속초방송국

초대방송국장은 신경석이다. 신경석은 오랜세월

 방우회 회원으로 활약했다.     고세혁은 10개월간 이

 이동방송차를 탔다고 했다. 그리고 춘천방송국으로 갔다.

여객버스가 없던 시절 군용차량을 이용해서 갔다고 했다.

춘천에 도착한 고세혁은 암담했다. 6.25 최전방으로 잿더미

 되어버린    춘천에서 방송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전혀

안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써 놓은 춘천

방송국 어제와 오늘 글 일부를 옮긴다.


  6.25는 춘천방송을 1953년
9월까지 중단하게 만들었습니다.
 춘천방송국에 단신으로 돌아온 문돈식
 국장은 춘천여고 뒤의 타다 남은 경찰국장
관사 한쪽에서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방송요원은 국장님 외에
김성열 기술과장님, 고세혁님 (지금은
부산에 거주)등이 방송국을 지키시는 정도였고 
방송은 250W앰프와 확성기 3대를가지고
  지엽적인 유선방송을 했을 뿐 정상적인
방송은 아니었습니다.
 
그 뒤에도 시내 곳곳을 연결하는
유선방송을 통해서 방송을 들어야 했고
 RC 12호짜리 송신기를 때로는 리어카에 또
미군차라도 빌릴 수 있을 때는 그 차에 싣
다니면서  방송을 해야만 했습니다.
 
바로 이무렵 1953년 고세혁이
춘천방송국에 배속된것이다. 고세혁은
그때를 말한다.   리어카에 발전기와 엠프를 싣고
다니면서 하는 두 이동방송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방송을 들을 수 는 라디오 수신기도 갖은 사람이 별로 없던시절
 그나마 레시버로 방송을 듣던 광석라디오로 방송을 듣고 있던 시절이다.
그리고 방송국에는  돈이 없었다.    방송국장을 비롯해서 직원들이 수시로
바뀌던 때라 춘천방송국은 공보처의 대기소라고도 했다. 1953년부터 1960년
까지 17명의 국장이 바뀌었다. 이때 예전에 제주에서 알았던 1군 사령관 송요찬을
 만난것이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그 인연으로 전차부대에서 1주일에 한드럼씩,
세개의 전차부대에서 세드람의 휘발유를 받고 헌 발전기를 사서 고쳐 사용함과
동시에 춘천에 주둔하던 미 4 유도탄 기지 사령부에서  10Kw 발전기를 받아.
발전을 해서 방송국에서도 쓰고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던
춘천의 일반가정에 전기를 공급해서 받은 돈으로 방송국
운영비에 썼다고 했다. 참으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나 있었던 이야기다.





고세혁이 처음 춘천방송국에 배속되었을때는

문돈식국장이 재직하고 있었다.   리어카에 엠프를

싫고 다니며 방송을 했다. 미군 막사로 쓰던 판잣집 (위 사진)

에서 방송을 시작한 것은 1955년 9월의 일이다. 판잣집 가건물에

300W송신기를 설치하면서  그런대로 방송이 시작되었다.  고세혁이

이 사진을 보존하고 있었다.   2014년 춘천방송국 70년사를 발간 할때도

 이런 사진은 없었다. 고세혁이 보존한 기록은 이나라  방송사를 더듬는데

참으로 소중한 사료다.    이런 사진이 없었다면 이런 건물이 방송국

 건물이었다고 믿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것이 그나마 

복구되어가는 춘천방송국 사옥이었다는 것이다. 필자도

 지금까지 말로만 들어왔던 사옥 건물이다.


이 사진에 나온 건물 모습과 인물을 자세히

보았다. 판잣집 중앙 현관 앞에는 HLKM 춘천방송국

호출부호가 선명하다. 지붕이 낡은 스레이트로 된 판잣집이고

붕 중앙에는 날로 연도가 솟아있다. 춘천방송국에 자동차가 없던시절

 뒷편에 자동차 한대가 있고 중앙에서 온듯한 인물이 이 사진속에 있다. 이때

춘천방송국장은 서희택님(왼쪽에서 세번째 키 큰분)이다.   6.25때 대구방송과장

으로 재직하던 분인데       KBS사우회 회장을 지낸 서병주님의 부친이기도 하다.

서희택님은 오랜세월  대구방송국에 근무하던 분으로 대구방송국 전시 방송과장 

이곳 춘천방송국장  그리고 1954년 9월 6일부터 1957년 6월 19일까지 대구방송

국장을 지내셨다. 이 사진의 설명이 없어 잘 알 수는 없지만 서울에서 온 남학현

 (왼쪽 두번째), 박은상 (왼족에서 네번째) 그리고 고세혁, 송경원 아나운서가

 함께 사진이다.        송경원은  1964년까지   이곳에 근무하다가

중앙방송국으로 옮겨  '누가 누가 잘하나' 어린이 공개방송

등을 담당했다. 송경원이 이때에도 이곳

에서 근무한것은 미처 몰랐다.


 



1958년 새로 마련한 청사 앞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춘천방송국 직원들과 서울방송국 최계환, 이호로님이 함께

 한 사진으로 앞줄  왼쪽 두번째부터 이호로(음악계장), 최계환,

김득성 (춘천방송국장), 이승균 (기술과장), 뒷줄 남광명, 민서운

 송경원, 김영옥 (현 탤런트), 김태호. 김영길, 고세혁, 조찬길, 이기선, 

고재록이다. 기술과장 이승균은 1957년 춘천방송국에 배속되어 새로운

춘천방송국을 세우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지금보면 시골 면사무소

 보다도 더 작은 보잘것 없는 사옥이지만 그때로서는 현대식 훌륭한

 건물이라고 했다.    이 건물 조조정실 안에 1Kw송신기와 300w

송신기가 있었고 뒷쪽  문 앞에 1Kw송수신용 안테나 철탑이 

있었다.  아래는 그때의  기술과 직원들이 함께 한

사진이다. 이승균, 고세혁, 조찬길

최동철이 근무하던 때다.






속초방송국 시절



원주에 있던 이동방송차가 어업전진기지

속초로 옮긴것은 1956년 3월 5일이고 그해 8월 1일

부터 속초이동방송국이라는 이름으로 정규방송을 내 보냈다.

출력 300W, 주파수 1,000KHz, 이때도 속초에는 전기가 들어가지

않아서 발전기에 의존했다. 속초 이동방송국은 5.16이 일어나고 얼마

 안있어 1961년 12월 31일자로 정식방송국으로 승격해서 호출부호 HLCS로

 방송을 내 보냈다. 이때 고세혁이  속초방송국 기술과장으로 부임했다. 아래

사진은 1962년 3월 26일 개국후 얼마 않된 속초방송국에 이원우 공보부 차관이

왔을때 함께 촬영한 사진이다. 앉은분 두번째 신경석 속초방송국장, 이원우

공보부 차관, 민유동 방송관리국장, 뒷줄 왼쪽에서  두번째 박찬규, 세번째

 김옥영, 다섯번재 분이 고세혁님이다.  이 밖에도 김점학, 김영길, 

김중기, 박석규님등이 근무했는데 사진 획인이 않된다.






위 사진을 보면 하단 오른쪽에

지난날 활동하던 이동방송차가 폐차되어

있음을 본다. 아래 사진은 1962년 3월 발전기를

수리하는 장면이다.  속초에 아직 전기가 들어가지 않을

여서 발전기에 의존했다. 필자가 속초에 처음 간 것은 1965년

이었는데 그때까지도 속초는 전깃불 없는 어둠 컴컴한 도시였다.  

그 시절에는 전기가 들어온 지역에서도 늘 예비 발전기는 필요했다.

전기사정이 좋지 않던 시절이라 어느때 정전이 될 지 알 수 없어

 늘 긴장 해야만 했다. 만약 잠시라도 정전이 되어 우리방송이

나가지 못할때는 북한방송이 국내방송처럼 들려오던

때였다. 우리방송 근처의 주파수에서 북한방송이

 들릴때는 우리방송이 북한방송을 중계방송

한다는 오해를 받을때도 있었다.








1962년 3월 속초방송국 조정실이라고 했다.

그 시절 지역방송의 시설을 보여주는 좋은 사료다.






위 사진은 1962년 1월 2일 오후 1시 42분에

촬영한 사진으로 속초앞바다의 해난사고 현장이다.

아래는 그 해난사고 실황을 신속, 정확히 보도한

 공로로 받은 공보부 장관의 표창장이다.





고세혁선생님은 제주에서 시작,

이동방송국과 춘천방송국을 거쳐 다시

 이동방송국이 정규방송국으로 된 속초방송국으로

 갔고 또 다른 이동방송국이 방송국으로 승격된 포항

방송국으로 옮겨  1975년까지 오랜세월 이곳에  재직하면서

 많은 일들을 했다. 특히 동해의 고도 울릉방송을 위해 쏟은 정열과

피, 땀어린 노고는 방송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다. 1950년대 이동방송차는

 1952년에 들어온 차와 1957년에 들어온 두대의 차를 합에서 3대가 있었는데 

이 3대의 차가  어업전진기지  속초, 포항, 여수에 정 착하면서  각각 현지

이동방송국이 되었고    1961년 12월 31일을 기해서 정규방송국으로

승격되었다.   고세혁은 이동방송국 차를 타던 시절부터 속초,

포항에서 재직해서 이동방송국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고세혁은 1980년까지 남원 방송국 등

 방송국 기술과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울릉도에

 라디오와 TV중계소 건설, 영일 대규모 송신소 건설,

남원방송국 10Kw송신소 건설 등 힘을 기울이다가 정년

퇴직 후 부산에  사셨다.  고세혁 선생님과 관련한 다른

얘기는 앞으로도 쓸 기회가 있으므로 오늘은  방송

사료 사진을 올리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정근춘 전 KBS사우회장과 고세혁 선생님이 방송사료를 살펴보고 있는 모습


정근춘 전 KBS사우회장과 필자가 2016년

 3월 17일 부산을 찾아 고세혁 선배님을 만나기로 했는대 

그날  부산역에 나오셔서 기다리시겠다던 선배님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한참 돌아다니다가 곁에 노인 한분이 서 계셔서

자세히 보니  이분이 바로 고세혁 선배님 이었는데 6-7년동안

너무 변해버린 고선배님을 선뜻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

니다. 세월의 무상함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80대 후반까지 부산에서 먼 KBS사우회

서울 모임에 자주 참석 해주셔서 뵈었는데 서울

모임에 참석 안 하신지가 6-7년이 되었고 올해 93세라고

 하시니 그동안 알아볼 수 없게 변해 버리신 것입니다. 더할나위

 없이 반가움 속에서도 그토록 변하신 모습, 걸음걸이도 많이 불편

하신 그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찡하게 울려옴은 어찌 할 수가 없었

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힘찬 목소리는 예나 크다름

 없으시고 확대경을 통해서나마 글씨를 보시는 보습을 

보며 한편으로는 흐뭇한 마음이었습니다.



윤후현(팔방미남) 선생님 글



고세혁 노 선생님!의 방송역사 사진과

음성 녹음 잘 들었습니다. 제 선친과 동갑이신데

제 선친은 29년전(1987년)에 작고 하셨지요. 몸은 비록

늙으셨지만 목소리에서는 젊은 기백이 살아 있는 것 같습니다.
글을 보다가 제일 끝에서 이장춘 사장님!의 얼굴(부산역에서
찍은 사진 인 것 같음)을 발견하고 다시 찍어서 제 블록로

 모셔 왔습니다.멀리 부산 까지 왕림 하시어 보내

 주신 소식 감사합니다. 춘하추동방송

이장춘 사장님!...



유경환(유카리나)여사님 글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상태에서,

 제주, 울릉도등 오지를 다니시며 방송의 기술과 

  역사에 너무도 중요한 중추로 평생을 일관하신 고세혁

선생님의 활동하셨던 사진들을 보니 참으로 소중합니다. 93세

이신 어른의 이나라 방송역군으로 힘써오신 일들이 사진으로 남아

 영원히 춘하추동방송 블로그에 기록, 저장되게되니, 고세혁 선생님의

 연세를 생각할 때, 참으로   이장춘 국장님과 정근춘 회장님께서

귀한 걸음을 하셨습니다.  기록의 중요함을 생각하신

두분의 역사관과 실천에 큰 박수를 드립니다.



관련 글 보기 영문자 클릭         



울릉도 최초의 TV방송 그때 그 얘기 TV중계소 설치 고세혁 정근춘님

http://blog.daum.net/jc21th/17782819


6.25 한국전쟁과 제주방송국의 탄생

http://blog.daum.net/jc21th/17782815


KBS 제주방송총국의 어제와 오늘

사진으로 본 KBS 제주방송총국의 역사

http://blog.daum.net/jc21th/17780652

        

6.25때의 이동방송에서 이동방송국까지


KBS 춘천방송총국의 어제와 오늘 (1)

http://blog.daum.net/jc21th/17780328


속초방송국의 추억

http://blog.daum.net/jc21th/17781150


  

고세혁 선생님 방송사료












































 







고세혁 녹음편집.wma






- 첨부파일

고세혁 녹음편집.wma  
   
고세혁 노 선생님!의 방송역사 사진과 음성 녹음 잘 들었습니다.
제 선친과 동갑이신데 제 선친은 29년전(1987년)에 작고 하셨지요.
몸은 비록 늙으셨지만 목소리에서는 젊은 기백이 살아 있는 것 같습니다.
글을 보다가 제일 끝에서 이장춘 사장님!의 얼굴(부산역에서
찍은 사진 인 것 같음)을 발견하고 다시 찍어서 제 블록로 모셔 왔습니다.
멀리 부산 까지 왕림 하시어 보내 주신 소식 감사합니다. 춘하추동방송 이장춘 사장님!...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상태에서, 제주, 울릉도등 오지를 다니시며 방송의 기술과 역사에 너무도 중요한 중추로 평생을 일관하신 고세혁 선생님의 활동하셨던 사진들을 보니 참으로 소중합니다.
93세이신 어른의 이나라 방송역군으로 힘써오신 일들이 사진으로 남아 영원히 춘하추동방송 블로그에 기록, 저장되게되니, 고세혁 선생님의 연세를 생각할 때, 참으로 이장춘 국장님과 정근춘 회장님께서 귀한 걸음을 하셨습니다.
기록의 중요함을 생각하신 두분의 역사관과 실천에 큰 박수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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