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복수 재미시인

이장춘 2016. 2. 13. 18:42





시인, 시 암송가, 화가 등등 수많은

수식어가 붙은 85세의 할머니 박시인과 이메일을

주고 받다 보면 80대 중반에 인생을 그토록 아름답고 

보람있게 사실 수 있는가.   감명을 받는다. 「세상 떠날 날을 

바라보며 떠나기 전에 세상 사람들에 줄 수 있는것이 무엇이냐?」를 

 생각하며 사신다는   박복수 할머니! 미국에서 왕 언니로 통하는 박시인!.

 "같은 나이에  젊어 보이는 사람이 있고,   늙어 보이는 사람이 있는데

늙어 보이는 사람은 욕심이 많아 남의 나이까지  다 빼앗아 가서

그렇답니다. 젊어 보이는  분은 남에게 자기 나이를 논아줘서

 어려보이는 것이랍니다. "  그러면서 젊게 사신다.


외과의사였던 아버지는 6.25 동난 때

납치 당한후  어머니는 4남매를 기르며 살았다.

그 가운데 한분이 박시인으로 서울 사범대학을 나오고

 미국유학길에 올라  1961년 U.C.L.A에 입학 수학중 대학원생

박영곤을 만나 결혼했다.  그로부터 아이가 생기고 공부가 여려워져

대학은 수료했어도 학점미달로 졸업장은 받지 못했다.    결혼을 해서

살아도 어머니는 늘 곁에 계셨다. 아래 사진은 화가 박시인이 스스로

그린 어머니 초상화 옆에 서 있는 모습이다.    4남매를 훌륭하게

 길러낸 어머니는 1980년대 중앙일보에서 賢夫人賞을 받았다.

오늘 얘기는 스스로 쓴 글 어머니와 라일락

글로부터 들어간다. 이 글은 박복수시인의

삶의 단면을 볼 수 있다. 





어머니와 라일락

박 복 수


라일락은 원래 유럽 산이지만 지금은

아시아에 많이 분포되어있다. 꽃은 늦봄에 피는데

 품종이 개량 되어 흰색, 연보라색, 붉은 보라색등이 있으나

 보라색 계통의 꽃이 주를 이룬다. 꽃은 외겹으로 피는 것과 여러

 겹으로 피는 것이 있어서 한 꽃대에 작은 꽃이 사방으로 여러 개 모여

핀다. 라일락은 꽃 핀 모습도 장관이지만, 은은한 향기는 어느 꽃도

따를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이다. 꽃의 향기가 뛰어나서 향수의

원료로 쓰이기도 한다. 토질을 특별히 가리지 않으며

 햇볕을 좋아하는 양지식물이다. 


 어린 시절 내가 살았던, 집 마당 중앙에는

 라일락 한 그루가 정원수로 심어져 있었다.  우리 집

대문은 동쪽을 보고, 대문을 들어서면 오른 쪽으로 중대문이

남쪽을 향해 나있었다. 중대문이 열리면 바로 라일락이 제일 먼저

반겨 주어 온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중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

 아랫방은 오빠가 쓰는 방이었다.    외삼촌의 아홉 자녀들 중, 장남인

 사촌오빠는   가정교사가 있는 우리 집에 와서  오빠 방을 함께 썼다.

왼편 아랫방이 내방 이였고 내 옆방은 가정교사가 쓰고 있었다.

옆엔 곡간이 있고 구석방은 침모(針母)가 썼는데 젊은 과수였다.

 어머니는  꽃 장사 아주머니에게  좋은 자리를 찾아보라

부탁하여 침모는 시집을 가게 되었다. 어머니는 

장롱까지 마련해주셨다.


고아였던 가정교사 박종식 아저씨는

할아버지가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주셨다. 안방은

어머니가 쓰셨고, 대청 건너의 건넌방은 아버지 방이다.

방안 북쪽과 동쪽에 놓인 책장엔 천장에 닿을 정도로 책들이

쌓여있었다. 어머니도 복수가죽 구두; 하이힐을 신고 다니시던

신여성이었다. 내외분이 종로에 있던 단골 포목상인 ‘윤상회’에

나가시면 다른 상점점원들이 내다보았다고 한다. 세 살 난

내 양단두루마기 깜을 싸주던 아저씨는 “우리 복수

두루마기는 송아지 한 마리 값이다.” 하며 

 싸 주셨다고했다.



세살때의  박복수시인 오빠와 함께



부엌방은 애꾸눈 할머니와 젊은

청주 댁 아줌마, 그리고 심부름하는 순이라는

처녀언니 셋이서 쓰고 있었다. 순이 언니는 어머니가

자기 딸같이 가꾸어 놓고 좋은 혼처를 골라 시집보낸다고

하셨는데 인물이 훤해 동네 아주머니가 바람을 넣어 취직해 나갔다.

 중대문에서 오른쪽으로 꽃밭을 지나 들어가면 할아버지가 쓰시던 윗사랑이다.

할아버지는 특히 라일락 꽃 내를 좋아하셨다. 늘 여유 있는 자세로 시를 읊으며

 생활을 즐기셨다. 중대문을 넘으면 싱그럽고 은은한 라일락 향기가 온 집안을

 채웠는데 운치 또한 일품이었다. 어머니는 라일락 가지를 꽃꽂이 소재로

쓰셨다. 가지 밑을 장도리로 두드려서 쓰시기에 까닭을 여쭈어

보았더니 흡수가 잘 돼 오래 산다고 말씀하셨다.


단골 꽃 장사 아주머니가 오면 장미, 마거리트, 

금어초,  국화 등을 사서 함께  꽂아놓으셨다. 어머니는

 꽃 장사 아주머니가 오면  으레 밥상 차려다 주라고  하셨다.

 뿐만 아니라 라일락꽃도 한 아름 따가지고 가도록 하셨다. 어머니

에게는 가족이 십여 명이나 딸린 단골거지 아주머니도 있었다.

커다란 광주리를 가지고 와서 음식을 담아갔다.   청주 댁이

생선이나 떡은 담아주지 않으면 어머니가 손수 이것저것

 고루 챙겨서 광주리를 가득 채워 보내셨다.


내가 어릴 때 어느 날, 남치마에 자주색

 끝동을 단 옥색저고리에 하얀 앞치마를 두르시고,

자주 댕기를 드린 머리엔 피치 뒷꼬지와 귀지개를 꼽아,

곱게 쪽찌셨던 어머니가 순이 언니와 마주 앉아 김치 거리를

 다듬고 게셨다. 그 모습이 하도 아름다워 친구와 중대문으로 들어오다

  “우리 엄마 참 예쁘지?” 하고 친구에게 자랑스럽게 물어보던 일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마도 어머니는 집안일을 하시면서 라일락 향내를

즐기셨으리라. 어머니를 생각하면 잊을 수 없는 일은, 가을마다

꿀에 쟁인 밤을 우리식구는 ‘밤자랑’이라고 불렀다. 그것을

땅에 묻어 놓고 손님이 오거나 우리들의 간식으로 일년

 내내 쓰셨다.     내가 친구들을 데려오면 

 ‘밤자랑’을 곶감하고 내 주셨다.



삼광유치원시절 박시인



어머니는 겨울엔 안방 아랫목 보료위에서

 은실 섞인 자주색 털실로 나의 치마, 바지, 스웨터를

손수 짜서 입히셨다. 내 친구 애주와 나는 그 털 치마 앞자락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종이에 하나하나 예쁘게 포장된 화신백화점에서

 사온 과자들을, 다락에서 한 주먹씩 꺼내 우리들 치마 위에 얹어주셨다.

내가 삼광유치원에 다니던 어느 겨울아침, 나에게 옷을 입히시던

어머니는 내복 소매 끝을 꼭 잡고 있으라고 이르셨건만,

놓쳐버린 내복을 집게손가락과 장지로 잡아내려,

반듯하게 입혀 주셨다. 어머니 손과

발은 유난히도 예쁘셨다.


손끝이 뾰족하고 긴 손으로

 버선 솜을 펴시던 손이 눈에 선하다.

 발도 하도 예뻐 버선발이 맵시가 있다고들 했다.

나도 어머니처럼 우리 딸들이나 손자들에게 옷을 입혀주며

어머니의 따스하던 손길을 더듬어 할머니 자랑으로 꽃을 피운다.

  노년에도 아들하고 나가시면 부부냐고들 했고 오빠는 어머니를

“우리 마마” 라고 불렀다. 어머니의 별명은 ‘예쁜 아즈머니’ 엇고,

그 따뜻하던 손길은 말년에도 여전하셔, 아무리 고급이고

 새 옷이라도 자주 안 입으시면 반드시 세탁해 

 필요한 분들에게 미련 없이 돌리셨다.


어느 겨울 우리 집만 빼고 집집마다

 수도가 막혔다.      어머니는 기사 아저씨에게

우리 집 수도를 대문 밖으로 끌어내라고 하셨다. 다른 집

일 하던 아줌마들이 밤이면, 대문 앞에서 빨래도 하고 김장거리를

밤새 씻고,   배추쓰레기를 떨어뜨리고 갔다. 밤새 얼음이 얼어, 물을

끓여다 부어야 배추찌꺼기가 떨어졌다. 어머니가 나가시다 넘어지신다고

물을 끌어드리겠다던, 화 난 기사아저씨를 달래시며 그대로 두라 하셨다. 

 지나던 동내사람들은 외출하시는 어머니 차 뒤 에다도 절을 했다고

기사아저씨는 어머니 칭찬에 입이 말았다.


늘 입버릇 같이 하시던 말씀 “여인의

목소리는 아무리 슬프거나 노 하여도 담을

 넘어 가서는 아니 된다.” 경제는 회전경제 사상으로,

남에게 베풀어야 쓰게끔 들어온다 하시며 평생을 그대로

 사시다 주름도 없이 고운 모습으로, 87회 생신 며칠 전에

생을 마감 하셨다. 일거일동이 맑고 아름다운

여인으로서 나에겐 누구보다도 가장

 존경하는 여인 이었다.





외과 전문의로 6.25 동난 때

납북 당한 아버지가 두고 가신 것으로, 우리

4남매를 열심히 키우셨다. 이곳 로스앤젤어스

에서 80년대에 있었던 중앙일보 주최, 현부인

대회에선  열녀 상을 받으셨다.


 아버지 유학시절 동창인 어느 교수님에게

 재혼을 권했다가 호되게 혼 난 적도 있었다. 내가

삼광 유치원 다니던 시절, 아버지는 일본에 유학중이시었다.

그 시절 일본에 가는 교통수단은, 부산에서 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가 시모노세키에 도착해 기차로 동경엘 갔었다. 어머니는 봄가을

밑반찬을 손수 해가지고 아버지를 뵈러 동경에 가셨는데 오빠는 학교

 때문에 나만 데리고 가셨다. 또 내 눈에는 다래끼가 자주 생겨 북한 땅에

 있는 삼방온천에 자주 데리고 가셨다. 우리 모녀가 나들이를 할 때마다

 오빠는 속이 상하여 라일락나무 위에 올라가 앉아 있었다.

  어딜 가도 나를 데리고 다니던 오빠와 같이 가고

 싶은 나는 울며 때를 썼다.


그때를 회상 하니 지금은 이 세상분이

 아니시니, 여쭈어 볼 수도 없지만 아마도 그런

아들을 두고 가시던 어머니 심경(心境)도 오빠와 같이

 그 라일락나무 위에 함께 올라가 앉아 계셨으리라. 라일락이

피는 5월이 되면 나의 마음은 어느새 어린 시절로

 돌아가 우리 집 마당을 그리게 한다.




박시인의 집 일을 돌봐주던 할머니가 환갑을 맞아 환갑잔치를 해 드렸다



박시인이 한국에서 마지막 살았던 친정집.



 박복수 시인 2015년 年記



박복수신인과 주고 받는 이메일 속에는

안부를 전하는 얘기가 있는가 하면 시도 있고

 생활일기나 수필도 있다.    사진이나 동영상도 있다.

중에서 춘하추동방송 가족이 함께 보셨으면 하는 내용들을

고르는 것이다. 2016년 연초에 보내오신 글중에 2015년에 있었던

 "고마운 분들에게 보내는 글" 또 1년간의 있었던 일을 일목요연하게

 작성해서 보내주신 글이 있다. 제목을 무어라고. 할까 생각하다가

  "2015년  年記"라고 붙였다. 싯귀 형식으로 쓰인 감사계절에

 생각나는 얼굴들을 올려드린다.   글귀  구절,

구절마다 깊은 뜻이 담겨있음을 본다.






고마운 분들에게 드리는 글-



2015년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가슴이

따뜻해지는 얼굴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인 것 같습니다. 답장,

감사했습니다.    어스레한 할머니의 불평을 마음으로

응답해 주신  문인귀 회장님 김준철 이사장님과 장효정

회장님이 계셨기에 한 장의 달력 앞에서 지난 乙未年

 (2015)을, 아니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네요.



단국 대학교 시 낭송 만리장성



1월: 첫 달에는 단국대 종강에서 김수복

지도교수님의 시를 암송했습니다. 김교수님이

 저에게 닥아 오셔서   "덕분에 별 볼일 없는 죽은 시가

살아났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후 귀국하신 박덕규 교수님은

"글들과 너무나 많은 일들로 감동을 주신 박복수 선생님, 무엇보다도

그 기나 긴 시를 암송하셨을 때 받은 감동은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그런 멋진 시 암송은 아직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그날 시 암송에 대해 우리

 미주문단의 대모 김영교 시인이 이번에 출판 하신  <소중한 기억들> 수필집에

 '왕 언니의 향기' 저의 대해 쓰신 글에서도 "김수복 교수님의 장시 '어머니의 신록'

다 암송, 시의 열렬한 애정을 나타내 실내를 감동으로 몰아갔습니다. 이렇듯

 몰두하는 노력도 기억력도 대단하십니다. 후배들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타면서 지는 해가 아름답지 않습니까? 문단의 왕 언니답게 이렇듯

 항상 정이 넘치는 인생선배십니다." 라는 아낌

없는  격려로 힘을 주십니다.


이 '인생 선배' 라는 말은 문인귀 선생님도 하셨지만

 교회와 합창단에서 뿐이 아니라 지난 세월 나의 삶에 크나큰

힘이었던 '우리의 귀감 '나의 롤 모델' 이런 말들은 시문학회 이영숙

회장님도 수필가협회 성민희회장님 구자애시인님, 오연희시인님, 정국희시인

께서, 홍승주 원로시인님도 이성열시인님 최선호평론가도 산디에고의 최미자수필가

님도 해 주셔서 너무 감사하고    늘 많이많이 행복한 나날들이었습니다.  "같은 나이에

젊어 보이는 사람이 있고, 늙어 보이는 사람이 있는데 늙어 보이는 사람은 욕심이 많아

 남의 나이까지 다 빼앗아 가서 그렇답니다.    젊어 보이는 분은 남에게 자기 나이를

논아줘서 어려보이는 것이랍니다. 저도 젊어 보이도록 노력하렵니다. 물론

칭찬에 아주 인색한 분들도 있습니다. 격려해 주시는 분에 비해 아주

소수라 그런 분들에게는 제가 자주 과찬으로 격려해 드립니다.

인생은 즐거워야하니까요. 즐겁게 해 드려 그 분들도

 저와 같이 행복하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2월: 어딘가에서 자전 에세이' 원고 청탁이

 왔습니다. 늘 있었듯이 어느 돈 없는 문예지에서 글이 

필요한가보다는 생각에 그저 한편을 보내드렸습니다.   출판

기념일에 연락이 와서 가 보고 당황 했었습니다. 하원 의원, 시장을

위시해 "한인 사회 추축이 된 29명의 롤. 모델의 자전에세이집" < 나는

 아메리카의 한국인입니다>라고 한국일보에서 읽은 바로 그 책에 저의 글도

 실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글을 내신 분들 앞에서 '빈 집' 이라는 긴 시를

 암송했습니다. Y.T.N. 방송에서 저자들의 소계가 매일 한 사람씩 뉴스 다음

시간에 나갔는데 저의 소계는 2월 16일 2015년   '시 암송은 박복수시인의

 몫' 이라며 한인 사회 최초의 방송인' 이라고 저의 유치원시절 부터 저의

어느 가정의 출신이라는 것 까지 소계를 했습니다. google에도

있더군요. 그 후 어느 큰 모금행사에서 만난 그 분들이 "그 때

그 긴 시 암송은 한 마디로 감동이었습니다." 고

하셔서 너무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3월: 해외문학에서 <한.미문학>에

나갈 영. 한 시 2편을 보내라고 하셔서 작년과

같이 번역을 맡기지 않고 제가 영문시를 써서 늘 하듯이

한국말을 못하는 저의 딸에게 읽어 보라니 잘 썼다고 엄마가

  자랑스럽다고 했습니다. 발행인도 받아보시더니 시들이 아주

좋다고 함께   출판 할 외국인들에게   부끄럽지 않다고

흡족해 하셔서 감사하며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4월: 한국에서 시조 특집에 낸다고 원고청탁이

 왔습니다. 4편을 써서 원로 시조 시인들께 먼저 보내

드렸더니 잘 썼다고들 하셔서 보내드리면서 "저는 시조시인이

아니고 시조 공부도 정식으로 안했습니다. 특집에는 내 시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고 보냈습니다." 좋은 시들 감사

합니다." 하는 이메일이 왔었습니다.



한국일보 창간 46주년 '축 시' 를 스스로 촹영한 사진에 올린 작품



5월: 한국일보에서 창간 46주년 '축 시' 를

쓰라는 이 메일이 왔습니다. 한 달 여유를 주었으나

영.한 시 3편을 또 써야 해서 서둘러 써서 저를 아끼시는

평론가와 원로시인들,  3분께 보내드렸더니 너무 좋은데 한자가

들어가서... 들 하시더니 한국일보에서도 한자를 빼고 조금 길게

써달라고 연락이 그 후 신문을 보신 분들께서 시인으로서 영광

이라고 많은 스승님들, 문인들, 방송인들, 음악인들, 교인들,

친지들이 과찬의 이메일로 축하 해 주셨습니다.


8월: 시문학회에서 "시사전'에 출품을

해 달라 는 이영숙회장님의 부탁을 받았습니다

한국에서 찍어 온 초가집, 계와 집 사진들 우리 집 뒷들의

 첫 새벽, 야자나무 사이로 어둠속에서 구름을 뚫고 떠 올아 오려던

태양을 찍어 배경 사진으로 넣고 영시도 써서 4편을 '작가의 집' 에서 열린

'시사전'에 출품했습니다. 김문희시인 부군 Dr. KIM 께서도 "시가 너무 좋습니다."

격려해 주셨습니다. 한국에 '서울 문학'에 또 시와 사람들의 '소월기' 와 크리스찬

 문협' 시들을 보내드릴 기회를 주셨고 '국제 펜'에서 <세계한글작가대회 기념문집>

원고 청탁이 왔습니다. "아직 한 달이 남았는데 벌서 일천여명의 작품이 들어

왔어요." 편집국장님이 병이 날 지경이라며 "200명 예정인데...


박복수 선생님 글이 아주 훌륭해 축하드립니다."

책을 받고 보니 147명의 글만 올라 있어 또 감사하며

밤잠을 못자고 결과를 기다리다 못처럼 발을 뻗고 잘 잤습니다.

그 후 한국현대시인협회 손해일이사장님께서 이메일을 보내주셨습니다.

"축하합니다.      한미문학상 시상식에 시상하러 제주도에 갑니다.   그 날

뵙겠습니다."   알고 보니 저의 시들을 늘 한국에 보내신 전달문 선생님,

한승욱 서울 문학 발행인, 한국의 백원용 원로시인, 손해일 '국제 펜'

부이사장님계서 금년 한미문학상은 탁월한 작품상으로 박복수

시인에게 주자고들 합의 하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민족시인의 밤' 은 해 마다 불러 주셔서

 가서 민족 시인들의 시 암송을,     또 여기 저기

 출판 기념에는 항상 시 낭송에 불러들 주셔서 다 감사히

 나가서 봉사를 했습니다. 미주문학 연합행사 때엔 시를 외울

시간을 안 주셔서 최미자 수필가님이 목소리는 쟁쟁해 좋았는데

손을 떨어 안타까웠다고 했습니다. 합창단 년말 파티에서도 어제

 시 암송을 하고 마음 약한 동생들은 눈물이 나왔다고 해서 감사하고

 기뻤습니다. 가을에는 서울대 합창단을 위시해 몇,몇 합창단이 연합으로

공연을 했는데 저의 합창단에서는 노래도 하고 '사물 놀이' 팀이 있는데

저도 전문가들 뒤에 앉아 장구를 치며 흉내를 내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짧은 시일 내에 장단 외우는 것이 장난이 아니더군요. 잘 들 아시지만

노래도 12곡을 다 박자란 외우는 것도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지금도

 4월 2일 2016년 공연 준비로 바쁜 나날입니다. 특히 손자 손녀가

다섯이라 많은 음악행사와 매해 있는 년말 가족이 총동원 하는

국제 모금 무도회등 88살 할아버지, 84살, 할머니에게는


금년도 참석 할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큰 감사를 올립니다.



Valley Korean 풍물놀이에 참여해서 함께 하는 박복수 시인



그곳은 우리내외가 U.C.L.A. 재학중에

 결혼식을 올린 학교 에서 가까운 호텔이고 학생이라고

 어느 명사의 3층 호화 Suite을 무료로 3일간 신혼여행대신

 쓰게 해 주었던 또 저의 딸 피로연도 한 호텔이라 감회가 깊었

습니다. 늘 여러분과 함께하여 행복하길 빌겠습니다. 몇 일남지 않은

 2015년...멋지게 잘 마무리들 하시고 다가오는 2016년에도 가족들

모두 즐겁고 건강하게   행복한 한해가   되시기를 빌며  모든 일

 소원 성취하시고 아울러 건필도 비옵니다. 소중한 인연을

뒤돌아보는 행복한 나날들이 되시길....


존경과 사랑을 띄우며 박 복수 절  






위, 아래 사진, 딸들 학부모회 회장시절 학부형 들과 함께






결혼 25주년 기념일 여행중 결혼 갱신 서약 을 한 사진



유경환(유카리나)여사님 글



이분의 출생에서부터 90의 연세를 바라보는

 이 싯점까지 살아오신 인생 파노라마를 읽으며 감동과

 부러움이 밀려옵니다. 박복수 여사를 일컫는 수 많은 형용사,

수식어 중에 '문태후'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글월 文字  

 '文태후'이신가요? ^ ^제게 드는 생각이 재능이나, 외모나, 건강이나,

그분의 내면까지 모두가 '연구대상'이라는 생각이 듭미다. 후천적인 노력이

더해져서 오늘의 복된 삶이 있었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지만, 부모님의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하시는   음덕도 큰 몫을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박복수 여사님이

 직접 그리신 어머님 초상화 옆에서 찍으신 사진을 보니, 실로 감탄하게 됩니다.
90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놀라울 만큼 젊으시고 아름다우신   90의 소녀의

 복되고,   빛나고, 멋진 삶에 응원의 박수를 보내드리며 건강관리

지금처럼 잘 하셔서 앞으로도 더 신나고, 아름답고 , 귀감이

되는 좋은 소식 많이 보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이복예(케이양-카페 운영자) 선생님 글



시인 박복수님 이름처럼 이세상에서

가장 많은복을 받고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님에게 해당되는

 문구인것 같습니다 하늘나라에서 내려오신

선녀보다도 더욱 아름답고 곱고 우아하십니다 ^ㅡ^;;흑백의 예쁜

사진속에는 살아오신 지난날의 오랜세월속의 그시대의 역사 ..시와음악 ..

문학과 예술..추억과낭만....기쁨과 환희....정열과사랑..다복한 가정에서
곱게사랑듬뿍받으며 .....다정한 오빠와의 남매의 귀한사진..너무너무

 아름답습니다 어린시절의 성장과정 ..로맨스

모두가 한편의 드라마 처럼 행복과 사랑이 가득담겨있는
소중한 선물보따리 들 입니다**


이모든 소중한 선물보따리들을 풀어서 ..

우리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셔서 넘 고맙습니다
이 선물을 받는 모든분들도 님처럼 행복하기를 소원합니다 ^.^*
지금은 좀 쉬시면서 취미생활 하시면서 편안하게 지내셔야 할
연세

이신데도...아직도 한국의 문화와 예술 ..방송활동을 위해서 부지런히

 일하시는 박복수 시인님 넘 존경하며    열렬한 사랑의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 항상 건강하시고 가족분들과 함께 행복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아름답고 멋진귀한 작품 올려주신 춘하추동방송

 대표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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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시인 박복수 (1) 유년, 젊은시절 그리고 6.25의 기억


재미 시인 박복수 (2) 금혼의 노래, 미주방송인회 협회장

http://blog.daum.net/jc21th/17782728 


재미시인 박복수 (3) 시(詩)와 시암송 동영상 (윤동주 별헤는 밤) 


재미시인 박복수 (4) 어머니와 라일락, 2015년 을미년 연기 年記

미주방송인협회 제15대 회장 박 복수님 시인 시집

http://blog.daum.net/jc21th/17782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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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으신분들을 만나뵈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고맙습니다. 행복하세요.
이분의 출생에서부터 90의 연세를 바라보는 이 싯점까지 살아오신 인생 파노라마를 읽으며
감동과 부러움이 밀려옵니다.
박복수 여사를 일컫는 수 많은 형용사, 수식어 중에 '문태후'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글월 文字 '文태후'이신가요? ^ ^
제게 드는 생각이 재능이나, 외모나, 건강이나, 그분의 내면까지 모두가 '연구대상'이라는 생각이 듭미다.
후천적인 노력이 더해져서 오늘의 복된 삶이 있었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지만,
부모님의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하시는 음덕도 큰 몫을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박복수 여사님이 직접 그리신 어머님 초상화 옆에서 찍으신 사진을 보니, 실로 감탄하게 됩니다.
90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놀라울 만큼 젊으시고 아름다우신 90의 소녀의 복되고, 빛나고, 멋진 삶에 응원의 박수를 보내드리며
건강관리 지금처럼 잘 하셔서 앞으로도 더 신나고, 아름답고 , 귀감이되는 좋은 소식 많이 보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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