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방송역사 90년

이장춘 2017. 2. 8. 22:09




 

유튜부에서 보기 https://youtu.be/2LuTkyqZR5E




1. 미군의 방송국 접수 날



주한미국 사령관 하지중장,  해방으로부터

정부수립시까지 3년간 명실공히 한국통치자였다.




1945년 9월 15일! 6.25전쟁기간을

 제외하고는  전무후무한  방송중단사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미군의 방송국  접수과정

에서 빚어진 것이었고 방송국 운명의 날이기도 했다.

한 달간의 무정부 상태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중  9월

15일은 군정청이 일본인 방송국 간부들을 해임한 날이어서

우리방송인들이 직접 임원진을 선발한 날이다. 건국

준비위원회가 일방적으로 구성한 내각 명단을 발표

하도록  강요하면서 험한 분위기가 조성되는 등

급박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미군의

방송국접수가 이루워졌다.


 방송국이 미군에 접수되자

일제 강점기 하에서 방송을 했던

방송인들은 정단한 방송인수자가 나타날때

까지만 방송국을 지키난는 생각이어서 방송국이

미군에 접수된 시잠에서  모두 물러나겠다고 했지만

 미군은 9월 7일에 발표한   포고령 1호  ‘모든 공직자는

별명이 있을 때까지 현직에 남아서 일하라’는 그 내용을

들어 마음대로 그만 둘 수 없다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방송인은 전문직종임으로 경력 있는 사람들이 남아서 

방송을 이끌어 가야 한다면서    다 같이 방송국을

운영하는데   힘을 기울여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때까지 방송국에 근무했던

방송인들은 계속근무하게 되었다.



2. 미군접수 날 방송국 표정

이혜구(초대방송국장) 기





9월 15일 인공내각 발표

 실랑이가 있고 난 뒤 꾀 시간이

지났을 무렵 난데없이 미군 MP들이

머리를 수그리고 총을 거머쥔 체 우당탕

밀려 들어와 한패는 지하실로 뛰어 들어가고

 또 한패는 2층으로 뛰어올라간 것이 나의 눈에

띠었다. 마치 노상에서 폭도들에게 쫓겨

방송국에 숨으려고 뛰어 들어온 것

 같은 형세였다.


잠시 후 총을 겨눈 MP가

방송과로 들어오더니 불문곡직하고

 그 안에 있던 아나운서들을 방송국에서 당장

나가라고 명령 하였다. 윤길구 아나운서가 벗어

놓은 양복을 가지러 가는데도 MP는 총을 그 등 뒤에

 대고 따라 다녔다.          내가 아나운서들과 함께

 현관홀에 나갔을 때 그곳에는 각 방에서 나온

 직원들이 몰려 있었고 4명쯤 되는 MP가

 한사람씩 내 보내고 있었다.


기술과원에게는 조정판 스위치를

끄고 내려오라고 일렀고 당분간 방송국

 문을 닫겠다고 선언했다.그리고 일렬로 서서

 나가는 사람들에게 “류” 라는 사람을 아느냐고

 일일이 물었다.  나는 “류”를 어떻게 쓰느냐고 MP

에게 물었더니 그는 자기 수첩에 쓴 “LYU" 를

내 보여 주었으나 현관문을 나올 때 까지도

”류“가 누구인지 몰랐다.


길에서 동료들을 기다리고

있었을 때 입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살았다!“ 라는 말이   흘러 나왔고 소위

인민공화국각료명단 발표문제가 그렇게

 뜻하지 않게 무사히 해결 된 것을 천명이라고

기뻐하면서 나의 우거로 동료들을 끌고 가서

술잔을 나눴다. 그때 그 주석에서 비로소

 ”LYU"는 류가 아니라 “려” 라고 읽어야

 할 것을 알아 차렸다.





(”LYU" “려” 란 당시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분으로 행방정국

에서‘건국 준비위원장’을 맡아 좌익계열을

중심으로 한 민족진영을 이끌고 있었다.   미군에

 접수된 방송국은 미군 고문관이 배치되었다.)



3. 군정하의 방송국직제와 운영



군정청 초기, 1946년 3월

28일까지는 직제 상 모든 방송인들은

조선방송협회에 속해 있었지만 3월 29일부터

시행된 새로운 개편을 통해서 방송분야만을 분리해서

군정청 공보국의 1개 과 방송과로 군정청에 소속 시켰다. 

  이로부터 방송을 제외한   업무는 조선방송협회   소속이었고

방송부문은  군정청에 속해서  이상한 방송운영형태가 되었디.

 보수체계도 완전히 달라서 조선방송협회에 속한    방송기술인

등은 협회운영재원의 부족으로 심한  생활고에 시달려 파업을

단행하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다.   (다음 편에 쓸 것이다.) 

 또 조선방송협회에 속했던 경성방속국장이 일시에 군정청

공보국의 방송과라는       일개 과로 전락하게 되어

어려움을 겪다가 6개월이 지나 10월,   다시

군정청 방송국으로 승격되어 이혜구

국장이 그 자리를 이었다. 



4. 미군 방송 고문관



미군이 방송국을 접수하면서

방송국에는 미군 고문관이 배치되어

한국인 방송인과 함께    일하게 되었다.

 9월 16일터 9월 말까지 과도기를 거치고 10월

 1일 모든 일본 방송인들이 해직되면서 한국방송인들과

 고문관이 방송 감독자로 또는   협력자로 일하게 되었다.

방송국에는 현직 대위 두 사람과 중위 한사람이 방송국장

고문관으로 일했고     또 각 업무 분야 벌로 고문관을

 두어 사실상 미군의 뜻에 따라 방송을 해 나갔다.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났어도 마로 독립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고문관 실이 따로

 마련되었지만 1946년 3월 29일

 부터 방송국이 군정청 직속 방송과로

되면서 부터 각 분야별로 함께 일하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각 파트별로 방송인

들과 한방에서  함께   일 하면서

호흡을 같이 했다.


미국인 고문관실에는 유능한

캪튼 “퍼시빌”이 주석 격이고, 얼굴이

붉고 파잎을 물고 온화하고 주로 군정청시간

연출을 맡아보는 캪튼 “테일러” 도쿄스캪에서 와

원래는 사후검열만 있고 사전검열이 없다는 것이지만

방송 전에 뉴스제목을 대강 구두로 제출 받은 침착하고도

 이해가 많은 루테란트 “피커링” 그 외에 몇 미국인과 한국인

 통역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이 캪튼 “퍼시빌”, “테일러”. 

 “피커링” 3인은 서투른 영어 몇 마디로 우리 의사를 곧 짐작하는

 이해력을 가졌고 당시 정당이 수십 개 달하여 정계가 혼란

하였을 때 일을 민활하고 정확하게 처리하여 한국인

직원은 유쾌한 당시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군정이 3년간이나 이어졌으므로

고문관도 여러차례 바뀌었지만 중요한

사항만 간추려보면 국장 고문으로는 퍼시빌에

 이어 윌슨, 엘른, 쁘라위트로 이어졌고 국장고문을

돕는 방송고문, 기술고문이 따로 있었으며 방송작가나

기술 실무자도 배치되어 3년간 생활을 같이했다. 편성과에

배치된 고문관은 코르만, 레인지, 티이플로 이어지고 티이플

 고문은 군정이 끝날 때까지 오랫동안 재직하면서 교향악단

직접 지휘하는 등    여러 분야에 힘을 기울였고 뒷날

 VOA에서 일을 했다. 또 랜돌프가 작가로 있으면서

해방 후 최초의 인기 어린이 연속극 똘똘이 모험

 작품을 쓰기도 하고 영어회화 프로그램을

 제작하거나 출연도 했다.


브라운이라는 여자작가도

있어서 간단한 대화극을 쓰기도 했다.

스무고개, 천문만답, 거리의 화재, 희망음악 등

이때 새로 생긴 프로그램들은 미국에서 방송음반을

가져다가 그것을 거울삼아 본보기로 만들어진 프로그램

들이었다. 현대화된 주간기본방송순서의 편성, 15분단위제

실시, 프로그램사이의 간주곡사용, 음악과 음향 프로그램의

입체화 등      새로운  제도가 새로 시행 되었다. 코르만

 고문관은 기획과장 박경호의 사위가 되었고 박경호는

1949년 6월 미국연수를 갔다가  VOA에서

 오랫동안 근무하게 되었다.


기술 쪽의 고문관으로 있었던

포카드는 뒷날 체신부 고문관으로 가

일하면서 연희송신소 50Kw출력관이 없어

 방송이 어려웠을 때는 출력관을 공수 해다 방송을

할 수 있도록 했고 방송기계부품이 부족 할 때는 부평

보급 창고를 열어주면서 필요한 부품을 같다 쓰라고 해서 

자동차로 실어 오기도 했다. 동양 문화권에서 자라고 일본

시절에 방송을 시작해서 그 속에서 방송해온 우리방송인과

서양 문화와 함께 숨 쉬던 고문관 사이에는 생각의 차이가

있었고    때로는 우리문화를 이해하지못하거나 국가와

민족적인 입장이 있어서 갈등을 빚을 때도 있었지만

우리 방송을      새로운 문화와 접목시키고 또

 물자가 부족하던 시절에 이리저리

많은 도움을 받기도 했다.

 


5. 고문관들의 생활모습

방송기술인 이종일의 기록





갑자기 들이닥친 군인들에게

 숙소가 제대로 있을 리가 없어서 응접실을

 숙소로 사용하다가 방송실 옆에 악기를 보관

두던 그 방으로 옮겼다. 식사는 휴대용으로 그리저리

 때우고 잠은 잤지만 불편하기 짝이 없었고 겨울에는 

추워서 불을 안 때도 보온이 되는 방송실로 옮겨 생활

하면서 잠을 자기도 했다. 방송실에서 버너를 이용해

 휴대용식사도 만들어 들고 커피도 끓여 먹으니

진동하는 냄새에, 화재 위험등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그때는 그랬었다.



6. 군정 시행전의 세력갈등



8월 15일 해방을 맞고 16일과

17일 치안공백을 틈타 서로 방송국을

지키겠다며 갈등을 빚는등 혼란을 틈타

미군이 올때까지 방송국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일본군이 방송국을 점령했다. 9월 9일 미군진주와

 함께 일본군이 방송국에서 물러나고 아직 미군이

접수하기까지 기간에는 좌익계열을 중심으로 한

 방송국 접수소동이 계속되었다. 이혜구

방송국장의 기록이다.


1945년 9월 미군진주 직후의

일로 하루는 인민공화국의 최 모란 자가

전에 방송국 직원으로 있던 자를 앞장세우고

 나에게 면회를 청하고  방송국을 접수 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나는 접수소동을 그때 처음 당한

것이 아니고 건준 때부터 여러 차례 겪었었다.     만일

그들이 정식으로 접수한다는 위임장 조각이라도 가지고

 왔더라면 또 올 때 마다        그 사람들의 얼굴이 번번히

바뀌지만 않았더라면, 또 접수하러온 한 패거리가 교섭

하고 있는 방에 딴 패거리가 덮쳐 들어와서 서로가

접수 하겠다고 자기들 끼리 얼굴을 맞대고 싸우며

 권위를 들먹이는 일 따위가 없었다면 귀찮아

서라도 책임을 맡기고 방송국을

 내 놓았을 런지 모르겠다.


그때 우리직원들은 해방과

동시에 한결같이 이 나라의 참다운

새 주인에게 썩 자리를 내놓고 물러서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방송국을 무작정 접수

하러온 최 모에게 “이 나라 정식 정부가 수립되면

우리들은 이 방송국을 얼른 내 놓겠다.” 고

 우리의 심정을 솔직하게 이야기 했다.


최는 펄펄 뛰면서 인민공화국에

따르지 않는 몇몇 사람을 화석이라고

 윽박지르면서 젊은 직원들을     선동하며

방송국에 불을 지르게 하고   그자는 뒤에서

부채질 하였다. 사무실 여기저기서 불통이 튀는

 모습을 본 나는 안서와 청천과 상의하고 전 직원을

 응접실에 집합시킨 후    나의 소신을 토로 하였다.

“우리들은 정식 정부가 수립되면 썩 물러나야 할

람들이다. 그때 까지는 이 중요한 기관을

절대 보존하는 것이 우리나라에

대한 충절인줄 안다. 


 이 공공기관을 정식정부가 아닌

어느 정당에 넘겨주어야 하겠는가?

우리들 중에는 어떻게 해서라도 방송국에

남아 있으려고 생각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그 이튿날부터 발을 끊을 생각으로 내수동

우거에 드러누웠다. 그날 이계원이 술병을 들고

 찾아와서 전날의 경위를 이야기 하고 젊은 사람들

한때 잘못을 용서하고 그전같이 나와 달라고

청하여 방송국은 파란이 또 하나의 고비를

넘겼고 그로 인하여 전 직원은 동고

하기로 더욱 결속 하였다.

 





9월 15일, 조선방송협회 운영진

선발을 위한 회의를 열고 있던 중 건국준비

 위원회가 인민공화국 내각을 구성했다면서 그 명단을

 방송을 통해서 발표 하라는 요구가 있었다. 그때 그 내각은

좌익 단체인 건국준비위원회가 이승만, 김구, 김성수 등을 포함

해서 일방적으로 구성한 것으로 그 명단을 함부로 방송으로 발표

할 성질이 아니었다. 이날 네 시 뉴스는 윤용노 아나운서가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이때는 방송국 안에도 좌익계열 직원이 있어서 윤용노

아나운서가 인공내각발표 방송을 할 수 없다고 거부함에, 좌익계열의

팽진호 (6.25때 월북) 아나운서가 자기가 하겠다고 뉴스원고를

 가로 챈 것을 다시 문제안 기자가 그 기사를 빼내 감추어

버림에 따라     그 기사를 방송할 수 없게 되어

그 청년들이 7시 안에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방송국을 떠났다.


조선방송협회 사무실에서 회의를

하던 이혜구 국장이 이 말을 듣고 방송국

으로 돌아와 소위 각료 명단이라는 것을 보고 

그들과는 정 반대 입장에 있는 김성수가 문교부

장관이 되어 있는 등 민족진영의 인사도

 끼어 있는 그 명단을납득이 가지

않는 데가 많았다. 


 더군다나 미 군정은 어떠한

정부든 연합군의 승인 없이는 존재 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었기 때문에 방송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이를 거절

 할 경우 아무 죄도 없는 아나운서들 신변에 닥칠

위험을 어떻게 막아야 한단 말인가. 매우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이혜구 국장은 아나운서들과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다고 다짐하고

그들과 함께 그 청년들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면서

 어떻게 그들을 타일러야 하나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모두들 긴장한 표정이었다.   혈기 있는 젊은 아나운서들은

간혹 우스갯말을 하며 신세타령을 늘어놓기도 했다. 그 자리에

꾀 시간이 지났을 무렵 난데없이 미군 MP들이 머리를 수그리고

총을 거머쥔 체 우당탕 밀려 들어와 한패는       지하실로 뛰어

들어가고 또 한패는 2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이혜구국장의

 눈에는  마치 노상에서 폭도들에게 쫓겨 방송국에 숨으려고

뛰어 들어온 것 같은 형세같았다고 했지만 실은 방송국

접수를 위해 들어온 미군이었다.     이로부터

  3년간 미군정 하의 방송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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