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와 방송

이장춘 2011. 6. 3. 04:09

 

 

6.25 1.4 후퇴로 다시 시작된 부산 피난방송

 

 

9,28수복으로 그런대로 방송을

 할 수 있게 되었고 UN군은 파죽지세로

북진을 계속해서 평양과 함흥 등을 탈환, 10월 26일 

압록강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따라  5년 만에 평양을 비롯해서

 북한 땅에서 우리방송을 내 보낼 수가 있었지만 그것은 잠시였고

 인해전술로 밀려드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UN군이 후퇴를 

거듭람에 따라 방송국도 부산으로 옮겼습니다.

 

불시에 당했던 6월 27일 밤의

피난과는 달리 국방부 계획에 따라 전쟁이

끝날 때까지 피난살이를 한다는 생각으로 기본적인

방송기재와 피난 대상인원 등을 사전에 파악해서

 1.4후퇴 하루 전 1월 3일 한강을 건넜습니다.  

 

 

국방부 정훈국에서 방송국에 나와 있던

책임자는 홍천 대위였고 실무자는 최학수 중사

습니다.홍천대위와 최학수 중사는 전쟁이 끝난 후

공보부공무원으로 남아서 한 가족이 되었기 때문에  60년대,

 70년대에 방송국에 근무하신 분들은 그 분들을 압니다.

그때 실무일을 맡았던 최학수님이 써 놓은

 글이 있어서 옮깁니다.

 

중앙방송국을 철수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군 장비( 자동차등) 가 필요 했는데

군 지휘부에서는 방송요원으로 아나운서와 엔지니어

밖에 인정 해 주지 않았다. 명단을 작성 해 보니 37명이었는데

이 인원으로는 도저히 방송국직원 전체를 철수 시킬 수 없고

그렇다고 군 지휘부의 설득도 불가능했다.

 

할 수 없이 37명으로 결재를 받은 후

나는37이라고 쓰여진 위에 1자를 더 써 넣어

 137명으로 고쳤다.군사재판에 회부 될 각오였다.

왜냐 하면 중앙방송국의가까이 지내던 편성이나

 서무직원들을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137명으로 늘여놓고 보니

중앙방송국의임시직원까지 다 넣어도

그렇게 되지 않았다.아무튼 그렇게 해서

중앙방송국의 1.4후퇴는 원활하게

 된 것으로 믿는다.

 

최학수님의 얘기를 인용 했습니다.

 

 

이로부터 두 번째의 부산 피난방송을

 맞게 되고 3년간의 전시방송이 시작되었습니다.

부산피난생활이 다 그랬듯이 방송국사정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115평의 자그마한 건물에 방송시설을

갖추고 500W 적은 출력으로 중앙방송을 해야 했고 숙식을

해결하기 어려웠던 방송인들은 방송국 안에서

 해결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런 얘기는 다음회에 하겠습니다.

 

  

 

 

 


1950. 1. 3. 1·4 후퇴를 앞두고 불타고 있는 서울 시가지 모습입니다. 


 1951. 1. 4. 무개화차에 몰린 피난민들입니다.
 

 
 1951. 1. 5. 언 한강을 피난민들이 걸어서 건너고 있습니다. 
 
    1951. 1. 4. 한강 임시 부교입니다. 
 
 1951. 1. 5. 서울. 꽁꽁 언 한강을 피난민들이
조심조심 건너 남하하고 있습니다. 
 
1951. 1. 6. 수원역에서 남행열차입니다. 
 

1951. 1. 5.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미군 부대에 몰려온 한국의 노무자들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아내의 노래 백설희, 심연옥-1.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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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행복이 시생없이는 이뤄지지않은 다는것을 알게됩니다 그러기에 나도 지금 무엇을 도울수있는지 ,
충실하게 사시는 것이 돕는것이겠지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