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와 제주의 이야기

다호다호 2009. 12. 14. 15:37

濟州에 사는 濟民의 이야기 - 그 세 번째 이야기 濟州의 茶

관광경제신문에 글을 올리고 나서 요즘 한달이 이렇게 빨리 가는 줄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글을 전문적으로 쓰시는 분들의 정신적 스트레스가 얼만큼 인지 이제야 조금 상상이 간다고 할까? 벌써 세 번째인데 제주의 다객이 아직 차이야기를 하지 않은것 같아 오늘은 제주의 차이야기를 조금 풀어보기로 하자...

세상의 많은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있지만 그 중에 차(茶) 이야기 역시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다 특히 이곳 제주에는 우리나라 茶聖이라 칭송하는 초의선사와 조선시대 후반에 당대의 걸작이라는 추사체를 완성하여 멀리 청나라에까지 그 이름을 날린 추사 김정희선생의 재미있는 일화가 남아 있는 곳이라 제주의 차이야기를 조금 하련다.

추사는 24세 때인 1810년(순조 10) 아버지 김노경이 청나라에 동지사 겸 사은사로 사신행을 떠날 때 아버지의 시중을 드는 자제군관으로 따라갔다 추사는 연경에 가서 몸으로 체험한 청나라의 다양한 茶文化를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한국의 차에 대한 궁굼증으로 초의를 만나고 싶어 했다. 초의선사와 추사는 1815년 겨울 서울 외곽에 위치한 수락산 학림사에서 처음 대면을 하게 되는데 수종사에서 학림사로 거처를 옮긴 초의선사를 추사가 직접 찾아가 우리의 차문화를 물어 보았을 것이다 또한 그 둘은 당시 나이가 30세 동갑지기로 서로의 뜻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을까 생각해 볼 수 있다. 더구나 추사선생과 초의선사의 우정은 추사가 먼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차와 서신으로 이어오면서 시대의 두 천재였던 추사와 초의는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하게 사상과 선에 대해 논쟁했지만 이후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되었을 때에는 그곳까지 직접 찾아갈 정도로 그들의 우정은 깊어만 갔다. 조선시대의 대학자요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는 왕실의 총애를 받고 권세를 누리다가 옥사 사건에 연루되어 그의 나이 55세에 제주도 남쪽 끝에서 9년간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추사선생은 초의선사에게 일평생 44번 정도의 서신을 보냈고 그 중에 약 11통 정도는 차와 관련된 내용인데 주로 초의선사에게 염치 불구하고 차를 좀 보내 달라는 내용이다. 추사는 당시 유배지에서 초의에게 "당신은 햇차를 먹고 난 묵은차만 주고 또 그나마 어쩌다 조금씩 적은량의 차만 보내주니 몽둥이 삼십방은 맞아야 정신을 찾을 것 같다"고 협박 아닌 협박으로 으름장을 놓으니 초의선사는 추사가 머물고 있는 제주에 도대체 안 가볼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만다. 결국 이 유배지에 동갑내기 동무이자 벗인 초의 선사를 제주까지 찾아오게 한 후 약 반년을 같이 제주에서 생활한다. 추사의 글 중에는 유명한 것이 많은데 유배지인 제주에서 대표적인 글로는 "명선"(茗禪 차를 마시면서 선의 경지로 든다) 차를 보내준 것에 대한 답례와 일로향실(一爐香室 "차를 끓이는 다로(茶爐)의 향이 향기롭다")역시 초의가 제주도까지 차를 보내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추사가 제자 소치를 통해 초의에게 보낸 이 글은 초의선사가 머물던 대흥사 일지암(一枝庵 "다만 한 개의 나뭇가지로 지은 암자")에 차향이 은은하게 나는 방에 걸라고 준 글씨이다.

초의선사와 추사선생이 당시 서로의 신분을 넘어서 오로지 사람과 사람으로 만남을 다연으로 이어가게 하는 차는 각박한 현대의 세대에 친구와 친구를 만나게 하고 스승과 제자를 만나게 하고 부모와 자식을 만나게 하고 남편과 부인을 만나게 해준다. 마치 세상과 사람을 이어주는 다리와도 같고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믿음과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세상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통해 믿음을 약속 할 수 있는데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것에 바로 차가 있음을 스스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현대에 우리가 차를 마시게 하는 또 하나의 믿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