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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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해전에 대한 고찰과 은둔설 또는 자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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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장군의 휘하장수

2019. 10. 11.

 

독자분들은 노량해전을 왜군이 철수하면서 충무공과 치른 임진왜란의 마지막 해전쯤으로 알고 계실 텐데요.....

 

 

 

 


근데 한꺼풀만 벗겨보면

왜군이 후퇴하면서 마지막 해전을

노량에다 선택한게 아니라,

 

노량으로 전장을 선택한것도 충무공이시요
(진린장군의 협박,,칼을 들고 군법운운함..)

조일전쟁의 마지막 해전을 노량으로 결정지은 것도

오직 충무공이시라는 거죠..

 

다시말해,
조일전쟁의 마지막 해전이 노량해전이 된것도

충무공이 노량에서 애석하게 전사를 하는 바람에 

조일전쟁의 마지막 해전이 된 것이라 이 말임니다.

 

그럼 만약 충무공이 노량에서 전사를 하지 않았다면

마지막 해전지는 어디였을까요?

ㅎㅎㅎ..

당연히 "제2차 부산포 해전" 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길이 길이 남았겠죠....

(아마 진린장군과 또 대판 싸웟을 꺼임..ㅎ)

 

결국 왜군은 부산포에서 퇴로가 막히고 보급부족으로 말라서 굶어죽거나 결국 모조리 항복 했겟지요...

 

노량해전직후 왜군이 전부 달아난게 아니라
함선부족등의 이유로
노량해전후 2달이나 지나야 왜군이 완전 철수를 햇으니까요..


그럼, 지금부터 노량해전 직전의 시대상황...

 

진린장군과의 입장차이로 오는 충무공의 고뇌를 살피러 

타임머신을 타고 이동해 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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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바야흐로 1597년 10월..

 

칠천량에서 삼도수군을 괴멸시키고 대나무를 쪼개는 기세로 

북상하던 왜군은

 

명량해전의 급보를 받고

직산을 기점으로 일제히 남하하여

남해안 근처에서 성을쌓고 방콕모드로 또 전환했다...  

 

저 임진년 당시, 한산도 대첩의 결과로 왼팔이 잘린 왜군의 입장에서

보급로 차단이 무얼의미하는지.......

얼마나 쓰라린 고통인지......

고니시장군은 그 추운 겨울에 평양성에서 한성까지 후퇴하면서

몸서리 쳐지는 경험을 또 다시 반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당초 원정군 선봉장으로 18,700의 병력으로 기세 좋게

조선을 침공한 고니시는

이날 평양에서 한성으로 돌아와 병력을 점고해보니,

이미 1만2천은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ㅎ

 

왜군이 방콕하고 있을 무렵 ,

히데요시가 결국 사망 (1598년8월)하고 철수론이 솔솔 퍼지면서

결국 고니시는 신속히 남하한 유정장군에 의해

순천 왜교성에서 그만, 포위되고만다.

 

여기서부터 명군과 충무공의 갈등은 시작된다...

 

지상군의 유정장군과 수군인 진린장군의 명군측은
조선에서의 추가적인 병력손실 없이 그대로 철군해서 
북방에서 신흥세력인 여진족의 누르하치와 마지막 결전을 벌여야 했기때문이다..

 

실제로 유정장군을 비롯한 대다수 명나라 장수들은 임란후

만주에서 청군과 전투를 벌이다 대부분 전사를 하고
특히 진린장군의 손자는 임란의 인연으로

명제국 멸망후 고금도로 와서

광동진씨를 연다.......

 

병력손실없이 철군해야하는 명나라 장수와

왜군이라면 불구대천의 원수로써

한놈도 살려서는 보내지 않겟다는 복수의 화신 , 충무공....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틈을 비집고  

이쪽저쪽 사절단을 보내 제발 퇴로을 좀 열어달라고  달라고

애원하는 고니시....

 

진린,충무공,고니시............

 

삼국의 영웅들의 4백30여년 전의 고뇌와 갈등...

 

하지만 충무공에게서 돌아온 대답이 가히 걸작이다..

 

"지난 7년의 전쟁 동안 우리 군이 노획한 총과 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너희들이 응당 진정한 무인(武人)이라면 이따위 잔꾀를 부리지 말고, 정정당당히 무력으로 되찾아 가라 " 충무공

 

결국 고니시는 진린진영에 사람을 보내어 결국 사단이 난다...


11월14일 : 실록

 

1척의 작은 배를 보냈는데 왜인 8명이 타고 있었다.
그 뒤에 이순신이 말하기를 「왜선이 나간 지 이미 4일이 되었으니 구원병이 반드시 올 것이다. 그러니 우리들도 묘도(猫島) 등지로 가서 파수하여 차단시켜야 한다. 」 하였다.

 


11월16일 : 이분행록

 

도독이 그 부하 장수 진문동을 적의 영문으로 보내더니 얼마 있다가 왜적 오도주라는 자가 배 세 척에 말과 창과 칼 등속을 싣고와 도독에게 바치고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리고부터는 왜의 심부름꾼으로 도독부에 왕래하는 자가 끊기지 않더니

필경 도독이 공에게 화친을 허락해 주자는 것이다.

이때 공은

'대장으로는 화친을 말할 수 없을뿐더러 이 원수는 놓아 보낼수 없소.'

하니 도독도 부끄러이 여기었다.

왜의 심부름꾼이 또 오자 도독은

'내가 너희 왜들을 위해서 통제사에게 말했다가 거절을 당했기 때문에

이제 두 번 다시 말하기는 어렵다.'

하였다. 

해장이 공에게도 사람을 보내어 총과 칼 등속을 선물로 가지고와서 간
청하자 공은 곧 물리치며


'임진년 이래로 적을 무수히 사로잡아 총과 칼을 얻은 것이 산만큼 쌓였는데 원수의 심부름꾼놈이 여기는 무얼하러 온단 말이냐.'

하였더니 적이 아무 말도 못하고 물러갔다.

행장이 또 사람을 보내어 하는 말이

'조선 해군은 마땅히 명나라 해군과 서로 딴 곳에 진을 쳐야 할텐데 어째서 같은 곳에서 진치고 있는 것이오.'

하고 묻는다. 공은

 '우리땅에서 진치는 것이야 우리 생각대로 할 일이지 너희들의 알 바는 아니다.' 하였다.

이때 도독은 적의 뇌물을 많이 받고 놈들이 빠져 나갈 길을 터 주려고 공에게 하는 말이

'나는 여기 이 행장은 잠깐 이대로 내버려 두고 먼저 남해에 있는 적을 토벌하러 가야겠소.'

하므로 공은 대답하였다.
'남해에 있는 것은 모두 우리 백성으로 적에게 포로된 사람들이지 왜적이 아니오.'

도독은 다시 말하되

'이미 적에게 붙은 이상 그것도 역시 적이라 할 수 있소. 이제 거기 가서 토벌하면 힘 안 들이고 머리를 많이 벨 수 있을 것이요.'

하였을 때 공은

'황제께서 적을 무찌르라고 명령하신 것은 실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하라는 것이었으리라. 그런데 이제 구해 내오지는 아니하고 도리어 그들을 죽이겠다는 것은 황제의 본의가 아닌 것이오.'
하였다.

도독은 성을 내며
'우리 황제께서 내게 긴 칼을 주셨소.'

하고 위협하는 것이었다. 공은 다시

'한 번 죽는 것은 아깝지 아니하오.

나는 대장이 되어 결코 적을 내버리고 우리 백성을 죽일 수는 없소.'

하며 한참이나 다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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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7일[무술/12월14일]어제 복병장 발포만호 소계남과 당진포만호 조효열 등이 왜놈의중선(中船) 한 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에서 바다를 건너 갈 적에한산도 앞바다에까지 쫓아가니, 왜적들은 언덕을 의지하고 뭍으로올라가 도망갔고, 잡은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사람에게 빼앗기고서 빈손으로 돌아와 보고했다.

결국 왜선 한척이 진린담당 구역에서 빠져나간것 이었다...
다음날 기록(이분행록)이다..

 

11월18일오후 여섯 시쯤 적선이 남해에서 무수히 나와서 엄목포에 정박해있고, 또 노량으로 와 대는 것도 얼마인지 알 수가 없다.도독과 약속하고 밤 열시쯤에 같이 떠났다.자정에 배 위로 올라가 손을 씻고 무릎을 꿇고 " 이 원수를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유한이 없겠습니다"고 하늘에 빌었다.
그리고 진린 제독에게 "적의 원병이 며칠 안으로 도착할 것이다.그러니 우리가 먼저 나가서 선수를 쳐서 적을 요격한다"고 했으나진린은 허락하지 않았다.나는 이를 듣지 않고 먼저 나가 싸울것을 결심하고, 나팔을 불고 배를출항시켰다.진린도 할 수 없이 내 뒤를 따라왔으나, 명나라 배는 선체가 작은데다가 후미에 있었기 때문에 기세만 돋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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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앞뒤로(왜교성의 고니시, 사천의 시마즈)  적을 맞게 된 상황에서 

어떻게든 함대를 보존하려는 진린과

 

한놈도 살려서는 못보낸다는 복수의화신 충무공간의 피튀기는 설전뒤,

 

죽음을 각오하고 자리를 밖차고 나가는 충무공의 뒷통수에
진린장군의 외마디 단발마가 들려왓다..

 

"황제의 칼이 여기 있소~~~오" ㅎ 

 

진린의 협박을 뒤로 하고


충무공은 자신의 판옥선 50척으로 단독으로 출항하려는

단오한 의지를 보이자

결국, 진린은 충무공과 빅딜을 하게된다..
.
.

.


즉,

명나라 수군은 이번해전에 참전은 하되,


총사령관 진린 ,부총병 등자룡은  
명나라 호선(판옥선보다 상대적으로 적다) 대신

판옥선 두척에 각각 승선 하여 최전방에 선다 .
(이경우 장렬히 전사하면 더욱좋다,상징적인 의미가 크므로)

 


다만, 자신의 주력함대는 조선의 판옥선 뒤에서, 참전은 하지 않고

응원군의 역할만 한다..

(이경우 조선군이 이기면 명수군은 추격하여 전과를 확대하고

반대로 조선군이 지면, 진린과 등자룡만 조선군과 함께 운명을 같이하고

나머지 병력은 그대로 내뺀다)

 

국운이 다해가는 명나라 무장으로써

그리고

충무공과 동고동락햇던 전우로써의 의리를 지킬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날저녁

 

드디어 결전의 날이 다가왓다

 

1598년 12월 15일 (음력11월 18일) 저녁10시

 

충무공은 살을 에는 듯한 추위속에 닷을 올렷다..

 

왜 밤에 몰래 출항햇을까?

 

당연히 장도뒤에 함선이 있는 것 처럼 위장을 하고 
노량으로 몰려오는 시마즈 함대를 상대하기 위해서이다..

 

시마즈함대를 밤새워 격파하고 다음날 해뜨기전

아무일 없었다는 듯 장도로 돌아와서
고니시를 각개 격파할 심산이었다..

 

 

결과론적이지만 이날밤에 먼바다에서 밤을세워 들려오는 포성과 화염을 보고
(관음포에 갇혀 전멸하는 시마즈를 돕지도 않코..ㅋㅋ)

식급한 고니시는 먼바다를 돌아서 내뺀다..

 

 

이번전투(노량해전)는,

상대하기 어려운 진검 승부이다..

이번에 상대하는 시마즈는

사천방향으로 남하하는 명의 중로 원정군 사만을

삽시간에 괴멸시킨 명장중의 명장이 아닌가 말이다.
(실록에 의하면 목없는 조명연합군의 시체가 10리길에 널부러 져 있었다고..ㅠㅠ )

 

충무공입장에서도 비로 얼마전 사천전투에서 죽어간 영혼들의 

명복을 비는 차원에서라도 반드시 이겨야만한다...

 

사실 충무공은 조선이 당한게 있으면 반드시 되 값아준다..

 

임진왜란 전초전인 1587년 손죽도 전투에서

이대원 권관이 돗대에 왜군에의해 돗대에 매달려 처형된 것과

똑같이 충무공은 명량에서 구루시마 미치후사에게 대우해줫다

 

경기도 용인전투에서 8만 근황군을

단 삼천의 병력으로 괘멸시켜

기고만장한 와키자카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해

한산도 앞바다까지 유인해  충무공은 또 복수해 줬다..

 

그리고 이번엔 이곳 노량에서 얼마전 사천전투에서 산화한 영혼들을

위로해줄 차례이다. 

 

드디어  ,1598년 12월 16일  새벽4시경

 

 

이곳 노량으로 야음을 틈타 병목지점으로 몰려오는

시마즈함대와 충무공의 판옥선단 간에 일대 난타전이 벌어졌다.

 

꼼꼼한 경계와 정찰을 바탕으로 기습와 원거리 함포공격으로

전광석화처럼 초기에 전투를 끝내버리는 충무공의 전투기법은

적도 이미 간파하고 있었고 또

이곳 노량에선 적의 야간 선제 기습으로 통하지도 않았다..

 

충무공이 선호하는 원거리 함포전 대신 이곳 노량에서

등선과 단백병전이 시작이 된것이었다..

그럼에도 전투초기 판옥선 50척의 화력에 의해

시마즈의 세키부네 50척은 전투 시작과 동시에 격파되었지만

 

저글링처럼 몰려오는 왜선과 뒤엉켜 왜군의 등선을 막는

처절한 혈투가 시작 되었던 것이었다..

 

 

 

 

계속 반복되는 말이지만 ,

원거리 함포전을 선호하는 충무공의 지휘한 전투에선

아군의 피해는 지금까진 정말로 경미햇다..

 

그리고 지금까지 충무공이 지휘한 전투에서 판옥선을 잃은 기록이

딱 한번 나오는데

 

바로 웅포해전에서 발포와 가리포전선 두척을 잃었는데 그것도 아군끼리  공명심에 서로 왜군을 공격하려다

서로 부딧쳐서 침몰한 경우이다.. 

 

지만 이곳 노량에선 야간 전투시작과 동시에

단백병전이 벌어져

최고 선두에있던 명 부총병 등자룡이  탄 함평전선이 불이나면서

모두 전사하고야 말았다..

 

적군과 아군사이에 한치 앞을 알수없는 백척간두앞에선 대혈투였다..

 

승리를 가늠할수 없었으므로

병사들의 얼굴는 모두 흑빛이었고

 

충무공 입장에서도 피가 바짝 말랏을 것이다..

 

선두에선 부총병 등자룡이 전사하고 위기는

곧바로 진린에게도 찿아왔다..

 

여러 사서에 의하면

새벽4시부터 전투가 시작되어

비교적 전투 초중반, 즉

아직 싸움이 한창인 동이 틀 새벽무렵

 

충무공은 진린의 함대를 구원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순간

왼쪽 겨드랑이를 파고 지나가는 유탄에 맞았다.,.

 

필자생각에는 왼쪽겨드랑이를 뚫고 심장을 지나가

즉사 했을 것으로 판단한다..

(물론 기록에는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라는 기록이 있으나.ㅠㅠ)

 

이날 전투로 북방에서 부터 동고동락했던 아들같은 친구인

 

가리포첨사 이영남 장군을 비롯하여 난중일기에 거북선 돌격장으로

자주등장하는 이언량 장군등  많은 전사자를 낸다 .

 

이처럼

 

임진왜란 정유재란 통털어 가장 치열했던 해전이 바로

 

노량해전인 것이다. 

 

 

충무공의 어이없는 갑작스런 죽음으로

후대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은둔설"이라든지 "자살설"을 주장하지만

 

그당시 충무공이 처한 상황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은둔설"또는 "자살설"은

 

 

한시대를 정말 악전고투로

 

파란 만장한 삶을 살다간 그분에게는 

 

매우 사치스런 단어라는게 필자의 생각이다..  

 

은둔설이든 자살설이든

 

당시 시대상황을 보면 충분히 납득할만한 상황이다..

 

그러나,

 

충무공이 전사한 노량해전 당시 상황을 보면

충무공은 노량해전의 끝을 보고 

 

드라팔가해전의 드골처럼

 

여친에게 편지나 쓰면서 편안하게 낭만적으로 전사한게 아니라

 

전투도중,,,즉,, 전투가 한창일때,,

 

이길지도 질지도 모르는 혼전중에 전사한 거라

 

충무공이 선두에 나서 갑옷을 벗어 던지거나 하는

 

낭만적인 자살?을 맘대로 선택할수 있는

 

상황이 절때 아니었다는거.ㅠㅠ...

 

아무튼 노량해전 직후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진린은

더이상의 해전을 절때 절때 엄금을 함니다.

.

.

.

아마 충무공 그분께서 전사하지 않았다면

 

당장 부산포로 이대로 진격 해야 한다고...........

 

부산포에서 기나긴 칠년간의 대전쟁의 끝을 보겟노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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