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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도만호 송여종(宋汝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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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장군의 휘하장수

2009. 12. 28.

임란초기 낙안군수 신호장군 막하군관(대변군관)으로 활약했다.

 

신호장군 막하에는 유능한 군관들이 많았던거 같다.

 

 

6월 초9일 [양력 7월 15일]<경술> 맑다.

몸이 아직도 쾌하지 않는다. 답답하고 걱정된다. 조방장 신호(申 浩)․사도첨사․방답첨사가 편을 갈라서 활쏘기를 했는 데, 신호 (申浩) 편이 이겼다.

 

 

이순신 장군의 장계를 쥐어가게 한 공로를 인정받아 부산포 해전에서 전사한 정운장군의 후임으로

 

전라좌수군의 최정예인 녹도군의 만호로 임명.

 

유명한 명량해전의 보유척수(12~13척)논쟁의 장본인.

 

녹도군의 만호로 추천한것을 보면 충무공이 송여종에 대한 신뢰가 컷다는 것을 알수 있다.

 

충무공의 장계 (부산포파왜병장)




태인에 사는 업무교생 송여종은 낙안군수 신호의 대변군관으로서 4번 적을 토벌할 때 충성심을 분발하여 솔선하여 적진으로 뛰어들어 죽기를 한하고 힘껏 싸워 왜의 머리를 베었는 바, 전후의 군공이 모두 1등에 든 자이므로 이 장계를 모셔가게 하나이다.


 


‘부산포파왜병장’ 은 그간의 전투에서 공이 많았던 군관 송여종이 가지고 올라갔다. 송여종이 행재소를 향해 출발한 날은 9월 17일이었다.



다음은 송여종이 장계를 받들고 올라갈 때의 상황을 기록한 송여종의 비문에서 옮긴 것이다.



 송여종의 비문

임금의 수레는 몽진하셨고 세 도성이 다 무너져 연도에는 적들이 겹겹이 진을 치고 있어 문안 차 달려가던 관원들도 문득 길이 막혀 중도에 돌아오는 형편이었다. 이공(이순신)은 공이 본시 나라에 죽을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공에게 장계를 주었다. 적의 진영을 돌고 돌아 낮이면 엎드리고 밤에 움직여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어 겨우 임금 계신 곳에 당도했다.



위(임금)에서 곧 불러보시고 친히 변방의 일을 물으시며 술을 하사하여 수고를 위로해줌이 참말 장하므로, 서부주부를 제수하고 위로부터 이조에 전교하시되 ‘전라좌수사 군관 송여종은 맨발로 걸어 천리를 멀리 왔으니 지극히 가상할 바다. 전라 방면의 수령 가운데 빈 자리가 있으면 보직케 하고’ 하시므로, 이조에서는 곧 남평현감을 제수했는데, 병조에서 또 청하되 ‘녹도만호가 탄환에 맞아 죽었으므로 마땅히 그 후임을 선택해야 할 것이온데 송여종을 이미 남평현감으로 제수하긴 했으나 일찍이 순신의 관하에서 공을 세웠고 또 해전에 익숙하오매 이 사람으로 대행케 하심을 바랍니다’ 했다.

 

 

비문에는 칠천량해전에서 공의 전선은 잃지 않았다고함.

 

명랑해전 당일 일기에서도 송여종장군의 전선이 나온다

 

 

나는 배를 돌려 곧장 쳐들어가 빗발치듯 어지러이 쏘아대니, 적선 세 척이 얼추 엎어지고 자빠지는데 녹도만호 송여종 (宋汝悰)․평산포대장 정응두(丁應斗)의 배가 줄이어 와서 합력하 여적을 쏘아 한 놈도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최근에 알려진 절이도 전투의 장본인.

 

절이도전투의 전개 과정도 대단히 흥미롭지만 전투후 명라나장수의 전공(수급)빼았기 문제가 불거졌을때

 

이순신장군이 일을 대단히 매끄럽게 처리함(동일사건의 서로다른 장계가 두장).

  

아래글은

 

임진왜란 역사연구소(http://blog.naver.com/hangiree/30006820055)에서 펀글임니다,

 

녹도만호 송여종(宋汝悰)의 비명(碑銘)

 

공의 휘는 여종(汝悰), 자(字)는 언온(彦蘊)이며, 그 선조는 여산[驪良] 사람이다. 여산 송씨(송대립,희립,정립)는 고려조에서부터 현달(顯達)하였는데, 휘가 숙문(叔文)인 분은 관직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으며, 8대를 지나 휘가 연손(演孫)인 분은 중종조에 구학(舊學)에 힘써 여러 차례 관직을 옮겨 통정대부(通政大夫) 한산군수(韓山郡守)에 이르렀다. 군수 공은 아들 셋을 낳았는데 모두 학문을 이루었다. 막내는 휘가 세형(世珩)으로 가장 귀하게 되었는데, 이조판서 겸동지경연사(吏曹判書兼同知經筵事)가 되었다. 판서 공이 휘가 창(昌)인 분을 낳았는데 청암도 찰방(靑巖道察訪)을 지냈고, 공이 왜적을 정벌한 공훈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추증되었으니 이 분이 공을 낳은 분이다.

 

 공은 태어나 12세에 대부인(大夫人)의 상을 당했는데, 부친을 받들고 계모(繼母)를 섬기며 동생과 누이들

 

을 잘 어루만져 효성과 우애로 알려졌다. 자라서는 수염이 많고 산악처럼 우뚝하여 (키가) 9척이나 되니 고

 

을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판서공(判書公)에게는 자손이라 할만한 이가 있으니 제사를 거르지는 않겠

 

구나.」라고 하였다. 스스로 호시(弧矢)를 단련하는데 힘써서 여러 번을 향시(鄕試)에는 합격하였으나 누

 

차 (대과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임진년에 왜적이 바다에서 내려 깊이 쳐들어오니 온 나라가 머리를 감싸쥐고 자기만 온전하게 하려는 계

 

책들을 세우니 공이 의연히 스스로 분발하여 몸을 빼쳐 낙안군수 신호(申浩)의 막하로 들어갔다. 신호는

 

평소에 공을 그릇으로 여겼기에 모든 고을의 일을 공에게 위임하였다. 신호가 좌수사 이순신(李舜臣) 공에

 

 

게 소속되어 한산도에서 왜적을 토벌할 때에 공은 단 하루도 군중(軍中)에 있지 않은 날이 없었다.

 

 주사(舟師)가 대첩을 거두고서 이공(李公)이 수급을 바치러 갈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데 적임자를 얻지 못

 

하였다. 이 때에 대가(大駕)가 몽진(蒙塵)하고 세 도읍을 모두 지키지 못하여 연로(沿路)의 적들이 겹겹이

 

서로 바라보이는 곳에 주둔하여 문안하러 달려가던 관원들도 문득 길이 막혀 중도에 돌아오게 되니 이공

 

(李公)이 평소 공이 순국(殉國)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는 말을 듣고는 공을 불러서 장계를 주었다.

 

공이 왜적의 진영을 돌고 돌아 낮에는 숨고 밤에만 움직이기를 계속하여 구사일생으로 행재소(行在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상께서 불러보시고 친히 변방의 일을 묻고서 술을 하사하시어 수고를 위로하는 것이 매우 각별하였다. 이

 

에 조정에서는 모두들 안 평원(顔平原 평원태수 안진경)과 이평(李平)의 관계에 비유하였다. 즉시 서부 주

 

부(西部主簿)에 제수하였는데, 상께서 이조(吏曹)에 전교하시기를, 『전라좌수사의 군관 송여종(宋汝悰)은

 

험한 길에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천리 먼 길을 왔으니 지극히 가상하다. 남방의 수령 중에 빈 곳이 있으면

 

보직케 하라.』하시어 이조에서 즉시 남평현감(南平縣監)을 제수할 것을 의망(擬望)하니 병조에서 또 아뢰

 

기를, 『녹도(鹿島)의 전 만호(前萬戶)가 탄환에 맞아 죽었으니 마땅히 그를 대신할 사람을 가려 뽑아야 하

 

는데 송여종이 비록 이미 남평현감에 제수되었으나 일찍이 이순신의 관하에서 공을 세웠고, 수전(水戰)에

 

도 익숙하니 이 사람으로 대신하게 해야겠습니다.』하니, 윤허한다고 하시어 드디어 녹도만호(鹿島萬戶)

 

로 바뀌었다. 공은 부임하고 나서부터 전선을 집으로 삼아 날로 다스리는데 힘써서 군대가 충실하여졌다.

 

 갑오년 4월에 조정에서 특별히 주사(舟師)를 위한 무과를 설치하여 수군에 소속된 장졸들을 위무(慰撫)하

 

였는데, 공은 을과(乙科) 7등으로 합격하니 이 때에 공의 나이 42세였다. 정유년에 이순신 공이 모함을 당

 

하여 잡혀가고 원균(元均)이 대신하여 통제사가 되었는데, 왜적이 그 해 7월에 한산도(閑山島)를 함락시켰

 

다. 주사가 모두 무너졌으나 공의 전선은 홀로 완전하니 사람들이 모두 신명(神明)이 도우신 것이라 하였

 

다.

 

이공(李公)이 기복(起復)되어 주사를 통솔하게 되어서 타다 남은 전선들을 수합하여 완전하게 수리하였는

 

데 다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적선 200여 척이 이미 벽파진(碧波津) 앞바다에 도달하였다. 우리 전선은 겨우

 

10척에 불과하였으나 일당백의 용기를 떨쳐 앞장서지 않는 이가 없었다. 승첩을 아뢰는데 공

 

은 수공(首功)이 되었다.

 

이공이 보화도(寶花島)로 나가 주둔하는데 흥양의 왜적들이 사방으로 나와 살인하고 약탈한다는 것을 듣

 

고는 공을 복병장(伏兵將)으로 정하여 정병(精兵) 백여 명을 주니 공이 매(枚)를 물리고서 (적진을) 출입하

 

며 포로로 잡힌 남녀들을 유인해 돌아오게 하고 적병을 셀 수 없이 쳐죽이니 왜적이 땔감을 구하지 못하여

 

결국 순천(順天)으로 옮겨갔다.

 

 무술년 7월에 이공이 또 공에게 명령하여 몽충(蒙衝 전선) 6척을 거느리게 하여 바닷길을 파수(把守)하라

 

하니 공이 즉시 출발하여 녹도 앞바다(절이도전투)에 숨어 정박하고 있다가 적선 10척이 바다에 안개가 낀 것을 틈타 몰

 

래 들어와서 장차 야경(夜驚)하려는 계책을 꾸미기에 공이 즉시 염탐하여 알아내고는 돛을 올리고 곧바로

 

나아가 남김없이 다 무찌르고 개선하여 돌아왔다. 이공이 즉시 포상하는 장계를 올렸고, 명나라 장수도 또

 

한 은화와 포목(布木)으로 상을 주는 것이 매우 후했다. 11월에 이공이 주사(舟師)를 크게 모아 노량(露梁)

 

에서 싸웠는데 적병이 크게 패하여 바닷물이 붉게 변하였으니 중흥의 전공으로는 이것이 제일이었으며, 공

 

의 공로도 또한 여러 장수들보다 앞섰다.

 

 기해년(己亥年, 1599)에 단성현감(丹城縣監)을 제수받았고, 경자년(庚子年, 1600)에는 그동안의 노고에 대

 

한 보답으로 특별히 절충장군을 가자하기에 서울에 들어가 사은(謝恩)하니 겸사복장(兼司僕將)을 제수하

 

였다. 신축년(辛丑年, 1601)에는 외직으로 나가 임치첨사(臨淄僉使)가 되었는데 임기가 만료되자 흥양현감

 

(興陽縣監)을 제수하였다. 을사년(乙巳年, 1605)에 선무원종공신녹권(宣武原從功臣錄券)을 하사받고 부친

 

에게 (벼슬을) 추증하였다. 얼마 후에 곤양군수(昆陽郡守)를 제수받았으나 일이 있어서 파직되었다. 정미

 

년(丁未年, 1607)에 경상우도 수군우후를 제수받았다가 재임 중에 부친이 돌아가시어 분상(奔喪)하였는데

 

슬픔과 괴로움이 병이 되어 기유년(己酉年, 1609) 8월에 상복을 입던 중에 돌아가시니 향년 57세였다. 장사

 

를 지낼 즈음에 맏아들 진경(震慶)의 원종공훈(原從功勳)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우윤(漢城府右

 

尹)에 추증되었고, 그 해 11월 경진일(庚辰日)에 상두산(象頭山)의 신좌(辛坐) 을향(乙向)의 언덕에 장사지

 

냈다.

 

 공은 품성이 온화하고 순박하며 마음씀이 근후(謹厚)하였으며, 사람을 대할 때는 모두 겉치레[邊幅]를 없

 

앴으며, 친척들을 구휼하자 (이를) 기다려 끼니를 끓이던 사람들이 많았는데도 겸양하고 공손히 따르기를

 

시종 한결같이 하였다. 군진(軍陣)에 임하여 적과 대치하고 있을 때에는 몸을 빼쳐 흔들리지 않으니 8년을

 

수군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대소 60여 회의 전투에서 시석(矢石)이 좌우에 떨어져도 전혀 안색이 변하지 않

 

았다. 편비(褊裨)들을 분발하게 하고 외로운 전선을 이끌고서 (공훈을) 세운 바가 오히려 이와 같았으니 공

 

에게 삼군(三軍)을 통솔하여 한쪽 방면을 담당하게 하였다면 공의 성취가 어찌 많지 않겠는가?

 

 공의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김씨로 학생 우이(友頤)의 딸인데, 4남 1녀를 낳았다. 장남은 진경(震慶)으로

 

을해년(乙亥年 → 강항의 생몰연대를 보면 己亥年(1599)의 실수로 보인다)에 무과에 합격해서 검모포만호

 

(黔毛浦萬戶)를 지냈으며, 주부(主簿) 류근(柳謹)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았다. 차남은 진강(震綱)

 

으로 수문장(守門將) 류경윤(柳慶胤)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고, 그 다음이 진선(震善)으로 임

 

인년(壬寅年, 1602)에 무과에 합격하여 여도만호(呂島萬戶)를 지냈는데, 학생 조경응(曺慶膺)의 딸에게 장

 

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다. 그 다음이 진록(震祿)으로 학생 전한봉(田翰鳳)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딸은 정

 

덕봉(鄭德鳳)에게 시집갔는데 부친이 돌아가시고 나서 아들 둘을 두었다고 한다. 비명은 이렇게 짓노라.


 어진 이는 반드시 용감한 것이나

 용감한 이가 꼭 어진 것은 아니요,

 신하된 이로써 충성을 다하고,

 자식된 이로써 효성을 다하였으니,

 이는 인(仁)과 같고,

 살아서도 바라지 않고,

 죽어서도 움직이지 않으니,

 이는 용(勇)과 같도다.

 지혜로운 장수는 진실로 숭상할만하나,

 복장(福將)은 지장(智將)보다 낫도다.

 신호(申浩)가 (공이) 몸을 의탁할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이 충무공이 (공이) 함께 일을 할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

 즐겨 그를 취하였으니,

 지혜롭지 않다고 할 수 없을 것이며,

 맨손으로 떨쳐 일어나 금인(金印)을 취하였으니,

 그 삶이 또한 영광이요,

 그 죽음이 기쁨이니,

 복이 없다 말할 수 없을 것이라.

 상두산(象頭山)의 비탈은 몸과 혼이 묻힌 곳이니,

 만고의 명성을 한 조각의 비석에 새겨 밝히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