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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군수 신호(申浩)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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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장군의 휘하장수

2009. 12. 28.

신호(申浩) 장군(1539~1597) , 고향 : 정읍시 북면 우일리 원당





개인적으로 신중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판단됨니다.

 

임란초기 타도(경상도)출전 문제로 작전회의 때


정운,송희립등과 달리 출전을 강하게 반대하던 장군입니다.

 

그 이유는 이억기 수군이 올때까지 기다려(집중의원리) 야 한다는 거지요.

 


당시 상황은 대략 이렇습니다.

 

원균은 자기가 거느린 함선을 몽땅 수장시키고서 , 


장계에는 전라좌도 수군함선과 연합해서 공격할 수 있도록


이율 배반적인 행동을 함니다..

 


이사실을 모르는


충무공은 밀계와 지침에 의해 


원균관할 첨입군(공동관리구역,평산포,곡포 상주포)장수를


봉장으로 삼아

(물론 좌수영소속의 방답군[첨사.이순신]은 이억기에 배속되어 물길을 안내하며 후원)


전라좌도 경상우도,,좌우 연합함대로 왜의 선봉을 공격할 계획이었는데요 


5월2일 기절초풍 할일이 일어납니다.

 

송한련(宋 漢連)이 남해에서 돌아와서 하는 말이,
"남해현령(기효근)·미조 항첨사(김승룡)·상주포·곡포·평산포만호(김축) 등이
하나같이 (왜적의) 소식을 듣고는 함부로 벌써 달아나 버렸고, 군기물 등도 흩어 없어져
남은 것이 거의 없다"고 한다. 놀랍고도 놀랄 일이다
 

 

이순신장군은 이때까지만 해도 원균이 어느정도 함선을 보유한걸로 알고있었는데 연합은고사하고

 

자기구역 코앞까지 이제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보통일이 아니죠.

 

그래서 하는수 없이 방답첨사 이순신의 수군을 부랴부랴 불러들여 5월4일출격하게 됨니다.

 

이상으로 당시 상황은 출격할만한 정상적인 상황이 절때아니죠

(하긴 이순신장군은 항상 열악한 상황에서 전투를 치뤘죠) 

 

아마 제가 만약 이순신장군이었다면 그상황에서 출전하지 않고 기다렸을겁니다,

(결과론적으론 틀렸지만)

 

출전전날(5월3일) 이순신장군은 5관5포의 휘하장수중 한명인 여도권관  황옥천을 처형하는데요,

 

표면적으론 탈영해서 집에있는걸 붙잡아 처형했다고(탈영했는데 집에 왜있는지?)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론 무리한 출전을 강력하게 반대해 집에있다가 처형된것으로 판단됨니다.

 

이시기에 신호장군도 처형될수도 있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이순신장군은 이날 일기에 신호장군에 대한 군법을 언급합니다)


5월 2일 [양력 6월 11일]<신유> 맑다.

겸 삼도순변사의 공문과 우수사의 공문이 도착했다. 송한련(宋 漢連)이 남해에서 돌아와서 하는 말이, "남해현령(기효근)·미조 항첨사(김승룡)·상주포·곡포·평산포만호(김축) 등이 하나같이 (왜적의) 소식을 듣고는 함부로 벌써 달아나 버렸고, 군기물 등도 흩어 없어져 남은 것이 거의 없다"고 한다. 놀랍고도 놀랄 일이다. 오정 때에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진을 치고, 여러 장수들과 약 속을 하니, 모두 기꺼이 나가 싸울 뜻을 가졌으나, 낙안군수(신 호)만은 피하려는 뜻을 가진 것 같으니, 한탄스럽다. 그러나 군법이 있으니, 비록 물러나 피하려 한들 그게 될 법한 일인가. 저녁에 방답의 첩입선(첩입된 지역을 왕래·연락하는 배) 세 척 이 돌아와 앞바다에 정박했다. 비변사에서 세 어른의 명령이 내려왔다. 창평현령이 부임하였다는 공문을 와서 바쳤다. 저녁에 군호를 용호(龍虎)라 하고, 복병을 수산(水山)이라 하였다.




 

하지만 출전하게되고 좌부장(左部長)으로 옥포(玉浦), 견내량(見乃梁), 안골포(安骨浦) 등의 싸움에서 공을 세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진..

 

 정유재란때 조방장으로 있다가 이순신장군의 몰락과 더불어

 

수군에서 육군(교룡산성 수어장)으로 있다가 남원성 전투때 지원나갔다 전사함니다.


충무공의 휘하장수들은 어디서 싸워야 하는지 또 어디서 죽을지 아는 장수들임니다..


평지인 남원성에 진을치면 안된다고 그렇게 뜯어 말렷건만,,,,


주력인 기마대의 무용을 뽐내고 싶었던 양원은 결국 남원성에 주둔을..ㅠㅠ  


(사후 시신은 수습하지 못했다고 전해지네요.)

 

[임란중 이순신장군이 지휘한 전투에서 전사한 장수는 사실 몇 안됨니다, 정운-부산포해전 ,

기리포첨사 이영남(블로거참조),주부 이설,돌격장 이언량,낙안군수 방덕룡, 홍양현감 고득장-노량해전,왜교성공방전은생략]

 

 

공의 휘(諱)는 호(浩), 자(字)는 언원(彦源)이며, 계파는 평산(平山)에서 나왔으니 고려 태사(太師) 장절공(壯節公) 숭겸(崇謙)의 후손이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휘가 치복(致復)인 분이 있었는데, 관직은 여러 조(曹)의 참의(參議)에 이르렀으며, 비로소 호남의 고부(古阜)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3세를 거쳐 휘가 희중(希仲)인 분에 이르러 창녕(昌寧) 장(張)씨의 딸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18년, 기해년(己亥年, 1539) 3월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호방하고 대범하여 범인들과 같지 않았고, 품은 뜻과 기상이 컸었다. 약관을 갓

 

넘어서 고을의 향교에 적을 두고 있었는데, 본도의 도사(都事)가 여러 유생들에게 송독(誦讀)할 과제를 내

 

고서 순행(巡行)하여 군(郡)에 이르렀다. 공도 또한 미리 익혀두었으나 시험에 임해서 실수하여 굴욕을 당

 

하게 되었다. 공이 개연히 좌중(座中)에서 일어나며 말하기를, 「글을 읽는 선비로 오늘의 치욕을 당하여

 

이 지경이 되었구나!」하고는 망건을 벗어 관청 안의 연못에다 던져버리고 떠났다. 이 때부터 더욱 분발하

 

고 격려하여 낮에는 활쏘기를 익히고 밤에는 등불을 밝히고 서사(書史)를 읽기를 그치지 않더니 융경(隆

 

慶) 정묘년(丁卯年, 1567)에 이르러 드디어 무과에 갑과 2등으로 발탁되었다.

 

 공은 재능과 힘이 남보다 뛰어나 항상 목전(木箭)을 쏘면 500보에 이르니 시험에 응시해서는 왼손으로는

 

활을 잡고 오른손으로 화살을 재어 장시관(掌試官)에게 들어가 청하기를, 「원컨대 빨리 사람을 시켜 지붕

 

에 올라가게 하여 이 화살이 도달하는 곳을 살피게 하소서!」하고는 화살을 쏘았다. 과연 화살을 시험장 밖

 

의 황폐한 촌락 중에서 찾으니 시험장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시끄럽게 떠들며 기이하게 여겼다. 과거에 급

 

제하고 나서 내외의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는데, 특히 무용(武勇)이 현저하여 일찍이 조산보만호(造山堡萬

 

戶)가 되었을 때에 방수(防守)를 제대로 하여 주장(主將)에게 포상을 받아 유임되어 임기만료가 되었어도

 

교대하지 않은 지가 여러 해가 되었다.

 

 선조께서 일찍이 공이 오래 수고한 것을 기억했다가 본도의 병사(兵使)에게 명령하기를, 「신호(申浩)는

 

여러 해 동안 북방을 지키며 근면하게 애쓴 것이 많으니 그에게 빨리 내직(內職)을 제수하라.」고 하시니

 

이때에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를 제수(除授)받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경력(經歷)으로 승진되었다. 경신

 

년(庚申年, 1590)간에 조정에서 비로소 수길(秀吉)이 길을 빌려 명나라를 치려고 하는 계책을 갖고 있음을

 

깨닫고서 한때의 무장들로 굳세고 용맹하며 재략(材略)이 있는 자들을 선발하여 나누어 남방의 고을에 제

 

수하였는데,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이 정읍현감(井邑縣監)에 제수되고, 권준(權俊)이 순천부사(順天府使)

 

에, 배흥립(裵興立)이 흥양현감(興陽縣監)에, 어영담(魚泳潭)이 광양현감(光陽縣監)에 임명된 것과 같이

 

공은 곧 낙안군수(樂安郡守)에 제수되었다.

 

 임진년 4월에 이르러 과연 왜적이 대거 쳐들어왔다. 이 때에 이순신 공이 이미 발탁되어 호남좌도수군절

 

도사가 되었는데 주사(舟師) 수십 척을 이끌고서 공을 중위장(中衛將)으로 삼아서 옥포(玉浦) 앞바다에서

 

만나 접전하였다. 공이 앞장서서 대선(大船) 1척을 부수고 그 장수의 관복(冠服)과 갑주 및 검을 빼앗았다.

 

다음날 또 적진포(赤珍浦)에서 싸워서 대선 1척을 부수고, 또 견내량(見乃梁)에서 싸워 대선 1척을 부수었

 

으며, 다시 안골포(安骨浦)에서 싸워 수급을 벤 것이 매우 많았는데, 절도사가 연달아 공을 적은 명부를 올

 

렸는데 공의 이름은 항상 1등에 있었다. 조정에서 드디어 공의 자급(資級)을 올려 통정(通政)이 되었다. 7

 

월에 공이 또 이공(李公)을 따라 재차 영남으로 내려가 부산 앞바다에서 적을 만나 또다시 그들의 대선 4척

 

을 부쉈다.

 

 공이 군(郡)에 있으면서 정무(政務)를 다스릴 때에 지역의 호족들을 엄히 억누르는 것을 중시하였는데, 그

 

중에 동습(東濕)이라 하는 자가 있었다. 경관(京官)이 마침 고을의 정사에 대하여 조사[按廉]할 일로 지경

 

(地境)에 이르렀다가 공을 원망하는 자의 말을 듣고 이에 근거하여 공을 파직시키니 이공(李公)이 크게 애

 

석하게 여기다가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가 되어서는 드디어 청하여 공을 주사조방장(舟師助防將)으로 삼

 

았다.

 

 정유년에는 교룡산성(蛟龍山城)의 수어장(守禦將)으로 옮겨 제수되었는데 산성은 곧 고대 대방(帶方)의

 

 

옛 성으로 남원부(南原府)와의 거리가 겨우 6~7리에 불과했다. 이 때에 남원이 포위되어 날로 위급한데

 

명나라 총병 양원(楊元)이 가벼운 기병으로써 포위를 뚫고 먼저 빠져나왔다. 공이 남원을 지키지 못하면

 

산성은 더욱 외롭게 되어 홀로 보전할 수 없음을 헤아리고 하루는 화살에 편지를 묶어 병사 이복남(李福

 

男) 등에게 날려서 같이 힘을 합하여 사수(死守)할 것을 약속하려 하였으나 성중에서는 처음에는 응하지

 

않았다. 성이 함락되려 하자 공이 비로소 동문(東門)을 빼앗아 들어가니 적병이 이미 해자(垓字)를 메우고

 

성첩(城堞)을 넘어오는데 감히 막는 이가 없었다. 공이 나무에 몸을 숨기고서 적을 쏘는데 화살은 다 떨어

 

지자 오히려 대도(大刀)를 쥐고서 달려들어 싸우니 이르는 곳마다 적병이 모두 쓰러지고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노비 한 명이 공을 따랐는데 공의 말고삐를 잡고서 떠나지 않으니 공이 몸소 자신의 옷을 벗고,

 

또한 공의 이빨 하나를 부러뜨려 그 노비에게 주면서 돌아가 집에 알리도록 하면서 말하기를, 「오늘이 바

 

로 내가 죽는 날이다.」라고 하였다.

 

 이 때에 마침내 이복남, 부사(府使) 임현(任鉉), 별장(別將) 김경로(金敬老) 등과 같이 죽었으니 정유년 8

 

월 16일이다. 처음에 공이 매번 복파장군 마원(馬援)이 시신을 가죽에 싸서 돌아갔다는 말을 즐겨 외우며

 

항상 격앙하여 스스로 맹세하였는데, 그것이 남원을 구하러 달려가게 한 것이다. 평일에 손톱과 머리카락

 

을 뽑아서 한 궤에 넣어두어 소장하였는데, 표식(標識)으로 집안 사람에게 주면서 결사의 뜻을 보였다. 공

 

이 돌아가셨으나 시신은 시체더미 속에 있어서 찾지 못하니 집안에서는 결국 의관(衣冠)으로 선영[先壟]

 

의 옆에 장사지냈으니 아아 슬프구나!

 

 조정에서 나중에 공의 전공(戰功)을 논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으로 책록하고 형조판서를

 

추증하여 포상하고, 남원에 사당을 지어 공과 함께 같은 날에 전사한 이들을 함께 모셨으며, 이어서 충열

 

(忠烈)이라는 편액을 내려주셨다.

 

 공은 정부인(貞夫人)을 추증받은 전주 최씨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 천기(天紀)는 음사(蔭仕)로 주부(主

 

簿)에 이르렀으며, 주부공(主簿公)은 아들이 없이 딸 하나를 두었는데 사인(士人) 배시망(裵時望, 배흥립의

 

장남이다)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았다. 장남은 명전(命全)으로 현감(縣監)을 지냈고, 차남은 명순(命

 

純)으로 부사(府使)를 지냈다. 명순이라는 이는 곧 병자호란에 덕원(德原 → 德源) 영장(營將)으로 남산에

 

서 전사하였다.

 

공이 돌아가신 지 85년 후에 경연(經筵)에서 한 신하가 공의 충절(忠節)에 대한 정상(情狀)에 대하여 앞자

 

리에서 아뢰었던 적이 있는데 상께서 특별히 나에게 시호(諡號)를 정하도록 명하시고 태상시(太常寺)에 회

 

부한 것이 이미 몇 일이 되었다. 덕원공(德源公)의 아들인 전 부사(前府使) 상형(尙珩)이 공의 유사(遺事)를

 

간략히 취하여 나에게 시장(諡狀)을 요구하기에 내가 이 충무공이 왜적을 방어할 때의 장계에 실린 내용을

 

참조하여 공의 시종(始終)을 기록하였다. 상형이 기록한 바에 또한 공은 내행(內行)이 독실[篤純]하여 전

 

후로 시묘를 살 때에 죽만을 먹으며 지낸 것이 6년에 이르렀고, 비록 때를 만나지 못하여 미관말직에 머물

 

러 있을 때에도 한번도 권세 있는 집안에 비굴하게 드나든 적이 없었다고 하였으니 아! 이 한 마디 글을 보

 

건대 족히 공이 평소에 이룩한 바가 그 근본이 있음을 알겠다.

 

 이 충무공의 임진년 9월 장계에 이르기를, 「순천부사 권준(權俊), 낙안군수 신호(申浩), 광양현감 어영담

 

(魚泳潭), 흥양현감 배흥립(裵興立) 등이 모두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옮겨가신 지 이미 6개월에 이르렀는

 

데, 궁벽한 변방이라 민간에서 지공(支供)하는 것이 필시 모자랄 것이므로 서쪽으로 행재소(行在所)를 바

 

라보고서는 통곡을 이기지 못하고는 각기 군량 100섬과 군기 몇 종을 갖추어 배를 준비하고 사람을 모집하

 

여 바닷길을 거쳐 봉진(封進)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아아! 나라가 파천하고 뒤집히는 시기를 만나서

 

신하된 자로 국경을 힘써 지키는 것으로 밖으로는 강한 적을 맞아 꺾고, 안으로는 공물[職貢]을 근실하게

 

준비하여 공물로 바치는 보배를 바꾸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천고의 의열(義烈)을 감동시키고 그 기개를 고

 

취하는데 부족하겠는가! 아! 위대하도다.

 

 권준은 후에 선무공신에 책록되어 안창군(安昌君)에 봉해졌고, 배흥립은 후에 절도사에 이르렀으나 오직

 

어영담은 관작이 어디까지 이르렀는지 알 수 없기에 내가 신공(申公)의 시장(諡狀)을 쓰는 것으로 인하여

 

함께 언급하노라. 삼가 장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