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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5. 19. 20:12

런던에서의 정일우는 조금 달랐다. 생각보다 말을 아꼈으며, 밝게 웃는 동안에도 시선은 미묘하게 시야를 벗어나 다른 세계를 향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타들어가는 담배를 쥐고있는 가늘고 긴 손가락이 멋졌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단서를 찾지 못했다. "무슨 생각을 하나요?" 라는 물음에 그가 건네온 것은 자신의 감정을 차곡차곡 담아낸 몇 장의 글이었다.       피처에디터: 김민경   글: 정일우

 

런던에서의 정일우

 

 

1 2 래드 피케 티셔츠와 데님 팬츠. 빈폴 맨즈. 스티커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3  퍼플과 스카이 블루가 믹스된 피케 티셔츠. 옥스포드 라인. 베이지 팬츠. 모두 빈폴 맨즈. 스니커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4 4가지 컬러가 믹스된 피케 티셔츠. 옥스포드 라인. 빈폴맨즈.

 

4월 2일 마지막 촬영을 끝냈다. 그리고 일주일. 따분할 정도로 적막한 시간을 흘려보냈다. 촬영이 끝나기만 하면, 절대로 침대 밖으로 발도 내딛지 않을 거란 욕심도 지켜지지 않았다. 언제나 눈은 떠졌고, 복면만 벗었을 뿐 일지매는 여전히 현실 속의 나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4월 9일, 24부작으로 마무리 지은 <돌아온 일지매>의 마지막 방송. 튀어나올 것 같은 심장의 두근거림 같은 건 없었다. 뙤약볕에 아끼던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리듯 ‘쑤욱~’ 하고 내 몸 안에 뭔가 빠져나가는 느낌. 7개월을 품에 안고 있던 것 치고는 의외로 간단명료함. 요동치는 심리적인 변화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스스로 정리된 채로 흘러나오는 감정의 절제는 조금 의아스러웠다. 감정이란 게 너무 노골적이어서 생각한 것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어쩐지 의미가 바래는 것만 같아서. 커다란 배낭을 꺼내 급하게 짐을 챙겨 넣기 시작했다. 여행을 떠나자, 시간을 이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 여행은 내게 일종의 구급약 같은 거니까.

 

 

5 6 7 소매의 숫자가 포인트인 핑크 피케 티셔츠. 옥스포드 라인. 스카이 블루 팬츠. 모두 빈폴맨즈.
8 셔츠와타이. 네이비 베스트. 화이트 팬츠. 모두 빈폴 맨즈. 브라운 가죽이 포인트인 가방. 빈폴맨즈

 

 

 9 셔츠와 타이. 그레이 후드 점퍼. 네이비 팬츠. 모두 빈폴맨즈. 브라운 숄더백. 빈폴 액세서리.
10 옥스퍼드 셔츠와 타이, 데님 팬츠. 모두 빈폴맨즈.

 

런던은 세 번째다. 개인적으로 일본의 다이칸야마나 스위스의 베른 같은 휘적휘적 걸어다녀도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한적한 곳을 좋아하지만, 지금처럼 작품을 막 끝냈을 때는 북적이는 인파에 밀려 정신없이 떠다니는 방법을 택한다. 군중 속에 묻혀 치이고 밟히면서 정신없이 떠다녀야 좀 더 쉽게 내 몸에 묻은 캐릭터를 털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서. 하지만 진심으로 일지매를 빨리 놓아주고 싶은 건지, 아니면 그 반대 심리로 나를 다그치는 건지 정답은 아직 찾지 못했다. 그리고 일지매를 덜어낸다 한들 저울에 단 것처럼 이전의 나와 똑 같은 무게와 질량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급하지도 그리고 너무 과하지도 않게. 하지만 7개월을 이고 있던 일지매를 내가 진정 놓아줄 수 있을지.

이번 여행에서 내가 풀어야 할 숙제다. 드라마 끝나고 읽기 시작한 <남쪽으로 튀어>. 그리고 악틱 몽키즈와 다이나믹 듀오 형들의 음악. 덕분에 12시간 남짓한 비행시간을 잘 버텨낼 수 있었다. 게다가 오쿠다 히데오의 가볍게 터지는 글을 좋아하는데 이번 책 역시 혼자 스멀거리는 웃음을 참아내기가 힘겹다. 짐을 찾고 게이트를 빠져나오자 달큰한 푸른색 하늘이 그대로 눈꺼풀에 박혀버렸다. 게이트 안과 밖의 공기가 충돌하듯 서늘하면서 동시에 후끈한 바람이 목덜미를 타고 머리를 찰랑거렸다. 런던이다. 지금부터는 최소한의 익명성만으로 시간을 흘려보내야지.

 

 

11  댄디 스타일의 셔츠와 타이, 다크 그레이 재킷, 화이트 팬츠. 모두 빈폴 맨즈. 안경은 정일우 본인의 것.
12  스트라이프 셔츠와 베이지 치노 반바지, 브라운 야구 모자, 브라운 벨트. 모두 빈폴 맨즈

 

 

몸을 일으키고 시간을 보니 6시가 조금 안 된 시간.  세수만 간단히 하고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호텔을 나섰다. 3주간의 부활절 휴가 기간에 들어간 런던의 아침은 바닥까지 내려앉은 묵직한 무게만큼이나 근엄한 분위기. 고즈넉하다 못해 스산할 정도다. 여행자의 입장이란 게, 서울에서와 같은 패턴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지만 이번만큼은 나 자신에게 약속한 바가 있어 부지런을 떨어보기로 했다. 런닝화 끈을 조이고 템스 강까지 조깅하기. 웨스트민스터와 빅밴을 거치는 동안 만난 사람이라곤 개와 산책하는 아저씨. 스피커를 뚫고 나올 만큼 음악을 크게 들으며 걷는 흑인 학생. 두 번이나 왔지만 이토록 한산한 런던 시내를 경험하게 될 줄이야. 역시나 여행의 묘미는 이런 의외성에서 출발하는 게 아닐까. 쉬지 않고 런던 아이까지 달렸더니 땀이 날 정도로 온몸이 따뜻해졌다.

 

그리고 강바람을 타고 코끝으로 찬 공기가 살짝 올라왔다. 런던으로 출발하기 이틀 전에 머리를 잘랐다. 순간, 바람에 밀려 귀밑을 타고 오는 짧은 머리카락에 움찔했다. 일지매를 위해 처음으로 해보았던 긴 머리의 헤어스타일, 아직 다음 작품이 정해지지 않아 10cm 정도의 커트로 만족. 단정하게 쏟아진. 어깨 선을 덮었던 머리가 이제 겨우 목덜미를 덮을 뿐이다. 벤치에 않아 요즘 빠져 있는 크레이크 데이비드의 ‘you don’t miss your water’ 한 곡을 다 듣고 나서야 일어섰다. 시작한 김에 테이트 모던까지 달려가고 싶었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13 14 15 뒷면과 소매의 프린트가 포인트인 화이트 피케 셔츠. 옥스포드 라인. 핑크 팬츠. 모두 빈폴 맨즈

 

 

16  스카이 블루 티셔츠와 옐로 팬츠. 모두 빈폴 맨즈. 보타이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17 18 로고가 프린트된 화이트 라운드 티셔츠와 네이비 라운드 티셔츠의 레이어링. 옥스포드 라인. 데님 팬츠. 모두 빈폴 맨즈.

 

코벤트 가든 앞에서 중학교 때 친한 친구였던 주황이를 만났다.  거의 1년만이다. 런던 칼리지 오브 패션에서 풋 웨어 디자인을 공부하고 있는 주황이는 런던에 올 때 마다 스케줄이 맞지 않아 이렇게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사실 이번 여행 스케줄을 짜면서 내가 기대했던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다행히 주황이도 부활절 방학 기간이라 다음 여행지인 베를린에 동행하기로 했다. 친구와 여행하는 것도 처음이지만 어렸을 때부터 뭐든 잘 통했던 친구라 같이한다는 것만으로도 기대감 급등이다. 참, 주황이는 중학교 별명은 오렌지. ㅋㅋ. 내 별명은 ‘일구’. 친구들끼리 이름 뒷자에 ‘구’자를 붙여 놀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이젠 제법 런더너의 기질이 느껴지는 녀석을 따라 브리티시 뮤지엄을 향해 걸었다. 올 때 마다 이곳에 들르는 이유는 전시 규모나 퀄리티도 마음에 들지만 1층 입구 오른쪽에 마련된 카페티리아. 하얀색 바가 길게 뻗은 테이블에 앉자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면 런던의 복작함과는 조금 떨어져 있는 여유로운 기분을 느끼게 한다. 게다가 오늘처럼 날이 좋은 날엔 천장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빛이 만들어내는 음영의 틀이 공간의 미학을 느끼게도 하고, 주황이가 2층 전시를 보고 오는 동안 책을 절반이나 읽어버렸다. 뾰족하게 솟은 감성이 느긋하게 풀어지는 순간이다.

 

빨간색 이층버스를 타고 브릭레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저기 붙은 벽보와 전선줄에 뭉쳐 매달린 운동화 묶음. 런던에 두 번이나 왔지만 이런 빈티지한 모습은 처음이다. 점점 더 런던이 마음에 들려고 한다. 점퍼 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손을 꺼내 어어폰을 말아 넣었다. 눈과 귀를 열어두지 않는다면 지금 이렇게 걷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만 같아서. 달짝지근한 햇살과 코를 뚫고 지나는 상쾌한 바람이 마음 깊숙한 곳에 가라앉았던 시간을 꺼내 올리는 순간이다. 그리고 골목 한 귀퉁에 서서 이런 다짐을 했다. 그동안 일지매에게 닫혀 있던 시간을 조금씩 허락해야지. 그리고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욕심으로 또다시 한 발짝 내디뎌야지.♥

 

피처 에디터: 김민경  사진: LOUIS PARK  스타일링: 강윤주@블링블링  헤어 &;;; 메이크업: 김미경
프로덕션 코디네이터: 앤 킴 BY PRODUCTION GUINNESS

 

장문의 글을 작성해서 잡지에 실을 정도로 복잡미묘한 심경였나 보네.. 근~ 한 달 동안 낯선곳의 풍광 감상하면서 외국물 먹고 돌아오니 마음의 짐이 덜어지더냐??? 근데.. 런던은 이번이 세 번째다.. 이래놓고 본문에선 2번째라고 2번이나 언급한 건 뭐라지?! 에디터가 오타낸 건가..
사진이정말이쁘네요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