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方外之士

空手잠빌 2007. 10. 13. 18:16

[Why] “45분마다 한 명씩 자살하는 세상…”

[최보식기자 직격인터뷰] 정치인에서 승려가 된 지개야
“법당, 여기가 바로 내가 있을 곳”
“어려서 가출… 거지·막노동, 안해본 게 없어”

입력 : 2007.10.12 23:03 / 수정 : 2007.10.13 10:40

 

 

흙 때가 전 플라스틱 슬리퍼를 신고 마중 나왔다. 잿빛 승복 바지를 입었지만, 키 작고 마르고 노동에 찌들려 쭈글쭈글해진 모습이었다. 합장하고 첫인사가 “공양(식사)부터 합시다. 절집에서는 찬(饌)이 없는 게 찬이지” 였다. ‘지개야’(祉개?也: 복을 비는 거지·56)라는 법명을 쓰는 그는 객(客)을 보면 밥 대접부터 먼저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경기도 안성시 칠장사(寺)로 들어가기 초입에 걸려있는 ‘묵언마을’문패. 여러 가호가 모인 마을인 줄 알았는데 법당과 요사채만 있다. 절은 절이나 절 같지가 않다. 건축물은 반듯하게 각이 서야 할 텐데, 구불구불 곡목(曲木)과 황토만을 써서 기둥과 서까래를 엮고 세워놓았다. 생전 본 적이 없는 공법이었다. 우리말로 ‘법당’’구경칸’’똥칸’ 등의 표찰을 붙여놓았다. 그는 속세 시절의 재산 30억 원과 5년 세월을 이 유니크한 절에 털어 넣었다.

  • ▲ 경기도 안성시 칠장리에 위치한‘묵언마을’. 약 7000㎡ 땅에 굽은 나무로 2층짜리 법당 건물과 요사채 3개 동을 지었다.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우리의 마음속에 절이라면 공짜로 밥 주고 잠을 재워 줄 것 같은 향수가 있지요. 지금은 그렇게 잠 재워주고 밥 주는 곳이 거의 없어요. 예부터 절에는 배고픈 사람, 마음 아픈 사람, 도둑놈이든 깡패든 누가 오더라도 그냥 재워 줍니다.’네가 도둑놈이냐?’고 속세의 과거를 묻지도 않는 것이 절이에요. 우리 사회에 이런 곳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 어차피 죽으면 내 가진 것들 놓고 갈 건데 조금 빨리 이 자리에 놓아둔 것뿐이지요. 짓는 것은 내가 지었지만 내 것이 아닙니다. 여기 오는 사람들의 것이지요.”

―하필 왜 굽은 나무만을 써 절을 지었지요?

“모든 기둥은 반듯해야 먹줄을 대는데, 이런 곡목(曲木)으로 지어본 적 없는 목수들이 몇 번이나 두 손들고 가버렸어요. 목수들을 구하는 데 애를 먹었어요. 저는 머릿속으로 구상을 갖고 있으나 기능적인 기술이 없으니, 목수들에게 ‘내가 시키는 대로 따라주면 된다’고 주문했습니다. 집 짓는 데 늘 같이 붙어 있었지요.

우리는 어떤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가 없거든요. 나무란 기둥 자체가 똑바르고 곧아야 된다는 고정관념이 박혀있는 거죠. 그런데 자연이란 원래 각지고 네모나지 않잖아요. 굽은 나무는 틀에 맞지 않고 버림받지요. 제 살아온 삶의 모습도 이런 굽은 나무와 별 차이가 없었고, 삶의 막장에서 이곳을 찾아올 사람들도 비슷하겠지요.”

마주앉아 된장국에 밥을 먹으면서 그를 쳐다보니, 얼른 승(僧)과 속(俗)의 구분이 안 됐다. 여기에 오기 전까지 그는 사업과 정치판에 있었다. ‘안동황우촌’이라는 체인음식점을 만들었고, 경북 도의원·국회의원보좌관을 지냈으며, 지난 총선에 출마하려다’탄핵역풍’으로 중도 포기했다.

“저는 철조망이 막힌 길을 가위로 잘라가며 순리를 어겨가면서까지 가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빙 둘러가지요. 다음 총선도 있겠지만, 지금은 점점 나이가 내려오는 시대인데 내 나이가 점점 올라가니 나의 길이 아니구나 하고 미련 없이 떠나왔습니다. 제가 태어난 곳이 첩첩 산골이었지요. 거기를 닮은 곳을 찾다가 연고 없는 여기에 정착하게 됐어요.”

 

  • ▲ "정치할 때도 가족들이 말렸지만 출가할땐 더 말렸어요. 두 자식들에게 말했죠. 네 인생은 네가 살고 내 인생은 내가 살 거다."


―처자식을 거느린 늦은 나이에 출가까지 한 이유가 있었나요?

“처음에는 전원생활을 꿈꾸었습니다. 어느 날 신문을 보니까, 우리나라에서 45분마다 한 사람씩 자살을 하고, 지구촌 65억 인구 중 70%가 양식이 없어 굶어 죽고, 인구 30%는 너무 먹을 것이 많아서 살을 빼기 위해 굶고, 날마다 어린이 3만5000명이 영양실조로 죽는다는 내용이었지요. 그걸 보면서 제 안에서의 어떤 고민만 할 게 아니라 무언인가는 해야 되겠구나 생각을 했어요. 그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서 갑자기 머리를 깎고 이걸 짓게 됐어요.”

―머리를 깎지 않으면 할 수가 없었을까요?

“삶에 상처를 받고 자살하려는 사람과 상담을 할 때, 속세인으로서 하는 것보다는 승려로서 하면 받아들이는 쪽도 달라집니다.”

―본인은 그대로인데 다만 일반 사람을 교화하기 위한 변신입니까?



“머리 깎고 먹물 옷만 입었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라고 설명하기 힘들지만, 출가 전과 후는 많이 다릅니다. 이제 누군가가 ‘스님 죽고 싶습니다’라고 찾아오면, 그는 제가 필요한 사람이지요. 이보다 더 값진 인생은 없죠. 인간 사표(辭表)를 쓰려고 하는 사람이 그 사표를 찢어버리고 열심히 살겠다고 제게 큰절하고 떠나는 그런 모습을 한번만 봐도 제가 이 절을 지은 보람을 느끼겠지요.”

―불교에서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없다고 보는데, 죽음에 대해 너무 집착하는 것은 아닌가요?

“그런 경지를 뛰어넘을 만한 깨달음에 제가 못 미칩니다. 자살을 하려고 기암절벽에 서 있는 사람도 뒤에서 바위가 굴러오면 놀라서 비킵니다. 그거 맞아 죽으나 자살하나 똑같을 텐데도 말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의 본능이겠지요.”

―여기는 아무나 와서 몇 날 며칠씩 그냥 먹고 지내도 됩니까?

“지금 여섯 분이 묵고 있는데, 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어디에 사는 누군가도 묻지 않았고 그냥 와 있습니다.”

잘하면 나도 이 절에서 무전취식 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자, 작은 눈으로 웃는 그에게 흥미가 당겼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몰려들면 감당을 못할 것 같은데.

“개개인의 인연에 따라갈 겁니다. 어떤 이는 노숙하면서 굶더라도 여기에 오려 하지 않을 겁니다. 여기서 돈 없는 사람은 그냥 자고, 돈 있는 사람은 보시를 조금 더 하겠지요. 그 보시하는 사람이 적어 운영비가 모자라면 반찬을 줄이면 되고.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 잠잘 데가 없으면 못 자고, 잠잘 수 있는 사람은 자겠지요. 여기서 묵으면서 몸과 마음을 다 추슬러서 나가면 또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겠지요.”

―여기로 들어올 때 가족들이 말리지 않았나요?

“정치를 하려고 할 때도 반대했지만, 그걸 떠나서 여기 들어와 산다니까 더 말렸지요. 지금은 직장을 다니는 두 자식들에게는 ‘나는 너희들을 낳아서 길러줄 뿐이지 네가 영어를 영점 맞든 수학을 전공하든 그것은 네가 알아서 해라. 네 인생은 네가 살지 절대로 내가 살아 줄 수 없고, 또 너희는 나보다 인생을 더 오래 살 것이다. 반대로 내 인생도 내가 살 거다’라고 했지요. 그렇게 혼자 떠나왔는데, 뒷날 안사람도 저를 따라 출가(태고종)를 해버렸어요. 부부 승려는 좀 드뭅니다. 이 경내에 있지만 서로 떨어져 살아요. 절이 정돈되면 저는 곧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정치판에는 어떻게 해서 들어갔나요?

“소 키우는 일로 도의원을 만나려고 면담 신청을 여러 번 했으나 면담을 안 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안 해주는 면담을 계속 신청하는 것보다 내가 도의원이 돼서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3평짜리 선거사무실에 선거운동원 3명, 프라이드 차 한 대로 했는데 당선됐어요.”

도의원을 함께 했던 김성조 의원(한나라당)은 “참 개혁적이고 독특한 분”이라고 기억했다.

내가 그를 찾아가게 된 것은 행사 초청편지 때문이었다. ‘한 번 놀러 오세요. ‘지개야’란 햇병아리 중이 살아가는 이야기도 듣고, 뭐 그렇게 손해야 나겠습니까?’라면서, 그는 20일부터 그 절에서 하는 행사를 이렇게 전했던 것이다.

‘저런! 농민도, 바람난 울 마누라도, 돈 벌면서 보시하네. 묵언마을에서는 농민과 도시인을 위한 우리 콩 메주를 직거래 주문 알선으로, 묵언마을에 있는 1000여 개 항아리에 도시인들이 직접 된장을 담가서, 필요시 언제고 퍼 가서 잡수시면 결과는, 농민은 콩으로 판매하는 것보다 메주판매로 3배 더 돈 벌고, 도시인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항암 된장을 시중가 3분의 1로 먹을 수 있어, 얼씨구 좋다. 물처럼 바람처럼. 지개야 합장’

 

  • ▲ 묵언마을 굽은 나무로 만든 요사채에서 지개야 스님을 만났다. /채승우 기자
 

―왜 절을 ‘묵언마을’로 지었습니까? 스님께서도 묵언을 하고 있지 않고, 우리는 지금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지요.

“ ‘묵언’(默言) 하면 절 냄새가 나고, ‘마을’하면 고향과 외가, 인간냄새가 풍기지요. 고향이나 외가에 다녀오듯 누구나 여기서 쉬어갈 수 있기를 원했기 때문이죠. 여기 들어오는 분에게는 묵언을 시켜요. 물론 저도 묵언하는 시간이 있지요.

묵언은 자기 내면을 들여다 보게 되지요. 처음 묵언하면 흩어진 마음이 밖으로 나돌지요. 모든 원망이 바깥에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마음도 가는 길이 있는데, 가다가다 끝이 되면 더 이상 안 갑니다. 며칠간 묵언하면, 내면으로 들어와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내가 왜 사는가?’ ‘우리는 태어나서 왜 죽어야 되는가?’라고. 인간이면 누구나 다 그런 고민을 하거든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과거에 살아온 길을 볼 수 있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것이죠. ”

―’왜 사느냐?’에 대한 스님의 답은 무엇입니까?

“후회 없는 삶이 어떤 것인지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한번뿐인 삶 즐기다 갈 수도 있지만, 저는 세상에 태어나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이 있지요.

안동에서 축협에 근무할 때, 저는 송아지를 인공수정해주는 일을 했어요. 농부들이 일어나는 시간이 보통 새벽 5시고, 집에 들어가는 시간은 밤 9시 정도 됩니다. 농부들의 시간에 맞춰 저는 새벽 5시부터 밤 10시까지 근무를 했어요. 왜냐하면 농부들에게는 제가 이 세상에서 제일 필요한 사람입니다. 제가 그 집에 가서 송아지를 한 마리 낳아주면 그 집 아들의 공납금을 제가 내주는 거나 마찬가지요. 그런 생각을 하면 밤에 자는데도 불러도 반가웠지요.”

그는 경북 안동산촌 출신으로 초등학교 졸업을 하고 가출했다. 그는“전깃불 밑에서 수돗물을 먹고 살아야 인간이 될 것 같아서”라고 했다. 초년 시절 이력에는 거지, 구두닦이, 신문배달, 중국집 종업원, 양복점 조수, 막노동 등이 들어 있다.

“오지 산골에는 매일같이 눈만 뜨면 이마에 딱 닿는 게 산이고 누우면 머리에 베는 게 산이었지요. 그러다가 어느 여름 반바지에다가 흰 러닝셔츠, 까만 고무신을 신고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안동시내까지 걸어와서 처음으로 전깃불을 봤지요. 중국집에서 버린 음식물 쓰레기를 먹었어요. 그걸 제일 먼저 개와 고양이가 먹습니다. 밤 12시 통금 사이렌 소리가 나면 사람들이 다 자기 집을 찾아가고 없을 때야, 그걸 공동수돗물에 씻어서 먹었지요. 잠은 빈 포장마차에서 잤지요. 그때 저를 아는 사람들은 ‘네가 깡패가 안 되고 도둑놈이 안 된 것이 너무 신기하다’고 합니다.”

―정규 학력은 여전히 가출할 당시의 초등학교 졸업입니까?

“어떻게든 공부를 해야 되고, 그 다음에는 남보다 더 잘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뒤 검정고시로 19살에 농업고에 입학했지요. 또 졸업해서 10년 만에 전문대에 들어갔고 다시 10년 만에 4년제 대학에 편입했고, 그 뒤로 대학원을 두 군데나 수료했어요.”

―그런 초년 고생은 한편으로 사람의 품성을 모질게 만들지 않나요?

“가축 인공수정사라는 시험이 있었지요. 시험을 치러 가려는데 차비가 없었습니다. 아는 가축 병원의 원장께 찾아가 ‘시험을 치러 가는데 차비 좀 빌려 주십시오’라고 했지요. 그분이 하는 말이 ‘내가 너 아비냐? 내가 왜 차비를 빌려 줘야 하느냐’는 것이었지요. 그때 제가 무슨 말을 했느냐 하면, “저는 앞으로 원장 선생님보다 1원이라도 더 잘 살 겁니다’라고 했지요. 결국 버스를 공짜로 타고 가서 시험에 합격해 축협에 취직이 됐습니다. 제가 비뚤어지지 않는 것은 그때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저는 모질었지요. 그러니 쓸데없는 데는 돈 한 푼 안 씁니다. 커피 한잔에 5000원이 아까워 다방에도 안 갔죠. 나중에 제가 돈을 많이 버니,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벌었으니 인생을 즐겨야지’라고 했지만, 저는 반대입니다. 인생은 즐겁게 살 것이 아니라 인간답게 보람되게 살아야죠. 자식들에게도 ‘물려줄 재산은 없다. 내가 번 돈이니까 내가 어떻게 쓰든 간에 내 마음대로 쓴다’고 했습니다.”

―맨손으로 어떻게 돈을 벌었던 겁니까?

“안동 축협에 근무할 때, 소 한 마리 값이 12만원까지 폭락한 적이 있었어요. 당시 정부에서 축산 장려책을 펴면서 소를 지나치게 수입을 한 겁니다. 농부들이 120만원 주고 산 소를 2년간 먹여 어미 소가 낳은 송아지 한 마리까지 끼워 팔아도 50만원도 못 받는 거예요. 그래서 자살을 하고 데모를 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저는 ‘모든 것이 내리면 오르는 법이다.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 오를 것이다. 자살을 하고 데모를 하느니 소를 더 기르자’며 농가를 찾아다니며 설득했지요. 그러니 나보고 다 돈 놈이라고 해요. 제가 먼저 실천해 보이기 위해 1000만원 빚을 내 소 100마리를 사서 직접 길렀어요. 지금은 송아지 한 마리에 270만원이에요. 팔고 사고 하면서 나중에는 500마리 정도 됐지요. 소 값이 비쌀 때 그것을 팔아 도시에 집을 사고, 그 집을 사놨다가 소 값이 내리면 그 집을 담보로 해가지고 또 소를 샀지요. 이 절을 지으면서 다 그만뒀지만, 안동에 있던 목장의 땅 값도 엄청 뛰었지요.”

―30억원을 들여 이 절을 지었으니, 돈을 많이 벌기는 벌었군요.

통상 이런 말에는 속인도 겸사(謙辭)하는 법인데, 명색이 스님께서 “이건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할 수도 없어요. 없을 때보다는 당연히 많이 벌었지만 그게 많이 번 것은 아니지. 진짜로 돈 벌려고 했으면 100억원 이상쯤 벌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재산이면 평생을 안 벌어도 먹고살 것이고, 내가 더 돈 벌면 다른 사람들이 돈 벌 기회를 그만큼 잃게 되겠지요.”라고 큰소리쳤다. 듣는 내게는 가장 어려운 과업임에도.

“돈 버는 것은 쉬워요. 그런데 저는 남들에게 돈 버는 것을 알려주는 것을 좋아하지 제가 직접 버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뭐, 이 정도로 벌어도 저는 정말 출세를 많이 한 거죠. 산골 촌놈이 도의원도 했지, 이보다 더 출세할 수는 없어요. 너무 과분하게 출세를 했지. 호사다마(好事多魔)라 좋은 일에는 마가 끼니, 내가 많이 출세하고 많이 벌었으니까 많이 베풀어야 합니다.

돈을 모으기만 하고 쓸 줄은 모르면 그건 돈의 주인이 아닙니다. 자기가 모았으면 자기가 쓸 줄 알아야 주인이지요. 주인이 자기를 어디에 쓰느냐를, 돈은 지켜봅니다. 귀신보다 더 밝다는 게 돈의 눈이란 말이지요.”

비록 절에서 돈 얘기를 했지만 돈은 늘 우리 삶의 관심사가 아니겠는가. 정말 맛있는 밥 한 그릇 잘 얻어먹고 왔다.


 

  • 경기도 안성 묵언마을에서 지개야 스님을 만났다.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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